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망설이다가 심미연은 결국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핸드폰을 꺼내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그녀는 아마 강지한이 온지유와 통화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결국 프런트에 가서 물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서자 온지유가 강지한의 팔을 끌어안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심미연은 가슴 한편이 답답하고 불편해져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안전 통로로 발걸음을 돌렸다. 위층에 도착해 외할머니 병실 앞에 서자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야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병상에 누워 있는 외할머니가 보였다. 호흡기를 달고 주변의 기기들은 고요하게 작동하고 있었고 그 소리는 심미연의 심장을 울리는 듯했고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한 걸음씩 병상으로 다가갔다. 외할머니는 평온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심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저 혼자서 오랫동안 서서 울었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 의사가 들어오더니 눈물을 흘리는 심미연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심미연은 급히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 외할머니 상태는 어떤가요? 언제쯤 완전히 회복하고 퇴원할 수 있을까요?” 심미연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고 빨리 외할머니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이분은 나이가 많고 이 병을 오래 앓고 있어서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완전히 회복하고 퇴원하려면 아마 시간이 많이 걸릴 거예요. 혹은... 아예 퇴원을 못 할 수도 있어요. 환자분의 가족으로서 마음 준비를 해야 해요.”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며 어떤 보장도 하지 않았다. “최고의 의료팀이 있지 않나요? 그들이 못하면 누가 할 수 있죠?” 외할머니의 몸 상태가 도저히 회복되지 못한다면 그녀는 다른 계획을 세워야 했고 계속 강지한 옆에 있을 수는 없었
강지한의 시선이 심미연의 얼굴에 머물렀고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넌 정말 본분을 다하는 좋은 아내야. 내가 상이라도 줘야 할까?” 심미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가 주는 상이라면 그녀는 받을 자격도 없었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하...” 강지한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여기 남아서 온지유나 잘 돌봐. 난 회사에 가야겠어.” 심미연의 태도는 시종일관 시큰둥했고 강지한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잘 가.” 심미연은 손을 살짝 흔들며 맑게 웃어 보였다. 강지한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려 걸어갔다. 예전의 신미연은 이렇지 않았다. 그가 외출할 때마다 심미연은 현관까지 따라와 배웅하며 이별 키스를 요구하곤 했었지만 지금은 ‘잘 가’라는 말로 끝낼 뿐이다. 이 선명한 태도 변화는 강지한을 불편하게 했고 답답한 기분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 그때 강준형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저녁 식사에 가기로 한 건 이미 약속드렸잖아요. 굳이 다시 전화 안 주셔도 돼요.” 그러나 강준형은 이를 무시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오면 안 돼! 생일 케이크랑 선물을 준비해 와야 한다. 빈손으로 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강지한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누구 생일인데요? 뭘 준비하라는 거예요?” 누구 생일인지 모르는데 무작정 준비하라니 당연히 답답했다. 강준형은 그 말에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더 이상 너한테 말 안 하련다!” 그러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지한은 핸드폰을 쥔 채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지?” 하지만 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곧장 차를 몰고 회사로 출발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성무진이 찾아왔다. 강지한은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심씨 가문이 완전히 파산했습니다. 심씨 가문 명의의 모든 재
“조경 디자인 쪽에서 도면 의뢰를 할 작업실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사모님의 절친이 운영하는 조경 디자인 작업실이 꽤 평판이 좋다고 하던데 그쪽에 의뢰해 볼까요?” 성무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보다 강지한의 현재 심정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성에 조경 디자인 작업실이 거기 하나뿐이야?” 강지한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이해했습니다.” 성무진은 곧바로 깨달았고 이건 싫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더 묻지 않는 게 상책이다. 강지한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작업실과 협력할 계획이 있다는 얘기만 흘려 놔. 다른 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지금 당장은 급한 서류부터 가져와.” 심미연이 그 친구와 워낙 친하니 그 얘기를 들으면 분명 자신에게 부탁하러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조건을 걸 기회가 생길 것이다. 성무진은 그의 의도를 끝내 파악하지 못했지만 명령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급한 서류들을 챙겨와 그의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우선순위대로 정리했습니다. 