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린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촉촉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내가 헛소리하는 게 아니란 걸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신하린, 나한테 왔으면 그냥 순순히 복종해.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대하는지 너 잘 알잖아.” 남자는 그녀 발목에 달린 작은 방울을 손끝으로 튕기며 차갑고 섬뜩한 목소리를 냈다. 조금 전만 해도 몸을 섞었던 그들이었지만 이제 남자의 말은 차갑고도 잔혹하게 느껴졌다. 신하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무너져가는 몸을 겨우 일으켰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웨이브 진 긴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그저 한 번 웃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가진 모든 걸 잃는다고요?” 그녀의 작업실과 가장 친한 친구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가진 모든 것들. 여자는 말없이 눈부시게 웃었지만 그 웃음 뒤로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남자는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신하린의 목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이를 갈고 말했다. “신하린, 넌 진짜 질릴 만큼 비열해! 내가 너한테 그렇게 잘 해줬는데 넌 그동안 다른 남자만 생각하고 있잖아!” 신하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진영 씨, 당신 마음속에도 잊지 못한 첫사랑이 있잖아. 무슨 자격으로 날 비난하는 거야?” 박유진은 그녀가 가장 깊숙이 품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녀는 그를 마음속 깊이 숨겨두면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남자는 그 모든 걸 알아챘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도 그가 숨겨둔 마음속까지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들 똑같았다. 그도 그녀를 비웃을 자격이 없었다. 남자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고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네가 나랑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너 따위가 뭐라고!” 그 여자는 남자의 건드릴 수 없는 약점이었고 아무도 그 부분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런데 신하린은 이제 대놓고 말했으니 정말 죽을 각오를 한 듯했다. 신하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가슴
의사의 상상력이 제법 풍부하다고 해야 할까. 신하린의 상태를 간단히 살펴본 의사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하지만 뒤돌아섰을 때 남자의 날 선 살벌한 눈빛과 마주쳤고 의사는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 “이 여자 상태는 어때? 왜 아직도 안 깨는 거야?” 이진영의 목소리는 차갑기 짝이 없었고 의사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사람을 베어낼 것 같은 날카로움을 띄고 있었다. 의사는 이유도 모르고 남자를 화나게 만든 자신을 탓하며 땀을 닦았다. “몸엔 아무 이상 없습니다. 다만 너무 피로해 깊이 잠든 겁니다.” 의사의 얼굴은 백지처럼 창백해졌고 눈앞의 남자를 조금이라도 더 자극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히 못 할 정도였다. “그럼 됐어. 이제 나가. 이 일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마.” 이진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의사는 급히 약상자에서 연고를 꺼내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두었다. “이건 목에 바르는 연고입니다. 하루 몇 번씩 바르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약품 상자를 들고는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도련님의 일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다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남자는 침대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신하린의 찌푸려진 미간을 문질렀다. 이 여자가 헤어지고 한 후 지난 반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여자에게 손끝조차 댄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지 이틀 만에 그야말로 중독된 듯 그녀를 놓지 못하고 여러 번을 이어갔다. 제어하지 못하고 욕망에 휘둘린 끝에 이렇게까지 그녀를 지치게 만든 것이다. 평소 트위터에서는 러닝 사진이나 운동 영상을 자랑하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허약한 몸일 줄은 몰랐다. 이진영은 진지하게 이 모든 게 그저 연출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고 의심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약
신하린은 애써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열 번을 다시 말해도 달라지지 않아요. 우리 관계는 그냥 침대 위에서나 의미가 있을 뿐이니까요. 그런데 진영 씨, 제가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당신은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이 다른 여자랑 결혼하든 말든 제가 당신에게 매달릴 일은 없으니까요.” 지난 몇 년간 신하린은 스스로에게 절대 그를 사랑하지 말 것을 굳게 다짐해 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이진영은 얼굴에 냉소가 번졌다. “침대 위에서나? 네가 우리 사이를 그렇게 정의하겠다고?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겠네.” 말을 마치자 그는 신하린을 거칠게 들어 올려 소파 위로 던져버렸고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신하린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울음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친 방식으로 모든 불만을 쏟아내기만 했다. 마지막 순간 남자는 입을 벌려 그녀의 흰 어깨를 물었다. 