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막아서 더는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육현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누군데?” “이씨 가문입니다.” 육현성은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힘껏 쥐었다. 펜촉이 손가락을 깊게 파고들며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차갑게 말했다. “일단 접어둬!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결과 나왔어?” “28년 전에 회장님이 어촌 마을에 가셨던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씨 가문에 매입되어 휴양지로 개발됐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정말 회장님의 자식인지 확인하려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확보해 DNA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계속 조사해. DNA 검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육현성은 전화를 끊었고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육현성, 내가 그 자식 당장 없애버리라고 했잖아! 왜 아직도 안 움직인 거야!” 분노에 찬 목소리가 귀에 울려 퍼졌다. 육현성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봤고 그곳에서 어머니가 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 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내가 몇 번이나 전화해도 받지 않길래 회사까지 찾아왔잖아!” 오미경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현성아,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말이라도 해줘!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니 집에 있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만 하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육현성은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제가 진정하시라고 그랬잖아요. 그냥 예전처럼 쇼핑도 하시고 마사지도 받으시고 고스톱도 치시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생활에 영향 받지 말라고요.” “그렇게 밤낮으로 경계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나타난 내연녀와 그 자식에 게다가 그 자식이 벌써 스물일곱이라잖아! 너랑 겨우 두 살 차이야! 지금 나보고 진정하라고? 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어!”비록 재벌가에서 내연녀를 두는 일은
이렇게 해야만 아들이 회사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로 그 자식에게 회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머니, 저는...” 육현성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오미경은 그의 말을 끊었다. “온지유 그년은 평소에 갖고 노는 건 되는데 결혼은 꿈도 꾸지 마! 육씨 가문의 며느리는 반드시 이씨 가문의 막내딸이어야 해!” 아들이 온지유를 좋아하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마땅한 며느릿감이 없었으니 아들이 하는 대로 그냥 놔뒀었다. 어차피 남자가 결혼 전에 여럿 만나고 돌아다니는 건 괜찮다고 여겼으니까.하지만 결혼하면 그런 관계는 완전히 끊어야 했다. 게다가 온지유는 좋은 여자도 아니었다. ‘남편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임신했다고? 게다가 도련님과 말도 안 되게 엮여 실검에 오르내리기까지.’‘이런 여자는 결혼해서 집에 데려온다고 해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거야. 분명히 외도할 게 뻔해!” 아들은 그 여자에게 속아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외부인으로서 오히려 더 명확히 보였다. 그녀는 아들이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육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머니 품격은 어디 갔어요?” 어떻게 그런 욕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 “아무튼 걔는 좋은 여자 아니야. 멀리하는 게 좋아.” 오미경은 단호하게 경고했다. 그녀는 온지유가 집에 들어오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육현성은 불쾌한 마음을 누르며 대답했다. “어머니, 제 일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니 일이나 신경 쓰세요. 차는 갖고 오셨어요? 안 갖고 왔으면 기사한테 말해 모셔다드릴게요.” “됐어! 혼자 갈 거야.” 오미경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빨리 온지유랑 관계 끊어! 안 그러면 앞으로 골치 아픈 일만 생길 거야.” ‘온지유는 절대 좋은 여자가 아니야! 얽혀봤자 좋을 게 없어.’ “알겠어요. 이제 가세요!”육현성은 누구든지 온지유에
