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를 손에 들고 있으니 묵직했다. 사실 아까부터 알고 있었지만 열어볼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이정희의 유품이었으니까. 나는 관심이 없었지만 석나은이 여기에 떨어뜨리고 갔다.게다가 이정희가 편지를 썼다는 사실에 놀랐다.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처럼.나는 편지를 가방에 넣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가정부의 안내를 받아 거실에 도착하니 석지훈은 이미 어머니를 관에 모셔 놓은 상태였다. 지난번 어머니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이번에는 석씨 가문의 방계를 부를 수 없어서 조용히 이정희를 아버지 곁에 묻어야 했다. 사실 그녀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이다.하지만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것도 너무나 잔인한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누가 옳고 그른지 누구의 잘못인지 더 이상 판단하고 싶지 않다.나는 거실 입구에서 지키고 서 있었다. 석지훈은 어머니의 관 앞에 무릎을 꿇고 밤샘을 하고 있었다. 요즘 이 2년 동안 정말 쉴 새 없이 많은 일이 있었다.우리 곁을 떠난 사람이 너무 많았다.나의 친아버지와 석지훈의 두 어머니, 그리고 친어머니까지. 나와 석지훈은 장례식을 네 번이나 치렀다.나는 거실에 오래 머물지 않고 석지훈의 정원으로 돌아왔다. 수선화는 이미 시들었고 4월의 단풍잎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나는 문턱에 앉아 정원 안 인공 호수를 바라보며 계속 생각에 잠겼다. 친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석지훈의 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내 마음속에는 큰 슬픔이 없었다. 다만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있을 뿐이었다. 몇 번 만나지 못해 깊은 정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까.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가 마음이 차가운 게 아니야.”나는 마음이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피가 뜨겁게 끓고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고현성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옆에 있던 현정우가 물었다.“뭐라고 하셨습니까?”“아니에요. 그저 세상사가 무상하다고 느껴서요.”나는 내가 석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 될 줄은
하지만 그녀가 했던 말 중에 ‘나는 정말, 정말, 정말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이 말은...그녀는 세 번이나 강조하여 말했다.이정희가 석지훈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 아파할까.그런데 이 편지는 분명 석지훈에게 쓴 것이었다.게다가 이정희는 편지에서 석지훈을 '잡종'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던 현정우에게 물었다.“이정희가 편지에 지훈 씨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썼는데 이걸 지훈 씨에게 보여줘야 할까요?”현정우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이건 석 대표님께 남긴 편지입니다.”현정우는 내게 석지훈에게 직접 편지를 전달하라고 넌지시 권하는 것이었다.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세상에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도 있어요? 난 윤아랑 윤민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죽는 순간까지 지훈 씨한테 그럴 수 있죠? 이정희는 정말 독한 여자네요.”현정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가주님, 생각을 바꿔 보시죠. 어쩌면 돌아가신 분은 석 대표님이 계속 마음 쓰는 게 싫어서 그런 말을 남기신 걸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아마 마음속에 죄책감이 많았을 겁니다.”현정우의 말에 내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나는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엄마가 평생 너무 고집스럽게 살았구나...그 고집 때문에 그와 수십 년을 떨어져 살았고 그가 죽던 날에도 그와 다투며 누구를 사랑하는지 물었고 그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어.내가 너무 고집스러웠어.그 고집 때문에 평생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하지만 난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단다.죽음 앞에서조차 후회하지 않았어.지훈아, 나는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실망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이제 더 이상 날 감싸주지 않겠지?정말 더 이상 날 감싸주지 않을 것 같구나!네가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 차가웠으니까.하지만 네가 더 이상 날
“네가 지훈 씨라고 부르면 멀게 느껴져.”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시큰하게 아파왔다.석지훈이 언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가?자신의 슬픔을 이렇게 드러낼 정도로 약해지다니. 순간 마음속 죄책감이 더욱 깊어졌다.나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사과했다.“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희연이가...”그녀는 내 말을 듣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비록 그녀가 죽였다고 하지만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었다. 단지 석지훈한테 죄책감이 좀 덜할 뿐이었다.그는 다시 말했다.“넌 잘못 없어.”석지훈은 항상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게 죄책감을 느꼈다.난 차라리 그가 날 원망하길 바랐다.적어도 화라도 냈으면 좋을 것 같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나는 어쩔 줄 몰라 말했다.“오빠, 내가 같이 있어 줄게요.”오늘 밤 나는 그와 함께 있어주기로 했다.나는 몸이 안 좋아서 후반야쯤 되니 힘들었고 결국 석지훈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나는 또 꿈을 꿨다.꿈에는 엄마만 나왔다.엄마는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나는 나지막이 불렀다.“엄마.”“수아야, 넌 참 가엾구나.”나는 놀라서 물었다.“엄마,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사랑하는 남자, 애들 둘, 부모님, 친구, 돈, 권력... 다 있는데 내가 왜 가엽다는 거지?“수아야, 넌 가여운 사람이야.”엄마는 왜 날 가엽다고 하는 걸까?나는 다급하게 물었다.“엄마, 무슨 말이에요?”엄마는 대답 없이 꿈속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나는 놀라 눈을 뜨고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내 모습에 석지훈은 날 안아줬다.“왜 그래?”“오빠, 나 악몽을 꿨어요.”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나는 엄마의 이 꿈을 악몽이라고 했다.요즘 들어 자꾸 엄마 꿈을 꾼다.지난번에는 나에게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했고 이번엔 내가 가엽다고 했다.왜 이런 꿈을 꿀까?뭔가 징조인가?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우