무지막지한 통증이 온몸으로 번졌고 신하린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목이 잠겨 비명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남자는 그녀를 풀어주고 느긋하게 옷을 입고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비웃듯 냉소를 지었다. “핸드폰 꺼놓지 마. 내가 언제든 부를 수 있으니까.” 그는 곧바로 수표 한 장을 꺼내 그녀 앞으로 던지고 한 치의 미련도 없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신하린은 통유리에 비친 자신의 볼품없는 몰골을 마주하며 이내 눈물이 끝없이 쏟아졌다. 그는 예전보다 더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 하지만 신하린은 스스로에게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를 사랑했다면 지금 이 모욕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걸 끝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소파에 힘없이 기대어 있던 신하린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몸을 조금 움직일 수 있었다. 소파를 짚으며 간신히 일어선 신하린은 한 걸음 한 걸음 샤워
“감사합니다.”신하린은 비서에게 인사한 뒤 가방을 받아 들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곧바로 호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선 그녀는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했다.민망했지만 어깨에 난 상처는 빨리 처리해야 했다. 흉터라도 남으면 큰일이었다.치료를 받는 동안 의사의 미묘한 시선이 그녀를 스쳤다. 이 상처가 물린 자국이라는 걸 알아챈 듯했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신하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했다.‘어차피 다시 볼 일도 없는 사람이잖아.’남자에게 물렸다는 걸 알아챘든 아니든 아무 상관 없었다.그런데 치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던 순간, 예상치 못한 얼굴과 마주쳤다. 바로 육현성이었다.그의 입가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묻어 있었고, 뺨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누군가와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 역력했다.신하린은 육현성과 심미연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심미연의 친구로서 그녀와 대립하는 이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최대한 모른 척 지나치려 했다.그러나 육현성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뭐 하는 겁니까? 사람을 보고도 인사를 안 해요?”신하린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어깨의 통증이 다시 욱신거리며 밀려들었다.“육현성 씨, 제발 손 좀 놔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육현성은 술집에서 현지원과 싸우고 나온 길이었다. 이미 기분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친 상태에서 신하린이 자신을 마치 전염병 취급하며 피하자, 육현성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현지원, 그 근본 없는 자식만 나타나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니까!’분노는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번져갔다.“심미연의 밑에서 그렇게 개처럼 살다 보니, 사람만 보면 물고 보는 겁니까?”육현성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몰아붙였다.신하린은 그런 그를 단단히 노려보다가, 순간 그의 다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아야!”육현성은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 그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
“맞아!”심미연이 가볍게 대답하자, 신하린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와, 정말 잘됐다! 이제 조카가 두 명이나 생기겠네? 그것도 귀여운 공주님, 왕자님이겠어! 내일 당장 아기 옷 사러 가야겠다!”그녀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축복이 담겨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신하린의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너는 어때? 별일 없지?”심미연이 먼저 전화를 건 이유는 단순했다. 신하린이 전화를 안 한 것이 내심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나야 잘 지내지. 너랑 통화 끝나면 바로 잘 거야.”신하린은 자신의 상황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괜히 심미연까지 걱정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그럼 얼른 자. 우리 내일 오전에 사무실에서 만나자.”“미연아, 생일 축하해!”“오늘 초음파 검사 결과가 내게 최고의 생일 선물이야. 정말 기뻐!”심미연은 강씨 가문 본가에서 열린 강준형의 가족 모임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멈췄다. 오늘 강준형은 온 가족을 불러 모았고,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속내를 전부 드러낼 수 없었기에, 신하린과의 통화에서도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그럼 나도 잘게.”신하린은 전화를 끊기 전에 강지한이 심미연의 생일을 챙겼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만약 선물을 준비했으면 미연이가 바로 얘기했겠지. 말 안 한 걸 보면 준비 안 한 거잖아. 괜히 물어봤다간 더 속상해질 테고...’심미연은 간단히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고도 핸드폰을 손에 든 채 그녀는 한동안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그때 갑작스레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흠칫 놀랐다.“기다리고 있었어?”심미연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강씨 가문 본가의 정원 한가운데, 땅바닥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그녀는 속이 쓰린 듯한 기분에 잠시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강씨 가문 식구들이 스무 명 넘게 기다리고 있는데, 회사에서 야근 중이라더니..
