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갈 입장이 아니에요! 그냥 안 갈려고요.” 남자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쓸쓸함이 묻어났다.“어머니 얼굴이라도 보러 가고 싶지 않아?”“어머니가 이씨 가문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걸 알고 있어요.”“왜 데리고 떠나지 않아? 넌 충분히 부양할 능력이 있잖아. 안 그래?”“이씨 가문에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제 곁에는 없어요. 만약 제가 강제로 어머니한테 나와 함께 하라고 하면 그저 시들어버릴 거야.” 길은 어머니가 선택한 거였고 그녀는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을 거라 믿었다. 그가 그녀를 억지로 떠나게 한다면 그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그 삶이 길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할까!강지한은 말없이 침묵했다.그는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어릴 적부터 그는 생존과 빼앗는 것만 배웠고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법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이란 대체 어떤 느낌일까?’“됐어요. 당신한테 이런 얘기해 봤자 당신은 이해 못 할 거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제가 오늘 한 말이 이해될 거예요!”전화가 끊어지자 강지한은 핸드폰을 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지한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강지한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보았고 넉넉한 병원복을 입고 서 있는 온지유의 모습이 보였다. 코끝이 빨개져 서 있었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왜 내려왔어? 침대에서 푹 쉬라고 하지 않았어?”“너무 오래 내려가 있어서 걱정돼서 내려왔어.” 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창백하고 여리여리해 보였고 지켜주고 싶은 느낌을 주었다.“가자. 위로 올라가자.” 강지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심미연 씨는? 아직 안 왔어?” 온지유는 강지한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고 싶지 않아 하면 내가 전화해서 오지 말라고 할까?”강지한은 그녀의
잠시 망설이다가 심미연은 결국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핸드폰을 꺼내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그녀는 아마 강지한이 온지유와 통화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결국 프런트에 가서 물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서자 온지유가 강지한의 팔을 끌어안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심미연은 가슴 한편이 답답하고 불편해져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안전 통로로 발걸음을 돌렸다. 위층에 도착해 외할머니 병실 앞에 서자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야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병상에 누워 있는 외할머니가 보였다. 호흡기를 달고 주변의 기기들은 고요하게 작동하고 있었고 그 소리는 심미연의 심장을 울리는 듯했고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한 걸음씩 병상으로 다가갔다. 외할머니는 평온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심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저 혼자서 오랫동안 서서 울었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 의사가 들어오더니 눈물을 흘리는 심미연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심미연은 급히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 외할머니 상태는 어떤가요? 언제쯤 완전히 회복하고 퇴원할 수 있을까요?” 심미연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고 빨리 외할머니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이분은 나이가 많고 이 병을 오래 앓고 있어서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완전히 회복하고 퇴원하려면 아마 시간이 많이 걸릴 거예요. 혹은... 아예 퇴원을 못 할 수도 있어요. 환자분의 가족으로서 마음 준비를 해야 해요.”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며 어떤 보장도 하지 않았다. “최고의 의료팀이 있지 않나요? 그들이 못하면 누가 할 수 있죠?” 외할머니의 몸 상태가 도저히 회복되지 못한다면 그녀는 다른 계획을 세워야 했고 계속 강지한 옆에 있을 수는 없었
강지한의 시선이 심미연의 얼굴에 머물렀고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넌 정말 본분을 다하는 좋은 아내야. 내가 상이라도 줘야 할까?” 심미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가 주는 상이라면 그녀는 받을 자격도 없었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하...” 강지한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여기 남아서 온지유나 잘 돌봐. 난 회사에 가야겠어.” 심미연의 태도는 시종일관 시큰둥했고 강지한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잘 가.” 심미연은 손을 살짝 흔들며 맑게 웃어 보였다. 강지한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려 걸어갔다. 예전의 신미연은 이렇지 않았다. 그가 외출할 때마다 심미연은 현관까지 따라와 배웅하며 이별 키스를 요구하곤 했었지만 지금은 ‘잘 가’라는 말로 끝낼 뿐이다. 이 선명한 태도 변화는 강지한을 불편하게 했고 답답한 기분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 그때 강준형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저녁 식사에 가기로 한 건 이미 약속드렸잖아요. 