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아, 생일 축하해!” 할아버지 강준형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목소리엔 기쁨과 행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심미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오늘이 자기 생일인 걸 떠올렸다. 어제 박유진이 일부러 밖으로 불러내 브로치를 선물해 줬지만 강지한에 의해 쓰레기통에 버려진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할아버지가 생일 선물만 준비한 게 아니고 생일 만찬도 준비했으니까 오늘 시간 되면 일찍 와서 나랑 얘기라도 하자.” 강준형은 며칠째 그녀를 못 봐서 보고 싶어서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이가 드니 옆에 자식이나 손주가 있어야 외로움이 덜해지는 거 같았다. 심미연은 마음이 따뜻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네! 고마워요. 할아버지.” 강씨 가문에서는 할아버지 강준형만이 그녀에게 가장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그녀는 거절할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 어서 출근해! 난 이만 네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마.” 강준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진심으로 심미연을 아꼈고 그녀가 점점 더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강지한이 심미연과 함께하는 이유는 심미연이 아주 훌륭했고 남자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물론 예쁜 외모도 한몫했다. 심미연은 핸드폰을 쥔 채 마음이 복잡해졌다. 신하린은 금방 도착했다. 심미연이 차에 올르자 신하린은 곧바로 쇼핑백을 건넸다. “미연아, 생일 축하해!” 심미연은 쇼핑백에서 보석 상자를 꺼내 열었고 그 안에는 MK 브랜드의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가격은 8자리 숫자의 고가였고 심미연은 신하린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이렇게 비싼 걸 왜 나한테 줘! 네 작업실도 자금이 필요하잖아.” “그 사람이 나한테 카드를 주었어. 돈 필요하면 그 카드 쓰면 돼.” 신하린은 밝게 웃고 있었다.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네가 그 사람의 돈에 욕심낸 게 아니란 거 알아. 너 나
“하린아, 뒤에 있는 차가 우리 따라오는 거 같지 않아?”심미연은 소리를 낮춰 신하린에게 말했다. 고속도로에서 겪었던 불쾌한 기억 때문에 그녀는 고속도로만 오면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또 사고라도 날까 봐 걱정되었다. “손잡이 꽉 잡아. 속도 낼 거야.” 신하린은 백미러를 바라보며 그 차도 똑같이 속도를 높이는 걸 확인했다. 그녀가 속도를 줄이면 그 차도 똑같이 속도를 줄였고 방향을 틀면 그 차도 그대로 따라 틀었다. 그 차는 마치 그녀들이 지나온 길을 그대로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두 사람은 그 차가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미연아, 가방 안에 있는 내 핸드폰 좀 꺼내줘. 그 사람한테 전화해야 해!” 신하린은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긴장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저 사람 신경 쓰지 말고 운전만 잘해.” 심미연은 그녀의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고 전화를 걸기 전에 전화가 걸려 왔다. “진영 도련님이야. 받을까?”“받아!” 신하린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하고 급히 전화를 받았다. “다 자고 나서는 그냥 도망치네. 심하린! 나한테 도발하는 거야?”남자의 목소리는 저음으로 울려 퍼졌고 전화기 너머로도 그의 분노가 느껴졌다. 신하린은 급히 해명했다. “오늘 아침에 미연이랑 병원 검진 가기로 약속했다고 어젯밤에 말했잖아요.”“점심은 같이 먹어. 네가 해 줘!”남자의 목소리 속 분노가 확실히 조금 가라앉은 게 보였다. “점심은 미연이랑 밖에서 먹을 거예요. 오늘 미연이 생일이에요.”신하린은 자신과 남자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잘 알고 있었다. 늘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고 자신이 더 깊게 빠지지 않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고통받는 건 그녀였다. “신하린, 나 놀리는 거야?”남자는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내일은 어때요? 부탁이에요.” 남자가 미친 듯이 발광하며 점심에 집에 돌아와 밥을 해달라는 고집을 막기 위해 신하린은 그를 달래야만 했다. “저녁까
“누군가 막아서 더는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육현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누군데?” “이씨 가문입니다.” 육현성은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힘껏 쥐었다. 펜촉이 손가락을 깊게 파고들며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차갑게 말했다. “일단 접어둬!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결과 나왔어?” “28년 전에 회장님이 어촌 마을에 가셨던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씨 가문에 매입되어 휴양지로 개발됐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정말 회장님의 자식인지 확인하려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확보해 DNA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계속 조사해. DNA 검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육현성은 전화를 끊었고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육현성, 내가 그 자식 당장 없애버리라고 했잖아! 왜 아직도 안 움직인 거야!” 분노에 찬 목소리가 귀에 울려 퍼졌다. 