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 너 뭐 하는 거야? 어머니를 네가 왜 몰래 만나!” 마음이 급해진 온지유는 임현을 한 번 노려보고는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새로 온 기 센 팀장 때문에 이미 혼이 반쯤 나가 있던 임현은 그녀가 나가자마자 긴 한숨을 내뱉었다.한편 사무실을 나와 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온지유는 다급하게 협박조로 말했다.“심미연, 당장 로펌으로 돌아와. 내 말 안 듣고 계속 어머니 만나면 너 지금 바로 해고할 거야!”대답하기도 귀찮았던 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길 건너에 있는 리우로펌을 한 번 바라보았다. 예쁜 눈으로 그곳을 한참동안이나 주시하던 심미연은 익숙한 인영이 급히 정문을 나오는 게 보이자 그제야 몸을 돌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문소영은 한참 만에 온 그녀를 보며 얼굴을 찡그린 채 짜증부터 냈다.“그냥 길만 건너면 되는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너 때문에 30분이나 기다렸잖아. 할아버님이 너 감싸주신다고 내가 너 못 건드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문소영 맞은편의 의자를 꺼내며 앉던 심미연은 웃으면서 말했다.“들어오려고 했는데 우연히 의뢰인을 만나서 잠깐 얘기했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여사님.”공손하면서도 친절한 태도였지만 문소영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차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가 직접 일해서 번 돈? 고작 그거 가지고 가방 하나는 사겠니?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렇게 유세야, 안 부끄러워?”심미연은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쓸데없는 말들만 늘어놓는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어머니와 싸우는 건 옳지 않았기에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강지한 씨랑 저 사이엔 아무 감정도 없는 거 여사님도 아시잖아요. 그 사람한테 못 기대니까 제가 직접 벌어야죠.”강지한 매달 주는 2천만 원은 전부 집에 들어가는 돈이었기에 심미연 본인의 차 할부, 생활비, 기름값 등 나머지 지출은 심미연이 직접 벌어야만 했다. 강지한에게 손을 벌리는 건 심미연도 원치 않았고 손을 벌린다 해도 줄 강지한이 아니었다.심미연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문소
자신과 강지한의 결혼으로 인해 친조카 일은 포기한 줄로 알았는데 오늘 문소영의 태도를 보니 아직도 계획 중인 것 같았다.3년 동안 잠잠하다가 이번에 찾아온 것도 할아버님이 주식을 주시니 계획을 서둘러야겠다 싶어서 온 것 같았다.문소영이 이토록 이혼을 재촉하는 건 이혼을 해야 다른 여자를 강지한의 침대에 올려보낼 수 있어서 일 것이다.심미연이 강지한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니까.“누가 불륜이고 누가 사실혼이야.”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심미연은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강지한인데 그가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의아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하지만 심미연은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돌려 예쁜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여기 공공장소인데 그런 얘기는 자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너 어떻게 지한 씨를 두고 그런 얘기를 해? 지한 씨가 너한테 얼마나 진심인데, 미안하지도 않니?”그때 또 슬픈 척 연기를 하며 끼어드는 온지유에 심미연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네가 무슨 염치로 감히 그런 말을 해?”“기사에 얼굴 비추고 싶은 거면 말만 해. 너희가 방을 몇 번이나 잡았고 선물은 또 몇 번이나 오갔는지 내가 하나하나 다 읊어줄 테니까.”“미연아,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왜 자꾸 모함하는 거야, 나 이제 더는 내 명예 실추시키고 싶지 않아.”그에 온지유가 눈시울 붉힌 채 몸을 떨어대자 심미연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누가 널 모함해,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유언비어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저렇게 마음껏 떠들어대는 온지유가 심미연은 추해 보이기만 했다.하지만 온지유는 자신의 연기를 계속 이어나갔다.“네가 며칠 전에 기사 올려서 나 상도 취소될 뻔했어. 다행히 상은 지켰지만 이제 무용단에도 못 돌아가게 생겼어. 우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다고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흥분했는지 말을 하면서 딸꾹질까지 해대는 모습이 남이 보기에는 아주 가여워 보였
