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실례할게요. 미안해요.”이진영은 태도가 좋고 표정도 온화해서 오히려 한유나가 함부로 추측하기 미안하게 했다.“급한 일이면 어서 가보세요.”“진영 형,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유나 누나를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줄게요.”박인우는 이진영이 그를 믿지 않을까 봐 가슴을 치며 다짐했다.“한유나 씨, 괜찮겠어요?”이진영은 서둘러 떠났지만 내색하지 않고 온화한 표정으로 한유나에 물었다.남자가 너무 부드러웠는지 한유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서 가 봐요.”이진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지고 말했다.“참 착해요.”한유나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어서 가요.”그들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 남자의 행동이 너무 다정하게 느껴졌다.하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싫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금 마음에 들었다.“그럼 나 먼저 갈게요. 더들 즐겁게 마셔! 이 술은 내가 살게!”이진영은 호기롭게 말하고 갔다.한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렸다잠시 후에 그녀는 돌아가서 엄마에게 부탁해 사람을 찾아 알아보라고 했다.그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그녀는 아직 사랑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한유나 씨, 계속 마셔요.”육현성은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고는 잔을 들어 그녀와 부딪쳐 고개를 들어 단숨에 마셨다.엄마는 그에게 이진영의 여동생과 접촉해서 그들과 어울리게 하려고 했다. 원래는 이따가 이진영과 이 일을 이야기해서 이진영의 태도를 보려 했는데 이진영이 떠났으니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둘이 술을 마시는 동안 박인우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육현성은 술에 취해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다가 박인우에게 물었다.“강지한이 어디 갔어?”박인우는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방금 진영 형이랑 같이 나간 거 아니었어요? 설마 진영 형 집에 따라갔나?”이진영이 집에 일이 있다고 하니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다.육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강지한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한유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이씨 가문과 한씨 가문이 조건이 맞으니 제가 이진영 씨와 선을 본 것도 당연해요.”그녀는 이진영과 선을 보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도 선을 봐야 한다.오늘 저녁에 이진영과 지내보니 이진영이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그녀는 만족했다.육현성은 조용히 술을 마셨다.한유나의 말이 맞았다. 그들 같은 집안에서 태어나면 결혼은 가문끼리 조건이 맞아야 한다.온씨 가문은 이미 초라해졌고 온지유는 과부라는 신분까지 있다...그와 온지유는 함께 있을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서 좀 괴로웠다.한유나는 그가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여 얼떨결에 말했다.“술로 근심을 풀기보다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해요.”무슨 일이든 해결 방법이 있으니 당장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걱정할 필요 없다.육현성은 고개를 들어 컵 속의 술을 다 마시고는 웃으며 말했다.“문제가 좀 있는데 답이 없어요. 하지만 저도 이미 포기했어요.”온지유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었으니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이미 해결책을 찾았나 봐요.”잘 모르는 사이라 한유나는 계속 물을 이유가 없었다.그때 박인우이 돌아왔다.“지한이는 찾았어?”육현성이 물었다.“못 찾았어요. 하지만... 전화했더니 졸려서 벌써 집에 가서 잔대요.”박인우가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항상 어딘가 이상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그만 헤어지죠. 네가 한유나 씨를 집에 데려다줘.”육현성이 술잔을 놓고 일어서자 한유나도 따라 일어섰다.“제가 전화해서 기사에게 데리러 오라고 할 테니 데려다줄 필요 없요.”“그건 안 돼요. 진영 형이 떠날 때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당부했어요. 가요, 제가 데려다줄게요.”박인우가 다가가 가방을 들어주고 외투를 건넸다.이진영이 분부한 일을 그는 당연히 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일이 힘들어질 것이다.“평소 연구소에서 밤늦게
