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는 순식간에 미묘하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가에 웃음이 더 깊어졌다. 그는 일부러 심미연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낮고 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절한 지 몇 시간 만에 벌써 생각이 바뀌었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마음이 생긴 거야? 강 부인, 너무 원칙이 없는 거 아냐? 소문이라도 나면 누가 너한테 소송 걸자고 찾아가겠어.” 그가 말을 내뱉는 사이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심미연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심미연은 주먹을 꽉 쥐며 손톱이 거의 손바닥에 박힐 정도였지만 여전히 숨이 막힐 듯한 차가운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몸을 살짝 비켜 강지한과 가까운 접촉을 피하며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 “강 대표님,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네요. 난 이제 당신과 어떤 연관도 있고 싶지 않아요. 그냥 할아버지랑 밥 한 끼 먹으러 온 거고 당신을 만난 건 그저 우연이에요.”말을 끝낸 그녀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 홀로 남은 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눈빛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 뜻밖의 만남은 마치 총성이 울리지 않는 전쟁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서서히 퍼져나갔다. 결국 누가 승자가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미연아, 네가 좀 더 늦게 왔으면 내가 사람 보내서 데리러 갈 뻔했어.” 강준형의 힘찬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그녀는 가슴 속 안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미연은 빠르게 그의 앞에 다가갔다. 가방을 그의 손에 건넨 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차가 막혀서 좀 늦었어요. 그리고 이건 할아버지께 드리려고 산 무릎 보호대예요. 무릎 상태가 안 좋으시잖아요. 날씨가 더 추워지면 필요할 것 같아서요.”강지한이 들어오며 할아버지가 심미연에게 보이는 다정한 모습에 미묘한 질투를 느꼈다. ‘누가 진짜 친손자인지 모르겠네.’ 강준형은 고개를 들어 강지한과 시선이 마주치자 금세 웃음을 지었던 얼굴을 확 굳어버
여자의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는 모습이 강지한을 자극했다. 입술 끝에서 은은하게 미소가 번지며 그 곡선이 매혹적으로 빛났다. 그의 손끝이 여자의 다리 위에서 원을 그리듯 스쳤고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흘러나왔다. “심미연 씨, 왜 이렇게 나 쳐다봐? 내가 그렇게 멋있어?”‘말 진짜 뻔뻔하게 하네.’ 심미연을 이를 갈며 남자의 장난치고 있던 손을 잡아 확 꼬집었다. ‘이미 전남편 전처인데 왜 자꾸 이렇게 은근슬쩍 다가오는 거지? 예전엔 강지한이 이렇게 뻔뻔한 사람인 줄 몰랐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이 여자 진짜 손끝이 세네.’ ‘너무 아프잖아!’ 하지만 손이 아파도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강준형은 그릇에 국을 담아 심미연 앞에 놓으며 그녀가 화가 나 얼굴이 빨개진 모습을 보고는 강지한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줄 알았다. 그는 강지한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다그쳤다. “빨리 먹고 가!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그는 그저 심미연이랑 조용히 식사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는 강지한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강지한이 지금까지 심미연에게 상처를 준 모든 일을 기억했다. 그런 사람을 절대로 도와줄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 저야말로 당신 친손자잖아요! 쟤는 남인데 왜 저 대신 쟤를 도와주는 거예요?” 강지한은 말하면서도 손과 발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심미연을 괴롭히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예전에 심미연이 눈앞에 있을 때는 그녀가 따분하고 거슬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 집에서 혼자 한나절을 보내니 집안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강준형을 찾아가 심미연을 설득해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려 했는데 여기서 그녀를 뜻밖에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근데 할아버지도 참. 심미연만 불러서 밥을 먹자고 하고 정작 친손자인 나한텐 말 한마디도 없으시네.’‘편애도 정도가 있지. 이건 뭐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야?’ 강지한이 그렇게 웃는
