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기사는 문득 백미러로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참 잘 어울린다고 속으로 감탄했다.그렇게 모두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 차는 법원에 도착했다.문 앞에 도착해 보니 예전에 그 변호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심미연은 왠지 씁쓸해졌다.이것도 인연이라고 해야 하는지.“강 대표님, 사모님, 이건 이혼 합의서인데 두 분께서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두 사람의 이혼 사건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이렇게 이혼 합의서를 직접 가져다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심미연은 서류를 건네받고 읽어 보다가 깜짝 놀랐다.합의서에는 그녀에게 재산 200억을 나눠주고, 추가로 시가 100억 정도 되는 별장과 벤틀리 한 대까지 주겠다고 적혀있었다.강지한이 이만큼 넘겨주는 것과 또 강준형이 주는 주식까지 합치면 이혼하자마자 졸부가 되는 셈이다.하지만 심미연은 바로 사인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강지한에게 물었다.“서류가 잘못된 건 아니지?”“내가 너한테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단 건 알고 있는데 이혼해도 물질적인 보장은 내가 해주고 싶어. 미연아, 그냥 사인해.”사실 다른 목적이 있긴 했다.만약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두 사람은 완전히 끝날 것 같았고 혹시나 순순히 이혼해 주면 그래도 나중에 심미연이 얼굴은 보여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녀와 완전히 인연이 끊어지는 건 싫었다.그러자 심미연이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확실해?”3년이라는 시간 동안 생활비라고는 고작 몇천만 원만 내놓던 사람이라 여태껏 깍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혼하려니까 갑자기 통이 큰 모습을 보여주니 의심이 드는 게 당연했다.“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나 정신이 말짱하니까 걱정하지 마.”강지한이 다시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이 여자가 애초에 자기 재력만 보고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내숭을 떠나 싶었다.“그래. 일단 사인할 테니까 혹시나 후회되면 바로 말해. 받았던 물건들은 다 돌려줄 테니까.”심미연은 혹시나 나중에 강지한이 정신 차리고 오늘의 일이
심미연은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제가 상상 임신이라도 했을까 봐요?”변호사는 심미연의 대답을 듣고 난처해졌다.‘잠자리도 안 가지는 부부였네.’보아하니 부부가 금실이 좋아지려면 속궁합도 잘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강지한이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차갑게 말했다.“역시 변호사라 그런지 예리하시네.”“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나랑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볼까?”이 순간 심미연은 혹시나 그가 진짜로 가자고 할까 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뱃속에는 아이가 하나가 아닌 둘이 있기 때문이다.하여 지금 검사하면 바로 알아낼 수 있는데 강지한의 의심을 거두려면 어쩔 수 없이 세게 나가야 했다.그리고 강지한이 결국에는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내가 네 말을 안 믿는다고 했어?”강지한이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그제야 예상대로 자기 말을 믿어주는 것 같아 심미연은 살짝 안심할 수 있었고 검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임신이 아닌 게 확실하면 두 분께서는 여기에 사인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사인하시기 전에 혹시나 다시 한번 고민해 보실 필요 없는지 확인 부탁드릴게요. 일단 서류에 사인하는 즉시 이혼으로 확정되는 거라서요.”변호사는 끝까지 자기 임무에 충실했다.하지만 심미연은 순간 짜증이 몰려왔다.서류에 사인만 하면 되는 일을 왜 이리도 시간을 끄나 싶었기 때문이다.강지한은 원래부터 이혼을 반대했던 사람인데 혹시나 변호사의 설득에 넘어가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네. 바로 사인할게요.”심미연은 재빨리 펜을 들고 서류에 사인했다.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서류를 강지한에게 넘기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9년이라는 사랑이 이렇게 끝나버렸고 이제 다시는 강지한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 순간 그녀의 기분은 유달리 평온했다.하지만 강지한은 그저 심미연의 사인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글씨가 참 정갈하고 깔끔한 게
