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암 말기입니다...”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뭐라고요?”의사는 진단서 위에 팔을 올려놓고 또박또박 말했다.“사모님, 2년 전 유산했을 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후에 감염까지 된 바람에 자궁에 암 덩어리가...”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의사의 말을 가로챘다.“그럼 얼마나 남았나요?”“암세포가 퍼져서 길어야 석 달 정도...”그 후로 의사가 더 뭐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가 윙 했다. 머릿속에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해서 맴돌았다......그날 저녁, 고씨 가문 별장.조금 전 나와 뜨거운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바로 나의 남편 고현성이다.결혼 3년 동안 그는 매번 별장으로 돌아와 나와 관계를 가진 후 욕실로 들어가서 씻었다. 마치 더러운 뭔가를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후에는 매정하게 나가버렸다.별장으로 들어와서부터 나갈 때까지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그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후 양복을 갈아입고 또다시 나가려고 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고현성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고현성이 입술을 깨물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그의 무관심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결국 이 한마디만 했다.“조심해서 가요.”아래층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의 검은색 마이바흐를 내려다보면서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성이 전화를 받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나와 고현성은 올해로 결혼한 지 3년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그 여자의 목숨으로 고현성을 협박하면서 나와의 결혼을 강요했다.고현성은 반항도 해봤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고 나와 결혼했다.3년 동안 나를 대하는 고현성의 태도는 늘 차가웠고 잔인하기만 했다. 심지어 나와 잠자리를 할 때도 그 여자의 이름 임지혜를 부르곤 했다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또 무슨 수작이야?”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네. 나랑 연애해요.”“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왜 그러시죠?”“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고현성은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내가 저녁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 내버려 둔 탓에 음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입맛이 없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밥을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고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연수아,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고현성의 시선이 음식 쪽으로 향했다.“다 네가 한 거야?”고현성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설거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낮에 현성 씨한테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겠냐고 물어봤었잖아요. 들어오겠다고 해서 현성 씨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한상 차렸죠.”고현성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나는 수저를 치우던 동작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눈 사이에 예전에 느꼈던 따뜻함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침묵을 택했다. 아무 말 없이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위층을 올려다보며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보니 고현성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리 위에 얇은 금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나는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다가 욕실 문을 연 순간 짙은 기운이 날 감싸 안았다.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침대까지 끌려갔다. 마지막에 고현성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혜가 그러는데 3년 전에 네가 강요해서 미국으로 간 거래.”고현성은 이미 내가 그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는 3년 전에 그와 6억 원 사이에서 고민도 없이 6억 원을 선택했다.그렇다. 3년 전에 내가 임지혜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만약 임지혜가 고현성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고씨 가문과의