굳이 다시 전화 안 주셔도 돼요.” 그러나 강준형은 이를 무시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오면 안 돼! 생일 케이크랑 선물을 준비해 와야 한다. 빈손으로 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강지한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누구 생일인데요? 뭘 준비하라는 거예요?” 누구 생일인지 모르는데 무작정 준비하라니 당연히 답답했다. 강준형은 그 말에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더 이상 너한테 말 안 하련다!” 그러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지한은 핸드폰을 쥔 채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지?” 하지만 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곧장 차를 몰고 회사로 출발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성무진이 찾아왔다. 강지한은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심씨 가문이 완전히 파산했습니다. 심씨 가문 명의의 모든 재
“조경 디자인 쪽에서 도면 의뢰를 할 작업실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사모님의 절친이 운영하는 조경 디자인 작업실이 꽤 평판이 좋다고 하던데 그쪽에 의뢰해 볼까요?” 성무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보다 강지한의 현재 심정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성에 조경 디자인 작업실이 거기 하나뿐이야?” 강지한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이해했습니다.” 성무진은 곧바로 깨달았고 이건 싫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더 묻지 않는 게 상책이다. 강지한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작업실과 협력할 계획이 있다는 얘기만 흘려 놔. 다른 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지금 당장은 급한 서류부터 가져와.” 심미연이 그 친구와 워낙 친하니 그 얘기를 들으면 분명 자신에게 부탁하러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조건을 걸 기회가 생길 것이다. 성무진은 그의 의도를 끝내 파악하지 못했지만 명령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급한 서류들을 챙겨와 그의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우선순위대로 정리했습니다. 먼저 검토하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강지한은 서류를 들고 검토하기 시작했다. 성무진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병실 안에서 온지유는 심미연에게 물을 떠 오라고 시키고 있었다. 심미연은 컵을 집어 정수기 앞으로 가며 고개를 돌려 온지유에게 물었다. “몇 도짜리 물로 줘?” 온지유가 괜히 트집 잡는 걸 막으려고 미리 물어본 것이었다. “날 돌보러 온 사람이 내가 마실 물 온도를 묻다니. 심미연, 넌 사람을 간호할 줄 몰라?” 온지유는 일부러 대답을 미뤘다. 대답하면 심미연에게서 어떻게든 흠을 잡아내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사실 온지유가 심미연을 불러온 이유는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였고 심미연이 일을 너무 잘해버리면 흠을 잡을 틈도 없어진다! 심미연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사람을 돌 본 적이 없어서 물어본 거야. 만약 100도짜리 물을 떠줬다가 네가 화상이라
“지한 씨, 나 지금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 미리 말해두는 거야.” 만약 그녀가 강지한에게 알리지 않으면 온지유가 또 뒤에서 그녀를 곤경에 빠뜨릴 일을 꾸밀 수 있었기에 미리 알리기로 했다. 예전에는 혼자였으니 강지한이 어떻게 그녀를 다루든 상관없었지만 이제는 쌍둥이를 임신한 상태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녀는 직장에서의 모든 노하우를 강지한과 온지유를 상대하는 데 썼고 이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였다. “방금 외출했다 왔잖아? 또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강지한의 목소리는 분명히 불쾌해 보였다.‘이 여자가 정말!’‘요즘 밖으로만 나가려고 하네.’“온라인에 이력서를 제출했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고 전화 왔어.” 심미연은 당연히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없어 얼버무려서 핑계를 댔다. 거짓말하는 게 어렵겠냐고! “아직 사직도 안 했는데 다른 회사 면접을 보겠다고? 심미연, 너 변호사면서 근로계약법도 모른다는 거야?” 강지한은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심미연은 입술을 꼭 깨물며 말했다. “네가 나한테 휴가를 줘놓고 아무 혜택도 안 주면 그게 사실상 해고 아니야? 그런 상태에서 다른 곳에 가는 게 뭔 문제라도 돼?”비록 그녀는 리우에서 계속 일을 하며 스승님이 뛰어내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곳이 온지유의 통제 속에 있기에 남고 싶어도 남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임신 중이라 리우에 계속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강지한이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아차리는 게 두려운 것은 물론. 온지유와 문소영이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도 두려웠다. 겉으로 보이는 적보다 은밀하게 다가오는 위협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숨어 있고 그녀는 언제나 드러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방어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 기회를 이용해서 떠나는 것이 그녀에게는 가장 좋을 것이다. “네게 휴가를 준 거지 해고한 건 아니야! 급여는 없다지만 이번 달 생활비로 2000만 원이 더
