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앙칼진 목소리가 운동장을 울리자 달리던 아이들도 걸음을 멈추고 나와 엄마를 지켜보고 있었다.내가 수학을 배우고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타는 걸 눈 뜨고 지켜보지 못하는 엄마를 잘 알기에 나는 대열에서 나와 엄마와 마주했다.“양 선생님, 잊으셨나 본데 저를 쫓아낸 건 당신이에요.”“모녀 사이에 그 정도 마찰은 다 있는 거야. 그건 이미 끝난 일이니까 고집부리지 마.”꼭 자기가 불리할 때만 모녀 사이를 들먹이는 건 엄마가 가장 잘 쓰는 수법이었다.엄마가 이런 말만 하면 관련도 없던 사람들이 나와서 내가 불효를 저지르는 것처럼 손가락질 해왔었다.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도 모르면서, 살아있는 게 지옥이었던 내 삶도 모르면서.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대열 뒤쪽에 있던 한 선생님이 뛰어오더니 나를 등 뒤로 숨겨주셨다.“양유아, 이 배은망덕한 년! 지금 나 따라 안 오면 넌 평생 수능 못 볼 거야.”“주민등록증 다 나한테 있어. 내가 그거 안 주면 넌 경시대회 참가도 못 해. 네가 아무리 천재라고 소용없다고!”어떻게 하면 나를 휘어잡을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고통스럽게 내 숨통을 옥죄일지 너무나도 잘 아는 엄마였다.내 몸은 파르르 떨려왔고 밀려오는 분노에 담아두었던 화가 폭발하려는 찰나 한 선생님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오며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유아야, 나만 믿어.”“학부모님은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나가 주세요. 안 그러면 경찰 부를 겁니다. 일 크게 만들면 피차 곤란하지 않겠어요?”엄마는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그래서 그날도 아빠에게 거절당하고 바로 아픈 할머니를 버려두고 이 작은 도시로 도망치듯 내려온 것이다.엄마는 마지막까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수능은 꿈도 꾸지 마.”엄마가 떠나자 나는 힘이 풀려 뒤로 넘어져 버렸다.열 달이나 나를 품고 있다가 힘들게 낳은 건 엄만데, 처음에는 엄마도 나를 기다렸고 나를 사랑했었는데 언제부터 우리 사이가 이렇게 돼버린 건지 모르겠다.하지만 부모가 내 생
오른손의 감각은 점점 무뎌져 갔고 나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있는 힘껏 엄마를 밀쳐내고는 앞으로 내달렸다.하지만 이미 과다출혈로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바닥에 엎어져 버렸고 엄마는 여전히 벽돌을 든 채 괴상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내 오른손이 이렇게 부러지나 싶던 찰나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대학생들이 나를 쳐다보자 엄마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차를 몰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하늘이 나를 가엾이 여기신 건지 지나치던 대학생들은 마침 의대생들이었기에 그들은 빨리 119에 신고를 해주고 간단한 응급처치까지 해주었다.그래서 다행히 손은 지켜냈지만 당분간 오른손은 움직일 수가 없게 돼버렸다.그 소식을 들은 한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셔서 달려오더니 붕대를 칭칭 감은 내 손을 보고는 이내 눈시울을 붉히시면서 울음을 참아내고 계셨다.“너만 살아있으면 됐어, 너만 괜찮으면...”고개를 떨군 채 나 몰래 눈물을 닦아내시던 한 선생님의 표정은 많이 복잡해 보였다.몇 달간 나를 위해 같이 시합 준비를 도와주시느라 많이 고생하셨는데 그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서 안타까워하는 얼굴이었다.그에 나는 마취가 덜 깬 상태라 잘 안 움직이는 입을 힘겹게 떼며 말했다.“선생님, 저 왼손으로도 글씨 쓸 수 있어요.”이쯤 되니 어릴 적 엄마가 나를 가둬놓은 게 고맙기도 했다.그때 혼자 갇혀버린 나는 하도 심심해서 왼손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왼손으로 글씨 쓰는 법도 익히고 왼손을 오른손만큼 편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아빠가 왼손잡이라서 그 얘기는 굳이 엄마한테 하지 않았었다.만약 그 얘기까지 했었다면 내 왼손은 이미 진작에 잘려나갔을 것이다.내 말을 들은 한 선생님은 긴장이 풀린 건지 목 놓아 우시더니 나를 꼭 껴안고 말씀하셨다.“유아야, 우리한테도 좋은 날이 올 거야.”...나를 차로 친 사람이 엄마라는 걸 안 한 선생님은 바로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런 선생님을 말렸다.당연히 같잖은 모녀간의