이혼 철회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잠깐 눈을 붙였다.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의 눈빛에는 더 이상 조금의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괴로웠다.심미연이 법원에서 나오니 신하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미연아, 어디야?”“나 방금 법원에서 나왔어.”“자유의 몸이 된 걸 축하해주려고 내가 특별히 흥원각을 예약해 뒀는데 지금 데리러 갈까?”신하린은 한껏 신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혼자 갈 수 있어.”심미연은 사실 아직도 방금 강지한이 변호사에게 묻던 말이 머릿속에 떠나지 않아 마음이 심란했다.“그래. 그럼 내가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넌 천천히 와.”신하린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심미연은 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미연아, 왜 그래? 강지한 그놈이 혹시 또 널 괴롭혔어?”강준형의 목소리에 심미연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바라보았는데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할아버지...”목이 메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강지한이 이대로 순순히 이혼해 주지 않을 것 같았고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은 삶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미래가 보이지 않고 너무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왜 울어? 무슨 일인지 빨리 할아버지한테 말해.”강준형은 그녀가 우는 모습에 깜짝 놀라 재빨리 다가왔다.“한 달간의 숙려기간에 지한 씨가 만약 생각이 바뀌어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하죠?”심미연은 여태껏 너무 힘들게 버텨왔는데 또다시 이런 일이 터지니 결국 멘탈이 무너졌다.강준형은 너무 서글프게 우는 심미연을 보고 가슴이 아파 다급히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지한이가 이혼에 대해 번복하지 못하도록 이 할아버지가 막아줄게.”심미연이 강지한과 함께 있어봤자 불행하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강제적으로 두 사람을 붙여줄 수는 없었다.심미연은 어쩌면 강지한과 헤어지고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그녀가 행복하
강준형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답했다.“지한아, 너랑 미연이 관계도 오늘부로 끝났는데 난 여전히 그 애가 너무 아쉬워.”그는 강지한이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인지 살피다가 다시 어떻게 결정할지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강지한은 백미러로 그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문득 되물었다.“할아버지, 하시고 싶은 말이 뭐예요?”강준형은 당연히 심미연 편을 들겠다고 예상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지금은 알고 싶었다.“이혼을 안 하려는 거지?”강지한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네.”강지한도 굳이 숨길 마음이 없어 솔직하게 답했다.“그렇다면 난 지금 당장 법원에 전화해서 숙려기간 없이 바로 이혼 신청에 넣어달라고 말할 거야.”강준형은 핸드폰을 들고 그에게 보여줬다.“할아버지, 왜 그러세요!”강지한은 놀라기도 하고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그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친손주는 바로 저예요. 어떻게 다른 사람이랑 손을 잡고 저를 모함할 수 있어요?”그러자 강준형이 차갑게 웃으며 답했다.“난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놨어. 미연이가 너랑 이혼이 확정되면 난 내 생일에 바로 큰 잔치를 열 거야. 그리고 전 경성에서 괜찮다고 하는 젊은 남자들은 모두 참석하게 해서 미연이더러 혹시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는지 눈을 크게 뜨고 골라보라고 할 예정이야.”그때 가서 미연이를 자기 손녀도 들일 생각이다.그렇게 되면 강지한과는 부부였다가 남매사이로 되기에 한방에 단념시킬 수 있을 것이다.‘그러니까 옆에 있을 때 소중하게 여겼어야지.’“할아버지, 저랑 미연이는 이혼하려면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어요. 만약 이 기간에 미연이가 마음이 바뀌면요?”강지한은 심미연이 그토록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쉽게 그와 이혼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강준형은 백미러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고 답했다.“다른 여자였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미연이는 아니야. 그 애가 이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정말 너에 대한 모든 정이 떨어진 것이고 이혼하자고 했으면 이미 마음이 돌아섰다는
성무진은 케이스를 힐끔 바라보더니 공손하게 답했다.“이건 강 대표님께서 사모님 생일에 드리려 했던 선물입니다. 그동안 진성 쪽 일들을 처리하느라 깜빡 잊고 못 드렸다고 하셔서 오늘 마침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대표님께서 미안하다는 말도 꼭 전달해달라고 하셨습니다.”심미연은 재빨리 그 케이스만 성무진에게 돌려줬다.“합의서만 받고 이건 지한 씨한테 돌려줘요. 이제 이혼하면 남남이 되는 건데 누구에게도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전달 부탁드립니다.”“사모님, 이건...”성무진은 한껏 난감한 얼굴로 손에 든 케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이걸 다시 강지한에게 가져가면 분명 비서라는 사람이 이런 작은 일도 처리하지 못했다고 월급 깎이는 건 고사하고 해고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심미연은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신하린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성무진은 제자리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급히 심미연을 쫓아갔다.