강지한이 그녀를 어떻게 처벌할지 그건 나중의 일이다. 핸드폰을 챙긴 뒤 심미연은 곧장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가서 간호사들에게 온지유의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달라고 당부한 후 떠났다. 그녀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외출한다고 말했고 간호사들에게 온지유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이 기간에 온지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로 그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었다. 내려와 차를 기다리는 동안 심미연은 신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연아, 무슨 일이야?” “하린아, 나 지금 병원에 가서 다시 초음파 검사해야 하는데 너 시간 돼?” “또다시 검사한다고? 아기한테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신하린의 목소리엔 분명히 초조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내가 쌍둥이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대!” 심미연은 순간 그때 신하린이 쌍둥이를 가질 거라며 웃었던 일이 떠올랐고 정말로 쌍둥이였다. 한 마디로 맞춘 그녀의 직감은 참으로 대단했다. “뭐? 세상에! 진짜 예상 못 했어! 지금 어디야? 기다려. 내가 당장 데리러 갈게!” 신하린은 기뻐하며 소리쳤다. “아니야. 그냥 병원으로 가. 나도 택시 타고 가니까 거기서 만나자.” 심미연은 이제 마음이 급해져서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 도착하고 싶었다. 쌍둥이가 맞는지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쁜 일을 아이 아빠에게도 알릴 수 없는 현실이 아쉬웠다. 그때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고 심미연은 당황해서 급히 말했다. “나 혼자 갈게! 너 오지 마.”그리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두 사람의 좋은 시간을 깨트린 생각에 그 남자가 화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스위트룸의 큰 침대 위에서 신하린은 엎드려 있었고 남자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움켜쥔 채 방울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신하린은 손에 쥔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고 표정은 멍해 있었다. 그때 남자의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정아.” 신하린은 갑자기 정신이 들었고 가슴이 아파졌다. 이럴 때마다 남자는 항상 그 이름을
신하린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촉촉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내가 헛소리하는 게 아니란 걸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신하린, 나한테 왔으면 그냥 순순히 복종해.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대하는지 너 잘 알잖아.” 남자는 그녀 발목에 달린 작은 방울을 손끝으로 튕기며 차갑고 섬뜩한 목소리를 냈다. 조금 전만 해도 몸을 섞었던 그들이었지만 이제 남자의 말은 차갑고도 잔혹하게 느껴졌다. 신하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무너져가는 몸을 겨우 일으켰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웨이브 진 긴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그저 한 번 웃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가진 모든 걸 잃는다고요?” 그녀의 작업실과 가장 친한 친구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가진 모든 것들. 여자는 말없이 눈부시게 웃었지만 그 웃음 뒤로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남자는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신하린의 목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이를 갈고 말했다. “신하린, 넌 진짜 질릴 만큼 비열해! 내가 너한테 그렇게 잘 해줬는데 넌 그동안 다른 남자만 생각하고 있잖아!” 신하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진영 씨, 당신 마음속에도 잊지 못한 첫사랑이 있잖아. 무슨 자격으로 날 비난하는 거야?” 박유진은 그녀가 가장 깊숙이 품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녀는 그를 마음속 깊이 숨겨두면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남자는 그 모든 걸 알아챘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도 그가 숨겨둔 마음속까지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들 똑같았다. 그도 그녀를 비웃을 자격이 없었다. 남자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고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네가 나랑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너 따위가 뭐라고!” 그 여자는 남자의 건드릴 수 없는 약점이었고 아무도 그 부분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런데 신하린은 이제 대놓고 말했으니 정말 죽을 각오를 한 듯했다. 신하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가슴
