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계셨지만 얼굴은 창백했고 숨은 이미 멎었다. 나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은 채 얼마 전 그녀를 봤을 때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는 모두 그게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감정이 깊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상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하나 줄어들었음을 실감했다. 나는 아직 그녀에게 효도도 못 했는데...그리고 어머니의 일생도...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분명 빛났을 것이다.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공작부인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까?그녀가 석윤민을 안고 있던 모습도 떠올랐다.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일생에서 처음 경험해 보는 행복이라고 했다.그녀는 석윤민을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다.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집사는 갑자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께서 이렇게 가시다니... 방금 전까지도 살아계시던 분이 어떻게 갑자기 돌아가실 수 있는 거죠? 의사 선생님께서도 건강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했는데.”나는 입술을 깨물며 참았지만 눈물이 볼을 타고내라며 입안에서 짠맛을 냈다.집사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사모님께서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셨는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나는 뭔가 수상해서 물었다.“누구를 만났어요?”나는 영어로 물었고 집사도 알아들었다.“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만 하셨고 누구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우리한테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어요.”뭔가 수상한 냄새가 났다. 나는 이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일단 그 문제는 잠시 제쳐두기로 했다.“장례복은 있나요? 바꿔 입을게요.”집사는 나에게 장례복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얼른 갈아입은 뒤 조용히 어머니의 곁을 지켰다.세 시간이 지났을까, 최욱현이 도착했다. 그는 곧바로 침대 옆으로 달려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이 너라고?”최욱현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마치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사실 나는 그랑 가깝게 지내는 게 조금 두려웠다. 그리고 담현아도 그를 경계했었다. 그러나 석지훈이 그와 너무 멀어지지 말라고 조언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우리는 가족이야.”그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어머니를 향해 기쁨에 차서 말했다.“어머니, 들으셨어요? 수아가 저한테 가족이라고 했어요.”그는 갑자기 미쳐 날뛰듯 기뻐하며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수아야, 어머니는 내 첫 번째 가족이고, 너는 두 번째, 그리고 윤민이랑 윤아는 세 번째야! 나는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어. 아무도 나를 돌봐주지 않았어.”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싸늘해졌다.“분명히 나도 가족이 있었어. 내 친 어머니도 건강하셨고, 게다가 돈도 많고 권력도 있었지. 그런데도 나를 버렸어. 만약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수아야, 근데 그 사람들은 지금 나를 두려워해. 나한테 자비를 베풀라고 구걸하지만 나는 전혀 관심 없거든. 되레 내가 어떤 짓을 할까 봐 겁내고 있는 것 같아. 어렸을 땐 나를 버리더니 지금은 나를 두려워하고 있어. 웃기지 않아? 나를 사람취급도 하지 않잖아, 괴물로 생각하지.”그는 점점 더 격앙돼서 말했다. 나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우리 먼저 어머니부터 보내드리자. 모든 일이 끝나면 함께 운성시로 돌아가자. 윤민이랑 윤아도 널 기다리고 있어.”두 아이를 언급하자 그의 눈빛은 금세 부드러워지며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말했다.“고마워.”대채 뭐가 고마운지 나는 알 수 없었다.그는 젖은 수건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닦아준 뒤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집사는 급히 새 이불로 바꿨다. 그리고 어머니를 다시 침대에 눕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왕실에 알리고 모레 화장하자.”그제야 최욱현은 안정을 찾은 듯 차분해졌다.마치 새로운 희망을 찾은 것 같았다.나는 그와 함께 어머니의 방에서 밤늦게까지 머물렀다. 헤어
“언제 올 거예요?”그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가.”그의 목소리엔 묘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나는 조용히 대답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무 일도 없어.”그는 잠시 멈췄다가 계속해서 말했다.“얼른 자, 내일 눈 뜨면 날 볼 수 있을 거야. 내일 봐.”나는 그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그래요, 기다릴게요.”사실 나는 지금 그한테 의지하고 싶었지만 그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다른 한편, 석지훈의 저택.그는 통화를 마친 뒤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는 사모님을 바라보며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뭐라고 해도 소용없었다.그는 조용히 다가가 물었다.“좀 쉴래요?”사모님은 멍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석훈아.”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인내심을 갖고 말했다.“내일 사람을 보내서 F국을 떠나게 해줄게요. 안전은 제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석훈아, 나를 탓하지 않는 거니?”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대답했다.“미워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죠? 어머니가 그분을 죽였잖아요. 제가 나중에 윤아를 어떻게 마주할지 생각은 해보셨어요? 어머니, 한 번이라도 저를 배려해 준 적 있어요?”그녀는 말문이 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항상 그에게 미안했다.하지만 원망이 너무 쌓이다 보니 수년간 복수만을 생각해 왔다.그리고 오늘, 그녀는 마침내 복수를 했다.그녀는 다소 불안한 듯 물었다.“그럼 수아 씨한테 말할 거야?”“네, 전 수아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 거예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통스러워하며 말했다.“수아가 진실을 묻는다면 전 절대로 숨기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 전 이제 수아를 어떻게 봐야 하죠?”“지훈아, 수아 씨한테 말하지 마.”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저택을 떠났다.현재 그는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한쪽은 그의 여자이자 아이의 엄마였다.다른 한쪽은 그의 어머니였다.그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갑자기 쉽
