그러나 시간이 오래된 탓인지, 아니면 정암처럼 관에 석회를 뿌리지 않아서인지, 이 팔에서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주상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더니 불쾌해서 물었다.“뭘 보여주려는 것이오?”“주상전하께서는 이 팔에 새겨진 자청이 눈에 익으십니까?”소한의 말을 듣자, 주상은 다시 보더니, 팔에 새겨진 자청이 호랑이 머리였다!“전에 명정대군을 죽인 산적의 몸에도 똑같은 자청이 있었는데, 저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당우리에 있는 산적들을 만나 보니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 몸에는 죄다 호랑이 머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주상은 소한의 말을 듣고는 탁상에서 돌아서 내려와 쭈그려서 자세히 그 팔을 봤다.소한의 귀신처럼 으스스한 소리가 또 들려왔다.“주상전하께서도 이것이 예전의 호랑이군이라 생각하시나요?”‘호랑이군’이란 말을 듣자, 주상은 놀라서 땅에 주저앉았다.옆에 있던 내시도 놀라서 급히 다가가 주상을 부축하려 했는데, 주상이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 주상은 그 팔을 뚫어지게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평양원군의 호랑이군 말이오? 자청만 봤을 때 확실히 비슷하오!”소한의 깊은 눈동자가 더 어두워졌다.“평양원군은 8년 전에 사라졌고, 당우리의 산적은 6, 7년 전에 창궐해졌습니다. 시간상으로 봤을 때 맞물립니다.”“아닐 것이오!”주상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열넷째는 절대로 그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오!”평양원군의 이름은 최지습이고 주상의 열네 번째 남동생이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남동생이기도 하다.그해, 주상이 아직 세자였을 때, 후궁이 난잡해서 많은 대군이 죽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대군은 그를 포함해서 일곱 명이다.그리고 주상이 왕위를 승계받고 나머지 여섯 명을 원군으로 책봉할 때, 그중 다섯 명이 결탁하여 주상을 끌어내려 했다. 평양원군은 혼자서 결탁한 다섯 명의 원군을 모두 주살했다.그리고 다섯 원군의 반란을 평정하고 평양원군과 그가 거느리던 호랑이군도 함께 사라졌다.호랑이군은 열 명밖에 없었
7일 후.숙희가 김단 방에 들어왔을 때, 김단은 방 안에 앉아서 바깥의 작은 마당을 보면서 넋을 놓고 있었다.벌써 연거푸 7일째다.김단은 매일 일어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만 놓고, 얼굴은 점점 수척해지고 있다.숙희는 큰 마님과 정암의 죽음이 회오리처럼 아씨를 가장 어두운 심연 속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지금 아씨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이렇게 생각하자, 숙희는 앞으로 다가가 김단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아씨, 저랑 갈 때가 있어요!”숙희는 원래 힘이 커서 김단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멈췄다.숙희는 김단을 데리고 화원에 갔다.지금은 오월이라 여러 가지 꽃이 폈고 햇빛 아래의 화원은 생기발랄했다.하지만 이런 생기는 김단을 조금도 감동하게 하지 못했다.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숙희의 호의를 저버리기 싫었지만, 그녀는 정말로 방에만 있고 싶었다.숙희는 갑자기 한 곳으로 뛰어가더니 김단을 불렀다.“아씨, 여기 봐요. 이것이 무엇입니까?”숙희는 자기 옆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그 나무는 잎사귀 하나 없이 민숭민숭했다. 화원의 꽃과 비교하니 완전히 칙칙했다.하지만, 이 민숭민숭한 나무가 김단의 마음을 되살아나게 했다.매화나무다.김단이 알아본 것을 보자, 숙희는 또 김단에게 웃었다.“종사관님이 심은 것입니다! 겨울이 되면 이 나무에서 빨간 매화꽃이 가득 피어서 매우 고울 것 같습니다!”김단은 매화를 좋아한다. 특히 빨간 매화를 좋아한다.그러나 전에 진산군댁에서 그녀를 위해 심었던 매화나무는 결국에 모두 임원의 것으로 됐다.하지만, 이 매화나무만큼은 정암이 직접 심은 것이라 영원히 그녀의 것이다!정암이 그녀를 위해 한 일은 너무도 많다.마음 한 구석에서 따뜻함이 전해지더니 마음속의 어둠을 깨버렸다.그러나 김단의 코끝은 여전히 찡했고 눈물도 따라서 흘러내렸다.정암이 그녀에게 한 것에 비하면 그녀는 정암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김단이 다시 울
김단은 길에서 위험한 일이 생겨 숙희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벌써 많은 사람을 헤쳤다.더는 숙희를 그녀 옆에 둬서는 안 된다.하지만, 숙희는 받아들일 수 없어 온 얼굴에 벌써 눈물 자국이 범벅 했다.“아씨께서 집 지킬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사람을 찾을게요. 제발 저도 같이 데리고 가세요. 아씨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숙희가 이렇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 김단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숙희가 더는 마음 아프지 않았으면 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그럼, 이 일은 나중에 다시 하고, 너 지금 먼저 기성복 가게에 가서 남자 옷 두 벌을 사와.”