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학은 한참 걸어도 화가 수그려지지 않았다.의원의 당부가 없었다면, 당장 돌아가 정암에게 주먹을 휘둘렀을 것이다.그는 관저로 돌아오자마자 매화당으로 향했다.임원의 상황도 살펴보고, 자신의 상처도 의원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지혈은 했지만 밖의 의원은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매화당의 문 앞에 도착하자 금방 치료를 끝낸 의원과 마주쳤다.의원은 그를 보고 예의를 갖추었다.“도련님을 뵙습니다.”임학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원이의 상처는 어떠하오?”의원이 답했다.“우려 안 하셔도 돼옵니다, 큰 아씨의 검이 완벽하게 빗겨 나가 생명에는 위험이 없사옵니다. 가슴 팍의 상처도 깊지 않아 몸종에게 약을 바르라 시켰사옵니다.”임학은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김단의 검술은 자신이 가르쳤기 때문이다.하지만 잠시뿐 이었다.어렸을 때 괴롭히는 사내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알려 준 기술이다.그 기술이 자신의 여동생에게 쓰일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임학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원이 옆에 잠시 있다가 의원을 찾아가겠소이다.”그는 매화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때, 의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작은 아씨는 지금 매화당에 계시지 않습니다.”임학은 깜짝 놀랐다.“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는데, 어디 갔단 말이오?”의원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입가에는 비웃음이 섞였다.“아씨께서는 아씨가 큰 마님을 다치게 하였으니, 안채로 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겠다 하였나이다.”그의 말에 임학은 심장이 떨려왔다.곧바로 몸을 돌려 안채로 향했다.의원은 멀어져가는 임학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저 고개를 저으며 한숨만 내쉴 뿐 이다.잠시 뒤, 임학이 안채에 도착했다.의원의 말대로 임원이 조모의 방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양옆으로 진산군과 임 씨 부인이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하지만 임원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상처에 피가 흘러도, 얼굴이 창백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임학은 눈살을 찌푸렸다.다가가서 그녀를
“원아, 네가 선의의 마음으로 그랬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않느냐, 저번에도 단이에게 크게 혼났는데, 어찌 기억을 못 하는 것이야? 알다시피 단이가 제일 걱정하는 이는 조모다, 네가 조모를 건드리면 그 계집이 너를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란 말이다!”임원은 임학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눈물이 한 방울씩 바닥으로 떨어졌다.하지만 눈가에는 전혀 다른 의도가 감돌았다.그렇다, 모를 리 없다.조모는 김단의 '약점' 이다,만약 조모가 죽지 않으면 김단도 관저를 절대 나가지 않는다.절연?말이 되는 소리!김단이 진정 절연을 하고 싶었다면,명정 대군에게 얻어맞았을 때야말로 해야 했다.아니, 3년 전에야말로 절연해야 했다!하지만 결국 김단은 여전히 관저의 큰 아씨라는 신분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임원, 자신이야말로 관저의 아씨다.헌데 어찌 김단에게 억압 당하고, 위협을 당하는 것인가.저번에도 다섯 날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도, 먹지도 못했다.다음에도 김단이 자신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더 이상 소한의 약혼자가 아님에도 자신의 혼례는 늦춰지고 있다.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모두가 김단을 아끼고 있다!그녀는 무서웠다.모든 것이 다시 김단에게 돌아갈까 봐 두려웠다.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임원은 어떻게든 김단을 내쫓야만 했다.그녀는 생각할수록 눈물이 더욱 거세졌다.상처는 생각하지 않고 방 문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조모, 모두 소녀의 잘못이옵니다.소녀가 어리석었사옵니다. 그저 누이와 헤어지는 것이 싫어 그리하였사옵니다. 모든 잘못은 소녀의 것이옵니다!”그리고는 머리를 계속 조아렸다.아물지 않은 상처에 피가 흘러 그녀의 옷에 묻었다.임 씨 부인은 마음이 아팠다.서둘러 임원 옆에 앉아 그녀를 부축했다.이때, 조모의 방문이 열렸다.김단이었다.빨갛고 부은 눈에 초췌하기 그지없었다.그녀는 그들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문을 닫았다.김단은 임원에게 다가갔다.미친 것처럼 날뛰다가 한바탕 울기까지 한 탓일까