의사의 상상력이 제법 풍부하다고 해야 할까. 신하린의 상태를 간단히 살펴본 의사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하지만 뒤돌아섰을 때 남자의 날 선 살벌한 눈빛과 마주쳤고 의사는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 “이 여자 상태는 어때? 왜 아직도 안 깨는 거야?” 이진영의 목소리는 차갑기 짝이 없었고 의사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사람을 베어낼 것 같은 날카로움을 띄고 있었다. 의사는 이유도 모르고 남자를 화나게 만든 자신을 탓하며 땀을 닦았다. “몸엔 아무 이상 없습니다. 다만 너무 피로해 깊이 잠든 겁니다.” 의사의 얼굴은 백지처럼 창백해졌고 눈앞의 남자를 조금이라도 더 자극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히 못 할 정도였다. “그럼 됐어. 이제 나가. 이 일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마.” 이진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의사는 급히 약상자에서 연고를 꺼내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두었다. “이건 목에 바르는 연고입니다. 하루 몇 번씩 바르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약품 상자를 들고는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도련님의 일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다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남자는 침대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신하린의 찌푸려진 미간을 문질렀다. 이 여자가 헤어지고 한 후 지난 반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여자에게 손끝조차 댄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지 이틀 만에 그야말로 중독된 듯 그녀를 놓지 못하고 여러 번을 이어갔다. 제어하지 못하고 욕망에 휘둘린 끝에 이렇게까지 그녀를 지치게 만든 것이다. 평소 트위터에서는 러닝 사진이나 운동 영상을 자랑하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허약한 몸일 줄은 몰랐다. 이진영은 진지하게 이 모든 게 그저 연출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고 의심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약
온지유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순간 마음 한편에서 감동이 살짝 밀려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만약 그녀가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육현성이 이런 말을 한 순간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 온지유의 침묵은 육현성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었고 어쩌면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자신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결국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현성 오빠, 저는...” 온지유는 육현성이 괴로워하는 것을 느꼈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알아요. 지유 씨, 자기 자신을 강요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아요.” 결과를 알게 된 육현성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앞으로 자주 만날 수는 없을 거예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 당연히 그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 “현성 오빠, 나랑 이제 아예 연락고 안 해줄 건가요?” “지유 씨, 미안해요. 그냥 내가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요즘 육씨 가문이 엉망진창이라 육현성도 정신없이 바빴기에 온지유를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온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며 갑자기 눈가가 붉어졌고 이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알겠어요!” 그녀는 육현성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육현성이 떠나자마자 강지한이 도착했다. 온지유의 붉어진 눈을 보고 또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울었다고 생각했다. “유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눈에 안 좋다고 울지 말랬잖아.” 강지한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달래야 했다. 온지유는 육현성의 다정함이 떠오르며 울음을 참지 못하고 더 크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고 강씨 가문의 저택에서. 심미연은 단정한 원피스를
‘차라리 돌아와서 직접 아는 게 낫겠어.’ “성 비서, 말해! 도대체 무슨 일이야?”강지한의 목소리가 예리해졌다. 성무진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알게 된 사실을 모두 전했다. 강지한의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잠시 멈칫했다. 그날 전화로 심미연에게 온지유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 그녀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었지만 그때 그는 뭐라고 말했지? 그는 심미연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심미연은 전화하지 않았고 그는 그저 그녀가 사과하고 싶지 않아서 그를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토록 큰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마 슬픔에 잠겨 있었겠지.’‘그래서 내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야.’ “대표님.” 성무진은 전화기 속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부르며 물었다. “알았어. 그럼 여기까지 하자.” 강지한은 전화를 끊고 창밖의 차들이 가득한 거리를 바라보며 심미연이 혼자서 외할머니의 영정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그는 남편이었지만 아무것도 몰랐으며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그때 할아버지의 전화를 다시 떠올리니 아마 할아버지도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화가 너무 나서 전화를 끊어버렸던 거다. ‘할아버지는 나한테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강지한은 창가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 온지유의 전화가 다시 울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또 무슨 일이야?”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한 씨, 나 무서워.”온지유는 반쯤 진심이고 반쯤 아닌 듯 말하였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강지한은 신속하게 응답했다. “지한 씨, 내가 일 방해한 건 아니야?” 온지유는 조심스럽게
