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인생.”내 인생에 감회가 있을 게 뭐가 있지?나는 그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내 어깨를 문지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비록 넌 석씨 가문의 자녀로, 어릴 때부터 권력과 부를 누렸지만 사실 네 인생은 고난이 많았잖아. 어쩌면 세상의 모든 고통을 거의 다 겪은 것 같아. 세상은 너한테 잔인하면서도 자상하네.”세상이 잔인한 건 내가 고난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고 세상이 자상한 건 내가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세상에 완벽한 건 없었다.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하지만 나는 이제 지난 과거를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면 그만이다.“괜찮아요, 원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에요. 난 지금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에요. 특히 우리 아이들이 결혼하는 모습까지 보고 싶어요. 가끔은 윤민이가 오빠 성격을 닮지 않을까 싶어요. 오빠를 닮길 바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그는 목구멍 깊숙이에서 한 마디를 내뱉었다.“응?”그의 쌀쌀한 성격 탓에 만약 석윤민이 그를 닮는다면 여자 친구가 고생을 많이 할 것 같았다. 적어도 그의 마음을 얻는 게 쉽지 않을 거다. 나 역시 석지훈의 마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나는 대충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내가 말을 꺼내지 않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너한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어.”1년 전, 우리는 캠핑하러 나웨이에 갔다. 천문 망원경까지 샀었다. 그때 오로라를 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하지만 그날 밤, 우리는 결국 오로라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때 조금 실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렸다. 그러나 석지훈은 그 일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그리고 지금 우리는 아이스랜드에 있었고 4월은 오로라를 보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차는 북쪽을 향해 계속 달렸다. 길은 멀었고 나는 몸이 나른해져서 그의 품에 기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어. 시간 되면 F국으로 뵈러가자.”“네, 그래요.”나는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었다.밤은 점점 깊어졌고 아이스랜드의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오늘은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요?”“별일 없으면 무조건 볼 수 있을 거야.”캠핑카 옆에는 흰색 천문 망원경이 준비되어 있었고 소파도 하나 놓여 있었다. 대개 두 사람이 누울 정도의 크기였고 위에는 하얀 담요가 놓여 있었다. 나는 포근해 보이는 모습에 얼른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윤 비서님이 준비한 거예요?”뒤에 서 있던 윤승민이 웃으며 말했다.“아가씨가 추울까 봐 준비해 뒀어요.”“참 배려 깊으신 분이네요.”나는 신발을 벗고 소파에 누웠다. 그는 윤승민에게서 새 양말 한 켤레를 건네받아 나한테 신겨줬다. 갑자기 마음도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윤아야, 아직도 추워?”이토록 세심하게 챙겨주는데 추울 리가.“감사해요, 둘째 오빠.”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별것도 아닌 걸 뭐.”뭔가 말하려던 찰나, 최욱현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석지훈의 기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왔다.나는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옆으로 걸어갔다. 전화를 받자 최욱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아이는 비서한테 보냈어. 넌 언제 돌아올 거야?”“며칠 더 있다가.”“그럼 운성시에서 기다릴게.”나는 반문했다.“날 기다려서 뭐 해?”“얼굴 한 번 보고 가려고.”나는 별로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아 단번에 거절했다.“어머니가 기다릴 거야.”그는 내 말 뜻을 알아차리고는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날 만나고 싶지 않은 거야?”“아니야, 그냥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어.”그는 또 내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운성시.여기는 연수아가 어릴 때부터 자란 곳이다. 그래서 최욱현은 이곳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비록 연수아는 그를 오빠로 인정하
최욱현은 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굳이 그의 화를 돋워서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이불 속으로 몸을 움츠리며 들어갔다. 석지훈은 그런 나를 보더니 다정하게 말했다.“네가 고양이야? 근데 누구야? 무슨 일 있어?”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욱현이에요. 윤민이를 운성시까지 데려다줬어요.”최욱현을 언급하자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욱현 씨가 너를 가족처럼 여기는 것 같아. 그러니까 평소에 너무 멀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항상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성격이다 보니 멀리할수록 오히려 네가 더 위험할 수 있어.”나는 놀라서 물었다.“예전에는 욱현이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요.”그는 몸을 느긋하게 소파에 기댄 채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윤승민은 눈치채고 얼른 경호원들과 함께 떠났다. “어쨌든 위험한 사람은 맞아. 성격이 변덕스럽고 결과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잖아. 예전에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던 건 너한테 이토록 집착할 줄 몰랐기 때문이야. 근데 이제는... 너의 어머니랑 가까운 사람이잖아. 