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심서연과 심씨 가문이 얽혀 있다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네. 만약 박유진이 아니라면, 새 대표이사님은 도대체 누구지?’그때 누군가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심 변호사님, 얼굴이 왜 그렇게 안 좋아요? 혹시 새 대표이사님 오고 나면 지금 누리던 혜택을 못 누릴까 봐 속상하신 거예요?”심미연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백현지였다.백현지는 심미연과 같은 날 로펌에 입사했지만, 단독으로 법정에 선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주로 맡았던 건 민사 사건 조정 업무뿐이었다.반면 심미연은 뛰어난 성과를 내며 ‘금메달 변호사’라는 별칭까지 얻은 인물이었다.백현지가 심미연을 질투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백현지의 비아냥거림은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심미연이 만약 그 태도에 대해 따져 물으면, 사람들은 오히려 심미연을 비난할 게 뻔했다.평소 그녀를 질투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도덕적 우월감을 내세우며 그녀를 지적할 터였다.그래서 심미연은 백현지를 상대하지 않았다.대부분은 피하거나, 침묵으로 대응했다.그녀가 겁먹어서가 아니었다.‘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받는 건 시간 낭비야. 그리고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도 않아.’하지만 오늘 백현지는 선을 넘었다.“그러니까 몸으로 얻은 혜택은 오래가지 못하는 거야.”백현지는 비아냥거리며 한 발 더 나아갔다.“근데 뭐, 괜찮아. 내일 새 대표이사님 오시면 목표를 바꿔서 새 대표이사님 침대에 올라타면 되잖아? 어차피 남자 한 명이랑 자봤는데, 열 명이랑 자는 건 또 뭐가 다르겠어?”백현지의 말에 주변 사람들 몇이 소리내어 웃었다.심미연은 예쁘고 뛰어난 업무 능력을 가졌지만, 이런 이유로 로펌에서 질투를 받았고,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않았다.이 상황에서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백현지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로펌에 들어왔을 때 심미연만 없었더라면, 내가 지금 이 꼴은 아니었을 텐데. 다 그녀 때문이야! 몇 마디
백현지는 심미연의 말에 얼굴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참지 못한 그녀는 심미연에게 달려들어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려 했다.“닥쳐! 헛소리하지 마!”그녀가 소리쳤다.심미연은 몸을 살짝 틀어 공격을 피하고, 바로 손을 뻗어 백현지를 밖으로 밀쳐냈다.“제가 헛소리를 하는지 아닌지는 CCTV를 보면 알 수 있겠죠?”심미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오늘 이 자리에서 백현지를 제대로 제압하지 않으면, 앞으로 로펌의 모든 사람이 나를 깔보고 짓밟으려 들겠지. 그건 절대 안 돼.’그때 누군가가 맞장구를 쳤다.“백 변호사님이 헛소리라고 하셨으니, CCTV 확인하러 가야죠! 확인하면 진실이 나오겠죠?”순식간에 분위기가 고조되며 사람들이 하나둘씩 소리를 높였다.“그래요! 다 같이 가서 확인해 봐요!”“백 변호사님, 가시죠.”주변의 부추김에 백현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CCTV를 확인하면 모든 게 드러날 거야... 현지원도 곤란해질 게 뻔해. 그럴 순 없어!’심미연은 백현지의 변하는 표정을 보고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백 변호사님, 안 가시나요?”그녀는 백현지가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백현지는 입술을 깨물며 버티다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심 변호사님, 당신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예요!”그러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기세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백현지가 사라지자, 심미연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주변을 둘러봤다.예쁜 눈빛으로 사람들을 가볍게 훑은 뒤 부드럽게 말했다.“여기 계신 분들, 각자 자리로 돌아가셔야죠? 아니면 다른 가십거리가 궁금한 건가요? 어쩌면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오히려 사람들을 더 움츠러들게 했다.잠시 후, 사람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남긴 채 하나둘 흩어졌다.심미연은 차분하게 탕비실로 들어갔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복잡했다.‘새로 오는 대표이사님은 어떤 사람일까? 성격이 까다로우면 일하기 정말 힘들 텐데...’그녀
