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큰 마님은 절대 자신의 아들과 손자가 수난 당하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며 목숨을 걸고서라도 임씨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고 할 것이다.그럼 김단은 큰 마님이 준 금은보화로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김단은 큰 마님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님,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덕빈 마마께서 저에게 잘해 주십니다. 내일 제가 궁에 들어가 덕빈 마마 곁에서 힘든 시간을 함께 견디면, 이 또한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갈 것입니다.하지만 큰 마님은 김단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덕빈 마마께서 평소에 친절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 하지만 사실 생각이 많고 속셈도 깊은 사람이야. 단아, 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여인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김단도 당연히 알고 있지만 큰 마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대수롭지 않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할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덕빈 마마께서는 정말 저를 많이 아껴 주십니다. 전에는 마마께서 소유하고 있는 점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점포를 저에게 선물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김단의 말에 큰 마님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정말이냐?”“그럼요. 그러니 제가 마마의 마음만 잘 달랜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큰 마님은 환하게 웃는 김단을 보며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덕빈 마마께서 명정 대군의 죽음을 네 책임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너무 다행이지만… 그럼 그 뒤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그 뒤?김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큰 마님을 쳐다보았고 큰 마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김단의 이마를 콕콕 눌렀다.“우리 단이가 헛똑똑이네. 이 할미는 네 혼사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야. 명정 대군이 죽었는데 넌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마음에 드는 사내는 있고?”“할머님, 명정 대군께서 살해된 지 이제 며칠밖에 되지 않았습니다!”김단의 말에 큰 마님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할미도 알아. 하지만 할미에게 남은 날이 많지가 않아서 그
다음날, 김단은 명정 대군 빈소에 찾아가 절을 한 뒤, 덕빈궁으로 향했다.김단을 쳐다보는 덕빈궁 나인들의 눈빛은 의미심장했지만 김단은 그저 못 본 척 지나갔다. 덕빈궁 침실 밖에 선 김단은 인사를 올린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덕빈은 방 안에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나인 한 명이 덕빈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한걸음 앞으로 다가간 김단은 무릎을 꿇은 뒤, 인사를 올렸다.“소인, 덕빈 마마께 인사를 올립니다.”김단의 인사에도 덕빈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단은 덕빈이 깨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한참동안 기다리다가 덕빈이 여전히 대꾸가 없자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마마, 삼가 고인의 명복을…”김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덕빈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달려와 김단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네까짓 게 지금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넌 분명 명정 대군을 안전하게 데리고 오겠다고 나에게 약조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아들은 죽었는데 넌 아직 살아있는 거야? 말해! 왜 넌 살아있는 거냐고!”덕빈이 붉어진 눈시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김단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명정 대군께서 목숨 걸고 소인을 지키셨기에 소인이 이렇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네가 그딴 헛소리로 문무백관을 속이고 전하까지 속였지만 설마 나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덕빈은 자신의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목숨 걸고 지켰다는 김단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김단의 멱살을 확 잡더니 언성을 높였다.“네가 내 아들을 죽인 거지? 내 아들이 너를 때리고 괴롭혔다고 기회를 엿보다가 죽인 게 확실해! 천박한 년! 내 오늘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야!”말을 하던 덕빈은 김단을 바닥에 확 쓰러트린 뒤 주먹으로 김단을 마구 때리기 시작
나인들은 빠르게 물러났고 나가면서 방 문도 굳게 닫았다.순간, 침실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그제야 김단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소인이 명정 대군을 보았을 때, 명정 대군은 산적들에게 갖은 고문을 당한 뒤였습니다. 온몸에 상처가 많았고 명정 대군께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산적들에게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습니다.”김단은 진실을 원하는 덕빈에게 사실대로 얘기했고 조용히 듣고 있던 덕빈은 그때 당시의 상황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이 아팠다.하지만 조금 전에 목숨 걸고 김단을 지키다가 살해됐다는 말보다는 지금 김단이 한 얘기가 더 믿음이 갔다.김단은 덕빈의 팔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덕빈은 여전히 영혼을 빠져나간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마마, 혹시 이 궁 안에 있었던 정아라는 궁녀가 기억나십니까?”정아?덕빈의 머릿속에 늘 환한 미소를 짓던 해맑은 여자애가 떠올랐다. 정아는 궁 안에서 일하던 궁녀였지만 나중에 명정 대군이 그 아이를 한양 서쪽에 데리고 갔다.불안한 마음에 덕빈은 재빨리 고개를 들고 김단을 쳐다보았다.