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흰 소복 차림을 하고 발인 행렬의 맨 뒤를 따라갔다. 가는 내내 많은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단순히 배웅만 하는 것으로도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는데, 만약 소복을 입고 상주 노릇까지 해야 했다면…김단은 차마 더 상상할 수 없었다.발인 행렬을 한양 밖까지 이어가고 나서야 김단은 몸을 돌려 돌아갔다.돌아오는 길에도 백성들은 여전히 그녀를 곁눈질했지만, 다행히 김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오히려, 다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적어도 명정 대군의 일에 대해서는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그러고 있을 때, 누군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낭자.”김단은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정암이었다.그녀는 이내 미소로 화답하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정암에게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정 종사관 나리를 뵙습니다.”정암은 황급히 공수하며 답례했다. “김 낭자께서 이리 과하게 예를 갖추지 않으셔도 됩니다.”그의 손짓에, 김단은 그의 손에 들린 다과를 보게 되었다. “이것은, 혹시 저에게 주시려는 것입니까?”정암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수줍어하는 기색이었다.두 손으로 다과를 김단 앞에 내밀었다.김단은 손을 내밀어 받긴 하였지만, 이내 의아해하며 말했다. “정 종사관 나리,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째서 며칠 동안 계속 이것을 저에게 보내시는 것입니까?”그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정암은 약간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그저, 며칠간 김 낭자께서 분명 마음이 심란하실 거라고 생각해, 좋아하는 것을 좀 드시면 마음이 좀 나아지실까 해서 그랬습니다.”김단은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정암의 목적이 이렇게 순수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단지 그녀의 기분을 좀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라니?눈앞의 순박한 사람을 보며 김단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도리어 입을 열고 말했다. “정 종사관 나리,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다과를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이 말을 들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다시 이주가 지났다.보름 동안, 진산군 댁은 평화로웠다. 춘화연 초대장이 집으로 도착할 때까지는 말이다.춘화연은 중전이 개최하는 연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공주가 주관했다. 매년 봄이 되면 공주는 날이 가장 따뜻한 날을 골라 각 집안의 젊은 남녀들을 궁으로 초대해 꽃을 감상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읊도록 하였다.김단이 초대장을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자, 숙희가 이를 보고 물었다. “아가씨, 가시려고요?”말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김단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안 가겠느냐?”숙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다가왔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매년 춘화연 초대장이 왔을 때, 어르신들께서는 둘째 아가씨가 병에 걸렸다 거짓말하시고 가지 못하게 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춘화연이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닌 것 같아요!”김단은 입꼬리를 올리고 옅게 웃었다.확실히 좋은 곳은 아니다. 예전에 그녀는 춘화연에서 벌을 받아 세답방에 가게 되었었다.다만 그녀는 진산군과 임씨 부인의 임원에 대한 편애가 이렇게나 눈에 띌 줄은 생각지 못했다. 집안의 하녀들조차 알아챌 정도였다.“그래서, 네 생각에는 임원이 올해도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숙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가지 못하게 할 거예요.”하지만 어찌할 수 있을까…공주가 직접 이름을 거론하며 임원에게 올해 춘화연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했는데!그러고 있는 와중, 밖에서 어린 하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가씨, 소 장군님께서 옷 한 벌을 보내셨어요!” “뭐? 소 장군님이?” 숙희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문밖으로 나가 다른 하녀에게 재차 확인하였다. 이후 그제야 그 옷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옷은 나무 책상 위에 놓였다. 옷 위에는 붉은 천이 덮여 있었다.숙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소 장군님께서 어째서 아무런 이유 없이 아가씨께 옷을 보내신 걸까요?”김단은 대답하지 않고, 일어나 숙희 앞으로 가서 붉은 천을 걷어 올렸다.안에는 연
