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의 가슴속에 불안감이 스쳤다. “근데 엄마는 예전에 그런 얘기 한 적 없잖아. 넌 어떻게 알았어?” 이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아이는 강지한에 대한 미움만 키울 테고 그런 감정이 자라게 해선 안 됐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강 대표님이 엄마한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글이 엄청 많아요.”심태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직접 강지한이 엄마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에 글들만 봐도 강지한이 엄마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 얼마나 고통을 주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는 다 사실은 아니야. 사람들 관심 끌려고 과장된 것도 많거든. 그런 글에 너무 휘둘리지 마.”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아들을 품에 안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이가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게 안타까웠다. 심미연은 앞으로는 아이 앞에서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 저 이제 다 컸어요.”심태하는 의젓하게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엄마, 드레스는 상미한테 줬어요. 상미가 제 생일 파티에 오기로 했거든요. 다른 친구들도 몇 명 초대해도 되요?” 심미연은 아들의 얼굴에서 순수한 기쁨이 묻어나는 걸 보고 마음이 흐뭇해졌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친구들을 초대하고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예전처럼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길 꺼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럼. 네가 초대하고 싶은 친구들 다 불러도 돼.”심미연은 따뜻하게 말했다.“근데 몇몇 친구들은 별로 안 좋아요. 자꾸 울고 떼쓰는 애들도 있어서 귀찮아요.” 심태하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심미연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좋아하는 친구들만 초대해.” 심태하는 심미연의 목에 팔을 두르고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엄마,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심미연은 품에 안긴 작은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태
박유진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심태하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해?” ‘이 아이, 너무 똑똑한 거 아닌가?’ ‘회사에 문제가 생긴 걸 어떻게 알아챈 거지?’ “아빠, 예전엔 집에서 저랑 놀 때 핸드폰도 무음으로 해놓고 저랑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아침 일찍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고 저랑 놀 때도 자꾸 전화받고... 게다가 전화를 받을 때마다 얼굴이 엄청 심각해 보여요.”아이의 논리 정연한 말에 박유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심미연도 옆에서 얼어붙었다. ‘이게 정말 세 살짜리 입에서 나올 말인가?’ ‘이 녀석, 천재 아냐?’ 박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우리 태하, 관찰력 하나는 끝내주네?” 심태하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누구 아들이에요?” 너무도 당당한 모습에 심미연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리 태하, 정말 최고다.” ‘이제 말까지 이렇게 능청스럽다니.’ 그때 심태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엄마, 아빠 밥 해준다면서요? 얼른 가서 해 주세요. 저랑 아빠는 남자들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까요.” 작은 손으로 심미연의 어깨를 토닥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꼬마 어른이었다. 심미연은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도 그를 흘겨보았다. “엄마한테 버릇없이 굴지 마.” ‘이 녀석 너무 버릇없어졌네.’ ‘근데 어쩜 이렇게 귀엽냐고.’“엄마, 미안해요. 다음엔 안 그럴게요.” 심태하는 급하게 사과했다. 아빠가 그랬다. 엄마가 화났을 땐 잘못이 있든 없든 무조건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아빠 말이라면 믿어야지.’ 심미연은 아들의 귀여운 모습에 마음이 살짝 풀렸다. 그녀는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엄마가 만들어 줄게.” 심태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밤에 많이 먹으면 살쪄서 멋지지 않아요.” 심미연은 순간 벙찼다. ‘이 녀석, 대체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거야?’
심태하의 영특함에 박유진조차 자주 감탄했다. 마치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꽃은 아빠가 직접 꽃집에 가서 사야 해. 아빠의 성의를 보여줘야지.” 박유진은 부드럽게 말했다. 심태하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빠 말대로 할게요. 아빠, 피곤하면 잠깐 쉬세요. 저는 내려가서 레고 할래요.” 하지만 박유진은 아들을 안아 들고 문을 열었다. “아빠도 같이 할 거야.” 심태하는 레고를 정말 좋아했다. 한 번 시작하면 완전히 집중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박유진은 회사 동료들이 아이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자주 말하는 걸 들었지만 심태하를 돌볼 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고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이마다 이렇게 차이가 클 수 있나?’ 두 사람은 거실로 내려가 놀이 매트 위에서 레고를 시작했다.방 안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하인들이 몰래 문을 열고 살짝 들여다봤다. 그들은 곧바로 카톡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백선영이 말했다. [사장님은 얼굴도 잘생기셨고 성격도 좋고 아내와 아들에게도 엄청 잘해주시네요. 이렇게 좋은 남자는 살면서 처음 봐요.] 진은숙도 한마디 했다. [맞아요. 우리 남자들은 능력도 없고 성격도 고약한데 담배, 술, 도박 하나 안 하는 게 없어요. 같은 여자라도 어찌 이리 운명이 다를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백선영이 말을 이어갔다. [사모님이 예쁘고 능력도 있잖아요. 이런 여자는 사장님 같은 남자와 정말 잘 어울려요.] 진은숙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사모님 성격이 진짜 좋더라고요. 말할 때도 부드럽고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쉽게 다가갈 수 있어요.] [듣자 보니 사모님이 굉장한 변호사라고 하던데.] 백선영이 또 덧붙였다. 진은숙은 놀라운 이모티콘을 몇 개 보냈다. [정말요? 이렇게 온화해 보이는 사모님이 변호사라니 전혀 상상이 안 가네요.]