지금까지 현지원은 백현지에게 언성을 높여 본 적조차 없었다.현지원은 짜증이 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답답한 듯 말했다.“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만약 새로 온 대표이사님이 우리 중 한 명을 해고하려 한다면, 네가 날 유혹한 거라고 주장해. 그날 사무실에서 있었던 게 처음이었다고 말하고.”백현지는 현지원의 말에 충격을 받아 눈물조차 멈췄다.“뭐라고?”‘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내가 알고 있던 책임감 있고 의지가 되던 그 사람이 맞아? 아닐 거야.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현지원은 냉정하게 이어 말했다.“넌 어차피 수습일 뿐이잖아. 아직 정식으로 법정에 서 본 적도 없고, 로펌을 떠난다고 해도 네 미래엔 아무 영향도 없을 거야. 하지만 내가 품행 문제로 해고당하면, 이후에 변호사로서 설 자리를 잃는다고. 네가 직장을 잃으면 내가 널 먹여 살릴 수 있지만, 내가 직장을 잃으면 네가 나를 먹여 살릴 수 있어?”현지원의 간절한 눈빛은 그녀를 설득하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는 백현지가 늘 자기가 하는 말을 믿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백현지의 눈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그동안 나한테 수습 변호사로도 잘하고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와서 나를 희생시키고 네가 살겠다고?”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에는 분노와 실망이 가득했다.“내가 상사 유혹했다는 더러운 꼬리표를 달고 법무법인 리우를 떠나면, 내 변호사 경력은 끝이야!”‘변호사를 못 하면, 그다음엔 내가 뭘 할 수 있지?’현지원은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끊었다.“내가 심미연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왜 말을 안 듣고 괜히 나서서 이런 꼴을 당하냐고! 넌 항상 생각 없이 행동해서 문제를 만들어.”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왜 이렇게 멍청한 여자를 처음에 끌어들여서 내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거지?’백현지는 충격과 분노로 얼굴이 굳은 채 물었다.“지금 그게 할 말이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그날 네가 굳이 로펌에서 같이 야근
심미연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앞의 주아연을 바라봤다.로펌에 처음 들어왔을 때, 두 사람은 함께 여러 회사를 찾아다니며 협력 논의를 이어갔다.그때는 정말 힘든 시절이었다. 술을 마시다가 토하는 일이 일상이었지만, 심미연은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그녀는 마음속으로 항상 주아연에게 고마움을 느꼈다.지난 2년간 가끔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협력했고, 함께 일할 때는 즐거운 순간도 많았다.심미연은 원래 감정적인 말을 잘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쉽게 마음을 나누지도 않았다.하지만 주아연만큼은 조금 달랐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감정이 있었다.그런데 지금, 심미연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임현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변호사님, 몸이 안 좋아 보이세요. 이 잔은 제가 대신 마실게요.”심미연이 말릴 틈도 없이 임현은 술을 비운 뒤, 목이 메여 기침했다.심미연은 급히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물 좀 마셔요.”주아연은 임현이 심미연 대신 술을 마셔준 것을 보고 예상치 못한 화가 치밀었다.그녀는 비꼬는 목소리로 말했다.“심 변호사님은 정말 인복이 많으시네요. 누가 대신 술까지 마셔주는 사람은 처음 봐요.”심미연은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주아연을 스치고 지나갔다.“사실 저는 지금껏 아연 씨에게 항상 고마웠어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그 고마움을 접겠습니다.”그녀는 술잔을 집어 조용히 술을 따랐다.잔을 들고 옆에 앉은 대표이사님을 향해 말했다.“대표님, 그동안 저를 키워주시고 믿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떠나신다니 마음이 아프지만, 분명 더 나은 길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이 잔, 대표님께 올립니다.”심미연은 고개를 들어 잔을 한 번에 비웠다.대표이사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다 결국 말을 삼켰다. 대신 술잔을 들어 함께 마셨다.“저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계속들 즐기세요.”
