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진은 그녀의 상태가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다시 바닥에 내려줬다.“그럼 이야기 나누고 있어. 난 가서 전화 받을게.”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흔들었다.하지만 이런 모습마저 강지한의 눈에는 아주 애틋하게 느껴져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심미연, 감히 날 이런 취급해? 간이 부었네?’박유진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심미연은 강지한에게 다가왔다.아까까지는 너무 괴로웠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았다.그리고 강지한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한테 주겠다고 했던 그 재산들이 아까우면 나랑 같이 살 때 당신이 온지유 씨한테 줬던 선물, 집, 차, 미용원까지 전부 다 받아와. 그리고 다시 재산 나누던지.”어차피 그녀는 앞으로도 변호사 일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별로 창피하지도 않았다.그저 강지한만 버텨내면 된다.심미연의 말을 들은 강지한은 순간 눈빛이 살벌해졌다.“변호사라 그런지 말주변 하나는 끝내주네. 나는 지금 너랑 저 떳떳하지 못한 남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온지유는 왜 갑자기 튀어나와? 그리고 가만히 있는 여자를 왜 자꾸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예전의 심미연은 항상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이어서 그녀를 다루기 참 쉽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참 악독하고 못된 사람인 것 같았다.“그러는 당신은 온지유 씨랑 붙어 먹은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 사실을 전 경성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무슨 자격으로 내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거야?”다시 살아난 심미연은 전투력이 슬슬 올라가는 것 같았다.강지한은 듣다 보니 짜증이 밀려왔다.“나랑 온지유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했지? 헛소리 그만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심미연은 핸드폰에 뜬 발신자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강지한은 온지유한테서 걸려 온 전화인 걸 확인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끊자마자 또다시 전화가
심미연은 강지한의 반응이 너무 웃겼다.박유진과 심미연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자신과 온지유 이야기만 나오면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이기적인 인간!’“미연아, 만약 미르 파크에 돌아가기 싫으면 내가 매일 제때 집에 가서 너랑 같이 저녁 먹을게. 어때? 네가 받아들인다면 그 넥타이를 박유진 씨한테 줬던 일은 내가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게.”강지한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심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조금 비참해 보이고 비굴해 보여도 심미연이 자기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었다.“강지한 씨, 정신과 치료 좀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심미연은 너무 진지한 그의 모습에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뻔했다.그의 내연녀가 되면 돈도 많이 받고 직업도 자유롭다.다른 여자였으면 분명 구미가 당겨 바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텐데 아쉽게도 심미연은 이제 강지한에 대한 감정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아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심미연, 내가 지금 좋게 말할 때 받아들여. 나중에 사서 고생하지 말고.”강지한은 아까보다 한껏 낮은 말투로 말했는데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백번 양보해서 그 넥타이 사건은 이제 따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도리어 강지한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비꼬았다.심미연은 짜증이 섞인 얼굴로 그에게 답했다.“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두 번 다시는 지한 씨한테 돌아가지 않을 거야. 만약 온지유 씨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면 다른 여자라도 찾아보던지. 아마 기꺼이 당신 성욕을 만족시켜 줄 테니까.”저 말도 안 되는 제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의 말에 강지한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아직 상황판단이 안되나 보네.”말을 마친 뒤 그는 자리를 떴다.그리고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서야 심미연은 그가 진짜 떠났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박유진이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미연아, 그 사람은 갔어?”심미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응. 오빠도 그만 가봐. 나