임원은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또한 하루 종일 무릎을 꿇은 이유도 그들에게 비난받지 않기 위해 연기를 한 것이다.곧이어 김단이 뺨을 내리치자 계획을 한 듯이 자연스럽게 임 씨 부인을 안았다.임 씨 부인은 마음이 아팠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은 무기력 해보였다.하지만 순식간에 힘을 써서 뺨을 내려칠 줄은 몰랐다.그 바람에 임원은 혀까지 씹고 말았다.입안에 퍼지는 피비린내에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입술에 피가 고여 있는 모습에 진산군이 김단의 팔을 잡았다.“단아, 네가 조모를 염려하는 마음을 안다. 하지만 원이가 네 탓에 다치지 않았느냐, 한 번만 더 내리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지 않겠느냐!”“저 계집이 자초한 일 입니다.”김단은 단호했다.평온한 말투에는 증오의 감정이 섞였다.그녀는 당장이라도 임원을 죽이고 싶다.이때, 김단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진심으로 참회하러 온 것이 아니 옵니까?”그녀는 진심, 이라는 두 글자를 강조했다.임원은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것 마냥 입을 열었다.“누이, 소, 소녀가 잘못했사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곧 있으면 죽을 것 같이 희미했다.김단의 두 눈동자가 점점 짙어졌다.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의 위선적인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옅은 미소를 보였다.“그럼 계속 무릎 꿇고 계시지요, 그토록 진심이시면 하늘에서도 가엾이 여겨 조모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겠소?”그녀의 말에 임원이 멈칫했다.허약한 자신에게 어찌 계속 꿇어 있으라는 말 인가.임학은 찢어질듯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김단에게 큰소리쳤다.“김단, 적당히 해. 원이의 상처가 저리 심한데..”이때, 김단이 그의 말을 끊었다.임학이 아닌 임원을 보며 물었다.“어찌, 아씨께서는 그저 시늉하러 오신 겁니까?”“아니, 아니 옵니다! 소녀는 진심으로 참회하러 왔사옵니다!”임원은 서둘러 답했다.어찌 자신이 시늉을 하러 왔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하지만 김단은 그녀의 속셈을 눈치챘다.코웃음을 치고는 답했다.“예, 진심이면 되옵니다
임원은 반신반의한 채로 약을 건네받았다.그리고 그들 앞에서 약을 먹었다.김단이 물었다.“어떠하시오? 한양 서쪽에서 돌아왔을 때, 먹었던 약이오. 효과가 아주 좋았소.”한양 서쪽이라는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움찔했다.그녀가 관저로 돌아왔을 때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몸 전체에 상처가 나서 피가 멈추지 않았었다.지금 임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즉, 이 약은 효과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임원은 약을 삼켰다.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소.”그녀는 말하는 도중에 임 씨 부인의 품에서 나왔다.고통을 참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김단은 그제야 만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필요하시면 더 줄 수 있소이다, 힘들면 말씀하시오."말을 끝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김단의 가느다란 목소리와 더딘 행동이 곧 있으면 쓰러질 것 같다.마치 임원에게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진산군은 김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쓰려왔다.이때, 수 나인이 입을 열었다.“도련님의 등에 아직 상처가 있다. 여봐라, 의원을 부르거라! 마님께서도 기력이 약하시온데, 이리 계속 눈물만 흘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여봐라, 어서 부인을 방으로 모셔라. 대감 마님, 큰 마님께서 이대로는 오래 버티시기 어려우실 것이옵니다. 금일은 아씨께서 곁을 지키고 계시나, 내일은 대감 마님께서 직접 지켜야 하옵니다... 지금 쉬지 않으시면, 그 몸이 버티지 못하옵니다.”임원은 당황했다.수 나인의 몇 마디에 임 씨 가족들이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하지만 수 나인은 오랜 시간 조모를 지켰다.그리하여 관저에서는 힘이 있었다.임 씨 가족을 걱정하는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몸종들이 임 씨 부인을 부축했다.임 씨 부인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방 안을 쳐다보았다.그리고 무릎 꿇고 있는 임원을 쳐다 보았다.결국 고개를 저었다.곧이어 몸종들이 그녀를 부축하여 자리를 옮겼다.임학은 등이 찢어질 듯 아팠다.임원이 많이 다치지
해가 저물고, 하늘이 어두워졌다.임원은 자신이 얼마나 꿇고 있었는지 모른다.그저 불어오는 바람에 추웠다.두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다.가슴 팍의 상처만 심장 박동에 따라 아파왔다.그 덕분에 희미해지던 정신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고개를 들자 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사람의 그림자를 보자 코 끝이 찡했다.그녀는 왜 자신이 이러한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큰 마님은 곧 죽을 사람이다, 화병으로 지금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른 가.김단은 관저와 절연하려 하지 않았는 가,자신이 오히려 그녀를 도와준 것이 아닌가.생각하면 할수록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이때, 임학이 안채에 도착했다.의원에게 상처를 치료받은 뒤, 추워할 임원에게 겉옷을 주려 찾아온 것이다.곧이어 처참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철렁했다.“원이야.”임원은 그의 소리를 들었다.