3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생명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소원은 고현성과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고현성이 나를 조금만 달래줘도 나는 아마 날뛰듯이 기뻐할 것이다.그나저나 나는 평생 귀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여 임지혜를 자주 질투했고 미친 것처럼 고현성을 욕심냈다.고현성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해도 기꺼이 당해주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보잘것없고 비굴한 존재였다.나는 항상 자신을 낮추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고현성은 평소처럼 그냥 휙 가버린 게 아니라 샤워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회사 서류를 처리했다.나는 잠옷을 입고 가볍게 물었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나는 시력이 좋아 그의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서류를 정확히 보았다. 전부 예전에 선양 그룹과 체결했던 계약이었다.최근 선양 그룹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들이 줄줄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게 다 고현성이 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 않았다. 그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길 바랐다.고현성이 무시하자 나도 더는 방해하지 않고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혼에 관해 그와 상의하려는데 임지혜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임지혜의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현성아, 살려줘. 그 여자가 사람을 시켜서 날 납치했어. 내 몸을 더럽혀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여자로 만들겠대.”고현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네가 시킨 거야?”나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예요?”고현성이 나가려고 하자 나는 달려가서 그를 잡았다. 그러고는 용기 있게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물었다.“현성 씨는 왜 그 여자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요? 자작극일 수도 있잖아요.”“난 지혜를 잘 알아. 걔는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나는 순간 멈칫했다.‘너 같
임지혜는 나를 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진짜 내가 한 짓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고현성이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고현성의 가슴팍은 따뜻해서 늘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임지혜도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고현성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내 남편은 임지혜를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괜찮아. 내가 있는 한 절대 너한테 무슨 짓 하지 못해.”고현성의 다정함은 임지혜만의 것이었다. 나에게 말할 땐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병원에는 왜 왔어? 당장 집에 가지 못해?”임지혜의 앞에서 그는 늘 나를 집에 돌려보냈다.나는 시선을 거두었고 고현성이 임지혜에게 다정하게 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임지혜는 고현성을 믿고 뜨거운 물을 나의 얼굴에 확 뿌렸다. 나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부딪힌 바람에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현성 씨.”고현성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임지혜를 째려보고는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정교하게 한 메이크업이 번지면서 한쪽 얼굴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점심에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였고 손톱으로 긁으면서 더 심해졌다.고현성은 거즈와 알코올을 가져와 말없이 소독해주었다. 너무도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가 나에게 건네는 잠깐의 따뜻함을 만끽했다.검은 머리도 다 젖고 말았다. 나는 고현성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 씨.”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왜?”나는 욕심을 드러내며 물었다.“내가 연씨 가문을 현성 씨한테 주고 이혼도 하겠다고 하면 나랑 연애해볼 생각 있어요?”고현성이 움직임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물었다.“어제 지혜가 귀국한 다음부터 계속 이상했어. 대체 뭐 하자는 거야?”고현성은 나에게 인내심이 별로 없다고 얘기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만 봐도 지금
나는 꿈을 꾸었다. 그곳은 연씨 가문 별장이었고 집에 부모님과 고현성이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23살 생일 파티를 어떻게 할까 상의하고 있었다.내가 소파 옆에 서 있는데 고현성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빨간색 좋아하니까 빨간 장미꽃을 세팅하는 건 어때요? 제가 피아노도 직접 연주할게요.”고현성의 표정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창밖의 햇살이 그에게 비추면서 더욱 멋있어 보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미간을 어루만지려 했다. 그런데 손가락은 그를 뚫고 허공에 머물렀다. 당황한 내가 계속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내가 목놓아 울부짖던 그때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병실에 누워있었고 낮에 입었던 밝은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옆에는 싸늘한 표정의 고현성이 서 있었다.꿈속에서 다정했던 고현성을 봤던 탓인지 차가운 그를 차마 볼 수가 없어 두 눈을 감았다.“아까 무슨 일 있었어요?”고현성은 시선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고승철이 갑자기 병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고현성을 째려보면서 화를 냈다.“방금 넘어져서 얼굴이 피범벅이 됐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 여자만 아니었더라도 병원에 와서 이런 일 당하지 않았을 텐데. 수아야, 너 평소에 현성이를 너무 풀어줬어. 남편을 잘 단속했어야지.”‘남편이라... 방금 이혼하자고 했는데.’나는 고현성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고 아버지의 얘기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웃으면서 고승철에게 말했다.“아버님, 우리 이혼했어요.”그 소리에 고현성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고승철도 놀란 눈치였다. 다행히 내가 낮에 귀띔이라도 한 덕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낮에 그 얘기를 꺼내더니 벌써 이렇게 빨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빠른가요? 현성 씨는 3년 전에 이미 이혼하고 싶어 했어요. 지금까지 끌어도 아무도 득을 본 사람이 없고요. 아 참, 전 사업 머리가 없어서 선양 그룹이