밖에서 돌아다니려면 남장하는 것이 편리하다.숙희는 그제야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빨리 갔다 올게요. 아씨, 집에서 기다시고 계세요.”“알았어.”김단이 대답하자, 숙희는 눈물 닦으면서 나갔다.그녀는 그제야 방으로 들어가 간단한 짐을 싸려고 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편지를 봤다. 정암이 소하에게 쓴 편지다.그녀는 하마터면 이 일을 잊어버릴 뻔했다!한양을 떠나기 전에 이 편지를 소하에게 줘야 한다.이렇게 생각하자, 김단은 편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소하를 만난 것은 벌써 한 시간 뒤의 일이다.소하는 나무로 만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안색이 창백했고 이마에도 땀이 얇게 한 층 맺혔다. 무슨 재난을 겪은 것처럼 허약해 보였다.김단은 걱정이 됐다.“소하 오라버니, 괜찮으세요?”소하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담담한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들어 김단을 보더니, 수척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천천히 말했다.“슬퍼하지 마시오.”큰 마님을 놓고 한 말이기도 하고 정암을 가리키는 것도 있었다.김단은 마음이 씁쓸했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상황을 보자, 소하는 김단에게 물을 따라주고는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오늘 나를 찾으러 온 게 무슨 일 때문이지오?”김단은 그제야 반응하
조선의 어느 음력 12월 28일.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오전에 시작했던 빨래를 간신히 마친 김단은, 얼어붙어 감각을 잃은 파랗게 질린 손을 닦을 틈도 없이 세답방의 나인에게 불려갔다.“어서 가보게. 진산군댁에서 자네를 데리러 왔네.”나인의 말에 김단은 자리에 얼어붙었다.진산군댁,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한때 그녀도 그 댁의 귀한 여식으로 15년을 자랐었다. 3년 전, 자기가 진짜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정2품 진산군댁의 안주인인 정부인 임씨와 같은 해에 출산했던 유모는 임종 직전, 죄책감이라도 들었는지 자기가 두 아이를 바꿨다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김단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부부가 자신의 친딸, 임원을 상봉한 것에 감격스러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녀와 부녀의 모습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5년간,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한 번도 친부모가 아니라고 의심한 적 없었다.진산군은 안색이 어두워진 김단에게 앞으로도 이 집안의 여식으로 남아 임원의 언니로서 살아가도 좋다고 했다. 임씨도 그녀를 친딸처럼 대하겠다고 약조했다.하나, 궁궐에 들어 공주자가의 유리그릇을 깨트린 임원을 발견한 부부는, 임원의 몸종이 김단을 모함할 때조차 임씨 부부는 망설임 없이 수양딸이었던 김단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웠다. 공주는 분에 겨워 그녀를 세답방의 무수리로 쫓아냈으나, 한때 부모님이었던 그들은 임원의 옆에 서서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그날, 김단은 그들이 자신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멍하니 서서 뭐 하시오? 그 댁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나인의 독촉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세답방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희미한 햇살이 비친 문 쪽에서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마주한 김단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랫동안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가슴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은
그 목소리에 김단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래전 무감각해진 줄 알았던 그녀의 심장은 익숙한 목소리에 활력을 얻은 듯 천천히 뛰었다.그녀는 천천히 마차 안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 나이에 호국 장군이 된 그녀의 옛 정혼자, 소한이다. 그녀는 얼른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장군님이시군요.”미간을 살짝 찌푸린 소한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향했다. “낭자, 진산군댁에 가는 길이었소?”고개를 숙인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소한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알고 있던 그녀는 항상 곁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여인이었다.