가시지 않는 고통에 심미연은 희미해진 시야에 강지한을 담으며 말했다.“쟤가 연기하는 건 눈에 안 보여?”강지한처럼 똑똑한 사람이 온지유의 얕은수를 못 보아낼 리 없었지만 강지한은 늘 그녀에게 속아줬었다.그러면서 상처를 입은 자신한테만 이토록 가혹했다.아무리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사람이면 걱정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지유는 쓰러지려고 했고 너는 멀쩡히 서 있잖아, 지금 나 안 따라 나오면 내일부터 출근 못 하게 될 거야.”내연녀가 아내에게 누명을 씌우는 걸 보고만 있으면서 내연녀를 감싸기 위해 일로 협박까지 해오는 강지한과 자신이 처한 우스운 상황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던 심미연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공사는 명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내 착각이었나 보네.”“지유 쓰러지잖아, 얼른 병원부터 보내. 미연이는 내가 잘 돌려보낼게.”그때 방관만 하던 문소영이 갑자기 입을 열자 강지한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엄마가 어른인데 뭐하러 여기까지 찾아와요.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요, 내가 심미연 데리고 가면 돼요.”강지한은 이내 심미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나갔다.“계속 버티고 있으면 지유 잘못되라고 일부러 시간 끄는 걸로 생각할 거야.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잖아. 너 감당 할 수 있겠어?”차갑기만 한 게 아니라 시리기까지 한 말에 심미연은 한기가 피부를 뚫고 뼈를 타고 온몸에 전해지는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가슴에서 느껴지던 통증도 이젠 무뎌지고 그저 치가 떨리게 시린 느낌만이 몸을 에워싸고 있었다.온지유가 기절한 척 연기하는 것만 아니었으면 잔인한 강지한의 말에 진작에 웃음을 터뜨리고도 남았을 것이다.한편 문소영은 심미연과 대화하는 강지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의 속내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워낙 속마음을 감추는데 능숙한 강지한이라 그녀는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했다.하지만 이상하게 어딘가 찝찝했다.“심미연.”그때 강지한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심미연을 부르자 심미연
어쩐지 3년 동안 그 흔한 파티하나 참석하라는 말이 없다 했는데 그게 다 자신이 예의를 몰라서 강씨 집안 얼굴에 먹칠이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였다는 걸 심미연은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물론 집안에서는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았던 건 맞지만 그래도 외할머니랑 살면서 할머니가 사람까지 붙여줘서 웬만한 건 다 교육을 받은 상태였다.웃는 모습부터 인사, 식사예절까지 빠지지 않고 다 배워서 어느 재벌 집 딸들과 비겨도 뒤지지 않을 자신은 충분했다.강지한과 결혼한 뒤에도 늘 행동거지에 심혈을 기울이며 나름대로 재벌 집 사모님 노릇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그건 다 저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강지한에게 저는 그저 잠자리 상대에 불과한 것 같았다.침대 위에서는 그 어떤 예의도 필요하지 않았으니까.한편 심미연에게 예절을 가르치라는 강지한의 말에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 문소영이 웃으며 대꾸했다.“그래, 내가 시간 내서 잘 가르쳐놓을게.”“그럼 좀 서둘러주세요, 얼마 뒤에 한원 그룹 어르신 생신이신데 그날 심미연도 데려갈 거에요. 엄마가 잘 가르쳤는지 그날 확인할게요.”심미연을 한원 그룹 회장의 생일파티에 데리고 가는 걸 지금 결정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강지한이었지만 그의 품에 안긴 온지유는 무언가 이상했다.하지만 굳이 또 어디가 이상하다고 짚어낼 수는 없어서 그저 눈을 감고만 있었다.문소영은 온지유를 안고 있는 강지한을 보며 문득 심미연이 불쌍하게 느껴졌다.남편 사랑을 못 받으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게 여자인데 그런 상황에 닥친 게 심미연이라 같은 여자로서 생긴 측은지심인 것 같았다.할 말을 마친 강지한은 온지유를 안고 카페를 나섰다.카페 앞에는 심미연이 서 있었는데 가만히 서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얌전해 보여 그녀의 외모만 봐서는 그녀가 법정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는 변호사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강지한은 그런 심미연을 보며 그녀에게로 다가가 말했다.“가서 차 가져와.”그 목소리에 생각을 멈
“그래, 온지유는 남이 아니라 당신 여자지, 내가 남이야!”강지한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을 마친 심미연은 바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여기서 더 말하면 그에게 손을 댈 것만 같아 간신히 참은 건데 양심이라고는 없는 강지한은 또 한숨을 쉬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심미연, 너 진짜 속 좁은 거 알아?”온지유는 강씨 집안 족보에 이름을 올린 한 집안사람인데 그녀에게만 매정한 심미연이 강지한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의 말에 발걸음을 멈춘 심미연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렇게 내가 형님보다 못난 사람인 것 같으면 빨리 서류에 사인이나 해, 이혼하고 각자 갈 길 가자.”