심미연은 강지한이 자신에게는 한 푼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됐어. 너희들 나 부러워하지 마. 어차피 나도 상류층 부자 2세들을 많이 아니까, 나중에 지한 오빠한테 모임 하나 주선해 달라고 할게. 너희 다 같이 만나면 운 좋으면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도 생길지도 모르잖아!”온지유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는 은근한 자랑이 깃들어 있었다.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의 통증을 억눌렀다.강지한은 온지유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사람이었다.마치 하늘의 별이라도 따 줄 것 같은 모습이 떠올랐다.밖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온지유를 칭찬하며 한참 떠들더니, 마침내 자리를 떠났다.심미연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칸막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임현에게 메시지를 보내 가방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가방을 받은 그녀는 더 이상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그날 밤, 경성의 불꽃놀이 쇼는 큰 화제가 되었다.모두가 ‘온지유’라는 여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녀가 약혼자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도 깨달았다.심미연은 그날 밤 이불을 끌어안고 동이 틀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오전, 심미연은 법정에서 승소하고 피곤한 얼굴로 로펌으로 돌아왔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임현이 작은 목소리로 다가왔다.“변호사님, 저희 팀에 새로운 팀장이 생길 것 같아요. 그런데 변호사님은... 아쉽게도 아닌 것 같아요.”심미연은 미소 지으며 돌아오는 길에 사장님에게서 받은 전화를 떠올렸다.“돌아가서 월요일 사건 자료를 정리해 주세요. 저는 잠깐 사장님 방에 다녀올게요.”심미연이 사장실에 들어가자, 뜻밖에도 강지한이 그곳에 있었다.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의아해하던 찰나, 사장이 그녀를 불렀다.“심 변호사, 이쪽으로 와서 인사해. 이분은 이노하이브 그룹의 총괄 대표님이시고, 오늘부터 법무법인 리우의 새로운 대표이사님이 되셨어.”심미연은 잠시 멍해졌다.‘강지한이 어젯밤 온지유의 생일 파티를 준비해 준 것 때문에 미안해서 나에게 로펌을 선물
강지한의 눈빛이 사장의 손을 스치자, 사장은 얼굴이 새파래지며 급히 손을 뗐다.‘강 대표님... 눈으로 레이저를 쏘겠네! 손이 부러지는 줄 알았어!정말 무서운 분이시네...’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여성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한 씨, 나 기다리지도 않고 혼자 먼저 올라오면 어떡해!”온지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미연은 몸이 굳었다. 그리고 어제 임현이 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임현은 로펌이 약혼녀에게 선물로 넘어갔다고 말했었다. 처음엔 혹시 박유진이 법무법인 리우를 인수했나 싶었지만, 지금 보니 그 인수자는 강지한이었다.어제 온지유의 생일이었다는 점을 떠올리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역시나...’다음 순간 강지한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법무법인 리우는 네가 관리해. 인원 파트와 운영은 네가 전적으로 맡아서 해.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고, 사무용품 같은 건 성 비서에게 말해.”심미연의 가슴이 갑자기 무거워지며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었다.‘온지유는 무용을 전공한 사람이잖아. 로펌에 와서 자리만 차지하면서 나를 괴롭히겠다는 건가? 강지한은 정말 그녀를 과하게 애지중지하는구나.’“지한 씨, 고마워. 생일 선물 정말 마음에 들어!”온지유는 강지한의 손을 잡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잘생기고, 돈 많고, 마음 넓은 이 남자가 하필 다른 사람의 남편이라니...’온지유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심미연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심 변호사님, 예전부터 명성을 많이 들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온지유의 인사는 강지한과 마치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았다.심미연은 억지로 화를 억누르며 강지한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단히 말했다.“강지한, 이게 무슨 뜻이야?”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멀리서만 지켜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의 앞에 그들을 매일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강지한은 그녀의 화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