운성시의 하늘에 흰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대지를 하얀색으로 뒤덮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는 안에 금색 롱원피스를 입었고 밖에는 하얀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거기에 예쁜 실버 귀걸이를 매치했고 메이크업까지 한 채 길거리를 목적 없이 걸어 다녔다.운성시는 아주 시끌벅적했지만 나는 외톨이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방황하듯 사람들 사이에 서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찬바람이 스치면서 눈꽃이 얼굴에 내려앉아도 전혀 춥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평범하고 키도 평범한 한 사람을 따라갔다.그 사람이 담배를 피우던 그때 나는 용기 내어 다가가 은행 카드를 건네면서 부탁했다.“내가 10억 원 줄 테니까 나랑 3개월만 연애할래요?”그는 마치 바보를 쳐다보듯 나를 보았다.“미안해요. 난 여자 친구가 있어요.”혼자 걸어 다니는 걸 보고 용기 내서 다가간 것이었는데...“알겠어요. 괜찮아요.”나는 실망한 얼굴로 발걸음을 돌리다가 또 다른 평범한 남자를 찾았다. 사실 나 정도 얼굴이라면 남자들이 거절할 리가 없었고 게다가 10억으로 유혹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그들은 되레 날 미친 사람 취급했다.“나랑 연애할래요?”“머리가 어떻게 됐어요? 가족한테 연락해 줄까요?”나는 멋쩍게 웃었다.“아닙니다. 다른 사람 찾아볼게요.”또 다른 사람을 잡고 물었다.“나랑 연애할래요?”“미안해요...”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제대로 된 연애가 하고 싶었고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 왜냐하면 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느낌이 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행복이라는 게 대체 어떤 걸까?내가 해본 거라곤 임지혜를 미친 듯이 질투한 것뿐이었다.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나랑 연애할래요?”그런데 그때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진짜 언니였어요?”내가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고씨 가문 사람 고민영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고현성이 싸늘하게 서 있었다.나는 민망함이 극에 달했고 고민영이 놀란 기색이 역력한
그는 방금 일어난 소동을 눈여겨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다정하게 물었다.“집에 갈래요?”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그런데 먼저 친구랑 놀다가 저녁쯤에 돌아갈게요.”왕자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조심하고.”그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사라졌다.그녀가 무사하면 안심이 된 듯했다.최희연은 공항을 나가면서 차 안에서 걱정하듯 물었다.“왜 갑자기 아이스랜드에 왔어? 무슨 일이 있어?”나를 잘 아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최희연 역시 공감하며 말했다.“유겸 씨도 성격이 차갑고 말이 없는 편이잖아. 근데 지훈 씨는 성격이 차가울 뿐 절대로 널 배신하지 않을 거야. 아까도 봤지? 유겸 씨는 나한테 이렇게까지 상처 주잖아”최근 뭔가를 깨달은 듯 최희연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이 따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정말 치유받는 기분이야. 이제는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마음 상할 일도 없어. 예전처럼 불안하게 살지 않아도 되 유겸 씨가 언제 나를 떠날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왜냐하면 진유겸은 이미 그녀를 떠나버렸고그녀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쉬며 나를 위로했다.“지금은 지훈 씨 생각하지 마. 나랑 아이슬란드에서 재밌게 놀다 가자. 그리고 저녁에는 온천에 몸도 담그고, 그나저나 3월 초라 오로라를 보기에 딱 좋은 시기야.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오두막에서 자자.”나는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응, 네 말대로 하자.”그녀는 나를 시내로 데려가서 옷 한 벌을 선물해 줬다. 그리고 차를 렌트해 근처 온천회관으로 데려갔다.그녀는 옷을 벗자 내 배에 드러난 상처를 보고는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최희연은 따뜻한 손바닥으로 살며시 배의 흉터를 만졌다. 나는 조금 간지러워서 이내 뒤로 물러섰다.“자궁을 절제했어.”그녀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언제 한 거야?”“반 달 전 일
나는 아파트로 돌아가 두툼한 패딩으로 갈아입었다. 원래는 직접 F국으로 가서 석윤민을 데려올 계획이었지만 결국 아이스랜드로 가서 최희연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어디를 가든 운성시를 떠나면 그만이었고 석지훈을 보고 싶지 않았다.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났다. 비서에게도 비밀로 했고 비행기 티켓도 혼자서 예매했다. 비행기 탑승 전, 최희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그녀는 놀라서 답장을 보내왔다.[공항에서 기다릴게!]공항에 도착했을 때 진유겸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는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미간을 띠푸린 채 핸드폰을 꺼내 석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여자는 이제 안 챙길 거야?”전화 너머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어딘데?”“아이스랜드.”진유겸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이스랜드에 도착한 순간 진유겸이 석지훈에게 내 행방을 알려준 것이다.