심미연은 핸드폰 화면에 표시된 번호를 잠시 보고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혜윤 씨,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심미연 씨, 제 친구가 지금 혼수상태에 빠져서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있어요. 제발 와주실 수 있나요?] 장혜윤의 목소리는 마치 숨을 헐떡이는 듯 급박했고 그녀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그대로 느껴졌다. [어디 병원인가요?] 심미연은 전에 그녀가 말한 친구가 납치당했다는 얘기를 떠올리며 직감적으로 그 친구가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어떻게 그렇게 폭력을 일삼는 인간들이 많은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하병원이에요. 제발 빨리 와주세요.] 심미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혜윤이 친구를 치료해달라고 부탁했으니 이 기회에 그 여자가 나윤미인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만약 그 여자가 정말로 나윤미라면?’ 그렇다면 이건 정말 쉽게 해결될 일이 될 것이다. 전화를 끊고 심미연은 허리를 굽혀 심태하 앞에 무릎을 꿇고 부드럽게 말했다. “태하야, 엄마는 병원에 가야 해. 태하는 잠깐 놀고 나서 방에서 씻어야 해. 알겠지?” 심태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아빠가 데려다주게 하세요. 엄마 혼자 가는 건 좀 불안해요.” 그 말에 심미연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 아이는 어떻게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알겠어. 그럼 내가 아빠한테 얘기하고 올게. 태하는 놀고 있어.” 심미연은 말하며 그의 작은 몸을 감싸 안고 그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심태하도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건 사랑의 뽀뽀야. 엄마 화이팅!” 심미연의 눈가가 붉어지고 그의 몸을 더 꽉 안았다. “고마워, 아들.” ‘우리 아들은 어쩜 이렇게 멋지지?’ ‘그냥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 “엄마니까 저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요.” 심태하는 그녀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빨리
박유진은 장혜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며 마음속으로 의아함을 느꼈다. ‘오태진의 아내라니. 미연이는 대체 어떻게 이 여자를 알게 된 걸까?’ 오태진은 경성에서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었고 그의 아내가 이렇게 심미연과 친한 사이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태진은 아내를 극진히 아낀다는 소문도 자주 들었다. 심미연과 장혜윤이 이렇게 편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둘은 가까운 사이임이 분명했다. ‘내가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미연이가 다른 사람에게 억울하게 당할 일은 없겠어.’ 박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뒤 병원을 떠났다. 신미연은 장혜윤과 함께 병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응급실의 문이 열렸다. 장혜윤은 수술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급히 일어나 달려갔다. 하지만 의사는 그녀의 손에 병상 사망 통지서를 쥐어주며 서명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갑게 덧붙였다. “아이를 구할 수 없습니다.” 장혜윤은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심미연은 핸드폰을 꺼내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지한은 병원에서 강상미와 함께 있던 중 심미연의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그는 심미연을 보자마자 바로 물었다. “안에 있는 환자랑 무슨 관계야?” 심미연은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고 강지한은 곧장 의사들에게 그녀를 응급실로 데려가 수술을 맡기라고 지시했다. 심미연은 응급실에 들어가자마자 빠르게 수술복을 갈아입고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리고 수술대 위에 익숙한 얼굴을 보고 심호흡을 내쉬었다. ‘역시나 나윤미 맞네.’ 장혜윤은 응급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며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오태진과 결혼한 후 그녀는 주변 사람들과 멀어졌고 고위 간부 아내들 사이에서는 너무 어린 자신이 어울리지 않아 그곳엔 발도 들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나윤미와 가장 가까이 지내며 의지해왔기에 나윤미는
심미연은 아름다운 도화 눈으로 강지한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예전에 우리가 부부였을 때도 한 번도 날 신경 쓴 적 없잖아.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닌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설마 네 딸 수술을 나한테 맡기려고 하는 거야?” 애초에 그녀는 강상미의 수술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건 ‘심미연’이 아닌 명의로서 하려던 계획이었다. 강지한은 그녀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히고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정말 너한테 상미 수술을 부탁하고 싶다면?” 그래도 한때는 그의 아내였던 사람이다. 어차피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면 정체불명의 명의보다는 차라리 심미연이 나았다. 그날 명의는 얼굴을 꽁꽁 싸맨 채 강상미를 진찰했고 강지한은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진찰하는 동안엔 아예 그를 내보내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지만 최근 박시훈에게 명의의 연락처를 알아보라고 했음에도 끝내 알아내지 못하자 그는 점점 명의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심미연이 강상미의 수술을 맡아준다면 굳이 명의를 찾아야 할 이유도 없어졌다. 이미 지급한 계약금 정도는 포기해도 상관없었다. “네가 이노하이브 지분 15%를 나한테 넘기겠다고 하면 한 번 고려해볼 수는 있어.” 심미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동의하면 임현 씨에게 계약서 초안을 준비하게 할 거야.” 강지한은 예전에 임현에게 소송을 맡겼던 일이 떠오르며 잠시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심미연, 너 천성 로펌의 변호사인 걸 왜 나한테 미리 말해주지 않았어?” 그는 심지어 이 여자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냥 내 웃음거리를 보고 싶었던 건가?’“네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내가 왜 내 일에 대해 너한테 말해야 돼? 네가 나한테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잖아?”심미연은 그의 말을 단호하게 되받아쳤다. ‘이 남자, 아직도 내가 예전