육현성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봤고 그곳에서 어머니가 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 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내가 몇 번이나 전화해도 받지 않길래 회사까지 찾아왔잖아!” 오미경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현성아,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말이라도 해줘!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니 집에 있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만 하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육현성은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제가 진정하시라고 그랬잖아요. 그냥 예전처럼 쇼핑도 하시고 마사지도 받으시고 고스톱도 치시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생활에 영향 받지 말라고요.” “그렇게 밤낮으로 경계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나타난 내연녀와 그 자식에 게다가 그 자식이 벌써 스물일곱이라잖아! 너랑 겨우 두 살 차이야! 지금 나보고 진정하라고? 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어!”비록 재벌가에서 내연녀를 두는 일은
이렇게 해야만 아들이 회사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로 그 자식에게 회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머니, 저는...” 육현성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오미경은 그의 말을 끊었다. “온지유 그년은 평소에 갖고 노는 건 되는데 결혼은 꿈도 꾸지 마! 육씨 가문의 며느리는 반드시 이씨 가문의 막내딸이어야 해!” 아들이 온지유를 좋아하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마땅한 며느릿감이 없었으니 아들이 하는 대로 그냥 놔뒀었다. 어차피 남자가 결혼 전에 여럿 만나고 돌아다니는 건 괜찮다고 여겼으니까.하지만 결혼하면 그런 관계는 완전히 끊어야 했다. 게다가 온지유는 좋은 여자도 아니었다. ‘남편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임신했다고? 게다가 도련님과 말도 안 되게 엮여 실검에 오르내리기까지.’‘이런 여자는 결혼해서 집에 데려온다고 해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거야. 분명히 외도할 게 뻔해!” 아들은 그 여자에게 속아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외부인으로서 오히려 더 명확히 보였다. 그녀는 아들이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육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머니 품격은 어디 갔어요?” 어떻게 그런 욕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 “아무튼 걔는 좋은 여자 아니야. 멀리하는 게 좋아.” 오미경은 단호하게 경고했다. 그녀는 온지유가 집에 들어오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육현성은 불쾌한 마음을 누르며 대답했다. “어머니, 제 일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니 일이나 신경 쓰세요. 차는 갖고 오셨어요? 안 갖고 왔으면 기사한테 말해 모셔다드릴게요.” “됐어! 혼자 갈 거야.” 오미경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빨리 온지유랑 관계 끊어! 안 그러면 앞으로 골치 아픈 일만 생길 거야.” ‘온지유는 절대 좋은 여자가 아니야! 얽혀봤자 좋을 게 없어.’ “알겠어요. 이제 가세요!”육현성은 누구든지 온지유에
그때 심미연과 신하린은 주얼리 샵 앞을 지나가고 있었고 우연히 가게 안에서 반지를 고르고 있는 여자가 익숙한 얼굴이라는 걸 느꼈다. 그녀는 신하린의 손을 잡고 가게로 들어갔고 그 여자가 다름 아닌 5년 전 남편의 불륜과 가정폭력으로 리우를 찾아와 이혼 소송을 맡겼던 나윤미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그때 심미연은 리우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고 그 사건은 스승님이 맡으셨다. 그런데 그 이혼 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스승님이 갑자기 투신자살하셨다. 그녀는 스승님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격이 까다롭고 종종 화를 내기도 했지만 절대 자살을 선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스승님이 세상을 떠난 후 심미연은 나윤미를 찾아가 상황을 물어보려 했지만 나윤미는 집을 팔고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 후 5년 동안 심미연은 계속해서 스승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추적했으며 나윤미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윤미는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듯 아무런 유용한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갑자기 그녀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자 심미연은 문득 나윤미가 이 5년 동안 경성 어딘가에 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은 어떤 액세사리를 찾고 계시는가요?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직원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물었다. 신하린은 가방에서 남자가 준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안쪽에서 천천히 고를게요. 괜찮죠?” 직원은 카드를 보고 깜짝 놀라다 이내 부러워했다. 그 카드는 경성에서 몇몇 가문만이 가질 수 있는 한정판 카드였다. 눈앞의 여자는 매우 젊어 보였고 아마도 상류 사회 가문의 사모님일 거라 짐작했다. “두 분,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두 사람을 안내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분도 함께 모셔서 천천히 고를 수 있죠?”신하린은 말할 때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마치 재벌 집 아가씨처럼 말했다. “물론입니다!” 직원은 물건을 조금이라도 더 팔아 인센티브를 챙기기 위해 서둘러 대답했다. 심미연은 신