만약 네 어머니가 떠나면 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너를 유일한 가족으로 여기겠지.”나는 몸을 곧게 펴고 망원경을 통해 저 멀리 내다보았다. 귓가에 석지훈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윤아야,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마주하는 게 나아.”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건 오직 빛나는 별들뿐이었다. “알겠어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최욱현은 가족을 원했다. 나는 그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석지훈은 나를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뭐가 보여?”“별이요. 하늘에 별이 가득해요.”별들은 까만 밤하늘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그는 다시 물었다.“핀란드와 비교하면 어때?”핀란드는 석지훈이 유일하게 고향으로 여기는 곳이다.하지만 그는 나와 함께 운성시에 정착했다.“다 아름다워요.”“응, 핀란드는 사
“사모님, 암 말기입니다...”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뭐라고요?”의사는 진단서 위에 팔을 올려놓고 또박또박 말했다.“사모님, 2년 전 유산했을 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후에 감염까지 된 바람에 자궁에 암 덩어리가...”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의사의 말을 가로챘다.“그럼 얼마나 남았나요?”“암세포가 퍼져서 길어야 석 달 정도...”그 후로 의사가 더 뭐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가 윙 했다. 머릿속에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해서 맴돌았다......그날 저녁, 고씨 가문 별장.조금 전 나와 뜨거운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바로 나의 남편 고현성이다.결혼 3년 동안 그는 매번 별장으로 돌아와 나와 관계를 가진 후 욕실로 들어가서 씻었다. 마치 더러운 뭔가를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후에는 매정하게 나가버렸다.별장으로 들어와서부터 나갈 때까지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그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후 양복을 갈아입고 또다시 나가려고 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고현성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고현성이 입술을 깨물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그의 무관심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결국 이 한마디만 했다.“조심해서 가요.”아래층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의 검은색 마이바흐를 내려다보면서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성이 전화를 받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나와 고현성은 올해로 결혼한 지 3년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그 여자의 목숨으로 고현성을 협박하면서 나와의 결혼을 강요했다.고현성은 반항도 해봤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고 나와 결혼했다.3년 동안 나를 대하는 고현성의 태도는 늘 차가웠고 잔인하기만 했다. 심지어 나와 잠자리를 할 때도 그 여자의 이름 임지혜를 부르곤 했다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또 무슨 수작이야?”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네. 나랑 연애해요.”“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왜 그러시죠?”“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고현성은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내가 저녁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 내버려 둔 탓에 음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입맛이 없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밥을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고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연수아,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고현성의 시선이 음식 쪽으로 향했다.“다 네가 한 거야?”고현성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설거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낮에 현성 씨한테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겠냐고 물어봤었잖아요. 들어오겠다고 해서 현성 씨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한상 차렸죠.”고현성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나는 수저를 치우던 동작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눈 사이에 예전에 느꼈던 따뜻함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침묵을 택했다. 아무 말 없이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위층을 올려다보며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보니 고현성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리 위에 얇은 금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나는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다가 욕실 문을 연 순간 짙은 기운이 날 감싸 안았다.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침대까지 끌려갔다. 마지막에 고현성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혜가 그러는데 3년 전에 네가 강요해서 미국으로 간 거래.”고현성은 이미 내가 그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는 3년 전에 그와 6억 원 사이에서 고민도 없이 6억 원을 선택했다.그렇다. 3년 전에 내가 임지혜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만약 임지혜가 고현성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고씨 가문과의