남자는 곧 답장했다.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언제 시간이 되는지 물어본 후에 알려 주겠다고 말이다.한유나는 휴대전화를 쥐고 손끝으로 화면 글씨를 쓰다듬으며 안심했다.질문을 하는 대로 바로 대답하는 이것이 아마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이진영은 힘겹게 신하린을 차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자마자 한유나의 문자를 받았다. 그는 백미러 속 여자의 얼굴을 힐끗 한 번 보고 문자를 빠르게 편집해 답장했다.그와 한유나의 관계가 좋을수록, 안정적일수록 차 뒷좌석의 여자도 안전해진다.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지만 그녀를 평생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굳이 그녀를 묶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 박유진만 있는 것을 못마땅해서였을 것이다.문자를 보낸 후 그는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진영아, 늦은 시간에 전화한 건 무슨 일 있는 거야?" 어머니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엄마, 나 오늘 한유나 씨랑 만났는데 서로 느낌이 괜찮았어요. 아빠랑 시간을 내서 유나 씨 부모님이랑 같이 밥 먹으면서 관계를 정하는 게 어때요?”이진영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듯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지금 바로 네 아빠와 상의해 보고 이따가 답장할게.”길게 내뱉는 방혜자의 목소리에 희열이 역력했다.그녀는 정말 꿈에서라도 이진영과 한유나를 맺어주고 싶었다.“알았어요.”이진영은 응낙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방혜자는 당사자보다 더 조급해져 반드시 빨리 결정하리라 마음먹었다.그는 결혼식에 나오기만 하면 되고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다.전화를 끊자마자 뒷자리에 누운 여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긴 머리카락이 그 작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둠 속에서 조금 무서웠다.“이진영, 개자식! 지질남!”여자는 목청을 돋우어 욕했는데 술을 마신 그녀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이진영의 안색이 갑자기 보기 흉하게 변했다.그는 그녀 외에 다른 여자를 건드린 적이 없는데 쓰레기라니.“이진영, 안아줘...”
심미연은 입술을 깨물다가 대답했다.“이노 하이브에는 최고의 변호인단이 있어. 우리가 이혼할 때 변호인단이 어떻게 당신의 재산을 지킬 수 있는지 알고 있을 거야.”빨리 이혼하고 싶을 뿐 이혼으로 얼마만큼의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을지, 재산 구분 없이 빈털터리로 내쫓을지는 아무런 의견이 없었다.“심미연, 내가 만약 당신과 아이를 낳을 의향이 있다면? 남아서 나와 계속 부부가 돼줄 수 있어?”이혼 후 미르 파크에 심미연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예전에 어르신께서 항상 심미연과 아이를 낳으라고 할 때 그는 심미연과 평생 함께할 계획이 없다고 생각하며 아이를 낳는 것은 아이를 해치는 것이라 여겼다.아버지처럼 자식에게 책임을 지지 못할까 두려웠고 아이의 일생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심미연이 이혼을 고집하고 있고, 그는 두 사람에게 아이가 있다고 하면 그녀를 곁에 묶어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아마 평생 심미연을 사랑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녀와 아이를 책임질 것이다.심미연은 당황했다.‘설마 강지한이 임신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 일부러 이런 말을 해서 나를 떠보는 건가?’그녀의 침묵하는 것을 본 강지한은 그녀가 마음이 움직인 줄 알고 계속 말했다.“아이가 생기면 난 매일 오후 제시간에 집에 가서 아이를 돌볼게. 당신은 계속 출근하고 싶다면 출근하고, 출근하고 싶지 않다면 집에서 아이를 돌봐도 돼. 어쨌든 난 당신의 결정을 존중해.”그는 심미연이 딸을 낳으면 꼭 그녀를 닮아 말랑말랑하고 예쁘겠다고 생각했다.그는 틀림없이 딸을 매우 사랑할 것이다.심미연은 예쁜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가 임신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그녀는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온지유의 아이는 사라졌지만 두 사람은 아직 젊으니 아이를 갖는 것도 쉬운 일이야. 나는... 당신에게 더 이상의 사랑이 없고 당신과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그녀는 이미 체념했는데 어떻게 그의 두세 마디 말에
여기까지 생각한 온지유는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폰을 다시 주울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휴대폰이 고장 나지 않아서 쓸 수 있었다.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육한성의 번호를 눌렀다.육현성은 초고속으로 전화를 받았다.“지유 씨,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잠이 안 와서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으세요?”온지유는 일부러 목소리를 죽였다.“나 혼자 있는데 뭐가 불편하겠어요?”육현성의 말투는 그녀를 탓하고 있는 것 같았다.“지유 씨, 나한테 왜 남처럼 대해요?”“아줌마가 결혼하라고 한 거 기억나요. 둘이 같이 살고 있는데 제가 한밤중에 전화해서 방해할까 봐요.”온지유의 말투는 조롱 섞인 말투였는데 그때 얼마나 한스러웠는지 그녀만이 알 수 있었다.