강지한은 이혼서류에는 사인도 안 하면서 또 이래저래 꼬투리만 잡고 있었기에 심미연은 그가 자신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런다고만 생각했다.“이혼 얘기 한 번만 더해.”하지만 강지한은 강지한대로 이혼을 시도 때도 없이 입에 올리며 결혼을 애들 장난으로 생각하는 심미연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낮은 목소리로 화를 참으며 말했다.강지한이 막무가내로 나오자 심미연도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이혼 얘기 듣기 싫으면 너부터 온지유랑 거리 유지해, 둘이 같이 기사에 오르는 거 나 더는 못 봐줘. 약속하면 나도 이혼 얘기는 안 꺼낼게.”일말의 보장도 없는 결혼생활은 심미연에게도 고통에 불과했기에 결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심미연...”강지한이 그 말에 대답하려고 할 때 그 품에 안겨있던 온지유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지한 씨, 여기 어디야? 나 쓰러졌었어?”지금 눈을 뜨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의 말에 응할 것만 같아 온지유는 연기도 집어치워 버렸다.정말 강지한이 심미연 말대로 자신과 거리를 두면 둘 사이는 여기서 끝이 날 것만 같아서 일단은 그걸 막는 게 먼저였다.강지한도 그제야 온지유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너 아까 쓰러졌었어. 괜찮아? 병원 갈까?”“저혈당으로 쓰러진 걸 거야. 괜찮으니까 병원은 안 가도 돼.”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고개를
일부러 보란 듯이 잘난 척하는 심미연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강지한에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온지유가 또 떼를 쓰기 시작하자 강지한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알겠다고 할 뿐이지 그걸 꼭 다 지킨다는 건 아니야. 너 지금 임산부야,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하면 배 속의 아이한테도 안 좋아.”그의 말을 들은 온지유는 눈물을 도로 집어넣으며 다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알겠어, 감정 조절 잘할게.”사실 온지유의 기분은 강지한의 태도에 의해 좌우지됐지만 온지유는 그걸 사실대로 말하진 못했다.“넌 이제 로펌으로 가, 나 심미연이랑 얘기 좀 할게.”“지한 씨는 진짜 안 가? 같이 가자, 응?”온지유는 강지한의 팔을 잡고 그를 올려다보며 졸라대고 있었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강지한이 온지유를 거절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굳이 듣지 않아도 대답이 어떨지는 이미 예상이 갔다.“알겠어.”역시나, 예상한 대답을 뱉어내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하지만 강지한에게 버려지는 건 3년 동안 자주 겪어온 일이었기에 별로 큰 상처는 아니었다.“지한 씨, 나 좀 어지러운데 부축 좀 해줘.”그 대답에 만족스럽게 웃은 온지유는 강지한의 손을 잡으며 그가 보지 못하게 심미연을 향해 웃어 보였다.이긴 건 나라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의 웃음이었다.“가자 그럼.”하지만 온지유의 도발에도 심미연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본 강지한은 그 평온한 표정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미연아, 같이 가자.”그때 온지유가 보란 듯이 손을 저으며 자신을 부르자 심미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가버렸다.그리고는 강지한과의 이혼에 더욱더 확신을 가졌다.앞으로 이런 모습을 더 보다가는 정말 암이라도 걸릴 것 같아서 몸을 위해서라도 이혼만이 답인 것 같았다.한편 미련 없이 돌린 등을 보며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주름이 새겨질 정도로 깊게 찌푸린 미간을 한 채 심
“심미연 씨, 듣고 있어요?”그에 정신을 차린 심미연이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서둘러 가방을 챙긴 뒤 방을 나섰는데 마침 들어오고 있던 강지한과 온지유를 마주쳐버린 것이다.심미연은 못 본 척 지나치려고 했지만 온지유는 당연히 그녀를 쉽게 보내줄 리가 없었다.“심미연, 너 또 어디가?”“병원.”온지유의 말에 발걸음을 멈춘 심미연이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그리고 강지한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신약 얘기를 꺼내려고 시도해봤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래서 일단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고 정 방법이 없으면 그때 강지한에게 말하기로 했다.예전 같았으면 할머니 병세에 대해 전해 듣자마자 강지한을 떠올렸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심미연의 말에 강지한은 전에 성무진에게서 들었던 심미연 외할머니 병에 대해 떠올렸다.아마도 신약이 필요한 것 같은데 심미연은 돈을 들여 다른 약을 사들일지언정 저에게는 절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그게 또 선을 긋는 것 같아 강지한은 강지한 나름대로 못마땅했다.“할 얘기 있으니까 얘기 마치고 가.”온지유는 말을 하면서도 옆에 서 있는 남자의 눈치를 봤다.