“할아버지, 이노하이브 주식 1%를 심미연에게 다 주셨잖아요. 심미연이 할아버지를 돌보는 게 뭐가 문제에요.” 강지한이 당당하게 말했다. ‘돈이면 뭐든지 해결된다고 하지 않았나?’ ‘심미연은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야지.’“난 미연이에게 주식을 줬을 뿐 거기서 아무런 보상도 바란 적 없어!”강준형은 화가 나서 강지한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지난번에 때린 게 너무 약했던 것 같다. ‘그때 좀 더 세게 때려야 했는데!’ 심미연은 강지한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는 이미 이혼했잖아. 이제 지한 씨가 좋아하는 사람 데려와서 할아버지 돌보면 되겠네.” 예전에는 강지한과 이혼한다고 생각하면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 이혼하고 나니 슬픔은커녕 오히려 그를 조롱하며 웃을 수 있었다. ‘사랑하지 않으니 이렇게 평온하고 차분해지는구나.’ 강지한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이혼하자고 고집한 사람은 너잖아! 다른 남자랑 애매한 관계를 이어갔던 것도 너고. 지금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는 거야? 심미연, 진짜 대단하다.” “그만 먹고 빨리 나가! 계속 말하면 누가 밥 먹을 기분이 나겠어.”강준형이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강지한에게 소리쳤다. ‘자기 잘못으로 이 가정을 깨놓고 이제 와서 모든 잘못을 미연이에게 돌리다니.’‘한심한 놈.’심미연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강지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왜 온지유가 몇 개월째 임신한 일은 말 안 해?”‘이 결혼이 끝난 게 그의 외도 때문 아니었나?’‘왜 이제 와서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냐고.’“우리 사이의 일을 왜 온지유를 거론하는 거야?” 강지한은 기분이 나빴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여자는 왜 자꾸 온지유 얘기만 하는 거야.’ 강준형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미연이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할 거면 너도 미연이가 다른 남자랑 뭔가 있었다고 떠드는 거 그만둬. 강지한, 오늘 여기서 말하는데
강준형의 목소리를 듣고 심미연은 잠시 멈칫했다가 바로 그 말속의 뜻을 알아차리고 급히 고개를 떨구며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강준형의 발이 그대로 그녀의 발밑에 있었다. 조금 전 너무 화가 나서 어느 방향인지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그냥 밟아버린 것이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심미연은 계속해서 사과의 말을 했다. “다 네 탓이야. 흥!”강준형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미 다 이해하고 있었다. 그도 젊었을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을 다시 엮는 건 원치 않았기에 강지한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할아버지, 너무 편파적이세요.”강지한은 내내 기분이 불쾌했다. ‘예전엔 나랑 심미연을 이어주려고 애쓰지 않았나?’‘왜 오늘은 입도 떼지 않으시지?’ “밥 먹자.”강준형은 두 사람을 한 번 훑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지한도 지지 않으려는 듯 심미연을 단단히 쏘아보고 있었다. 심미연은 못 본 척하며 고개를 숙여 밥에 집중했다. 강준형은 다시 강지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밥 먹어!”강지한은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여 먹기 시작했다. 한 끼 식사가 끝날 무렵. 정교한 식기들이 살며시 부딪쳐 미세하고 맑은 소리를 냈다. 강준형은 잠시 심미연에게 시선을 두었고 그 눈빛에는 깊은 응시와 기대가 섞여 있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선 후 심미연의 어깨를 가볍게 톡 치며 말했다. “미연아, 나랑 서재에 가자. 얘기할 게 있어.”그리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강지한이 일어나려던 찰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폰을 꺼냈고 화면에 떠오른 온지유의 이름을 보고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즉시 온지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후회와 무력감이 가득했다. “지한 씨, 미안해... 내가 그런 말을 라이브 방송 중 인터뷰 카메라 앞에서 하는 게 아니었어. 그 후에 생길 일들은 전혀 생각 못 했어. 제발 용서해줘...” 그녀는 애처롭게 울며 말했다.
