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어둠 속에서 최희연의 얼굴도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때 왕자현이 불쑥 손을 뻗어 최희연의 손을 감싸 쥐더니 차가운 어조로 진유겸에게 물었다.“진실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내 와이프를 이렇게 곤란하게 하는 건 너무하네요! 진유겸 씨, 게임에도 선이 있는 법입니다.”제일 먼저 최희연을 감싼 건 왕자현이었다.진유겸은 비웃으며 말했다.“당신들이 먼저 시작한 거 아니었나? 어떻게?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그리고 난 당신한테 물어본 것도 아닌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진유겸의 말투는 정말 얼굴을 붉히려는 것 같았다.그는 최희연에게 날카롭게 물었다.“나를 사랑해?”최희연은 마스크를 코까지만 쓰고 있어서 위 얼굴이 보였는데 얼굴은 창백했고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답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듯 주변 사람들은 모두 짐작하는 눈치였다. 나는 왕자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매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왕자현은 일어서서 최희연을 텐트로 데려가려 했지만 최희연은 갑자기 단호한 표정으로 천천히 한마디 내뱉었다.“사랑해요.”나는 왕자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형용하기 어려웠다. 차가웠지만 관용이, 분노했지만 알 수 없는 신뢰가 어려 있었다. 마치 곁에 있는 여자를 전적으로 믿는 듯한 표정이었다.진유겸의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며 말했다.“그럴 줄 알았어.”그는 최희연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마치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듯했지만 최희연은 천천히 말했다.“사랑하는 건 맞지만 잊는 데 시간이 필요할 뿐 잊을 수 없는 건 아니에요! 2년 전처럼... 내가 용기를 내서 서준을 포기하고 당신을 선택했던 것처럼요.”진유겸의 얼굴이 굳어졌다.“무슨 말이야? 서준이가 없어서 나를 사랑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희연아, 아직도 날 몰라? 난 내가 원하는 건 반드시 가져야 해!”최희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유겸 씨, 이혼하던 날 당신은 정말 매정했어요. 그래도 난 당신을 놓아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날 분명히 말했는데 지금 이 집착은 대체 뭐예요?!
“내가 왜 널 탓하지 않겠어?”그가 물었다. 왕자현은 손을 뻗어 자신의 외투를 벗었다. 얇은 반팔 티셔츠만 남은 상태에서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최희연이 보는 앞에서 그 옷마저 벗었다.그의 몸매는 매우 훌륭했고 인어선도 또렷하게 드러났다.게으른 도련님 같지는 않았다.최희연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이때 왕자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나는 네가 실수하는 것도, 내 앞에서 예의 없이 구는 것도, 내 앞에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다 허락할 수 있어! 네가 무엇을 원하든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수 있어. 하지만 네가 스스로를 함부로 하는 말은 용서할 수 없어! 희연아, 생명은 네 거야. 짧은 시간, 네가 소중히 여기길 바래.”최희연은 놀라서 물었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왕자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뭐야?”최희연은 웃으며 잘못을 인정했다.“내가 잘못했어요!”최희연의 태도가 좋아 왕자현은 더 캐묻지 않았다.최희연이 반문했다.“오빠는 내게 별을 따다 줄 수 있어요?”왕자현은 한마디로 대답했다.“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데 별 하나쯤이야, 그냥 돌덩이일 뿐이지.”왕자현의 말투는 매우 거만했다.그러나 최희연은 왠지 모르게 그 말을 믿었다.그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어찌 된 일인지 최희연의 불안했던 마음은 진정되었고 최근의 우울한 생각도 누그러졌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왕자현에게 정중하게 큰절을 올리고는 공손하게 말했다.“고마워요. 재민 씨.”그녀가 이 이름을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왕자현 씨라는 호칭 외에는 대부분 자현 씨라고 불렀다.예전에 최희연은 항상 그의 곁에 붙어서 오빠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때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따스했던 순간들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그녀는 왕자현과 함께 떠났을까?최희연은 생각해 보았지만 그래도 남을 것 같았다.그 당시 왕자현을 만난 타이밍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어떤 시