속으로는 ‘이제 강지한과의 일이 이 사람들에게 다 보였으니, 나중에 우리가 사귀게 되면 따로 알릴 필요도 없겠네. 참 잘됐어.’ 라고 생각했다.온지유의 입꼬리는 얄미울 정도로 올라가 있었지만, 겉으로는 순진한 표정을 유지했다.“나도 모르겠어.”강지한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사실 강지한은 심미연의 생일인 줄 몰랐다. 할아버지가 전화로 케이크와 선물을 사 오라고만 했을 뿐, 누구의 생일인지까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강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집에 모여 있는 것을 보니 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지한 씨, 우리도 들어가자!”온지유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부러 가슴을 펴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한발 한발 걸음을 뗄 때마다 신경 쓰이는 듯 머리를 한 번 만지며 누군가를 의식하는 모습이었다.그때, 김 집사님이 급히 안에서 뛰어나와 강지한 앞에 멈춰 섰다.“물건은 제가 들겠습니다!”김 집사님은 온지유와 강지한의 손에 든 케이크와 선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온지유는 기다렸다는 듯 물건을 그의 손에 건네며 환하게 웃었다.“감사합니다.”김 집사님은 허리를 숙이며 서둘러 대답했다.“큰 사모님, 감사는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심미연은 한 발짝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가서 한쪽에 조용히 선 그녀는 이미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강지한과 온지유가 이렇게 친밀한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파 부엌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지금 나와 강지한은 전우 같은 관계일 뿐. 더 이상 그의 행동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아!’그녀는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였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했다.‘온지유가 이렇게 대놓고 강지한과 함께 나타난 건 둘 사이를 공식적으로 알리려는 거겠지. 그렇다면 나야 편하지 뭐. 이제 강지한이 외할머니를 핑계로 날 붙잡아 두려 하지 않을 테니, 빨리 벗어날 수 있겠네.’강준형은 멀리서 심미연을 흘끗 보았다. 그녀의 멍하니 선 모습이 안쓰러워 한숨을 깊게 삼켰다.‘강지
온지유는 순간 멍해졌다.문소영이 자신에게 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러면 밤에 강지한과 따로 만나고 싶어도 불가능할 텐데.’게다가 지금처럼 몸이 아픈 척하며 강지한을 부르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그녀의 속은 점점 타들어 갔다.‘강지한을 보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더군다나 문소영과 매일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면 자신의 비밀도 곧 들통날 게 뻔했다.“엄마 말씀대로 할게요.”강지한의 낮고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는 절망했다.‘강지한도 전에는 분명히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했었잖아. 외곽에 집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나를 내버려두는 거야? 설마, 아까 팔짱을 일부러 낀 게 문제였던 거야? 그 행동에 대해 경고하는 건가? 이제 어떡하지?’문소영은 옆에 서 있던 하인을 힐끗 보며 차갑게 말했다.“큰 사모님 좀 부축해라. 둘째 도련님 힘들게 하지 말고.”하인이 급히 다가와 온지유를 부축하며 말했다.“큰 사모님, 조심하세요.”온지유는 이를 악물었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하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뿐이었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강지한의 팔에서 자기 손을 천천히 뗐다.문소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강지한에게 말했다.“지한아, 얼른 미연이한테 가봐. 오래 기다렸을 거야. 오늘 저녁은 직접 주방에서 네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어.”강지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계단 위로 향했다.멀리 서 있는 심미연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은 멀리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풍기는 차분한 분위기가 묘하게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그 모습을 본 온지유는 이를 악물며 몰래 강지한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심미연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순간, 온지유의 속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심미연, 그 뻔뻔한 계집애! 일부러 저렇게 서서 강지한의
심미연은 강지한을 아예 공기 취급하며 완전히 무시했다.그가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을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만든 것도 모자라, 온지유 하나 때문에 이런 짓을 벌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강지한과의 관계가 단순히 협력 관계일 뿐이라 해도, 이제 더는 그와의 연극에 동참할 생각이 없었다.강지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심미연, 지금 뭐 하는 거야?”그녀가 일부러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망신 주려 한다는 생각에 분노가 서렸다.“강지한, 그만해!”강준형의 화난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그의 분노는 강지한을 향한 실망과 심미연을 향한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네가 미연의 남편으로서 아내 생일을 몰랐다는 건 그렇다 쳐. 하지만 내가 분명히 케이크와 생일 선물을 준비하라고 특별히 당부하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준비한 케이크는 크림이 다 녹아 원래 모양도 알아볼 수 없고, 선물은 테무에서 9,900원짜리 무료 배송으로 산 것 같은 털인형 하나! 네가 돈이 없냐, 아니면 시간이 없었냐? 그렇게 찌질하게 굴고도 미연이를 탓할 자격이 있긴 하냐?”