안광 없는 눈으로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곧이어 걱정 어린 표정의 임학을 보고 나서야 울음을 터뜨렸다.“흑흑, 오라버니, 저 아픕니다, 흑흑흑…”임원의 울음에 임학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서둘러 가져온 겉옷을 임원에게 걸쳐 주었다.“그래, 이만하면 되었다. 오라버니가 부축해서 데려 가마.”그의 말에 임원은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임원을 부축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이미 임학을 향해 있었다.이때, 조모의 방문이 열렸다.곧이어 불빛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그리고는 그림자 하나가 불빛을 막았다.“지금 가시오?”김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화가 나지 않아 보이지만 그녀의 두 눈은 빨갛게 부어있었다.심지어 그녀의 말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섬뜩한 모습에 임학이 미간을 찌푸렸다.곧이어 김단을 보지도 않고 답했다.“원이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어, 데려가야 해.”그의 말에 김단이 코웃음을 쳤다.“수 나인이 약을 주셨나이다. 헌데 아씨의 몸이 조모의 몸보다 허약 하나 봅니다.”임원의 몸이 굳어 버렸다.부축하는 임학의 행동이 미세하게 느려졌다.이를 느낀
조모의 눈빛에 광이 돌았다.김단은 마치 자신이 꿈을 꾸는 것 같았다.천천히 다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조모…”조모가 눈을 들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단아, 이리 와서 안아주렴.”곧이어 김단이 다급하게 그녀의 품에 안겼다.“흑흑, 농이 지나치십니다. 소녀는, 조모께서...”김단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울고 나서 허약해졌던 몸은 조모 덕분에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잃었다가 다시 얻은 기분에 묘해졌다.이때, 그들의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조모.”다름 아닌 임학이었다.김단은 눈살을 찌푸렸다.조모의 품에서 나와 그를 쳐다보았다.혹여 임학이 임원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오면, 뺨을 때려 내쫓을 생각이었다.하지만 다행히도 임학은 조모께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조모의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두 눈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조모께서 눈을 뜨시니 다행이옵니다.”조모는 그를 보고 마음이 복잡했다.임학은 관저의 유일한 남식이다.어렸을 때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 왔으며, 마찬가지로 그녀도 임학을 아꼈다.하지만 김단에게 한 짓을 떠올리자 마냥 기쁘지 않았다.잠시 생각하고는 결국 임학에게 손을 내밀었다.임학은 마음이 쓰렸다.곧이어 조모의 손을 붙잡았다.조모는 그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이고, 우리 학이가 이렇게나 컸구나. 이 조모의 손보다 훨씬 크다.”웃자고 하는 말에 임학의 눈가가 더욱 붉어졌다.조모가 계속 말을 이었다.“내 네 두 사람이 어렸을 때가 아직도 눈에 훤하다. 하나는 나무에 달려 있는 복숭아를 먹고 싶어 했지, 하필 제일 꼭대기에 있는 게 맛있다면서 고집을 피웠어. 또 하나는 여동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숭이처럼 나무 위로 올라갔지. 이 조모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진산군을 불러서 망정이지, 잘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몰라.”임학과 김단은 조모가 과거 일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두 사람은 이미 잊은 듯 했다.조모는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모..”임학의 목소리가 떨렸다.이유는 모르지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조모는 전보다 더 정정해 보였다.목소리에도 힘이 가득했다.하지만..알지 못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가만히 있는 임학을 보고 조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찌, 조모의 말이 말 같지가 않느냐?”“오해십니다!”임학은 서둘러 부인했다.다급한 마음에 목소리가 떨렸다.“손자, 어떠한 것이든 다 따르겠나이다!”“그래야지!”조모는 그제야 안심한 듯 보였다.잡고 있던 임학의 손을 놓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가서 네 아비를 불러와라. 조모가 할 말이 있다, 전하라.”임학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김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다급하게 눈물을 닦아냈다.그는 그제야 방에서 나갔다.임학이 나가자마자 김단이 조모를 불렀다.“조모..”떨리는 목소리에 두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피로하시지 않사옵니까? 아니면 잠시 쉬시는 것이 어떠 하옵니까?”조모는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손가락으로 장농을 가리켰다.“가서 물건을 가져오너라.”김단이 멈칫했다.이 전에 조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장롱 안에는 자신을 위해 남겨 둔 물건이 들어 있다고 했다.허나 지금 보여 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함이 밀려왔다.