옷을 하나씩 입어보고 다시 벗으면서 시간은 서서히 흘러갔지만 온지유의 마음은 전례 없는 채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그녀는 강지한을 만나야 했다! 그 어떤 때보다 간절하게! 서재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조명이 흐릿하게 비추는 고풍스러운 가구들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공기 속에는 짙고 무거운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심미연은 넓은 책상 앞에 서서 두 손을 자연스레 교차시킨 채 눈빛은 혼란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준형은 천천히 일어나 뒤에 있는 오래된 나무 장롱에서 정교한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상자의 표면은 살짝 청동빛을 띠고 있었고 가장자리에 섬세한 연꽃 문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마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그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심미연의 떨리는 손에 놓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그의 손은 오히려 더욱 강하고 엄숙하게 느껴졌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뒤 강준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강지한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물건이야. 이 집에 그리고 강지한에게 남긴 유일한 물건이지. 이걸 네게 전하는 이유는 강지한 대신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동시에 그녀의 죽음의 진실도 밝혀 주길 바란다.” 강준형의 목소리는 낮고 무게가 실려 있었으며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거대한 망치처럼 심미연의 마음을 강하게 치는 듯했다. 심미연은 손에 쥔 상자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준형을 바라보며 눈빛 속에 의문과 불안이 가득 차올랐다. “왜... 왜 저한테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마치 자신이 이 막중한 책임을 맡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아연하기까지 했다. 이건 다름 아닌 강지한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강준형은 긴 한숨을 내쉬며 눈빛이 점점 더 깊고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는 오랜 시간 감춰왔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강지한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미연아, 이렇게 부탁하는 게 너한테 참으로 미안한 일이란 건 알아. 하지만 말이다. 나도 나이가 많고 몸도 예전 같지가 않아. 언제 잠들어서 다시는 못 깨어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강준형은 말하며 눈가가 붉어졌다. 심미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손에 든 상자를 무의식적으로 더 꼭 쥐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할아버지께서는 꼭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장수하실 거예요!” 강준형은 잔잔히 웃었다. “이 나이 먹도록 살아보니 이제는 생사에 연연하지 않게 됐단다. 내가 떠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네 인생을 잘 살아.” 그는 심미연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그 빚을 갚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남은 시간 동안 그녀가 아끼고 사랑받으며 살길 바랐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바람이었다. 심미연은 강준형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안함이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그의 모습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려는 순간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심미연은 하던 말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미연아,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까?” 박유진의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포근하게 들려왔다. “나 차 갖고 나왔어. 데리러 안 와도 돼. 고마워.” 말하는 내내 심미연의 미간은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준형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강지한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이건 다른 사람 탓할 것도 없고 전부 강지한이 자초한 일이다. “나한테 굳이 예의 차릴 거 없어.” 박유진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래. 그럼 일 봐. 내일 다시 연락할게!” 사실 그는 하루 24시간을 다 써서라도 심미연을 보고 싶었고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전에는 심미연이 이혼하지 않았기에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심미연이 이혼했으니 그