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집안에서 정해준 혼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견뎠었다. 가끔은 지치지 않고 떠드는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떡을 집어넣기도 했지만, 그 순간조차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던 그녀였다. 떡으로 입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반 시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활달했던 여인이었다. 못 본 사이, 김단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전처럼 떠들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소한은 그녀를 부축하는 대신 냉랭하게 말했다. “마침, 궐에 들던 길이었소. 이 마차를 타고 돌아가시오.”그녀가 거절하기도 전에 그가 한마디 더 했다. “다쳤으면 무리하지 마시오. 본인은 몰라도, 그 댁 큰 마님께서 속상해할 것이오.”그의 목소리에는 반박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조모님은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무수리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조모님께서 중전마마께 간청했기 때문이다. 만약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돌아온 그녀를 보게 되면, 조모님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라 여긴 김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쇤네, 장군님께 감읍할 따름입니다.”말을 마친 김단은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가까이선 본 소한은 3년 전과 달리 키가 훌쩍 커져 있었고 체격도 다부져졌다.최근 전쟁에서 승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직도 전
김단이 전에 묵었던 별당은 매화당이었다.정원에 무수한 매화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꽃샘추위가 찾아올 즈음 핀 매화꽃들은 초봄까지 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릴 적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매화라는 소리에 진산군은 조선 팔도로 사람을 보내 매화나무를 구해왔고 그 종류는 다양했다. 그 후로 매년 수백 냥의 은자를 들여가며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매화나무를 극진히 돌봤다. 하지만 매화당에 핀 매화꽃이 아름답다는 임원의 말 한마디에 매화당은 곧 임원의 별당이 되었다.그 순간에는 자기 별당을 빼앗긴 것 같아 분하기도 했으나, 지금 돌이켜보니 이 집안의 친딸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었다. 이 집안의 물건과 사람들은 전부 임원의 것이었다.김단, 그녀야말로 남의 자리를 꿰찬 외부인이었다. 길을 안내하던 몸종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씨를 모셨던 몸종이 혼인하여 출가하는 바람에 마님께서 쇤네를 아씨께 보내셨습니다. 쇤네는 숙희라 하옵고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쇤네를 불러 말씀하시면 됩니다.”숙희는 통통한 볼에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단은 그녀가 눈에 익었다.“혹 전에 오라버니를 모시지 않았더냐?”숙희가 놀란 듯 답했다.“쇤네를 알아보시겠습니까?”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예전에 임학의 외별당에 드나들면서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임학의 몸종을 자기에게 붙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분명 3년 전만 해도 임학은 그녀가 임원을 해치려 한다고 오해하며 그녀에게 적대심을 품었다.그런 사람의 몸종을 붙인 거로 보아, 감시하려는 게 틀림없었다.새로 안내받은 별당은 그리 넓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면 연꽃이 활짝 피어 꽤 아름다웠을 테지만, 지금은 연꽃이 다 지고 시든 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다행히 실내에 불을 지핀 덕에 따뜻했다.미리 따뜻한 물을 준비해 둔 숙희는 김단의 목욕을 돕기 위해 나섰으나, 김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혼자 하면