강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회사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온지유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곧장 따라나섰다.두 사람은 나란히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순간, 법무법인 리우의 전 사장이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로펌 직원들을 모두 모아 자기소개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대표님과 온지유 씨께서 직원들을 빠르게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전 사장은 한순간 로펌을 매각한 것이 후회되었다.하지만 좋은 가격에 팔았으니 업무 인계만큼은 성실히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강지한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끄덕이자, 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뒤에 몸을 숨겼다.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마치 사랑받는 사모님의 모습처럼 비쳤다.맨 뒤에 서 있던 심미연은 두 사람을 보며 손을 꽉 움켜쥐었다.‘온지유는 분명 불륜녀인데도 당당하게 저 자리에 서 있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면서...’반면 그녀는 강지한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숨어야만 했다.모든 직원이 자기소개를 마칠 때까지 심미연은 여전히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그때 임현이 다급히 팔꿈치로 그녀를 찌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변호사님, 이제 변호사님 차례예요.”온지유가 심미연을 바라보았다.175cm의 키로 마지막 줄에 서 있었지만, 심미연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저녁노을이 유리창을 통해 그녀의 얼굴에 부드럽게 비치며 황금빛 아우라를 더한 듯 보였다.그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온지유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심미연이 있는 곳에선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냥 들러리처럼 보이게 돼. 심미연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강지한의 차가운 눈빛이 잠시 심미연의 얼굴에 머물렀다.임현은 긴장하며 다시 한번 심미연을 살짝 밀었다.“변호사님, 새 사장님이 보고 계세요. 어서 말씀하세요.”심미연은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혼팀, 심미연입니다.”온지유가 그녀의 팔찌도, 남편도 빼앗아 갔었
“심 변호사님은 원래 냉정하고 사람을 잘 안 믿는 스타일이잖아. 누구한테나 똑같이 대했지. 오늘도 평소랑 별다른 거 없어 보이는데.”“원래 심 변호사님이 팀장으로 승진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낙하산’이 팀장 자리를 가로채서 화가 나는 것도 이해되지 않아?”“근데 나만 본 거야? 대표님이 심 변호사님 얼굴을 1분 넘게 쳐다본 거? 혹시 대표님, 심 변호사님을 은근히 마음에 들어 하는 거 아니야?”“아니, 어쩌면 심 변호사님이 대표님 침대에 먼저 올라갔을지도 모르지. 지난 4년 동안 남자들 침대를 들락날락한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 경험도 많을 테니 뭐.”소곤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심미연은 냉소를 띠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어제 백 변호사한테 줬던 교훈이면 다들 조용히 입 닫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내 사생활이 그렇게 궁금한 거예요? 그러면 누가 가서 팝콘 좀 사 와요. 다 같이 팝콘이나 나눠 먹으면서 얘기 좀 해보자고요.”그녀의 차가운 한마디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여자가 예쁘면 사람들 눈에는 그저 보기 좋은 꽃병 같은 존재로만 비춰지기 마련이었다. 예쁘기만 하고 쓸모는 없을 거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예쁘면서도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그때는 시선이 또 달라졌다. 마치 계산이 빠르고 남자들을 발판 삼아 성공을 쟁취한 사람처럼 여겨졌다.심미연이 4년 전 법무법인 리우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하지만 그녀는 그런 시선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노력해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노력을 보지 않았다.그저 그녀가 남자에게 기대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할 뿐이었다.‘어제 이미 한 번 반격했는데, 오늘도 겁도 없이 나대네.’심미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아침에 백현지는 그녀를 보자마자 피했고, 주아연도 주저하는 눈빛을 보였다.그녀가 다시 한번 날을 세우자, 사람들이 서둘러 말했다.“심 변호사님,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화내지 마세요
강지한은 미간을 꾹 누른 채 시선이 옆에 있는 심미연에게로 향했다.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심미연을 편애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노하이브의 지분도, 강씨 가문의 가보도 툭툭 넘겨주었다.심미연 이 여자는 권모술수도 많고 악랄한데 뭐가 좋다고!“병원에 곧 도착하니까 만나서 얘기해요. 심미연이랑 같이 있어요.”심미연도 함께 있다는 말을 들은 강준형의 말투가 한층 누그러졌다.“그래, 기다리마.”전화를 끊으며 강지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준형이 갑자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낸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심미연이 뒤에서 허튼수작을 부린 게 밝혀지면 그도 수단 가리지 않고 상대할 생각이었다.곧 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섰고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을 차에서 끌어 내렸다.손목이 아프게 꺾이자 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강지한, 손 놔!”