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식장으로 정한 호텔마저 내가 결혼했을 때 호텔과 똑같은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수혁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야 했다.나는 예식장 구석구석을 떠다니며 살펴보았는데 메뉴마저 똑같았다. 참으로 이상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임수혁은 우리가 결혼할 때 입었던 정장을 입은 채 예식장에 꼿꼿이 서 있었다. 옆에는 몸에 맞지 않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이하린이 바짝 붙어 있었다.사회자가 몇 번이고 임수혁에게 시작하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하린은 초조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임수혁의 소매를 슬며시 당겼다.“오빠, 얼른 시작하죠. 하객들이 다 기다리고 있어요.”임수혁은 이하린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조금만 기다려줘. 곧 시작할 거야.”다정한 둘의 모습에 나는 시어머니가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냄새만 맡아도 군침이 돌았다.“장모님, 하린이가 그러던데 지난번에 태반을 드시고 많이 좋아지셨다면서요? 제가 더 가져왔어요.”하객들이 왜 식이 시작되지 않는지 궁금해하던 와중에 갑자기 스피커에서 임수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괜찮아. 이제 다 나았어.”뒤이어 여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아마도 이하린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치솟았다. 임수혁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우리 아이를 그만 보내줄 것이지 왜 계속해서 괴롭히는 거지?“장모님, 하린이가 분명히 태아가 제대로 형성되기 전에 먹어야 병이 낫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태반으로 바뀐 거죠?”이하린의 어머니는 당황한 나머지 이하린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대답하세요.”“오빠, 일단 결혼식부터 올리고 얘기해요, 네?”이하린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드러났다. 뻔뻔하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결혼식? 나랑 민아는 이미 8년 전에 결혼식을 끝냈어.”“이하린, 넌 그 시신이 민아인 줄 알고 있었지?”임수혁의 추궁에 이하
이하린의 말에 현장에 있던 하객들은 숨을 들이마시며 급히 자리를 떠났다.“철썩!”임수혁은 화가 치밀어오른 채 이하린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 쥐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쇼하는 거예요?”“저 혼자서 바람피울 수 있어요? 아이도 오빠가 직접 빼낸 거잖아요. 임수혁, 넌 정말 남자도 아니야!”임수혁은 이하린의 말에 대꾸하지도 않은 채 그녀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놔! 이거 놔!”이하린이 아무리 저항해도 임수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하린을 끌고 옥상으로 향했다.“임수혁, 대체 뭐 하려는 거야?”이하린은 임수혁의 불안정한 상태를 느꼈는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는 이미 옥상 문을 잠근 상태였다.“우리 둘은 죄인이야. 여기서 민아랑 뱃속의 아이에게 속죄라도 하자.”임수혁은 말을 마치고 이하린과 함께 34층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이하린의 시신은 산산조각 났다.나는 그들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하린의 영혼이 사라지는 모습까지.어쩌면 그녀는 참 운이 좋았다. 그렇게 많은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한순간에 모든 죄가 사라졌으니 말이다.임수혁도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그는 28층 외벽 세척 작업자가 남겨둔 바구니에 걸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그의 영혼은 육체 곁을 떠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앞에 나타나자 그제야 그는 자신의 영혼이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듯했다.“민아야, 너 맞아? 혹시 나 데리러 온 거야?”나는 임수혁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민아야, 네가 남겨준 선물 봤어. 너무 감동이야. 고마워.”혹시 내가 갑자기 사라질까 봐 초조했는지 급하게 나를 붙잡으려 했다.하지만 그는 자신의 육체를 벗어나 멀리 갈 수 없었다. 몇 걸음만 움직여도 한계에 다다랐다.“민아야, 아직도 날 용서할 수 없는 거야? 나 이하린을 데려갔잖아.”나는 전혀