먼저 검토하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강지한은 서류를 들고 검토하기 시작했다. 성무진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병실 안에서 온지유는 심미연에게 물을 떠 오라고 시키고 있었다. 심미연은 컵을 집어 정수기 앞으로 가며 고개를 돌려 온지유에게 물었다. “몇 도짜리 물로 줘?” 온지유가 괜히 트집 잡는 걸 막으려고 미리 물어본 것이었다. “날 돌보러 온 사람이 내가 마실 물 온도를 묻다니. 심미연, 넌 사람을 간호할 줄 몰라?” 온지유는 일부러 대답을 미뤘다. 대답하면 심미연에게서 어떻게든 흠을 잡아내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사실 온지유가 심미연을 불러온 이유는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였고 심미연이 일을 너무 잘해버리면 흠을 잡을 틈도 없어진다! 심미연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사람을 돌 본 적이 없어서 물어본 거야. 만약 100도짜리 물을 떠줬다가 네가 화상이라
“지한 씨, 나 지금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 미리 말해두는 거야.” 만약 그녀가 강지한에게 알리지 않으면 온지유가 또 뒤에서 그녀를 곤경에 빠뜨릴 일을 꾸밀 수 있었기에 미리 알리기로 했다. 예전에는 혼자였으니 강지한이 어떻게 그녀를 다루든 상관없었지만 이제는 쌍둥이를 임신한 상태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녀는 직장에서의 모든 노하우를 강지한과 온지유를 상대하는 데 썼고 이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였다. “방금 외출했다 왔잖아? 또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강지한의 목소리는 분명히 불쾌해 보였다.‘이 여자가 정말!’‘요즘 밖으로만 나가려고 하네.’“온라인에 이력서를 제출했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고 전화 왔어.” 심미연은 당연히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없어 얼버무려서 핑계를 댔다. 거짓말하는 게 어렵겠냐고! “아직 사직도 안 했는데 다른 회사 면접을 보겠다고? 심미연, 너 변호사면서 근로계약법도 모른다는 거야?” 강지한은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심미연은 입술을 꼭 깨물며 말했다. “네가 나한테 휴가를 줘놓고 아무 혜택도 안 주면 그게 사실상 해고 아니야? 그런 상태에서 다른 곳에 가는 게 뭔 문제라도 돼?”비록 그녀는 리우에서 계속 일을 하며 스승님이 뛰어내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곳이 온지유의 통제 속에 있기에 남고 싶어도 남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임신 중이라 리우에 계속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강지한이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아차리는 게 두려운 것은 물론. 온지유와 문소영이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도 두려웠다. 겉으로 보이는 적보다 은밀하게 다가오는 위협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숨어 있고 그녀는 언제나 드러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방어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 기회를 이용해서 떠나는 것이 그녀에게는 가장 좋을 것이다. “네게 휴가를 준 거지 해고한 건 아니야! 급여는 없다지만 이번 달 생활비로 2000만 원이 더
강지한이 그녀를 어떻게 처벌할지 그건 나중의 일이다. 핸드폰을 챙긴 뒤 심미연은 곧장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가서 간호사들에게 온지유의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달라고 당부한 후 떠났다. 그녀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외출한다고 말했고 간호사들에게 온지유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이 기간에 온지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로 그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었다. 내려와 차를 기다리는 동안 심미연은 신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연아, 무슨 일이야?” “하린아, 나 지금 병원에 가서 다시 초음파 검사해야 하는데 너 시간 돼?” “또다시 검사한다고? 아기한테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신하린의 목소리엔 분명히 초조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내가 쌍둥이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대!” 심미연은 순간 그때 신하린이 쌍둥이를 가질 거라며 웃었던 일이 떠올랐고 정말로 쌍둥이였다. 한 마디로 맞춘 그녀의 직감은 참으로 대단했다. “뭐? 세상에! 진짜 예상 못 했어! 지금 어디야? 기다려. 내가 당장 데리러 갈게!” 신하린은 기뻐하며 소리쳤다. “아니야. 그냥 병원으로 가. 나도 택시 타고 가니까 거기서 만나자.” 심미연은 이제 마음이 급해져서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 도착하고 싶었다. 쌍둥이가 맞는지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쁜 일을 아이 아빠에게도 알릴 수 없는 현실이 아쉬웠다. 그때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고 심미연은 당황해서 급히 말했다. “나 혼자 갈게! 너 오지 마.”그리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두 사람의 좋은 시간을 깨트린 생각에 그 남자가 화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스위트룸의 큰 침대 위에서 신하린은 엎드려 있었고 남자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움켜쥔 채 방울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신하린은 손에 쥔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고 표정은 멍해 있었다. 그때 남자의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정아.” 신하린은 갑자기 정신이 들었고 가슴이 아파졌다. 이럴 때마다 남자는 항상 그 이름을