임원이 선의로 건넨 말을 날카롭게 받아치는 김단을 본 임학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말에 씨가 있구나. 몸에 상처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뭣 하러 숨긴 것이냐?”그녀가 미리 말만 했어도 임학은 내의원에 들러 약을 받아왔을 것이다.“도련님께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오라버니라 칭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분개한 임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이 집에서 어릴 때부터 네게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더냐? 세답방에 과연 얼마나 강한 고수가 있었기에 이리도 다친 것이냐?”그의 말에 김단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걷어 올렸던 옷소매를 천천히 끌어내린 그녀도 서늘하게 대꾸했다.“처음에는 반항도 하였지요. 도련님 말씀처럼 세답방 나인들은 소인의 상대가 아닙니다. 하나 그들의 수법도 점점 다양해지더군요. 깊이 잠든 사이 차가운 물을 부어버린다거나, 밥을 먹을 때 남들은 국을 퍼가지만 소인에겐 하수구 물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게 빨래한 옷들을 뒷간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자신들의 일을 소인에게 떠넘기기도 했더이다.”임학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궁마마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소인에게 돌아온 것은 매질밖에 없었습니다. 점점 저항도 하지 않게 되었고 침구가 젖으면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하수구 물이라도 먹었습니다. 한 번은 상궁마마께서 하도 심하게 구타하여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나, 다행히 진산군댁 수양딸이라는 신분 덕에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요. 그 뒤론 전처럼 심한 구타는 하지 않았습니다.”깜짝 놀란 임학의 표정에 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혹 소인이 못 된 마음을 먹고 일부러 그런 고초를 당했다고 여기신 겁니까?”“괴로워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천한 신분을 가진 소인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괴로워할지언정, 소인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분들이라는 거 잘 알고 있나이다. 어쩌면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은 게 이 댁 아씨가 아니라 소인이라 안도하셨을 수도 있겠지요.”임학은 자신을
소한이 손에 든 약재 함을 내려다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임학은 불안한 듯 재촉했다. “금일 전하께서 궐에 들라는 전교를 내린 적 없는 줄로 아네만, 혹 김단을 마중간 것이오?”임학은 소한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였고 눈빛만 봐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임학이 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제정신이오? 전에 김단이 좋다고 매달릴 땐 미동도 하지 않던 인간이, 원이의 정혼자가 된 지금 다시 김단에게 흔들리는 게 정상이오? 내 누이들을 불장난에 끌어들일 생각 마시게! 그땐 우리의 우정도 끝날 테니.”소한은 조롱 어린 시선으로 임학을 쳐다보았다.“자네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내가 보기엔 자네야말로 첫째 누이를 신경을 쓰는 것 같군.” 사실 소한의 말처럼 누구보다 김단을 신경 쓰는 것은 임학이었다. 자기 마음을 정확히 꿰뚫는 소한의 말에 임학은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고고한 척하지 마시오. 3년 전 그날, 그 자리에 자네도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저 아이는 날 원망하기도 하지만, 자네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알고 있소.”소한이 서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마차 안에 있던 수정과는 건드리지도 않더군.”수정과는 고사하고 난로조차 건드리지 않았다.만약 큰 마님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소한의 마차에도 올라타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소한을 보자마자 예를 갖춰 인사하며 거리를 뒀다.전처럼 만나서 좋다며 인사하지도 않았고 그를 연모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던 소한은 마음이 어지러웠다.누구보다 소한에게 다정했던 누이가, 소한을 연모하던 누이가 더는 그에게 미련 없이 돌아섰다는 말에 임학도 큰 충격을 받았다. 누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딴사람이 되자, 임학도 상당히 놀랐다. 그녀의 발에 가득 자리 잡은 흉터들이 떠오른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세답방 궁인에게 화가 났다. 공주자가의 명이라 할지언정, 김단은 진산군의 여식이었다. 임학은 불편한 기색을 띠며 소한을 흘겨보았다.“전쟁터에서
