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해했다. 누구보다 그의 고통을 이해했다.석지훈의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아들을 협박하는 것이 나 역시 혐오스러웠다.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한쪽에는 사랑이, 다른 한쪽에는 가족이라는 굴레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데.그건 마치 어느 쪽으로도 기울일 수 없는 천칭 같았다.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지훈은 차가운 입술로 내 손바닥을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윤아야, 나와 결혼해 줄래? 석지훈의 아내가 되어 줘. 그리고 내 아이의 엄마가 되어 줘. 나중에 꼭 당당하게 결혼식을 올려 줄 테니 지금은 잠시만 억울해도 참아줘.”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물었다.“괜찮겠어?”괜찮겠냐고?마음이 갑자기 내키지 않았다. 세상에 비밀은 없으니 그의 어머니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그때의 결말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나는 갑자기 딜레마에 빠졌다.석지훈과 나는 결코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예유진이 했던 말도 그에게 말할 수 없었다.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석지훈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표정이 굳어졌다.“왜 아무 말도 안 해?”그는 조용히 물었다.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참았다. 내 모습을 본 석지훈의 눈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왜 그래?”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조심스러웠다.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석지훈은 나를 품에 꼭 안았다. 그 순간, 나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나는 석지훈을 너무 잘 알았다. 그는 어머니의 협박 때문에 망설이겠지만 그는 말과 행동이 매우 단호한 남자였다. 결혼하자고 하면 정말 결혼할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발각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석지훈은 누군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성범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는 내가 전부였으니까.하지만 나는 그런 그가 두려웠다.나는 석지훈의 어머니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그
석지훈은 담현아보다 훨씬 총명하고 통찰력이 깊었다.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고정재와 그만큼 나를 꿰뚫어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금방 내 진심을 알아채 버렸다.나는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네, 그런 이유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했던 그 말 때문이기도 해요. 당신이 아무리 부정하고 사과해도 그건 당신의 진심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항상 위험한 일에 뛰어들잖아요. 우리는 항상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고...”나는 몸을 돌려 무표정한 석지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우리가 결혼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이건 내가 꿈꾸던 가정이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가정은... 지훈 씨, 난 매일 아침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깨어나고 싶어요. 그가 내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 싶고 그 사람이 진정한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요. 그리고 그의 세계에 녹아들고 싶어요. 난 우리가 서로에게 솔직하고 친밀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난... 그리고 결혼은 두 가족의 문제잖아요. 우리 부모님은 동의하시겠지만, 당신 어머니는... 난 이렇게 몰래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아요. 떳떳하게 당당하게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나는 그를 강요하려는 게 아니었다.단지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을 거절하고 싶었다.그렇다고 그의 아내가 되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나는 그저 그가 또 다른 어머니를 잃지 않기를 바랐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밖으로 나가 온천 옆에서 패딩을 찾아 입고 방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폭풍설이 몰아쳤다.몸은 얼어붙었지만 마음은 더욱 시렸다.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고 답답했다.나는 붉어진 눈으로 밖으로 나왔다. 패딩 안에는 얇은 시폰 드레스 한 장뿐이라,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텅 빈 듯 추웠다.망망한 설원을 걷기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나는 눈구덩이에 빠졌다. 순식간에 온몸을 덮치는 냉기에 이가 덜덜 떨렸고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내 모습이 한심해서 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속에서