혹여나 심미연이 아까 한 말을 들었을까 봐 쳐다본 건데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는 강지한은 들었어도 도와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나 지금 급하니까 나중에 얘기해.”한 시간 전에 같이 다니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서 이렇게 다정한 부부마냥 온지유와 한 프레임에 서 있는 강지한에 역겨워 난 심미연은 무표정으로 대꾸했다.“미연이 화난 것 같은데, 지한 씨가 나 데려다줘서 그런 거 아니야?”제가 뻔히 듣고 있는데 일부러 강지한을 보며 말하는 온지유에 심미연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딴 거 신경 안 쓰니까 어디 사무실에라도 들어가 있어. 여기 계속 서 있으면 또 우리 삼각관계에 대해서 다들 수군댈 거야. 앞으로 누가 또 내가 강지한 침대에 기어올랐다느니 뭐니 하는 헛소문 퍼뜨리면... 그땐 혼인신고서 단톡방에 뿌려버릴 거야.”할머니
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며 말했다.“내가 급한 일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날 못 가게 막은 게 온지유야. 할머니가 응급실에서 수술 기다리시는데 이 상황에 내가 어떻게 걔 말에 따라! 온지유가 무시당하는 게 그렇게 마음 아프면 그냥 회사 보내지 말고 끼고 살아, 당신 돈으로 얼마든지 책임질 수 있잖아.”심미연의 할머니가 응급수술에 들어가야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던 강지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나 이제 가도 될까? 이러다 할머니 마지막 모습도 못 볼 것 같아서 그래.”말을 마친 심미연은 눈물을 닦으며 방을 나왔고 그에 문에 기대어 엿듣고 있던 온지유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심미연이 이미 멀리 간 뒤라서 바로 심미연을 부르려고 했는데 그 순간 강지한이 방에서 나오는 바람에 온지유는 바로 그에게로 달려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지한 씨.”“앞으로 심미연이 어디 가겠다고 하면 그냥 보내줘, 쟤 너한테 허락 맡을 이유 없어.”저를 한번 보며 저런 말만 남기고 가버리는 강지한에 온지유는 화가 나 이를 갈기 시작했다.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화가 나 있었는데 왜 나올 때는 태도가 180도로 변한 건지 온지유는 의아하기만 했다.한편 차를 몰고 주차장을 나서던 심미연은 제 앞을 가로막아버리는 강지한의 벤틀리에 경적을 울렸지만 전혀 비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운전석의 창문을 두드렸다.“사모님!”성무진은 심미연의 모습에 깍듯하게 인사부터 건넸다.“문 열어요.”말을 마친 심미연이 뒷좌석으로 가 문을 당기자 안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는 강지한의 모습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날 보내줄 거야...”“타.”키보드를 두드리며 고개도 들지 않고 명령조로 말하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나 지금 급해, 할 얘기 있으면 밤에 하자.”할머니가 응급수술을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했는데도 제 앞길을 막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그가 온지유가 받은 서러움을 되갚아주려고
신하린의 눈빛은 마치 두 개의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조금의 온도도 없이 이진영의 깊은 눈동자를 찔렀다. 그 눈빛에는 의외와 분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가 가득했다.“무슨 일이 있어요?”그녀의 말은 나지막하고 힘차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이 사이로 비집고 나온 듯 거부할 수 없는 무거움을 띠고 있었다.이진영은 몸을 살짝 움직였다. 그녀가 이 한마디를 뱉는 순간 그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암울하게 변했고 마음속에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그는 한 걸음 천천히 앞으로 내디디며 꿈에도 그리지만 아득히 먼 이 그림자에 접근하려 했지만 신하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담함과 거부감은 보이지 않는 장벽처럼 그를 격리했다.“괜찮으시다면 먼저 나가서 기다렸다가 나중에 들어오세요!”그녀가 계속 말했다. 말투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확고함과 결단만이 있었다.그녀의 두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핏줄이 하얀 손등에 내비쳐 그녀의 마음속 거친 정서를 드러냈다.이 순간, 그녀는 더는 그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니라 복수의 사신으로 변신하여, 죽은 절친을 위해 따지려는 듯했다.이진영의 마음이 아프게 조여왔다. 그는 신하린의 증오로 가득 찬 두 눈을 바라보며 전례 없는 무력함과 고통을 느꼈다.그는 앞으로 나가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위로해주고 싶고그녀와 얘기도 하고 싶었지만 신하린의 눈빛은 너무 차가웠다.두 사람은 이렇게 대치하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긴장과 억압이 가득 차 있어 마치 시간조차 이 순간에 정체된 것 같았다.“왜 아직도 안 가?”신하린이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더는 이 남자와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는 복수의 불길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이진영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충격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이왕 만났으니 우리 얘기 좀 할까?”신하린은 가슴이 아파지는 걸 느끼며 입을 벌리고 그를 불렀다.“진영 씨.”그녀의