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좀처럼 손에 넣을 수 없고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곁에는 이미 다른 여자가 있다.결국 그녀는 여전히 홀로인데 그녀가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엄마가 물어봤는데 상대방이 아직 답을 안 줬어요.”오늘 이진영을 보고 그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진영이 그렇게 빨리 가버려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현성 오빠가 이렇게 훌륭한데 그렇게 오래 고민하다니, 정말 너무해요.”온지유는 씩씩거리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역시 부모님이 있는 게 좋아. 아무것도 스스로 쟁취하지 않아도 부모님이 모든 것을 잘 안배해 주잖아. 나도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그랬다면 그녀가 강지한과 함께 있고 싶어 할 때 그들은 몰래 그녀를 위해 좋은 계획을 세울 것이다.“육씨 가문은 강씨 가문보다 낫지도 않고, 나도 지한이만큼 훌륭하지도 않아요.”육현성은 자신을 비웃듯 피식하며 말했다.“사실 나도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 어떤 결정이 든 간에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이다은은 성격이 나빠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이씨 집안과의 혼인은 육씨 집안에도 좋고 그에게도 좋으니 그는 싫어도 감히 거절하지
“지한 씨 미연 씨에게 없다는 것을 알아. 왜냐하면 방금 나를 찾아왔고 지금 샤워 중이거든.”온지유의 말투에는 자랑이 섞여 있었는데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도 희열이 느껴졌다.심미연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웃으며 말했다.“강지한이 방금 집에 왔는데 어떻게 거기 있겠어? 온지유, 인정해. 지한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사실 나지 네가 아니라는걸.”‘여우 짓 하는 걸 누가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줄 알아?’강지한이 어디에 있는지는 사실 관심도 없었다.온지유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래진 채 손톱이 살에 박히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두 사람이 내일 이혼한다고 하지 않았어? 왜 오늘 밤까지 같이 있는 거지? 설마 육한성이 나를 속인 건가? 사실 두 사람은 이혼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은 거 아니야?’“지한 씨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경성의 모든 거리에 놓인 꽃들을 같은 품종으로 바꿀 수 있었겠어? 만약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꽃밭에 내가 좋아하는 꽃을 심었겠어? 그리고 지한 씨가 마시는 찻잎은 모두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나와 같은 거로 마시는 거야.”“그리고 두 사람 신혼 날 밤, 내가 전화해서 발을 삐었다고 했을 뿐인데 신혼집에 있는 미연 씨를 버리고 달려와 밤새 나를 돌봐줬어. 그리고 이건 미연 씨가 모를 거야. 며칠 전에 나에게 미용실 하나를 차려줬고 강변이 보이는 집 한 채랑 차 한 대 사줬어. 심지어 리우를 나에게 넘기겠다고 했어.”그녀는 자랑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강지한이 사실 심미연을 대신하여 보상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이런 것들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강지한이라는 사람뿐이었다.“내가 다 녹음했어. 이혼할 때 이것들을 돌려주는 거 잊지 마. 어쨌든 나와 강지한의 부부 공동 재산이니까.”예전에는 온지유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심미연이 그대로 화가 나서 기절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전에 없이 냉정했다.그녀의 강지한에 대한 마음도 조금씩 식어가 이젠 아무런
그녀의 일을 알 리가 없다.“여보, 샤워 잘했어? 그래, 금방 갈게.”심미연은 갑자기 한마디 하고 전화를 끊었다.온지유는 휴대폰을 쥐고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심미연 이 천한 년이 또 지한 씨를 꾀고 있어! 안돼, 절대 심미연의 마음대로 이루어지게 하지 않을 거야!’이런 생각에 그녀는 서둘러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가 한참 동안 울리도록 아무도 받지 않았다.온지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설마 벌써 시작한 건 아니겠지? 안돼! 절대 심미연과 자게 해선 안 돼.’온지유는 서둘러 다시 전화를 눌렀다.전화가 끊기 직전 휴대폰에서 듣기 좋은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남자의 목소리는 정말 사람을 빠져들게 했지만 온지유는 정신을 차렸다.만약 남자가 침대에서 이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녀는 그의 침대에서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무슨 일인데?”남자는 일부러 말투를 세게 했다. 마치 좋은 일이 끊기는 것 같은 짜증이 났다.“지한 씨, 보고 싶어.”온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녀는 시시각각 그를 만나고 싶어 하지만 강지한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지유야,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자야지. 