나는 그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게 싫었다.하지만 또 그가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기를 바랐다.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은 변함없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아니, 그 사람 눈에 든 게 얼마나 다행인지.“윤아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눈가가 빨개진 채로 그를 쳐다보니 석지훈은 내 몸에 묻은 눈을 털어주고 자신의 정장을 벗어 내게 덮어주며 한숨을 쉬었다.“나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여자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라. 태웅이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는 게 정답이라고 해서 내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잊었어.”나는 억울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석지훈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태웅이가 그러더라. 차가운 남자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나도 네가 내가 무뚝뚝해서 여러 번 화를 냈다는 걸 알아. 그리고 핀란드를 떠날 때마다 제대로 말하지 않아서 화를 냈다는 것도. 미안해. 내가 부족해서 네가 원하는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게 했고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에게도 힘든 시간을 주었어.”역시, 석지훈은 정말 다 알고 있었다.그는 내 마음속 깊은 곳의 모든 생각을 알고 있었다.그는 눈밭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어머니 일은 아직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 이 일로 네게 실망을 안겨 줘서 미안해. 그러니, 우리 당분간 결혼은 미루는 게 어떨까?”눈이 그의 몸 위로 떨어졌다. 그는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들었다.“먼저 내 세상에 적응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 아가야, 나는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이해해. 표현이 서툴렀을 뿐이야. 앞으로 더 잘할게. 그러니까 화 풀어, 응?”석지훈이 이렇게까지 낮추다니.나는 그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깊은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일단 따뜻한 곳으로 가자. 몸 녹이고
내 손가락은 나도 모르게 그의 허리에 닿았고 붉어진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지만 그 순간 그가 날 끌어안았다.나는 결국 그에게 안겨 방으로 돌아왔다.그는 내 몸의 물기를 닦아주고 침대에 눕혔다.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나를 보고 석지훈은 의외로 농담을 건넸다.그는 예전보다 더 뻔뻔해진 것 같았다.나는 그를 노려보며 대꾸하지 않았다. 석지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윤아야, 넌 내 사람이야.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우리 어머니 일은... 내게 위협이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누구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 설령 어머니가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난 슬프고 안타깝겠지만 그뿐이야. 그분이 내 행복을 막는 걸림돌이 될 순 없어. 그분뿐만 아니라, 이 세상 누구도 네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둘 수 없어.”석지훈은 몸을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너야. 아이들도 너에 비할 바가 못 돼. 아이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너야말로 내가 평생 지켜야 할 여자라는 거야. 아이들은 네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이고! 윤아야, 앞으로는 네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직접 널 내 세상으로 데려갈게. 괜찮겠니?”그 후에도 석지훈은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고 내가 원하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었다.난 조용히 응수했다. 그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잠깐 자고 있어. 유겸이가 아직 아이스랜드에 있는데 만나고 와야 해. 그리고 친구라고 하기도 뭐한 친구도 만나야 하고.”예전 같았으면 절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난 그를 보내주며 말했다.“가서 볼일 보고 와요.”석지훈이 일어서자 난 그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친구라고 하기도 뭐한 친구는 누군데요?”그는 나지막이 대답했다.“왕자현.”석지훈과 왕자현이 아는 사이라고?...석지훈은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코트로 갈아입고 온천 회관을 나섰다. 계속해서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 비서는 석지훈이 나
하지만 그건 과거의 연수아일 뿐이었다.지금의 그녀는 그에게 의지하고 예전보다 성격도 더 까칠해졌지만 살아있는 사람다웠다.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연수아는 진심으로 그에게 의지하고 그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로 여기며 그에게서 원하는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평범한 여자들처럼 꾸밈없이 사랑하고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에게 화가 나면 바로 표정을 굳히는 것처럼 말이다.이런 모습이 진짜 연수아였다. 더 이상 과거 고현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심스러워하거나 가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 석지훈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까탈스러운 게 아니라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의 윤아는 까다롭지 않다. 그의 윤아는 그저 평범한 행복을 바랄 뿐이었다. 기쁠 땐 웃고, 슬플 땐 우는 그런 그녀야말로 석지훈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비록 그가 시시때때로 그녀를 달래줘야 한다 해도 괜찮았다.석지훈은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녀의 사랑을 받는 이런 나날들이 행복했다.그는 심지어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평생 그녀 곁에 있을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인생은 늘 엇갈리고 어쩔 수 없는 일투성이다.석지훈은 옆에 있는 윤 비서를 바라보며 갑자기 뜬금없이 말했다.“윤아가 내 곁에 온 후로 너뿐만 아니라 태웅이를 포함한 몇몇이 규칙을 잊고 나한테 하지 말아야 할 질문들을 계속하더라. 몇 번이나 주의를 줬는데도 멈추질 않고. 내가 우습게 보여? 설마 내 뒷말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하지 마. 다 알고 있으니까.”연수아가 석지훈의 곁에 나타난 후에야 윤 비서를 비롯한 원태웅 등은 석지훈에게 부드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사자 수염을 건드리듯 조심스럽게 농담도 하고 그랬지만 나름대로 선은 지켰다고 생각했다.윤 비서 일행은 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석지훈에게 들통나고 말았다.역시 석 대표님은 세상에서