짝! 짝!맑은 따귀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서 터져 마치 여름에 갑자기 닥친 천둥소리처럼 사람의 마음을 떨리게 했다.신하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머금은 두 눈엔 억울함과 한이 반짝이였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흐느낌을 참으며 마치 모든 억울함과 고통을 이 간단한 동작을 통해 털어놓으려는 것 같았다.강지한은 눈앞에 별이 보이도록 얻어맞았지만 그 따가운 통증이 뺨에 번지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의 파도를 가라앉히려 했다. 머릿속에는 꽃처럼 예쁘게 웃고 있는 심미연의 모습이 떠올랐고 심미연의 부드러운 말투, 그리고 함께 보낸 따스한 시간이 조수처럼 밀려와 그를 파묻었다.“만약 심미연이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이런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낮고 잠긴 목소리에는 끝없는 슬픔과 후회를 품고 있었다.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멍한 눈빛으로.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많은 장애물을 뚫을 수 있는 것처럼 이미 멀어졌지만 영원히 그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그 모습을 보았다.그런 그의 모습에도 신하린의 마음속 분노는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용솟음쳤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서 두 손을 주먹으로 꼭 쥐었다. 손끝은 너무 힘을 주어 하얗게 질렸지만 목소리는 떨리면서도 확고했다.“강지한 씨, 무슨 자격으로 미연이를 언급해요? 강지한 씨가 뱉는 모든 글자가 미연이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이에요!”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그 순간 더 격렬한 충돌이 일어날 것처럼 극도로 팽팽해졌다.그러나 바로 이 긴장된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강지한이 갑자기 웃었다. 그것은 일종의 씁쓸하고 자조적인 웃음이었다.“그래요.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내가 미연이를 죽였어요.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반드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신하린은 모든 슬픔을 삼킨 것 같은 강지한의 얼굴을 보고 입가에 시큰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 속에는 풍자와 경멸이 숨어 있었는데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졸렬한 연기를 비웃는 것 같았다.“허, 정말 가소롭네
성무진은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뻗어 신하린을 붙잡았다.“신하린 씨,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신하린은 갑자기 입을 벌리더니 성무진의 손을 한입 물었다.“놔요!”성무진이 아파서 손을 놓자 신하린은 또 강지한을 덮쳤다.순간 강지한이 갑자기 그녀를 노려보았다.그 눈빛이 너무 매서워서 신하린은 바로 걸음을 멈추었다.“신하린 씨, 지금 하린 씨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 일은 우리 강 대표님과 무관해요.”성무진은 황급히 입을 열어 강지한을 대신해서 설명했다.신하린은 몸을 곧게 펴고 머리카락이 국에 젖은 강지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강지한 씨가 온지유를 밑도 끝도 없는 포용하지 않았다면 온지유가 어떻게 감히 미연이 앞에서 그렇게 날뛰고 방자할 수 있겠어요? 강지한 씨가 미연이를 믿지 않은 게 아니었다면 미연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억울함을 당할 수 있었을까요!”“강지한 씨, 그거 알아요? 미연이는 강지한 씨를 꼬박 10년 동안 사랑했어요!”심미연은 26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러니 계산해 보면 심미연은 정말 강지한을 10년 동안 사랑했다.결국 그녀는 10년 동안 자신을 다른 세계로 보내버렸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강지한의 차가운 표정이 마침내 흔들렸다.심미연이 그를 10년 동안 사랑했다니, 이것은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성무진도 놀란 표정이었다.강 대표님의 부인이 강 대표님을 10년 동안 사랑했다니.10년이란 시간은 참 긴 세월인데 말이다.“강지한 씨, 나도 알아봤어요. 온지유가 안에서 맛있는 걸 먹으며 잘 지낸다는데 이렇게 하면 미연이게게 미안하지 않아요?”신하린은 화가 난 나머지 눈물이 흘러 내렸다.그 악독한 여자가 미연이와 외할머니를 죽였는데 어떻게 멀쩡하게 살아있단 말인가! 빌어먹을!강지한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그는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기에 온지유의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성무진은 그제야 반응하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없어요.”그는 온지유를 잘 모시라고 당부했었다.설마...그들이