신하린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촉촉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내가 헛소리하는 게 아니란 걸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신하린, 나한테 왔으면 그냥 순순히 복종해.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대하는지 너 잘 알잖아.” 남자는 그녀 발목에 달린 작은 방울을 손끝으로 튕기며 차갑고 섬뜩한 목소리를 냈다. 조금 전만 해도 몸을 섞었던 그들이었지만 이제 남자의 말은 차갑고도 잔혹하게 느껴졌다. 신하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무너져가는 몸을 겨우 일으켰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웨이브 진 긴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그저 한 번 웃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가진 모든 걸 잃는다고요?” 그녀의 작업실과 가장 친한 친구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가진 모든 것들. 여자는 말없이 눈부시게 웃었지만 그 웃음 뒤로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남자는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신하린의 목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이를 갈고 말했다. “신하린, 넌 진짜 질릴 만큼 비열해! 내가 너한테 그렇게 잘 해줬는데 넌 그동안 다른 남자만 생각하고 있잖아!” 신하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진영 씨, 당신 마음속에도 잊지 못한 첫사랑이 있잖아. 무슨 자격으로 날 비난하는 거야?” 박유진은 그녀가 가장 깊숙이 품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녀는 그를 마음속 깊이 숨겨두면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남자는 그 모든 걸 알아챘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도 그가 숨겨둔 마음속까지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들 똑같았다. 그도 그녀를 비웃을 자격이 없었다. 남자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고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네가 나랑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너 따위가 뭐라고!” 그 여자는 남자의 건드릴 수 없는 약점이었고 아무도 그 부분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런데 신하린은 이제 대놓고 말했으니 정말 죽을 각오를 한 듯했다. 신하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가슴
의사의 상상력이 제법 풍부하다고 해야 할까. 신하린의 상태를 간단히 살펴본 의사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하지만 뒤돌아섰을 때 남자의 날 선 살벌한 눈빛과 마주쳤고 의사는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 “이 여자 상태는 어때? 왜 아직도 안 깨는 거야?” 이진영의 목소리는 차갑기 짝이 없었고 의사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사람을 베어낼 것 같은 날카로움을 띄고 있었다. 의사는 이유도 모르고 남자를 화나게 만든 자신을 탓하며 땀을 닦았다. “몸엔 아무 이상 없습니다. 다만 너무 피로해 깊이 잠든 겁니다.” 의사의 얼굴은 백지처럼 창백해졌고 눈앞의 남자를 조금이라도 더 자극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히 못 할 정도였다. “그럼 됐어. 이제 나가. 이 일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마.” 이진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의사는 급히 약상자에서 연고를 꺼내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두었다. “이건 목에 바르는 연고입니다. 하루 몇 번씩 바르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약품 상자를 들고는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도련님의 일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다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남자는 침대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신하린의 찌푸려진 미간을 문질렀다. 이 여자가 헤어지고 한 후 지난 반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여자에게 손끝조차 댄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지 이틀 만에 그야말로 중독된 듯 그녀를 놓지 못하고 여러 번을 이어갔다. 제어하지 못하고 욕망에 휘둘린 끝에 이렇게까지 그녀를 지치게 만든 것이다. 평소 트위터에서는 러닝 사진이나 운동 영상을 자랑하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허약한 몸일 줄은 몰랐다. 이진영은 진지하게 이 모든 게 그저 연출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고 의심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약
신하린은 애써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열 번을 다시 말해도 달라지지 않아요. 우리 관계는 그냥 침대 위에서나 의미가 있을 뿐이니까요. 그런데 진영 씨, 제가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당신은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이 다른 여자랑 결혼하든 말든 제가 당신에게 매달릴 일은 없으니까요.” 지난 몇 년간 신하린은 스스로에게 절대 그를 사랑하지 말 것을 굳게 다짐해 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이진영은 얼굴에 냉소가 번졌다. “침대 위에서나? 네가 우리 사이를 그렇게 정의하겠다고?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겠네.” 말을 마치자 그는 신하린을 거칠게 들어 올려 소파 위로 던져버렸고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신하린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울음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친 방식으로 모든 불만을 쏟아내기만 했다. 마지막 순간 남자는 입을 벌려 그녀의 흰 어깨를 물었다. 