3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생명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소원은 고현성과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고현성이 나를 조금만 달래줘도 나는 아마 날뛰듯이 기뻐할 것이다.그나저나 나는 평생 귀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여 임지혜를 자주 질투했고 미친 것처럼 고현성을 욕심냈다.고현성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해도 기꺼이 당해주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보잘것없고 비굴한 존재였다.나는 항상 자신을 낮추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고현성은 평소처럼 그냥 휙 가버린 게 아니라 샤워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회사 서류를 처리했다.나는 잠옷을 입고 가볍게 물었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나는 시력이 좋아 그의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서류를 정확히 보았다. 전부 예전에 선양 그룹과 체결했던 계약이었다.최근 선양 그룹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들이 줄줄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게 다 고현성이 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 않았다. 그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길 바랐다.고현성이 무시하자 나도 더는 방해하지 않고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혼에 관해 그와 상의하려는데 임지혜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임지혜의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현성아, 살려줘. 그 여자가 사람을 시켜서 날 납치했어. 내 몸을 더럽혀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여자로 만들겠대.”고현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네가 시킨 거야?”나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예요?”고현성이 나가려고 하자 나는 달려가서 그를 잡았다. 그러고는 용기 있게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물었다.“현성 씨는 왜 그 여자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요? 자작극일 수도 있잖아요.”“난 지혜를 잘 알아. 걔는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나는 순간 멈칫했다.‘너 같
최욱현은 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굳이 그의 화를 돋워서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이불 속으로 몸을 움츠리며 들어갔다. 석지훈은 그런 나를 보더니 다정하게 말했다.“네가 고양이야? 근데 누구야? 무슨 일 있어?”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욱현이에요. 윤민이를 운성시까지 데려다줬어요.”최욱현을 언급하자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욱현 씨가 너를 가족처럼 여기는 것 같아. 그러니까 평소에 너무 멀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항상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성격이다 보니 멀리할수록 오히려 네가 더 위험할 수 있어.”나는 놀라서 물었다.“예전에는 욱현이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요.”그는 몸을 느긋하게 소파에 기댄 채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윤승민은 눈치채고 얼른 경호원들과 함께 떠났다. “어쨌든 위험한 사람은 맞아. 성격이 변덕스럽고 결과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잖아. 예전에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던 건 너한테 이토록 집착할 줄 몰랐기 때문이야. 근데 이제는... 너의 어머니랑 가까운 사람이잖아. 만약 네 어머니가 떠나면 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너를 유일한 가족으로 여기겠지.”나는 몸을 곧게 펴고 망원경을 통해 저 멀리 내다보았다. 귓가에 석지훈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윤아야,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마주하는 게 나아.”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건 오직 빛나는 별들뿐이었다. “알겠어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최욱현은 가족을 원했다. 나는 그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석지훈은 나를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뭐가 보여?”“별이요. 하늘에 별이 가득해요.”별들은 까만 밤하늘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그는 다시 물었다.“핀란드와 비교하면 어때?”핀란드는 석지훈이 유일하게 고향으로 여기는 곳이다.하지만 그는 나와 함께 운성시에 정착했다.“다 아름다워요.”“응, 핀란드는 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어. 시간 되면 F국으로 뵈러가자.”“네, 그래요.”나는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었다.밤은 점점 깊어졌고 아이스랜드의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오늘은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요?”“별일 없으면 무조건 볼 수 있을 거야.”캠핑카 옆에는 흰색 천문 망원경이 준비되어 있었고 소파도 하나 놓여 있었다. 대개 두 사람이 누울 정도의 크기였고 위에는 하얀 담요가 놓여 있었다. 나는 포근해 보이는 모습에 얼른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윤 비서님이 준비한 거예요?”뒤에 서 있던 윤승민이 웃으며 말했다.“아가씨가 추울까 봐 준비해 뒀어요.”“참 배려 깊으신 분이네요.”나는 신발을 벗고 소파에 누웠다. 그는 윤승민에게서 새 양말 한 켤레를 건네받아 나한테 신겨줬다. 갑자기 마음도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윤아야, 아직도 추워?”이토록 세심하게 챙겨주는데 추울 리가.“감사해요, 둘째 오빠.”