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아, 생일 축하해!” 할아버지 강준형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목소리엔 기쁨과 행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심미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오늘이 자기 생일인 걸 떠올렸다. 어제 박유진이 일부러 밖으로 불러내 브로치를 선물해 줬지만 강지한에 의해 쓰레기통에 버려진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할아버지가 생일 선물만 준비한 게 아니고 생일 만찬도 준비했으니까 오늘 시간 되면 일찍 와서 나랑 얘기라도 하자.” 강준형은 며칠째 그녀를 못 봐서 보고 싶어서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이가 드니 옆에 자식이나 손주가 있어야 외로움이 덜해지는 거 같았다. 심미연은 마음이 따뜻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네! 고마워요. 할아버지.” 강씨 가문에서는 할아버지 강준형만이 그녀에게 가장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그녀는 거절할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 어서 출근해! 난 이만 네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마.” 강준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진심으로 심미연을 아꼈고 그녀가 점점 더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강지한이 심미연과 함께하는 이유는 심미연이 아주 훌륭했고 남자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물론 예쁜 외모도 한몫했다. 심미연은 핸드폰을 쥔 채 마음이 복잡해졌다. 신하린은 금방 도착했다. 심미연이 차에 올르자 신하린은 곧바로 쇼핑백을 건넸다. “미연아, 생일 축하해!” 심미연은 쇼핑백에서 보석 상자를 꺼내 열었고 그 안에는 MK 브랜드의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가격은 8자리 숫자의 고가였고 심미연은 신하린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이렇게 비싼 걸 왜 나한테 줘! 네 작업실도 자금이 필요하잖아.” “그 사람이 나한테 카드를 주었어. 돈 필요하면 그 카드 쓰면 돼.” 신하린은 밝게 웃고 있었다.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네가 그 사람의 돈에 욕심낸 게 아니란 거 알아. 너 나
“하린아, 뒤에 있는 차가 우리 따라오는 거 같지 않아?”심미연은 소리를 낮춰 신하린에게 말했다. 고속도로에서 겪었던 불쾌한 기억 때문에 그녀는 고속도로만 오면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또 사고라도 날까 봐 걱정되었다. “손잡이 꽉 잡아. 속도 낼 거야.” 신하린은 백미러를 바라보며 그 차도 똑같이 속도를 높이는 걸 확인했다. 그녀가 속도를 줄이면 그 차도 똑같이 속도를 줄였고 방향을 틀면 그 차도 그대로 따라 틀었다. 그 차는 마치 그녀들이 지나온 길을 그대로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두 사람은 그 차가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미연아, 가방 안에 있는 내 핸드폰 좀 꺼내줘. 그 사람한테 전화해야 해!” 신하린은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긴장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저 사람 신경 쓰지 말고 운전만 잘해.” 심미연은 그녀의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고 전화를 걸기 전에 전화가 걸려 왔다. “진영 도련님이야. 받을까?”“받아!” 신하린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하고 급히 전화를 받았다. “다 자고 나서는 그냥 도망치네. 심하린! 나한테 도발하는 거야?”남자의 목소리는 저음으로 울려 퍼졌고 전화기 너머로도 그의 분노가 느껴졌다. 신하린은 급히 해명했다. “오늘 아침에 미연이랑 병원 검진 가기로 약속했다고 어젯밤에 말했잖아요.”“점심은 같이 먹어. 네가 해 줘!”남자의 목소리 속 분노가 확실히 조금 가라앉은 게 보였다. “점심은 미연이랑 밖에서 먹을 거예요. 오늘 미연이 생일이에요.”신하린은 자신과 남자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잘 알고 있었다. 늘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고 자신이 더 깊게 빠지지 않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고통받는 건 그녀였다. “신하린, 나 놀리는 거야?”남자는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내일은 어때요? 부탁이에요.” 남자가 미친 듯이 발광하며 점심에 집에 돌아와 밥을 해달라는 고집을 막기 위해 신하린은 그를 달래야만 했다. “저녁까
“누군가 막아서 더는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육현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누군데?” “이씨 가문입니다.” 육현성은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힘껏 쥐었다. 펜촉이 손가락을 깊게 파고들며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차갑게 말했다. “일단 접어둬!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결과 나왔어?” “28년 전에 회장님이 어촌 마을에 가셨던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씨 가문에 매입되어 휴양지로 개발됐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정말 회장님의 자식인지 확인하려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확보해 DNA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계속 조사해. DNA 검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육현성은 전화를 끊었고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육현성, 내가 그 자식 당장 없애버리라고 했잖아! 왜 아직도 안 움직인 거야!” 분노에 찬 목소리가 귀에 울려 퍼졌다. 