‘그냥 묻지 않는 게 나을지도.’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는 분명히 알게 될 테니까. 강준형의 말에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손끝을 꽉 움켜쥐었고 손에 쥔 상자가 손바닥을 아프게 찔렀다. ‘혹시 할아버지가 임신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걸까?’ “괜찮아. 내가 묻지 않은 걸로 하자.” 강준형은 그녀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강준형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실망감에 심미연은 마음이 무거웠다. 입을 열려 했지만 말이 나오기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하려던 말을 삼켜버리고 말했다. 강준형은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물었다. “누구냐?”“저예요.”문밖에서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미연은 강준형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러면 저는 먼저 갈게요.”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그래. 조심해서 가고 집에 도착하면 꼭 연락해. 아니면 걱정되니까.” 강준형은 그녀를 붙잡을 수 없어 그냥 보내주기로 했다. 심미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나갔다. 문이 열렸다.심미연은 고개를 숙인 채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에 쥔 상자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고 급하게 앞으로 걸었다. “심미연, 나 못 봤어?”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아당기며 말투가 썩 좋지 않았다. 심미연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불쾌한 감정이 역력했다. “왜 이렇게 아프게 잡아!” 강지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풀어주었다.“심미연, 우리 얘기 좀 하자.” 남자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는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나 피곤해. 내일 얘기할 수 있을까?” 강준형이 말한 강지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지금 강지한을 마주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일이면 괜찮을 것이다. “너 아픈 거야?” 강지한은 그녀의 얼굴이 좋지 않은 걸 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주 건강해. 아프지
잠시 후 그녀는 메시지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온지유의 셀카 한 장이 담겨 있었다. 셀카 뒤로 보이는 뒤편 벽에는 예전에 그녀가 사람을 시켜서 합성한 강지한과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결혼사진을 걸었을 당시 강지한은 비웃으며 조롱했었다. 그녀는 그저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고 그의 조롱 따위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고집으로 그 사진은 3년 동안 그대로 벽에 걸려 있었다. 이사를 할 때 서두르다 보니 사진을 내려서 없애는 걸 깜빡했다.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온지유가 벌써 그 집에 들어갈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정말 성급하기도 하네.’그런데 아까 본가에서 밥 먹을 때 강지한은 그녀에게 무례한 장난을 쳤었다. ‘재밌네.’그녀는 이제 강지한에 대한 감정은 모두 놓아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사진을 봤을 때 아마 속이 뒤집혔을 것이다. 사진을 지우려던 찰나 온지유의 전화가 걸려 왔다. 심미연은 온지유가 단지 자신에게 자랑하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지한에게 더 이상 마음이 없는 그녀는 그와 온지유의 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온지유 같은 아무런 자존심도 없이 끝까지 낮아지는 사람은 정말로 그녀의 세계관을 새롭게 만들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온지유의 메시지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섹시한 속옷 차림의 사진이었다. 심미연은 전에 한 번 그런 걸 샀던 기억이 났지만 그걸 어디다 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심미연은 강지한에게 선물했던 그 넥타이를 떠올렸다. 아마 아직도 옷장에 있을 거다. 온지유가 전화를 받지 않자 그녀는 한 장 한 장 점점 더 노골적인 셀카를 계속 보내왔다. 심미연은 속으로 잠깐 욕을 뱉고 그 사진들을 바로 강지한의 이메일로 보내버렸다. ‘둘이 진짜 끼리끼리네.’ ‘앞으로 둘이 평생가라! 서로 다른 사람 건드리지 말고!’사진을 보내고 난 후 심미연의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심미연은 잠도