강준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질타했다. 처음 강지한과 온지유가 함께 나타났을 때는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김 집사가 들고 있는 케이크와 선물을 본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강씨 가문의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지한에게 쏠렸다.그들은 이미 강지한이 심미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 번의 결혼 생활 동안 어느 정도 정이 생겼으리라 기대했었다.그럼에도 오늘 강지한의 행동은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깨뜨렸다. 그의 냉담함은 경악스러울 지경이었고, 반대로 심미연의 대범한 태도는 감탄을 자아냈다.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팔짱을 끼고 나타난 것을 보고도 태연히 대처하며 가족들에게 식사를 권유하는 그녀의 모습은 강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저런 여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강지한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강준형의 호
강지한은 핸드폰을 꺼내 보았고 화면에 떠 있는 이진영의 번호를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들과 연락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진영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공항에서 신하린과 심미연을 봤어.” 강지한은 갑자기 전에 박시훈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잠시 멈칫했다. “박유진도 그들과 함께 있었어.” 이진영은 신하린이 박유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년간 신하린의 마음 속에는 늘 박유진이 있었고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떠올리는 사람은 항상 박유진이였다. “정말 공항에서 심미연을 봤다고?”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그렇다면 심미연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그럼. 절대 틀림없어. 살아있는 심미연 씨야.” 이진영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심미연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신하린은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그녀의 얼굴에서 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진영은 심미연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심미연 씨 정말 대단해. 모두를 속였어.’‘강지한까지 속인 걸 보면 정말 대단해.’“그럼 그 사람이 진짜 심미연인지 신하린 씨에게 물어봤어?” 강지한이 물었다. 그는 이진영과 신하린 사이의 관계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동안 이들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연락 안 했어.” 이진영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심미연이 사라진 이후 신하린의 정신 상태는 항상 불안정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마다 자주 싸웠고 그의 가문과 한씨 가문에 일이 생기면서 그는 처리하느라 바빴고 신하린과의 연락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와 만난 횟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신하린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강지한은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상미가 그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점점 약해져 이제는 무언가를 잃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네가 이미 결혼해서 자식을 두었다고 떠들고 있는데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이렇게 살겠다는 거야?” 우선 강지한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강지한의 전 부인 행방을 알아내면 그때 자신이 먼저 대시해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때면 강지한도 그와 경쟁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박시훈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신의 성격이라면 반드시 심미연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명의 찾아서 상미 치료부터 해.”강지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세상이 뭐라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다시 여자를 찾아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상미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함께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았어. 바로 갈게.” 박시훈은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바로 사람을 보내 심미연을 찾기 시작했다.강지한은 전화를 쥐고 박시훈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심미연이 죽지 않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 심미연과 똑같이 성형한 걸까?’ “아빠, 상미 때문에 속상한거에요?” 병상에 누워 있는 상미는 고열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목소리는 가늘고 약했다. “미안해요, 아빠. 제가 아프게 해서...” 상미는 어느 날 엄마와 친구들이 나눈 전화를 우연히 듣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상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아빠가 자신을 잃으면 얼마나 슬퍼할지 걱정됐다. “우리 상미가 얼마나 대견한데.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 강지한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마치 자상한 아버지처럼 보였다. 강상미는 작은 손을 뻗어 그를 향해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꼭 밥 잘 먹을게요