생각을 정리하던 강지한은 결국 그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전화기에서 울려 퍼지는 건 차가운 신호음뿐이었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바쁜 신호음만이 들려왔다. 강지한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심미연이라는 여자는 진짜 단 한 번도 그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잘못한 것도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다니. 그녀가 그의 번호를 차단했다면 그 역시 그녀를 찾을 필요 없이 돌아가서 처리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강지한은 화면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 여자가 또 할아버지에게 고자질이라도 한 건가?’ ‘이젠 할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그를 혼내려는 걸까?’ 지난번에 매를 맞은 뒤로 최근 너무 바빠서 상처도 신경 못 썼더니 이제 염증이 나서 며칠째 고통스러웠다. 한참 후 강지한은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강지한! 너 요즘 어디에 가 있었냐? 왜 전화는 한 번도 받지 않는 거냐?”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는 듯 분노가 그대로 드러났다. “저 요즘 진성에 출장 갔었어요. 핸드폰을 계속 켜놓고 있었는데 왜 안 받았겠어요?” 강지한은 늘 그렇듯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는 정말로 전화를 꺼본 적이 없었다. “그럼 그쪽에 계속 있어! 평생 돌아오지 마!” 강준형은 화가 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출장을 갔을 뿐인데 전화가 계속 안 된다니. 그게 단순한 우연일까?강지한처럼 예리한 사람이 왜 이 정도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강지한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생각하고 있을 때 온지유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 그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무슨 일이야?” “지한 씨, 지금 어디야? 나 혼자 병실에 있으니까 너무 무서워. 와서 좀 같이 있어 줄래?” 온지유의 목소리엔 떨림이 섞여 있었고 그 공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알았어. 금
“그럼 어머니가 계획한 대로 하세요.” 이진영은 어머니와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의 모든 결정은 이씨 가문을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그들은 이씨 가문의 명예를 누렸으니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선택할 수 없었던 일이니까. “넌 먼저 한유나 씨와 연락하고 다시 전화해 줘. 저녁 식사는 취소할게.” “알았어요!” 이진영은 전화를 끊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그 연기 속에는 그 여자의 눈부시고 매혹적인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담배 한 개비를 마저 피우고 나자 여자의 얼굴도 사라졌다. 그는 살짝 웃으며 비서에게 한유나의 번호를 찾게 한 후 바로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전화기에서 여자의 자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당신의 소개팅 상대 이진영이에요.” “무슨 일이죠?”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냉담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태도지?’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별일 없으면 그냥 끊을게요. 바빠요.” “소개팅 상대로 만나려면 점심에 얼굴 한 번 봐야죠. 어디죠? 데리러 갈게요.” 이진영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했고 아무 감정이 없었다. “연구소로 와요.” 그녀는 빠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생각했다. ‘역시 대가문의 따님답게 감히 나를 명령하네.’ “제가 일이 있어서 그럼 이만.” 그녀는 말을 끝내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바쁜 신호음이 들려오자 이진영은 코웃음을 치며 미소를 흘렸다. ‘잘난 척은 끝내주네.’ 그때 강지한의 전화가 걸려 왔고 이진영은 잠시 응급실에 있는 심미연을 떠올리며 망설인 뒤 전화를 받았다. “구도심 사람들 다 동의했어. 지금 와서 계약서에 사인해.” 강지한은 매우 지친 목소리였다. “내일은 안 돼?”그는 오늘 일정이 꽉 찬 상태였다. “오늘 밤에는 경성으로 돌아가야 해!” 강지한은 무의식
이진영은 신하린의 얼굴이 금세 빨개지는 것을 보고 살짝 눈을 좁혔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신하린,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 여자가 혹시 자기가 여기서 뭔가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이 병원이 자기가 소유하는 곳이라 해도 그런 식으로 무모하게 행동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하는 건 비밀스러움이 주는 그 자극적인 느낌이 있어 확실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오늘 밤 당신 집에 가야 되나요? 아니면 우리 집으로 올래요?” 신하린은 이제 거짓말도 입을 열자마자 술술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사실 남자도 그녀가 진심을 말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진짜 속마음을 말하면 상처가 될 테니까. “내가 네 집 하나 샀어. 일이 끝나면 같이 가서 보여줄게.”이진영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고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내가 사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신하린은 그가 주는 걸 원하지 않았고 그에게 뭔가를 받는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 뿐이었다. “너 그곳 너무 좁아. 