“안 데려다줘도 돼. 필요 없다고 했잖아.” 심미연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를 지나쳐 앞쪽으로 걸어갔다. 강지한은 그녀를 재빨리 따라잡아 손목을 꽉 잡았다. “심미연,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가는 건 위험해. 그것도 몰라?” 게다가 이 여자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는 게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내 일에 간섭하지 마.” 심미연은 짜증이 나서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강지한, 제발 좀 귀찮게 하지 마! 우린 이미 이혼했잖아. 왜 아직도 이러는 거야?” 강지한의 행동은 심미연을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녀의 거절이 계속되자 강지한은 얼굴에 민망한 기색이 떠올랐다. “심미연, 난 그저 널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은 것뿐이야. 아무 뜻도 없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알아 들었겠지?’“안 데려다줘도 된다고 했잖아. 강지한, 사람 말 못 알아듣는 거야?” 심미연은 강지한의 말에 조금도 겁먹은 기색 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예전의 강지한은 그녀에게 관심도 없었는데 이제는 꼼짝없이 그녀에게 들러붙어 매일같이 그녀를 쫓아다니는 모습이 심미연에게는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은 얼굴이 굳어졌다. “심미연, 내가 너 생각해서 이렇게 하는 거잖아. 뭐가 불만이야?” 그는 분명 그녀에게 잘해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강지한은 심미연을 마주할 때마다 힘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엔 내 말이라면 다 듣던 여자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그냥 내가 불만이 많은 걸로 하자.”심미연이 말을 끝내자마자 손목이 잡히고 귀에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가자.” 따뜻한 손길이 손바닥을 통해 퍼져 나가며 그녀의 몸 속까지 온기가 전해지듯 점점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심미연은 돌아서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빠, 왜 여기 있어?” “계속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박유진은 그녀를 품에 끌어당기며 부드럽게 말했다.
강지한은 심미연이 자신에게 손을 댈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자 간신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여자가 남자의 입술을 닦아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강지한의 눈은 혈안이 되어 붉어지고 온몸의 피는 끓어오르며 가슴속에서 뚫인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심미연은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했었잖아.’ ‘도대체 어떻게 변할 수 있지?’ ‘아니야. 심미연이 변한 게 아니야. 박유진이 심미연을 강제로 데리고 있는 거야.’ ‘그래. 그게 맞아.’ 그때 성무진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셔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강지한은 그 말에 반응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심미연, 돌아와. 가지 마. 널 보내지 않을 거야.” 성무진은 강지한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며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랐다. 그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예전엔 대표님이 사모님을 떠나고 싶어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애절하게 잡으려 하다니. 무슨 의미일까요?’ ‘어떤 사람은 한 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인데...’ ‘대표님처럼 똑똑한 분이 왜 그런 걸 못 깨닫는 걸까요?’“성 비서, 빨리 아래로 내려가서 심미연을 데려와. 상미가 갑자기 호흡이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해. 어떻게 된 건지 와서 봐 달라고 해.” 강지한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손을 휘저으며 급하게 말했다. 성무진은 거절할 수 없어 어쩔수 없이 대답했다. “그럼 대표님은 병실로 돌아가셔서 쉬세요. 제가 바로 심미연 씨를 쫓아가겠습니다.” “빨리 가. 심미연이 떠나지 못하게 해.” “알겠습니다.” 성무진은 급히 말을 마친 뒤 서둘러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성무진은 계속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이 이렇게 변했다는 건 심미연 씨에게 마음이 생긴 걸까?’ ‘하지만 심미연 씨는 분명 대표님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대표님이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
“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온지유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애교가 섞여 있었다. 지금의 온지유에게 육현성은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를 잃는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육현성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됐다. ‘심미연, 기다려. 복수할 기회는 반드시 만들 거야.’“세상에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온지유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유야, 그런데 만약 네가 날 배신한다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어.”육현성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경고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너무 깊어서 그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더더욱 만약 온지유가 그를 배신한다면 그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팔이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걸 느낀 온지유는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강지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그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오빠, 걱정하지 마. 난 절대 오빠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이번 생엔 오빠만 사랑할 거고 영원히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온지유는 속마음을 감추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육현성 앞에선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 그의 말은 무엇보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유야, 이제 좀 쉬어. 나는 아래층 좀 보고 올게. 밥 먹을 때 부를게