석지훈의 말투를 듣는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기억을 되찾은 게 분명했다. 나는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솟은 채 진유겸을 향해 소리쳤다.“왜 쓸데없이 간섭하고 그러세요?”그는 성격이 급해서인지 나를 쏘아보더니 곧바로 최희연을 향해 물었다.“희연아, 지금 너한테 두 가지 선택이 있어. 나랑 순순히 따라갈래? 아니면 널 기절시켜서 데려갈까?” 이게 선택이라고? 협박이나 다름없지.그녀는 평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덤덤하게 한마디를 뱉었다.“얼굴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요. 지금 떠날 수 없어요. 그리고 유겸 씨랑 떠날 일도 절대 없을 거예요.”그녀는 더없이 단호했다. 순간 진유겸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그녀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내 팔을 잡고 한 발짝 물러서며 침착하게 말했다.“유겸 씨가 왜 여기까지 와서 저한테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제가 유겸 씨만 순순히 따르던 최희연인 것 같으세요? 다시 절 유겸 씨 곁에 두고 싶은 거예요? 됐어요. 이제 상관없어요. 궁금하지도 않고. 앞으로 우리 사이
“그냥 머리를 다쳐서 기억이 혼란스러워졌을 뿐 최근 2년 간에 있었던 일만 잊었다고 했어요. 아마 한두 달 정도면 회복될 거예요.”즉 언제든지 기억이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인가?석지훈이 기억이 돌아온 걸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혹시 우리를 놀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나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석지훈이 절대 말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분명했다.그는 기억을 회복한 게 틀림없었다.그렇다면 전날 밤 석지훈이 했던 말은...그때 이미 기억을 회복한 걸까?나는 석지훈에게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민수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전화 너머로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저 끊을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가슴이 답답하며 조금씩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결론이 났다. 나는 그와 함께한 2년을 떠올렸다. 그는 항상 완벽한 사람이었고 나를 배려하며 이해해 줬지만 내 곁에는 없었다.아무 설명도 없이 한두 달씩 떠났고 물어볼 때마다 항상 핀란드에서의 권력을 지켜야 한다고만 했다.그는 늘 위험에 처해 있다는 말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나는 항상 불안했다.그런데 그는?항상 태연하다 못해 하늘이 무너져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마치 이 사랑의 게임에서 나만 혼자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우리 아이에게는 차갑게 대하고 나에게는 침묵을 지키는 것에 대해 나는 늘 다양한 핑계를 대며 나 자신을 속여왔다.그가 조금씩 변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감쌌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지쳐버렸다.게다가 그는 지금 기억을 회복했으면서 나를 놀리고 있었다.그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내가 먼저 그를 인정하지 않았던 건 맞지만 내 마음속에는 풀지 못한 억울함이 쌓여 있었다.그냥 단순하게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화가 났을 뿐이다.특히 전날 밤 한성범을 그렇게까지 옹호하면서 내 반대편에 서는 게 너무 화가 났다.그때 이미 기억을 회복한 걸까?어쩌면 회복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그리고 다들 장식품이라고도 해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죠.”나는 농담처럼 물었다. “여자가 장식품인 게 장점인가요?”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예쁜 건 장점이죠.”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혼한 여자에게도 이쁜 게 장점인가요? 누군가에게는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 같은데요. 어떡해요? 이혼한 여자랑 키스하다니, 제가 너무 죄송하네요.”그는 약간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은 제가 실수했어요. 죄송합니다.”“괜찮아요. 그게 진심이었잖아요.”그는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나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 인내심 있는 그의 모습이 과연 기억을 잃은 석지훈일까?나는 혹시 또 농락당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그래도 지훈 씨가 저를 병원까지 데려다준 걸로 이번에는 용서할게요. 하지만 다음은 없어요.”그는 평가하듯 말했다. “화가 좀 크신가 봐요.”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이 영어 문장은 무슨 뜻이에요?”그는 잠시 침묵한 뒤 특유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너를 만났을 때 나는 이렇게까지 사랑에 빠지게 될 줄 몰랐어. 나는 너의 유일한 사람이 아닐지 몰라도 다행히 너는 내게 유일한 사람이야. 나는 너에게 정복당할 수 있는 맹수처럼 단단한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너를 내 품에 안을 거야.”뜻은 알고 있었지만 석지훈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느낌이 전혀 달랐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음속에 달콤함이 가득 차올랐다.하지만 예전의 석지훈이라면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이 남자는 너무 차갑다 못해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한 마디, 한 글자도 귀찮아서 대답하지 않을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은 나에게 인내심 있게 번역을 해주고 있었다.뭔가 이상했다.나는 여전히 마음속 의문을 억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관심 있는 사람 있어요?”그는 되레 반문했다. “제가 관심 있는 사람이