유치하게 굴지 말아 줄래?”강지한은 책상 앞에 앉아 손끝에 들린 펜을 돌리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심미연은 예전에 온지유과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입으로 대답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그가 보기에 그와 온지유 사이의 관계는 결백해서 일부러 멀리할 필요가 없었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심미연이 일부러 트집을 잡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심미연과 약속을 하고도 온지유와 계속 연락했다.오늘 밤 심미연은 결연한 얼굴로 이혼을 제안했고 그는 아직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심미연이 어르신까지 언급해서야 그는 문득 심미연이 그에게 한 말은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예전에 그는 그녀가 무리하게 억지 부린다고, 며칠 놔두면 곧 지나갈 거로 생각했다
온지유는 순간 기뻐하며 말했다.“알았어! 나 지금 옷 갈아입으러 갈게.”강지한이 그녀를 찾으러 오면 심미연은 강지한을 꼬실 기회가 없지 않은가! 심미연이 발끈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너무 좋아.’전화를 끊은 강지한은 서류를 챙기고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성무진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제가 음식을 포장해 왔어요. 따뜻할 때 드세요.”바로 30분 전에 강 대표의 음식을 포장해서 가져오라는 전화를 받은 성무진은 영문도 모른 채 급하게 음식을 포장해서 이쪽으로 달려갔다.“놔둬. 난 급히 나가야 해.”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기졌던 배가 이젠 배고프다는 감각도 잃었다.성무진은 할 말을 잃었다.‘강 대표님은 변덕이 많네.’강지한은 차에 올라탔지만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다.온지유가 아이를 잃고 많이 괴로워했다. 그는 곧 심미연을 잃을 것인데 그때 가서 자신도 이렇게 괴롭겠지?생각에 잠겼을 때 온지유의 전화가 또 걸려와 강지한은 미간을 문지르며 받았다.“왜 그래?”예전 같으면 그는 삼박사일을 휴식하지 않고 일해도 여전히 힘이 넘쳤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매우 피곤했다.“출발했어?”온지유가 부드럽게 물었다.“방금 차에 탔어.”“서쪽에 있는 함평집의 죽이 먹고 싶은데 테크 아웃 해줄래?”온지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이를 유산한 후 그녀는 강지한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고 느껴졌다.분명히 앞에 있지만 마치 산과 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있는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강지한을 꽉 잡고 싶었지만 또 잡을 수 없는 것 같았다.안전감이 없어서 그녀는 계속 그에게 전화를 걸어 옆에 있어 달라고 했고 그래야만 안전감을 느낄 수 있었다.“알았어.”강지한이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에서 들려오는 전화가 끊겼다는 안내음을 들으며 은근히 당황해진 온지유는 급히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마음속의 이런 느낌을 억누르려고 애썼다.이어 그녀는 전화를 걸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당신이 어떤
심미연의 눈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걸어내겠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듯했다.그때부터 심미연은 데이터 하나, 리포터 하나 놓치지 않고 아이의 병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방안에는 키보드 소리와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뿐이었고 적절한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들리는 그 소리는 생명과 희망을 담은 교향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심미연은 본인의 전문적인 지식과 용기로 작은 생명을 살릴 방도를 모색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그 시각, 심태하를 데리고 집으로 온 박유진은 역시나 조용한 집안에 심미연이 또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태하야, 엄마한테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박유진의 말에 2층으로 올라간 심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왜 혼자 내려와? 엄마는?”“엄마는 안 먹는대요. 난 할 만큼 했으니까 나머지는 아빠가 해요.”심태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박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알겠어, 내가 가볼게.”성큼성큼 걸어 올라간 박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방이 하도 조용해서 문 여는 소리마저 소음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 소음이 심미연을 방해하지는 못한 듯했다.