점심에 차를 너무 많이 마셨던 탓에 밥도 못 먹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배고파요.”석지훈은 짧게 응수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문가에 서서 무덤덤한 눈빛으로 천장의 하얀 등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속으로 굉장히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힘들어도 모든 고통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나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았다.특히 그의 어머니가 나 때문에...나는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현정우가 밥을 가져왔다. 석지훈은 많이 먹지 않았고 나도 입맛이 없어서 많이 먹지 못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석지훈은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그동안 그는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 석지훈을 찾아갔다. 그는 이미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좀 쉬라고 권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중에.”아침부터 하루 종일 석지훈은 계속 바쁘게 일했고 석나은도 그를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손 놓고 있었었다. 특히 열심히 일하는 석나은과 비교되니 아주 한심해 보였다.나는 힘없이 정원으로 돌아와 문턱에 앉았다. 현정우도 내 옆에 앉았고 우리 둘 다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꼴이었다.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물었다.“나 진짜 쓸모없는 것 같아요.”이럴 때 석지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니까.위로조차 해 주지 못했다.현정우는 대답했다.“지금 가주님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최선입니다. 어쨌든 관에 누워 계신 분이... 가주께서는 그냥 여기서 석 대표님을 기다리세요. 지쳐서 방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주님, 남자는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작은 온기면 충분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의 마지막 말에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묻어났다.나는 의아해서 물었다.“요즘 왜 이렇게 감성적이에요?”현정우: “...”내 말에 현정우는 나를 상대하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수아야. 넌 참 가여운 사람이야.난 도대체 내가 왜 불쌍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석지훈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그의 허리를 꼭 껴안고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내가 어떻게 오빠에게 차갑게 대할 수 있겠어요? 난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오빠가 날 원망할까 봐 무서웠고요.”석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추고 단호하고 따뜻하게 말했다.“난 오빠를 좋아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오빠를 사랑하고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나는 고현성과 사귈 때 키스를 거의 하지 않았고 석지훈과도 자제하는 편이었다.아마도 장례식 중이라 그런지 석지훈은 나를 놓아준 후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그저 나를 품에 안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정우의 말대로, 남자는 그저 따뜻함을 원하는 존재인 것 같다. 따뜻함을 충분히 주면 만족하는 것 같았다.지금의 석지훈처럼 말이다.그는 계속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꼭 어린아이 같았다.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행동이었다.그는 내가 아직도 그 자세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일어나 나를 눕히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윤아야, 왜 나를 안 불렀어?”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깨울까 봐...”내 말을 듣자 석지훈의 표정이 누그러졌다.“다음에는 그러지 마.”그는 손을 들어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내일 아침에 어머니 장례식이 끝나면 너랑 같이 운성에 갈 거야. 운성에서 며칠 있다가 아이들과 함께 핀란드로 가자.”나는 놀라서 물었다.“나랑 아이들을 핀란드에 데려간다고요?”석지훈은 검은색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그는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내가 말했잖아. 앞으로 널 내 세상으로 데려가겠다고. 윤아야, 더 이상 너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널 내 곁에 두고 싶어. 우리 핀란드와 운성을 오가며