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별것도 아닌 걸 뭐.”뭔가 말하려던 찰나, 최욱현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석지훈의 기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왔다.나는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옆으로 걸어갔다. 전화를 받자 최욱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아이는 비서한테 보냈어. 넌 언제 돌아올 거야?”“며칠 더 있다가.”“그럼 운성시에서 기다릴게.”나는 반문했다.“날 기다려서 뭐 해?”“얼굴 한 번 보고 가려고.”나는 별로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아 단번에 거절했다.“어머니가 기다릴 거야.”그는 내 말 뜻을 알아차리고는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날 만나고 싶지 않은 거야?”“아니야, 그냥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어.”그는 또 내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운성시.여기는 연수아가 어릴 때부터 자란 곳이다. 그래서 최욱현은 이곳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비록 연수아는 그를 오빠로 인정하
“네 인생.”내 인생에 감회가 있을 게 뭐가 있지?나는 그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내 어깨를 문지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비록 넌 석씨 가문의 자녀로, 어릴 때부터 권력과 부를 누렸지만 사실 네 인생은 고난이 많았잖아. 어쩌면 세상의 모든 고통을 거의 다 겪은 것 같아. 세상은 너한테 잔인하면서도 자상하네.”세상이 잔인한 건 내가 고난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고 세상이 자상한 건 내가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세상에 완벽한 건 없었다.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하지만 나는 이제 지난 과거를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면 그만이다.“괜찮아요, 원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에요. 난 지금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에요. 특히 우리 아이들이 결혼하는 모습까지 보고 싶어요. 가끔은 윤민이가 오빠 성격을 닮지 않을까 싶어요. 오빠를 닮길 바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그는 목구멍 깊숙이에서 한 마디를 내뱉었다.“응?”그의 쌀쌀한 성격 탓에 만약 석윤민이 그를 닮는다면 여자 친구가 고생을 많이 할 것 같았다. 적어도 그의 마음을 얻는 게 쉽지 않을 거다. 나 역시 석지훈의 마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나는 대충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내가 말을 꺼내지 않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너한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어.”1년 전, 우리는 캠핑하러 나웨이에 갔다. 천문 망원경까지 샀었다. 그때 오로라를 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하지만 그날 밤, 우리는 결국 오로라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때 조금 실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렸다. 그러나 석지훈은 그 일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그리고 지금 우리는 아이스랜드에 있었고 4월은 오로라를 보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차는 북쪽을 향해 계속 달렸다. 길은 멀었고 나는 몸이 나른해져서 그의 품에 기댄
윤승민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는 석지훈의 비서로서 분명히 알 텐데 나한테 숨기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내 호기심은 더 커졌다.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윤승민은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비록 급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궁금한 마음에 계속해서 그를 귀찮게 했다.“대체 어디로 가는 건데요?”그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안 알려주면 지훈 씨한테 이를 거예요.”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말하면 더 빨리 죽겠어요. 제가 대표님의 행방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나는 그가 그렇게 충실할 리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만 포기하기로 했다. 문을 나서는 순간 최욱현이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윤민이는 잘 돌아갔어?”“응, 어머니가 윤민이랑 헤어지기 아쉬워하셔서 며칠 더 있다가 왔어. 근데 어머니도 윤민이를 곁에 계속 두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은지 얼른 나한테 데려가라고 재촉하더라. 방금 운성시에 도착했어. 넌 어디야? 찾으러 갈게.”“나 지금 아이스랜드야. 윤민이는 우리 엄마, 아빠한테 보내줘.”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네 엄마, 아빠라니?”“응, 양 부모님.”그때 나는 오두막과 가까운 도로에 고급 세단 한 대가 멈춰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뒤에는 작은 승용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그들은 모두 석지훈의 경호원들이었다.차 문이 열려 있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기다란 다리가 시선을 끌었다.심지어 나를 안은 채 그 기다란 다리로 걸어가는 모습조차 상상할 수 있었다.전화 너머로 최욱현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부모님이라니?”나는 의아해서 물었다.“왜?”그는 거침없이 말했다.“네 엄마는 우리 어머니 한 명뿐이야.”“...”나는 그가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쓸 줄은 몰랐다.어떻게 대답할지 몰라서 이내 대화를 돌렸다.“나 지금 국내에 없으니까 아이는 내 비서한테 맡겨줘.”그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윤 비서는 약간 멍해 있는 나를 보