그날 백화점에서 심미연이 넥타이를 사 가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똑같은 걸 사서 박유진한테 보냈을 것이다.그래서 오늘 강지한이 갑자기 찾아와서 질투심에 불타올라 난리를 쳤던 것이고.“그래. 지금 가서 카드 가져올게.”박유진은 한껏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어차피 거짓말한 것도 아니기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그럼 난 먼저 올라가 볼게.”박유진은 심미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이때, 갑자기 박유진의 핸드폰이 울려서 바로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통화가 끝나자마자 그는 차에 올라탔다.심미연이 집에 들어서니 신하린한테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혹시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나 걱정되어서 전화했으리라 생각하고 냉큼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런 신하린의 변함없는 마음이 심미연은 언제나 너무 고마웠고 오직 그녀만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미연아, 난 네가 혼자 있는 게 너무 불안해. 내가 옆에서 돌봐줄까, 아니면 도우미 아주머니라도 불러줄까? 둘 중에 네가 선택해.”신하린은 혹시나 심미연이 나쁜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너무 무서웠다.“그럴 필요 없어. 정말 괜찮다니까.”아직 배도 덜 나왔고 몸이 그렇게 무겁지 않아서 혼자라도 상관없었다.신하린은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그래. 알겠어. 혹시나 무슨 일이 있거나 몸이 이상하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심미연은 거실 창문 앞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신하린에게 고백했다.“하린아, 방금 지한 씨가... 한바탕 난리 치다가 갔어. 날 먹여 살리겠대. 그러면서 카드도 주더라.”신하린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뭐? 그 인간이 구연궁까지 찾아갔다고? 진짜 미친 거 아니야?”신하린은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 그녀의 눈에는 강지한이 그저 쇼하는 걸로 보였다.심미연은 수화기 너머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천천히 소파 쪽으로 가서 앉았다.“그 사람도 그저 일시적인 충동에 그런 말을 했을 거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미연아, 걱정하지 마. 내가 부탁해서 알아볼 테니까.”신하린은 화면을 통해 한껏 단호한 목소리로 심미연을 안심시켰다.듣고 있던 심미연도 알 수 없는 안도감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누가 넥타이를 샀는지만 알아내면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쉬울 것이다.“피곤해 보이는데 이만 쉬어. 이따 다시 얘기하자.”신하린은 핏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순간 가슴이 아팠다.“그래. 난 좀 쉴게.”심미연은 말을 마친 뒤 영상 통화를 껐다.신하린은 꺼진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차갑고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순간 멍해진 신하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는데 이진영이 의도적으로 그녀와 선을 긋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말해.”이진영은 살짝 짜증이 났는지 말투가 아까보다 더욱 어둡게 들렸다.“부탁할 일이 있어서 전화했는데요.”신하린은 어떻게 말해야 이 남자가 자기 부탁을 들어줄지 한참 동안 고민했다.“침대 밖에서는 우리가 남남인 척해야 한다며? 함부로 낯선 사람에게 도움 요청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야?”하지만 말과는 달리 이진영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기분이 좋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실례했어요.”순간 신하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이진영을 통하면 분명 백화점 판매 기록을 빠르게 찾을 수 있겠지만 그가 싫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혼자 해결해야 했다.이 시각, 심미연은 심란했던 기분이 신하린과의 수다로 조금 풀린 것 같아 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소파에 담요를 덮고 누워서 TV를 보기 시작했다.공교롭게도 TV에서는 온지유에 대한 인터뷰를 라이브로 진행하고 있었다. 화면 속 온지유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한 모습이었는데 심미연은 무의식적으로 담요를 손에 꼭 쥐고 머리는 소파 팔걸이에 기댄 채 유산했다던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몸도 채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 벌써 나와서 인터뷰까지 한다고? 열심히 사네.”사실 온지유라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졌다.이때, 갑자기 온지유의 낯빛이 변하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면서 기절했고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빨리 119 불러!”“라이브 꺼요!”심미연은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역시 수법이 너무 단순해.’그리고 리모컨으로 전원 버튼을 누르자 TV 화면이 꺼지면서 거실도 조용해졌다.심미연은 이미 색이 바래진 스크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머릿속에 갑자기 수많은 화면이 스쳐 지나가면서 마음이 심란해졌다.온지유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자신과 강지한은 애틋한 사이란걸 연기했는데 거의 배우 뺨치는 수준이었다.순간 두통이 몰려와 심미연은 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다가 그만 소파에서 잠이 들어버렸고 이상한 꿈까지 꾸게 되었다.꿈속의 하늘은 이미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천둥소리는 마치 불길함을 예고하는 듯 요란했다.이때 갑자기 두 명의 어린아이의 그림자가 비치면서 안개 속을 헤집고 그녀 쪽으로 뛰쳐나왔다.그들은 초라한 옷차림과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심미연의 두 다리를 꼭 껴안으면서 끊임없이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다.심미연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지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손을 뻗자마자 아이들의 가슴을 찢는 듯한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엄마, 저 좀 살려주세요. 저 사람들이 저희를 죽이려 해요!”아이의 목소리는 심미연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애써 손을 내밀어 위로를 건네려다 보니 어느새 자기 두 손도 떨고 있었다. 주위의 공기도 마치 응고된 것처럼 점점 숨쉬기조차 어려워졌다.바로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더니 나지막하고 차가운 웃음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심미연은 애써 고개를 들고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려 했지만 그 사람은 어둠 속에서 마치 저승사자처럼 그림자 형태로 그녀에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심미연은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알 수 없는