할 때 별로야.” 이진영은 손을 뻗어 신하린을 품으로 끌어안으며 그녀의 매혹적인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비서한테 큰 소파랑 넓은 침대로 바꾸라고 했으니까 오늘 밤 한 번 써보자.” 조금 조롱이 섞인 말투였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은근히 기대가 치솟았다. 신하린의 얼굴은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남자가 정말 끝까지! 하루 종일 그런 생각만 하는 거냐고.’ “너 밥 해줄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 거기는 부엌도 넓고 기계도 다 새것으로 준비됐어...” 마지막 말은 그녀의 귀에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이듯 말했고 신하린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었고 귀까지 붉어졌다. ‘이 남자는 정말 너무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고 신하린을 잠시나마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이진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며 번호를 확인
신하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박유진에게 말했다. “잠깐 다녀올게요. 먼저 여기서 미연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진영은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라 조금이라도 더 기다리게 하면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박유진은 그저 응답했을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신하린은 그를 그윽하게 한 번 쳐다보고 그제야 돌아서서 떠났다. 박유진과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가능성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을 접고 있었다.안전 통로에서 이진영은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었다. 연기가 퍼져 나가면서 그의 잘생긴 얼굴이 그 속에서 아련하게 비쳤다. 신하린은 문 앞에서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참으로 잘생겼다. 그때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며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왜 안 와? 내가 널 잡아먹니?” 신하린은 시선을 떼고 한 발짝씩 그에게 다가갔고 마음속은 불안하고 떨렸다. 남자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은 건가?’ 신하린은 그의 앞에 다가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미연이가 쓰러져서 박유진 씨와 함께 병원에 데려왔어요.” 이진영은 자연스레 그날 밤 강씨 가문에서 봤던 그 여자가 떠올랐다. 정말 독특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분위기 또한 차분하고 목소리는 매우 부드럽고 온화했다. 경성에서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웠음에도 강지한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남자들은 결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미연이의 외할머니가 사흘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동안 혼자서 지키며 사흘을 보냈고 오늘 아침에 외할머니 장례식을 마친 후 쓰러졌어요.” 박유진과 자신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오해받길 원치 않았기에 그녀는 스스로 설명했다. 이진영은 눈을
신하린은 깜짝 놀라 손을 급히 떼었고 다시 돌아섰을 때 남자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 최근 며칠 동안 그의 전화를 피했던 신하린은 마음속에서 불안이 밀려왔다. 여기서 이 남자가 자신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박유진도 있는데 말이다. 이진영은 신하린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속에서 폭발할 듯한 분노가 일렀다. ‘이렇게 겁을 먹은 정도로 내가 무서운 거야?’ 신하린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곧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급히 그 앞에 다가가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여긴 내 병원이야. 점검하러 왔는데 무슨 문제 있어?” 남자의 말투는 거칠었고 이미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신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에 제가 직접 요리할게요. 함께 와서 먹을래요?” 심미연의 임신 사실이 절대 누설되지 않도록 이진영이 이미 말해둔 상태여서 신하린은 심미연을 이곳으로 데려왔지만 여기서 이진영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예상 밖이었다. “나한테는 수석 셰프가 요리해 주는데 넌 셰프 자격증은 있어? 나한테 밥 해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진영은 차갑게 웃으며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며칠 동안 이 여자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도 답장하지 않았으며 영상통화는 아예 무시했었다. 그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이제 와서 한 끼 식사로 그를 달래려고 한다니 그건 어림도 없었다. “그럼 됐어요!” 신하린은 약간 당황한 채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이 남자가 살짝 꼬리를 내리면 풀릴 줄 알았지만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셰프 수준은 아니지만 요리를 꽤 잘하는 그녀였고 남자의 말은 그녀를 정말 난처하게 했다. 박유진은 이진영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와 신하린 사이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심미연은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다면 알려야 할까?’