무지막지한 통증이 온몸으로 번졌고 신하린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목이 잠겨 비명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남자는 그녀를 풀어주고 느긋하게 옷을 입고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비웃듯 냉소를 지었다. “핸드폰 꺼놓지 마. 내가 언제든 부를 수 있으니까.” 그는 곧바로 수표 한 장을 꺼내 그녀 앞으로 던지고 한 치의 미련도 없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신하린은 통유리에 비친 자신의 볼품없는 몰골을 마주하며 이내 눈물이 끝없이 쏟아졌다. 그는 예전보다 더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 하지만 신하린은 스스로에게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를 사랑했다면 지금 이 모욕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걸 끝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소파에 힘없이 기대어 있던 신하린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몸을 조금 움직일 수 있었다. 소파를 짚으며 간신히 일어선 신하린은 한 걸음 한 걸음 샤워
강지한은 핸드폰을 꺼내 보았고 화면에 떠 있는 이진영의 번호를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들과 연락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진영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공항에서 신하린과 심미연을 봤어.” 강지한은 갑자기 전에 박시훈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잠시 멈칫했다. “박유진도 그들과 함께 있었어.” 이진영은 신하린이 박유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년간 신하린의 마음 속에는 늘 박유진이 있었고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떠올리는 사람은 항상 박유진이였다. “정말 공항에서 심미연을 봤다고?”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그렇다면 심미연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그럼. 절대 틀림없어. 살아있는 심미연 씨야.” 이진영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심미연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신하린은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그녀의 얼굴에서 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진영은 심미연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심미연 씨 정말 대단해. 모두를 속였어.’‘강지한까지 속인 걸 보면 정말 대단해.’“그럼 그 사람이 진짜 심미연인지 신하린 씨에게 물어봤어?” 강지한이 물었다. 그는 이진영과 신하린 사이의 관계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동안 이들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연락 안 했어.” 이진영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심미연이 사라진 이후 신하린의 정신 상태는 항상 불안정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마다 자주 싸웠고 그의 가문과 한씨 가문에 일이 생기면서 그는 처리하느라 바빴고 신하린과의 연락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와 만난 횟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신하린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강지한은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상미가 그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점점 약해져 이제는 무언가를 잃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네가 이미 결혼해서 자식을 두었다고 떠들고 있는데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이렇게 살겠다는 거야?” 우선 강지한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강지한의 전 부인 행방을 알아내면 그때 자신이 먼저 대시해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때면 강지한도 그와 경쟁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박시훈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신의 성격이라면 반드시 심미연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명의 찾아서 상미 치료부터 해.”강지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세상이 뭐라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다시 여자를 찾아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상미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함께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았어. 바로 갈게.” 박시훈은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바로 사람을 보내 심미연을 찾기 시작했다.강지한은 전화를 쥐고 박시훈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심미연이 죽지 않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 심미연과 똑같이 성형한 걸까?’ “아빠, 상미 때문에 속상한거에요?” 병상에 누워 있는 상미는 고열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목소리는 가늘고 약했다. “미안해요, 아빠. 제가 아프게 해서...” 상미는 어느 날 엄마와 친구들이 나눈 전화를 우연히 듣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상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아빠가 자신을 잃으면 얼마나 슬퍼할지 걱정됐다. “우리 상미가 얼마나 대견한데.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 강지한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마치 자상한 아버지처럼 보였다. 강상미는 작은 손을 뻗어 그를 향해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꼭 밥 잘 먹을게요