[가면 알게 될 거야.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박유진은 단언하듯 말했다. 그는 심미연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승낙하려던 찰나 또 전화가 걸려 왔다. 심미연은 화면에 깜빡이는 ‘강 씨 저택’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유진 오빠, 나 먼저 전화 좀 받고 다시 말해도 될까?” 이미 강지한과 이혼한 사이였지만 강준형의 전화는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강준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알았어. 먼저 전화 받아. 기다릴게.” 박유진은 언제나 온화하고 세련된 도련님처럼 보였다. 심미연은 화면을 가볍게 몇 번 터치한 후 전화를 받았다. “미연아, 오늘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먹어. 내가 직접 시장에 가서 장도 봐 왔단다.” 강준형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단호함 속에 어딘가 모르게 따뜻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할아버지, 저랑 지한 씨는 이미 이혼했잖아요.” 심미연은 강지한이 전에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르며 본가에 돌아갔다가 그와 마주칠까 봐 걱정이 밀려왔다. ‘혹시 지한 씨가 내가 마음이 바뀐 줄 알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일부러 할아버지에게 찾아가 내연녀라도 되게 해달라고 부탁한 줄 알겠어!’“너희가 이미 이혼한 건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데 그게 우리가 같이 밥 한 끼 먹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 강준형은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음 섞인 말투였다. 지금 기분이 아주 좋은 게 확 느껴졌다. 다만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은 이 기회에 심미연에게 젊고 능력 있는 상대를 소개해 주려는 거였다. 하지만 이 말을 미리 꺼내면 심미연이 너무 놀랄까 봐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고 복잡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강지한과 마주칠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심미연은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 박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연아, 갈
분위기는 순식간에 미묘하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가에 웃음이 더 깊어졌다. 그는 일부러 심미연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낮고 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절한 지 몇 시간 만에 벌써 생각이 바뀌었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마음이 생긴 거야? 강 부인, 너무 원칙이 없는 거 아냐? 소문이라도 나면 누가 너한테 소송 걸자고 찾아가겠어.” 그가 말을 내뱉는 사이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심미연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심미연은 주먹을 꽉 쥐며 손톱이 거의 손바닥에 박힐 정도였지만 여전히 숨이 막힐 듯한 차가운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몸을 살짝 비켜 강지한과 가까운 접촉을 피하며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 “강 대표님,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네요. 난 이제 당신과 어떤 연관도 있고 싶지 않아요. 그냥 할아버지랑 밥 한 끼 먹으러 온 거고 당신을 만난 건 그저 우연이에요.”말을 끝낸 그녀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 홀로 남은 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눈빛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 뜻밖의 만남은 마치 총성이 울리지 않는 전쟁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서서히 퍼져나갔다. 결국 누가 승자가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미연아, 네가 좀 더 늦게 왔으면 내가 사람 보내서 데리러 갈 뻔했어.” 강준형의 힘찬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그녀는 가슴 속 안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미연은 빠르게 그의 앞에 다가갔다. 가방을 그의 손에 건넨 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차가 막혀서 좀 늦었어요. 그리고 이건 할아버지께 드리려고 산 무릎 보호대예요. 무릎 상태가 안 좋으시잖아요. 날씨가 더 추워지면 필요할 것 같아서요.”강지한이 들어오며 할아버지가 심미연에게 보이는 다정한 모습에 미묘한 질투를 느꼈다. ‘누가 진짜 친손자인지 모르겠네.’ 강준형은 고개를 들어 강지한과 시선이 마주치자 금세 웃음을 지었던 얼굴을 확 굳어버