육현성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봤고 그곳에서 어머니가 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 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내가 몇 번이나 전화해도 받지 않길래 회사까지 찾아왔잖아!” 오미경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현성아,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말이라도 해줘!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니 집에 있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만 하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육현성은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제가 진정하시라고 그랬잖아요. 그냥 예전처럼 쇼핑도 하시고 마사지도 받으시고 고스톱도 치시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생활에 영향 받지 말라고요.” “그렇게 밤낮으로 경계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나타난 내연녀와 그 자식에 게다가 그 자식이 벌써 스물일곱이라잖아! 너랑 겨우 두 살 차이야! 지금 나보고 진정하라고? 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어!”비록 재벌가에서 내연녀를 두는 일은
이렇게 해야만 아들이 회사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로 그 자식에게 회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머니, 저는...” 육현성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오미경은 그의 말을 끊었다. “온지유 그년은 평소에 갖고 노는 건 되는데 결혼은 꿈도 꾸지 마! 육씨 가문의 며느리는 반드시 이씨 가문의 막내딸이어야 해!” 아들이 온지유를 좋아하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마땅한 며느릿감이 없었으니 아들이 하는 대로 그냥 놔뒀었다. 어차피 남자가 결혼 전에 여럿 만나고 돌아다니는 건 괜찮다고 여겼으니까.하지만 결혼하면 그런 관계는 완전히 끊어야 했다. 게다가 온지유는 좋은 여자도 아니었다. ‘남편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임신했다고? 게다가 도련님과 말도 안 되게 엮여 실검에 오르내리기까지.’‘이런 여자는 결혼해서 집에 데려온다고 해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거야. 분명히 외도할 게 뻔해!” 아들은 그 여자에게 속아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외부인으로서 오히려 더 명확히 보였다. 그녀는 아들이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육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머니 품격은 어디 갔어요?” 어떻게 그런 욕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 “아무튼 걔는 좋은 여자 아니야. 멀리하는 게 좋아.” 오미경은 단호하게 경고했다. 그녀는 온지유가 집에 들어오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육현성은 불쾌한 마음을 누르며 대답했다. “어머니, 제 일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니 일이나 신경 쓰세요. 차는 갖고 오셨어요? 안 갖고 왔으면 기사한테 말해 모셔다드릴게요.” “됐어! 혼자 갈 거야.” 오미경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빨리 온지유랑 관계 끊어! 안 그러면 앞으로 골치 아픈 일만 생길 거야.” ‘온지유는 절대 좋은 여자가 아니야! 얽혀봤자 좋을 게 없어.’ “알겠어요. 이제 가세요!”육현성은 누구든지 온지유에
그때 심미연과 신하린은 주얼리 샵 앞을 지나가고 있었고 우연히 가게 안에서 반지를 고르고 있는 여자가 익숙한 얼굴이라는 걸 느꼈다. 그녀는 신하린의 손을 잡고 가게로 들어갔고 그 여자가 다름 아닌 5년 전 남편의 불륜과 가정폭력으로 리우를 찾아와 이혼 소송을 맡겼던 나윤미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그때 심미연은 리우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고 그 사건은 스승님이 맡으셨다. 그런데 그 이혼 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스승님이 갑자기 투신자살하셨다. 그녀는 스승님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격이 까다롭고 종종 화를 내기도 했지만 절대 자살을 선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스승님이 세상을 떠난 후 심미연은 나윤미를 찾아가 상황을 물어보려 했지만 나윤미는 집을 팔고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 후 5년 동안 심미연은 계속해서 스승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추적했으며 나윤미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윤미는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듯 아무런 유용한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갑자기 그녀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자 심미연은 문득 나윤미가 이 5년 동안 경성 어딘가에 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은 어떤 액세사리를 찾고 계시는가요?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직원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물었다. 신하린은 가방에서 남자가 준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안쪽에서 천천히 고를게요. 괜찮죠?” 직원은 카드를 보고 깜짝 놀라다 이내 부러워했다. 그 카드는 경성에서 몇몇 가문만이 가질 수 있는 한정판 카드였다. 눈앞의 여자는 매우 젊어 보였고 아마도 상류 사회 가문의 사모님일 거라 짐작했다. “두 분,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두 사람을 안내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분도 함께 모셔서 천천히 고를 수 있죠?”신하린은 말할 때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마치 재벌 집 아가씨처럼 말했다. “물론입니다!” 직원은 물건을 조금이라도 더 팔아 인센티브를 챙기기 위해 서둘러 대답했다. 심미연은 신