전국 경시대회가 끝나고 한 선생님은 나를 위해 선생님과 나밖에 모르는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셨다.더 이상의 사고는 있어서는 안 됐기에 나의 수업도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었다.경시대회 성적이 공표되는 날이면 엄마도 내가 왼손잡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기에 그전에 준비를 마쳐야만 했다.역시나 내 성적이 발표되는 날 교무실의 선생님들이 엄마한테 축하 인사를 전했지만 엄마는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유아 오른손 거의 다 부러졌는데. 글씨도 못 써요. 선생님이 잘못 보신 걸 거에요.”그에 선생님은 바로 엄마를 데리고 가더니 결과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맞춰보며 말했다.“잘못 본 거 아니라니까요. 유아 진짜 천재가 맞긴 한가 봐요.”그에 엄마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기만 했다.“아니야, 아니에요.”엄마는 다시 경찰과 교육청에 제보하며 한 선생님이 수상자 자격을 사들인 거라고 주장했다.한참이나 진행된 경찰 조사의 결과는 당연히 한 선생님의 무죄였다.엄마는 또 기계가 잘못된 거라며 행패를 부리자 보다 못한 직원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당신 같은 엄마가 어딨어요? 어떻게 딸이 성공하는 걸 방해하려고 애를 써요?”몇 번이나 조사를 신청하고 반복해봐도 똑같은 결과에 결국 엄마도 내가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엄마는 당연히 내 왼손도 부러뜨리려고 마음먹었지만 나를 찾을 수조차 없었기에 국가대표 선발 시험이 있는 날에 시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국가대표 선발시험에 민간인이 소동을 부릴 수 없다는 걸 나와 한 선생님은 미리 알고 있었다.그렇게 엄마는 내가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분노하며 치를 떠는 모습을 보자 속이 통쾌해 난 나는 일부러 멀쩡한 내 왼손을 들어 보였다.나는 꼭 금메달을 따서 높은 곳에 서서 상을 받는 모습을 양주은에게 보여주겠다고 그날 한 번 더 다짐했다....운명은 한 번 더 내 편이 돼주었고 나는 금메달과 연희대의
아빠는 응접실에 긴장한 듯 앉아있으며 바지춤에 손에 난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그건 내가 처음으로 본 아빠의 미소였다. 나를 위해서, 나에게 잘 보이려고 짓는 미소 말이다.내가 들어가자마자 아빠는 우유 한 상자를 건네주며 말했다.“유아야, 아빠가 너랑 의논할 게 있는데, 네 동생이 수학을 너무 못해서 네가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시간 있어?”아빠가 수학 선생님이시면서 왜 굳이 나더러 수학을 봐주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내가 의아하다는 듯 아빠를 쳐다보자 아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가족끼리 공부 가르치고 그러면 내가 네 동생한테 심한 말을 할 수도 있잖니.”그 말을 들은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내가 어릴 때 빗자루를 휘두르며 나를 쫓아내고 벽돌을 던지고 험한 말을 해대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나 싶었다.내가 금메달을 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찾아와서 자신이 아빠라고 칭하지도 않을 인간임을 알기에 나는 단칼에 그 부탁을 거절했다.한 선생님의 말씀처럼 금메달을 따고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사람인 척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하지만 어릴 때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남아있었던 나는 도무지 아빠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일들을 다 잊을 수도 없었다....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는 수능이 끝나고 학교에서 졸업 기념 회식 자리를 마련했을 때였다.허규연은 시에서 1등이라는 성적을 받았기에 연희대는 못 가도 다른 명문대는 아무렇게나 갈 수 있었다.엄마도 너무 기뻐하며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다.“내가 우리 규연이 똑똑하다고 했었죠?”“자, 다들 잔 들고 우리 규연이 졸업 축하해줘요!”오늘 졸업하는 사람이 허규연 혼자인 것도 아닌데 엄마 눈에는 여전히 허규연만 보이는 것 같았다.“양 선생님은 진짜 대단하시네요, 딸은 연희대에서 직접 데려가고 학생은 시 1등까지 하고.”그 말에 끝나자 사람들은 다 나를 쳐다보았고 엄마의 표정은 잠시 창백해지더니 다시 빨개지며 말했다.“넌 여기 왜 있어? 여긴 수능 본 애들을 축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미워했던 그 이유가 가짜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갑자기 폭삭 늙어버린 엄마를 다시 마주했을 때는 공항에서였다.엄마는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내가 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나는 그런 엄마를 봤지만 일부러 못 본 척하며 한 선생님과만 작별인사를 했다.한 선생님은 지금은 나의 엄마가 돼주신 아주 고마운 분이시다.“인경은 건조하니까 로션 꼭 챙겨 발라.”