김단은 길에서 위험한 일이 생겨 숙희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벌써 많은 사람을 헤쳤다.더는 숙희를 그녀 옆에 둬서는 안 된다.하지만, 숙희는 받아들일 수 없어 온 얼굴에 벌써 눈물 자국이 범벅 했다.“아씨께서 집 지킬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사람을 찾을게요. 제발 저도 같이 데리고 가세요. 아씨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숙희가 이렇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 김단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숙희가 더는 마음 아프지 않았으면 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그럼, 이 일은 나중에 다시 하고, 너 지금 먼저 기성복 가게에 가서 남자 옷 두 벌을 사와.”밖에서 돌아다니려면 남장하는 것이 편리하다.숙희는 그제야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빨리 갔다 올게요. 아씨, 집에서 기다시고 계세요.”“알았어.”김단이 대답하자, 숙희는 눈물 닦으면서 나갔다.그녀는 그제야 방으로 들어가 간단한 짐을 싸려고 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편지를 봤다. 정암이 소하에게 쓴 편지다.그녀는 하마터면 이 일을 잊어버릴 뻔했다!한양을 떠나기 전에 이 편지를 소하에게 줘야 한다.이렇게 생각하자, 김단은 편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소하를 만난 것은 벌써 한 시간 뒤의 일이다.소하는 나무로 만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안색이 창백했고 이마에도 땀이 얇게 한 층 맺혔다. 무슨 재난을 겪은 것처럼 허약해 보였다.김단은 걱정이 됐다.“소하 오라버니, 괜찮으세요?”소하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담담한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들어 김단을 보더니, 수척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천천히 말했다.“슬퍼하지 마시오.”큰 마님을 놓고 한 말이기도 하고 정암을 가리키는 것도 있었다.김단은 마음이 씁쓸했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상황을 보자, 소하는 김단에게 물을 따라주고는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오늘 나를 찾으러 온 게 무슨 일 때문이지오?”김단은 그제야 반응하
7일 후.숙희가 김단 방에 들어왔을 때, 김단은 방 안에 앉아서 바깥의 작은 마당을 보면서 넋을 놓고 있었다.벌써 연거푸 7일째다.김단은 매일 일어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만 놓고, 얼굴은 점점 수척해지고 있다.숙희는 큰 마님과 정암의 죽음이 회오리처럼 아씨를 가장 어두운 심연 속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지금 아씨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이렇게 생각하자, 숙희는 앞으로 다가가 김단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아씨, 저랑 갈 때가 있어요!”숙희는 원래 힘이 커서 김단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멈췄다.숙희는 김단을 데리고 화원에 갔다.지금은 오월이라 여러 가지 꽃이 폈고 햇빛 아래의 화원은 생기발랄했다.하지만 이런 생기는 김단을 조금도 감동하게 하지 못했다.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숙희의 호의를 저버리기 싫었지만, 그녀는 정말로 방에만 있고 싶었다.숙희는 갑자기 한 곳으로 뛰어가더니 김단을 불렀다.“아씨, 여기 봐요. 이것이 무엇입니까?”숙희는 자기 옆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그 나무는 잎사귀 하나 없이 민숭민숭했다. 화원의 꽃과 비교하니 완전히 칙칙했다.하지만, 이 민숭민숭한 나무가 김단의 마음을 되살아나게 했다.매화나무다.김단이 알아본 것을 보자, 숙희는 또 김단에게 웃었다.“종사관님이 심은 것입니다! 겨울이 되면 이 나무에서 빨간 매화꽃이 가득 피어서 매우 고울 것 같습니다!”김단은 매화를 좋아한다. 특히 빨간 매화를 좋아한다.그러나 전에 진산군댁에서 그녀를 위해 심었던 매화나무는 결국에 모두 임원의 것으로 됐다.하지만, 이 매화나무만큼은 정암이 직접 심은 것이라 영원히 그녀의 것이다!정암이 그녀를 위해 한 일은 너무도 많다.마음 한 구석에서 따뜻함이 전해지더니 마음속의 어둠을 깨버렸다.그러나 김단의 코끝은 여전히 찡했고 눈물도 따라서 흘러내렸다.정암이 그녀에게 한 것에 비하면 그녀는 정암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김단이 다시 울
그러나 시간이 오래된 탓인지, 아니면 정암처럼 관에 석회를 뿌리지 않아서인지, 이 팔에서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주상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더니 불쾌해서 물었다.“뭘 보여주려는 것이오?”“주상전하께서는 이 팔에 새겨진 자청이 눈에 익으십니까?”소한의 말을 듣자, 주상은 다시 보더니, 팔에 새겨진 자청이 호랑이 머리였다!“전에 명정대군을 죽인 산적의 몸에도 똑같은 자청이 있었는데, 저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당우리에 있는 산적들을 만나 보니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 몸에는 죄다 호랑이 머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주상은 소한의 말을 듣고는 탁상에서 돌아서 내려와 쭈그려서 자세히 그 팔을 봤다.소한의 귀신처럼 으스스한 소리가 또 들려왔다.“주상전하께서도 이것이 예전의 호랑이군이라 생각하시나요?”‘호랑이군’이란 말을 듣자, 주상은 놀라서 땅에 주저앉았다.옆에 있던 내시도 놀라서 급히 다가가 주상을 부축하려 했는데, 주상이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 주상은 그 팔을 뚫어지게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평양원군의 호랑이군 말이오? 자청만 봤을 때 확실히 비슷하오!”소한의 깊은 눈동자가 더 어두워졌다.