박유진은 부드러운 불빛이 비춰진 그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심미연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넓은 책상 앞에 마주 앉은 심미연의 얼굴에는 노트북 화면에서 나온 불빛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평소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두 눈도 이 시각만큼은 노트북에 고정한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심미연만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박유진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그러다가 자연스레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수치들과 그래프를 보게 된 박유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작게 쓰여있는 숫자와 그래프들이 박유진에게는 그저 낯선 부호였지만 거기에 쏟은 심미연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박유진은 감히 함부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심미연의 건강이 걱정됐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 때문에 심미연의 손톱은 이미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차분히 눈을 감고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의 입장이 되어 그 장면을 그려보았다.부서진 가구들과 온몸을 뒤덮은 상처,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도망가지 못해서 절망만 가득한 그 눈동자.가정폭력만 한 게 아니라 바람까지 피우면서 남자는 여자의 정신을 처참히 짓밟고 있었다.그 배신이 피해자의 마지막 남은 선까지 무너뜨려서 결국 그들을 이혼에 이르게 한 것이다.여자는 해방되고 싶어서 제안한 이혼이 자신의 명을 단축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폭행을 일삼고 바람까지 피우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던 남자는 오히려 의심병이 도져 갑자기 이혼을 제안하는 여자가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배 속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여기까지 본 심미연은 숨이 가빠와서 호흡이 거칠어졌다.인간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 남자에 대한 분노로 쌓인 한기가 서서히 심미연의 영혼을 뒤덮고 있었다.어쩜 사람이 이처럼 잔인하고 매정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자신의 배우자에게 이딴 짓을 할 수 있는지 심미연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인간이야!”차오르는 분노와 비통함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지자 심미연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그게 경찰 출동을 알리는 경보음인가 싶어 심미연은 순간 숨을 죽였다.물론 이내 자신의 상상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심미연은 그 짧은 순간에 전화벨 소리가 마치 생명을 구원해줄 동아줄처럼 느껴졌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심미연이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아이 사건은 보셨어요?”여자의 말에 그제야 잊고 있던 심장병 걸린 세 살 아이의 사건을 떠올린 심미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대답했다.“바로 볼게요.”
3년 동안 심태하를 자신의 친아들로 여기며 온 정성을 다 쏟은 박유진은 심태하가 신나게 떠드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아빠, 얼른 와요!”그때 들리는 아이의 앳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춘 박유진은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심태하를 보며 미소를 지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환한 아이의 미소 덕분인지 박유진은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아이에게로 다가간 박유진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자 심태하는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내가 엄마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엄마는 일만 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니까요. 아들인 나도 설득 못 한 엄마라고요.”말을 하며 옆자리를 손으로 콕콕 찌르는 아이의 의도가 너무나 명확해서 박유진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엄마는 항상 그래요. 일만 하면 밥 먹는 것도 까먹어요.”심태하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엄마가 가슴 아픈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내가 말려봐도 일은 엄마의 사명이라면서 말을 안 듣는다니까요. 그래도 엄마가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러는 걸 아니까 나도 떼는 안 썼어요.