그러고는 서둘러 몸을 돌려 급히 자리를 떠났다. 신하린은 일어나 쫓아가려 했지만 심미연이 그녀를 붙잡았다. “쫓아가 봤자 소용없어.” 조금 전 그 여자의 반응은 그녀가 바로 나윤미라는 걸 더욱 확실하게 증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당황하며 허둥지둥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우리 그냥 갈까?” 신하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카드까지 줘놓고는 구경도 안 하고 그냥 가겠다고?” 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조금만 기다려보는 게 좋을걸. 그 여자가 곧 너를 찾으러 올 거야.” 카드를 건넸으니 상대는 카드를 확인하려고 당연히 주인에게 연락할 것이다. 나윤미 쪽에는 따로 사람을 붙여 뒤를 쫓게 하면 된다. 다시 돌아온 이상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신하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 난 그 사람 돈을 쓰고 싶지 않아. 근데 내가 돈을 안 쓰면 그 사람은 내가 사랑 같은 걸 원한다고 착각해. 그리고 자기는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며 그래.” 그녀와 그가 관계를 한 건 사랑과 상관없이 서로 원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가 준 돈을 쓴다면 이 관계는 변질될 것이며 거래로 바뀐다. 신하린은 그런 비참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준 돈이 그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면 그냥 써. 마음 놓고 써버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사랑 따위는 아무 가치 없으니 바보같이 굴지 마! 나처럼 몇 년을 사랑하고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하지 말라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 그녀는 그저 가치 없다고 느꼈다. 신하린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감싸안았다. “미연아...” 만약 그녀가 좀 더 강했더라면 심미연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 걱정하지 마!” 배 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반드시 강하게 살아야 했다. 신하린은 마음이 아픈 듯 그녀를 더욱 꽉 안아줬다. “미연아, 너 지금 휴직 중인데 내
“나윤미, 왜 소리 질러?” 전화기 너머에서 날카롭고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진운혁!” 나윤미는 두려움에 떨며 간신히 이 이름을 내뱉었다. 진운혁은 5년 전 뛰어내려 죽은 변호사이자 심미연의 스승님이었다. “그 자식은 5년 전에 죽었어!” 남자는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너 혼자 겁먹고 있는 거야!” “그 사람! 안 죽었어요. 아직 살아 있어요! 바로 내 앞에...” 나윤미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가 너를 속이고 겁을 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남자는 경고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진짜예요!” 눈앞의 나타난 그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현실적이라 나윤미는 순간적인 충격에 쓰러져 버렸다. 폰이 땅에 떨어지고 화면이 깨졌다. “나윤미! 대답해!”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가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나윤미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번쩍이는 구두를 신고 나타난 남자가 나윤미의 앞에 멈추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폰을 집어 들고 화면에 있는 번호를 확인한 뒤 옆에 있는 밀크티 가게로 향했다. 밀크티 가게 안의 여자들이 남자가 들어오자 모두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너무 잘생겼어!” “스타일도 너무 좋은 아저씨야!” 남자는 창가 자리에 앉아 밀크티를 주문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나윤미는 빠르게 구급차에 실려 갔다. 남자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눈빛은 차가운 냉기가 서려 있었다. 주얼리 샵에서. 심미연은 두 개의 팔찌를 고른 뒤 하나는 신하린에게 선물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찼다. 디자인은 간단하지만 그녀의 손을 더욱 하얗고 아름답게 돋보이게 했다. 심미연은 매우 맘에 들었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강지한과 결혼한 이후 분기마다 성무진은 옷과 보석 그리고 액세서리를 보내왔지만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것들은 공식적인 자리나 연회에서나 겨우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번이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액세서리를 산