강지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놓으면 도망가게?”그러면서도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심미연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할머니 주치의가 전화해서 특효약에 대해 말해줬어. 당신이 약속 지켰으니까 나도 말한 대로 할 거야. 걱정하지 마, 억울하더라도 온지유에게 사과할 거니까.”강지한은 경성에서 손으로 하늘도 가릴 사람이라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하지만 그가 진실을 알아내기보다는 온지유의 일방적인 말을 믿고 싶어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차라리 순순히 온지유에게 사과하면 강지후가 좋게 봐줘서 다음 약을 얻는 게 더 쉬워질 수도 있었다.부부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건지, 마음이 씁쓸했다.강지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할아버지 앞에서 말 제대로 해.”심미연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가슴이 아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알아.”강지한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할머니는 그의 손에 있는 약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강지한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심미연은 단화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지한보다 다리가 짧아서 빠르게 걷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지유가 임신한 몸으로 혼자 있는데 내가 좀 도와주는 게 뭐 어때서”강지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온지유가 그를 구해줬고 이제 그녀가 어려움에 부닥쳤으니 당연히 도와줘야 마땅했다.그런데 심미연이 그가 온지유를 도와준 것에 대해 속 좁게 따지는 게 못마땅했다.심미연은 그의 무심한 표정을 보며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나랑 이혼만 하면 그 여자를 도와주든지 그 여자랑 결혼하든지 상관 안 할게.”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 사람을 위해 꺼져주겠다는데 이 바닥에서 그녀처럼 너그러운 사람은 둘도 없으니 강지한은 고마워해야 했다.강지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심미연...”바로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고 강지한은 말을 삼켰다.심미연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형수님 전화 오셨네, 받아.”그녀는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았다.온지유의 전화라면 둘이 관계를 할 때에도 전화를 받곤 했다.대체 온지유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면 그럴까.“나랑 지유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허튼 생각하지 마.”강지한은 심미연을 노려보았다.‘이 여자 표정은 뭐지?’“그래,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겠지. 그냥 온지유는 임신만 한 거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잡것을.”그녀도 임신 중이었기에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로 공격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강지한이 거듭해서 선을 넘지 않나.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눈빛이 갑자기 살벌해졌다.“심미연, 한 번만 더 잡것이라고 해. 내가 가만 안 둬.”심미연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당신은 날 가만 둔 적 없어.”온지유에 대해 말만 해도 그는 꼬리가 밟힌 것처럼 발끈했다.하지만 심미연은 최대한 화를 내지 않고 강지한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임신 중이라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배 속의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강지한은 그녀가 예전과 달라진 것을 느꼈다.정말 그녀의 말대로 더 이상 그를
온지유가 사고를 당한 건 그녀가 시킨 일이고,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내려는 것도 그녀가 일러바친 거다?한마디로 온지유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다 그녀가 했다는 뜻이다.강지한의 마음은 참 변함없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강지한이 화가 난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심미연, 제대로 설명해.”심미연은 화를 억누르며 작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강지한, 내가 할아버지한테 전화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면서 무슨 설명을 하라는 거야?”온지유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자 강지한은 머리가 없는 사람처럼 정상적인 생각이 불가능한 듯 보였다.성무진은 황급히 차 칸막이를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그 역시 강지한이 심미연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강지한을 설득할 수도, 심미연을 도울 수도 없었다.가끔은 정말 심미연이 안쓰러웠다.강지한은 이미 온지유 일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심미연이 이런 식으로 대꾸하자 순식간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심미연의 목을 움켜잡더니 험악하게 말했다.