그때 심미연과 신하린은 주얼리 샵 앞을 지나가고 있었고 우연히 가게 안에서 반지를 고르고 있는 여자가 익숙한 얼굴이라는 걸 느꼈다. 그녀는 신하린의 손을 잡고 가게로 들어갔고 그 여자가 다름 아닌 5년 전 남편의 불륜과 가정폭력으로 리우를 찾아와 이혼 소송을 맡겼던 나윤미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그때 심미연은 리우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고 그 사건은 스승님이 맡으셨다. 그런데 그 이혼 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스승님이 갑자기 투신자살하셨다. 그녀는 스승님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격이 까다롭고 종종 화를 내기도 했지만 절대 자살을 선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스승님이 세상을 떠난 후 심미연은 나윤미를 찾아가 상황을 물어보려 했지만 나윤미는 집을 팔고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 후 5년 동안 심미연은 계속해서 스승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추적했으며 나윤미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윤미는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듯 아무런 유용한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갑자기 그녀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자 심미연은 문득 나윤미가 이 5년 동안 경성 어딘가에 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은 어떤 액세사리를 찾고 계시는가요?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직원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물었다. 신하린은 가방에서 남자가 준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안쪽에서 천천히 고를게요. 괜찮죠?” 직원은 카드를 보고 깜짝 놀라다 이내 부러워했다. 그 카드는 경성에서 몇몇 가문만이 가질 수 있는 한정판 카드였다. 눈앞의 여자는 매우 젊어 보였고 아마도 상류 사회 가문의 사모님일 거라 짐작했다. “두 분,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두 사람을 안내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분도 함께 모셔서 천천히 고를 수 있죠?”신하린은 말할 때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마치 재벌 집 아가씨처럼 말했다. “물론입니다!” 직원은 물건을 조금이라도 더 팔아 인센티브를 챙기기 위해 서둘러 대답했다. 심미연은 신
그러고는 서둘러 몸을 돌려 급히 자리를 떠났다. 신하린은 일어나 쫓아가려 했지만 심미연이 그녀를 붙잡았다. “쫓아가 봤자 소용없어.” 조금 전 그 여자의 반응은 그녀가 바로 나윤미라는 걸 더욱 확실하게 증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당황하며 허둥지둥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우리 그냥 갈까?” 신하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카드까지 줘놓고는 구경도 안 하고 그냥 가겠다고?” 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조금만 기다려보는 게 좋을걸. 그 여자가 곧 너를 찾으러 올 거야.” 카드를 건넸으니 상대는 카드를 확인하려고 당연히 주인에게 연락할 것이다. 나윤미 쪽에는 따로 사람을 붙여 뒤를 쫓게 하면 된다. 다시 돌아온 이상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신하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 난 그 사람 돈을 쓰고 싶지 않아. 근데 내가 돈을 안 쓰면 그 사람은 내가 사랑 같은 걸 원한다고 착각해. 그리고 자기는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며 그래.” 그녀와 그가 관계를 한 건 사랑과 상관없이 서로 원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가 준 돈을 쓴다면 이 관계는 변질될 것이며 거래로 바뀐다. 신하린은 그런 비참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준 돈이 그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면 그냥 써. 마음 놓고 써버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사랑 따위는 아무 가치 없으니 바보같이 굴지 마! 나처럼 몇 년을 사랑하고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하지 말라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 그녀는 그저 가치 없다고 느꼈다. 신하린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감싸안았다. “미연아...” 만약 그녀가 좀 더 강했더라면 심미연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 걱정하지 마!” 배 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반드시 강하게 살아야 했다. 신하린은 마음이 아픈 듯 그녀를 더욱 꽉 안아줬다. “미연아, 너 지금 휴직 중인데 내
“나윤미, 왜 소리 질러?” 전화기 너머에서 날카롭고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진운혁!” 나윤미는 두려움에 떨며 간신히 이 이름을 내뱉었다. 진운혁은 5년 전 뛰어내려 죽은 변호사이자 심미연의 스승님이었다. “그 자식은 5년 전에 죽었어!” 남자는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너 혼자 겁먹고 있는 거야!” “그 사람! 안 죽었어요. 아직 살아 있어요! 바로 내 앞에...” 나윤미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가 너를 속이고 겁을 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남자는 경고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진짜예요!” 눈앞의 나타난 그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현실적이라 나윤미는 순간적인 충격에 쓰러져 버렸다. 