“평양원군은 8년 전에 사라졌고, 당우리의 산적은 6, 7년 전에 창궐해졌습니다. 시간상으로 봤을 때 맞물립니다.”“아닐 것이오!”주상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열넷째는 절대로 그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오!”평양원군의 이름은 최지습이고 주상의 열네 번째 남동생이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남동생이기도 하다.그해, 주상이 아직 세자였을 때, 후궁이 난잡해서 많은 대군이 죽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대군은 그를 포함해서 일곱 명이다.그리고 주상이 왕위를 승계받고 나머지 여섯 명을 원군으로 책봉할 때, 그중 다섯 명이 결탁하여 주상을 끌어내려 했다. 평양원군은 혼자서 결탁한 다섯 명의 원군을 모두 주살했다.그리고 다섯 원군의 반란을 평정하고 평양원군과 그가 거느리던 호랑이군도 함께 사라졌다.호랑이군은 열 명밖에 없었
김단은 방으로 돌아갔을 때까지도 마음속의 분노와 슬픔을 가라앉히지 못했다.그녀는 자신이 전생에 임학에게 피맺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생활이 좋아졌다고 느낄 때마다, 임학의 한마디로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건 말이 안 된다..명정대군도 그렇고 정암 역시 피할 수 없었다!그러나 만약에 그녀가 전생에 정말 임학에게 빚을 졌다면 그녀가 갚으면 되지 왜 정암까지 연루하는가?김단의 눈물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숙희는 옆에서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뭔가 갑자기 생각나듯 탁상 위의 물건을 가리키며 말했다.“아씨, 그게 뭐죠? 봐 봐요.”숙희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보자 김단은 편지 한 통을 봤다.봉투에는 ‘소하친전’이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그녀에게 준 것이 아니다.김단은 좀 실망했다.“왜 편지 한 통 밖에 없지? 정유이는 분명히 정암이 자기에게 물건을 남겼다고 했는데!”그저 이 편지를 소하에게 전해라는 것인가?김단의 울음이 다시 터졌다. 숙희는 갑자기 뭔가 생각나서 말했다.“며칠 전에 정 낭자가 종사관이 세상 떴다는 소식을 듣고는 저를 데리고 취향각 주방에 가서 이씨 주방장님한테서 돼지대창 볶음을 배우라고 했어요!”“그리고 정 낭자는 또 저를 데리고 성동의 산림에 갔어요. 매년 시월에서 십이월 사이에 거기서 산사가 달린다고 했어요. 그리고 산사를 따고 말려서 보존하는 방법도 알려 줬어요.”“종사관님은 확실히 아씨에게 무언가를 남겼어요. 그는 이 세상에서 아씨에게 가장 잘해주는 사람을 아씨 곁에 남겨 줬잖아요!”숙희는 김단을 위로하려 했는데, 이 말을 듣자, 김단은 더 비통한 심정을 억제하지 못해 숙희와 부둥켜안고 울었다.조모도 세상 떴고, 정암도 죽었다.이후로, 이 세상에서 그녀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숙희밖에 없다!숙희는 마음이 아파 김단과 함께 울면서 계속 말했다.“아씨, 저는 영원히 아씨 곁에 있을 겁니다. 영원히 아씨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영원히 그녀 옆에 있겠다고?김단은 머리를 숙희의 목에 기대며 살짝
김단은 임씨 부인이 그녀를 위로해 주러 왔는지 안다.그러나 위로의 말치고는 너무 듣기 싫다.사람마다 제명이 있다는 게 뭐지?정암은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인가?그녀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들과 논쟁할 힘도 없어서 그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말했다.“저는 이미 진산군댁과 연을 끊었습니다. 제게 무슨 일이 있어도 진산군댁과 연관 없으니, 두 분께서 앞으로 다시는 찾아오지 마십시오.”그녀는 말하고는 집으로 들어갔다.임학은 예상했던 데로 그녀의 뒤에서 고함쳤다.“김단! 사리 분별은 해야지! 어머님께서 평소에 집 밖으로도 안 나가는데, 네가 걱정돼서 친히 발걸음 하신 거야!”김단은 멈칫하더니 살짝 주먹을 쥐고는 임학에게 물었다.“도련님은요?”임학은 멍하더니 김단이 왜 이렇게 묻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김단은 갑자기 몸을 돌려 심사와 책문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럼, 도련님은 왜 오셨는데요? 걱정돼서? 아니면 찔려서인가요?”그녀는 사실 여태까지 이해하지 못한 일이 있다.분명히 그날 정암이 그녀를 진산군댁에 데려다줄 때까지만 해도 공훈을 세우겠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왜 갑자기 그녀를 위해 공을 세우겠다고 한 걸까? 심지어 그녀에게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급하게 밤중에 한양을 떠났는가?그녀는 무조건 누군가 정암에게 무슨 소리를 했다고 생각한다.소한과 임학 외에 그녀는 다른 사람을 떠올리지 못했다.임학의 당황한 눈빛은 그녀에게 답을 줬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한이 넘쳤다.“정말 너였어!”임학은 확실히 가슴이 찔렸다. 김단이 꼭 정암이랑 함께하겠다고 하니, 그날 그는 좋은 뜻으로 정암에게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니, 임학은 오히려 분노했다.“내가 그랬으면 뭐? 네가 마음먹고 아버지와 연을 끊겠다고 하니, 내가 출로를 찾아 줬을 뿐이야! 난 다 너희를 위해서인데, 내가 뭘 찔릴 게 있다고? 원망하고 싶으면 정암이 명 짧고 복이 없다는 것을 원망해!”“임학!”김단은 엄하게 소리 질렀다. 분노에 잠긴 목소리는 심