석지훈이 병실을 떠난 뒤 배가 고프다 못해 참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 깊은 밤에 영업하는 식당이 있을 리 없었다.인내심을 가지고 병실에서 기다리다 보니 약 30분 뒤에 석지훈이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오른손에는 하늘색 도시락을, 왼손에는 우유 한 병을 들고 있었다.그는 먼저 우유를 내게 건네주었다. 우유를 받자 아직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 전해졌다. 내가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신 뒤 그는 도시락을 열었다. 안에는 산약과 갈비로 만든 국과 흰 쌀밥 한 그릇이 있었다. 석지훈은 밥을 국에 말아 반 그릇을 내게 건넸다. 나는 마시다 남은 우유를 그에게 돌려준 뒤 그가 내준 밥을 금세 다 먹어버렸다.“그렇게 배고팠어요?”나는 그에게 그릇을 돌려주며 말했다. “네,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거든요. 점심에 우유 한 잔 마신 게 끝이에요. 저 한 그릇만 더 주세요.”석지훈은 다시 반 그릇 떠서 내게 건네주었다.그릇을 비우고 난 뒤 갈비 두 개를 더 뜯어 먹고서야 배가 불렀다. 입가에 기름이 묻자 석지훈이 티슈 두 장을 건네며 말했다.“닦으세요.”나는 웃으며 종이를 받아 입술을 닦았다.그는 이내 도시락을 치워 곁에 두었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자도 돼요. 내일 아침에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눈앞에 그는 더없이 다정했다.적어도 어제보다는 다정해 보였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혹시 기억을 되찾은 걸까? 2년 전, 고현성이 기억을 잃었다며 나를 속였던 일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내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긴 다리를 뻗어 소파에 다시 앉더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기는커녕 책 한 권을 들고 읽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책 제목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궁금한 마음을 애써 삼키며 태연하게 말했다.“그럼 전 잘게요.”눈을 감고 누운 채 한참을 뒤척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석지훈은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
최희연은 이곳에서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문을 열고 나가자, 왕자현은 붉은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컬러가 그에게는 전혀 과하지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매력적인 느낌을 더했다.그는 복도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악기가 놓여 있었다. 그 악기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재민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자현 씨, 악기 다룰 줄 아세요?”정원에는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고 온천에서는 여전히 증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악기를 다루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배웠어요.”그는 말 그대로 고귀함이 물씬 풍겼다.최희연은 속으로 감탄했다. 왕자현은 정말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와도 같았다. 모든 게 완벽할뿐더러 온화하며 세심하게 다듬어진 느낌이었다.“자현 씨는 어릴 적부터 많은 걸 배우셨네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집안이 부유하다 보니 생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죠. 원하지 않는 걸 배울 이유도 없고 여유 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악기를 배운 거죠.”부유한 집안에 대해 그는 마치 당연한 듯 말했다.그녀는 조금 시큰둥하게 말했다. “정말 부럽네요.”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부러워하는 거죠?”“부유한 집안이요.”그는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더 이상 그녀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최희연은 그 곡을 이해할 수 없었다.악기라고 배운 적이 없었기에 감상하기 어려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률이 매우 아름다운 곡이었다.그녀는 왕자현 곁에 앉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진유겸이었다. 그녀는 별로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혹여나 여기까지 찾아올까 봐 할 수없이 통화 버튼을 클릭했다.진유겸은 충분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복도 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 전화해서 뭐 하려고요?”진유겸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수아 씨가 그러는데 네가 결혼했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VIP 병실이었고 나는 크고 부드러운 병상에 누워 있었다. 눈앞에는 소파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그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더니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깨어났어요?”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네, 지금 몇 시예요?” 석지훈은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새벽 3시예요.”“아, 그렇군요. 고마워요.”“별말씀을.”“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그는 가볍게 대답한 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유진이랑 태웅이는 수아 씨가 형수님이 되어주길 바라던데 전 아직 여자 친구 찾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네?”“수아 씨도 저를 둘째 오빠라고 부르세요.”둘째 오빠...석지훈은 2년 전부터 자신을 둘째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었다.마치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나는 일부러 물었다.