주차장까지 달려와 보니 심미연은 이미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하여 재빨리 그녀에게 달려가 차 창문을 두드렸고 심미연은 그의 모습에 차창을 내렸다.“할 말이 더 남았을까요?”심미연은 최대한 다정하게 물었다.“죄송한데 혹시 이 물건을 직접 강 대표님께 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가져다드리면 분명 뭐라 할 것 같아서요.”성무진은 고개를 수그린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확실히 강지한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심미연은 그의 손에서 다시 케이스를 뺏은 뒤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자, 이제 돌아가서 보고하셔도 됩니다.”“...”이혼하더니 심미연이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그러나 지금 모습이 오히려 더 편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적어도 강지한에게 끌려다니는 게 아닌 자기 주관이 있게 되었으니까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오빠, 빨리 가자.”심미연은 차창을 다시 올리고 앞에 앉은 박유진에게 말했다.그러자 박유진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다시 한번 자기 마음을 거절당한 박유진은 속상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말했다.“그럼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꼭 대명으로 와.”박유진은 심미연과 같이 대명을 발전시키고 싶었다.하지만 그의 말에 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아이를 낳으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벌써 예약해 두는 거야? 내가 그때 가서 아이를 낳고 더 이상 변호사 일이 하기 싫어질 수도 있잖아.”“기다릴게.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박유진의 말에는 사실 두 가지의 뜻이 담겨 있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신하린은 순간 심미연이 부러워졌다.그녀도 주변에 이렇게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가 있으면 바로 결혼했을 것이다.“나중의 일은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자.”심미연은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래. 나중에 다시 얘기해.”박유진은 재빨리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사실 넌 어렸을 때부터 춤에 소질이 있어서 나중에 댄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글쎄 뜬금없이 변호사가 될 줄은 나도 몰랐거든.”“어렸을 때는 돈이 너무 없다 보니 그저 빨리 돈만 벌고 싶었어. 그리고 나중에 커서 불공평한 일을 많이 마주치다 보니까 변호사가 되어서 정의를 실현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내가 만약 변호사가 아닌 춤의 외길을 걸었다면 아마 온지유 씨 같은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겠지?”말을 마친 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순간 너무 자기중심적인 발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혼자 운영할 수 있는 자본이 없는데 어떻게 세계 최고의 댄서가 될 수 있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상을 받을 수 있겠어?”신하린은 한껏 그녀를 비웃었다.“자기 실력이 아닌 남자 꼬시는 방법으로 최고의 무대에 오를 수는 있겠다.”아마 온지유를 모르는 사람들만이 그녀의 실력이 훌륭하다고 생각할 것이다.사실 강지한이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말이다.박유진은 심미연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진 걸 발견하고 아직 그녀가 강지한을 잊지 못했다는 걸 알아챌
강지한은 듣자마자 얼굴이 일그러졌다.대체 무얼 믿고 이리도 당당한지 알 수 없었다.“누구랑 같이 있었어?”“박유진 씨가 데리러 오셨습니다.”성무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순간 주변 공기가 몇도 차가워졌다는 걸 느끼고는 괜히 온몸이 떨렸다.“지유는 지금 어디 있어?”강지한은 계속 말했다가는 열받아 죽을 것 같아 아예 화제를 돌렸다.“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성무진도 강지한의 뜻을 잘 알지 못하니 뭐라고 더는 말을 못 했다.“그래. 일단 나가 봐.”성무진은 재빨리 사무실에서 나왔다.강지한은 그가 나가자마자 액세서리 케이스를 열어보았다.안에는 이노하이브에서 올해 런칭한 신상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있는데 디자인은 심플하지만 너무 예뻐서 금세 인기 상품으로 되었다.고를 때도 심미연의 하얗고 기다란 목에 걸어주면 분명 이쁘겠다고 상상했는데 이걸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니.바로 이때, 카톡 메시지 알람 소리가 들렸다.강지한은 재빨리 감정을 추스르고 핸드폰을 확인했다.온지유가 그에게 박유진 사진과 함께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내 기억으로는 미연 씨가 똑같은 넥타이를 샀던 것 같은데?]그녀의 한마디가 잔잔한 호수에 돌덩이를 던진 것처럼 순간 거친 파도를 만들었다.