네 식구만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소한도 없고, 김단도 없이...지금부터, 한양에 있는 귀인들은 더 이상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소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는 정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더는 강렬히 요구하지 않았다.김단도 알아들었다.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야 울어서 힘이 빠진 정암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서 손목에 있는 옥팔찌를 뺐다.“제가 이 팔찌를 가질 자격이...”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암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눌렀다. 정암 어머니의 얼굴은 아주 힘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김단을 보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당신에게 줬으면 당신의 것입니다. 내게 돌려주는 것이 오히려 정암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김단은 멍하니 정암 어머니를 바라봤다.그녀에게 이 옥팔찌를 남긴다는 것은 그녀를 아직 정씨 집안의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그녀는 이런 일이 있어도 정씨 집안의 가족이 여전히 그녀를 인정할 줄 몰랐다.마음속에 씁쓸함이 솟아오르자, 김단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정암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감격도 있고 미안함도 있었다.정암 어머니는 가볍게 김단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유감하기도 했다.정암 아버지는 이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말했다.“됐어. 늦었다. 어서 가자!”이 말을 듣자, 김단은 정암 어머니를 놔주었고, 숙희도 다가와서 그녀를 부축해서 옆으로 물러섰다.정암 부모님은 마차에 앉아 정암을 데리고 고향으로 갔다.정유이도 따라가면서 김단 옆을 지날 때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 방에 오라버니가 남긴 물건이 있어요.”김단은 멍하니 서 있었고, 다시 뭔가 묻고 싶었지만, 정유이는 이미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정암을 데리고 가는 대열이 작은 점처럼 보일 때쯤에, 김단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뒤돌아서니, 소한은 아직 성문에 있었다.김단이 돌아보자, 소한은 그제야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집까지 데려다 주겠소.”김단은 얼굴에 못다 마른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됐어요.
그녀 때문에 정암 부모님은 아들을 잃고 정유이는 오라버니를 잃었다.모두 그녀의 잘못이다.그러나 정유이가 더 비통하게 울더니 말했다.“그러나 오라버니께서 내가 당신을 탓하는 것을 보면 내게 화낼 것 같아요...”이 한마디는 칼처럼 김단의 마음속에 단단히 꽂혔다.김단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유이를 바라보았다. 정유이는 눈물로 말문이 막혔지만, 간신히 입을 열었다.“오라버니가 떠날 때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번 생엔 어떤 여자도 당신처럼 그의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그저 당신이 평안하고 기쁘면 된다고, 목숨을 바쳐도 상관없다고 했어요.”“김단, 내 오라버니가 정말 목숨을 바쳤으니, 당신은 무조건 평안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아니면, 나는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이것은 그녀 오라버니의 마지막 소원이었다.정유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더는 한 글자도 내뱉지 못했다.그녀는 왜 이 세상에서 누군가 자기의 목숨으로 다른 한 사람의 평안과 기쁨을 바꿀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 오라버니가 한 말이니, 그녀는 거역할 수 없다.숙희는 급히 다가가서 정유이를 안았고, 정유이도 그녀를 안으면서 땅이 꺼질 듯 울었다.이 말들이 김단 마음에 적중했는지 그녀는 무기력하게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그녀는 그제야 그날 정유이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이해했다.정암은 떠나기 전에 이미 가장 나쁜 결과를 예상했던 것인가?그는 분명히 당우리 산적들이 얼마나 흉악한지 알고,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 것인가?왜?왜 그렇게 어리석은 거야?그가 아무런 공훈을 세우지 않아도 그녀는 계속 그의 곁에 지키고 있을 것이다.그녀가 중히 여기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공을 세운 것이 아니라 정암 그 자체다!끊임없이 밀려 오는 슬픔이 순간 김단 몸에 있는 모든 힘을 빼앗았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넘어졌는데 정암 아버지가 그녀를 부축했다.김단은 멍하니 고개를 돌려 정암 아버지를 보더니 눈물이 또 쏟아졌다.“