“오늘 온지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도 죽어.”목이 잡힌 심미연은 숨쉬기가 힘들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눈동자를 크게 뜨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한,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지난 3년 동안 나에게 계속 상처를 줬어! 나도 인간이야, 강철이 아니라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아프고 괴롭다고! 강지한, 이혼하자는 말 진심이야. 내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진심이고.”그녀는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했다.한때는 그와 평생을 함께 할 거라는 환상을 가졌다.그러다 이 결혼 생활에서 아무리 진심을 다 바쳐도 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걸 서서히 깨달았다.과거엔 사랑하지 않아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려 했는데 이제야 자존심도 버린 사랑은 상대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뚝뚝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찢어지는
심미연은 그를 돌아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왜요?”예전에는 강지한을 사랑해서 24시간 내내 그의 곁에 붙어 있기를 바랐던 그녀였지만 조금 전 강지한의 그런 말을 듣고도 어떻게 그의 곁에 있겠나.최대한 멀어지는 게 좋았다.성무진은 그녀의 질문에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강지한이 화가 났다고 말해야 하나.“그쪽 대표님은 안 바쁘대요? 왜 차에 안 타요? 아니면, 우리가 먼저 갈까요?”심미연이 덤덤하게 말했다.“나 일이 있어서 서둘러야 해요.”할머니에게 일주일 치 약이 있으니 일주일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그것만으로도 기꺼이 온지유에게 사과할 수 있었다.게다가 온지유가 그녀를 해친 것에 대해서 나중에 진실을 밝히고 되돌려주면 그만이다.아무리 늦어도 복수를 하기만 하면 되니까.성무진은 두려움에 차 밖을 내다봤다.다행히 강지한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아니면 심미연이 또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당연히 강지한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지 않을 수 없었다.그의 비서에게 그를 놔두고 가자고 하다니, 참 대단한 여자다.허리를 굽혀 차에 앉으려던 그는 심미연을 차갑게 노려보았다.“뒤에 앉아, 물어볼 게 있어!”심미연은 짜증을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이미 사과하라고 했는데 대체 왜 화를 내는 건지.’“심미연, 다시 한번 말할게. 뒤에 와서 앉아.”강지한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심미연은 심호흡을 하고 필사적으로 마음속에 치미는 분노를 삭였다.“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봐, 다 들리니까!”그녀는 이제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다.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성 비서, 전화해서 약 다시 가져오라고 해.”강지한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싸늘했다.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강지한은 정말 나쁜 놈이다!성무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모님, 뒤에 앉으시죠.” 한순간 홧김에 힘들게 얻은 약을 잃을 수는 없었다.심미연의 작은 얼굴이 창백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강지한은 고개를 들어 그의 뒤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심미연은?”성무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여자 화장실에 사람 시켜서 찾아봤는데 아무도 없어요!”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한의 얼굴은 곧바로 굳어졌다.“전화해서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해! 안 그러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성무진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심미연 대신 식은땀을 흘렸다.도대체 사모님이 무슨 짓을 했길래 대표님이 저렇게 화가 난 걸까.강지한은 극도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빨리 전화해!”강지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재촉했다.그 시각 심미연은 회사 밑 정원에서 통화 중이었다.할머니의 주치의는 누군가 특효약을 일주일 치 보내왔다며 방금 할머니에게 투여해서 상태가 좋아졌다는 말을 전했다.의사의 말을 들은 심미연은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구쳤다.“이따가 할머니 뵈러 갈게요,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저한테 감사할 게 아니라 약을 전해준 분께 감사해야죠!” 의사가 겸손하게 말하자 심미연은 의사가 말하는 ‘약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았다.하지만 의사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한참을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심미연은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성무진의 연락이 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성 비서님, 무슨 일이세요?”