강지한은 문득 예전에 심미연이 자신에게 줄 선물이 있다고 했는데 여태껏 잊어버리고 있었다.결국에는 그 넥타이가 박유진의 목에 걸려있는 걸 본 순간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그러다가 곧 전화벨이 울렸는데 강지한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그리고 빠르게 수화기 너머에서 분노를 억누르면서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한 씨, 나도 금방 봤는데 미연 씨가 그 넥타이를... 박유진 씨한테 선물해 줬어. 두 사람이 너무 자연스러운 게 누가 봐도... 연인 같잖아.”강지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두 눈을 부릅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쾅’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내팽개치자 빠르게 서류들이 바닥
심미연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는 저렇게 활짝 웃어 보였던 적이 없던 것 같았다.지금까지 자기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눈앞의 남자를 더욱 사랑하는 것 같기도 했다.그리고 3년 동안이나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순간 강지한은 누군가가 자기 목을 조르기라도 하듯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고 분노가 차오르는 동시에 알 수 없는 무력감까지 느꼈다.그리고 오늘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 그의 세상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그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그러나 또다시 시야에 두 사람의 애틋한 모습이 들어온 순간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순식간에 화르르 불타오르더니 마지막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심미연!”강지한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불렀는데 목소리에는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과 분노가 가득했다.예전의 그 차분했던 강지한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감정에 사로잡힌 보통 남자들처럼 운명의 기로에 서서 전례 없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심미연이 찢어질 듯한 누군가의 부름에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니 강지한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맞은편에 서 있었다.‘저 사람이 왜 갑자기 왔지?’박유진도 강지한을 발견했지만 왜 그리도 화가 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있었다.이 시각,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공기 중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면서 세상이 멈춘 것처럼 삽시에 고요했다.이때 강지한이 성큼성큼 심미연한테로 걸어가더니 그녀가 방심한 틈에 거칠게 팔을 끌어당겨 자기 품에 안았다.심미연은 그의 가슴에 부딪히는 순간 머리가 울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강지한 씨, 이거 놔!”심미연은 애써 정신을 차리고 그를 힘껏 밀치며 소리쳤다.“이혼하자마자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시시덕거리고 있어?”강지한은 한껏 차가운 목소리로 싸늘하게 웃더니 분노에 찬 말을 내뱉었다.그의 얼굴만 보아도 지금 매우 화가 난 상태인 것 같았고 예전에 부드럽게 심미연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도 지금은 마치 올가미처럼
잠시 후 그녀는 메시지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온지유의 셀카 한 장이 담겨 있었다. 셀카 뒤로 보이는 뒤편 벽에는 예전에 그녀가 사람을 시켜서 합성한 강지한과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결혼사진을 걸었을 당시 강지한은 비웃으며 조롱했었다. 그녀는 그저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고 그의 조롱 따위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고집으로 그 사진은 3년 동안 그대로 벽에 걸려 있었다. 이사를 할 때 서두르다 보니 사진을 내려서 없애는 걸 깜빡했다.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온지유가 벌써 그 집에 들어갈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정말 성급하기도 하네.’그런데 아까 본가에서 밥 먹을 때 강지한은 그녀에게 무례한 장난을 쳤었다. ‘재밌네.’그녀는 이제 강지한에 대한 감정은 모두 놓아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사진을 봤을 때 아마 속이 뒤집혔을 것이다. 사진을 지우려던 찰나 온지유의 전화가 걸려 왔다. 심미연은 온지유가 단지 자신에게 자랑하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지한에게 더 이상 마음이 없는 그녀는 그와 온지유의 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온지유 같은 아무런 자존심도 없이 끝까지 낮아지는 사람은 정말로 그녀의 세계관을 새롭게 만들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온지유의 메시지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섹시한 속옷 차림의 사진이었다. 심미연은 전에 한 번 그런 걸 샀던 기억이 났지만 그걸 어디다 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심미연은 강지한에게 선물했던 그 넥타이를 떠올렸다. 아마 아직도 옷장에 있을 거다. 온지유가 전화를 받지 않자 그녀는 한 장 한 장 점점 더 노골적인 셀카를 계속 보내왔다. 심미연은 속으로 잠깐 욕을 뱉고 그 사진들을 바로 강지한의 이메일로 보내버렸다. ‘둘이 진짜 끼리끼리네.’ ‘앞으로 둘이 평생가라! 서로 다른 사람 건드리지 말고!’사진을 보내고 난 후 심미연의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심미연은 잠도