왕자현과 최희연이 떠난 후 모닥불 옆에는 나와 석지훈만 남았다. 나는 남은 불씨를 완전히 끄고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진유겸은 희연이를 얻지 못하면 그녀와 함께 죽겠다는 거예요? 설마 그 정도로 집착할까요? 게다가 진유겸은 권력을 버리고 떠날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석지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그는 그럴 수 있어.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면 그런 외로운 남자는 뭐든 내려놓을 수 있어. 하지만 그가 상대하는 사람은 왕자현이야. 막대한 재력으로 전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지. 너도 알다시피 경제를 장악하면 권력도 굴복시킬 수 있어. 그래서 유겸은 혼자서는 그를 이길 수 없으니 나와 손을 잡자고 한 거야. 하지만 나와 왕자현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잖아.”나는 놀라서 물었다.“왕자현이 그렇게 대단해요?”석지훈은 대답했다.“대단하다기보다는 돈이 많다고 해야겠지. 유겸은 그를 상대할 방법이 없지만 나는 있어. 그래서 왕자현은 지금까지 나를 먼저 건드리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던 거야.”나는 호기심에 물었다.“그의 약점이 뭔데요?”석지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비밀.”나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나한테도 숨기는 거예요?”석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숨긴다기보다는... 그의 오랜 약점인데 지금 바로 그의 곁에 있지.”나는 눈살을 찌푸렸다.“희연이를 말하는 거예요?”“응, 왕자현은 희연 씨를 사랑해. 나는 그 사실을 계속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는 늘 참고 그녀를 몰아붙이지 않았지. 아마 자존심 때문에 먼저 나서지 못하는 걸 거야.”“그럼 진유겸은 그게 왕자현의 약점인 걸 몰라요?”석지훈은 차분하게 말했다.“유겸의 약점 또한 희연 씨야. 세 사람은 서로 얽혀 있고 결정권은 희연 씨에게 있어. 그녀의 마음이 확고하다면 유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 다만 그녀가 마음이 약해질까 봐 걱정이야. 그렇게 되면 왕자현은...”결국 결정권은 최희연에게
나는 그의 뜻에 따라 말했다.“네. 현아가 먼저 말했어요. 걔가 안 그랬으면 나도 용기 못 냈을 거예요... 난 항상 당신 생각이 먼저예요. 당신 마음 편한 게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에야 다른 사람 생각할 여유가 생기는 거죠. 내 마음 알겠죠?”“어. 당신 마음 내가 왜 몰라.”‘지훈 씨는 너무 착해.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나다니!’나는 감동에 젖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다시 그의 턱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랬더니 석지훈은 갑자기 팔로 나를 꽉 안더니 뜬금없이 말했다.“내 호는 자경이야.”내가 대답했다.“알아요.”“나 오늘 희연 씨가 자현 오빠라고 부르는 거 들었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 좋더라. 나도...”나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나도 자경 오빠라고 부르라고?”석지훈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되묻듯 물었다.“안돼? 아직 아무도 나를 그렇게 부른 적 없는데.”“거짓말, 자경 오빠라고 부른 사람 아무도 없었다고요?”“어. 민영이가 어렸을 때 자주 그렇게 불렀지만 내가 무시했거든. 그러니까 아무도 없다고 봐야지.”석지훈이 나에게 묻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마치 사탕을 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런 석지훈은 예전과는 정말 천지 차이였다.지금의 그는 정말 좋았다.나는 즐겁게 웃으며 물었다.“그럼 나한테 보상은 없어요?”그가 말끝을 올렸다.“응? 뭘 원하는데?”“내가 뭘 원하든 다 줄 거예요?”“윤아 너도 알잖아.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줄 거라는 거.”아무렇지 않게 하는 달콤한 말이 제일 치명적이었다.나는 그의 턱에 또 뽀뽀하고 그것도 모자라 계속 깨물었다.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한참 나를 쳐다봤지만 결국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자경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눈썹 사이로 살짝 실망한 듯 말했다.“아가야. 너 진짜 애가 타게 만드는구나.”나는 웃으며 불렀다.“자경 오빠.”방금 그가 자기 호를 말해줬으니 분명 내가 자경 오빠라고 불러주길 바랐던 것이었다.이 호칭은 좀 부끄러웠지만 석지훈의 눈은 기뻐