사실 성무진이 왜 전화를 했는지 마음속으로는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사모님, 길 잃으셨나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성무진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직접 묻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나 아래층 정원에 있으니까 오세요.”마음속으로는 강지한이 미웠지만 강지한의 뜻을 거스르는 순간 할머니가 쓰던 특효약은 순식간에 모두 회수될 것이기에 할머니가 더 이상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강지한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알겠습니다.”성무진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심미연의 말을 강지한에게 전달했다.강지한은 얼굴을 찡그
“미연 씨,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난 진심으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무슨 짓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온지유의 진지한 말투에 심미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요, 그러면 지금 강지한 사무실로 와요. 셋이 함께 얘기하죠.”단지 수작을 부리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던 거다. 아니면 온지유가 지금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오를 수나 있었겠나.“지한 씨한테 갔다고요? 왜 지한 씨를 찾아갔어요?”온지유가 한층 언성을 높이며 다급하게 말했다.“당연히 내 남편과 부부 사이 친밀한 일을 하려는 거죠. 왜 그렇게 불안해해요?”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온지유가 전화를 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다.절대 사적으로 그녀와 만나지 않을 거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세수하고 손을 닦은 후 화장실을 나섰다.사무실 문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순간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육체적 욕구 해결하려고 자는 거예요. 밖에서 만난 여자들보다 깨끗하니까. 그 여자가 이혼을 원하면 어떡하냐고요? 허, 절대 안 되죠. 3년 동안 내가 심전그룹에 얼마나 투자했고 그 여자한테 얼마를 썼는데 이혼하면 내 돈도, 청춘도 다 버리는 거잖아요. 게다가 난 아직 질리지 않았어요. 충분히 갖고 놀다가 질리면 회사 법무팀 통해 소송해서 한 푼도 안 주고 내보낼 거예요.”여기까지 들은 심미연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황급히 엘리베이터 입구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고 그 남자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알고 보니...강지한은 단지 육체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다.그녀가 밖에 있는 여자들보다 깨끗해서!그리고 아직 충분히 갖고 놀지 못해서 이혼하지 않는 것이고 지겨워지면 그때 소송해서 빈털터리로 쫓아낼 생각이었다.영리한 사업가인 강지한은 그녀를 내쫓기 전에 마지막 남은 가치까지 쥐어짜 내려 했다.그런 남자를 9년이나 사랑했다니.참 우스웠다.그 시각 사무실에서 강지한은
어쨌든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든 증거가 심미연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배후는 그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고소하면 심미연은 법의 심판을 받는다.이제 온지유에게 사과만 하면 될 일인데 뭐가 문제일까.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분명하게 말했다.“강지한, 나한테 계속 이렇게 상처를 주면 언젠가 내가 당신한테 너무 상처받아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떠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떠났어야지! 3년이나 기다릴 게 아니라!” 그의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심미연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강지한의 말이 맞다. 그녀는 떠나지 못한다.그에게 계속해서 상처받으면서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곁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전에는 그것이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자신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강지한의 눈에 그녀의 사랑은 아무 가치도 없었다.“내가 말 바꿀까 봐 걱정되면 지금 당장 사람 시켜서 약 보내줄게. 할머니가 약 받고 사과하러 가도 돼.”강지한은 이미 자신이 많이 양보했으니 심미연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그녀가 멍청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지금 전화해. 난 약을 먼저 받아야겠어.”강지한이 이렇게 말하니 심미연은 아무리 억울해도 삭힐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몸이 더 중요했기에 할머니가 고통받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건 불효였다!강지한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고 심미연은 전화를 거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남몰래 결심했다.통화를 마친 강지한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다.“약 곧 올 테니까 앉아서 기다려.”심미연은 그가 뻗은 손을 피해 한 발짝 물러서서 말했다.“할머니 주치의한테 특효약에 대해 말하고 올게.”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냥 온지유에게 사과하는 건데, 무릎 꿇으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대체 뭐가