박시훈은 잠시 멍해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얼마 전에 그 명의와 연락이 닿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상미 진료 기록은 이미 전달했어. 명의가 치료법을 찾으면 먼저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래.” “그게 사실이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상미가 선천성 심장병을 진단받은 이후 그는 그 아이를 치료해 줄 의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상미는 아직 너무 어렸고 선뜻 수술을 감행하려는 의사는 없었다.작년에 강지한이 진성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우연히 들은 이야기 하나가 그의 귀에 박혔다. “우리 진성에는 명의가 한 분 계시죠. 못 고치는 병이 없어요. 불과 2년 만에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셨다니까요.” 말하는 이는 별 뜻 없이 흘렸지만 듣는 이는 달랐다. 강지한은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박시훈에게 명의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박시훈의 정보망이 전 세계에 퍼져 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그는 원하는 그 명의를 찾지 못했다. 강지한 역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소문했지만 단 한 번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지금 상미는 고열로 입원했고 어린 몸으로 이 병을 버텨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명의를 찾고 싶었다. 명의만 찾을 수 있다면 상미는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진짜 너무하네.” 박시훈이 발끈하며 투덜거렸다. 강지한이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게 서운했다. “그러니까 빨리 사람부터 찾아.” 강지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쳐. 기억이 안 나면 다시 말해 주지. 심미연은 이미 죽었어.” 박시훈은 한순간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한아, 넌 네 전 부인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강지한은 순간 멈칫했다. 그 한마디에 묻어
‘방금 아빠랑 엄마가 뽀뽀했어.’ ‘나도 해야지.’ 심미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녀석이 정말.’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꼭 집어서 하는 재주는 여전하네.’ 심미연은 이 상황이 너무 민망했다. 하지만 심태하는 엄마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칠흑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엄마, 왜 나만 안 안아줘요? 왜 나만 뽀뽀 안 해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나 아니에요?” 심미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이 녀석, 또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 온 거야!’박유진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를 번쩍 안아 올리며 결국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엄마가 일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널 안을 힘이 없대.” 심태하는 곧장 심미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엄마, 피곤하면 쉬어요. 아빠랑 내가 성 만들 거에요.” 박유진은 잠시 침묵했다. ‘나도 같이 쉬고 싶은데.’ 심미연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아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 엄마는 조금 더 일해야 하니까 아빠랑 성 만들고 있어.” 그 아이의 수술을 위해 아직 최선의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다. 더 깊이 연구해 봐야 했다.“그럼 엄마 눈 마사지해줄게요.” 심태하의 작은 손이 심미연의 이마를 살짝 눌러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박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흘렸다. ‘우리 태하 정말 똑똑하네.’ 며칠 전에 그는 심미연에게 마사지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따라 하는 아이의 기억력이 많이 놀라웠다. 심미연은 그 순간 마음속에 벅찬 행복을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을 두게 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엄마 이제 일하세요.” 심태하는 손을 떼며 박유진에게 레고 놀이하러 가자고 재촉했다. 박유진은 그를 안고 돌아서 나가려 했다
“미연아...” 박유진은 가슴이 살짝 떨렸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낮고 부드럽게 입을 떼며 적막을 깨뜨렸다. “응?” 심미연이 가볍게 대답했다. 목소리도 눈빛도 온통 부드러웠다. 박유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미연아, 오늘... 괜찮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깊었다. 온전히 그녀만을 향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지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박유진은 한결같이 그녀의 곁을 지켜왔다. 특히 우울증이 극도로 심해졌던 그때 그는 한순간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무너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버릴까 봐 24시간 내내 곁을 지키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박유진이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순순히 치료를 받아들이고 의사의 말에 성실히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1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우울증을 극복해냈다. 