이 말을 듣자, 임원의 얼굴에 있던 수줍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되려 긴장하고 경계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김 낭자가 내가 연회에 가기를 바라는 것이냐?”숙희는 임원의 안색이 왜 이리 갑자기 변하는지 몰랐지만,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큰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어쩌면 소 장군님께서 춘화연에서 둘째 아가씨와의 혼사를 발표하고 싶어 하시는 걸지도 모른다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둘째 아가씨께 이렇게 귀한 옷을 보내시겠습니까?”혼사라는 두 글자가 마치 임원의 마음속 어딘가를 뜨겁게 했다.방금 전의 경계와 긴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얼굴에 붉은 기가 올라왔다. 심지어 전보다 훨씬 더 수줍어했다. “김 낭자가 정말 그렇게 말했느냐? 나, 낭자가 혹시 뭐 들은 것이라도 있는 것이냐?”숙희는 정색하며 말했다. “그것은 소인이 알지 못합니다. 다만 큰 아가씨께서 전에는 명정 대군님의 일로 둘째 아가씨와 소 장군님의 혼사가 미뤄질까 봐 조금 걱정하셨는데, 며칠 전부터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나머지는 임원이 알아서 추측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임원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숙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곧장 옷을 내려놓고 떠났다.그날 저녁, 김단은 대청으로 불려갔다.그녀가 도착했을 땐 임씨 집안사람들 모두가 모여 있었다.임원은 대청 중앙에 서 있었고, 눈시울이 붉었다.진산군과 임씨 부인은 상석에 앉아 있었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임학은 김단이 오는 것을 보고 성큼성큼 다가와 따지듯이 물었다. “자네가 원이를 꼬드겨 춘화연에 가라고 하셨소?”김단은 담담한 표정으로 임학을 흘끗 보았다. “꼬드기다니요? 춘화연은 중전 마마께서 베푸시는 연회이고, 연회에 초대를 받는 것은 저희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어찌 진산군 댁 사람의 입으로 마치 좋지 않은 일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겁니까?”이 말을 들은 임학은 순간 멈칫했다.이어서 임씨 부인이 말했다. “단아, 3년 전 춘화연에서 무슨 일이 있었
그녀의 동의를 얻자, 임원은 속으로 몹시 기뻐하며 몸을 돌려 진산군의 옆으로 갔다.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진산군의 무릎에 베고 어리광을 부렸다. “아버지, 제발 가게 해 주세요! 원이는 나중에 소 오라버니께 시집갈 것이고, 조만간 궁에 들어가게 될 텐데, 그때 가서 아무것도 모르면 소 오라버니의 얼굴을 어떻게 보겠어요?”이 말을 들은 진산군과 임씨 부인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그렇다. 임원은 훗날 소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다. 그들이 지금 그녀를 이렇게 과잉보호하는 것이, 어쩌면 오히려 그녀를 해치는 것일지도 모른다.임씨 부인은 여전히 걱정되었지만, 말투는 꽤나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럼 궁에 들어가거든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네 오라버니를 꼭 따라다녀야 한다. 알겠느냐?”임원은 임씨 부인이 허락하자 몹시 기뻐하며 곧장 대답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이어서 다시 고개를 들어 진산군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얼굴이 유난히 가련해 보였다. “아버지…” “됐다, 됐어, 네 마음대로 하거라!” 진산군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며 동시에 경고했다. “반드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춘화연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임원은 기뻐하며 대답했고, 다시 일어나 김단 옆으로 가 김단의 손을 덥석 잡았다. “김 낭자를 잘 따라다니면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절대 사고 치지 않을 겁니다!”김단은 그녀가 손을 잡자 온몸이 굳는 것 같은 느낌을 느꼈지만, 끝내 뿌리치지는 않았다.이렇게 ‘기쁜’ 날에, 그녀는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임학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대청을 나서며, 그는 김단의 길을 막아섰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오?” 임학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김단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마치 김단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여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한때 자신을 온갖 애정으로 감싸주었던 그 얼굴을 마주 보며, 김단은 낯섦을 느꼈다. 이내