‘그냥 묻지 않는 게 나을지도.’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는 분명히 알게 될 테니까. 강준형의 말에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손끝을 꽉 움켜쥐었고 손에 쥔 상자가 손바닥을 아프게 찔렀다. ‘혹시 할아버지가 임신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걸까?’ “괜찮아. 내가 묻지 않은 걸로 하자.” 강준형은 그녀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강준형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실망감에 심미연은 마음이 무거웠다. 입을 열려 했지만 말이 나오기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하려던 말을 삼켜버리고 말했다. 강준형은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물었다. “누구냐?”“저예요.”문밖에서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미연은 강준형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러면 저는 먼저 갈게요.”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그래. 조심해서 가고 집에 도착하면 꼭 연락해. 아니면 걱정되니까.” 강준형은 그녀를 붙잡을 수 없어 그냥 보내주기로 했다. 심미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나갔다. 문이 열렸다.심미연은 고개를 숙인 채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에 쥔 상자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고 급하게 앞으로 걸었다. “심미연, 나 못 봤어?”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아당기며 말투가 썩 좋지 않았다. 심미연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불쾌한 감정이 역력했다. “왜 이렇게 아프게 잡아!” 강지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풀어주었다.“심미연, 우리 얘기 좀 하자.” 남자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는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나 피곤해. 내일 얘기할 수 있을까?” 강준형이 말한 강지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지금 강지한을 마주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일이면 괜찮을 것이다. “너 아픈 거야?” 강지한은 그녀의 얼굴이 좋지 않은 걸 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주 건강해. 아프지
“미연아, 이렇게 부탁하는 게 너한테 참으로 미안한 일이란 건 알아. 하지만 말이다. 나도 나이가 많고 몸도 예전 같지가 않아. 언제 잠들어서 다시는 못 깨어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강준형은 말하며 눈가가 붉어졌다. 심미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손에 든 상자를 무의식적으로 더 꼭 쥐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할아버지께서는 꼭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장수하실 거예요!” 강준형은 잔잔히 웃었다. “이 나이 먹도록 살아보니 이제는 생사에 연연하지 않게 됐단다. 내가 떠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네 인생을 잘 살아.” 그는 심미연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그 빚을 갚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남은 시간 동안 그녀가 아끼고 사랑받으며 살길 바랐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바람이었다. 심미연은 강준형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안함이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그의 모습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려는 순간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심미연은 하던 말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미연아,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까?” 박유진의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포근하게 들려왔다. “나 차 갖고 나왔어. 데리러 안 와도 돼. 고마워.” 말하는 내내 심미연의 미간은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준형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강지한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이건 다른 사람 탓할 것도 없고 전부 강지한이 자초한 일이다. “나한테 굳이 예의 차릴 거 없어.” 박유진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래. 그럼 일 봐. 내일 다시 연락할게!” 사실 그는 하루 24시간을 다 써서라도 심미연을 보고 싶었고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전에는 심미연이 이혼하지 않았기에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심미연이 이혼했으니 그
