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마주친 박지훈과 이미자는 마음이 서로 달랐다.박지훈은 박유진이 심서연과 결혼하면 앞으로 강지한과 한 가족인데, 만약 바렐 그룹과 이노 하이브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바렐 그룹의 미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이미자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건 박유진이 심서연과 결혼한 후에 심미연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끊으리라는 것이다. 아들은 그녀가 키웠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책임감이 있고 감정을 중시한다. 유일한 결점은 너무 감정이 한결같다는 것이다.그때 강지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 밥을 먹어요? 심미연이 배가 고파요.”심미연은 식사 시간이 항상 규칙적이었는데 매일 저녁 6시 반에 식사를 시작했다.갓 결혼한 그 기간에 심미연은 매일 그가 집에 돌아와 함께 먹기를 기다리며 음식을 한 번또 한 번 데웠다. 후에 그녀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밥을 먹고 바로 치웠다. 때로는 그가 집에 돌아와 조금도 먹지 못했다.지금 벌써 8시가 다 되어 가니 그녀는 틀림없이 배가 고플 것이다.가뜩이나 몸이 안 좋은데 조금만 더 굶으면 몸이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심미연은 눈을 들어 그를 한 번 보고는 마음속으로 어이없게 웃었다.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생사도 돌보지 않는데 그녀가 배고프든 말든 상관할 리 없지 않은가?강지한이 아무리 그녀가 배고플 거라고 해도 그들은 못 들은 척하며 얼버무릴 뿐이다.조은하는 심미연이 배가 고프다는 말을 듣고 조건반사처럼 욕설을 퍼부었다.“굶어 죽어도 싸!”어려서부터 심보가 사나운 사람인데 누가 그녀의 생사에 관심이 있겠는가.차가운 눈빛으로 조은하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몸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심미연의 등에 흉측한 흉터가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심미연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고 심미연은 어머니가 화상을 입었다고 말했다.그는 사람을 찾아 두 사람의 DNA를 조사했는데 모녀가 확실했다.그는 어떻게 딸에게 그렇게 독한 어머니가
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강지한을 바라보며 예쁜 두 눈에 의외라는 눈빛이 가득했다.‘이 남자 오늘 약 잘못 먹은 거 아니야?’온지유 앞에서는 한 마디도 안 해주던 사람이 계속 도와주다니?심서연은 화가 나서 손을 들어 심미연을 때리려 했지만 결국 누군가 손목을 가로챘다. 잡힌 손목은 부러질 것처럼 아파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아파, 놔! 심미연 너 이거 놔!”심미연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 무슨 손을 놓는단 말인가.그러나 강지한의 행동은 정말 알 수 없었다.오늘 왜 계속 도와주는지 정말 의아할 나름이었다.“개도 주인을 보면서 때린다는데 심미연은 지금 강씨 가문 사모님이야. 감히 내 앞에서 미연이를 때리려 하다니. 겁대가리 없구나. 당장 사과해!”강지한의 눈에는 냉기가 감돌아 현장을 얼어 붙일 것 같았고 목소리는 뼈를 찔렀다.심미연 마음속에서 막 생겨난 그 한 가닥의 호감은 지금 깨끗이 사라졌다.그녀는 그를 생명의 지푸라기로 여겼는데 그는 그녀를 개로만 여겼다.심서연이 그녀를 상대하는 것은 강지한의 꼬리를 밟아서이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나...”심서연이 막 말을 하려고 하자 남자의 매서운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사과해! 빨리!”‘이 여자가 내 앞에서 감히 이렇게 날뛰고 건방지다니. 흥!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심서연은 이를 악물고 아무렇게나 말했다.“미안해.”어쩐지 강지한이 오늘 줄곧 그녀를 겨냥하여 심미연을 대신해서 화풀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전에 인터넷에서는 이 두 사람의 불화설이 돌며 강지한은 밖에 애인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강지한은 심미연을 돕고 있는 거지? 일부러 연기하는 건가?’그런 생각에 심서연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자신이 진실을 알아냈다고 생각했다.심미연은 그녀처럼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순식간에 위로가 되었다.심미연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녀는 즐겁고 심미연이 행복하면 그녀는 화가 나서 죽고 싶었다.심미연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
‘다 심미연 이 천한 년 때문이야.’박지훈과 이미자는 줄곧 이 모든 것을 차갑게 지켜보며 심서연에 대한 마음속의 인상은 극도로 나빠졌다.이런 며느리를 집에 들이면 정말 가문이 불행해질 것 같았다....복도 끝에서 박유진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았다. 연기는 밤 빛 속에 감돌며 마치 그의 지금 심정처럼 복잡하고 어수선했다.담배꽁초를 비벼 끈 그는 확고한 발걸음으로 룸에 돌아와 사람들을 훑다가 마침내 심미연에 눈빛이 고정되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의 사랑은 조수처럼 용솟음쳤고 모든 세포는 그녀에 대한 갈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그윽하고 열렬하여 마치 그녀를 그 속에 빨아들이려는 것 같았는데 숨길 수 없는 사랑은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처럼 눈 부신 빛을 반짝였다.심미연은 그 뜨거운 눈빛을 느끼자 고개를 들어 박유진의 시선과 공중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 속에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강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이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강지한의 목소리가 갑자기 이 평온을 깨뜨렸다.“예전에 장모님에게서 말씀 들었어요. 박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혼인을 맺는다고 하던데 날짜는 잡았어요?”“지금 날짜를 고르고 있는데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심동현은 심서연을 잡아당기며 웃는 얼굴로 강지한에게 물었다.“아니면 사위가 날짜를 정할래?”어차피 양측 모두 합의를 봤으니 날짜는 누가 정해도 상관없었다.강지한은 핸드폰으로 달력을 뒤졌는데 심미연은 그의 모습이 마치 사기꾼처럼 느껴졌다.‘이렇게 진지하게 날짜를 고르다니.’"그럼 1월 1일 양력설 날로 해요. 아직 20일이 남았으니 준비할 시간이 좀 있어요.”강지한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살짝 감돌았다.두 사람이 약혼했으니 앞으로 박유진이 더는 심미연을 넘보지 않을 것이다.그는 사심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심서연은 멍하니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심동현의 손을 당기며 다급하게 말했다.“아빠, 1월