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빨리 많은 걸 배우려고요. 그러면 엄마가 조금은 편해질 거잖아요.”심태하는 마치 박유진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맹세하는 사람처럼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엄마를 생각하는 그 갸륵한 마음에 임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임현은 저 말들이 세 살 난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영민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 자꾸 아까 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말들은 여름날 오후에 갑자기 찾아온 우레처럼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임현의 마음을 울렸다.임현은 그제야 왜 심미연이 아들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갔다.이런 아들이라면 백번이라도 자랑하고 싶을 것 같았다.하지만 다정한 눈으로 심태하를 바라보던 박유진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3년 전, 눈을 뜨자마자 심미연부터 찾은 박유진은 3
“죄송합니다!”“당신...”심미연의 사과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죽은 심미연 씨랑 똑같게 생겼어요.”그 말에 가슴이 내려앉은 심미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는 바로 전설적인 존재인 박시훈이었다.그가 유명해진 건 그의 정보망 때문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이 찾기 싫은 건 있어도 못 찾는 건 없다는 말도 떠돌게 된 것이다.심미연과 일면식도 없는 그가 그녀를 알아봤다는 건 박시훈이 심미연에 대해 뒷조사를 했다는 뜻이었다.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뒷조사를 한 사람과 지금은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잠깐만요!”“이게 뭐 하는 짓이야?”그때 나타난 박유진이 심미연에게로 뻗어진 박시훈의 팔을 가로막았다.박유진의 목소리를 들은 심미연은 그제야 안도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그가 있는 한 적어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는 없기 때문이었다.“박유진?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한편 이미 멀어진 심미연에 박시훈의 표정은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그는 매번 나타나서 자신의 일을 망치는 박유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저 사람은 내 아내 될 사람이야. 네 형수고. 앞으로 보면 예의부터 갖춰.”그 순간, 박유진은 진심으로 심미연을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었다.박시훈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혼자만 보며 심미연의 마음속에도 본인뿐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나를 가족으로 인정해준 적도 없는 박씨 집안 사람들이야. 자꾸 친한 척하지마. 너랑 나는 남이니까.”박씨 집안에 돌아갈 생각도 없고 그 집안사람과 엮이기도 싫었던 박시훈은 손을 쳐내며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하지만 심미연이 아직 멀리 못 갔을 걸 생각해 박유진은 또다시 박시훈의 팔을 붙잡았다.“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박유진, 너 진짜 미친 거야? 왜 자꾸 날 잡아!”또다시 잡힌 팔에 박시훈은 표정을 구기며 박유진을 노려보았다.이 순간만큼은 정
흉부외과 전문의들을 다 찾아봐도 소용이 없어서 자신에게 연락을 한 걸 알기에 심미연은 마음이 착잡해졌다.“진작에 이메일로 보내놨죠. 시간 날 때 보세요. 그럼 전 먼저 끊을게요.”태하와 동갑인 여자아이가 심장병으로 앓고 있다는 게 너무 불쌍해서 심미연은 전화를 끊었음에도 쉽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엄마, 괜찮아요?”그때 심태하가 심미연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레 묻자 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응, 엄마 괜찮아.”세 살 난 아이가 이렇게 빨리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된 건 안타까웠지만 심미연은 태하 앞에서는 티 내지 않으려 했다.“알겠어요 그럼!”엄마가 괜찮다고 하자 심태하는 역시나 아이는 아이인지 곧바로 다시 디저트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유명한 식당답게 맛이 출중해서 태하는 아주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지만 마음이 불편했던 심미연은 몇 숟가락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임현도 전화를 받은 뒤로 저기압인 심미연이 걱정됐지만 함부로 물을 수도 없어서 그저 밥만 먹고 있었는데 그때 심미연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나 바람 좀 쐬고 올게요.”“네.”자신의 기분이 왜 갑자기 나빠졌는지는 심미연도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다행히 아무것도 묻지 않는 임현에 빠르게 복도 끝으로 걸어간 심미연은 창밖으로 다니는 차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미연아, 뭘 그렇게 보고 있어?”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춘 심미연이 고개를 돌리며 웃어 보였다.“언제 왔어?”“좀 전에. 태하 데리러 가자.”자신에게로 내밀어진 박유진의 손을 잠시 보던 심미연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밥은 먹었어?”박유진은 별것도 아닌 그 말에 환히 웃으며 답했다.“좀 전까지 바빴어서 못 먹었지.”“그럼 뭐라도 좀 먹을래?”“그래.”고개를 끄덕이는 박유진과 함께 심미연은 아까의 룸으로 돌아갔다.갑자기 나타난 박유진에 심태하는 다급히 포크를 내려놓으며 그에게로 달려갔다.“아빠! 여긴 왜 온 거예요?”아빠가 이곳에 온 게 자신