박시훈은 잠시 멍해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얼마 전에 그 명의와 연락이 닿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상미 진료 기록은 이미 전달했어. 명의가 치료법을 찾으면 먼저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래.” “그게 사실이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상미가 선천성 심장병을 진단받은 이후 그는 그 아이를 치료해 줄 의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상미는 아직 너무 어렸고 선뜻 수술을 감행하려는 의사는 없었다.작년에 강지한이 진성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우연히 들은 이야기 하나가 그의 귀에 박혔다. “우리 진성에는 명의가 한 분 계시죠. 못 고치는 병이 없어요. 불과 2년 만에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셨다니까요.” 말하는 이는 별 뜻 없이 흘렸지만 듣는 이는 달랐다. 강지한은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박시훈에게 명의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박시훈의 정보망이 전 세계에 퍼져 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그는 원하는 그 명의를 찾지 못했다. 강지한 역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소문했지만 단 한 번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지금 상미는 고열로 입원했고 어린 몸으로 이 병을 버텨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명의를 찾고 싶었다. 명의만 찾을 수 있다면 상미는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진짜 너무하네.” 박시훈이 발끈하며 투덜거렸다. 강지한이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게 서운했다. “그러니까 빨리 사람부터 찾아.” 강지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쳐. 기억이 안 나면 다시 말해 주지. 심미연은 이미 죽었어.” 박시훈은 한순간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한아, 넌 네 전 부인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강지한은 순간 멈칫했다. 그 한마디에 묻어
‘방금 아빠랑 엄마가 뽀뽀했어.’ ‘나도 해야지.’ 심미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녀석이 정말.’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꼭 집어서 하는 재주는 여전하네.’ 심미연은 이 상황이 너무 민망했다. 하지만 심태하는 엄마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칠흑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엄마, 왜 나만 안 안아줘요? 왜 나만 뽀뽀 안 해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나 아니에요?” 심미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이 녀석, 또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 온 거야!’박유진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를 번쩍 안아 올리며 결국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엄마가 일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널 안을 힘이 없대.” 심태하는 곧장 심미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엄마, 피곤하면 쉬어요. 아빠랑 내가 성 만들 거에요.” 박유진은 잠시 침묵했다. ‘나도 같이 쉬고 싶은데.’ 심미연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아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 엄마는 조금 더 일해야 하니까 아빠랑 성 만들고 있어.” 그 아이의 수술을 위해 아직 최선의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다. 더 깊이 연구해 봐야 했다.“그럼 엄마 눈 마사지해줄게요.” 심태하의 작은 손이 심미연의 이마를 살짝 눌러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박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흘렸다. ‘우리 태하 정말 똑똑하네.’ 며칠 전에 그는 심미연에게 마사지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따라 하는 아이의 기억력이 많이 놀라웠다. 심미연은 그 순간 마음속에 벅찬 행복을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을 두게 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엄마 이제 일하세요.” 심태하는 손을 떼며 박유진에게 레고 놀이하러 가자고 재촉했다. 박유진은 그를 안고 돌아서 나가려 했다
“미연아...” 박유진은 가슴이 살짝 떨렸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낮고 부드럽게 입을 떼며 적막을 깨뜨렸다. “응?” 심미연이 가볍게 대답했다. 목소리도 눈빛도 온통 부드러웠다. 박유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미연아, 오늘... 괜찮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깊었다. 온전히 그녀만을 향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지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박유진은 한결같이 그녀의 곁을 지켜왔다. 특히 우울증이 극도로 심해졌던 그때 그는 한순간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무너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버릴까 봐 24시간 내내 곁을 지키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박유진이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순순히 치료를 받아들이고 의사의 말에 성실히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1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우울증을 극복해냈다. 