“하린아...” 심미연이 말하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열렸다. 심하린이 고개를 들어 남자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담긴 눈빛과 마주쳤을 때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미연이가 예상한 대로 빨리 왔네.’ “널 찾으러 왔어. 둘이 얘기해. 난 밖에서 기다릴게.” 심미연은 신하린을 살짝 밀며 일어섰고 손으로 옷을 정리한 뒤 몸을 돌려 남자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진영 도련님.” “강 부인.” 심미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목소리를 살짝 낮춰 말했다. “심미연이라고 부르세요.” 예전에 심미연은 ‘강 부인’이라는 호칭이 아주 좋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호칭이 혐오스럽고 웃음거리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고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을 나서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나윤미가 길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고 지금 응급처치 중입니다.”심미연의 얼굴에서는 미세한 변화가 일렀다. “어떻게 된 거죠?” “무언가를 보고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 같아요.” 심미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윤미가 스승님을 봤나?’ 5년 전 스승님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녀는 현장에 갔었고 그것이 분명히 스승님이었음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나윤미가 오늘 본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계속 지켜가고 있을게요. 새로운 소식 있으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심미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아직 나윤미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나윤미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당시 그 소송은 또 어떻게 된 일일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며 그녀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있어?” “주얼리 샵에서 엄청 예쁜 결혼반지를 봤어. 지한 씨, 우리는 결혼했는데 결혼반지조차 없네.” 심미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일부러 말을 돌렸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강지한은 그녀에게 병원에 가서 온지유를 돌보라
강지한은 차를 잡고 있던 손이 마치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갑자기 움켜잡힌 듯 그의 마음까지도 얼어붙게 했다. 창밖의 밤은 깊고 먹물처럼 어두웠으며 실내의 조명은 흐릿하게만 그를 비추고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지금 그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이 일을 심미연에게도 말한 걸까?’‘그렇지 않다면 심미연은 왜 이렇게 단호하게 이혼을 결심한 걸까?”강준형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미 경고했잖아. 그 애 일에 너무 개입하지 말라고! 근데 넌 내 말을 그냥 흘려들었지!” 강준형의 목소리는 낮고 강렬했으며 그 한마디 한마디가 강지한의 가슴을 거듭 내리치며 파고들었다. 강지한은 잘 알고 있었다. 강준형이 진성과 온지유에 대해 언급한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고 분명 예전부터 사람을 시켜서 조사를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아는 일이면 심미연도 다 알고 있는 걸까?’강지한은 아무 말 없이 고요히 침묵을 지켰다. “온지유는 겉으로 보기엔 여린 듯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강준형의 말에는 약간의 무력함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젊은 후배의 일을 이렇게 뒤에서 평가하는 게 본의는 아니었지만 네가 그저 이 늪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미연이까지 잃었다는 걸 보고는 그냥 지켜볼 수가 없더라. 혹시 넌 생각해 본 적 있어? 그 애의 착한 모습이 어쩌면 그저 교묘하게 짜놓은 덫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 목표는 바로 너고”강준형은 그 말을 하던 중 가볍게 한숨을 쉬었고 그 한숨은 마치 세월을 넘는 깊은 한숨처럼 약간의 세월의 흔적과 슬픔이 섞여 있었다. “강지한, 그거 알아?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은 대부분 가장 부드러운 미소 뒤에 숨겨져 있어.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그걸 미리 읽을 수는 없단다.” 그 순간 공기가 마치 얼어붙은 듯했고 밖에서 가끔 들려오는 밤바람의 속삭임만이 이 공허함을 채우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강지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
심미연은 이미 구연궁에서 살기로 결심한 상태였고 강준형이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알았어요. 이제 많이 늦었으니 먼저 돌아가서 쉬세요. 제가 자리를 잡고 나면 찾아뵐게요.”“알겠다!” 강준형은 그녀의 창백하고 피곤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저렸다. ‘참 좋은 아이인데.’이렇게 떠난다는 사실이 너무 아쉽고 마음이 짠했다. 하지만 그녀가 강지한에게 계속 상처받는 걸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결국 강지한은 후회하게 된다고 생각했다!심미연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짐을 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떠날 결심이 이미 서 있었기에 그녀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심미연!” 강지한은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강준형이 지팡이를 들어 그의 다리를 쳤다. “거기 서라! 따라가면 안 된다!”“할아버지...” 예전에는 분명히 온전하셨던 정신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미련을 두는 걸까?강준형은 기사에게 심미연을 데려다주게 하고 강지한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강지한, 네가 무슨 면목으로 그 애를 붙잡고 있어? 미연이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남편인 네가 소식 하나 없었잖아. 미연이는 홀로 외할머니를 보내며 3일 동안 잠도 안 자고 버텼단 말이다. 미연이의 마음속 아픔은 네가 상상도 못 할 거야.”그 3일 동안 그는 심미연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졌다. 그런 착한 아이가 이제는 무감각해졌으니.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딘 걸까. 강지한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결국 손을 내려놓았다. 강준형의 말을 듣고 나서 그는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그래도 그는 여전히 심미연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네가 정말로 착한 사람이라면 그애를 놓아줘라! 그 애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 강준형은 강지한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끼며 더 이상 두 사람을 엮어주려 하지 않았고 그저 강지한에게 놓아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강지한은 말없이 몸을