밸런타인데이, 나는 임수혁과 사랑을 약속했던 곳에서 관람차 좌석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그날 나는 아이까지 잃었다.그러나 남편인 임수혁은 그 순간마저도 이하린과 포옹한 채 진하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선배님, 제가 가만히 있었더라면...”나는 이하린이 임수혁의 품에 꼭 붙어 있는 걸 죽어서도 지켜보아야 했다. 다만 그녀는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난 그녀의 귓가에 대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래,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좌석이 떨어졌어. 네가 아니면 난 죽지도 않았을 거야!”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들을 수 없었다.“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안민아 명이 짧은 거지. 어차피 누군가는 이 좌석에 타고 있었을 거고 똑같이 죽을 운명이었을 거야.”임수혁은 이하린을 꼭 끌어안은 채 마치 내가 되살아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선배님, 저 무서워요.”“하린아, 눈 감아. 얼른 여기서 나가자.”임수혁은 이하린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파묻으며 꼭 끌어안았다.하지만 이하린은 조용히 머리 없는 내 시체를 바라보며 어렴풋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임수혁은 특이한 직업을 가졌다. 그는 장례식장에서 입관 작업을 맡고 있었다. 이하린은 새로 온 인턴이었고 올해 6월에 금방 대학을 졸업했다.이하린은 젊고 이뻤다. 임수혁은 그녀가 종종 멍청한 질문을 한다고 불평하기도 했다.“새로 온 인턴이 너무 멍청한 것 같아. 우리 일은 똑똑하고 세심한 사람이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우리에게 마지막을 맡긴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잖아.”초반에 그는 이하린이 멍청하고 세심하지 않다며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매일같이 불평했다.다만 나중에도 여전히 불평하고 있었지만 말투에는 어느새 애정이 담겨 있었다.“오늘도 하린이가 실수를 했어. 내가 눈치채고 도와줬기에 다행이지. 아니면 어쩔 뻔했겠어?”어쩌면 그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이내 얼굴을 들고 내 표정을 확인했다.사실 난 이미 그의 외도를 알고 있었기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왜냐하면 이하린이 직접 나한
임수혁은 겁에 질린 이하린을 집에 데려다준 뒤에야 돌아왔다.“민아야, 물 한 잔만.”이는 임수혁의 습관이었는데 집에 돌아오면 꼭 따뜻한 물을 마셔야 했다. 장례식장의 온도가 너무 차가워서 이렇게 해야만 집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하지만 대답 대신 집안을 가득 채운 건 고요함뿐이었다.우리는 아침에 이하린 때문에 크게 싸웠다.“여보, 하린이가 고열 때문에 병원에 혼자 있어. 선배인 내가 가봐야 할 것 같아.”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있는 임수혁을 바라보며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병원에 의사랑 간호사들도 있잖아. 여보가 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 게다가 밸런타인데이에 날 혼자 집에 두려고?”임수혁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민아야, 지금 하린이가 아픈데 네 머릿속엔 오직 밸런타인데이뿐이야?”“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야? 하린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걔가 알면 실망하겠어.”‘왜 하필 그녀는 밸런타인데이에 임수혁에게 전화했을까? 왜 아프면서까지 우리의 기념일을 망치려 한 걸까?’차라리 그와 함께 그녀를 돌보러 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임수혁이 문을 세게 닫고 나가는 바람에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켜버릴 수밖에 없었다.“해피 관람차로 와줘.”임신 소식을 알게 되자마자 임수혁한테서 메시지를 받았다.나는 그가 나랑 다투고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줄로 알고 있었지만 전혀 내 예상을 빗나갔다.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본 탓인지 현실에는 지고지순한 남자가 드물었다.나는 그들이 손을 잡고 관람차 6번째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랑 임수혁이 입 맞추고 포옹하며 영원을 약속했던 곳에서 말이다.병원에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왜 이곳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나는 마치 도둑처럼 8번 방에 앉아서 그들을 몰래 지켜보았다.관람차가 꼭대기에 도달하자 둘은 포옹하더니 진하게 키스하기 시작했다.‘그들 역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을까?’마치 나랑 임수혁이 처음