마음속으로는 아직 이정희에게 원망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것은 석지훈을 위해서였다.나는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랐다.강해온이 아이들을 데리고 석 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담현아도 와 있었다. 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물었다.“너 여긴 어떻게 왔어? 아니, 너 내 비서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지훈 오빠가 나보고 언니랑 같이 있으라고 하던데요.”이 시간에 석지훈이 담현아를 나에게 보내다니...나는 담현아에게 의아하게 물었다.“이해가 안 돼. 내일 아침이면 우린 떠날 건데, 너 괜히 왔다 가는 거잖아?”담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나도 이해가 안 돼요. 근데 연락은 아침에 받았는데 내가 일이 있어서 늦어졌어요. 그러다가 저녁에 이쪽으로 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강 비서님을 만났거든요. 그냥 인사만 하려고 했는데, 목적지가 같더라고요. 아, 맞다! 윤민이가 방금 나보고 이모라고 불렀어요!”나는 그녀의 품에서 윤민이를 받아안으며 물었다.“네가 가르쳤어?”“강 비서님이 가르쳤어요. 이 녀석 너무 똑똑해요! 볼수록 너무 사랑스러워요. 근데 수아 언니, 나 윤아랑 윤민이 양엄마 하면 안 될까요?”나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너 아직 한참 어리잖아.”내가 거절하자 담현아는 시무룩하게 말했다.“사람 무시하지 말아요. 나도 결혼한 성인이거든요.”“알았어, 알았어. 성인인 거 인정할게.”내가 쉽게 허락하지 않자 담현아는 더 이상 조르지 않고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양엄마는 안 할 테니까 그냥 이모 할게요.”담현아는 아직 어려서 아이들의 양엄마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담현아와 함께 정원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석지훈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이들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누가 데려왔어?”내가 설명했다.“내가 강 비서에게 부탁했어요.”석지훈은 담현아의 품에서 윤아를 안아 들었다. 윤아는 그의 품에서 얌
담현아는 황급히 부인했다.“말도 안 돼요. 난 아직 어린데 무슨 애를 가져요. 그리고 아저씨도 아직 우리 집에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 없어요. 연말쯤에나 생각해 보려고요.”“임신한 줄 알았잖아.”담현아는 재빨리 대답했다.“아니라니까요.”그녀는 윤민이를 안고 정원을 나서려고 했다. 내가 조심하라고 당부하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석씨 가문 전체가 언니 거고 지훈 오빠도 여기에 있는데 누가 우리를 건드리겠어요.”조심하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에 특히 아이들 일에는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담현아는 윤민이를 안고 정원을 나섰다.나는 윤아를 비서에게 넘겨주었고 그는 담현아를 따라갔다.두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원에는 다시 나와 현정우만 남았다.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생전에 쓰시던 방에 같이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현정우는 휴대폰으로 날씨 예보를 확인하고는 말했다.“가주님, 곧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그칠 것 같네요.”“음, 다행히 봄비는 보슬보슬 내리니까.”나는 아버지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음침했다.이곳에 오는 것은 두 번째였지만 여전히 으스스했다.현정우는 방의 불을 켰다. 밝은 불이 아니라 어두운 불이었다. 현정우는 오랫동안 석씨 가문 사람이었기에 내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설명했다.“저는 훈련을 받고 여러 차례 선발 과정을 거친 후 처음부터 이 정원을 지키는 일을 했어요. 근데 밖에 나갈 기회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석 회장님은 1년 내내 매일 방 안에만 계셨거든요. 가장 멀리 가본 곳이라고 해 봐야 새해에 가족들과 거실에서 식사하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석씨 가문 사람들은 회장님을 두고 방에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나 보다 하고 수군거렸었지요. 하지만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사모님이 이 방을 정리했고 석 대표님도 함께 계셨는데 아무런 비밀도 없었습니다. 다만, 작은 밀실이 하나 있는데 아무도 열 수 없었죠. 부수지 않는 이상은요. 사모님은 부수려고 했지만
“네, 사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도 모르셨을 겁니다.”그렇다. 그녀는 이미 죽었다.갑자기 마음속에 의문이 가득 차올랐다.나는 급히 휴대폰을 들어 석만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의 번호를 삭제했던 것 같았다.나는 현정우의 휴대폰으로 석만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나는 그에게 물었다.“이 벽의 비밀번호가 왜 이정희의 생일인 거예요?”석만호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물었다.“회장님 방에 있는 밀실 말씀이십니까?”나는 차분하게 말했다.“맞아요. 비밀번호는 이정희의 생일이었어요.”“저는 모릅니다. 회장님께서 27년 동안 그 밀실을 열지 않으셨거든요.”내 친아버지는 27년 동안 이 밀실을 열지 않으셨다...27년...그때는 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고 어머니를 막 만난 시기였다.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큰 비밀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나는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고 현정우는 내 뒤를 따랐다. 들어가자마자 방 안 가득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왔다. 표본으로 만들어진 말린 꽃으로 수십 년 동안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밀실 곳곳에는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는 모두 같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근대 시대의 화장을 하고 있었고 흑백사진이었지만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옛 시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뚜렷한 윤곽을 가진 그녀는 분명 이정희였다.아버지의 밀실에는 이정희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나는 엄마의 인생이 한낱 웃음거리가 아니었을까 두려웠다.나는 밀실을 한 바퀴 돌았다.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옛날 물건이었지만 이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현정우는 책상 위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편지 봉투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그는 나에게 편지를 건네준 후 서랍을 열었다.서랍 안에는 수많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나는 편지 봉투의 먼지를 털어냈다. 현정우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진실은 더욱 잔혹할지도 몰라요.”잔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