“왜요?”그는 돌아서서 나를 향해 물었다.“원하는 게 뭐예요?”나는 술에 취해서 했던 말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말했다.“절 가지세요.”웃음이 피식 나오는 석지훈이었다.“전 수아 씨를 갖고 싶지 않아요.”“너무 단호하시네요. 저 되게 쉬운데, 한 번 해보세요.”그 역시 그날 밤처럼 대답했다.“흥미 없어요.”나는 웃으며 말했다.“마침 잘됐네요. 우리 그냥 이렇게 끝내죠.”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왜 시나리오대로 안 가는 거예요?”나는 물었다.“뭔 시나리오죠?”“그날 술 취해서 비슷한 말을 했잖아요.”석지훈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전 이미 다 잊었어요. 그날 밤 술에 취했다 보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그는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진짜 취했어요?”혹시 내가 취한 척하는 걸 눈치라도 챘나?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건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의 모습이었다.나는 그의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시크한 척은.비는 쏟아졌고 고현성은 계속해서 내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는 원래 그를 무시하고 떠날 생각이었지만 석지훈이 가볍게 말했다. “협박하고 싶지 않아요.”협박하고 싶지 않다...이미 협박이었다.나는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죠?”“말했잖아, 민수가 수아 씨를 데리러 오라고 했다고.”석지훈의 말투는 너무나 가벼워서 마치 오늘 이 일을 끝내지 않으면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내가 떠나는 것도 나를 놓아주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그가 이렇게 강압적인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어쨌든 이 일은 그냥 지나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고현성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비서한테 부탁해서 집까지 데려다줄게. 며칠 후에 다시 너랑 놀아주면 어때?”그의 눈빛엔 실망이 담겨 있었지만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 말을 따랐다.“알겠어.”그 말을 듣고 비서는 즉시 차에 올라타더니 고현성을 집으로 데려다줬다.고현성이 떠난 뒤 나는 석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지훈 씨의 성격상 민수 씨 부탁으로 절 데려갈 사람이 아닌데요? 혹시 저한테 관심이라도 생겼어요?”석지훈은 내 말을 듣더니 차갑게 쏘아봤다.나는 다시 물었다. “혹시 질투하는 건 아니죠?”석지훈은 아무 말 없이 차로 돌아갔다.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윤 비서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수아 씨, 농담 그만하시고 얼른 차에 타세요.”나는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접고 차에 올랐다. 석지훈은 곁에서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몸이 계속해서 나른하고 불편해서 결국 눈을 감고 쉬기로 했다. 차가 거의 도착할 즈음, 석지훈이 갑자기 물었다.“자주 연락하세요?”석지훈이 가리키는 건 고현성이었다.“지훈 씨랑 상관없을 텐데요.”“그래, 상관없지.”석지훈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하고 담담했다.나는 몸 상태가 안 좋다 보니 힘없이 석지훈에게 말했다. “약속대로 저를 데려왔으
그의 촉촉한 눈망울을 마주하며 나는 결국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달래듯 말했다.“먼저 옷부터 갈아입어.”고현성은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의 모습에 나는 잠시 눈이 반짝였다. 비서는 그에게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을 사주었고 흰색 니트는 그의 몸에 딱 맞아 보였다.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는 더욱 훤칠해 보였다.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가자.”나는 먼저 문을 나섰고 고현성은 내 뒤를 따라 나섰다. 비서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서는 고현성에게 우산을 씌워주었고 나는 혼자서 우산을 썼다. 그런데 고현성은 나를 위해 우산을 씌워주고 싶어 했다.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말했다.“말 들어.”고현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우산을 쓰고 앞서갔고 고현성과 비서는 뒤에서 따랐다. 아파트 입구에 다다를 때 나는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그때, 석지훈이 갑자기 몸을 살짝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윤아야.”기억을 되찾은 건가?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태웅이가 그렇게 불렀죠?”괜히 설렜네.내가 답을 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고현성이 급히 설명했다. “수아예요.”고현성은 내 앞에 서서 소유욕을 보이며 석지훈을 막아섰다. 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쪽은?”“전 수아의 남편, 고현성이라고 해요”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조금 망설였다. 마치 자기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듯했다.계속해서 그를 현성이라고 부르자 석지훈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석지훈은 다시 물었다. “남편?”고현성은 확고하게 말했다.“네!”석지훈은 나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태웅이가 어젯밤까지 전남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고현성은 잠시 멈칫하더니 내게 물었다. “수아야, 전 남편이 뭐야?”석지훈은 냉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그의 눈빛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그는 절대로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물론 어젯밤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