“미연아, 내가 이번 일에 관해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잖아. 나가지 말고 내 말을 먼저 들어줄래?” 강지한은 억누른 화를 속으로 삼키며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가 급히 진주에서 돌아온 게 심미연을 보내려 온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상황에 관해 설명하고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이번엔 그의 잘못이었다!심미연은 짐가방을 단단히 붙잡고 아무 감정 없이 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그녀가 10년 동안 사랑해 온 사람이었고 평생 그를 사랑할 거라 믿었지만 결국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사랑했던 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신이 그녀에게 좋은 길을 마련해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지한 씨, 내가 당신에게 준 기회는 이미 다 끝났어. 그래서 이번에는 무조건 떠날 거야.” 그녀의 표정은 아무 감정이 없이 가볍고 담담했다. 외할머니의 죽음 이후 그녀는 강지한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했다. 사람은 한 번 마음을 놓으면 다시 맞닥뜨릴 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이었다. 앞으로 강지한의 모든 것은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네가 정말 나를 떠나기로 결심했다면 할아버지 생각은 해봤어? 건강도 안 좋은데 네가 떠난다고 그러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걱정되지 않아?”강지한은 심미연의 결단을 보고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할아버지를 방패 삼아 막으려 했다. 심미연이 할아버지를 그렇게 아끼는 만큼 그녀는 그가 아프고 슬퍼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강지한은 확신했다.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물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어. 할아버지는 내가 이혼하는 걸 지지하셔.”예전엔 할아버지의 건강 때문에 이혼 얘기를 꺼내지 못했지만 이번엔 강지한의 행동은 너무 지나쳤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이혼을 반대하셔도 그녀는 할 것이었다. 더 이상 강지한과 그런 날들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제 외할
심미연은 일어나 멀리 있는 곳을 응시했다. 그 시선은 마치 지금 자신이 가게 될 길이자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 가득 찬 새로운 여정이 펼쳐지는 순간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한편 강준형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서서 그녀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음속 깊이 뭔가를 잃은 듯한 아쉬움과 함께 손녀의 앞날을 향한 무한한 기대가 교차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강씨 가문의 저택은 다시 한번 고요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오늘 밤 심미연이 내린 결단은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처럼 깊은 파문을 일으켜 새로운 삶의 여정이 시작될 것을 예고했다. 미르 파크로 돌아온 심미연을 반기며 임혜자가 서둘러 다가왔다. “사모님,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바로 준비할게요!” 심미연은 미소로 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요.” “알았어요. 그럼 나중에 드실 때 말씀하세요!” “네. 그럼 저는 올라가 볼게요.” 임혜자는 그녀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더 말라가는 사모님의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손바닥만큼 작아 보일 정도였고 그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심미연은 윗층으로 올라와 빠르게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보낸 3년의 세월 동안 짐이라고는 고작 하나의 여행 가방에 담길 만큼 간단했다. 짐을 끌며 문을 나서던 그녀는 잠시 멈추어 침실을 뒤돌아보았다. 그 방을 바라보는 마지막 시선이었다. 임혜자는 그녀가 가방을 들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다가갔다. “사모님, 어딜 가시려고요?” 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제 이 집을 떠나려고요.” “사모님, 왜 이러세요!” 임혜자는 눈가가 붉어진 채 울먹이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가지 마세요!” 하지만 심미연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단호히 짐을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마음속 결단을 전달하는 듯했다. 가방