지금 그때의 힘든 나날들을 되돌아보면 항상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박유진이 곁에 없었다면 그녀는 아마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었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미 상처투성이인 마음과 불완전한 몸으로는 완벽한 박유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벽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늘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오늘 그녀는 그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녀가 시선을 피하자 박유진은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결국 아직도 그 벽을 넘지 못한 듯했다.그는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는 입술을 살짝 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고민하지 마.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네가 원할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 예전 진성에 있을
심미연의 눈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걸어내겠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듯했다.그때부터 심미연은 데이터 하나, 리포터 하나 놓치지 않고 아이의 병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방안에는 키보드 소리와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뿐이었고 적절한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들리는 그 소리는 생명과 희망을 담은 교향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심미연은 본인의 전문적인 지식과 용기로 작은 생명을 살릴 방도를 모색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그 시각, 심태하를 데리고 집으로 온 박유진은 역시나 조용한 집안에 심미연이 또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태하야, 엄마한테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박유진의 말에 2층으로 올라간 심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왜 혼자 내려와? 엄마는?”“엄마는 안 먹는대요. 난 할 만큼 했으니까 나머지는 아빠가 해요.”심태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박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알겠어, 내가 가볼게.”성큼성큼 걸어 올라간 박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방이 하도 조용해서 문 여는 소리마저 소음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 소음이 심미연을 방해하지는 못한 듯했다.박유진은 부드러운 불빛이 비춰진 그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심미연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넓은 책상 앞에 마주 앉은 심미연의 얼굴에는 노트북 화면에서 나온 불빛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평소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두 눈도 이 시각만큼은 노트북에 고정한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심미연만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박유진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그러다가 자연스레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수치들과 그래프를 보게 된 박유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작게 쓰여있는 숫자와 그래프들이 박유진에게는 그저 낯선 부호였지만 거기에 쏟은 심미연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박유진은 감히 함부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심미연의 건강이 걱정됐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 때문에 심미연의 손톱은 이미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차분히 눈을 감고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의 입장이 되어 그 장면을 그려보았다.부서진 가구들과 온몸을 뒤덮은 상처,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도망가지 못해서 절망만 가득한 그 눈동자.가정폭력만 한 게 아니라 바람까지 피우면서 남자는 여자의 정신을 처참히 짓밟고 있었다.그 배신이 피해자의 마지막 남은 선까지 무너뜨려서 결국 그들을 이혼에 이르게 한 것이다.여자는 해방되고 싶어서 제안한 이혼이 자신의 명을 단축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폭행을 일삼고 바람까지 피우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던 남자는 오히려 의심병이 도져 갑자기 이혼을 제안하는 여자가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배 속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여기까지 본 심미연은 숨이 가빠와서 호흡이 거칠어졌다.인간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 남자에 대한 분노로 쌓인 한기가 서서히 심미연의 영혼을 뒤덮고 있었다.어쩜 사람이 이처럼 잔인하고 매정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자신의 배우자에게 이딴 짓을 할 수 있는지 심미연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인간이야!”차오르는 분노와 비통함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지자 심미연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그게 경찰 출동을 알리는 경보음인가 싶어 심미연은 순간 숨을 죽였다.물론 이내 자신의 상상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심미연은 그 짧은 순간에 전화벨 소리가 마치 생명을 구원해줄 동아줄처럼 느껴졌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심미연이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아이 사건은 보셨어요?”여자의 말에 그제야 잊고 있던 심장병 걸린 세 살 아이의 사건을 떠올린 심미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대답했다.“바로 볼게요.”