진유겸은 이런 상황에서도 최희연을 협박하고 있었다.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이제 어떡해?”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유겸 씨는 항상 내 약점을 알고 있어. 내가 마음이 약하다는 것도, 하지만 더 이상 굴복하고 싶지 않아.”그리고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게. 예전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알려줘야지. 됐어, 우리는 밥 먹으러 가자.”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짱을 꼈다. 그녀가 혼자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만약 그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왕자현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마음속에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있었다.최희연은 내 어깨에 떨어진 눈송이를 털어내며 말했다.“저녁 먹고 자현 씨는 시내로 가야 해, 나도 따라가려고. 너랑 지훈 씨는 여기 남아서 쉬어. 내일 아침에 오두막으로 돌아갈 거니까 그때 구경시켜 줄게... 아니다, 지훈 씨가 있으니 나랑 놀기 어렵겠네.”“얼른 가. 우리 신경 쓰지 말고.”“나 빨리 갔으면 좋겠지?” 그녀가 말했다.“그럴 리 없잖아.”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거실에서 두 남자는 체스를 두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누가 더 잘하세요?”왕자현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수아 씨도 체스를 둘 줄 아세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이거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아빠가 종종 삼촌이랑 체스를 두셨거든요. 그래서 곁에서 좀 봐왔어요.”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분은 약간 부족하시네요.”약간 부족하다는 건 왕자현보다는 체스 실력이 낮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석지훈은 바로 체스판을 밀어버렸다.왕자현은 다소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화났어요?”나는 왕자현이 일부러 화를 돋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석지훈은 싸늘한 눈빛으로 왕자현을 쳐다보았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최희연은 분위기를 풀어주며 말했다.“얼른 밥 먹어요.”나는 배 불리
석지훈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여전히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아마도 내가 왕자현을 칭찬한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그는 내가 왕자현의 외모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석지훈은 내가 늘 그의 미모에 유혹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는 차갑게 나를 보며 물었다.“왜?”나는 일부러 물었다.“나한테 화났어요?”그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니.”또 아니란다.나는 다시 물었다.“혹시 질투하는 거예요?”그는 차갑게 말했다.“아니.”“내 마음속에는 오빠가 제일 잘생겼어요!”나는 발끝을 세워 석지훈의 턱에 입을 맞춘 후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쥐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내 마음속에선 오빠가 제일 멋있어요! 아무도 오빠랑 비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오빠가 잘생기지 않았더라도 난 오빠를 좋아했을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건 오빠라는 사람이지 오빠의 외모가 아니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석지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거짓말.”그가 이렇게 대답한다는 것은 화가 풀렸다는 의미였다.나는 다시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중심을 잃고 몸이 살짝 기울어지자 석지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왕자현의 저택의 따뜻한 방에서...최희연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온몸에 피로를 느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석지훈은 방을 나가 왕자현을 만나러 갔다.왕자현이 그에게 문자를 보냈기 때문이다.[석지훈, 거실에서 얘기 좀 해.]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나는 자현 씨의 아내이니 조만간 그와 관계를 갖게 될 거야.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잖아. 나 처녀막 수술을 하고 싶어.”나는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최희연이 먼저 말했다.“내가 이러는 건 뭔가를 숨기려는 게 아니야. 그는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도, 내가 낙태를 했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두 남자를 만났다는 것도
석지훈은 갑자기 나를 놓아주고 침대 옆에 가서 앉았다. 다리 한쪽을 의자에 올리고 팔꿈치를 무릎에 괴는 모습이 평소와 달리 건들거렸다.게다가 검은 코트 차림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그가 화가 났고 내가 달래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니면 내가 그에게 사과해야 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나는 일부러 그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오히려 그를 놀리고 싶었다.나는 그의 옆에 가서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갔다. 방은 매우 따뜻했다. 바깥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방안은 봄처럼 따스했다. 나는 조용히 패딩을 벗었다.안에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나는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석지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정말 잘생겼어?”석지훈은 아직도 그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잘생기지 않았어요? 왕자현 씨는 분위기가 끝내주잖아요. 