심동현은 그때 고작 다섯 살이던 아이가 저런 악행을 저질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너무 미안해하지는 마. 당신의 마지막이 심미연보다는 더 처참할 테니까.”심서연의 말 몇 마디에 심동현은 그대로 기절해버렸고 심서연은 그런 그를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나, 나는 네 아빠가 불러서 온 것뿐이야.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그때 옆에 있던 여자가 덜덜 떨며 말하자 심서연은 여자의 발을 즈려밟으며 말했다.“넌 너무 더럽잖아.”물론 심서연도 남자와 노는 걸 즐기긴 했지만 그녀는 이렇게 돈을 목적으로 남자를 탐하는 여자들을 경멸했다.그때 초인종이 울리자 다급히 발을 뗀 심서연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인터폰을 눌러보았다.역시나 성무진의 얼굴이 보이자 그녀는 칼을 들어 자신의 다리를 긋고는 절뚝이며 문을 열어주었다.“성 비서님... 저 좀 살려주세요...”눈을 감으며 죽는 척을 하는 심서연을 본 성무진은 바로 뒤따라온 사람을 향해 말했다.“이분은 차에 태워.”심서연이 그 사람에게 들려 나가자 곧바로 구급차가 도착했고 심동현과 여자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모든 일이 끝나고서야 성무진은 강지한에 연락을 했다.*그때 심미연은 임현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는데 함께 앉아있던 심태하는 자신의 앞에 가득 놓인 디저트들을 보며 숟가락을 든 채 놀라고 있었다.“엄마, 이거 다 내 거에요?”평소에는 달달한 걸 많이 못 먹게 하던 엄마가 갑자기 이러니 심태하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응, 다 네 거야. 얼른 먹어. 대신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아프니까 적당히 먹어야 해.”“네! 조금만 먹을게요 그럼!”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심태하는 한입 한입 디저트들을 베어 물기 시작했다.심미연은 미소를 짓다가도 이렇게 일찍 철이 든 아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왔다.엄마가 힘든 게 싫어서 세 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성숙한 행동들을 하는 걸 심미연이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임현은 그저 부럽다는 듯 말했다.“태하는 진짜 너무 착한 것 같아요!”세
심서연이 사리를 분별하기 시작할 때부터 심동현은 늘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 싶어 했다.그리고는 아들을 낳으라고 조은하를 달달 볶았는데 조은하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녀에게 화까지 내곤 했다.그때부터 심씨 집안의 딸은 하나여야만 한다는 걸 깨우친 심서연은 일부러 유괴범을 찾아 심미연을 팔아버리려고 했었다.이미 말까지 다 맞추고 심미연을 데려간 건데 심서연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사라져버린 심미연 때문에 심서연이 유괴범들에게 대신 끌려가게 된 것이다.그때부터 심서연의 악몽 같은 나날이 시작되었고 심미연을 향한 그녀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심서연은 심미연도 유괴범에게 자신을 넘기려고 계획을 짠 게 분명하다는 착각까지 해가며 그녀를 증오해왔었다.시골에 끌려간 뒤로 매일 맞고 욕을 먹으며 자라던 심서연은 양어머니가 아들을 낳게 된 뒤, 모든 신경이 그 아들에게 가 있는 틈을 타 빠르게 도망쳐 나왔고 그길로 기억에 남아있던 심씨 집안을 찾아갔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심서연은 예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심미연을 보며 질투심에 불타 그녀가 가진 걸 모조리 빼앗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심서연에게 회사를 맡긴다는 건 회사를 말아먹겠다는 거랑 다름이 없었기에 부모님은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믿지는 못하고 있었다.그 와중에 심미연은 여전히 화려한 집에서 세계적인 부자인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다.그렇게 심서연이 점점 질투심에 눈이 멀어가고 있을 때 하늘이 고맙게도 심미연을 죽여준 것이다.굶어 죽어가던 심서연이 그 틈을 타 강지한에게 연락을 했고 그 덕에 아무 상관도 없는 강지한의 보살핌으로 강씨 집안 둘째 사모님 대우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물론 그녀가 이 모든 걸 누릴 수 있게 된 건 다 문소영과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사람 덕분이었다.힘들고 가난한 시절을 겪어봤기에 더욱더 자신의 것을 잃고 싶지 않았던 심서연은 어떻게 해서든 강씨 집안에 들어가야만 했다.그리고 그동안 마음껏 누려온 심동현은 이제 그만 고생할 때도 된 것 같았다.“심서연! 걔