3년 동안 심태하를 자신의 친아들로 여기며 온 정성을 다 쏟은 박유진은 심태하가 신나게 떠드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아빠, 얼른 와요!”그때 들리는 아이의 앳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춘 박유진은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심태하를 보며 미소를 지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환한 아이의 미소 덕분인지 박유진은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아이에게로 다가간 박유진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자 심태하는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내가 엄마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엄마는 일만 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니까요. 아들인 나도 설득 못 한 엄마라고요.”말을 하며 옆자리를 손으로 콕콕 찌르는 아이의 의도가 너무나 명확해서 박유진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엄마는 항상 그래요. 일만 하면 밥 먹는 것도 까먹어요.”심태하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엄마가 가슴 아픈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내가 말려봐도 일은 엄마의 사명이라면서 말을 안 듣는다니까요. 그래도 엄마가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러는 걸 아니까 나도 떼는 안 썼어요.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빨리 많은 걸 배우려고요. 그러면 엄마가 조금은 편해질 거잖아요.”심태하는 마치 박유진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맹세하는 사람처럼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엄마를 생각하는 그 갸륵한 마음에 임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임현은 저 말들이 세 살 난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영민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 자꾸 아까 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말들은 여름날 오후에 갑자기 찾아온 우레처럼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임현의 마음을 울렸다.임현은 그제야 왜 심미연이 아들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갔다.이런 아들이라면 백번이라도 자랑하고 싶을 것 같았다.하지만 다정한 눈으로 심태하를 바라보던 박유진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3년 전, 눈을 뜨자마자 심미연부터 찾은 박유진은 3
“죄송합니다!”“당신...”심미연의 사과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죽은 심미연 씨랑 똑같게 생겼어요.”그 말에 가슴이 내려앉은 심미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는 바로 전설적인 존재인 박시훈이었다.그가 유명해진 건 그의 정보망 때문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이 찾기 싫은 건 있어도 못 찾는 건 없다는 말도 떠돌게 된 것이다.심미연과 일면식도 없는 그가 그녀를 알아봤다는 건 박시훈이 심미연에 대해 뒷조사를 했다는 뜻이었다.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뒷조사를 한 사람과 지금은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잠깐만요!”“이게 뭐 하는 짓이야?”그때 나타난 박유진이 심미연에게로 뻗어진 박시훈의 팔을 가로막았다.박유진의 목소리를 들은 심미연은 그제야 안도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그가 있는 한 적어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는 없기 때문이었다.“박유진?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한편 이미 멀어진 심미연에 박시훈의 표정은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그는 매번 나타나서 자신의 일을 망치는 박유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저 사람은 내 아내 될 사람이야. 네 형수고. 앞으로 보면 예의부터 갖춰.”그 순간, 박유진은 진심으로 심미연을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었다.박시훈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혼자만 보며 심미연의 마음속에도 본인뿐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나를 가족으로 인정해준 적도 없는 박씨 집안 사람들이야. 자꾸 친한 척하지마. 너랑 나는 남이니까.”박씨 집안에 돌아갈 생각도 없고 그 집안사람과 엮이기도 싫었던 박시훈은 손을 쳐내며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하지만 심미연이 아직 멀리 못 갔을 걸 생각해 박유진은 또다시 박시훈의 팔을 붙잡았다.“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박유진, 너 진짜 미친 거야? 왜 자꾸 날 잡아!”또다시 잡힌 팔에 박시훈은 표정을 구기며 박유진을 노려보았다.이 순간만큼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