“살살 해, 나 아파.”심미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뻗어 강지한을 밀쳤다.이 남자는 정말 여자를 아낄 줄 전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의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고 방금 얼굴도 그의 가슴에 부딪혀서 심하게 아팠다.“함부로 보지 마!”강지한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말했는데 말투는 위협적이었다.심미연은 숨을 들이마시며 손을 뻗어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며 난처함을 숨기려 했다.박유진이 먼저 찻잔을 들고 그녀 앞에 건네주었다.“네가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기억해. 너는 차의 향을 좋아하지 않잖아. 좋아하지 않으면 억지로 자신을 강요하지 마.”말 속에 또 다른 말이 들어 있었다.찻잔이 앞에 있는데 심미연은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어려서부터 차 마시는 것을 싫어했는데 차향이 싫어서 그랬다.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녀는 박유진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강지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가 여기에 있는데 박유진이 뜻밖에도 심미연에에 아첨하며 또 오해를 사는 말을 했다.‘내 존재를 무시하는 거야?’“유진 씨, 나 차 좋아해. 내가 마실게.”심서연은 기분이 나빠져 차를 달라고 했다.‘심미연 이 더러운 년, 이미 결혼했는데도 내 남자를 유혹하려 하다니. 참 뻔뻔해!’박유진은 심미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안 마실 거야?”심미연은 진퇴양난에 빠져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강지한은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아 잔에 든 차를 한입에 다 마셨다. 그러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심미연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네가 주량이 좋다는 걸 알아. 오늘 이 경사스러운 날에는 당연히 한 잔을 마셔야지.”박유진은 강지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술을 부인에게 마시게 하면 괴로워하지 않겠어요? 강 대표님은 정말 여자를 아낄 줄 모르는군요."심미연은 주인공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눈썹을 찌푸리고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강지한이 먼저 가로챘다.“미연이는
그는 느릿느릿 말했지만 말투가 무거워 고마움이 느껴진 게 아니라 오히려 귀띔하는 것 같았다.술잔을 든 손을 심하게 떨며 심동현은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말도 더듬었다.“부모로서 미연이를 잘 대해주는 건 당연한 거지. 우리 사위 너무 겸손해.”조은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미연아, 앞으로 집에 자주 와. 우린 모두 네가 보고 싶었어.”강지한의 뜻을 알아차린 조은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한이 바람이 났다며 왜 아직도 심미연에게 신경 쓰는 거지? 앞으로 심미연에게 잘해줘야겠어. 그러다가 강지한이 회사에 투자하지 않으면 어떡해? 아니면 내일 심미연을 데리고 옷이나 두 벌 사주며 잘 보여야겠어.’심서연은 화가 나서 두 손을 꼭 잡으며 심미연을 죽이고 싶은 마음조차 생겼다.강지한은 술잔에 든 술을 다 마신 후 고개를 돌려 심미연에게 말했다.“미연아, 술 따라야지!”조용하고 얌전한 심미연을 보며 강지한은 마음이 편해졌다.심미연은 그를 힐끗 보며 술을 따랐을 뿐 부모님이 하는 얘기를 한 글자도 듣지 않았다. 이미 남남이기 때문에 그들과 친한 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두 번째 잔은 강지한이 박지훈과 이미자에게 권했다.다 마신 후 그는 또 심미연더러 술을 따르게 했다.심미연은 맞은편에 앉은 박유진을 슬쩍 보았는데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아마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술을 더 마시면 힘들 것이다.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강지한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진 오빠는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지한 씨 함께 마시지 마. 일이 생긴다면 지한 씨책임도 있어.”점심에 알코올 중독이 될 때까지 마셨으니 더 마시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강지한은 얼굴이 어두워졌다.“넌 강씨 가문 사모님이야.”그는 강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말할 때 언성을 높였다.‘이 여자가 남의 편을 들다니! 박유진을 도와줘?’그는 마음이 불쾌해졌다.“내가 강씨 가문 사모님이기 때문에 당신이 잘못을 저지르게 놔둘 수 없어.”맞은편에