임수혁은 나를 찾지도 않고 씻고 나서 바로 침대에 누웠다. 나한테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통도 없었다. 내가 어디 갔는지 묻지도 않았다.사랑에 빠진 그의 그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사랑이 식은 게 너무나도 뻔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예전엔 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답장을 빨리하지 못하면 바로 전화를 걸어와 걱정하곤 했다. 가끔 전화를 받지 못할 때면 그는 자신의 일을 제쳐두고 회사까지 찾아와 확인할 정도였다.“여보, 아무리 바빠도 답장은 꼭 해줘.”“네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혹시 내가 귀찮아졌어?”“다음부터는 그냥 웃는 이모티콘이라도 하나 보내줘. 여보가 걱정돼서 그래.”...하지만 그는 이제 메시지를 보낼 의욕조차 없는 것 같았다.우리는 엄마 때문에 알게 되었다.엄마는 수십 년간 가정폭력을 견디다가 결국 옥상에서 뛰어내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체가 훼손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엄마의 입관을 맡은 사람이 바로 임수혁이었다.그는 경외와 연민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엄마의 시신을 맞춰갔다. 그 모습을 보며 엄마가 나에게 생명을 준 것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용이 아깝지 않은 실력이었다.“옆에 있는 티슈로 눈물 닦으세요. 깨끗하니까 걱정마세요.”“어머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난 이미 마음이 차갑게 굳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뜨거운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급히 티슈로 눈물을 닦고 나서 몰래 그를 바라봤다.그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훤칠한 기럭지를 뽐냈다. 다만 왜 이런 직업을 선택했는지 의문이었다.“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되었어요?”평소 과묵하던 내가 먼저 질문할 줄은 나조차도 생각지 못했다.“아버지 때문이에요. 당시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누구도 아버지의 모습을 복원할 수 없었거든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렇게 산산조각 난 채로 가신 걸 너무나도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때 다짐했죠. 훌륭한 입관사가 되어 내 손을 거치는 모든 자들이
내 시신은 임수혁이 일하는 장례식장으로 옮겨졌고 임수혁과 이하린이 함께 나의 유해를 정리하게 되었다. 그는 시신을 복원하는 일을 맡았고 이하린은 유품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원래 둘의 손발이 이렇게도 잘 맞았던 걸까? 그렇다면 왜 임수혁은 매일 집에 와서 그녀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을까?사람이란 어쩌면 가지지 못한 것을 항상 갈망하는 게 아닐까?“선배님, 언니 벌써 임신 3개월 차인데 너무 안타깝네요.”이하린은 내 부검 결과를 보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임수혁은 아무 말도 없이 여전히 내 두개골을 복원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만약 이하린이 내 유품을 정리하면서 핸드폰을 몰래 숨기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나 역시 그녀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내 머리는 산산조각 난 채 완전히 복원하는 것이란 불가능했다. 그저 대충 외형만 겨우 맞춰 놓은 상태였다. 그들 눈에 난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존재였기에 두려울 것도 없었다.임수혁은 내 두개골을 고정하기 위해 철사로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한편 이하린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리저리 주위를 훑어봤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죽은 내 심장을 다시 덜컥 가라앉게 만들었다.“선배님, 엄마의 병이 걱정돼서 그러는데 제가 듣기론 아직 형체가 갖춰지지 않은 태아로만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임수혁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이하린은 임수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풀이 죽어서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영혼이 된 나는 이미 평평해진 배를 만져보았다. 아이는 이미 나를 떠난 모양이었다. ‘죽어서도 내 아이는 나와 함께하지 않는구나.’“메스 가져와.”임수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구석에 앉아 있던 이하린은 그의 말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선배님, 메스는 왜요?”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는 이하린을 향해 무심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네 어머니 병을 고치려면 필요하잖아.”이하린은 너무 기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하며 메스를 가지