임혜자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 말했다.“성 비서님께서 아까 사모님 유품을 가져왔더라고요. 그리고 둘째 도련님께서는 지금 응급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겨졌습니다.”임혜자는 강지한이 너무 걱정되었고 혹시나 그에게 일이 생기면 아무것도 모르는 강준형이 그들을 탓하지는 않을지도 걱정되었다.“네...”강준형을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순간 본가 쪽도 아수라장이 되어 집사들은 그를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의사와 간호사의 필사적인 노력 끝에 강준형은 깨어날 수 있었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김준혁은 그가 깨어난 모습을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어르신,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강준형은 겨우 침상에서 일어나 앉더니 온 힘을 다해 집사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성 비서한테 전화해서 그 팔찌를... 가져오라고 해.”성무진도 마침 병원에 있었기에 빠르게 그의 병실로 오게 되었고 오자마자 주머니에서 그 팔찌를 그에게 넘겨줬는데 조명 아래 비치니 더욱 반짝거리는 모습이 보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했다.강준형은 떨리는 손으로 팔찌를 건네받고 만져보다가 익숙한 촉감에 결국에는 눈물을 흘렸다.그리고 문득 심미연의 해맑은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녀의 것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강준형은 마음이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팔찌를 움켜쥐고 몸을 잘게 떨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칼로 찌르기라도 한 듯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순간 그는 마치 온 세상을 잃은 듯 끝없는 공허함과 절망에 빠져버렸다.김준혁은 그의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어르신,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너무 흥분하시면 심장에 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잠깐 눈 좀 붙이시는 게 어떠세요?”그러나 강준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가 그토록 아끼던 심미연이 이렇게 떠나버렸다.시신도 남기지 않고 가버린 사실을 강지한이 깨어나 알게 되면 얼마나 절망적일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3일 후, 강지한이 드디어
강지한은 심미연이 이제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는데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살짝 벌렸지만 너무 떨려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피가 용솟음쳐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 뒤 낮은 신음을 내뱉더니 곧바로 입에서 피를 쏟아내면서 픽 하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그리고 마치 온몸의 모든 공기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힘없이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성무진은 갑자기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손으로 임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머니, 혹시 지금 위층 안방에 가서 강 대표님이 괜찮은지 확인 할 수 있으실까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너무 걱정돼서요.”전화 받은 임혜자도 그의 말에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그러나 다년간의 경험으로 그녀는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킨 뒤 성무진을 위로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강지한은 창백한 얼굴로 피를 토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방안에는 이미 피비린내가 가득 퍼져있었다.임혜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119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가능한 빨리 차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그러나 기다리는 1분 1초가 너무 괴로웠다.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집 앞에 도착했고 의료진들은 신속하고 질서 있게 방에 들어가 강지한을 조심스럽게 들것에 옮겨 데리고 나갔다.임혜자는 구급차가 떠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강지한이 이 고비를 빨리 넘길 수 있도록 기도했다.그렇게 강지한은 빠르게 응급실로 옮겨졌다.응급처치가 끝난 뒤 그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는데 여전히 깨나지 못한 채 긴 꿈을 꾸게 되었다.꿈속은 마치 길고 인상 깊었던 영화와 같았는데 프레임마다 그가 심미연과 함께한 3