“무슨 일이요?” 김단이 되물었다. “산적을 시켜 저를 납치하게 한 일인가요, 아니면 저에게 최음제를 먹여, 직접 다른 남자의 침상에 보내려 한 일인가요?”김단은 이 두 가지 터무니없는 일만으로도 임학이 입을 다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오히려 씩씩거리며 자신을 변호했다. “최음제를 쓴 것은 실수였소. 나는 그저 평범한 마취약인 줄 알고…”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김단은 임학을 노려보았다. “도련님께서는 심지어 간접적으로 제 약혼자까지 죽게 만드셨습니다. 이렇게나 많은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러 놓으시고, 이제 와서 역으로 저에게 딴 속셈이 있다고 하시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지 않으십니까?”그 잘못들을 임학도 인정하였다.이에 그는 당장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나서야 겨우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낭자가 나를 미워하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원이와는 상관없지 않소? 낭자가 복수를 하고 싶다면, 나에게 하시오.”김단은 냉소를 지었다. “하지만 제가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임원 때문입니다.”임학은 목소리를 낮추어 마치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것은 그 아이의 하녀가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이오. 원이는 낭자를 해한 적이 없소!”김단은 동의한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하녀가 저를 해하였지요. 그럼 제가 세답방의 궁녀들에게 모욕당하고 구타당할 때, 그 하녀는 어떤 벌을 받았습니까?”임학은 김단이 억지를 부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에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아이의 하녀는 낭자가 이미 내쫓지 않았소?” “맞습니다. 제가 내쫓은 것입니다!” 김단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자신이 행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했다.그녀가 진산군 댁으로 돌아온 후에 한 일이다!그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3년 동안, 그녀가 모욕당하고 구타당했던 수많은 밤낮 동안, 그녀를 해한 그 하녀는 임원의 곁에서 호의호식했다!그들은 그녀를 해친 하녀 한 명조차 처벌하지
눈 깜짝할 사이, 춘화연 날이 되었다.어화원 안, 임원은 천잠사 저고리를 입고 임학이 어제 사 준 장신구를 하고 나타났다. 등장과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그녀를 알아보는 양반집 아가씨들은 곧바로 다가와 오늘 그녀의 차림새를 칭찬하기에 바빴다.그에 비해, 김단은 훨씬 수수한 차림이었다.게다가 그 자리에 있던 아가씨와 도련님들은 모두 김단이 진산군 댁의 양녀이고, 얼마 전에는 유일한 기둥이었던 명정 대군마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그녀에게 말조차 걸려는 사람이 없었다.김단 또한 편안하고 자유로운 것이 좋았기에, 혼자 구석으로 가 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가 다가왔다. “김 낭자.”소정원이었다.김단은 소정원이 자신에게 말을 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난번에 소정원이 임원의 본모습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긴 했으나, 그녀들은 어릴 때부터 싸운 앙숙이었기 때문이다.이에 그녀는 눈썹 끝을 살짝 올리며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오?” “저 옷 말이오.” 소정원은 멀리 있는 임원을 힐끗 보고는 이어서 말했다. “저것은 오라버니가 김 낭자에게 사 준 것인데, 어째서 임 낭자가 입고 있는 것이오?”김단은 소정원이 이 일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지만,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난 그저 소 장군님께서 잘못 보내신 줄 알고 임 낭자에게 돌려준 것뿐이요.”하지만 소정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일부러 그런 것이지 않소.”그녀들은 어릴 때부터 싸워 왔기 때문에, 김단의 생각을 소정원이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김단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녀가 말했다. “지난 삼 년간 임 낭자는 궁에 와 연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소. 오늘 온 것 역시 김 낭자가 부추긴 것이 아니오?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이오?”말투에는 어딘가 적의가 느껴졌다.김단도 따라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무엇을 할 거라고 생각하시오?” “임 낭자는 김 낭자를 해친 적이 없소!” 