심동현은 그때 고작 다섯 살이던 아이가 저런 악행을 저질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너무 미안해하지는 마. 당신의 마지막이 심미연보다는 더 처참할 테니까.”심서연의 말 몇 마디에 심동현은 그대로 기절해버렸고 심서연은 그런 그를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나, 나는 네 아빠가 불러서 온 것뿐이야.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그때 옆에 있던 여자가 덜덜 떨며 말하자 심서연은 여자의 발을 즈려밟으며 말했다.“넌 너무 더럽잖아.”물론 심서연도 남자와 노는 걸 즐기긴 했지만 그녀는 이렇게 돈을 목적으로 남자를 탐하는 여자들을 경멸했다.그때 초인종이 울리자 다급히 발을 뗀 심서연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인터폰을 눌러보았다.역시나 성무진의 얼굴이 보이자 그녀는 칼을 들어 자신의 다리를 긋고는 절뚝이며 문을 열어주었다.“성 비서님... 저 좀 살려주세요...”눈을 감으며 죽는 척을 하는 심서연을 본 성무진은 바로 뒤따라온 사람을 향해 말했다.“이분은 차에 태워.”심서연이 그 사람에게 들려 나가자 곧바로 구급차가 도착했고 심동현과 여자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모든 일이 끝나고서야 성무진은 강지한에 연락을 했다.*그때 심미연은 임현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는데 함께 앉아있던 심태하는 자신의 앞에 가득 놓인 디저트들을 보며 숟가락을 든 채 놀라고 있었다.“엄마, 이거 다 내 거에요?”평소에는 달달한 걸 많이 못 먹게 하던 엄마가 갑자기 이러니 심태하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응, 다 네 거야. 얼른 먹어. 대신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아프니까 적당히 먹어야 해.”“네! 조금만 먹을게요 그럼!”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심태하는 한입 한입 디저트들을 베어 물기 시작했다.심미연은 미소를 짓다가도 이렇게 일찍 철이 든 아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왔다.엄마가 힘든 게 싫어서 세 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성숙한 행동들을 하는 걸 심미연이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임현은 그저 부럽다는 듯 말했다.“태하는 진짜 너무 착한 것 같아요!”세
심서연이 사리를 분별하기 시작할 때부터 심동현은 늘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 싶어 했다.그리고는 아들을 낳으라고 조은하를 달달 볶았는데 조은하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녀에게 화까지 내곤 했다.그때부터 심씨 집안의 딸은 하나여야만 한다는 걸 깨우친 심서연은 일부러 유괴범을 찾아 심미연을 팔아버리려고 했었다.이미 말까지 다 맞추고 심미연을 데려간 건데 심서연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사라져버린 심미연 때문에 심서연이 유괴범들에게 대신 끌려가게 된 것이다.그때부터 심서연의 악몽 같은 나날이 시작되었고 심미연을 향한 그녀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심서연은 심미연도 유괴범에게 자신을 넘기려고 계획을 짠 게 분명하다는 착각까지 해가며 그녀를 증오해왔었다.시골에 끌려간 뒤로 매일 맞고 욕을 먹으며 자라던 심서연은 양어머니가 아들을 낳게 된 뒤, 모든 신경이 그 아들에게 가 있는 틈을 타 빠르게 도망쳐 나왔고 그길로 기억에 남아있던 심씨 집안을 찾아갔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심서연은 예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심미연을 보며 질투심에 불타 그녀가 가진 걸 모조리 빼앗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심서연에게 회사를 맡긴다는 건 회사를 말아먹겠다는 거랑 다름이 없었기에 부모님은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믿지는 못하고 있었다.그 와중에 심미연은 여전히 화려한 집에서 세계적인 부자인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다.그렇게 심서연이 점점 질투심에 눈이 멀어가고 있을 때 하늘이 고맙게도 심미연을 죽여준 것이다.굶어 죽어가던 심서연이 그 틈을 타 강지한에게 연락을 했고 그 덕에 아무 상관도 없는 강지한의 보살핌으로 강씨 집안 둘째 사모님 대우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물론 그녀가 이 모든 걸 누릴 수 있게 된 건 다 문소영과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사람 덕분이었다.힘들고 가난한 시절을 겪어봤기에 더욱더 자신의 것을 잃고 싶지 않았던 심서연은 어떻게 해서든 강씨 집안에 들어가야만 했다.그리고 그동안 마음껏 누려온 심동현은 이제 그만 고생할 때도 된 것 같았다.“심서연! 걔
심서연은 자신의 말이 끝났음에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강지한이 혹시나 자신을 외면할까 봐 불안에 떨며 물었다.“지한 씨...”심서연은 사실 이번 기회에 강지한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기회를 봐서 잠자리를 가지고 거기에서 애까지 생긴다면 그야말로 천운이겠지만 일단은 강지한을 끌어들이는 게 우선이었다.“성 비서 보낼게요.”“지한 씨가 직접 와주면 안 돼요?”자신이 대답을 했음에도 그칠 줄 모르는 심서연의 요구에 강지한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상미 열나서 지금 병원에 있어요. 귀국한 다음에 열 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전에 왜 애 아프다는 말 안 했어요?”순식간에 차가워진 목소리에 심서연은 당황하며 물었다.“뭐라고요? 상미가 열이 나요? 전 진짜 몰랐어요!”