폰이 땅에 떨어지고 화면이 깨졌다. “나윤미! 대답해!”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가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나윤미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번쩍이는 구두를 신고 나타난 남자가 나윤미의 앞에 멈추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폰을 집어 들고 화면에 있는 번호를 확인한 뒤 옆에 있는 밀크티 가게로 향했다. 밀크티 가게 안의 여자들이 남자가 들어오자 모두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너무 잘생겼어!” “스타일도 너무 좋은 아저씨야!” 남자는 창가 자리에 앉아 밀크티를 주문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나윤미는 빠르게 구급차에 실려 갔다. 남자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눈빛은 차가운 냉기가 서려 있었다. 주얼리 샵에서. 심미연은 두 개의 팔찌를 고른 뒤 하나는 신하린에게 선물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찼다. 디자인은 간단하지만 그녀의 손을 더욱 하얗고 아름답게 돋보이게 했다. 심미연은 매우 맘에 들었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강지한과 결혼한 이후 분기마다 성무진은 옷과 보석 그리고 액세서리를 보내왔지만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것들은 공식적인 자리나 연회에서나 겨우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번이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액세서리를 산
“하린아...” 심미연이 말하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열렸다. 심하린이 고개를 들어 남자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담긴 눈빛과 마주쳤을 때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미연이가 예상한 대로 빨리 왔네.’ “널 찾으러 왔어. 둘이 얘기해. 난 밖에서 기다릴게.” 심미연은 신하린을 살짝 밀며 일어섰고 손으로 옷을 정리한 뒤 몸을 돌려 남자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진영 도련님.” “강 부인.” 심미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목소리를 살짝 낮춰 말했다. “심미연이라고 부르세요.” 예전에 심미연은 ‘강 부인’이라는 호칭이 아주 좋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호칭이 혐오스럽고 웃음거리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고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을 나서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나윤미가 길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고 지금 응급처치 중입니다.”심미연의 얼굴에서는 미세한 변화가 일렀다. “어떻게 된 거죠?” “무언가를 보고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 같아요.” 심미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윤미가 스승님을 봤나?’ 5년 전 스승님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녀는 현장에 갔었고 그것이 분명히 스승님이었음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나윤미가 오늘 본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계속 지켜가고 있을게요. 새로운 소식 있으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심미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아직 나윤미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나윤미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당시 그 소송은 또 어떻게 된 일일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며 그녀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있어?” “주얼리 샵에서 엄청 예쁜 결혼반지를 봤어. 지한 씨, 우리는 결혼했는데 결혼반지조차 없네.” 심미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일부러 말을 돌렸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강지한은 그녀에게 병원에 가서 온지유를 돌보라
심미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감정을 추스르고 웃으며 대답했다. “미르 파크엔 하인들도 있는데 왜 그 얘기는 안 해? 그리고 지금 해커들이 IP 주소를 바꾸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나? 이걸로 나를 범인으로 몰겠다는 거야?”아침에 강지한이 이 말을 했을 때 그녀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일이 아니었기에 당당했지만 지금 분명히 누군가가 뒤에서 예전처럼 그녀를 모함하고 있었다. 이전에 찾은 증거들을 강지한에게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집안의 하인들은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거 몰라!” 심미연의 피식 웃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그런 걸 모른다는 건 누굴 무시하는 말인지 모르겠네.’“할아버지께서 빨리 결혼식을 준비하라고 하셨어. 