임수혁은 내 배에서 태아를 꺼낸 뒤 이하린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선배님, 따뜻한 물이에요.”이하린이 건넨 물을 바라보며 임수혁은 다정하게 그녀의 코를 터치했다.“한 번 얘기했을 뿐인데 기억하고 있었네.”‘어쩌면 여기도 임수혁의 집이었구나. 따뜻한 물은 어디서든 마실 수 있는 거였구나.’임수혁은 물을 마신 뒤 무언가 떠오른 듯 이하린의 만류에도 급히 떠났다.임수혁이 떠나자 이하린은 내 아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아가야, 네 엄마 참 못났네. 살아 있을 때 나한테 당하더니 죽어서도 널 지키지 못하잖아.”나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아이를 보며 손을 뻗어 안으려 했지만 계속해서 스쳐 지나갈 뿐 닿을 수 없었다.“엄마가 미안해. 무능한 엄마를 만나서 너까지 고생하는구나. 다음 생엔 좋은 가정에 태어나렴.”나는 아이 옆에 웅크리고 앉은 채 눈물을 훔쳤다. 죽어서도 슬픔은 지속되는 거였다.이하린은 소파에 앉아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엄마, 선배님이 엄마 병에 대해 물어보면 선배님이 준 약을 먹고 나서 많이 나아졌다고 말하세요.”나는 이하린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결국 그녀의 엄마는 태아가 필요하지 않았다.그녀는 임수혁을 위해서라면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마저 잔인하게 해칠 수 있었다.‘사람들 앞에서 한 모습이고 혼자 있을 때는 또 다른 모습이라니 피곤하지도 않은가?’“언니, 너무 다정하세요. 꼭 마치 제 친언니 같아요.”“이제부터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아무래도 안 되겠죠? 선배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테니.”“언니, 선배님과 꼭 오래오래 행복해야 해요.”항상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이하린에게 이토록 잔인한 모습이 있었다니 차마 믿을 수 없었다.아마 유체를 이탈한 나는 임수혁에게서 멀리 떨어질 수 없는 것 같았다. 이하린의 일에 대해 알아내기도 전에 어느새 다시 임수혁 곁으로 돌아와 있었다.임수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제야 나를 떠올리기 시작했다.그는 나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거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이하린과 함께 날 죽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걸까? 아직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우리 아이의 시신을 스스로 훼손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임수혁은 여전히 그 시신이 나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머리카락을 잡고 검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멈추더니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채 머리를 파묻고 오열하기 시작했다.‘그래, 누구의 유전자와 검사해서 확인할 수 있을까? 난 이미 고아인데.’어머니가 자살하던 날, 폭력적인 아버지마저 함께 떠나버렸다. 그녀는 내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민아야, 이제 너는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거야!”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실패한 결혼생활을 지켜보며 나는 연애와 결혼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러나 임수혁이 내게 다가오더니 세상에는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부부도 많다고 했다. 그의 부모님처럼 말이다. 단지 내 어머니가 운 나쁘게 폭력적인 아버지를 만났을 뿐이라고 했다.그는 자주 나한테 연락했고 둔감한 나조차 그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수혁아, 나 좋아해?”두려운 마음에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용기 내어 그에게 물었다.“민아야, 나 너 좋아해. 너랑 배신이라고 없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나는 그를 믿었다. 그리고 여러 번 그에게 말했다.“수혁아, 나한텐 너밖에 없어.”그와 했던 약속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듯했지만 임수혁은 이미 그 약속을 저버렸다.“수혁아, 민아는 어찌 된 거야? 집도 안 치우니? 꼴 좀 봐라.”“처음부터 난 걔가 마음에 안 들었어. 부모가 돌아갔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더니, 어찌나 소름 돋던지.”“역시 내 감이 맞았어. 결혼한 지 몇 년인데 애도 못 낳고.”“엄마는 그 하린이라는 애가 마음에 드는데. 성격도 좋고 민아처럼 어둡지도 않잖아.”“무엇보다 하린이는 아이도 잘 낳을 것 같아.”임수혁이 문을 열자마자 시어머니가 거실에서 끊임없이 나를 비난
이하린의 말에 현장에 있던 하객들은 숨을 들이마시며 급히 자리를 떠났다.“철썩!”임수혁은 화가 치밀어오른 채 이하린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 쥐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쇼하는 거예요?”“저 혼자서 바람피울 수 있어요? 아이도 오빠가 직접 빼낸 거잖아요. 임수혁, 넌 정말 남자도 아니야!”임수혁은 이하린의 말에 대꾸하지도 않은 채 그녀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놔! 이거 놔!”이하린이 아무리 저항해도 임수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하린을 끌고 옥상으로 향했다.“임수혁, 대체 뭐 하려는 거야?”이하린은 임수혁의 불안정한 상태를 느꼈는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는 이미 옥상 문을 잠근 상태였다.“우리 둘은 죄인이야. 여기서 민아랑 뱃속의 아이에게 속죄라도 하자.”임수혁은 말을 마치고 이하린과 함께 34층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이하린의 시신은 산산조각 났다.나는 그들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하린의 영혼이 사라지는 모습까지.