여자의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는 모습이 강지한을 자극했다. 입술 끝에서 은은하게 미소가 번지며 그 곡선이 매혹적으로 빛났다. 그의 손끝이 여자의 다리 위에서 원을 그리듯 스쳤고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흘러나왔다. “심미연 씨, 왜 이렇게 나 쳐다봐? 내가 그렇게 멋있어?”‘말 진짜 뻔뻔하게 하네.’ 심미연을 이를 갈며 남자의 장난치고 있던 손을 잡아 확 꼬집었다. ‘이미 전남편 전처인데 왜 자꾸 이렇게 은근슬쩍 다가오는 거지? 예전엔 강지한이 이렇게 뻔뻔한 사람인 줄 몰랐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이 여자 진짜 손끝이 세네.’ ‘너무 아프잖아!’ 하지만 손이 아파도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강준형은 그릇에 국을 담아 심미연 앞에 놓으며 그녀가 화가 나 얼굴이 빨개진 모습을 보고는 강지한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줄 알았다. 그는 강지한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다그쳤다. “빨리 먹고 가!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그는 그저 심미연이랑 조용히 식사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는 강지한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강지한이 지금까지 심미연에게 상처를 준 모든 일을 기억했다. 그런 사람을 절대로 도와줄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 저야말로 당신 친손자잖아요! 쟤는 남인데 왜 저 대신 쟤를 도와주는 거예요?” 강지한은 말하면서도 손과 발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심미연을 괴롭히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예전에 심미연이 눈앞에 있을 때는 그녀가 따분하고 거슬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 집에서 혼자 한나절을 보내니 집안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강준형을 찾아가 심미연을 설득해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려 했는데 여기서 그녀를 뜻밖에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근데 할아버지도 참. 심미연만 불러서 밥을 먹자고 하고 정작 친손자인 나한텐 말 한마디도 없으시네.’‘편애도 정도가 있지. 이건 뭐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야?’ 강지한이 그렇게 웃는
“지한 씨가 날 사랑하는 거 너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땐 잘만 참더니 지금은 왜 못 참아?” 온지유는 심미연의 말에 단번에 반응했다. 두 사람이 강지한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도 내 편이야. 이건 기회야.’ 오늘 이 자리에서 심미연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지한 씨랑 재혼? 웃기고 있네.’ 온지유의 도발에 심미연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뼛속까지 아끼고 감쌌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예전엔 내가 눈이 멀었지. 하지만 지금은 눈이 멀쩡해. 그러니까 이제는 참을 이유도 없어.” 심미연은 담담히 웃으며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머릿결이 살짝 감겼고 그 모습은 어딘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참아줄 때 당장 꺼져.” 예전엔 강지한을 사랑했기에 온갖 수모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이었고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심미연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온지유가 계속 도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구도 그녀를 탓할 순 없었다. 박시훈은 그런 심미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역시 달랐다. 머리카락 한 올 넘기는 그 동작조차도 치명적으로 보였다. 예전엔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그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문제는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상태하는 것. ‘이제는 미연 씨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박시훈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온지유는 심미연의 여유로운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심미연, 분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강지한 이름만 꺼내도 감정이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목적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심
심미연은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나오기 전에 꽤나 공을 들여 꾸미고 온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 위엔 파운데이션이 지나치게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마치 밀가루를 덕지덕지 얹은 듯 자연스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한 씨가 내가 안에서 고생하는 거 못 본다고... 날 꺼내줬어.” 온지유는 등을 곧게 펴고 얼굴 가득 자부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심미연, 지한 씨랑 재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 말을 들은 박시훈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강지한이 직접 저 여자를 꺼냈다고?’ 그는 불과 얼마 전, 온지유가 출고했다는 사실을 강지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결국 바보는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심미연의 눈동자가 조용히 온지유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건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섬세한 곡선. “그래?” 낮고 담담한 목소리. 마치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속을 들키지 않는 말투였다. 