온지유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순간 마음 한편에서 감동이 살짝 밀려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만약 그녀가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육현성이 이런 말을 한 순간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 온지유의 침묵은 육현성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었고 어쩌면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자신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결국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현성 오빠, 저는...” 온지유는 육현성이 괴로워하는 것을 느꼈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알아요. 지유 씨, 자기 자신을 강요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아요.” 결과를 알게 된 육현성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앞으로 자주 만날 수는 없을 거예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 당연히 그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 “현성 오빠, 나랑 이제 아예 연락고 안 해줄 건가요?” “지유 씨, 미안해요. 그냥 내가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요즘 육씨 가문이 엉망진창이라 육현성도 정신없이 바빴기에 온지유를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온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며 갑자기 눈가가 붉어졌고 이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알겠어요!” 그녀는 육현성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육현성이 떠나자마자 강지한이 도착했다. 온지유의 붉어진 눈을 보고 또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울었다고 생각했다. “유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눈에 안 좋다고 울지 말랬잖아.” 강지한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달래야 했다. 온지유는 육현성의 다정함이 떠오르며 울음을 참지 못하고 더 크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고 강씨 가문의 저택에서. 심미연은 단정한 원피스를
‘차라리 돌아와서 직접 아는 게 낫겠어.’ “성 비서, 말해! 도대체 무슨 일이야?”강지한의 목소리가 예리해졌다. 성무진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알게 된 사실을 모두 전했다. 강지한의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잠시 멈칫했다. 그날 전화로 심미연에게 온지유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 그녀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었지만 그때 그는 뭐라고 말했지? 그는 심미연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심미연은 전화하지 않았고 그는 그저 그녀가 사과하고 싶지 않아서 그를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토록 큰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마 슬픔에 잠겨 있었겠지.’‘그래서 내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야.’ “대표님.” 성무진은 전화기 속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부르며 물었다. “알았어. 그럼 여기까지 하자.” 강지한은 전화를 끊고 창밖의 차들이 가득한 거리를 바라보며 심미연이 혼자서 외할머니의 영정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그는 남편이었지만 아무것도 몰랐으며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그때 할아버지의 전화를 다시 떠올리니 아마 할아버지도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화가 너무 나서 전화를 끊어버렸던 거다. ‘할아버지는 나한테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강지한은 창가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 온지유의 전화가 다시 울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또 무슨 일이야?”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한 씨, 나 무서워.”온지유는 반쯤 진심이고 반쯤 아닌 듯 말하였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강지한은 신속하게 응답했다. “지한 씨, 내가 일 방해한 건 아니야?” 온지유는 조심스럽게
생각을 정리하던 강지한은 결국 그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전화기에서 울려 퍼지는 건 차가운 신호음뿐이었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바쁜 신호음만이 들려왔다. 강지한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심미연이라는 여자는 진짜 단 한 번도 그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잘못한 것도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다니. 그녀가 그의 번호를 차단했다면 그 역시 그녀를 찾을 필요 없이 돌아가서 처리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강지한은 화면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 여자가 또 할아버지에게 고자질이라도 한 건가?’ ‘이젠 할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그를 혼내려는 걸까?’ 지난번에 매를 맞은 뒤로 최근 너무 바빠서 상처도 신경 못 썼더니 이제 염증이 나서 며칠째 고통스러웠다. 한참 후 강지한은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강지한! 너 요즘 어디에 가 있었냐? 왜 전화는 한 번도 받지 않는 거냐?”