옷을 하나씩 입어보고 다시 벗으면서 시간은 서서히 흘러갔지만 온지유의 마음은 전례 없는 채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그녀는 강지한을 만나야 했다! 그 어떤 때보다 간절하게! 서재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조명이 흐릿하게 비추는 고풍스러운 가구들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공기 속에는 짙고 무거운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심미연은 넓은 책상 앞에 서서 두 손을 자연스레 교차시킨 채 눈빛은 혼란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준형은 천천히 일어나 뒤에 있는 오래된 나무 장롱에서 정교한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상자의 표면은 살짝 청동빛을 띠고 있었고 가장자리에 섬세한 연꽃 문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마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그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심미연의 떨리는 손에 놓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그의 손은 오히려 더욱 강하고 엄숙하게 느껴졌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뒤 강준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강지한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물건이야. 이 집에 그리고 강지한에게 남긴 유일한 물건이지. 이걸 네게 전하는 이유는 강지한 대신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동시에 그녀의 죽음의 진실도 밝혀 주길 바란다.” 강준형의 목소리는 낮고 무게가 실려 있었으며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거대한 망치처럼 심미연의 마음을 강하게 치는 듯했다. 심미연은 손에 쥔 상자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준형을 바라보며 눈빛 속에 의문과 불안이 가득 차올랐다. “왜... 왜 저한테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마치 자신이 이 막중한 책임을 맡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아연하기까지 했다. 이건 다름 아닌 강지한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강준형은 긴 한숨을 내쉬며 눈빛이 점점 더 깊고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는 오랜 시간 감춰왔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강지한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강준형의 목소리를 듣고 심미연은 잠시 멈칫했다가 바로 그 말속의 뜻을 알아차리고 급히 고개를 떨구며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강준형의 발이 그대로 그녀의 발밑에 있었다. 조금 전 너무 화가 나서 어느 방향인지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그냥 밟아버린 것이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심미연은 계속해서 사과의 말을 했다. “다 네 탓이야. 흥!”강준형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미 다 이해하고 있었다. 그도 젊었을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을 다시 엮는 건 원치 않았기에 강지한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할아버지, 너무 편파적이세요.”강지한은 내내 기분이 불쾌했다. ‘예전엔 나랑 심미연을 이어주려고 애쓰지 않았나?’‘왜 오늘은 입도 떼지 않으시지?’ “밥 먹자.”강준형은 두 사람을 한 번 훑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지한도 지지 않으려는 듯 심미연을 단단히 쏘아보고 있었다. 심미연은 못 본 척하며 고개를 숙여 밥에 집중했다. 강준형은 다시 강지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밥 먹어!”강지한은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여 먹기 시작했다. 한 끼 식사가 끝날 무렵. 정교한 식기들이 살며시 부딪쳐 미세하고 맑은 소리를 냈다. 강준형은 잠시 심미연에게 시선을 두었고 그 눈빛에는 깊은 응시와 기대가 섞여 있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선 후 심미연의 어깨를 가볍게 톡 치며 말했다. “미연아, 나랑 서재에 가자. 얘기할 게 있어.”그리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강지한이 일어나려던 찰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폰을 꺼냈고 화면에 떠오른 온지유의 이름을 보고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즉시 온지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후회와 무력감이 가득했다. “지한 씨, 미안해... 내가 그런 말을 라이브 방송 중 인터뷰 카메라 앞에서 하는 게 아니었어. 그 후에 생길 일들은 전혀 생각 못 했어. 제발 용서해줘...” 그녀는 애처롭게 울며 말했다.