정말 멋있어 보이던데!”석지훈: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발목을 잡고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내 입술에 키스했다.“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밖에 나갔다 온다고? 이건 너무하잖아!’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오빠.”그는 곁눈질로 나를 차갑게 쳐다보더니 흘끗 보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나: “...”그는 고의로 나를 벌주는 것이었다석지훈은 질투하는 것도 모자라서 복수까지 하는 것이었다.나는 침대에서 뒹굴며 그가 언제 방으로 돌아올지 생각했다.하지만 문 앞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실망감이 점점 커져서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석지훈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그가 왕자현의 거실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거실에는 값비싸 보이는 피아노가 한 대 놓여있었다.왕자현도 거기에 있었고 차를 끓이고 있었다.내가 들어가자 두 남자는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석지훈은 미간을 찌
“희연아, 남편 정말 잘 얻었네!”최희연은 농담처럼 물었다.“부럽지?”나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얀 도포를 입은 절세 미남이라, 정말 너무 완벽해. 모든 여자들의 이상형이잖아. 쯧, 진짜 부럽다!”“칭찬도 잘한다!”내가 왕자현을 이렇게 칭찬한 건 최희연이 그에게 관심을 좀 더 가졌으면 해서였다. 왕자현은 그녀가 기댈 만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리고 왕자현은 이런 칭찬을 받을 만했다.내가 통나무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왕자현은 연주를 멈추고 나를 보며 웃었다.“연수아 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저를 아세요?”“네. 희연이 절친이잖아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일어서더니 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내 옆을 보고 웃었다.“석 대표님도 와 계시는데.”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문 옆 복도에서 석지훈이 두 손을 등 뒤로 모으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위치는 마침 왕자현과 마주 보고 있었는데 마침 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나는 방금 전까지 그가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게다가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이 어두워 보였다.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지훈 씨, 왔어요.”그는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내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가 나를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 왕자현과 최희연의 앞에서 내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왕자현이 말했다.“연수아 씨, 희연이가 그러는데 두 분 여기서 며칠 묵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방금 손님방을 하나 정리해 두었어요. 뒤편에 있으니 사람을 시켜 안내해 드리죠.”왕자현은 사람을 시켜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석지훈은 앞서 걸었고 나는 1미터쯤 뒤에서 따라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에게 거칠게 밀쳐져 문틀에 부딪혔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나는 당황하며 물었다.“왜 그래요?”석지훈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나는 그가 이런 모습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내가 그에게
석지훈이 떠나고 30분쯤 지났을까, 내가 휴대폰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최희연이 온천 회관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내 몸에 남은 흔적을 보고는 일부러 놀리듯 물었다.“방금 온천 옆에서 남자 바지랑 셔츠를 봤는데 어떤 차가운 남자 옷 같더라! 쯧쯧, 내가 눈치 없이 온 거 아니야?”나는 일어나 최희연이 보는 앞에서 옷을 입으며 되받아쳤다.“너랑 왕자현 씨는...”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최희연은 황급히 말을 막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 나랑 자현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그런 쪽으로는 아무 말도 안 했고 포옹이나 손잡는 것도 한 번도 없었어. 그는 항상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 그리고 내 얼굴은... 어쨌든 그는 석지훈과 달라!”나는 웃으며 물었다.“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다 네가 말한 거잖아. 근데 왜 갑자기 지훈 씨를 그 사람이랑 비교하는 건데? 솔직히 말해 봐. 만약 그가 너를 원한다면, 넌 그에게 응할 거야?”내 질문을 들은 최희연은 잠시 멍해졌다.“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그가 원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사람이고 나는 왕씨 가문의 하나뿐인 안주인이니까.”나는 그녀 앞에서 한 바퀴 돌며 일부러 물었다.“희연아, 너에게 그는 그저 이용 가치가 있는 관계일 뿐이야?”최희연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 그래. 이용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였어. 아마도 은혜를 갚기 위해서겠지!”나는 호기심에 다시 물었다.“무슨 은혜?”“내가 예전에 그를 구해준 적이 있어. 그가 운 좋게 나에게 구출된 게 아니라 내가 운 좋게 그를 구해준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그는 내 삶에 나타난 지 겨우 5년밖에 안 됐지만 난 왠지 모르게 그를 전적으로 믿어. 세상에서 날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이야. 이런 믿음은 정말 이상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인연이라는 게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