“네가 정아 그 아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겁에 질린 덕빈의 표정에 김단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내각에서 무술 실력이 뛰어난 내시 한 명을 소인에게 보내주었고 그 내시는 소인과 함께 명정 대군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 내시는 손쉽게 산적들을 전부 죽여버렸지만 명정 대군을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자는 정아를 위해 복수를 선택했습니다.”김단의 말에 덕빈은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그럼 내각에서 보낸 내시가 명정 대군을 살해했다는 뜻인가? 하지만 내각에는 전부 전하의 사람들이잖아!이때, 김단이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덕빈 마마, 이게 바로 인과응보 아니겠습니까?”만약 명정 대군이 예전에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학살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명정 대군은 덕빈과 무사히 상봉했을 것이다.한편, 덕빈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니야. 넌
김단은 심장이 철렁했다. 김단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덕빈이 그녀의 팔목을 덥석 잡더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어제 류 나인에게 민간 시장에 가서 제사에 쓰일 물건을 사오라고 시켰거든. 그런데 네가 오늘 이렇게 궁까지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내가 너에게 영혼 결혼식을 시켜 내 아들 곁에 생매장할까 봐 두려운 거로군?”숨을 크게 들이마신 김단은 잡힌 손으로 덕빈 얼굴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주며 대답했다.“맞습니다. 소인의 목숨이 한없이 천한 건 맞지만 소인도 죽는 게 두렵습니다.”김단의 거친 손이 덕빈의 얼굴에 닿자 덕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덕빈은 여인의 손이 이렇게까지 거칠 줄 몰랐으며 그녀 곁을 지키는 나인도 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김단은 되레 덕빈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어갔다.“돌아가신 분은 사정이 너무 딱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마마께서 소인의 뜻을 이해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명정 대군은 덕빈의 유일한 아들이자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상대였다. 하지만 명정 대군이 죽은 지금, 덕빈에게 급선무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상대를 다시 찾는 것이고 후궁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다.궁 안에서 눈치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덕빈은 김단의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돌아서서 곁에 놓인 이불 위에 몸을 뉘였다.김단은 덕빈의 몸 위에 담요를 살짝 덮어준 뒤, 품에서 땅문서를 꺼냈다.“마마, 이건 마마께서 전에 소인에게 선물로 하사하셨던 땅문서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소인은 이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없을 것 같아서 마마께 다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덕빈은 고개를 살짝 돌려 땅문서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사한 물건을 도로 거두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명정 대군을 잃은 덕빈이 궁중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이 필요한 일이 많을 것이다.한참동안 고민하던 덕빈은 결국 땅문서를 받았
덕빈이 명정 대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라 한 것은 그저 인사만 하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그래서 김단은 예를 갖춰 물러난 뒤 한쪽으로 가서 명정 대군을 위해 지전을 태웠다.영당 밖의 두 명의 어린 환관이 이 광경을 보고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김 낭자가 명정 대군을 향한 정이 매우 깊구먼! 오늘 아침에도 왔었는데, 지금 또 왔네.” “맞아. 아까 명정 대군 관을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지는 거 봤어? 정말이지, 안타깝네!” "어휴… 예로부터 다정함은 부질없는 원한만을 남기는 법이지… 헉! 소, 소인 소 장군님을 뵙습니다!”소한의 표정은 차가운 얼음과 같이 얼어붙은 듯 싸늘했다. 그는 두 눈으로 두 환관을 훑어보았고, 목소리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궁궐 법도에서 주인을 함부로 평하라고 가르치더냐?”두 명의 어린 환관은 깜짝 놀랐다. 김 낭자는 주인이라고 모실 정도가 아니지 않나?하지만 소한의 싸늘한 모습을 보고는 몹시 당황하였고,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 소인, 감히 그러지 못하옵니다. 부디 소 장군님께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소 장군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직접 들어가 벌을 받거라!”두 명의 어린 환관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알아서 순순히 떠났다.소한은 그제서야 영당 안으로 들어갔다.명정 대군에게 향을 올린 후, 그는 김단 곁으로 걸어갔다.기척을 느낀 김단은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며 퉁명스레 말했다. “소 도련님, 정말 거만하시는군요.”방금 전의 소란을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그녀의 모습을 보던 소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영문 모를 불쾌감에 휩싸였다. 이에 그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비꼬듯 말했다. “김 낭자께서는 명정 대군께 정말 정이 깊으시군요.” “…” 김단은 그제야 손에 든 지전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소한을 바라보았다.분명 지전을 태우는 연기에 눈이 매워진 것일