그리고 내일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 결혼을 발표하라고 하셨어.” 강지한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번의 실검으로 너는 공식적인 강 씨 사모님이 되고 웅장한 결혼식을 할 수 있어. 아무리 봐도 너야말로 최고의 승자 아니야?”심미연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지한 씨, 제발 이런 말도 안 되는 추측은 그만하고 나한테 누명 그만 덮어 씌어! 다시 말하는데 난 그런 짓 하지 않았어.”그녀는 그를 단순히 전우로만 여겼을 뿐인데 어떻게 뒤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냐고! 게다가 둘은 비밀리에 결혼했지만 진짜 부부였고 두 사람의 관계를 굳이 폭로해 강지한이 그녀를 싫어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강지한이 그녀를 싫어한다면 그녀의 삶도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증거까지 다 나왔는데 아직도 변명해? 이렇게 말 잘하는 거 보니 리우 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강지한은 분노가 치밀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반박했다.‘왜 이 여자는 온지유처럼 온순하게 말을 듣지 않을까?’ 심미연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꽉 쥐었다.이미 이런 결말이 올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강지한이 직접 말하는 걸 들으니 마음속에서 억제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인턴 생활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오기까지 그녀는 큰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 뒤에서 신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연아, 우리 밥 먹으러 가자!” 심미연은 감정을 억누르며 돌아서서 신하린과 마주했다. “하린아, 미안해. 나 병원에 좀 가봐야 해서 점심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다음에 내가 꼭 밥 살게!”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신하린은 단번에 그녀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미연아, 혹시 강지한...” 그녀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심미연이 서둘러 말을 잘랐다. “외할머니 쪽에 문제가 좀 생겨서 가보려고.” 그녀는 신하린에게 자신이 강지한에게 억눌려 조금의 자유도 없이 꼭두각시처럼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럼 얼른 가봐. 내일 다시 시간 잡아서 밥 먹자!” 신하린은 심미연이 외할머니를 핑계로 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녀가 외할머니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건 분명 진짜로 일이 있는 것이다. 심미연이 외할머니를 얼마나 아끼는지 심하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난 먼저 갈게!” 심미연은 신하린에게 손을 흔들며 그녀 옆의 남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은 분주했고 마음은 이미 외할머니에게로 향해 있었다. 신하린은 그녀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마음이 어쩐지 씁쓸했다. 심미연이 너무 힘들게 살아가는 게 느껴졌다. “심미연 씨와 강지한 사이의 일은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 내가 강지한하고 어느 정도 얘기할 수는 있어도 저 사람이 강지한의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내가 나서도 내 말을 들을 리 없어.” 옆에 있던 남자가 낮게 말했다. 신하린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녀는 심미연이 너무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강지한과 결혼했으니 어쨌든 강씨 가문 사모님이야. 강지한이 그녀를 사랑하든 말든 이혼만 안 하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잖아. 뭐 때문에 그렇게 뭐가 그렇게 슬퍼하는 건데?” 남자는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으며 손끝으
강지한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는 네가 말하는 그 오빠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의 엄마는 그의 엄마일 뿐이야. 네 엄마가 될 수는 없단다, 알겠지?” 아직 어린 상미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원하는 사람이 엄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저릿하기도 했다. 강상미는 실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구나...” 강지한은 딸의 그런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다음에 그 오빠를 만나 그 오빠한테 직접 물어봐. 엄마를 너랑 나눠 쓸 수 있는지.” 강상미는 금세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바로 그때 강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박시훈의 전화였다. 그는 조용히 병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그 명의가 드디어 요청을 받아들였어. 직접 병원에 와서 네 딸 상태부터 확인하겠다고 하더라.” “언제 오는데?” 강지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상미에게 드디여 희망이 생겼어!’ “약속한 시간은 오늘 오후 세 시. 병실로 직접 찾아간다고 했어.” “알겠어.” “내가 이렇게까지 힘 써서 의사를 찾아줬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냐?” 박시훈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불만이 묻어 있었다. 강지한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원하는 거 있으면 성 비서한테 말해.” 그리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핸드폰을 꽉 쥔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딸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수록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결국 그는 또 한번 흡연실로 향했다. 그는 담배를 한 개비 얻어 물고 벽에 기대어 연기를 내뿜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우리 상미가 살 수 있어.’‘정말 다행이야.’“형님, 지금 기분 좋은 거에요. 안 좋은 거야?”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이진영의 입꼬리가 비웃음으로 살짝 올라갔다. “그러니까 아버지 말은 자신의 앞길을 위해서 자식도 얼마든지 팔아넘길 수 있다는 거네요?” 어릴 때만 해도 그는 아버지가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건 그저 어린 시절의 착각이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이상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그가 거대한 존재처럼 보였던 것뿐이었다. 이진영 아버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이진영, 네가 이제 좀 컸다고 해서 내가 널 통제 못 할 거라 착각하지 마라. 한유나와의 결혼은 무조건 그대로 진행돼야 해. 여기서 멈출 순 없어. 나가!” 이진영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이진영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짙은 피로를 느끼듯 미간을 손으로 눌렀다. 불쾌함과 초조함이 뒤섞인 감정이 그를 덮쳤다. 그는 그제야 이진영은 더 이상 자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평생 정상에 서는 것을 목표로 살아왔다. 반평생을 바쳐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이제 정말 꼭대기가 보이는데 이 순간에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진영은 차고로 가서 운전석에 앉자마자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꽤 오래 기다린 끝에야 강지한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데?” “어디야?” “병원. 딸이 열나서 입원했어.”“그럼 먼저 딸부터 잘 돌봐. 나중에 괜찮아지면 만나서 얘기하자.” 전화를 끊자마자 이진영은 갑자기 인생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다. 한편 강지한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딸에게 죽을 떠먹였다. 강상미는 또랑또랑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빠, 일 많이 바쁘지? 그냥 일하러 가도 돼요. 나 혼자서도 괜찮아요.” 딸의 사려 깊은 말에 강지한은 가슴 한구석이 짠해졌다. “아빠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어도 우리 상미를 돌보는 건 아빠밖에 못 해.” 다른 누구에게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머물 필요도 없었다. 한유나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곧장 주방을 나섰다. 거실을 지나치려던 순간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이진영의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이진영의 아버지는 그녀가 집에 있는 걸 예상하지 못한 듯 신문을 내리며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나 왔구나. 이리 와서 앉아라.” 한유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려고요.” 사실 그녀는 이진영의 아버지를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잠깐이라도 앉아서 얘기나 하고 가라. 하인에게 진영이를 내려오라고 하겠다.” 그는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요. 아버님, 안녕히 계세요.” 한유나는 부드럽게 인사를 건넨 뒤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이진영의 아버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문을 나서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2층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이진영은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자 어머니에게 한마디 전하고 곧장 서재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아버지 곁에 다가가 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너 한유나한테 파혼하자고 했냐?” “네.”이진영은 무의식적으로 등을 곧게 폈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했다. 아버지는 아까 거실에 앉아 있었고 그가 주방에서 한유나와 나눈 대화를 들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그를 그냥 내버려 뒀으면서 왜 이제 와서 따로 부르는 걸까?’“안 된다!”