심미연의 말을 듣고 울화가 치밀어올랐지만 현장에 많은 사람이 있어 그녀는 감히 화를 내지 못하고 그저 차갑게 말했다.“남편을 돌봐주는 건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야. 무슨 불평이 있어?”심미연은 화를 참으며 그녀의 모습을 보았지만 그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씁쓸했다.방금 강지한이 말로 그들을 일깨워줬으나 그녀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떤 때 심미연은 심지어 조은하가 친엄마가 맞는지 의심이 가기도 했다. 10개월의 임신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낳은 아이는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엄마는 심서연을 사랑했고 그녀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셨지만 반대로 심미연을 대할 때는 잔인하고 모질었다.심미연은 줄곧 자신이 언제 엄마의 미움을 샀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강지한은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어 그윽한 눈동자로 심미연을 쳐다봤다. 방금 도와줬는데도 이 양심 없는 여자가 다른 사람의 편을 들어주다니.“심미연, 술을 따르라고 했으면 얼른 해야지.”심미연이 움직이지 않자 조은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며 심미연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심미연이 어렸을 때 조은하는 심미연의 머리채를 잡고 땅바닥에 누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한 번은 심미연의 이마를 찧은 적도 있었다.그녀의 손이 다가오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잡혔다.“그만 해요.”심미연이 그녀를 보는 눈빛은 칼 두 자루를 품은 것처럼 서늘하고 무서웠다. 심미연은 강지한과 함께 오래 있어서인지 점점 닮아갔는데 일하는 스타일은 물론 눈빛까지 비슷했다.조은하는 그녀의 눈빛에 놀라서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망할 계집애가 어찌 이리도 사나울까!’“심미연, 이 불효녀야. 엄마를 때리다니!”심서연이 역성을 들었으나 옆에 있던 박유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잡아당겼다.손이 잡히자 심서연은 고개를 돌려 박유진을 노려보았다.“뭐 하는 거야!”심미연이 엄마와 손찌검을 하려는 모양이니 당연히 말려야 했으나 박유진이 손을 놓지 않으니 말릴 수 없었다.‘박유진이 일부러
그리고 심동현은 한 사람과 바람난 게 아니다.만약 조은하가 때리려 하지 않았다면 이 부부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절대 이 일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심미연, 정말이야?”조은하는 심미연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다.‘나쁜 계집애! 아빠에게 내연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래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이런 날에 말하며 난처하게 만들다니! 나쁜 계집애, 속셈이 정말 보통이 아니네.’“말해도 믿지 않는데 저더러 어떡하라고요. 모른 척하고 싶은 거면 어쩔 수 없어요.”심미연은 웃으며 술병을 들고 술을 석 잔 따랐다.강지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건 뭐 하는 거지?’심미연은 술잔을 들어 조은하와 심동현에게 드린 후 자신도 술잔을 들었다.“이 술은 저를 낳고 키워줘서 고맙다는 의미예요. 이제부터 우리는 관계를 끊고 당신들은 더는 지한 씨를 찾아 돈을 달라고 하지 마세요.”지난 3년 동안 그들은 강지한으로부터 수십억 원을 가져갔지만 점점 요구가 높아졌고 금액도 커졌다.그들은 그녀에게 기대어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도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어렸을 때 그녀는 반항할 힘이 없었지만 이젠 그들을 그대로 날뛰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들과 관계를 끊으면 더는 강지한을 찾아가 돈을 달라고 할 면목이 없고 강지한이 그녀의 약점을 잡아 괴롭힐 수 없다.잔에 담긴 술에는 끝없는 감정이 담겨 있는 것처럼 손을 가볍게 떨던 심미연은 고개를 젖혀 단숨에 다 마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알코올에 물들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감정이 이 순간 카타르시스의 출구를 찾은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마치 그 눈물에는 지난날에 대한 작별을 담은 듯 고집스럽게 흘리지 않았다.주변 공기가 굳어가는 듯했고 심미연의 동작 하나하나가 무겁고 단호해 보였다. 부모님의 경악하고 복잡한 얼굴을 훑어본 그녀의 시선은 결국 텅 빈 술잔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안에는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집이라는 존재가 있었는데 이젠 차가운 술 냄새만
험상궂은 얼굴로 달려오는 조은하를 보며 심미연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배를 감쌌다.강지한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뒤로 끌어당기며 조은하에게 발길질했다.“무슨 배짱으로 미연이를 건드려요!”그가 조은하에게 술을 권한 것도 심미연의 체면을 봐서였다.심미연에게 감사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감히 손찌검하려고 하다니! 이렇게 양심 없는 사람은 체면을 줄 필요가 없었다.조은하는 그의 발길에 걷어차여 날아올랐다 땅에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심동현은 얼른 가서 그녀를 잡아당겼고 심서연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분명히 이 더러운 년이 일부러 강지한을 부추겼을 거야!’심미연은 강지한의 뒤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이 모든 것을 바라봤다. 그들과 관계를 끊었으니 앞으로 더는 그녀를 상처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이것도 일종의 해탈이다.강지한은 돌아서서 심미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가자, 집으로 돌아가.”박유진과 심서연의 혼기가 정해졌으니 더는 남아 있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집에 가는 것이 낫다.심미연은 알았다고 대꾸한 후 박유진을 한번 보고는 시선을 거두며 강지한 곁에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는데 너무 얌전하여 아이 같았다.강지한은 그녀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괜히 짜증이 났다.이 여자는 법정에 서면 말솜씨가 좋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왜 지금은 바보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걸까?“음식이 나왔으니 밥 먹고 가.”심동현이 급히 심미연 앞으로 다가왔다.“미연아, 우린 핏줄을 섞은 가족인데 어떻게 관계를 끊을 수 있겠어? 그만해. 방금 했던 말은 못 들은 거로 치고 앞으로 집에 자주 돌아와.”만약 심미연과 관계를 끊는다면 그가 강지한을 찾아서 돈을 달라고 할 수 없을 테니 이것보다 더 큰 손실은 없었다.내연녀와 아들도 키워야 하는데 돈이 없이 어쩌란 말인가!심미연은 강지한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심동현의 긴장한 표정을 보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저를 학대할 때는 잊었나 봐요. 제가 결혼한 3년 동안 당신들은 지한 씨를 찾아가 그렇게 많은