“대군 생전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말에 주상은 순간 멈칫하였다.주상이 정말 이 일을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본 김단은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소한이 먼저 예를 올리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만부당합니다. 김 낭자는 단지 명정 대군과 혼약을 맺은 사이일 뿐, 미망인의 신분으로 장례를 치르게 한다면 분명 좋지 않은 말이 나올 것입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만약 김 낭자가 정말 미망인의 신분이 되면 조선의 풍속에 따라 3년간은 다시 혼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소한의 말을 듣고 나서야 주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말이 옳소. 서원 공주, 함부로 그런 제안을 하지 마시오.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을 때 해를 입는 것은 황실의 체면이오.”그러자 서원은 볼을 부풀며 주상의 어깨에 기대어 어리광을 부렸다. “공주는 그냥 한번 말해 본 것입니다!”주상에게는 서원 공주 외에는 딸이 없었기에, 당연히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매우 어여삐 여기며 서원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하지만 그는 서원 공주가 김단을 바라볼 때 원망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바라봤다는 걸 보지 못했다.그녀의 싸늘한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비록 미망인의 신분으로 장례를 치를 수는 없더라도, 김 낭자의 목숨은 어쨌든 대군이 구한 것이니, 소복을 입고 상여를 치르는 것이 지나친 일은 아니겠지요?”서원 공주는 김단을 백성들 앞에 나서게 하려고 작정한 것이 분명했다.황후가 이어서 입을 열었습니다. “덕빈 슬하에는 명정 대군 한 명뿐인데, 그 대군이 김 낭자를 구하려다 돌아가셨으니, 김 낭자께서 대군을 배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리하면 덕빈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입니다.”이 말을 들은 주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소. 내일 발인 때, 김 낭자는 서원이 말한 대로 함께 가도록 하시오!”서원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소복을 입고 상복을 갖춰 입어야만 한다.김단은 가슴이 답답한 게, 꽉 막힌 것 같았다. 하지만
김단은 이를 인정했다. 그녀도 서원 공주를 시켜 임원을 상대하게 하려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손을 빌려 죽이려던 것은 아니었다.하물며, 그 옷은 원래 그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김단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 옷가게는, 이미 덕빈 마마께 돌려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옷은 자네 것이지!” 서원 공주는 호통을 쳤다. “이 공주가 다음 날 사람을 시켜 이미 다 알아보았소! 그 옷은, 소한이 자네 치수에 맞춰 주문한 것이오!”김단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그것은 천잠사로 만든 옷으로, 3, 5년이 되어도 한 벌 나오기 힘든 옷인데……소한이, 그녀에게 준 것이라고?멍해 있는 김단의 모습을 본 서원 공주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이내 호통을 쳤다. “여기서까지 가식 떨지 마시오! 김단, 자네도 이제 이 공주가 소한을 점찍어 두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눈치껏 물러나야 할 것이오!”이에 김단은 즉시 서원 공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공주 마마,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만약 그 옷이 정말 소 장군님께서 소인에게 주신 것이라면, 소인이 행한 것은 하나 밖에 없사옵니다. 이는 바로 사죄입니다!”서원 공주는 다소 의아했다. “사죄?”김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 일에 대한 사죄입니다.”3년 전, 눈앞에서 그녀가 억울한 누명을 쓰는 것을 보면서도 옆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이제 와서 죄책감을 느꼈던 것일까?이에 그 귀한 옷을 가져와 배상한 것이다!서원 공주는 김단이 누명을 썼던 일은 알지 못했지만, 당시 소한이 옆에 서서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다만 훗날, 소한은 분명…서원 공주는 김단을 보며 물었다. “자네, 모르는 것이오?”김단은 서원 공주가 무엇을 물어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무엇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정말 모르는 것이었다!서원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얼굴의 노기가 사라지고, 오히려 약간의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아니오. 어
김단이 별당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난 후였다.자신의 방에 들어선 그녀는 힘없이 옆에 있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서원 공주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했던 말뿐이었다.그녀는 이제서야 지난 3년 동안 임원이 진산군 댁으로부터 얼마나 보호받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이전에도 그녀가 세답방 궁녀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때, 임씨 가문 사람들은 임원을 궁 대문 안으로조차 들여보내지 않았다!마치 그녀가 세답방으로 벌을 받으러 간 것도 진산군 댁을 위한 경종으로 쓰기 위한 것처럼, 그들은 궁궐의 사람이나 일이 조금이라도 임원과 연관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것이다.그래서 그들은 꼬박 3년 동안 그녀에게 아무런 소식도 묻지 않았던 것이다…우스운 것은, 그녀가 진산군 댁으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임씨 부인이 득달같이 그녀를 지난 3년 동안 그들이 맹수굴처럼 여겼던 궁궐로 데려갔다는 것이다…이런 생각이 들자,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쓰디쓰고 씁쓸했다.그녀는 사실 견딜 수 있었다. 3년간의 무관심을 겪은 후, 그녀는 진산군 댁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깨달았기 때문이다.단지 유일하게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것은, 바로 대비라는 두 글자였다.임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대하는 것과 임원을 대하는 것이 하늘과 땅만큼 달랐고, 15년 전과 현재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그녀는 부모님의 사랑과 형제들의 총애를 느껴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한때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졌었다.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가족을 가졌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햇빛을 보았었다.그래서 지금, 차갑고 음습하며 끝없이 어두운 곳에 누워 해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녀의 마음이 괴로워진 것이다……원래 그녀에게 향했던 따스한 햇살이, 이제는 모두 임원을 향해 비추고 있었다.어떻게 달갑겠는가?당연히 달갑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이제 그녀는 그저 외부인일 뿐인데……그러고 있는 와중, 숙희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