한유나는 잠시 멈칫한 후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약혼을 취소하고 싶으면 그냥 직접 말해줘요. 굳이 이렇게 돌려 말할 필요 없어요.” 그녀는 화가 난 기색도 없이 평소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이진영은 그녀의 모습에서 어디가 이상한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당신이 동의한다면 약혼 취소는 당신이 먼저 말하는 거예요. 이유는 당신 마음대로 정해도 괜찮아요.”이진영은 마음속으로 신하린을 떠올리며 절대 한유나와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유나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결혼 취소를 내가 제안하게끔 하면 내 체면을 지켜주긴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경성 사람들에게 나 한유나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네요.” 2년 전 아버지가 퇴직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진영은 예비 사위로서 장례식을 주관했다. 그때 그는 장례식을 엄청 성대하게 치렀고 모두가 그에게 의리와 정이 넘친다고 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경성의 모든 여인들은 그녀가 좋은 남자에 든든한 의지처를 만났다고 부러워했다. 그래서 비록 이진영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가기로 결심했다. 이진영같은 이런 사람을 놓치면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진영이 갑자기 결혼을 취소하자고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분명 그들 사이는 늘 아무 일 없이 잘 지내왔는데 말이다. “그럼 내가 먼저 말할게요. 그러면 당신은 피해자가 될 거니까 아무도 당신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 거에요.” 이진영은 사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한유나가 제안하면 좀 더 체면이 서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한유나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듣고 그는 한유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까지 모두 그가 주관했었다는 걸 떠올렸다. 만약 그가 먼저 결혼을 취소한다고 말하면 한유나는 역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진
결국 그녀와 이진영은 약혼한 사이였고 지금 경성의 모든 이들이 그들이 미혼 부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만약 약혼을 취소하면 그녀는 경성에서 다시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삼 년 동안 그녀는 이진영에게 매우 관대했다. 그가 다른 여자를 자기 앞에 데려오지 않는 한 그녀는 모든 것을 눈감아 주었다.방혜자의 방에 도착한 한유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를 보고 조용히 다가가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뭐 보고 계세요?” 방혜자는 정신을 차리고 한유나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유나야, 언제 왔니? 진영이도 집에 있어. 먼저 진영이한테 가 볼래?” 그녀는 말을 하면서 손을 천천히 뒤로 빼며 마치 한유나와의 접촉을 피하려는 듯 보였다. 한유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빠르게 감정을 누르고 웃으며 대답했다. “진영 씨와 함께 왔어요. 어머니가 점심도 안 드셨다고 하던데 입맛이 없으세요?” 그제야 방혜자는 눈을 들어 이진영을 바라보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왜 다 유나에게 말해주냐? 대체 누구 편인게냐.”그녀가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다정했다. 이 아들은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럼 제가 뭐 좀 만들어 올게요. 나중에 내려와서 드세요. 네?” 한유나는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 방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유나는 일어나서 이진영에게 다가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랑 얘기 좀 해주세요. 저는 뭐 좀 만들어 올게요.” “알겠어요.”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유나는 그의 차가운 얼굴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만약 아버지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면 한씨 가문은 여전히 번창했을 것이고 그녀는 이씨 가문에서 이렇게 홀로 소외된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는 여전히 억누를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하인들은 한유나를 보고 공손하
강지한은 핸드폰을 꺼내 보았고 화면에 떠 있는 이진영의 번호를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들과 연락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진영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공항에서 신하린과 심미연을 봤어.” 강지한은 갑자기 전에 박시훈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잠시 멈칫했다. “박유진도 그들과 함께 있었어.” 이진영은 신하린이 박유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년간 신하린의 마음 속에는 늘 박유진이 있었고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떠올리는 사람은 항상 박유진이였다. “정말 공항에서 심미연을 봤다고?”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그렇다면 심미연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그럼. 절대 틀림없어. 살아있는 심미연 씨야.” 이진영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심미연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신하린은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그녀의 얼굴에서 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진영은 심미연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심미연 씨 정말 대단해. 모두를 속였어.’‘강지한까지 속인 걸 보면 정말 대단해.’“그럼 그 사람이 진짜 심미연인지 신하린 씨에게 물어봤어?” 강지한이 물었다. 그는 이진영과 신하린 사이의 관계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동안 이들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연락 안 했어.” 이진영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심미연이 사라진 이후 신하린의 정신 상태는 항상 불안정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마다 자주 싸웠고 그의 가문과 한씨 가문에 일이 생기면서 그는 처리하느라 바빴고 신하린과의 연락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와 만난 횟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신하린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강지한은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상미가 그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점점 약해져 이제는 무언가를 잃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네가 이미 결혼해서 자식을 두었다고 떠들고 있는데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이렇게 살겠다는 거야?” 