“돈 아끼지 말고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안가연이 와서야 새엄마는 나와 아쉬운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내가 엄마를 다시 보게 됐을 때는 한제로 새엄마를 보러 갔을 때였다.이번에는 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어 새엄마가 걱정할까 봐 얼굴 보러 들린 것이었다.학교에서 교수님을 따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돈을 좀 벌어놨던 나는 온라인에서 떠도는 영상을 따라 감자 칩 통에 금목걸이를 넣어 새엄마인 한지우 여사님에게 선물했다.새엄마가 감동하여 울고 있을 때 나는 창문 유리를 통해 우리 쪽을 보고 있던 엄마와 눈이 마주쳐버렸다.몸은 안 본 새에 많이 야위어져 있었고 전처럼 강해 보이지도 않았기에 나는 엄마를 만나러 나갔다.“양 선생님은 가족들이랑 시간 안 보내요? 학생들이 보러 안 왔나 봐요?”한때 그의 딸이었던 사람으로서 나는 어떤 말을 하면 그녀가 아파할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유아야, 난 네 엄마야.”“우리 엄마는 안에 있으니까 괜히 나랑 친한 척하지 마요.”엄마는 나와의 관계를 회복해보려고 애썼지만 나는 그 마음을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나도 보살은 아니었기에 그 상처들을 모두 다 잊을 수 없었다....교환학생이 끝난 뒤에도 나는 계속 해외에 남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새엄마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양 선생님이 고발당했어.”엄마를 제보한 사람은 바로 그 자랑스러운 제자 허규연이었는데 허규연이 교육청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엄마의 과거를 조사한 것이었다.엄마가 담임으로 있었던 반의 성적
내가 무언가를 기억하게 됐을 때부터 엄마는 매일 나를 데리고 아빠를 찾아다녔다.나를 이용해 아빠의 발목을 잡기 위함이었다.“그날 일은 사고였어. 난 네가 왜 이 아이를 굳이 낳았는지도 모르겠어.”“그리고 낳았다 해도 난 내 자식이라고 인정 못 해.”아빠의 말에 엄마는 내 팔을 세게 꼬집었고 아픔을 견디지 못한 나는 또 엄마의 뜻대로 울음을 터뜨렸다.“얘는 당신 딸이에요, 어쩜 그렇게 매정해요?”“매정한 건 당신이지. 당신이란 사람 정말 이해가 안 돼. 당신이 아무리 이 아이를 앞세워 내 발목을 잡으려고 해도 우린 행복하지 못할 거야.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원래도 우리 사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어.”주위에 사람들이 하나둘 몰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엄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으며 또 나를 꼬집었다.“쓸모없는 년, 내가 널 이러려고 낳은 줄 알아?!”점점 더 자지러질 듯 울어대는 나 때문에 아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버렸고 엄마도 더 이상 나를 꼬집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그래서 나는 아픈 걸 신경 쓸 새도 없이 바로 비틀거리며 엄마의 발자국을 따라갔다.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렇게 천천히 아빠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증오로 변해갔다....나와 엄마의 사이는 그리 가깝지 못했지만 나는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하고 있었다.그래서 엄마의 생일 선물을 사주기 위해 나는 열심히 폐품을 주워가며 돈을 모아 그날 새로 산 귀걸이를 들고 신나게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그런데 거실에는 이미 엄마의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엄마는 뛰어 들어온 나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애들 공부 방해하지 말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그러고는 바로 학생들을 보며 부드럽게 얘기했다.“자, 다음 문제 같이 보자.”그에 서러워진 나는 용기를 내어 엄마를 소리높여 불렀다.“엄마! 엄마!”몇 번의 외침이 이어졌지만 엄마는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내가 받은 건 오히려 수많은 학생들의 부담스
그저 나에게만 해당하지 않을 뿐이었다.초등학교 때 수학 경시대회에서 전교 1등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너무 기뻐서 바로 상장을 받아들고 집으로 뛰어갔다.그러다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기까지 했지만 나는 아픔을 못 느끼는 사람마냥 벌떡 일어나 다시 내달렸다.조금이라도 빨리 엄마에게 상장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그렇게 집에 도착해서 기쁜 마음으로 엄마에게 말한 나였지만 엄마는 상장을 한 번 보더니 그걸 뺏어 들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넌 왜 수학을 잘하는 거야!”“넌 내 딸인데 왜 네 아빠를 닮은 거냐고!”“네가 그 사람을 닮아도 그놈은 너 안 사랑해!”