강지한은 핸드폰을 꺼내 보았고 화면에 떠 있는 이진영의 번호를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들과 연락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진영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공항에서 신하린과 심미연을 봤어.” 강지한은 갑자기 전에 박시훈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잠시 멈칫했다. “박유진도 그들과 함께 있었어.” 이진영은 신하린이 박유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년간 신하린의 마음 속에는 늘 박유진이 있었고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떠올리는 사람은 항상 박유진이였다. “정말 공항에서 심미연을 봤다고?”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그렇다면 심미연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그럼. 절대 틀림없어. 살아있는 심미연 씨야.” 이진영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심미연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신하린은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그녀의 얼굴에서 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진영은 심미연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심미연 씨 정말 대단해. 모두를 속였어.’‘강지한까지 속인 걸 보면 정말 대단해.’“그럼 그 사람이 진짜 심미연인지 신하린 씨에게 물어봤어?” 강지한이 물었다. 그는 이진영과 신하린 사이의 관계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동안 이들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연락 안 했어.” 이진영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심미연이 사라진 이후 신하린의 정신 상태는 항상 불안정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마다 자주 싸웠고 그의 가문과 한씨 가문에 일이 생기면서 그는 처리하느라 바빴고 신하린과의 연락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와 만난 횟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신하린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강지한은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상미가 그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점점 약해져 이제는 무언가를 잃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네가 이미 결혼해서 자식을 두었다고 떠들고 있는데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이렇게 살겠다는 거야?” 우선 강지한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강지한의 전 부인 행방을 알아내면 그때 자신이 먼저 대시해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때면 강지한도 그와 경쟁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박시훈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신의 성격이라면 반드시 심미연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명의 찾아서 상미 치료부터 해.”강지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세상이 뭐라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다시 여자를 찾아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상미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함께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았어. 바로 갈게.” 박시훈은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바로 사람을 보내 심미연을 찾기 시작했다.강지한은 전화를 쥐고 박시훈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심미연이 죽지 않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 심미연과 똑같이 성형한 걸까?’ “아빠, 상미 때문에 속상한거에요?” 병상에 누워 있는 상미는 고열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목소리는 가늘고 약했다. “미안해요, 아빠. 제가 아프게 해서...” 상미는 어느 날 엄마와 친구들이 나눈 전화를 우연히 듣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상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아빠가 자신을 잃으면 얼마나 슬퍼할지 걱정됐다. “우리 상미가 얼마나 대견한데.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 강지한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마치 자상한 아버지처럼 보였다. 강상미는 작은 손을 뻗어 그를 향해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꼭 밥 잘 먹을게요