우선 강지한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강지한의 전 부인 행방을 알아내면 그때 자신이 먼저 대시해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때면 강지한도 그와 경쟁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박시훈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신의 성격이라면 반드시 심미연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명의 찾아서 상미 치료부터 해.”강지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세상이 뭐라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다시 여자를 찾아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상미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함께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았어. 바로 갈게.” 박시훈은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바로 사람을 보내 심미연을 찾기 시작했다.강지한은 전화를 쥐고 박시훈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심미연이 죽지 않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 심미연과 똑같이 성형한 걸까?’ “아빠, 상미 때문에 속상한거에요?” 병상에 누워 있는 상미는 고열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목소리는 가늘고 약했다. “미안해요, 아빠. 제가 아프게 해서...” 상미는 어느 날 엄마와 친구들이 나눈 전화를 우연히 듣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상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아빠가 자신을 잃으면 얼마나 슬퍼할지 걱정됐다. “우리 상미가 얼마나 대견한데.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 강지한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마치 자상한 아버지처럼 보였다. 강상미는 작은 손을 뻗어 그를 향해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꼭 밥 잘 먹을게요
박시훈은 잠시 멍해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얼마 전에 그 명의와 연락이 닿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상미 진료 기록은 이미 전달했어. 명의가 치료법을 찾으면 먼저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래.” “그게 사실이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상미가 선천성 심장병을 진단받은 이후 그는 그 아이를 치료해 줄 의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상미는 아직 너무 어렸고 선뜻 수술을 감행하려는 의사는 없었다.작년에 강지한이 진성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우연히 들은 이야기 하나가 그의 귀에 박혔다. “우리 진성에는 명의가 한 분 계시죠. 못 고치는 병이 없어요. 불과 2년 만에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셨다니까요.” 말하는 이는 별 뜻 없이 흘렸지만 듣는 이는 달랐다. 강지한은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박시훈에게 명의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박시훈의 정보망이 전 세계에 퍼져 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그는 원하는 그 명의를 찾지 못했다. 강지한 역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소문했지만 단 한 번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지금 상미는 고열로 입원했고 어린 몸으로 이 병을 버텨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명의를 찾고 싶었다. 명의만 찾을 수 있다면 상미는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진짜 너무하네.” 박시훈이 발끈하며 투덜거렸다. 강지한이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게 서운했다. “그러니까 빨리 사람부터 찾아.” 강지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쳐. 기억이 안 나면 다시 말해 주지. 심미연은 이미 죽었어.” 박시훈은 한순간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한아, 넌 네 전 부인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강지한은 순간 멈칫했다. 그 한마디에 묻어
‘방금 아빠랑 엄마가 뽀뽀했어.’ ‘나도 해야지.’ 심미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녀석이 정말.’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꼭 집어서 하는 재주는 여전하네.’ 심미연은 이 상황이 너무 민망했다. 하지만 심태하는 엄마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칠흑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엄마, 왜 나만 안 안아줘요? 왜 나만 뽀뽀 안 해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나 아니에요?” 심미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이 녀석, 또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 온 거야!’박유진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를 번쩍 안아 올리며 결국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엄마가 일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널 안을 힘이 없대.” 심태하는 곧장 심미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엄마, 피곤하면 쉬어요. 아빠랑 내가 성 만들 거에요.” 박유진은 잠시 침묵했다. ‘나도 같이 쉬고 싶은데.’ 심미연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아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 엄마는 조금 더 일해야 하니까 아빠랑 성 만들고 있어.” 그 아이의 수술을 위해 아직 최선의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다. 더 깊이 연구해 봐야 했다.“그럼 엄마 눈 마사지해줄게요.” 심태하의 작은 손이 심미연의 이마를 살짝 눌러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박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흘렸다. ‘우리 태하 정말 똑똑하네.’ 며칠 전에 그는 심미연에게 마사지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따라 하는 아이의 기억력이 많이 놀라웠다. 심미연은 그 순간 마음속에 벅찬 행복을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을 두게 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엄마 이제 일하세요.” 심태하는 손을 떼며 박유진에게 레고 놀이하러 가자고 재촉했다. 박유진은 그를 안고 돌아서 나가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