“미연 씨랑 완전히 깨진 거야? 그럼 찾으면 이제 내 차례네?”박시훈은 어차피 이제 강지한이 심미연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박시훈, 지금 너랑 농담할 기분이 아니니까 빨리 사람 풀어서 찾아봐.”강지한의 마음속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만약 박시훈도 못 찾는 거라면 심미연은 완전히 실종되었다고 봐야 한다.“강지한,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줘. 미연 씨를 아직 사랑하지?”박시훈은 만약 그가 여전히 심미연을 좋아하는 거라면 여기서 깔끔하게 포기하겠다고 다짐했다.친구의 여자를 뺏는 건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그러나 강지한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큰 소리로 답했다.“전혀!”그는 여전히 자존심을 부렸다.강지한의 말에 박시훈은 또다시 히죽거리며 말했다.“그럼 미연 씨를 찾아도 나만 볼 수 있게 어디 숨겨둬야겠다.”강지한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박시훈, 싫다는 사람을 왜 억지로 데려가려고 해. 그리고 어디까지나 내 전 아내였던 사람인데 들이대고 싶어?”“난 미연 씨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거야. 그게 네 전 아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데?”박시훈도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됐어. 난 그만 사람 찾으러 가야겠다.”박시훈과의 통화 뒤에 강지한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모태 솔로인 박시훈이 심미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그는 모든 잡생각을 다 집어치운 뒤 강준형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바로 수화기 너머에서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연이한테 사과했어? 용서는 받았어?”“혹시 오늘 미연이 만나셨어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어요?”강지한은 다짜고짜 그녀가 사라졌다고 할 수 없었기에 에둘러 물었다.“미연이가 사라졌어?”강준형의 물음에 강지한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그에게 거짓말했다.“혹시 할아버지한테 찾아가서 무슨 이야기 나눴나 궁금해서요.”보아하니 강준형을 만나러 가지도 않은 것 같았다.“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 그런데 너한테는 비밀이야.”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자 강지한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설마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건가 싶어 머뭇거리다가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미연아, 나 왔어.”들어가 보니 침대는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는데 순간 강지한은 깜짝 놀라 온몸이 굳어졌다.침대 머리맡의 결혼사진은 틀이 깨진 채 신부 머리는 잘려 나가고 웨딩드레스만 남겨져 있었고 침대 위에는 온통 유리 파편이 널려져 있었다.강지한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그러다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문을 박차고 아래층에 대고 소리 질렀다.“아주머니, 빨리 올라와 보세요!”임혜자는 무슨 일인지 몰라 부리나케 위층으로 달려갔다.“도련님, 무슨 일이에요?”강지한은 마음속의 화를 애써 억누른 뒤 침실을 가리키며 물었다.“오늘 누가 침실에 들어왔어요?”임혜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그에게 답했다.“오늘 사모님만 침실에 들어갔고 누구도 오지 않았는데요? 왜요? 뭐 귀중한 물건이라도 없어졌을까요?”강지한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미연이는 지금 어디 있어요?”“도련님께서 아까 나가시고 얼마 안 돼서 사모님도 나갔어요. 어디 가시냐고 물어보니까 급한 일이 있다고만 하시고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도련님께 따로 연락하지 않으셨을까요?”임혜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심미연은 어디 가면 꼭 강지한에게 먼저 알려줬던 것 같은데 왜 오늘은 나가면서 아무런 말도 없었는지 의문스러웠다.강지한은 마음속의 불안이 점점 커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내려가서 혹시나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지 않는지 한번 물어봐요.”그는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애써 덤덤한 척했다.임혜자는 그렇게 방문을 나오자마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강지한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임혜자는 내려가서 모든 사람에게 한 바퀴 물어봤지만 누구도 심미연의 행방을 알지 못했고 그녀는 이제야