지금 그때의 힘든 나날들을 되돌아보면 항상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박유진이 곁에 없었다면 그녀는 아마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었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미 상처투성이인 마음과 불완전한 몸으로는 완벽한 박유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벽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늘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오늘 그녀는 그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녀가 시선을 피하자 박유진은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결국 아직도 그 벽을 넘지 못한 듯했다.그는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는 입술을 살짝 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고민하지 마.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네가 원할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 예전 진성에 있을
심미연의 눈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걸어내겠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듯했다.그때부터 심미연은 데이터 하나, 리포터 하나 놓치지 않고 아이의 병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방안에는 키보드 소리와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뿐이었고 적절한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들리는 그 소리는 생명과 희망을 담은 교향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심미연은 본인의 전문적인 지식과 용기로 작은 생명을 살릴 방도를 모색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그 시각, 심태하를 데리고 집으로 온 박유진은 역시나 조용한 집안에 심미연이 또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태하야, 엄마한테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박유진의 말에 2층으로 올라간 심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왜 혼자 내려와? 엄마는?”“엄마는 안 먹는대요. 난 할 만큼 했으니까 나머지는 아빠가 해요.”심태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박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알겠어, 내가 가볼게.”성큼성큼 걸어 올라간 박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방이 하도 조용해서 문 여는 소리마저 소음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 소음이 심미연을 방해하지는 못한 듯했다.박유진은 부드러운 불빛이 비춰진 그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심미연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넓은 책상 앞에 마주 앉은 심미연의 얼굴에는 노트북 화면에서 나온 불빛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평소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두 눈도 이 시각만큼은 노트북에 고정한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심미연만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박유진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그러다가 자연스레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수치들과 그래프를 보게 된 박유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작게 쓰여있는 숫자와 그래프들이 박유진에게는 그저 낯선 부호였지만 거기에 쏟은 심미연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박유진은 감히 함부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심미연의 건강이 걱정됐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 때문에 심미연의 손톱은 이미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차분히 눈을 감고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의 입장이 되어 그 장면을 그려보았다.부서진 가구들과 온몸을 뒤덮은 상처,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도망가지 못해서 절망만 가득한 그 눈동자.가정폭력만 한 게 아니라 바람까지 피우면서 남자는 여자의 정신을 처참히 짓밟고 있었다.그 배신이 피해자의 마지막 남은 선까지 무너뜨려서 결국 그들을 이혼에 이르게 한 것이다.여자는 해방되고 싶어서 제안한 이혼이 자신의 명을 단축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폭행을 일삼고 바람까지 피우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던 남자는 오히려 의심병이 도져 갑자기 이혼을 제안하는 여자가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배 속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여기까지 본 심미연은 숨이 가빠와서 호흡이 거칠어졌다.인간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 남자에 대한 분노로 쌓인 한기가 서서히 심미연의 영혼을 뒤덮고 있었다.어쩜 사람이 이처럼 잔인하고 매정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자신의 배우자에게 이딴 짓을 할 수 있는지 심미연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인간이야!”차오르는 분노와 비통함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지자 심미연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그게 경찰 출동을 알리는 경보음인가 싶어 심미연은 순간 숨을 죽였다.물론 이내 자신의 상상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심미연은 그 짧은 순간에 전화벨 소리가 마치 생명을 구원해줄 동아줄처럼 느껴졌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심미연이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아이 사건은 보셨어요?”여자의 말에 그제야 잊고 있던 심장병 걸린 세 살 아이의 사건을 떠올린 심미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대답했다.“바로 볼게요.”