박시훈은 잠시 멍해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얼마 전에 그 명의와 연락이 닿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상미 진료 기록은 이미 전달했어. 명의가 치료법을 찾으면 먼저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래.” “그게 사실이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상미가 선천성 심장병을 진단받은 이후 그는 그 아이를 치료해 줄 의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상미는 아직 너무 어렸고 선뜻 수술을 감행하려는 의사는 없었다.작년에 강지한이 진성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우연히 들은 이야기 하나가 그의 귀에 박혔다. “우리 진성에는 명의가 한 분 계시죠. 못 고치는 병이 없어요. 불과 2년 만에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셨다니까요.” 말하는 이는 별 뜻 없이 흘렸지만 듣는 이는 달랐다. 강지한은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박시훈에게 명의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박시훈의 정보망이 전 세계에 퍼져 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그는 원하는 그 명의를 찾지 못했다. 강지한 역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소문했지만 단 한 번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지금 상미는 고열로 입원했고 어린 몸으로 이 병을 버텨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명의를 찾고 싶었다. 명의만 찾을 수 있다면 상미는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진짜 너무하네.” 박시훈이 발끈하며 투덜거렸다. 강지한이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게 서운했다. “그러니까 빨리 사람부터 찾아.” 강지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쳐. 기억이 안 나면 다시 말해 주지. 심미연은 이미 죽었어.” 박시훈은 한순간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한아, 넌 네 전 부인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강지한은 순간 멈칫했다. 그 한마디에 묻어
‘방금 아빠랑 엄마가 뽀뽀했어.’ ‘나도 해야지.’ 심미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녀석이 정말.’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꼭 집어서 하는 재주는 여전하네.’ 심미연은 이 상황이 너무 민망했다. 하지만 심태하는 엄마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칠흑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엄마, 왜 나만 안 안아줘요? 왜 나만 뽀뽀 안 해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나 아니에요?” 심미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이 녀석, 또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 온 거야!’박유진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를 번쩍 안아 올리며 결국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엄마가 일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널 안을 힘이 없대.” 심태하는 곧장 심미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엄마, 피곤하면 쉬어요. 아빠랑 내가 성 만들 거에요.” 박유진은 잠시 침묵했다. ‘나도 같이 쉬고 싶은데.’ 심미연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아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 엄마는 조금 더 일해야 하니까 아빠랑 성 만들고 있어.” 그 아이의 수술을 위해 아직 최선의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다. 더 깊이 연구해 봐야 했다.“그럼 엄마 눈 마사지해줄게요.” 심태하의 작은 손이 심미연의 이마를 살짝 눌러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박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흘렸다. ‘우리 태하 정말 똑똑하네.’ 며칠 전에 그는 심미연에게 마사지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따라 하는 아이의 기억력이 많이 놀라웠다. 심미연은 그 순간 마음속에 벅찬 행복을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을 두게 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엄마 이제 일하세요.” 심태하는 손을 떼며 박유진에게 레고 놀이하러 가자고 재촉했다. 박유진은 그를 안고 돌아서 나가려 했다
“미연아...” 박유진은 가슴이 살짝 떨렸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낮고 부드럽게 입을 떼며 적막을 깨뜨렸다. “응?” 심미연이 가볍게 대답했다. 목소리도 눈빛도 온통 부드러웠다. 박유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미연아, 오늘... 괜찮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깊었다. 온전히 그녀만을 향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지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박유진은 한결같이 그녀의 곁을 지켜왔다. 특히 우울증이 극도로 심해졌던 그때 그는 한순간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무너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버릴까 봐 24시간 내내 곁을 지키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박유진이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순순히 치료를 받아들이고 의사의 말에 성실히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1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우울증을 극복해냈다. 지금 그때의 힘든 나날들을 되돌아보면 항상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박유진이 곁에 없었다면 그녀는 아마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었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미 상처투성이인 마음과 불완전한 몸으로는 완벽한 박유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벽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늘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오늘 그녀는 그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녀가 시선을 피하자 박유진은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결국 아직도 그 벽을 넘지 못한 듯했다.그는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는 입술을 살짝 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고민하지 마.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네가 원할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 예전 진성에 있을