“넌 꼭 이렇게 날 힘들게 해야겠니, 왜 하필 수학을 잘하는 거야!”아빠가 수학교사라는 이유로 엄마는 내가 가지고 있는 수학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찢어버렸다.백 점짜리 시험지들이 무자비하게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져서 활활 타올랐다.울고 불며 소리치는 나의 귓가에 엄마의 매정한 말이 내리꽂혔다.“역시 넌 내 딸이 아니라 그 사람 딸이었어.”그날부터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니라 그저 양 선생님으로만 살아왔다.허규연의 축하파티에 어색하게 끼어있는 내 앞에는 야채나 샐러드류만 놓여있었고 잘 까진 새우는 허규연의 밥 위에만 올라갔다.“우리 일등공신 많이 먹어.”그 일등공신이라는 말은 가시가 되어 내 맘에 박혔다가 무참히 뽑혀졌다.나는 어쩔 수 없이 야채를 집어먹으며 부러운 눈길로 허규연의 밥그릇에 놓인 새우를 빤히 바라보았다.나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였을까, 허규연은 엄마가 발라준 새우를 나에게 건네주었다.하지만 그마저도 엄마는 다시 허규연의 밥 위에 올려놓았다.“저 바보 같은 애한테 이런 거 먹여봐야 소용없어. 너나 많이 먹어, 경시대회 준비하느라 고생했잖아.”그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뒤적거리며 눈물이 밥 위에 떨어지는 것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입안으로 밀어 넣은 밥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냥 밥만 퍼먹는 것보다는 나은 듯싶었다.그러다가 케이크 박스가 열릴 때쯤 나는 다시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는 살아가는 것조차도 힘든 세상이었다....나와 엄마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 건 허규연이 나한테 고백을 했을 때였다.허규연이 나를 보며 얼굴이 빨개진 채 “나 너 좋아해.”라고 말할 때 나는 정말 그를 이용해 엄마의 관심을 끌어보고 싶었다.하지만 결국 양심에 찔렸던 나는 허규연을 거절했지만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우리 집에 더 자주 찾아오며 내 방에까지 들어와서 러브레터를 숨겨놓기도 했다.그날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엄마가 이미 그 러브레터를 발견한 뒤였다.내 얼굴을 본 엄마는 냅다 뺨부터 때렸다.그에 내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 하고 있자 엄마는 러브레터를 내 얼굴에 던졌다.“허규연은 너랑 달라, 걔는 명문대학에 가고도 남는 애라고!”“네 아빠도 너를 신경 쓰지 않으니까 나도 너 신경 쓸 생각 없어. 난 네 담임도 아니니까 나가서 몸을 팔든 뭘 하든 나는 아무 상관없어.”“그런데 내 제자를 꼬시는 건 절대 안 돼!”엄마가 어떻게 자기 딸한테 꼬시다라는 말을 내뱉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대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마음이 없었던 나는 크게 소리 질렀다.“허규연이 먼저 꼬신 거예요!”하지만 엄마는 바로 내 머리채를 잡으며 말했다.“이젠 말대꾸까지 해? 네가 안 꼬셨으면 걔가 왜 다른 애들도 아니고 하필 너한테 고백을 했겠어!”엄마는 내 머리채를 잡은 채로 방안으로 끌고 가더니 대뜸 가위를 들어 내 옷들을 자르기 시작했다.그렇게 옷가지들이 천 쪼가리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엄마가 자른 옷들은 다 사촌 언니가 안 입는다고 준 것들이었는데 평소에 좋은 집안 자식이라고 그렇게 칭찬을 하더니 너무 화가 나서 그 사실마저 잊어버린 것 같았다.엄마의 눈에는 나의 출생 자체가 잘못이었던 것 같다.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갖은 수를 써서 나를 낳으려던 사람이 바로 엄마라는 것이다....무슨 정신으로 집을 나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아빠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하지만 더는 새로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미워했던 그 이유가 가짜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갑자기 폭삭 늙어버린 엄마를 다시 마주했을 때는 공항에서였다.엄마는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내가 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나는 그런 엄마를 봤지만 일부러 못 본 척하며 한 선생님과만 작별인사를 했다.한 선생님은 지금은 나의 엄마가 돼주신 아주 고마운 분이시다.“인경은 건조하니까 로션 꼭 챙겨 발라.”“돈 아끼지 말고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안가연이 와서야 새엄마는 나와 아쉬운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내가 엄마를 다시 보게 됐을 때는 한제로 새엄마를 보러 갔을 때였다.이번에는 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어 새엄마가 걱정할까 봐 얼굴 보러 들린 것이었다.