그러고는 서둘러 몸을 돌려 급히 자리를 떠났다. 신하린은 일어나 쫓아가려 했지만 심미연이 그녀를 붙잡았다. “쫓아가 봤자 소용없어.” 조금 전 그 여자의 반응은 그녀가 바로 나윤미라는 걸 더욱 확실하게 증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당황하며 허둥지둥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우리 그냥 갈까?” 신하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카드까지 줘놓고는 구경도 안 하고 그냥 가겠다고?” 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조금만 기다려보는 게 좋을걸. 그 여자가 곧 너를 찾으러 올 거야.” 카드를 건넸으니 상대는 카드를 확인하려고 당연히 주인에게 연락할 것이다. 나윤미 쪽에는 따로 사람을 붙여 뒤를 쫓게 하면 된다. 다시 돌아온 이상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신하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 난 그 사람 돈을 쓰고 싶지 않아. 근데 내가 돈을 안 쓰면 그 사람은 내가 사랑 같은 걸 원한다고 착각해. 그리고 자기는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며 그래.” 그녀와 그가 관계를 한 건 사랑과 상관없이 서로 원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가 준 돈을 쓴다면 이 관계는 변질될 것이며 거래로 바뀐다. 신하린은 그런 비참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준 돈이 그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면 그냥 써. 마음 놓고 써버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사랑 따위는 아무 가치 없으니 바보같이 굴지 마! 나처럼 몇 년을 사랑하고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하지 말라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 그녀는 그저 가치 없다고 느꼈다. 신하린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감싸안았다. “미연아...” 만약 그녀가 좀 더 강했더라면 심미연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 걱정하지 마!” 배 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반드시 강하게 살아야 했다. 신하린은 마음이 아픈 듯 그녀를 더욱 꽉 안아줬다. “미연아, 너 지금 휴직 중인데 내
“나윤미, 왜 소리 질러?” 전화기 너머에서 날카롭고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진운혁!” 나윤미는 두려움에 떨며 간신히 이 이름을 내뱉었다. 진운혁은 5년 전 뛰어내려 죽은 변호사이자 심미연의 스승님이었다. “그 자식은 5년 전에 죽었어!” 남자는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너 혼자 겁먹고 있는 거야!” “그 사람! 안 죽었어요. 아직 살아 있어요! 바로 내 앞에...” 나윤미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가 너를 속이고 겁을 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남자는 경고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진짜예요!” 눈앞의 나타난 그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현실적이라 나윤미는 순간적인 충격에 쓰러져 버렸다. 폰이 땅에 떨어지고 화면이 깨졌다. “나윤미! 대답해!”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가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나윤미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번쩍이는 구두를 신고 나타난 남자가 나윤미의 앞에 멈추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폰을 집어 들고 화면에 있는 번호를 확인한 뒤 옆에 있는 밀크티 가게로 향했다. 밀크티 가게 안의 여자들이 남자가 들어오자 모두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너무 잘생겼어!” “스타일도 너무 좋은 아저씨야!” 남자는 창가 자리에 앉아 밀크티를 주문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나윤미는 빠르게 구급차에 실려 갔다. 남자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눈빛은 차가운 냉기가 서려 있었다. 주얼리 샵에서. 심미연은 두 개의 팔찌를 고른 뒤 하나는 신하린에게 선물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찼다. 디자인은 간단하지만 그녀의 손을 더욱 하얗고 아름답게 돋보이게 했다. 심미연은 매우 맘에 들었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강지한과 결혼한 이후 분기마다 성무진은 옷과 보석 그리고 액세서리를 보내왔지만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것들은 공식적인 자리나 연회에서나 겨우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번이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액세서리를 산