어쩌면 그녀는 참 운이 좋았다. 그렇게 많은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한순간에 모든 죄가 사라졌으니 말이다.임수혁도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그는 28층 외벽 세척 작업자가 남겨둔 바구니에 걸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그의 영혼은 육체 곁을 떠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앞에 나타나자 그제야 그는 자신의 영혼이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듯했다.“민아야, 너 맞아? 혹시 나 데리러 온 거야?”나는 임수혁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민아야, 네가 남겨준 선물 봤어. 너무 감동이야. 고마워.”혹시 내가 갑자기 사라질까 봐 초조했는지 급하게 나를 붙잡으려 했다.하지만 그는 자신의 육체를 벗어나 멀리 갈 수 없었다. 몇 걸음만 움직여도 한계에 다다랐다.“민아야, 아직도 날 용서할 수 없는 거야? 나 이하린을 데려갔잖아.”나는 전혀
나는 결혼식장으로 정한 호텔마저 내가 결혼했을 때 호텔과 똑같은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수혁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야 했다.나는 예식장 구석구석을 떠다니며 살펴보았는데 메뉴마저 똑같았다. 참으로 이상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임수혁은 우리가 결혼할 때 입었던 정장을 입은 채 예식장에 꼿꼿이 서 있었다. 옆에는 몸에 맞지 않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이하린이 바짝 붙어 있었다.사회자가 몇 번이고 임수혁에게 시작하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하린은 초조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임수혁의 소매를 슬며시 당겼다.“오빠, 얼른 시작하죠. 하객들이 다 기다리고 있어요.”임수혁은 이하린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조금만 기다려줘. 곧 시작할 거야.”다정한 둘의 모습에 나는 시어머니가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냄새만 맡아도 군침이 돌았다.“장모님, 하린이가 그러던데 지난번에 태반을 드시고 많이 좋아지셨다면서요? 제가 더 가져왔어요.”하객들이 왜 식이 시작되지 않는지 궁금해하던 와중에 갑자기 스피커에서 임수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괜찮아. 이제 다 나았어.”뒤이어 여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아마도 이하린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치솟았다. 임수혁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우리 아이를 그만 보내줄 것이지 왜 계속해서 괴롭히는 거지?“장모님, 하린이가 분명히 태아가 제대로 형성되기 전에 먹어야 병이 낫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태반으로 바뀐 거죠?”이하린의 어머니는 당황한 나머지 이하린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대답하세요.”“오빠, 일단 결혼식부터 올리고 얘기해요, 네?”이하린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드러났다. 뻔뻔하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결혼식? 나랑 민아는 이미 8년 전에 결혼식을 끝냈어.”“이하린, 넌 그 시신이 민아인 줄 알고 있었지?”임수혁의 추궁에 이하
시어머니의 반응에 놀라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개라도 키우면 정이 드는 법인데 내가 죽고 나서 슬퍼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왜 살아있을 땐 조금이라도 잘해주지 않고 이제 와서 쇼를 하는 거지?“민아의 물건을 정리해야겠어. 민아가 저세상에서 물건이 없으면 어떡할 거야?” “이미 다 정리했어요.”임수혁은 소파에 앉은 채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시어머니는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고집스럽게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다시 집안 곳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수혁아, 어서 와봐.”나는 시어머니를 따라갔다. 아이 방에서 내가 임수혁을 위해 준비했던 서프라이즈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서프라이즈가 아니었다.거기엔 내가 임수혁을 위해 직접 짠 목도리가 있었다. 작년 가을, 임수혁의 인스타그램에는 가을 첫 목도리에 대한 게시물로 가득했다. 그는 여자 친구가 짜준 목돌이를 부러워하며 나를 끌고 상가에 가서 목도리를 샀다. 그러고는 여보가 직접 짜준 목도리라며 게시물을 올렸지만 오직 우리 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나는 손재주가 없다 보니 목도리를 짜는 게 엄청 어려웠다,어렸을 적에 아버지한테 맞아 손가락이 모두 부러졌던 탓에 겨우 일상생활만 할 수 있을 정도로 재활치료를 했지만 오랫동안 무언가를 잡고 있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목도리 하나를 짜는 데 무려 5개월이나 걸렸다. 그가 잠든 틈을 타 한 땀 한 땀 짠 목도리였다.“사랑하는 여보한테 주는 밸런타인데이 선물이야. 마음에 들어?”“그래도 너무 좋아하지는 마. 