심미연의 눈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걸어내겠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듯했다.그때부터 심미연은 데이터 하나, 리포터 하나 놓치지 않고 아이의 병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방안에는 키보드 소리와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뿐이었고 적절한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들리는 그 소리는 생명과 희망을 담은 교향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심미연은 본인의 전문적인 지식과 용기로 작은 생명을 살릴 방도를 모색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그 시각, 심태하를 데리고 집으로 온 박유진은 역시나 조용한 집안에 심미연이 또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태하야, 엄마한테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박유진의 말에 2층으로 올라간 심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왜 혼자 내려와? 엄마는?”“엄마는 안 먹는대요. 난 할 만큼 했으니까 나머지는 아빠가 해요.”심태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박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알겠어, 내가 가볼게.”성큼성큼 걸어 올라간 박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방이 하도 조용해서 문 여는 소리마저 소음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 소음이 심미연을 방해하지는 못한 듯했다.박유진은 부드러운 불빛이 비춰진 그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심미연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넓은 책상 앞에 마주 앉은 심미연의 얼굴에는 노트북 화면에서 나온 불빛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평소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두 눈도 이 시각만큼은 노트북에 고정한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심미연만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박유진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그러다가 자연스레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수치들과 그래프를 보게 된 박유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작게 쓰여있는 숫자와 그래프들이 박유진에게는 그저 낯선 부호였지만 거기에 쏟은 심미연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박유진은 감히 함부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심미연의 건강이 걱정됐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 때문에 심미연의 손톱은 이미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차분히 눈을 감고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의 입장이 되어 그 장면을 그려보았다.부서진 가구들과 온몸을 뒤덮은 상처,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도망가지 못해서 절망만 가득한 그 눈동자.가정폭력만 한 게 아니라 바람까지 피우면서 남자는 여자의 정신을 처참히 짓밟고 있었다.그 배신이 피해자의 마지막 남은 선까지 무너뜨려서 결국 그들을 이혼에 이르게 한 것이다.여자는 해방되고 싶어서 제안한 이혼이 자신의 명을 단축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폭행을 일삼고 바람까지 피우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던 남자는 오히려 의심병이 도져 갑자기 이혼을 제안하는 여자가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배 속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여기까지 본 심미연은 숨이 가빠와서 호흡이 거칠어졌다.인간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 남자에 대한 분노로 쌓인 한기가 서서히 심미연의 영혼을 뒤덮고 있었다.어쩜 사람이 이처럼 잔인하고 매정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자신의 배우자에게 이딴 짓을 할 수 있는지 심미연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인간이야!”차오르는 분노와 비통함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지자 심미연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그게 경찰 출동을 알리는 경보음인가 싶어 심미연은 순간 숨을 죽였다.물론 이내 자신의 상상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심미연은 그 짧은 순간에 전화벨 소리가 마치 생명을 구원해줄 동아줄처럼 느껴졌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심미연이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아이 사건은 보셨어요?”여자의 말에 그제야 잊고 있던 심장병 걸린 세 살 아이의 사건을 떠올린 심미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대답했다.“바로 볼게요.”