김단은 움직 일 수가 없었다.곧이어 조모가 그녀를 보고 재촉했다.“단아, 가져 오거라.”김단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장농을 열자 작은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금사남목으로 제조되어, 사방에는 금이 둘러져 있었다.김단은 조심히 상자를 들어 조모에게 가져다주었다."여기 있사옵니다."조모는 상자를 건네받았다.마른 손으로 상자를 쓰다 듬었다.마치 먼 과거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다.“내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품이다…”금사남목의 나무 상자는 조모의 혼수 중 하나다.작은 탄식을 몇 번 하고는 그제야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정갈하게 싸인 은지폐와 토지 증서를 제외하고, 투명하고 윤기있는 옥패가 들어있었다.옥패에는 '목' 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김단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도중에도 여러번 고개를 돌려 조모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그러고는 서둘러 매화당으로 달려갔다.나무 상자를 방 안에 놓고, 다급하게 세수를 했다.옷도 갈아입지 않은 체 다시 안채로 향했다.김단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진산군이 조모의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기류가 이상했다.김단에게 보였던 미소는 온데간데 없고,조모는 그저 어두운 위엄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김단이 돌아오자 조모가 입을 열었다.“단아, 이리 오거라.”그녀의 말에 서둘러 다가갔다.진산군의 옆으로 다가가자 조모가 말했다.“꿇거라.”김단은 조모의 말에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조모가 다시 말을 이었다.“김단, 넌 임 씨 가문에서 열여덟 해를 보내었다. 혈연의 관계는 없다, 허나 네 아비와 어미는 어렸을 때부터 널 지키고 아껴주며, 친자식처럼 대해주었다. 그 점은 인정하느냐?”15년 동안 김단을 지키고, 아껴준 것은 사실이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였다.“인정하는 바옵니다.”“그리하면 네 아비께 머리를 조아리거라.”조모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김단은 감히 원망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곧이어 몸을 돌려 진산군에게 머리를 조아렸다.조모가 다시 말을 이었다.“네 친 여식이 돌아오고 나서, 넌 양녀를 엄격하게 대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다치게 한 점에 대해 인정하느냐?”진산군의 어깨가 떨렸다.그저 고개를 떨구어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조모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하면 부녀의 정은 다 하였다. 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결정하겠노라, 내 앞에서 세 번 손뼉을 치거라.”손뼉을 세 번 치는 것은 절연을 의미한다.진산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어머니!”그는 조모가 이러한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김단은 심장이 떨려왔다.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라 한 것은 임 씨 가문에게 길러준 은혜를
공격!순간, 어둠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칼날을 번쩍이며 산적들을 향해 공격했다.산적들은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하지만 오랜 시간 싸움을 해온 산적들은 두목의 명령에 따라 곧장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꺼내 들고 맞섰다.전투는 순식간에 격렬해졌다.소한은 재빨리 갇혀 있는 정암에게 다가가 칼로 쇠사슬을 끊어버렸다.그때 산적 두목이 이 상황을 눈치채었고, 옆에 있던 칼을 들고 소한을 향해 공격해 왔다.소한은 뒤에서 다가오는 살기를 느끼고 몸을 피하며 장칼을 휘둘러 산적 두목을 공격했다.그런데 놀랍게도, 산적 두목의 무술 실력은 소한과 비슷하였다.두 사람은 팽팽하게 맞서 싸우며 쉽게 승부를 내지 못했다.소한은 순간 정암이 우리에서 나오자마자 다른 산적이 정암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다행히도, 정암에게는 칼이 있었고, 공격을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하지만 정암은 7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며 심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몸이 매우 약해져있었다. 그는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내고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정암에게 다시 위협이 가해지자, 소한은 얼굴을 찌푸리고 산적 두목을 발로 차 버리고 정암에게 달려갔다.소한은 칼로 산적 두목의 가슴을 찔렀고, 눈빛에 힘이 없는 정암을 보고 말했다. “안전한 곳으로 피해라!”소한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산적 두목이 다시 공격해 왔다.소한은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 없이 맞서 싸웠다.주변에는 불길이 치솟았다.산적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지만, 몇몇 강한 산적들은 소한의 부하들을 죽인 뒤 소한을 향해 공격해 왔다.잠시 뒤, 소한은 네 명의 산적들에게 포위되었다.산적 두목은 소한을 쏘아보며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하, 네놈이 그 영웅이라고? 이런 수준을 가지고?”그들은 진정한 영웅은 과거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소한은 왜 이들이 자신에게 분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세 명의 부하 장군이 이곳에서 죽은 것을 떠올리면 자신의 분노가