“간단해. 윤아야, 네 스타킹 하나만 빌려줘.”나는 어리둥절했지만 시키는 대로 텐트에 들어가 새 스타킹 하나를 가져다 원태웅에게 주었다. 그는 근처에 있는 대나무를 하나 베어 와서 어떻게 만들지 연구하기 시작하더니 30분도 안 돼서 모양을 만들었다.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우리 셋 모두 쓸 수 있게 3개나 만들었다.물론 원태웅이 나중에 스타킹을 더 요구했었다.하지만 내가 많이 가져오지 않아서 최희연이 선뜻 자신의 스타킹 하나를 내주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그물망을 들고 강가로 갔다.5월의 날씨는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지만 아침 기온은 아직 좀 쌀쌀했다. 신발을 벗고 물에 들어가니 처음에는 약간 차가웠지만 금방 적응해서 나가기 싫어졌다.강물은 아주 맑아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 맨눈으로 보였다. 원태웅은 물고기에는 관심 없고 깊은 물웅덩이에서 수영만 하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태웅 오빠, 이제 그만 놀고 물고기 잡아요!”최희연과 나는 영 어설퍼서 눈앞에서 물고기가 헤엄쳐 가도 그물로 잡을 수 없었다. 원태웅은 일어나 우리를 타박하며 말했다.“너희 진짜 못 한다.”그는 웃통을 벗은 채 일어나 땅에 놓인 자신의 그물망을 집어 들고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지만 우리처럼 어설펐다.강에는 물고기가 많았지만 우리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얼마 후 석지훈 일행이 강가에 도착했다.원태웅이 그들에게 물었다.“멧돼지 잡았어?”한민수가 대답했다.“못 만났어. 허탕 쳤지.”“칫, 정말 재주도 없네.”원태웅은 사람 약 올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한민수가 반문했다.“너희는 물고기 잡았어?”원태웅은 강가로 나와 손에 든 그물을 한민수에게 던지며 말했다.“교활해서 잡히질 않네. 네가 잡아 보던가!”“이렇게 오랫동안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이번에는 한민수가 원태웅을 놀릴 차례였다.원태웅은 그에게 물을 끼얹으며 말했다.“그럼 네가 해보라고!”한민수는 원태웅에게서 그물망을 받아들고 흔들어 보며 물었다.“이거
답장을 보낸 후 휴대폰을 내려놓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석지훈은 불을 지피고 있었고 왕자현과 최희연은 아직 텐트 안에 있었다. 나는 석지훈 옆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원태웅은 생선 굽는 솜씨가 꽤 괜찮았다. 한민수와 예유진이 볶음 요리를 하려고 막 재료를 넣으려던 참에 한민수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예유진이 바로 물었다.“누구야?”한민수는 예유진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네가 받아.”예유진은 받지 않았고 한민수는 그의 앞에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전화기 너머로 예지한의 풀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선생님, 언제 돌아오세요?”한민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내일.”“선생님, 저 요즘 너무 힘들어요. 찾아가도 될까요? 걱정 마세요, 절대 폐 안 끼칠게요.”한민수가 대답했다.“너 오고 싶지 않을 텐데.”“그럴 리가요? 저는 선생님이랑 같이 있는 게 제일 좋아요.”예유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한민수를 바라보았다. 한민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하나야, 네가 예전에 제일 싫어했던 건 나였잖아. 잊었어?”“내가 싫어했던 건 한민수 오빠였지 선생님이 아니에요.”한민수는 말문이 막혔다. 결국 한민수는 타협했다.“알았어, 위치 알려줄게.”전화를 끊은 한민수는 예유진에게 말했다.“하나가 요즘 들어 이러기 시작했어.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예유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걔한테 뭔 짓 한 거야?”“설마. 난 하나를 항상 가족처럼 생각해.”그런데 그날 한민수는 예지한에게 주소를 알려주었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나는 따로 한민수에게 이유를 물었다.“잘 모르겠어요.”나는 궁금해서 물었다.“걔가 갑자기 왜 민수 씨를 쫓아다니는데요?”한민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글쎄요. 아, 기억났다! 어느 날 하나가 술에 취해서 나한테 질문 하나 했어요.”나는 무척 궁금했다.“무슨 질문요?”“자기가 꼭 집안의 사명 때문에 굉장히 훌륭하지만 자기는