3년 동안 심태하를 자신의 친아들로 여기며 온 정성을 다 쏟은 박유진은 심태하가 신나게 떠드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아빠, 얼른 와요!”그때 들리는 아이의 앳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춘 박유진은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심태하를 보며 미소를 지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환한 아이의 미소 덕분인지 박유진은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아이에게로 다가간 박유진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자 심태하는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내가 엄마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엄마는 일만 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니까요. 아들인 나도 설득 못 한 엄마라고요.”말을 하며 옆자리를 손으로 콕콕 찌르는 아이의 의도가 너무나 명확해서 박유진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엄마는 항상 그래요. 일만 하면 밥 먹는 것도 까먹어요.”심태하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엄마가 가슴 아픈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내가 말려봐도 일은 엄마의 사명이라면서 말을 안 듣는다니까요. 그래도 엄마가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러는 걸 아니까 나도 떼는 안 썼어요.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빨리 많은 걸 배우려고요. 그러면 엄마가 조금은 편해질 거잖아요.”심태하는 마치 박유진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맹세하는 사람처럼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엄마를 생각하는 그 갸륵한 마음에 임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임현은 저 말들이 세 살 난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영민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 자꾸 아까 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말들은 여름날 오후에 갑자기 찾아온 우레처럼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임현의 마음을 울렸다.임현은 그제야 왜 심미연이 아들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갔다.이런 아들이라면 백번이라도 자랑하고 싶을 것 같았다.하지만 다정한 눈으로 심태하를 바라보던 박유진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3년 전, 눈을 뜨자마자 심미연부터 찾은 박유진은 3
“죄송합니다!”“당신...”심미연의 사과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죽은 심미연 씨랑 똑같게 생겼어요.”그 말에 가슴이 내려앉은 심미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는 바로 전설적인 존재인 박시훈이었다.그가 유명해진 건 그의 정보망 때문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이 찾기 싫은 건 있어도 못 찾는 건 없다는 말도 떠돌게 된 것이다.심미연과 일면식도 없는 그가 그녀를 알아봤다는 건 박시훈이 심미연에 대해 뒷조사를 했다는 뜻이었다.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뒷조사를 한 사람과 지금은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잠깐만요!”“이게 뭐 하는 짓이야?”그때 나타난 박유진이 심미연에게로 뻗어진 박시훈의 팔을 가로막았다.박유진의 목소리를 들은 심미연은 그제야 안도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그가 있는 한 적어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는 없기 때문이었다.“박유진?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한편 이미 멀어진 심미연에 박시훈의 표정은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그는 매번 나타나서 자신의 일을 망치는 박유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저 사람은 내 아내 될 사람이야. 네 형수고. 앞으로 보면 예의부터 갖춰.”그 순간, 박유진은 진심으로 심미연을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었다.박시훈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혼자만 보며 심미연의 마음속에도 본인뿐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나를 가족으로 인정해준 적도 없는 박씨 집안 사람들이야. 자꾸 친한 척하지마. 너랑 나는 남이니까.”박씨 집안에 돌아갈 생각도 없고 그 집안사람과 엮이기도 싫었던 박시훈은 손을 쳐내며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하지만 심미연이 아직 멀리 못 갔을 걸 생각해 박유진은 또다시 박시훈의 팔을 붙잡았다.“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박유진, 너 진짜 미친 거야? 왜 자꾸 날 잡아!”또다시 잡힌 팔에 박시훈은 표정을 구기며 박유진을 노려보았다.이 순간만큼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