육맥산은 당우리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겹겹이 쌓인 봉우리가 마치 여섯 개의 봉우리처럼 보여 육맥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산세가 험준하여 방어하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운 데다, 산맥이 연결되어 있어 산적들이 다른 산으로 쉽게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산적들이 활개를 칠 수 있었다. 물론 이에는 관아와 산적간의 결탁이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깊은 밤.산채 안은 유난히 시끌벅적했다.산적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때 한 산적이 물었다. “두목, 여만안이 약속한 만 냥을 정말 가져올까요?”산적 두목은 한 손에 양다리를 들고 다른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흐릿한 눈빛으로 감옥에 갇힌 남자를 바라보며 비웃었다.“여만안이 말하길, 이번에 온 놈들은 모두 소한의 부하들이라고 했다. 특히 심장에 화살을 맞은 놈, 팔이 잘린 놈, 그리고 감옥에 있는 놈, 이 셋 모두 소한의 부하 장수들이라고 했어.”이 말에 다른 산적이 놀라며 물었다. “소한? 돌궐족의 진형을 깨고 우두머리를 죽였다는 그 젊은 장군 말이십니까?”산적 두목의 표정이 굳어졌다.다른 산적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너무 미화시키는 거 아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면 그 사람 부하가 우리에게 잡혔겠어?”이 말을 들은 산적 두목은 다시 기분이 풀렸다.그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소 씨 놈 부하 장수 셋 모두 우리에게 당했다. 우리가 이 세 명 중 한 명을 인질로 잡고 있는데, 네가 보기에 소한이 돈을 안 가져올 것 같으냐?”산적들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한이 똑똑한 사람이라면 돈을 주고 사람을 데려가겠죠! 하지만 후환이 두렵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을 데리고 복수하러 오면 어떡합니까?!”“겁낼 것 없어. 그 놈이 온다면 여만안이 우리에게 알려줄 테니까. 그때 가서 똑같이 놈을 붙잡아 오면 돼!”“맞아! 그때가 되면 놈을 산채로 잡아 왕에게서 돈을 뜯어 내는 거야!”“하하, 그 말이 맞네! 왕에게서 돈을 받아내자! 원래 우리 몫이
여만안은 소한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피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침대에는 단 한 사람, 노상이 누워 있었다. 노상은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고, 소한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흐릿했던 그의 눈동자가 빛을 냈다.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며 소한 앞으로 갔다. “소인 장군님을 뵙습니다!”목소리가 떨렸고, 슬픔이 묻어났다.소한은 노상의 왼쪽 팔을 바라봤다.노상이 격하게 움직이자 옷소매가 흔들렸고,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그의 왼팔은 어깨뼈 부근에서 잘려 나가 있었다. 소한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했고, 주변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소한은 노상을 일으켜 세우고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설명해.”노상은 오랫동안 소한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소한의 말 뜻을 알고 있었다. “저희는 10일 전에 당우리에 도착하여 육맥산 지형을 파악한 후 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산적들이 마치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지형을 이용해 저희를 기습했습니다. 왕여 종사관은 현장에서 전사했고, 정암 종사관이 목숨을 걸고 저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저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소한의 차가웠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옆에 있던 여만안은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지만, 소한에게 아부를 떨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산적들이 이틀 전에 편지를 보내와서 정 종사관님을 살려주는 대신 금 1만 냥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장군님, 걱정 마십시오. 저희 분당현이 돈이 부족하긴 하지만, 백성들에게 돈을 모으라고 하여 정 종사관님을 구해낼 것입니다!”말이 떨어지자 마자 싸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소한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여만안의 어깨를 찔렀다. “여 현령, 잘도 백성들의 돈을 빼앗는구려.”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왕여는 전사했고, 노상은 팔을 잃었으며, 정암은 생사가 불확실하다.여만안은 이런 일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오히려 산적들에게 돈을 대주려 하고 있다!여만안은 고통스러워하며 얼굴을 찌푸리고는 변명