3년 동안 심태하를 자신의 친아들로 여기며 온 정성을 다 쏟은 박유진은 심태하가 신나게 떠드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아빠, 얼른 와요!”그때 들리는 아이의 앳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춘 박유진은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심태하를 보며 미소를 지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환한 아이의 미소 덕분인지 박유진은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아이에게로 다가간 박유진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자 심태하는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내가 엄마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엄마는 일만 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니까요. 아들인 나도 설득 못 한 엄마라고요.”말을 하며 옆자리를 손으로 콕콕 찌르는 아이의 의도가 너무나 명확해서 박유진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엄마는 항상 그래요. 일만 하면 밥 먹는 것도 까먹어요.”심태하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엄마가 가슴 아픈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내가 말려봐도 일은 엄마의 사명이라면서 말을 안 듣는다니까요. 그래도 엄마가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러는 걸 아니까 나도 떼는 안 썼어요.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빨리 많은 걸 배우려고요. 그러면 엄마가 조금은 편해질 거잖아요.”심태하는 마치 박유진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맹세하는 사람처럼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엄마를 생각하는 그 갸륵한 마음에 임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임현은 저 말들이 세 살 난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영민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 자꾸 아까 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말들은 여름날 오후에 갑자기 찾아온 우레처럼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임현의 마음을 울렸다.임현은 그제야 왜 심미연이 아들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갔다.이런 아들이라면 백번이라도 자랑하고 싶을 것 같았다.하지만 다정한 눈으로 심태하를 바라보던 박유진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3년 전, 눈을 뜨자마자 심미연부터 찾은 박유진은 3
“죄송합니다!”“당신...”심미연의 사과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죽은 심미연 씨랑 똑같게 생겼어요.”그 말에 가슴이 내려앉은 심미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는 바로 전설적인 존재인 박시훈이었다.그가 유명해진 건 그의 정보망 때문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이 찾기 싫은 건 있어도 못 찾는 건 없다는 말도 떠돌게 된 것이다.심미연과 일면식도 없는 그가 그녀를 알아봤다는 건 박시훈이 심미연에 대해 뒷조사를 했다는 뜻이었다.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뒷조사를 한 사람과 지금은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잠깐만요!”“이게 뭐 하는 짓이야?”그때 나타난 박유진이 심미연에게로 뻗어진 박시훈의 팔을 가로막았다.박유진의 목소리를 들은 심미연은 그제야 안도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그가 있는 한 적어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는 없기 때문이었다.“박유진?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한편 이미 멀어진 심미연에 박시훈의 표정은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그는 매번 나타나서 자신의 일을 망치는 박유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저 사람은 내 아내 될 사람이야. 네 형수고. 앞으로 보면 예의부터 갖춰.”그 순간, 박유진은 진심으로 심미연을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었다.박시훈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혼자만 보며 심미연의 마음속에도 본인뿐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나를 가족으로 인정해준 적도 없는 박씨 집안 사람들이야. 자꾸 친한 척하지마. 너랑 나는 남이니까.”박씨 집안에 돌아갈 생각도 없고 그 집안사람과 엮이기도 싫었던 박시훈은 손을 쳐내며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하지만 심미연이 아직 멀리 못 갔을 걸 생각해 박유진은 또다시 박시훈의 팔을 붙잡았다.“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박유진, 너 진짜 미친 거야? 왜 자꾸 날 잡아!”또다시 잡힌 팔에 박시훈은 표정을 구기며 박유진을 노려보았다.이 순간만큼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