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는 듯 분노가 그대로 드러났다. “저 요즘 진성에 출장 갔었어요. 핸드폰을 계속 켜놓고 있었는데 왜 안 받았겠어요?” 강지한은 늘 그렇듯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는 정말로 전화를 꺼본 적이 없었다. “그럼 그쪽에 계속 있어! 평생 돌아오지 마!” 강준형은 화가 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출장을 갔을 뿐인데 전화가 계속 안 된다니. 그게 단순한 우연일까?강지한처럼 예리한 사람이 왜 이 정도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강지한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생각하고 있을 때 온지유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 그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무슨 일이야?” “지한 씨, 지금 어디야? 나 혼자 병실에 있으니까 너무 무서워. 와서 좀 같이 있어 줄래?” 온지유의 목소리엔 떨림이 섞여 있었고 그 공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알았어. 금
“그럼 어머니가 계획한 대로 하세요.” 이진영은 어머니와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의 모든 결정은 이씨 가문을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그들은 이씨 가문의 명예를 누렸으니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선택할 수 없었던 일이니까. “넌 먼저 한유나 씨와 연락하고 다시 전화해 줘. 저녁 식사는 취소할게.” “알았어요!” 이진영은 전화를 끊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그 연기 속에는 그 여자의 눈부시고 매혹적인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담배 한 개비를 마저 피우고 나자 여자의 얼굴도 사라졌다. 그는 살짝 웃으며 비서에게 한유나의 번호를 찾게 한 후 바로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전화기에서 여자의 자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당신의 소개팅 상대 이진영이에요.” “무슨 일이죠?”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냉담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태도지?’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별일 없으면 그냥 끊을게요. 바빠요.” “소개팅 상대로 만나려면 점심에 얼굴 한 번 봐야죠. 어디죠? 데리러 갈게요.” 이진영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했고 아무 감정이 없었다. “연구소로 와요.” 그녀는 빠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생각했다. ‘역시 대가문의 따님답게 감히 나를 명령하네.’ “제가 일이 있어서 그럼 이만.” 그녀는 말을 끝내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바쁜 신호음이 들려오자 이진영은 코웃음을 치며 미소를 흘렸다. ‘잘난 척은 끝내주네.’ 그때 강지한의 전화가 걸려 왔고 이진영은 잠시 응급실에 있는 심미연을 떠올리며 망설인 뒤 전화를 받았다. “구도심 사람들 다 동의했어. 지금 와서 계약서에 사인해.” 강지한은 매우 지친 목소리였다. “내일은 안 돼?”그는 오늘 일정이 꽉 찬 상태였다. “오늘 밤에는 경성으로 돌아가야 해!” 강지한은 무의식
이진영은 신하린의 얼굴이 금세 빨개지는 것을 보고 살짝 눈을 좁혔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신하린,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 여자가 혹시 자기가 여기서 뭔가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이 병원이 자기가 소유하는 곳이라 해도 그런 식으로 무모하게 행동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하는 건 비밀스러움이 주는 그 자극적인 느낌이 있어 확실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오늘 밤 당신 집에 가야 되나요? 아니면 우리 집으로 올래요?” 신하린은 이제 거짓말도 입을 열자마자 술술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사실 남자도 그녀가 진심을 말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진짜 속마음을 말하면 상처가 될 테니까. “내가 네 집 하나 샀어. 일이 끝나면 같이 가서 보여줄게.”이진영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고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내가 사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신하린은 그가 주는 걸 원하지 않았고 그에게 뭔가를 받는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 뿐이었다. “너 그곳 너무 좁아. 할 때 별로야.” 이진영은 손을 뻗어 신하린을 품으로 끌어안으며 그녀의 매혹적인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비서한테 큰 소파랑 넓은 침대로 바꾸라고 했으니까 오늘 밤 한 번 써보자.” 조금 조롱이 섞인 말투였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은근히 기대가 치솟았다. 신하린의 얼굴은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남자가 정말 끝까지! 하루 종일 그런 생각만 하는 거냐고.’ “너 밥 해줄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 거기는 부엌도 넓고 기계도 다 새것으로 준비됐어...” 마지막 말은 그녀의 귀에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이듯 말했고 신하린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었고 귀까지 붉어졌다. ‘이 남자는 정말 너무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고 신하린을 잠시나마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이진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며 번호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