김단과 정유이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무슨 헛소리야!” 정유이는 화가 나서 서화청을 다시 발로 차고 싶었지만, 이성을 유지하고 참았다.서화청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이다!김단도 미간을 찌푸리고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힌 채 나즈막하게 물었다. “그건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우리 아버지가 얘기해 주신 것이오!” 두 여인이 모두 당황하자 서화청은 기세등등한 표정을 보였다. “주상 전하께서 어제 소식을 받기를, 정암이 사람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갔다가 크게 패하고 전멸했다지 않소!"서화청은 마지막에 '전멸'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 두 글자는 김단의 가슴에 큰 돌덩이가 되어 떨어진 듯,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김단은 그 말에 너무 놀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정유이는 참다못해 서화청에게 달려들었다. “헛소리하지 마! 감히 우리 오라버니를 저주하다니!”정유이의 작은 주먹은 매우 강력했고, 서화청은 두 차례 맞고 어지러워하더니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정유이가 다시 서화청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김단은 숙희를 불러 정유이를 말리라고 했다. “숙희야, 정씨 낭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거라!”그리고 그녀는 정유이에게 말했다. “조급해 하지 마시오. 내가 군대에 가서 소식을 알아보겠소.”숙희가 정유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고, 김단도 곧바로 뒤따라 나갔다.김단은 말을 빌려 서둘러 군영으로 향했다.비록 그녀는 소한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소한에게서만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당우리의 산적들이 포악하긴 하다만, 전멸했다는 것은…믿기 어렵지 않은가?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김단의 머릿속에는 정암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떠올랐고, 마음이 불안해졌다.간신히 군영 앞에 도착했다.문을 지키는 병사는 김단을 알아보고 인사하며 말했다. “김씨 아가씨, 장군님은 어젯밤에 떠나셨습니다.”“떠나셨다고요?” 김단은 당황한 나머지 대답을 알면서도 되물었다. “어디로 가셨죠?”“당우
김단은 미간을 찌푸렸고, 직감적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그럼 지금 어디 계시지?”그런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2층 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그 순간, 한 남자가 방에서 밖으로 밀려 나와 복도에 나뒹굴었다.서화청이었다!정유이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고, 매우 거칠고 화가 난 듯했다. “너 같은 놈이 감히 나에게 시비를 걸어? 밥값이 아깝다고 음식에 벌레가 있다고 하질 않나, 쳐다도 보질 못할 새언니를 욕하질 않나, 너야말로 몹쓸 놈이고 집안 전체가 문제다!”말이 끝나자마자 의자가 방에서 날아와 서화청에게 적중했다.서화청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정유이는 허리에 손을 짚고 방에서 나와 서화청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 다시 한번 우리 새언니 욕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서화청은 며칠 전 우연히 정암의 여동생이 부엌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예전에 겪었던 굴욕을 떠올리며 정유이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그래서 음식에 벌레가 있다고 거짓말하며 주방에 항의했고, 정유이를 불러냈다.하지만 정유이는 예상외로 강하고 씩씩했다. 게다가 무술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그는 조금도 이득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낭패를 당한 것이다!화가 난 서화청은 소리쳤다. “네, 네가 감히 나를 때려? 두고 보거라, 내 사람을 시켜 네놈을 잡아들일 테니!”서화청은 호조판서의 서자였기 때문에 평범한 백성 한 명 괴롭히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다.그런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호조판서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한번 지켜보지요.”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서화청은 고개를 돌렸고, 김단은 2층 계단에서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 종사관님은 나라의 명령을 받고 산적떼를 토벌하러 가셨는데, 도련님은 여기서 그 분의 가족들을 괴롭히고 계시니, 이는 호조판서님께서 교육하신 것인지 여쭤보고 싶군요. 듣자하니, 호조판서님께서 요즘 좋은 물건을 많이 받으셨다지요?”호조판서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자리