해외에서는 남자들을 만나느라 바빠서 상미는 시터에게 맡겨뒀었기에 심서연이 아이의 몸 상태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하지만 강지한의 말투가 심상치 않아 그녀는 다급히 한마디 더 보탰다.“이틀 전에 열이 나서 병원 데려가긴 했는데 그때는 큰 문제 아니라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신경을 좀 덜 썼는데, 많이 아픈 거예요?”심서연의 말이 변명임을 아는 강지한은 더 말하기도 입 아파 그저 전화를 끊어버렸다.심서연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붙잡고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혹시라도 강지한이 자신이 해외에서 남자를 만나고 다닌 걸 알고 자신을 내치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지만 그렇다 한들 심서연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강지한이 결정한 일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애초에 없었으니까.한편 조은하는 어두워져 가는 딸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왜 그래 서연아?”조은하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심서연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아무 일도 아니니까 걱정 말고 누워 계세요. 먹을 것 좀 챙겨올게요.”“얼른 구급차 불러서 아빠부터 병원에 데리고 가.”심동현이 아픈 것도 보기 싫었고 또 심동현이 죽으면 하나뿐인 딸도 죽을 것 같아 조은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안 죽는다
조은하는 침대에 누워지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심미연 생각을 하고 있었다.어린아이가 자신들이 가하는 모진 매를 견뎌냈을 걸 생각하면 조은하는 자꾸만 가슴이 아파 왔다.그래서 지금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늘이 내린 벌 같았다.“엄마, 말할 수 있겠어요?”“응.”심서연이 눈시울이 빨개진 채로 묻자 조은하가 힘겹게 목소리를 짜내어 대답했다.“아빠한테 또 맞은 거예요?”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게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심서연은 한 번 더 물었다.“그냥 때리라지 뭐. 어차피 나 잘못한 거 많잖아.”조은하는 심동현에게 맞을 때마다 심미연에게 빚을 갚는 거라고 생각했다.물론 심미연은 이미 죽어서 자신이 이토록 참회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지만.“나 잠깐 아빠랑 얘기 좀 하고 올게요.”역시나 예상했던 답이 나오자 심서연이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나려 하는데 조은하가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됐어! 나 괜찮아.”“엄마가 이 꼴로 누워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그러고도 내가 사람이에요?”심서연은 마음 아파서 흐르는 눈물도 빠르게 닦아내며 방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그에 다급해진 조은하가 심서연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에 잡히는 건 공기뿐이었다.“서연아! 엄마한테 이제 딸이라곤 너 하나뿐인데 너까지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얼른 돌아와.”자식을 앞세우는 건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만약 심서연까지 잘못된다면 조은하는 정말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기에 목이 타게 그녀를 불렀지만 심서연은 이미 문을 열고 나간 뒤였다.조은하는 조급한 마음에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는데 몸도 편치 않아서 그만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조은하가 고통에 미간을 찌푸릴 때 심서연은 이미 소파에서 입에 담지도 못할 행동을 하고있는 심동현과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집에 있는 딸과 아내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이런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심동현에 이성이 끊겨버린 심서연은 주방에서 칼을 들고나와 심동현의 다리 위에서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여자를 향해 휘둘렀
적잖이 당황하는 심동현에 심서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마 또 집에 다른 여자 들인 거예요?”그 나이 먹고도 여자 생각만 하는 아빠가 심서연은 이제 정말 지겨웠다.“심서연, 넌 무슨 말버릇이 그래!”딸에게 들켜서 창피한 건지 심동현은 이내 역정을 냈는데 그게 또 원래도 기분이 좋지 않던 심서연을 더 건드리는 격이 되어버려 심서연은 들고 있던 가방을 심동현에게 던지며 소리쳤다.“하반신 간수 똑바로 안 하면 병원 가서 수술시켜 버릴 거에요. 그냥 고자가 되어버리면 좀 조용하겠죠.”심동현이 여자랑 혼외자들한테 돈만 퍼주지 않았어도 심씨 집안이 망할 일은 없었기에 심서연은 이 모든 게 심동현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한편 가방에 맞은 머리에서 피까지 흐르자 심서연의 말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심동현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쥐며 뺨까지 내리쳤다.“어디서 그런 배워먹지 못한 말을 해!”