여보한테 줄 서프라이즈가 또 하나 있거든. 몇 달 동안 여보 몰래 한약을 먹으면서 얻은 선물이야. 확인해 보고 알려줄게.”임수혁은 내가 남긴 카드와 목도리를 안고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시어머니가 어떻게 끌어봐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쇼를 하는 걸까?’‘바람피울 땐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잖아.’나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뺨을 향해 내리쳤다. “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이하린과 함께 날 죽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걸까? 아직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우리 아이의 시신을 스스로 훼손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임수혁은 여전히 그 시신이 나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머리카락을 잡고 검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멈추더니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채 머리를 파묻고 오열하기 시작했다.‘그래, 누구의 유전자와 검사해서 확인할 수 있을까? 난 이미 고아인데.’어머니가 자살하던 날, 폭력적인 아버지마저 함께 떠나버렸다. 그녀는 내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민아야, 이제 너는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거야!”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실패한 결혼생활을 지켜보며 나는 연애와 결혼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러나 임수혁이 내게 다가오더니 세상에는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부부도 많다고 했다. 그의 부모님처럼 말이다. 단지 내 어머니가 운 나쁘게 폭력적인 아버지를 만났을 뿐이라고 했다.그는 자주 나한테 연락했고 둔감한 나조차 그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수혁아, 나 좋아해?”두려운 마음에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용기 내어 그에게 물었다.“민아야, 나 너 좋아해. 너랑 배신이라고 없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나는 그를 믿었다. 그리고 여러 번 그에게 말했다.“수혁아, 나한텐 너밖에 없어.”그와 했던 약속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듯했지만 임수혁은 이미 그 약속을 저버렸다.“수혁아, 민아는 어찌 된 거야? 집도 안 치우니? 꼴 좀 봐라.”“처음부터 난 걔가 마음에 안 들었어. 부모가 돌아갔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더니, 어찌나 소름 돋던지.”“역시 내 감이 맞았어. 결혼한 지 몇 년인데 애도 못 낳고.”“엄마는 그 하린이라는 애가 마음에 드는데. 성격도 좋고 민아처럼 어둡지도 않잖아.”“무엇보다 하린이는 아이도 잘 낳을 것 같아.”임수혁이 문을 열자마자 시어머니가 거실에서 끊임없이 나를 비난
임수혁은 내 배에서 태아를 꺼낸 뒤 이하린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선배님, 따뜻한 물이에요.”이하린이 건넨 물을 바라보며 임수혁은 다정하게 그녀의 코를 터치했다.“한 번 얘기했을 뿐인데 기억하고 있었네.”‘어쩌면 여기도 임수혁의 집이었구나. 따뜻한 물은 어디서든 마실 수 있는 거였구나.’임수혁은 물을 마신 뒤 무언가 떠오른 듯 이하린의 만류에도 급히 떠났다.임수혁이 떠나자 이하린은 내 아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아가야, 네 엄마 참 못났네. 살아 있을 때 나한테 당하더니 죽어서도 널 지키지 못하잖아.”나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아이를 보며 손을 뻗어 안으려 했지만 계속해서 스쳐 지나갈 뿐 닿을 수 없었다.“엄마가 미안해. 무능한 엄마를 만나서 너까지 고생하는구나. 다음 생엔 좋은 가정에 태어나렴.”나는 아이 옆에 웅크리고 앉은 채 눈물을 훔쳤다. 죽어서도 슬픔은 지속되는 거였다.이하린은 소파에 앉아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엄마, 선배님이 엄마 병에 대해 물어보면 선배님이 준 약을 먹고 나서 많이 나아졌다고 말하세요.”나는 이하린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결국 그녀의 엄마는 태아가 필요하지 않았다.그녀는 임수혁을 위해서라면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마저 잔인하게 해칠 수 있었다.‘사람들 앞에서 한 모습이고 혼자 있을 때는 또 다른 모습이라니 피곤하지도 않은가?’“언니, 너무 다정하세요. 꼭 마치 제 친언니 같아요.”“이제부터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아무래도 안 되겠죠? 선배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테니.”“언니, 선배님과 꼭 오래오래 행복해야 해요.”항상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이하린에게 이토록 잔인한 모습이 있었다니 차마 믿을 수 없었다.아마 유체를 이탈한 나는 임수혁에게서 멀리 떨어질 수 없는 것 같았다. 이하린의 일에 대해 알아내기도 전에 어느새 다시 임수혁 곁으로 돌아와 있었다.임수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제야 나를 떠올리기 시작했다.그는 나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거