한민수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억울한 얼굴로 석지훈에게 물었다.“오빠, 우리가 뭘 잘못했어요?”“아니, 그냥 쟤가 마음이 복잡한 거야.”잠시 침묵하던 석지훈이 물었다.“너 대체 짝을 어떻게 지어주었다는 거야?”“나 방금 지한 씨 이야기했어요.”“어쩐지. 아마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걸 거야.”“그 일이 뭐가 어렵다고 그래요?”“걔가 너한테 뭐라고 했는데?”“지한 씨가 누구랑 결혼하든 똑같으면 차라리 민수 씨랑 하는 게 낫겠다고 했다는데요. 서로 잘 아니까 좋은 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석지훈은 내게 설명해 주었다.“지한이가 왜 하필 민수를 선택했겠어? 민수도 유진이와 마찬가지로... 사생아에 짐짝 취급받고 평판도 좋지 않고 집안의 지지도 없으니까. 지한은 지금 화풀이하는 거야.”나는 비로소 깨닫고 말했다.“일부러 사생아를 선택해서 예 씨 가문 사람들 열 받게 하려는 거네요? 근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내가 아는 예지한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그냥 내 추측일 뿐이야.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석지훈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민수는 지한이와 아무 사이도 안 될 거야. 걔는 현아를 좋아한다고 해도... 뭐랄까, 그냥 관심을 돌리려는 것뿐이었어.”“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설마 민수가 좋아하는 사람은 현아가 아닌 건가?’“윤아야, 민수는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민수를 떠났어. 민수는 아직도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나는 한민수에게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그날 우리는 산에서 더 머물지 않고 운성으로 돌아왔다. 운성에 돌아온 후 석지훈은 몹시 바빴다.그는 계속 서재에 머물며 일을 처리했고 나는 고민영의 연락에 시달렸다.고민영은 나에게 병원에 가서 고현성의 곁을 지켜달라고 했다.하지만 지금 나는 무슨 신분으로 고현성 옆에 있을 수 있겠는가?이건 일부러 석지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
담현아는 비행기로 운성에 돌아왔기에 나는 공항으로 그녀 마중을 갔다. 차 안에서 담현아는 갑자기 유능한 검사를 아는지 물었다. 학과 선배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것이다.나는 생각하다가 말했다.“강해온에게 부탁해 볼게.”“네. 우리 선배가 살인 사건에 연루됐는데 사실은 희생양이거든요. 근데 배경도 없고 힘도 없어서... 한시윤이 뒤에서 괴롭힌다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한 상황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한시윤? 운성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살인 사건이라고? 네 선배는 지금 어떻게 됐어?!”“선배가 함정에 빠져 누명을 썼는데 제일 선배가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한시윤이라잖아요. 그래서 선배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들려고 검사를 매수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다 막아버렸대요. 선배는 원래 부탁하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인데 얼마나 다급했으면 나한테 전화했겠어요. 비행기 타기 직전에 전화가 왔더라고요. 나도 사건이 심각해 보여서 언니한테 물어본 거예요. 혹시 아는 실력 있는 검사가 있으면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그건 간단해. 한시윤쯤이야 문제도 아니지. 바로 빼내면 되잖아!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담현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선배는 자존심이 세서 스스로 결백을 밝히고 싶어 해요. 좀 고지식한 면도 있고 융통성이 없어요. 그래서 선배의 결백을 밝혀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 그러면 평생 마음에 걸릴 거니까. 게다가...”담현아는 말을 멈췄다.“왜?”“선배는 전과가 있어서 들키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믿을 만한 검사를 찾아야 해요.”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무슨 전과?”“어렸을 때... 강간미수를 당했어요.”나는 놀라서 말했다.“그건 전과가 아니잖아!”피해자는 담현아의 선배였으니까.“하지만 선배가 그 사람을 과실치사했어요. 당시 검사는 선배의 동기를 의심했고 고의적인 보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그 소송도 1년이나 걸려서 겨우 벗어났는데 이번에 또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