김단은 정유이의 질문에 당황했다.그동안 의산적으로 무시해왔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폭발했다.김단의 얼굴은 더 이상 평온하지 못했고, 이마를 찌푸리며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오?”만약 정유이가 정씨 부부처럼 아무것도 몰랐다면, 지금처럼 그녀에게 묻지 않을 것이다.김단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본 정유이는 자신의 어금니를 꽉 물었다. 마음 속 외침이 입안 머물다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오라버니는 낭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간 것이라는 것이오!”김단은 정유이의 말을 듣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세히 묻기도 전에 정유이가 이어서 말했다. “오라버니는 낭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소. 낭자를 괴롭히는 사람을 없애기 위해 군 공을 세워 낭자를 지키려는 것이오! 낭자가 없었다면 오라버니는 이번에 산적떼 토벌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오.”그 말에 김단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가 생각했던 대로였다.정암이 갑자기 토벌에 나간 것이 그녀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소매 속에 있던 두 주먹을 꽉 쥐며, 김단은 마음이 흔들렸다.정유이도 두 손을 꼭 쥐었다. 너무 세게 쥔 나머지 손이 하얗게 될 정도였다.마음속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김단의 붉어진 눈을 보고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마지막으로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낭자를 용서하지 않을테니!”정유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문을 나서던 와중, 숙희와 부딪혔다.하지만 정유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숙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가씨, 정씨 아가씨께서 왜 우시는 겁니까?”운다고?김단은 흠칫 놀랐다. 오늘 정유이가 할 말이 더 있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정유이는 분명 무언가를 더 알고 있는 것이다!정암이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당우리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부터 울
사실 김단은 자신이 정암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모가 병을 얻으시고, 그 뒤로는 밤낮으로 상을 치르느라 정암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정암이 온다고 했어도 진산군 쪽에서 거절할 것이다.그래서 정암이 어디 있는지 그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그런데 김단이 이를 묻자 정유이의 표정이 굳어졌고, 정씨 부인도 인상을 찌푸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그 모습을 본 김단은 불안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정 종사관님은 어디에 계시죠?”정씨 부인은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정씨 어르신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 애는 종사관 아니느냐, 나라에서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가야지! 듣자 하니 산적떼를 소탕하는 임무를 맡아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하더구나!”산적떼 소탕? 그 말을 들고 김단은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산굴에서 만났던 무시무시한 산적들을 떠올렸다. 이어서 다급히 물었다. “혹시 당우리의 산적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네가 어떻게 아는 것이냐?” 정씨 어르신이 깜짝 놀랐다. “사실 듣기로 당우리의 산적떼가 마을 사람들을 습격해, 조정이 밤새 군사를 보내 소탕하도록 했다더구나.”김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더 이상 말함으로써 두 어르신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김단이 아무 말이 없자 정씨 부인은 김단이 걱정하는 줄 알고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산적들이 아무리 세도 산적일 뿐이야. 정암은 8년 전부터 군에 있었고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 않니. 잔혹한 돌궐족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 애가, 고작 산적 몇 명을 두려워하겠느냐?”“그럼, 물론이지.” 정씨 어르신도 거들었다. “아무 일 없을 거다. 아마 한 달 안으로 돌아올 거야!”김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암은 아무 일 없을 거다.한 달 후, 정암은 돌아올 것이다!이 집은 크지는 않지만 방이 세 개나 되었다.정씨 부부가 한 방을 쓰고, 정암과 정유이가 각각 한 방씩 썼다.이제 김단이 왔으니, 정유이와 함께 방을 쓰게