얼마나 힘을 준 건지 심서연의 얼굴은 심동현의 손자국대로 빨갛게 부어올랐다.“지금 나 때렸어요?!”“그래! 때렸다 왜! 내가 너 때려죽일 수도 있어.”심동현은 발악하는 심서연을 정말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네가 이딴 년인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죽게 내버려 뒀을 거야. 괜히 데려왔어 진짜!”몇 년 동안 심동현은 줄곧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만약 그때 심서연을 데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심미연이 유일한 딸 일 테고 그러면 3년 전 심미연이 죽었을 때 모든 재산을 다 가지게 되는 것인데, 심동현은 그러지 못한 게 아직까지도 한으로 남았다.강지한이 위자료로 200억과 함께 이노하이브의 주식과 집, 차까지 줬다던데 다른 걸 다 떠나서 200억도 여생을 평안하게 보내기엔 충분한 금액이었다.심미연이 아닌 심서연을 선택한 대가로 심동현은 다리 밑에서 굶어 죽을 뻔했었다.물론 3년 동안 심씨 집안 사람들이 먹고 쓰고 입는 건 따로 봐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손에 돈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평생을 함께하겠다던 여자는 진작에 도망가버렸고 그렇게 심동현은
아들을 낳으면 그 엄마도 귀해지는 법이다.“아이를 가지려고 계속 남자를 만났어? 그러다가 혼혈아를 낳으면 낳자마자 강지한의 아이가 아닌 게 뻔하잖아! 역시 시골에서 자란 촌뜨기는 머리가 둔해. 너 계속 이런 짓거리만 한다면 난 널 버리는 카드로 만들어 폐기할 거야. 그때 가서 울며불며 애원하지 마.”문소영은 쌀쌀하게 웃었다.“하지만 강상미에게 저를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잖아요? 제가 보이지 않으면 상미가 절 찾을 거예요.”심서연은 마음이 혼란스러워져 조리 있게 말하지도 못했다.문소영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봤다.“강상미는 강지한의 아이야. 세 살배기인 아이지만 속셈이 깊어 넌 걔를 이길 수 없어.”“어쨌든 전 강상미 엄마 노릇을 3년이나 했어요. 내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이 이상해할 거예요. 그리고 어르신도 물을 거예요.”문소영의 버림을 받을까 봐 심서연은 다급히 말했다. 지난 3년 동안 엄청난 부귀를 누려온 심서연은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까 봐 핑계를 둘러댔다.“강상미가 어떻게 온 아이인지 너와 나는 잘 알고 있어. 강상미를 너의 방패막이로 삼을 생각하지 마!”문소영은 심미연과 닮은 이 얼굴을 보고 생각에 빠졌다.‘지난 3년 동안 내가 그렇게 많은 기회를 마련해 줬어. 네가 만약 심미연 절반만큼이라도 똑똑하다면 이 기회를 잡았을 텐데 넌 아직도 강지한과 잠자리조차 가지지 못했어. 그러고는 감히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강지한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다니.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네.’“하지만 전에 저에게 임신하기만 하면 지한 씨와 결혼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심서연은 문소영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다. 할 수도 없는 일을 감히 약속하다니.“심서연, 잘 들어. 지금 너에겐 강상미를 잘 키우는 길밖에 없어. 강상미가 하루를 산다면 너도 상미 곁에서 엄마라는 말을 들으며 함께 살 수 있어. 하지만 상미가 죽으면 너도 강씨 가문에서 쫓겨날 거야.”문소영이 또박또박 말했다.심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속의 모든 감
“그 여자는 내 얼굴을 꼬집고 내 손을 잡아당겼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소리도 질렀어요. 아무튼, 엄청 무서웠어요.”그러면서 심태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킨 후 또 손목을 흔들어 보였다.“전에 엄마에게 말했잖아요.”심미연은 그제야 공항에서 있었던 이 작은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이 사건에 대해 박유진이 조사하고 있는데 아직 결론이 없었다.‘혹시 아직 찾지 못한 건 아닐까?’“하지만 저는 방금 그 여자에게 복수했어요. 엄마, 미리 말하지만 저는 그저 앞으로 여동생을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했을 뿐 모함하지 않았어요.”심태하가 득의만면해서 말하자 심미연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너 무슨 짓을 했어!”“그 여자의 휴대폰에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는 경고문을 넣었어요.”심태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의 말을 듣고 심미연은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 심태하는 비록 어리지만 사리가 밝아 함부로 괴롭히지 않는다. 그 여자가 먼저 심태하를 괴롭혔으니 반격하는 것도 틀린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이때 심서연이 문소영의 거처에 도착하자 기사가 대신 문을 열어주었다.“심서연 씨, 차에서 내리시죠.”심서연은 치맛자락을 들고 내리며 기사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곧 나올 거예요.”기사는 차 옆에 단정히 서서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차분하게 말했다.“저는 강 대표님의 지시를 따릅니다.”즉 강 대표님이 기다리라고 지시하지 않았으면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화가 나서 표정이 찌그러진 심서연은 기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강지한에게 고자질하려고 했다.휴대폰을 열자마자 화면에 커다란 피투성이가 된 입이 보였는데 그 입에서는 저주를 퍼붓는 것처럼 끊임없이 문자가 튀어나왔다. 자세히 보니 그 얼굴을 뜻밖에도 그녀의 것이었다.심미연은 깜짝놀라더니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이게 누가 한 짓이야!”‘나에게 잡히기만 한다면 가죽을 벗겨버릴 거야. 괘씸한 놈.’기사는 그녀가 화내는 모습을 보고는 즉시 운전석에 올라탄