나는 얼굴이 간지러워 손으로 쓸어보았지만 여전히 간지러웠다. 흐리멍덩하게 눈을 떠보니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보였고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고 다정하게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나는 나른하게 몸을 뒤척이며 그의 손바닥을 잡고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갔었어요? 나 여기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난 당신이... 엄마가...”목소리가 떨리며 눈물이 차올랐다. 내 마음속 고통을 느꼈는지 석지훈은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대었다. 그의 따뜻한 숨결이 내 얼굴에 닿자 잠시나마 안도감이 들었다.나는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힘겹게 말했다.“전 이번 생에는 엄마와 아무런 접점도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됐어요. 나를 향한 깊고 위대한 사랑... 내가 꿈꿔왔던 어머니의 모습이었어요. 오빠, 나 이제 겨우 엄마한테 다가가려고 했는데... 엄마는 더 이상 안 계셔요. 마음이 답답하고 허무하고 너무 아파요.”석지훈은 나를 품에 꼭 안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구나. 윤아야.”나는 석지훈이 왜 사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의 나는 그의 마음속에서도 같은 고통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나는 흐느끼며 말했다.“오빠 잘못 아니에요.”석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 줬다. 그의 따뜻한 손길에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며 나는 어느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눈을 뜨니 그는 곁에 없었다. 침대 옆에 놓인 그의 휴대폰이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꿈이었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F 국 궁정식 장례복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세수를 했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앳된 티가 남아 있는 하얗고 깨끗한 얼굴이었다.2년이 지났지만 이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 서 있던 가정부는 아래층 로비에 손님들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발코니로 나가보니 아래에는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들고 있었다.저 사람들은 F 국 왕실 주변 인사들로 상당한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마음에 걸려서 우산을 들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뒤뜰로 향했다.뒤뜰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고요해졌다. 성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는 담벼락 아래에 작은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 그 남자아이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나는 몸을 숙여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맞은편에는 비닐 천이 덮여 있었고 그 아래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정말 아름다운 눈이었다. 깊고 고요했다.비록 어린아이였지만 말이다.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이 아이가 앞으로 험난한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물었다.“당신은 누구세요?”아이는 정확한 우리나라 말을 구사했다.게다가 방언을 사용하고 있었다.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나는 이곳의 주인이야.”“거짓말. 이곳의 주인은 공작 부인이에요.”“난 그 사람 딸이야.”내가 대답했다.“아. 그럼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꼬마는 꽤나 까칠했다.게다가 말하는 것을 보니 생각도 또렷하고 전혀 긴장한 기색도 없었다.아이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여기에는 어떻게 있게 된 거니?”아이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렇게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겠다는 생각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나 따라올래?”아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따라온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성의 가정부들이 네가 혼자라고 하더구나. 나를 따라오면 외롭지 않을 거야.”나는 아이에게 집을 주고 싶었다. 마치 엄마가 최욱현에게 집을 주었던 것처럼.아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필요 없어요. 저를 동정하지 마세요.”나는 웃으며 말했다.“동정하는 게 아니야.”나는 우산을 접어 담벼락 옆에 두고 부드럽게 말했다.“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네가 힘들 때 이 우산을 가지고 집사를 찾아가렴. 그러면 집사가 나에게 연락할 거야.”나는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석씨 가문에서