그는 그냥 강준형에게 더 이상 강지한의 일을 강제로 강요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었다. 강지한 같은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강준형은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미연이가 지난 3년 동안 겪은 그 모든 불공정한 대우는 다 내 잘못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기가 싫어서 계속 모른 척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 그만둘 거야. 미연이가 이혼을 원한다면 그건 그 자식이 감당할 문제야.” 3일 후 양경자의 장례식이 있었다. 하늘에는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심미연은 검은 옷을 입고 우산을 쥔 채 묘비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 보였다. 마치 외할머니가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신하린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3일 동안 심미연은 잠을 2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사실 심미연이 잠을 자지 않은 것보다 이 3일 동안 한 번도 울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지나치게 조용했던 사실이 신하린을 더 두렵게 했다. 신하린은 심미연이 극단적인 생각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박유진이 다가와 신하린과 짧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연아, 외할머니는 이제 편히 잠드셨어. 집에 데려다줄게.” 이 3일 동안 그는 심미연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듣지 않았고 그녀가 하루하루 지쳐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외할머니는 편히 안장되었으니 그녀가 잘 수 있도록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빠랑 하린이는 먼저 가. 난 할머니랑 좀 더 있다가 갈게.” “너 3일 내내 잠도 자지 않았잖아. 더 버티면 몸이 망가져!” 신하린은 목소리가 떨렸고 눈가는 이미 붉어져 있었다. 이 3일 동안 그녀는 심미연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신하린은 문 쪽을 바라보다가 은발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강준형을 보고 급히 심미연을 불렀다. “미연아, 네 할아버지 오셨어.”심미연은 잠시 멈칫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준형은 지팡이를 짚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미연아, 이렇게 큰 일이 있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니!” 강준형은 그녀의 너무 지친 모습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정말 바보 같은 애구나.’ ‘어떻게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려고 했을까.’ 심미연은 일어나려 했지만 무릎이 너무 아파 일어설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할아버지, 어떻게 오셨어요?”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강씨 가문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강지한에게 외할머니의 죽음을 이용해 책임을 피하려는 교활한 사람일 테니 그 이미지대로 남기로 했다.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전화는 꺼져 있더라. 걱정돼서 사람을 시켜 확인해 봤더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어. 미연아, 나는 네가 강지한 그 자식에게 마음이 떠난 걸 알아. 그런데 그놈은 그놈이고 나는 나야. 이런 일을 나한테까지 숨기지 말았어야지.”강준형은 빈소를 잠시 바라보며 심미연이 혼자 바쁘게 모든 걸 처리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다. ‘결국 이 모든 게 강지한 그 자식 때문이야!’ 강지한을 생각하니 강준형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심미연도 연락이 안 됐고 강지한도 연락이 안 되었다. 고의로 잠적을 한 건지 뭔 일이라도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면 반드시 그 자식에게 따지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바빳어요. 핸드폰도 꺼져버려서 잊고 있었어요.”심미연의 목소리는 피곤함에 찌든 느낌이었다. “할아버지, 기사님이 데려다주신 건가요?” 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강준형에게 진짜 생각을 말할 리 없었다. 강준형은 심미연의 눈에 짙게 퍼져 있는 혈관과 창백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내가 사람을 데려왔어. 나머지 일은 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