신하린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분명히 쌍둥이를 임신했는데 하나를 잃었으니 지난 몇 년 동안 심미연이 어떻게 버텼는지도 모른다.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심미연은 위층으로 올라가 조용히 심태하의 방문을 열었다.방안의 카펫 위에 작은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 앞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는 온통 코드로 가득 차 있다.심미연은 발을 들여놓지 않고 오히려 손을 들어 노크했다.노크 소리에 작은 아이는 신속히 노트북을 닫은 후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엄마, 무슨 일 있어요?”심미연은 그의 비밀을 들켜버린 것처럼 켕겨 하는 모습을 보고 묻지 않았다.“임현 이모가 맛있는 음식을 사준다고 했으니 나갈 준비를 해야 해.”그녀는 무심코 바닥에 놓인 컴퓨터를 힐끗 보았다.‘이 녀석이 방금 무엇을 하고 있었지?’심태하는 즉시 그녀를 향해 달려와 품에 안기며 고개를 들어 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엄마, 너무 사랑해요!”심미연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만지며 부드럽게 웃었다.“엄마가 말했지? 해킹 기술로 다른 사람을 모함하지 않으면 난 화내지 않아.”이 녀석은 항상 입에 발린 말을 하며 그녀를 즐겁게 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예요!”심태하는 미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난 가끔 나쁜 사람을 벌할 뿐이에요.”“엄마는 널 믿어. 됐어, 우리 이제 밥 먹으러 가야지.”언제든지 심미연은 아들을 무조건 믿었다.“엄마 최고예요!”심태하는 그녀의 다리를 껴안고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는데 이 친근한 동작에 심미연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려 손을 뻗어 그를 안아 올렸다.심태하는 그녀의 목을 껴안고 작은 얼굴을 내밀어 얼굴에 뽀뽀했다.“엄마, 저를 아들로 낳아주셔서 고마워요.”그의 주변에 있는 어린아이들의 엄마는 걸핏하면 때리거나 욕했는데 그의 엄마는 이렇게 대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런 엄마가 있어 행복했고 심지어 하늘이 준 행복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변호사님, 방금 소송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드렸어요. 집에 도착했어요?”임현의 목소리는 경쾌했다.“이미 도착했어요. 점심 식사 함께할래요?”심미연이 물었다. 당시 그녀가 바다에 떠밀려 죽었다는 현상을 만든 후 제일 먼저 연결한 사람이 바로 임현이다.온지유의 사건은 그녀가 직접 법정에 나설 수 없어 임현에게 부탁했다.그녀와 3년 동안 함께 했고 또 임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절대 그녀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임현은 이 소송으로 경성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 후 심미연은 신하린과 로펌을 오픈했고 임현도 도우려고 함께 참여했다.지난 3년 동안 로펌이 신속하게 발전할 수 있는 데는 임현의 헌신적인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현재 임현은 이미 동업자가 되어 연봉이 수억 원에 달했다.“경성에 새로운 인기 레스토랑이 열렸는데 많은 사람이 방문하러 가더라고요. 듣기론 디저트가 아주 맛있다고 하던데 태하도 좋아하잖아요? 태하데리고 이 레스토랑에 가보는게 어떨까요?”신분, 지위, 돈 등 모든 것을 얻은 임현은 심미연이 발탁해준 은혜에 항상 감사했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심미연이 돌아오자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좋아요!”심미연은 먹는 것에 대해 가리지 않았지만 오히려 심태하는 편식했고 많은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유독 단 음식을 좋아했다.심미연은 예전에 강지한도 단 음식을 좋아했던 것을 떠올렸다.그녀가 웃을까 봐 몰래 훔쳐먹곤 했는데 심미연은 알면서도 까밝히지 않았다.심태하는 생긴 것은 물론 먹는 것까지 강지한과 똑같았다...“그럼 제가 룸을 하나 예약할게요. 천천히 준비하고 나오시면 되니 서두르지 마세요.”“알았어요.”심미연은 말을 마친 후 전화를 끊었다.신하린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임현 씨야?”심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하린은 그녀를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때 나 몰래 떠나면서 오히려 개인적으로 임현 씨와 연락하더라고. 이건 내가 너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라는 거잖아.”사실 이 일에 대해 심미연은 설명한 적이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