“하린아...” 심미연이 말하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열렸다. 심하린이 고개를 들어 남자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담긴 눈빛과 마주쳤을 때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미연이가 예상한 대로 빨리 왔네.’ “널 찾으러 왔어. 둘이 얘기해. 난 밖에서 기다릴게.” 심미연은 신하린을 살짝 밀며 일어섰고 손으로 옷을 정리한 뒤 몸을 돌려 남자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진영 도련님.” “강 부인.” 심미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목소리를 살짝 낮춰 말했다. “심미연이라고 부르세요.” 예전에 심미연은 ‘강 부인’이라는 호칭이 아주 좋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호칭이 혐오스럽고 웃음거리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고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을 나서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나윤미가 길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고 지금 응급처치 중입니다.”심미연의 얼굴에서는 미세한 변화가 일렀다. “어떻게 된 거죠?” “무언가를 보고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 같아요.” 심미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윤미가 스승님을 봤나?’ 5년 전 스승님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녀는 현장에 갔었고 그것이 분명히 스승님이었음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나윤미가 오늘 본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계속 지켜가고 있을게요. 새로운 소식 있으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심미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아직 나윤미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나윤미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당시 그 소송은 또 어떻게 된 일일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며 그녀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있어?” “주얼리 샵에서 엄청 예쁜 결혼반지를 봤어. 지한 씨, 우리는 결혼했는데 결혼반지조차 없네.” 심미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일부러 말을 돌렸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강지한은 그녀에게 병원에 가서 온지유를 돌보라
“지한 씨가 날 사랑하는 거 너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땐 잘만 참더니 지금은 왜 못 참아?” 온지유는 심미연의 말에 단번에 반응했다. 두 사람이 강지한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도 내 편이야. 이건 기회야.’ 오늘 이 자리에서 심미연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지한 씨랑 재혼? 웃기고 있네.’ 온지유의 도발에 심미연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뼛속까지 아끼고 감쌌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예전엔 내가 눈이 멀었지. 하지만 지금은 눈이 멀쩡해. 그러니까 이제는 참을 이유도 없어.” 심미연은 담담히 웃으며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머릿결이 살짝 감겼고 그 모습은 어딘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참아줄 때 당장 꺼져.” 예전엔 강지한을 사랑했기에 온갖 수모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이었고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심미연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온지유가 계속 도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구도 그녀를 탓할 순 없었다. 박시훈은 그런 심미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역시 달랐다. 머리카락 한 올 넘기는 그 동작조차도 치명적으로 보였다. 예전엔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그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문제는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상태하는 것. ‘이제는 미연 씨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박시훈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온지유는 심미연의 여유로운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심미연, 분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강지한 이름만 꺼내도 감정이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목적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심
심미연은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나오기 전에 꽤나 공을 들여 꾸미고 온 티가 났다. 하지만 얼굴 위엔 파운데이션이 지나치게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마치 밀가루를 덕지덕지 얹은 듯 자연스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한 씨가 내가 안에서 고생하는 거 못 본다고... 날 꺼내줬어.” 온지유는 등을 곧게 펴고 얼굴 가득 자부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심미연, 지한 씨랑 재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 말을 들은 박시훈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강지한이 직접 저 여자를 꺼냈다고?’ 그는 불과 얼마 전, 온지유가 출고했다는 사실을 강지한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결국 바보는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심미연의 눈동자가 조용히 온지유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건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섬세한 곡선. “그래?” 낮고 담담한 목소리. 마치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속을 들키지 않는 말투였다. 온지유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심미연은 문득 의심했다. ‘혹시... 강지한이 뒤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이제 이렇게 사실로 마주하니 심장이 조용히 찌릿하고 아려왔다. 