학교에서 교수님을 따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돈을 좀 벌어놨던 나는 온라인에서 떠도는 영상을 따라 감자 칩 통에 금목걸이를 넣어 새엄마인 한지우 여사님에게 선물했다.새엄마가 감동하여 울고 있을 때 나는 창문 유리를 통해 우리 쪽을 보고 있던 엄마와 눈이 마주쳐버렸다.몸은 안 본 새에 많이 야위어져 있었고 전처럼 강해 보이지도 않았기에 나는 엄마를 만나러 나갔다.“양 선생님은 가족들이랑 시간 안 보내요? 학생들이 보러 안 왔나 봐요?”한때 그의 딸이었던 사람으로서 나는 어떤 말을 하면 그녀가 아파할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유아야, 난 네 엄마야.”“우리 엄마는 안에 있으니까 괜히 나랑 친한 척하지 마요.”엄마는 나와의 관계를 회복해보려고 애썼지만 나는 그 마음을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나도 보살은 아니었기에 그 상처들을 모두 다 잊을 수 없었다....교환학생이 끝난 뒤에도 나는 계속 해외에 남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새엄마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양 선생님이 고발당했어.”엄마를 제보한 사람은 바로 그 자랑스러운 제자 허규연이었는데 허규연이 교육청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엄마의 과거를 조사한 것이었다.엄마가 담임으로 있었던 반의 성적
아빠는 응접실에 긴장한 듯 앉아있으며 바지춤에 손에 난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그건 내가 처음으로 본 아빠의 미소였다. 나를 위해서, 나에게 잘 보이려고 짓는 미소 말이다.내가 들어가자마자 아빠는 우유 한 상자를 건네주며 말했다.“유아야, 아빠가 너랑 의논할 게 있는데, 네 동생이 수학을 너무 못해서 네가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시간 있어?”아빠가 수학 선생님이시면서 왜 굳이 나더러 수학을 봐주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내가 의아하다는 듯 아빠를 쳐다보자 아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가족끼리 공부 가르치고 그러면 내가 네 동생한테 심한 말을 할 수도 있잖니.”그 말을 들은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내가 어릴 때 빗자루를 휘두르며 나를 쫓아내고 벽돌을 던지고 험한 말을 해대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나 싶었다.내가 금메달을 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찾아와서 자신이 아빠라고 칭하지도 않을 인간임을 알기에 나는 단칼에 그 부탁을 거절했다.한 선생님의 말씀처럼 금메달을 따고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사람인 척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하지만 어릴 때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남아있었던 나는 도무지 아빠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일들을 다 잊을 수도 없었다....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는 수능이 끝나고 학교에서 졸업 기념 회식 자리를 마련했을 때였다.허규연은 시에서 1등이라는 성적을 받았기에 연희대는 못 가도 다른 명문대는 아무렇게나 갈 수 있었다.엄마도 너무 기뻐하며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다.“내가 우리 규연이 똑똑하다고 했었죠?”“자, 다들 잔 들고 우리 규연이 졸업 축하해줘요!”오늘 졸업하는 사람이 허규연 혼자인 것도 아닌데 엄마 눈에는 여전히 허규연만 보이는 것 같았다.“양 선생님은 진짜 대단하시네요, 딸은 연희대에서 직접 데려가고 학생은 시 1등까지 하고.”그 말에 끝나자 사람들은 다 나를 쳐다보았고 엄마의 표정은 잠시 창백해지더니 다시 빨개지며 말했다.“넌 여기 왜 있어? 여긴 수능 본 애들을 축
전국 경시대회가 끝나고 한 선생님은 나를 위해 선생님과 나밖에 모르는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셨다.더 이상의 사고는 있어서는 안 됐기에 나의 수업도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었다.경시대회 성적이 공표되는 날이면 엄마도 내가 왼손잡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기에 그전에 준비를 마쳐야만 했다.역시나 내 성적이 발표되는 날 교무실의 선생님들이 엄마한테 축하 인사를 전했지만 엄마는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유아 오른손 거의 다 부러졌는데. 글씨도 못 써요. 선생님이 잘못 보신 걸 거에요.”그에 선생님은 바로 엄마를 데리고 가더니 결과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맞춰보며 말했다.“잘못 본 거 아니라니까요. 유아 진짜 천재가 맞긴 한가 봐요.”그에 엄마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기만 했다.“아니야, 아니에요.”엄마는 다시 경찰과 교육청에 제보하며 한 선생님이 수상자 자격을 사들인 거라고 주장했다.한참이나 진행된 경찰 조사의 결과는 당연히 한 선생님의 무죄였다.