내 시신은 임수혁이 일하는 장례식장으로 옮겨졌고 임수혁과 이하린이 함께 나의 유해를 정리하게 되었다. 그는 시신을 복원하는 일을 맡았고 이하린은 유품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원래 둘의 손발이 이렇게도 잘 맞았던 걸까? 그렇다면 왜 임수혁은 매일 집에 와서 그녀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을까?사람이란 어쩌면 가지지 못한 것을 항상 갈망하는 게 아닐까?“선배님, 언니 벌써 임신 3개월 차인데 너무 안타깝네요.”이하린은 내 부검 결과를 보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임수혁은 아무 말도 없이 여전히 내 두개골을 복원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만약 이하린이 내 유품을 정리하면서 핸드폰을 몰래 숨기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나 역시 그녀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내 머리는 산산조각 난 채 완전히 복원하는 것이란 불가능했다. 그저 대충 외형만 겨우 맞춰 놓은 상태였다. 그들 눈에 난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존재였기에 두려울 것도 없었다.임수혁은 내 두개골을 고정하기 위해 철사로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한편 이하린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리저리 주위를 훑어봤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죽은 내 심장을 다시 덜컥 가라앉게 만들었다.“선배님, 엄마의 병이 걱정돼서 그러는데 제가 듣기론 아직 형체가 갖춰지지 않은 태아로만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임수혁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이하린은 임수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풀이 죽어서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영혼이 된 나는 이미 평평해진 배를 만져보았다. 아이는 이미 나를 떠난 모양이었다. ‘죽어서도 내 아이는 나와 함께하지 않는구나.’“메스 가져와.”임수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구석에 앉아 있던 이하린은 그의 말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선배님, 메스는 왜요?”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는 이하린을 향해 무심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네 어머니 병을 고치려면 필요하잖아.”이하린은 너무 기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하며 메스를 가지
임수혁은 나를 찾지도 않고 씻고 나서 바로 침대에 누웠다. 나한테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통도 없었다. 내가 어디 갔는지 묻지도 않았다.사랑에 빠진 그의 그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사랑이 식은 게 너무나도 뻔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예전엔 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답장을 빨리하지 못하면 바로 전화를 걸어와 걱정하곤 했다. 가끔 전화를 받지 못할 때면 그는 자신의 일을 제쳐두고 회사까지 찾아와 확인할 정도였다.“여보, 아무리 바빠도 답장은 꼭 해줘.”“네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혹시 내가 귀찮아졌어?”“다음부터는 그냥 웃는 이모티콘이라도 하나 보내줘. 여보가 걱정돼서 그래.”...하지만 그는 이제 메시지를 보낼 의욕조차 없는 것 같았다.우리는 엄마 때문에 알게 되었다.엄마는 수십 년간 가정폭력을 견디다가 결국 옥상에서 뛰어내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체가 훼손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엄마의 입관을 맡은 사람이 바로 임수혁이었다.그는 경외와 연민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엄마의 시신을 맞춰갔다. 그 모습을 보며 엄마가 나에게 생명을 준 것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용이 아깝지 않은 실력이었다.“옆에 있는 티슈로 눈물 닦으세요. 깨끗하니까 걱정마세요.”“어머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난 이미 마음이 차갑게 굳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뜨거운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급히 티슈로 눈물을 닦고 나서 몰래 그를 바라봤다.그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훤칠한 기럭지를 뽐냈다. 다만 왜 이런 직업을 선택했는지 의문이었다.“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되었어요?”평소 과묵하던 내가 먼저 질문할 줄은 나조차도 생각지 못했다.“아버지 때문이에요. 당시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누구도 아버지의 모습을 복원할 수 없었거든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렇게 산산조각 난 채로 가신 걸 너무나도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때 다짐했죠. 훌륭한 입관사가 되어 내 손을 거치는 모든 자들이