“할아버지, 이노하이브 주식 1%를 심미연에게 다 주셨잖아요. 심미연이 할아버지를 돌보는 게 뭐가 문제에요.” 강지한이 당당하게 말했다. ‘돈이면 뭐든지 해결된다고 하지 않았나?’ ‘심미연은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야지.’“난 미연이에게 주식을 줬을 뿐 거기서 아무런 보상도 바란 적 없어!”강준형은 화가 나서 강지한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지난번에 때린 게 너무 약했던 것 같다. ‘그때 좀 더 세게 때려야 했는데!’ 심미연은 강지한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는 이미 이혼했잖아. 이제 지한 씨가 좋아하는 사람 데려와서 할아버지 돌보면 되겠네.” 예전에는 강지한과 이혼한다고 생각하면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 이혼하고 나니 슬픔은커녕 오히려 그를 조롱하며 웃을 수 있었다. ‘사랑하지 않으니 이렇게 평온하고 차분해지는구나.’ 강지한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이혼하자고 고집한 사람은 너잖아! 다른 남자랑 애매한 관계를 이어갔던 것도 너고. 지금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는 거야? 심미연, 진짜 대단하다.” “그만 먹고 빨리 나가! 계속 말하면 누가 밥 먹을 기분이 나겠어.”강준형이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강지한에게 소리쳤다. ‘자기 잘못으로 이 가정을 깨놓고 이제 와서 모든 잘못을 미연이에게 돌리다니.’‘한심한 놈.’심미연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강지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왜 온지유가 몇 개월째 임신한 일은 말 안 해?”‘이 결혼이 끝난 게 그의 외도 때문 아니었나?’‘왜 이제 와서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냐고.’“우리 사이의 일을 왜 온지유를 거론하는 거야?” 강지한은 기분이 나빴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여자는 왜 자꾸 온지유 얘기만 하는 거야.’ 강준형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미연이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할 거면 너도 미연이가 다른 남자랑 뭔가 있었다고 떠드는 거 그만둬. 강지한, 오늘 여기서 말하는데
여자의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는 모습이 강지한을 자극했다. 입술 끝에서 은은하게 미소가 번지며 그 곡선이 매혹적으로 빛났다. 그의 손끝이 여자의 다리 위에서 원을 그리듯 스쳤고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흘러나왔다. “심미연 씨, 왜 이렇게 나 쳐다봐? 내가 그렇게 멋있어?”‘말 진짜 뻔뻔하게 하네.’ 심미연을 이를 갈며 남자의 장난치고 있던 손을 잡아 확 꼬집었다. ‘이미 전남편 전처인데 왜 자꾸 이렇게 은근슬쩍 다가오는 거지? 예전엔 강지한이 이렇게 뻔뻔한 사람인 줄 몰랐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이 여자 진짜 손끝이 세네.’ ‘너무 아프잖아!’ 하지만 손이 아파도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강준형은 그릇에 국을 담아 심미연 앞에 놓으며 그녀가 화가 나 얼굴이 빨개진 모습을 보고는 강지한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줄 알았다. 그는 강지한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다그쳤다. “빨리 먹고 가!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그는 그저 심미연이랑 조용히 식사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는 강지한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강지한이 지금까지 심미연에게 상처를 준 모든 일을 기억했다. 그런 사람을 절대로 도와줄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 저야말로 당신 친손자잖아요! 쟤는 남인데 왜 저 대신 쟤를 도와주는 거예요?” 강지한은 말하면서도 손과 발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심미연을 괴롭히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예전에 심미연이 눈앞에 있을 때는 그녀가 따분하고 거슬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 집에서 혼자 한나절을 보내니 집안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강준형을 찾아가 심미연을 설득해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려 했는데 여기서 그녀를 뜻밖에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근데 할아버지도 참. 심미연만 불러서 밥을 먹자고 하고 정작 친손자인 나한텐 말 한마디도 없으시네.’‘편애도 정도가 있지. 이건 뭐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야?’ 강지한이 그렇게 웃는