소정원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소한을 바라보았다. 얼굴의 붉은기는 채 가시지 않았고, 눈 주위마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이것은 소 오라버니께서 보내 준 것이 아닙니까?”그가 보낸 것이라고?소한의 안색은 다시 어두워졌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았다.싸늘한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 놀랍도록 정확하게 김단의 얼굴에 꽂혔다.김단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그들의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자리에는 눈치 빠른 사람이 있었고, 단번에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어, 소 낭자 옆에 있는 분, 혹 진산군 댁의 큰 아가씨가 아니신가?”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김단에게로 향했다.김단은 이렇게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소 장군님 말씀의 뜻은, 혹 이 저고리가 저 큰 아가씨의 것이라는 뜻 아닌가?” “나는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네. 이렇게 예쁜 저고리에 소매 부분은 왜 이렇게 과하게 만들었는지, 마치 연극 의상 같지 않은가!”김단은 임원보다 키가 조금 더 컸고, 팔도 당연히 조금 더 길었다. 게다가 소한이 이 옷을 맞출 때 특별히 소매를 길게 해 달라고 하여, 김단의 손목 흉터를 가리도록 했다.그런데 이 저고리가 임원에게 입혀지니, 당연히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다른 사람들은 이유를 몰랐지만, 임원은 소매를 보고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니 단번에 알 수 있었다.이 저고리는, 소한이 김단에게 준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이에 대해 전혀 몰랐다. 심지어 이 옷을 입고 춘화연에 와 마치 광대처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칭찬을 받은 것이다…이전에는 없었던 수치심이 치솟았고, 임원의 두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소한을 쏘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소 오라버니, 이 저고리, 저에게 주신 것입니까?”이 순간, 그녀는 하나의 대답만을 필요로 했다.소한의 입에서 나오는, 긍정의
경악의 소리와 함께,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내관이 급히 달려와 임원의 곁에 다다르더니,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켰다.하지만, 이미 늦었다.화단은 이미 임원에게 짓밟혀 엉망진창이 되었고, 몇몇 가엾은 식물들은 흙 속에 파묻혀 원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어린 내관은 이 광경을 보고는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끝났다, 다 끝났어…”그러더니 어린 내관은 갑자기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옆에 있던 임원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자네가! 자네가 이 월하미인을 짓밟아 죽인 것이오! 이것은 공주 마마께서 비싼 값을 주고 청나라에서 들여온 것이오! 나와 상전 나리가 그 고생을 해서 이 두 그루를 살려 놓았단 말이오. 몇 달만 있으면 꽃을 피울 텐데, 다 와서 자네가 짓밟아 망쳐 놓다니! 배상하시오!”어린 내관은 소리치면서 울부짖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주위로 몰려들었다.임원의 옷은 화단에 넘어지는 바람에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또다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조롱받는 신세가 되자, 다시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치마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 어서 놓으시오!” “절대 못 놓소! 내 월하미인을 배상하시오!” 어린 내관은 오늘 임원에게 꼭 책임을 물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을 작정이었다.이를 본 임학은 황급히 다가와 말했다. “일단 놓으시오, 이 일은 우리가 알아서 공주 마마께 말씀드릴 것이오.” “놓지 못하오! 으흐흑, 내 월하미인을 물어내시오!” 어린 내관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임원은 지금 상황이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났다. 어린 내관이 너무 꽉 잡고 있는 나머지, 치마가 거의 찢어질 지경에 이르자, 다급한 마음에 발을 들어 어린 내관의 가슴팍을 걷어찼다.늘 소심하고 유순했던 임원이 겨우 열 살 남짓한 어린 내관을 걷어찰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게다가 그 어린 내관이 매우 꽉 잡고 있어 발에 차여 땅에 넘어졌는데도 손을 놓지 않을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찌지직’ 소리가 들려왔다.임원의 치마가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