드디어, 진산군 관저를 떠났다.높은 대문 앞에 서서 흰 천이 걸린 현판을 올려다보며 김단은 씁쓸하면서도 기쁜 마음이 교차했다.드디어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임씨 가문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조모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다.숙희는 뒤돌아보는 김단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아쉬워하는 듯하여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이틀만 더 있다 가면 어떨까요?”임 부인의 말처럼 큰 마님의 5일장이 이틀 후에 끝나기 때문에, 그때까지 있다가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하지만 김단은 고개를 저으며 숙희의 손을 잡고 성큼 성큼 나섰다.진산군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저택, 정씨 가문의 내외는 그녀가 보내 놓은 많은 귀중품들을 보며 당황해하고 있었다.김단이 오자 두 사람은 서둘러 인사를 올리고 물었다. “큰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김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이제 진산군 댁과 관계없습니다. 큰 아버님, 큰 어머니께서도 앞으로 큰 아가씨라 부르지 마시고 단이라고 불러주시지요.”“관계가 없다?” 멀리 서 있던 정유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김단을 보고 물었다. “왜 갑자기 연을 끊으셨단 말입니까?”정유이의 말투가 불손하다고 생각한 정씨 가문 어르신은 딸을 흘겨보고 김단에게 물었다. “큰 마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연을 끊으셨습니까? 그들이 괴롭히기라도 하셨습니까?”둘째 어르신은 말을 하며 김단 쪽 편을 들어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정유이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김단은 크게 감동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그들이 저를 괴롭혀서 연을 끊었습니다. 잠시 갈 곳이 없어져 두 분께 잠시 머물 수 있도록 부탁드리고 싶습니다.”하지만, 그녀와 정암은 아직 정식으로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같은 집에 살면 말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정씨 부인이 김단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이곳이 네 집인데 무슨 말이니?”그리고 그녀는 무언가를 눈치 챈 듯 김단의 손을 보며 안타
숙희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소인 지금 당장 짐을 싸겠습니다!”김단은 만족스럽게 웃었고, 숙희는 문득 물었다. “그럼 아가씨,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일단 정암이 있는 곳으로 가 며칠 지내며 갈 곳을 정하자구나!” 김단은 앞으로 한양을 떠날지, 아니면 남아 있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정암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으니, 남아 있을지 떠날지는 정암과 상의해야 했다.일단 지금 당장 그녀는 진산군 관저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숙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인이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창고에 있는 하사품은 왕철 아저씨에게 말해 정 종사관님 집으로 보내라고 할까요?”“그래, 보내거라.” 김단이 대답했다. 그것은 왕와 중전이 그녀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혼인 문제로 인해 그 난리를 겪으며 하마터면 목숨이 위험 했기 때문에, 하사품은 당연히 가져가야 했다.숙희는 알겠다고 말한 뒤 서둘러 일을 처리하러 갔다. 숙희가 너무 서둘러 일을 처리하며 물건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는지, 임씨 부인이 왔다. 김단이 짐을 싸고 나가려는 모습을 본 임씨 부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단아, 너, 너 어디를 가려고 하는 게냐?”임씨 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김단이 무엇을 하려는지 어찌 모를 수 있겠나?그녀는 그저 마음을 돌리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김단은 임씨 부인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마음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이미 대감 마님과 가족의 연을 끊은 이상, 제가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습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신세를 졌다니.그 말이 임씨 부인의 가슴을 찔렀다.임씨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단아, 어찌 이리 무정하니, 어찌...”“저는 조모님 앞에서 대감 마님과의 연을 끊었습니다.”김단은 차가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임씨 부인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해져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조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김단과 진산군의 관계가 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