엄마는 또 기계가 잘못된 거라며 행패를 부리자 보다 못한 직원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당신 같은 엄마가 어딨어요? 어떻게 딸이 성공하는 걸 방해하려고 애를 써요?”몇 번이나 조사를 신청하고 반복해봐도 똑같은 결과에 결국 엄마도 내가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엄마는 당연히 내 왼손도 부러뜨리려고 마음먹었지만 나를 찾을 수조차 없었기에 국가대표 선발 시험이 있는 날에 시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국가대표 선발시험에 민간인이 소동을 부릴 수 없다는 걸 나와 한 선생님은 미리 알고 있었다.그렇게 엄마는 내가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분노하며 치를 떠는 모습을 보자 속이 통쾌해 난 나는 일부러 멀쩡한 내 왼손을 들어 보였다.나는 꼭 금메달을 따서 높은 곳에 서서 상을 받는 모습을 양주은에게 보여주겠다고 그날 한 번 더 다짐했다....운명은 한 번 더 내 편이 돼주었고 나는 금메달과 연희대의
오른손의 감각은 점점 무뎌져 갔고 나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있는 힘껏 엄마를 밀쳐내고는 앞으로 내달렸다.하지만 이미 과다출혈로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바닥에 엎어져 버렸고 엄마는 여전히 벽돌을 든 채 괴상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내 오른손이 이렇게 부러지나 싶던 찰나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대학생들이 나를 쳐다보자 엄마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차를 몰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하늘이 나를 가엾이 여기신 건지 지나치던 대학생들은 마침 의대생들이었기에 그들은 빨리 119에 신고를 해주고 간단한 응급처치까지 해주었다.그래서 다행히 손은 지켜냈지만 당분간 오른손은 움직일 수가 없게 돼버렸다.그 소식을 들은 한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셔서 달려오더니 붕대를 칭칭 감은 내 손을 보고는 이내 눈시울을 붉히시면서 울음을 참아내고 계셨다.“너만 살아있으면 됐어, 너만 괜찮으면...”고개를 떨군 채 나 몰래 눈물을 닦아내시던 한 선생님의 표정은 많이 복잡해 보였다.몇 달간 나를 위해 같이 시합 준비를 도와주시느라 많이 고생하셨는데 그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서 안타까워하는 얼굴이었다.그에 나는 마취가 덜 깬 상태라 잘 안 움직이는 입을 힘겹게 떼며 말했다.“선생님, 저 왼손으로도 글씨 쓸 수 있어요.”이쯤 되니 어릴 적 엄마가 나를 가둬놓은 게 고맙기도 했다.그때 혼자 갇혀버린 나는 하도 심심해서 왼손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왼손으로 글씨 쓰는 법도 익히고 왼손을 오른손만큼 편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아빠가 왼손잡이라서 그 얘기는 굳이 엄마한테 하지 않았었다.만약 그 얘기까지 했었다면 내 왼손은 이미 진작에 잘려나갔을 것이다.내 말을 들은 한 선생님은 긴장이 풀린 건지 목 놓아 우시더니 나를 꼭 껴안고 말씀하셨다.“유아야, 우리한테도 좋은 날이 올 거야.”...나를 차로 친 사람이 엄마라는 걸 안 한 선생님은 바로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런 선생님을 말렸다.당연히 같잖은 모녀간의
그 앙칼진 목소리가 운동장을 울리자 달리던 아이들도 걸음을 멈추고 나와 엄마를 지켜보고 있었다.내가 수학을 배우고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타는 걸 눈 뜨고 지켜보지 못하는 엄마를 잘 알기에 나는 대열에서 나와 엄마와 마주했다.“양 선생님, 잊으셨나 본데 저를 쫓아낸 건 당신이에요.”“모녀 사이에 그 정도 마찰은 다 있는 거야. 그건 이미 끝난 일이니까 고집부리지 마.”꼭 자기가 불리할 때만 모녀 사이를 들먹이는 건 엄마가 가장 잘 쓰는 수법이었다.엄마가 이런 말만 하면 관련도 없던 사람들이 나와서 내가 불효를 저지르는 것처럼 손가락질 해왔었다.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도 모르면서, 살아있는 게 지옥이었던 내 삶도 모르면서.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대열 뒤쪽에 있던 한 선생님이 뛰어오더니 나를 등 뒤로 숨겨주셨다.“양유아, 이 배은망덕한 년! 지금 나 따라 안 오면 넌 평생 수능 못 볼 거야.”“주민등록증 다 나한테 있어. 내가 그거 안 주면 넌 경시대회 참가도 못 해. 네가 아무리 천재라고 소용없다고!”어떻게 하면 나를 휘어잡을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고통스럽게 내 숨통을 옥죄일지 너무나도 잘 아는 엄마였다.내 몸은 파르르 떨려왔고 밀려오는 분노에 담아두었던 화가 폭발하려는 찰나 한 선생님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오며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유아야, 나만 믿어.”“학부모님은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나가 주세요. 안 그러면 경찰 부를 겁니다. 일 크게 만들면 피차 곤란하지 않겠어요?”엄마는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그래서 그날도 아빠에게 거절당하고 바로 아픈 할머니를 버려두고 이 작은 도시로 도망치듯 내려온 것이다.엄마는 마지막까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수능은 꿈도 꾸지 마.”엄마가 떠나자 나는 힘이 풀려 뒤로 넘어져 버렸다.열 달이나 나를 품고 있다가 힘들게 낳은 건 엄만데, 처음에는 엄마도 나를 기다렸고 나를 사랑했었는데 언제부터 우리 사이가 이렇게 돼버린 건지 모르겠다.하지만 부모가 내 생