온지유는 박시훈의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기절했고 경찰은 그녀를 연행해 갔다.박시훈은 차에 앉아 멀리서 사진을 찍어 강지한에게 보여준 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한아, 일은 이미 해결됐어.”“그래.”“내가 이렇게 고생한 걸 봐서라도 미연 씨한테 제대로 고백할 수 있게 허락해 줘.”박시훈은 이미 비서 쪽에서 오늘 심미연이 모든 증거를 가지고 혼자 경찰서에 갔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저런 패기 있는 여자와 함께하면 분명 하루하루가 즐거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꺼져!”강지한은 어두운 얼굴로 그에게 소리를 쳤다.‘감히 누구 여자를 탐내?’“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잖아. 그럼 남남이고 내가 도전해 보겠다는 데 뭐 어때서? 설마 미연 씨랑 다시 합칠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신경 쓰지 마!”강지한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그러다가 머리가 복잡해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밖의 오가는 차들과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지금껏 심미연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안겨줬기에 아무리 빌어도 이제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문득 심미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이미 흘렀고 후회해도 늦었다.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강형준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한, 당장 온지유를 데려오지 않으면 지금 네 눈앞에서 혀 깨물고 죽어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심미연은 인터넷에 녹음 하나를 공개했는데 내용에는 그날 밤 온지유와 양경자가 죽기 전의 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이 소식은 이미 널리 널리 퍼져 전 경성의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그리고 드디어 강준형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는데 그는 이 악독한 여자를 한시라도 빨리 감옥에 가두고 싶었다.사람을 죽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이미 경찰서에 잡혀갔어요.”강지한은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박시훈은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미 온지유가 저질렀던 모든 추잡한 일을 다 조사해 냈다.그리고 강지한은
온지유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강지한은 비록 몇 년 동안 그녀 앞에서는 항상 온화하고 다정한 모습만 보여줬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거의 피도 눈물도 없다고 봐야 한다.그런데 강지한은 그날 밤 모든 사실을 다 알게 되었는데도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걸 보면 분명 뭔가가 이상했다.또한 육현성은 분명 그녀에게 내일 저녁에 출발한다고 말했었는데 갑자기 오후에 전화 와서는 오늘 저녁으로 앞당겨졌다고 알렸다.‘함정인가?’온지유는 순간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만약 이 모든 게 강지한의 계획이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절대 그럴 수는 없다.그리고 그날 강지한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삶을 살게 할 거란 말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설마 진짜 도망칠 수 없단 말인가?’‘아니!’바로 이때, 한 줄기 눈 부신 불빛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비쳤다.순간 깜짝 놀란 심미연은 습관적으로 도망치려고 몸을 돌렸다.하지만 그녀의 뒤에는 이미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한 줄로 서서 그녀를 막고 있었다.“온지유 씨, 경찰입니다.”경찰이 신분증을 보여주는 순간 온지유는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고 더 이상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전화 한 통화만 할게요.”그래도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강지한에게 이 판을 짠 사람이 진짜 그가 맞는지 직접 묻고 싶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강지한 씨가 직접 전해달라고 했거든요...”바로 이때, 박시훈이 차에서 내리더니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박시훈 씨? 당신이 어떻게...”온지유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외부 소문에 의하면 현재 전 경성의 정보망은 다 박시훈의 손아귀에 있다고 할 정도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다.하여 이번 일도 아마 그가 나섰기에 이렇게 쉽게 들켜버렸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래요. 접니다.”불빛이 그의 앳된 얼굴에 비치니 귀여운 외모 때문인지 날카로운 목소리와 많이 상반되는 느낌이었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