임수혁은 겁에 질린 이하린을 집에 데려다준 뒤에야 돌아왔다.“민아야, 물 한 잔만.”이는 임수혁의 습관이었는데 집에 돌아오면 꼭 따뜻한 물을 마셔야 했다. 장례식장의 온도가 너무 차가워서 이렇게 해야만 집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하지만 대답 대신 집안을 가득 채운 건 고요함뿐이었다.우리는 아침에 이하린 때문에 크게 싸웠다.“여보, 하린이가 고열 때문에 병원에 혼자 있어. 선배인 내가 가봐야 할 것 같아.”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있는 임수혁을 바라보며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병원에 의사랑 간호사들도 있잖아. 여보가 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 게다가 밸런타인데이에 날 혼자 집에 두려고?”임수혁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민아야, 지금 하린이가 아픈데 네 머릿속엔 오직 밸런타인데이뿐이야?”“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야? 하린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걔가 알면 실망하겠어.”‘왜 하필 그녀는 밸런타인데이에 임수혁에게 전화했을까? 왜 아프면서까지 우리의 기념일을 망치려 한 걸까?’차라리 그와 함께 그녀를 돌보러 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임수혁이 문을 세게 닫고 나가는 바람에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켜버릴 수밖에 없었다.“해피 관람차로 와줘.”임신 소식을 알게 되자마자 임수혁한테서 메시지를 받았다.나는 그가 나랑 다투고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줄로 알고 있었지만 전혀 내 예상을 빗나갔다.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본 탓인지 현실에는 지고지순한 남자가 드물었다.나는 그들이 손을 잡고 관람차 6번째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랑 임수혁이 입 맞추고 포옹하며 영원을 약속했던 곳에서 말이다.병원에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왜 이곳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나는 마치 도둑처럼 8번 방에 앉아서 그들을 몰래 지켜보았다.관람차가 꼭대기에 도달하자 둘은 포옹하더니 진하게 키스하기 시작했다.‘그들 역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을까?’마치 나랑 임수혁이 처음
밸런타인데이, 나는 임수혁과 사랑을 약속했던 곳에서 관람차 좌석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그날 나는 아이까지 잃었다.그러나 남편인 임수혁은 그 순간마저도 이하린과 포옹한 채 진하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선배님, 제가 가만히 있었더라면...”나는 이하린이 임수혁의 품에 꼭 붙어 있는 걸 죽어서도 지켜보아야 했다. 다만 그녀는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난 그녀의 귓가에 대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래,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좌석이 떨어졌어. 네가 아니면 난 죽지도 않았을 거야!”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들을 수 없었다.“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안민아 명이 짧은 거지. 어차피 누군가는 이 좌석에 타고 있었을 거고 똑같이 죽을 운명이었을 거야.”임수혁은 이하린을 꼭 끌어안은 채 마치 내가 되살아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선배님, 저 무서워요.”“하린아, 눈 감아. 얼른 여기서 나가자.”임수혁은 이하린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파묻으며 꼭 끌어안았다.하지만 이하린은 조용히 머리 없는 내 시체를 바라보며 어렴풋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임수혁은 특이한 직업을 가졌다. 그는 장례식장에서 입관 작업을 맡고 있었다. 이하린은 새로 온 인턴이었고 올해 6월에 금방 대학을 졸업했다.이하린은 젊고 이뻤다. 임수혁은 그녀가 종종 멍청한 질문을 한다고 불평하기도 했다.“새로 온 인턴이 너무 멍청한 것 같아. 우리 일은 똑똑하고 세심한 사람이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우리에게 마지막을 맡긴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잖아.”초반에 그는 이하린이 멍청하고 세심하지 않다며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매일같이 불평했다.다만 나중에도 여전히 불평하고 있었지만 말투에는 어느새 애정이 담겨 있었다.“오늘도 하린이가 실수를 했어. 내가 눈치채고 도와줬기에 다행이지. 아니면 어쩔 뻔했겠어?”어쩌면 그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이내 얼굴을 들고 내 표정을 확인했다.사실 난 이미 그의 외도를 알고 있었기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왜냐하면 이하린이 직접 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