심서연은 자신의 말이 끝났음에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강지한이 혹시나 자신을 외면할까 봐 불안에 떨며 물었다.“지한 씨...”심서연은 사실 이번 기회에 강지한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기회를 봐서 잠자리를 가지고 거기에서 애까지 생긴다면 그야말로 천운이겠지만 일단은 강지한을 끌어들이는 게 우선이었다.“성 비서 보낼게요.”“지한 씨가 직접 와주면 안 돼요?”자신이 대답을 했음에도 그칠 줄 모르는 심서연의 요구에 강지한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상미 열나서 지금 병원에 있어요. 귀국한 다음에 열 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전에 왜 애 아프다는 말 안 했어요?”순식간에 차가워진 목소리에 심서연은 당황하며 물었다.“뭐라고요? 상미가 열이 나요? 전 진짜 몰랐어요!”해외에서는 남자들을 만나느라 바빠서 상미는 시터에게 맡겨뒀었기에 심서연이 아이의 몸 상태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하지만 강지한의 말투가 심상치 않아 그녀는 다급히 한마디 더 보탰다.“이틀 전에 열이 나서 병원 데려가긴 했는데 그때는 큰 문제 아니라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신경을 좀 덜 썼는데, 많이 아픈 거예요?”심서연의 말이 변명임을 아는 강지한은 더 말하기도 입 아파 그저 전화를 끊어버렸다.심서연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붙잡고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혹시라도 강지한이 자신이 해외에서 남자를 만나고 다닌 걸 알고 자신을 내치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지만 그렇다 한들 심서연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강지한이 결정한 일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애초에 없었으니까.한편 조은하는 어두워져 가는 딸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왜 그래 서연아?”조은하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심서연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아무 일도 아니니까 걱정 말고 누워 계세요. 먹을 것 좀 챙겨올게요.”“얼른 구급차 불러서 아빠부터 병원에 데리고 가.”심동현이 아픈 것도 보기 싫었고 또 심동현이 죽으면 하나뿐인 딸도 죽을 것 같아 조은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안 죽는다
조은하는 침대에 누워지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심미연 생각을 하고 있었다.어린아이가 자신들이 가하는 모진 매를 견뎌냈을 걸 생각하면 조은하는 자꾸만 가슴이 아파 왔다.그래서 지금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늘이 내린 벌 같았다.“엄마, 말할 수 있겠어요?”“응.”심서연이 눈시울이 빨개진 채로 묻자 조은하가 힘겹게 목소리를 짜내어 대답했다.“아빠한테 또 맞은 거예요?”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게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심서연은 한 번 더 물었다.“그냥 때리라지 뭐. 어차피 나 잘못한 거 많잖아.”조은하는 심동현에게 맞을 때마다 심미연에게 빚을 갚는 거라고 생각했다.물론 심미연은 이미 죽어서 자신이 이토록 참회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지만.“나 잠깐 아빠랑 얘기 좀 하고 올게요.”역시나 예상했던 답이 나오자 심서연이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나려 하는데 조은하가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됐어! 나 괜찮아.”“엄마가 이 꼴로 누워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그러고도 내가 사람이에요?”심서연은 마음 아파서 흐르는 눈물도 빠르게 닦아내며 방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그에 다급해진 조은하가 심서연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에 잡히는 건 공기뿐이었다.“서연아! 엄마한테 이제 딸이라곤 너 하나뿐인데 너까지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얼른 돌아와.”자식을 앞세우는 건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만약 심서연까지 잘못된다면 조은하는 정말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기에 목이 타게 그녀를 불렀지만 심서연은 이미 문을 열고 나간 뒤였다.조은하는 조급한 마음에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는데 몸도 편치 않아서 그만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조은하가 고통에 미간을 찌푸릴 때 심서연은 이미 소파에서 입에 담지도 못할 행동을 하고있는 심동현과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집에 있는 딸과 아내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이런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심동현에 이성이 끊겨버린 심서연은 주방에서 칼을 들고나와 심동현의 다리 위에서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여자를 향해 휘둘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