보통이라면 그녀가 화를 내면 강지한은 한 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소영은 성무진을 보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며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차갑고 무표정한 시선만이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성무진은 그녀 앞에 서서 공손히 손짓하며 말했다. “큰 사모님, 모시겠습니다.”문소영은 강지한을 향해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강지한! 너 계속 이렇게 나를 몰아붙인다면 정말 당장 죽어버릴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책상 쪽으로 달려가 머리를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려 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성 비서, 데려가.”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는 문소영의 모습이 점점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성무진은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큰 사모님.” 그 말과 함께 그는 차가운 손길로 문소영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 당장 놔!” “손 떼! 지금 당장!” 문소영은 크게 외치며 저항했지만 성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거칠게 차에 태웠다. 차에 태운 후 성무진은 팔을 놓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문소영은 재빨리 차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큰 사모님, 죄송합니다.”성무진은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문소영은 그대로 기절했다. 성무진은 그녀를 차 안에 눕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 밖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역시 대표님을 화나게 하면 끝이 좋을 리가 없지.’‘어쩔 수 없군.’ 그 순간, 성무진은 갑자기 떠오른
도진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는 진지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신하린 곁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어제 하린이를 하늘 하우스로 데려갔어요. 한 번 들러보세요. 하린이 곁에 조금 있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미연은 서류봉투를 흘깃 바라본 뒤 덧붙였다. “이 서류는 제가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다시 연락드릴게요.”도진혁이 직접 합작 제안서를 들고 찾아온 이상 함부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수익이 보장된 일이라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놓쳐선 안 되는 법이었다. “네.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도진혁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심미연은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참 바라보다 방금 전 그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에서 조용한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린이 목에 남은 상처가 아직 그대로일 텐데...’‘진혁 씨가 그걸 보면... 혹시 이진영 씨에게 따지러 가는 건 아닐까?’강지한 사무실.성무진은 문소영을 데려다주고 서둘러 떠났다. 강지한의 얼굴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성무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무실 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문소영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느긋하게 쏘파에 앉았다. “비서한테 차 좀 가져오라 해. 괜찮은 차로.” 그녀는 비서부가 꽤 유능하단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웬만한 건 다 알아서 해줄 정도로. 하지만 강지한은 말없이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 그 봉투를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직접 보시죠.”“뭘 보라는 거야?” 문소영은 그를 향해 냉정하게 시선을 던졌다. “보면 알아요.” 강지한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뭐가 들어있길래...?” 문소영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봉투를 들었다. 무
심미연은 박유진이 수년 동안 마음을 다해 사랑해온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박유진이 쉽게 놓을 리 없었다.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던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 정말 모든 걸 걸고 계시는군요... 제발 심미연 씨가 그 진심을 외면하지 않기를...”한편, 심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세요.”조심스레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진혁이었다. 그는 마치 급히 돌아온 듯 피곤하고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도 비서님...?” 심미연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휴가를 낸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그의 뒤에서 따라 들어온 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심 대표님, 실례하겠습니다. 이분은 저희 도강홀딩스의 대표, 도진혁 대표님이십니다.”비서는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서류는 도강홀딩스와 은성 그룹이 합작할 프로젝트에 관한 제안서입니다. 먼저 검토 부탁드립니다.”심미연은 비서가 놓고 간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도진혁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도진혁 대표님...?’ ‘그렇다면 도진혁 씨가 휴가를 낸 이유는... 회사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였던 건가?”그때 도진혁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최 비서, 잠깐 나가 있어. 심 대표님과 단둘이 얘기할 게 있어.” 도진혁은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평소보다 더 단정하고 신경 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은 여유롭고 예의 바르며 그에게서 흐르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 엘리트의 품위였다. “네. 대표님.” 최세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조심스럽게 심미연을 한 번 쳐다봤다. ‘이분이 대표님이 좋아하는 여자분인가... 정말 예쁘다. 대표님이 회사를 물려받은 이유가 이분 때문이라면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