담벼락 너머의 아이는 어머니가 있다고 말했다.나는 차분히 물었다. “그럼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아이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제 엄마는 남의 가정을 파탄 낸 불륜녀였어요. 본처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를 데리고 F 국으로 도망쳐 왔지만,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저를 버렸어요. 돈 많은 F 국 남자가 엄마와 결혼하겠다고 했는데 조건이 저를 버리는 거였거든요. 저는 엄마가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엄마는 동의했어요.”결국 동의했다라...아이는 생각이 또렷했고 말투는 차가웠으며 어른도 갖기 힘든 담담함이 묻어났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더 이상 헛된 발버둥이나 희망을 품지 않는 것 같았다.내가 아이를 위로할 말을 찾고 있는데 아이가 먼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엄마는 저에게 생명을 준 여자니까 원망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나도 아이가 있으니 엄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악독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어머니를 잘 알지 못하니 뭐라 평가할 수 없어 그저 침묵을 지켰다.한참 후에 아이에게 물었다.“너는 몇 살이니?”“연말이면 열두 살이 돼요.”아이가 대답했다.하지만 아이는 겨우 여덟아홉 살처럼 보였다. 아마 오랫동안 영양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일 것이다.나는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갈래?”마음속에 안타까움과 연민이 가득 차올랐다.이렇게 어른스러운 아이를 보니 석씨 가문에서 쫓겨나 떠돌던 석지훈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하지만 이 아이는 석지훈보다 더 비참했다. 완전히 버려졌으니까.게다가 이 아이는 최현욱처럼...최현욱도 최씨 가문에서 버려졌었다.“아니요. 동정은 필요 없어요.”아이는 차라리 부랑아가 될지언정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다.그는 생각이 깊은 아이라서 계속 강요할 수는 없었다.“음, 그럼 생각이 정리되면 나를 찾아와.”나는 비를 맞으며 담벼락을 떠났다. 모퉁이를 돌아서려다가 뒤돌아본 순간, 그 유난히 아름다운 눈
나는 의아하게 그에게 물었다.“누군데?”최욱현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처럼 기뻐하며 어머니를 잃었을 때의 슬픔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 같았다.그는 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문 앞에서 기다렸다.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그는 서둘러 내 손목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 로비에서 나는 석지훈을 보았다. 그는 엄마의 관 옆을 지키고 있었다.나를 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최욱현을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욱현이가 나를 몇 사람에게 데려간다고 하는데 누군지 모르겠어요. 일단 따라가 볼게요.”석지훈이 알아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욱현은 나를 끌고 성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자 그는 집사에게 다급하게 물었다.“사람들은?”“2분 전에 떠났습니다.”최욱현의 표정은 다소 불안해 보였다. 그는 서둘러 집사의 손에 들린 우산을 받아 들고나와 함께 넓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뛰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성문 앞에 서서 한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차에 타려는 것을 보았다.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불렀다.“어머니.”그러자 차에 타려던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보며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나를 뭐라고 부른 거지?”내 앞에 있는 검은 상복을 입은 귀부인은 최욱현의 친어머니인 것 같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조금의 따스함도 없었다.최욱현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귀부인 옆에 있던 남자는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비위를 맞추듯 물었다.“욱현아,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니?”그 말을 듣자 최욱현은 흥분된 어조로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이쪽은 연수아, 어머니의 딸이에요. 제 가족이죠.”최욱현이 말한 어머니는 내 엄마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남자는 웃으며 말했다.“그래, 욱현의 가족이구나.”남자의 얼굴에는 최욱현에 대한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최욱현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귀부인을 바라보았다. 귀부인은 어린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최욱현은 성을 떠났지만 엄마의 장례는 주관할 사람이 필요했다. 석지훈은 나와 2분 정도 함께 있다가 로비로 돌아갔다.나는 성문 앞에 서서 방금 전 슬픈 모습으로 떠난 최욱현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우산을 쓰고 그 길을 따라 그를 찾아 나섰지만 긴 도로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걱정스러운 마음에 우산을 쓰고 곳곳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근처 거리에서 그를 찾았다. 그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F 국 겨울의 플라타너스 낙엽이 그의 주변에 떨어져 있어 쓸쓸해 보였는데 비까지 맞고 있어서 더 외로워 보였다.최욱현은 엄청 외로워 보였다. 진짜 외로워 보였다.이것은 그가 나에게 준 착각이었다.그는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채 폭우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우산의 대부분을 그의 머리 위로 펼쳐 주었다. 내 어깨는 빗물에 젖었다. 이상함을 느낀 최욱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자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붉어진 눈으로 물었다.“수아야, 왜 여기까지 따라왔어?”나는 그가 안쓰러웠지만 그가 동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방금 전 그 아이가 말했던 것처럼.나를 동정하지 마세요...최욱현 또한 동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나는 생각하다가 말했다.“비를 맞고 있으니까.”최욱현은 한숨을 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그의 옆에 앉아 다른 화제를 꺼냈다.“윤아와 윤민이는 이제 석 달만 있으면 돌이네. 애들 진짜 빨리 크지. 요즘 윤민이는 할머니라고 부른 적 있어?”나는 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었다.그리고 두 아이를 통해 그에게 따스함을 전하려는 것이었다.최욱현은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어. 어머니께서 윤민에게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 윤민이는 똑똑해서 금방 할머니라는 말을 배우더라. 어머니가 그때 진짜 좋아하셨는데.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 처음 봤어. 덕분에 병세도 많이 호전되셨지. 나는 윤민이를 며칠 더 있게 하려고 했는데 어머니는 네가 애를 보고 싶어 할까 봐 운성으로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