강지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그래.”“그러면 미연 씨가 사과를 하면 내가 직접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취하하는 게 어떨까요, 지한 씨?”달래는 듯한 말투였다.“지한 씨...”머뭇거리는 온지유가 난감한 듯 보였다.“할 말 있어?” 강지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심미연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셔츠가 젖어 가슴에 꽉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절제되고 섹시했다.심미연은 수년 전 강지한을 처음 봤을 때 믿기지 않는 그의 얼굴에 반해 바로 넘어갔던 걸 떠올렸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자신이 참 한심했다.온지유는 망설이다가 말했다.“미연 씨가 내 번호를 차단해서 연락이 안 돼요.”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내가 데려갈게.”“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요?”온지유가 다시 물었다.“잘못했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지. 됐어,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몸조리나 잘해.”“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 너무 강요하지 마요.”“내가 이따가 데려갈게”이 말을 들은 온지유는 뜻대로 흘러가자 순순히 강지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의 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마음속으로 막연한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온지유가 무슨 말을 했을까.“심미연, 지금 나랑 같이 병원으로 가.”강지한은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심미연을 향해 걸어가며 강압적인 어투로 말했다.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온지유가 또 무슨 짓을!강지한이 말했다.“네가 사람을 시켜서 지유를 차로 쳤잖아. 다행히 지유는 다른 데는 괜찮은데 손만 부러졌고 뱃속 아기도 멀쩡해. 나랑 같이 병원에 가서 지유에게 사과하면 지유가 바로 고소 취하할 거야.”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경악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여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꾸민 일인데 내가 그런 거라고 모함하고 나한테 사과까지 하라는 거잖아. 어떻게 그런 허술한 연기에 속아?”이노하이브를 인수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이노하이브를 사상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심미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담긴 물을 강지한의 얼굴에 뿌렸다.“당신이랑 그래도 3년 동안 부부로서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잤으니까 여기 오기 전에는 내가 어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도 당신이 내 결백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네. 이번 일 사실대로 밝히고 싶으면 뒤에서 수작 부리지 마. 내가 꼭 진실을 밝혀줄 테니까.”지금 강지한을 찾으러 여기 올 게 아니라 바로 병원으로 가서 온지유를 한바탕 두들겨 팼어야 했다.강지한은 손을 뻗어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고는 검은 눈동자로 심미연을 바라보며 비웃었다.“그렇게 자신 있는데 왜 나한테 와서 큰소리야?”이 여자가 무슨 배짱으로 그에게 물을 뿌리는 걸까.그와 시선을 마주한 심미연은 진작 마음이 산산조각 났다.이번에야말로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이 일이 밝혀지면 그와 온지유의 소원대로 반드시 강지한과 이혼할 거다.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며 정적을 깨뜨렸고 강지한이 휴대전화를 꺼내자 심미연은 화면에 뜬 온지유 이름에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심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오붓하게 통화해.’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심미연!”심미연의 발걸음이 살짝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사람 시켜서 교통사고에 대해 조사할 거야.”그가 당황했다.심미연에게 뭘 해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녀가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는 것은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인데 그녀의 감정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으니까.하지만 이번엔 심미연의 감정이 조금 신경 쓰였다.“전화 받고 얘기해.”3년 동안 심미연은 한가지 규칙을 발견했다. 강지한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풀릴 기세가 보이면 온지유는 전화를 걸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둥, 몸이 안 좋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댔고 강지한은 매번 철석같이 믿으며 심미연을 혼자 버려둔 채 온지유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