온지유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심미연은 문득 의심했다. ‘혹시... 강지한이 뒤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이제 이렇게 사실로 마주하니 심장이 조용히 찌릿하고 아려왔다. 그녀는 과거, 온지유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 그 여자가 평생 거기서 썩기를 바랐다. 하지만 겨우 4년. 너무도 빠른 재등장이었다. ‘강지한... 온지유한테 진심이긴 진심이었나 보네.’심미연의 눈빛에 눌린 온지유는 순간 몸이 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덮쳐왔고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그럼.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든가.” 그녀의 말은 당당했지만 박시훈이 보내는 미묘한 시선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혹시... 이 남자, 뭐라도 눈치 챈 건 아니겠지?’‘아냐. 아닐 거야. 괜한 걱정 하지 말자.’하지만 박시훈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몰래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
‘왜? 심미연을 보호하려고?’박시훈은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바짝 다가온 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줄게요. 미연 씨를 짝사랑하고 있어요. 고백했다가 차였고요.”심미연에게 거절당한 건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지유의 표정은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럴 리 없어요. 당신 지한 씨 친구라면서요? 심미연이 지한 씨한테 몇 번이나 안겼는지도 모르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졌고 시선엔 뚜렷한 분노가 일렁였다. ‘심미연이 뭐라고... 도대체 왜 다들 심미연만 좋아하는데?’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심미연이 있는 자리는 늘 그녀가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마치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인 양. 온지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한이랑 미연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박시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미연 씨를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심미연에게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미어오는 걸 느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온지유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어딘가 모르게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심미연 같은 중고품이 이렇게 인기 많다고?’‘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야. 말도 안 돼.’“딩.”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심미연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청아했고 단아했다. 말없이 걸어 나오는 짧은 그 순간마저 도도하게 빛나는 존재감으로 공간을 압도했다. 그건 단순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절제된 기품, 고요하지만 단단한 아우라. 심미연이라는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박시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운 듯 조심스
강지한의 목소리는 다소 불쾌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어조가 단호하고 차가웠다. 듣자마자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박시훈은 더는 망설일 여유도 없이 다급히 말했다. “온지유가 지금 은성 빌딩 로비로 들어갔어. 혹시라도 둘이 마주치면 싸움이라도 날까 봐... 너 빨리 와봐.” 숨도 제대로 못 고르고 내뱉은 말이었다. 급하게 말하다 목이 막힌 박시훈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너 먼저 막고 있어. 나 바로 갈게.” 강지한의 목소리엔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박시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강지한은 온지유한테 여전히 똑같네. 참 미련한 놈이지.’ 하지만 그가 온지유를 막으라고 했으니 일단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지유가 정말로 위층까지 올라가서 둘이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박시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지금 당장 막아야 했다. 안 그러면 강지한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온지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친 건 박시훈이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절 아세요?” 온지유는 낯선 남자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를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아는 듯한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이랑 아는 사이면 당신도 알죠.”박시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얄밉고 교활한 구석이 느껴졌다. ‘강지한이 눈이 정말 많이 멀었지. 저런 여잘 좋다고...’“지한 씨 친구라고요? 근데 전 왜 처음 보죠?” 온지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지한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익숙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지금 알면 됐죠. 그리고 지한이가 방금 전화했어요. 당신한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