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선생님을 보며 물었다.“제가 진짜 장려상이라고요?”그에 한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축하해, 유아야. 너 이제 전국 경시대회에 나갈 수 있게 됐어.”그 소식은 빠르게 학교에 전해졌고 학교로 돌아가서 수업을 듣게 된 첫째 날에 엄마는 바로 우리 반으로 쳐들어와서는 애들이 다 보는 앞에서 소리쳤다.“매번 보는 수학시험은 겨우겨우 60점 맞더니만 전국대회에는 어떻게 나간 거니? 말해봐, 너 커닝했지!”“그렇게 궁금하면 홈페이지에 신고해요.”그때 수업을 하던 선생님이 엄마를 말리기 시작했다.“무슨 커닝이에요, 그냥 유아 운이 좋았을 수도 있죠.”당연히 다른 선생님도 전국대회에 나가게 된 게 60점 주변만 맴돌던 나의 실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유아 너도 이렇게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바로 엄마한테 알려드렸어야지. 학교 측 통해서 이런 소식을 들으니까 엄마도 화내는 거잖아.”“커닝이나 하는 딸 나도 필요 없어요!”엄마는 그날로 바로 나를 홈페이지와 교육청에 부정행위로 신고했다.엄마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나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을 줄은 몰랐다.만약 내가 정말 부정행위를 했다면 엄마는 제 딸을 직접 고발해 정의구현을 실행한 품위 있는 교사가 되는 거고 나는 영원히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어졌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정말 하늘에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이 당당했기에 검사 결과도 나의 결백을 증명해주었다.나의 성적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부정행위 정황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답변이 수차례나 왔음에도 엄마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고 선생님들을 따라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떠들고 다녔다.그러던 와중에 나에 대한 또 다른 소문이 들려왔다.“학교에서 수학시험을 볼 때마다 유아는 항상 60점대를 유지했었죠. 그런데 매번 시험지의 난이도는 다 달랐는데, 혹시 유아가 일부러 점수를 낮게 맞은 건 아닐까요?”한 선생님의 질문에 교무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난이도가 어떻든 내 점수는 늘
그렇게 오랫동안 욕을 먹었는데 정말 배은망덕한 짓 한번 한다고 뭐 어떻겠냐 싶었던 나는 엄마의 말에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나는 꼭 경시대회에서 장려상을 받고 그다음 대회에까지 진출해서 국가대표팀이 되겠다고 다짐했다.그래야만 이곳을 떠나 나를 받아주는 그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하늘은 단 한 번도 나를 봐준 적이 없는 것 같다.시합은 세명시에서 열리는데 지금 살고 있는 이 작은 도시에서 세명시까지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돈도 엄청 많이 들었다.아빠가 준 2만 원을 한 푼도 안 썼다 해도 부족할 정도로 큰 금액이었기에 나는 자연스레 내 목에 걸린 목걸이에 손이 갔다.그건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내 손에 직접 쥐여주신 목걸이였다.“이 할미가 여태껏 모아놓은 돈은 다 이걸로 바꿔놨으니까 우리 유아 돈 필요할 때 이거 팔아서 써. 아끼지 말고 써야 될 때 꼭 쓰렴. 우리 유아가 수학가만 되면 할머니가 하늘에서도 너 꼭 지켜줄게.”목걸이를 매만지자 떠오르는 할머니의 유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나는 흐릿해진 시야로 할머니를 부르며 목걸이를 꽉 쥐었다.나는 마침내 결심하고 꼭 수학가가 되어 하늘에 계신 할머니께 보여드리겠다는 생각으로 금은방에 들어섰다.그런데 그 순간, 하늘이 갑자기 나를 굽어살피기라도 하시는지 안가연이 세명시에 나를 데리고 가줄 수 있다는 연락을 해왔다.나는 안가연의 호의를 거절할 자격도 이유도 없었기에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는 겨우 지켜낸 목걸이를 손에 꼭 쥐었다.이 작은 도시에서 세명시까지 가는데 나는 17년이나 걸렸다.시험장에 들어섰을 때도 나는 긴장을 전혀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도서관에서 많은 문제를 보며 공부를 했지만 이게 엄마와 엄마가 있는 곳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여전히 가슴이 떨려왔다.그리고 시험을 보는 내내 나는 손을 떨며 답안을 적어 내려갔다.시험장을 나선 뒤 안가연은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난 망했어.”그러고는 이내 나를 얼싸안으며 당부했다