분위기는 순식간에 미묘하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가에 웃음이 더 깊어졌다. 그는 일부러 심미연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낮고 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절한 지 몇 시간 만에 벌써 생각이 바뀌었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마음이 생긴 거야? 강 부인, 너무 원칙이 없는 거 아냐? 소문이라도 나면 누가 너한테 소송 걸자고 찾아가겠어.” 그가 말을 내뱉는 사이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심미연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심미연은 주먹을 꽉 쥐며 손톱이 거의 손바닥에 박힐 정도였지만 여전히 숨이 막힐 듯한 차가운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몸을 살짝 비켜 강지한과 가까운 접촉을 피하며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 “강 대표님,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네요. 난 이제 당신과 어떤 연관도 있고 싶지 않아요. 그냥 할아버지랑 밥 한 끼 먹으러 온 거고 당신을 만난 건 그저 우연이에요.”말을 끝낸 그녀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 홀로 남은 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눈빛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 뜻밖의 만남은 마치 총성이 울리지 않는 전쟁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서서히 퍼져나갔다. 결국 누가 승자가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미연아, 네가 좀 더 늦게 왔으면 내가 사람 보내서 데리러 갈 뻔했어.” 강준형의 힘찬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그녀는 가슴 속 안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미연은 빠르게 그의 앞에 다가갔다. 가방을 그의 손에 건넨 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차가 막혀서 좀 늦었어요. 그리고 이건 할아버지께 드리려고 산 무릎 보호대예요. 무릎 상태가 안 좋으시잖아요. 날씨가 더 추워지면 필요할 것 같아서요.”강지한이 들어오며 할아버지가 심미연에게 보이는 다정한 모습에 미묘한 질투를 느꼈다. ‘누가 진짜 친손자인지 모르겠네.’ 강준형은 고개를 들어 강지한과 시선이 마주치자 금세 웃음을 지었던 얼굴을 확 굳어버
[가면 알게 될 거야.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박유진은 단언하듯 말했다. 그는 심미연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승낙하려던 찰나 또 전화가 걸려 왔다. 심미연은 화면에 깜빡이는 ‘강 씨 저택’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유진 오빠, 나 먼저 전화 좀 받고 다시 말해도 될까?” 이미 강지한과 이혼한 사이였지만 강준형의 전화는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강준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알았어. 먼저 전화 받아. 기다릴게.” 박유진은 언제나 온화하고 세련된 도련님처럼 보였다. 심미연은 화면을 가볍게 몇 번 터치한 후 전화를 받았다. “미연아, 오늘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먹어. 내가 직접 시장에 가서 장도 봐 왔단다.” 강준형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단호함 속에 어딘가 모르게 따뜻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할아버지, 저랑 지한 씨는 이미 이혼했잖아요.” 심미연은 강지한이 전에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르며 본가에 돌아갔다가 그와 마주칠까 봐 걱정이 밀려왔다. ‘혹시 지한 씨가 내가 마음이 바뀐 줄 알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일부러 할아버지에게 찾아가 내연녀라도 되게 해달라고 부탁한 줄 알겠어!’“너희가 이미 이혼한 건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데 그게 우리가 같이 밥 한 끼 먹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 강준형은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음 섞인 말투였다. 지금 기분이 아주 좋은 게 확 느껴졌다. 다만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은 이 기회에 심미연에게 젊고 능력 있는 상대를 소개해 주려는 거였다. 하지만 이 말을 미리 꺼내면 심미연이 너무 놀랄까 봐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고 복잡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강지한과 마주칠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심미연은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 박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연아,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