김단은 멍하더니 어젯밤에 산적이 한 말을 떠올렸다. 만약 소한이 사람을 보내 그녀와 함께 가지 않았더라면 산적은 관에 있는 사람이 정암인지 몰랐을 것이다.그럼, 어젯밤의 전투도 없을 것이고 지금쯤이면 그녀는 벌써 당우리를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소한의 탓인가?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를 탓하면 안 된다.소한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누구도 산적을 만날 거라 생각 못 했다.더군다나, 이번 일은 산적이 흉악해서 온 마을의 백성, 심지어 갓난아이까지 도살해서 일어난 것이다.그러지 않으면 주상이 밤늦게 파병할 일도 없고 이 모든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모두 일어났다.정암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죽었다.그녀는 평온하게 ‘당신 탓 아니야’라고 할 수 없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이 일에 관한 모든 사람을 탓하고 있었다.제일 많이 탓하는 것은 그녀다.그래서 그녀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산적이 다시 와서 난리를 칠까 봐, 두 사람은 노상이 파견한 원군을 기다렸고, 대열은 하루 종일 지연되다 저녁이 되어 다시 길을 떠났다.김단과 소한은 길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정암이 죽은 지 12일째 되는 오전에 드디어 한양에 도착했다.아직 성문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김단은 벌써 성문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몇 사람을 봤다.가슴이 갑자기 빨리 뛰었다.정암의 가족이다.소한은 이미 정암이 죽었다는 소식을 한양에 전했다. 그래서 정암의 가족이 지금 성문에서 정암을 데리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다. 대열은 멈추지 않았고 김단은 마차에 앉아 안절부절못했다.김단은 돌아오는 내내 정암 부모님을 보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러나, 내내 고민했어도 그녀는 여전히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그들의 아들이 그녀 때문에 죽었는데,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변명하는가?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몸도 마음과 같이 떨고 있었다.심지어 그녀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도 했다.그러나 그녀는 도망가면 안 된다는
김단의 귓가에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경각심이 가득한 소리로 말했다.“다가오지 마!”그러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김단은 당황해서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소한은 김단이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거라 생각 못 하고 급히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검은 그의 소매를 그었다.김단은 자기가 상대방을 찌르지 못했다고 느껴서 또다시 휘둘렀지만, 상대방이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를 품에 안았다.“걱정하지 마, 나야!”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김단이 버티던 동작을 갑자기 멈추게 했다.그녀는 몸이 경직되면서 떠보듯 물었다.“소한?”“그래, 나야!”소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다 끝났어!”끝났다고?김단의 경직된 몸이 드디어 힘이 풀리는가 싶더니, 바로 소한의 옷으로 눈앞의 피를 닦고, 그를 떠밀어 산림 밖으로 뛰어갔다.관의 뚜껑이 열려 있었다!김단은 놀라서 마차 위로 기어올랐다. 정암의 시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고서야 이번에는 정말 힘이 풀려서 서 있기도 힘들었다.그녀는 관에 기대어 앉아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신들을 봤다. 그녀는 멍했다. 모두 병사들의 시신이었다.그들은 그녀와 이틀의 여정을 함께 했는데, 지금 모두 여기에서 죽었다. 바짝 긴장한 마음의 끈이 순식간에 끊어지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지 않았다면 이 젋은 병사들은 여기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역시 정암처럼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미안함이 밀려오면서 무수한 손이 그녀의 심장을 찢는 듯했다.김단은 소리 내어 울며, 심지어 마지막에는 숨을 쉴 수 없어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눈부신 빛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해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마차는 아직 제자리였지만, 병사들의 시신은 모두 사라졌다.김단은 놀라서 일어나보니 관 뚜껑도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