그녀는 과거, 온지유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 그 여자가 평생 거기서 썩기를 바랐다. 하지만 겨우 4년. 너무도 빠른 재등장이었다. ‘강지한... 온지유한테 진심이긴 진심이었나 보네.’심미연의 눈빛에 눌린 온지유는 순간 몸이 움찔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덮쳐왔고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허리를 더 곧게 세웠다. “그럼.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든가.” 그녀의 말은 당당했지만 박시훈이 보내는 미묘한 시선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혹시... 이 남자, 뭐라도 눈치 챈 건 아니겠지?’‘아냐. 아닐 거야. 괜한 걱정 하지 말자.’하지만 박시훈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몰래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
‘왜? 심미연을 보호하려고?’박시훈은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바짝 다가온 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줄게요. 미연 씨를 짝사랑하고 있어요. 고백했다가 차였고요.”심미연에게 거절당한 건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지유의 표정은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럴 리 없어요. 당신 지한 씨 친구라면서요? 심미연이 지한 씨한테 몇 번이나 안겼는지도 모르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졌고 시선엔 뚜렷한 분노가 일렁였다. ‘심미연이 뭐라고... 도대체 왜 다들 심미연만 좋아하는데?’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심미연이 있는 자리는 늘 그녀가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마치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인 양. 온지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한이랑 미연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박시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미연 씨를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심미연에게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미어오는 걸 느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온지유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어딘가 모르게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심미연 같은 중고품이 이렇게 인기 많다고?’‘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야. 말도 안 돼.’“딩.”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심미연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청아했고 단아했다. 말없이 걸어 나오는 짧은 그 순간마저 도도하게 빛나는 존재감으로 공간을 압도했다. 그건 단순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내면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절제된 기품, 고요하지만 단단한 아우라. 심미연이라는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박시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운 듯 조심스
강지한의 목소리는 다소 불쾌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어조가 단호하고 차가웠다. 듣자마자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박시훈은 더는 망설일 여유도 없이 다급히 말했다. “온지유가 지금 은성 빌딩 로비로 들어갔어. 혹시라도 둘이 마주치면 싸움이라도 날까 봐... 너 빨리 와봐.” 숨도 제대로 못 고르고 내뱉은 말이었다. 급하게 말하다 목이 막힌 박시훈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너 먼저 막고 있어. 나 바로 갈게.” 강지한의 목소리엔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박시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강지한은 온지유한테 여전히 똑같네. 참 미련한 놈이지.’ 하지만 그가 온지유를 막으라고 했으니 일단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온지유가 정말로 위층까지 올라가서 둘이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박시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지금 당장 막아야 했다. 안 그러면 강지한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온지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친 건 박시훈이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절 아세요?” 온지유는 낯선 남자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를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아는 듯한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이랑 아는 사이면 당신도 알죠.”박시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얄밉고 교활한 구석이 느껴졌다. ‘강지한이 눈이 정말 많이 멀었지. 저런 여잘 좋다고...’“지한 씨 친구라고요? 근데 전 왜 처음 보죠?” 온지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지한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익숙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지금 알면 됐죠. 그리고 지한이가 방금 전화했어요. 당신한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