옷장에는 쓰레기들이 가득 차 있었고 그걸 본 내가 그들을 쳐다봤지만 그들은 나를 향해 눈만 번뜩이고 있었다.곧바로 차가운 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렸고 그 양동이가 내 머리에 씌워지자마자 그 아이들이 달려와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누가 너더러 그 늙은이 딸 하래! 나 네 업보야!”엄마는 제자들을 친딸보다 더 아꼈지만 뒤에서 엄마를 욕하는 애들을 보니 나는 웃음만 나왔다.곱게 자라서 험한 꼴을 못 보고 자라온 애들과는 달리 나는 어려서부터 뭐든지 혼자 해오며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람이라 그 애들은 나와는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나는 바로 애들 위에 올라타며 받은 걸 똑같이 돌려주었지만 얼마 안 돼서 기숙사 사감한테 잡혀버렸다....그 소식을 들었는지 엄마는 씩씩대며 달려오더니 바로 내 뺨을 때렸다.“누가 너더러 내 학생들한테 손대랬어!”그에 산발이 된 여자애들은 하나둘 엄마의 등 뒤로 숨어들었다.“선생님, 저희는 그저 유아 도와서 짐 정리 해주려던 것뿐인데 유아가 저희를 때릴 줄은 몰랐어요...”여자애들이 눈물을 흘리자 엄마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더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어릴 때 집에서 과외를 받던 애들이 엄마의 금반지를 훔쳤을 때도 좋은 마음으로 엄마에게 알려주었지만 돌아오는 건 엄마의 폭언과 폭행이었다.“네가 내 금반지 가져간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어디 염치도 없이 내 학생들한테 뒤집어씌우려고 그래?”학교에서 내가 학급비에 손을 댔다는 오해를 받았을 때도 엄마는 고민도 없이 나를 범인으로 몰았다.“어릴 땐 내 금반지에 손을 대더니 이젠 돈까지 훔쳐?!”나는 수십 번이나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엄마 눈에 나는 처음부터 죄인이었기에 내 말은 들어주지도 않았다.그래서 이번에도 해명할 필요가 없다 느낀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엄마는 나의 머리채를 잡으며 사과를 강요했다.“선생님이 나를 때려죽여도 나는 얘네들한테 절대 사과 안 해요!”어릴 때와 똑같은 말을 하니 엄마도 그때처럼 발로 나를 찼다.하지만 엄마도 늙긴
엄마의 말에 문을 두드리던 내 손도 허공에 머물렀다.사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엄마는 진작에 나와의 연을 끊고 싶어 했다는 것을.허규연의 일은 내가 쫓겨나게 된 도화선이 아니라 그저 적당한 구실일 뿐이었다.허규연의 일이 좋은 계기가 돼주었기에 엄마는 이참에 짐 덩어리자 매일 지난날의 수치를 떠올리게 해주던 나에게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나는 제일 위에 있던 토끼 인형만 집어 들었다.그건 외할머니가 선물해준 것이기도 했고 이 모든 짐 중에서 유일하게 남이 쓰던 물건이 아니었다.내가 처음으로 가져본 온전한 내 것이었다.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이 닥쳐오니 마음이 아프긴 했다.나는 토끼 인형의 눈썹을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절대 이 토끼만은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나는 그날부터 토끼를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가족으로 삼기로 했다....아빠가 준 2만 원이 나의 전부였기에 나는 호텔을 끊기가 아까워 가까운 PC방에 들어갔다.내일 또 학교를 가야 했기에 이곳에서 하룻밤 보내려고 들어왔는데 의도치 않게 초등학교 때 같은 수학반에 있던 안가연을 만나게 되었다.안가연은 컴퓨터로 수학모형을 만들고 있었는데 한곳에서 막혔는지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어 나는 참지 못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며 풀이를 알려주었다.“양유아? 진짜 너야? 야, 네가 그때 그렇게 수학반 나가서 한 선생님이 얼마나 슬퍼하셨는지 알아?”그때 한 선생님은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는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반까지 만들어가며 아이들에게 수업을 해주었는데 나한테 재능있다는 소리를 아주 많이 해주셨었다.하지만 내가 수학을 잘하는 걸 싫어했던 엄마 때문에 나는 그 반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 뒤로는 뵌 적도 없는 사이였다.“경시대회 곧 시작해, 넌 내가 본 애들 중에 수학을 가장 잘하는 애야, 너도 나가보지 않을래?”수학은 엄마 때문에 영원한 유감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눌러 담았던 것이었는데 하필 이때 안가연을 만나니 마치 탐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