석지훈이 방을 나가자 나는 침대에 누워 심심함을 느꼈다. 하지만 석지훈이 왕자현을 안다는 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제 진유겸에 왕자현까지 만나러 간다니.하필 그 두 사람 다 최희연과 얽혀있는 남자들인데.문득 석지훈이 내게 덮어주었던 양복이 온천 옆에 놓여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 양복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양복 주머니에는 석지훈의 휴대폰이 들어있었다.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이 켜지면서 원태웅이 보낸 알 수 없는 문자가 있었다.나는 원태웅이 석지훈에게 보낸 문자가 항상 궁금했다.석지훈의 휴대폰에는 비밀번호 잠금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호기심에 못 이겨 문자를 열어보니 원태웅이 여러 개의 문자를 보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맨 위로 스크롤을 올려 몇 시간 전 대화 내용을 보니 석지훈이 원태웅에게 말한 내용이었다.[모든 기억이 돌아왔어.]원태웅은 놀란 이모티콘을 보내며 답했다.[벌써요?]석지훈: [...][그럼 형은 어디에 있어?]석지훈은 간단하게 답했다.[아이스랜드.][아이스랜드에는 왜? 설마 윤아 때문인가? 윤아가 아이스랜드에 있어? 맞다, 형이 갑자기 나한테 문자를 보낸 이유가 뭐지? 윤아가 또 형한테 화난 거 아니야?]원태웅은 석지훈의 습관을 꿰뚫고 있었다.석지훈은 담담하게 답했다.[...]나는 석지훈을 너무 잘 안다. 이 말줄임표는 원태웅을 상대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듣고 싶다는 의미였다.[여자는 화가 나도 달래기 쉬워. 게다가 형은 잘생겼으니 누가 정말 형한테 화를 내겠어? 내 말 믿어. 윤아는 분명 거절할 거야. 그럼 그냥 좀 더 박력 있게 나가. 그리고 윤아가 좋아하는 말 많이 해줘. 뭘 좋아하든 그냥 다 맞춰줘. 원칙 같은 건 필요 없어. 자기 여자 앞에서 무슨 원칙이야. 내 말 들어. 틀림없다니까.]석지훈이 답장이 없자 원태웅이 계속해서 말했다.[윤아는 그냥 좀 까다로울 뿐 온순해서 달래기 쉬워.]내가 까다롭다고?석지훈이 대꾸하지 않자 신이 난 원태웅
[본사 와서 벌 받아.]“쌤통이야.”나는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석지훈이 진유겸을 만난 것은 30분 후였다. 그는 시내 중심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이스랜드의 3, 4월은 매우 추웠는데 진유겸은 허리를 굽힌 채 마치 버려진 노숙자처럼 그곳에 앉아 있었다.석지훈은 그의 옆에 앉아 물었다.“무슨 일이냐?”진유겸과 석지훈은 오랜 숙적이었다. 유럽에서 끊임없이 영역 다툼을 벌였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상대이기도 했다. 둘은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일종의 암묵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진유겸은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내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석지훈은 침묵했다. 연수아 외에는 누구도 위로해 본 적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진유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었으니까.“지훈아, 우리 같은 남자들은 왜 항상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걸까? 내가... 민솔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건 사실이야. 난 희연이가 처리할 시간을 줄 줄 알았어. 근데 며칠 만에 갑자기 모든 게 변해버렸어.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아무도 한 사람을 위해 영원히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거.”석지훈이 물었다.“이제 어떻게 할 거냐?”진유겸은 하늘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모르겠어. 왕자현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지만 심오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야. 아무도 그를 쉽게 제거할 수 없어.”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석지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석지훈은 그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자신과 진유겸은 모두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둘이 손을 잡는다면 분명 왕자현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가 왜 진유겸을 도와야 한단 말인가?그의 여자와 최희연은 절친한 친구였으니 그는 항상 최희연의 편이었지 진유겸을 도와 그녀를 다치게 하는 쪽이 아니었다.
석지훈이 떠나고 30분쯤 지났을까, 내가 휴대폰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최희연이 온천 회관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내 몸에 남은 흔적을 보고는 일부러 놀리듯 물었다.“방금 온천 옆에서 남자 바지랑 셔츠를 봤는데 어떤 차가운 남자 옷 같더라! 쯧쯧, 내가 눈치 없이 온 거 아니야?”나는 일어나 최희연이 보는 앞에서 옷을 입으며 되받아쳤다.“너랑 왕자현 씨는...”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최희연은 황급히 말을 막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 나랑 자현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그런 쪽으로는 아무 말도 안 했고 포옹이나 손잡는 것도 한 번도 없었어. 그는 항상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 그리고 내 얼굴은... 어쨌든 그는 석지훈과 달라!”나는 웃으며 물었다.“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다 네가 말한 거잖아. 근데 왜 갑자기 지훈 씨를 그 사람이랑 비교하는 건데? 솔직히 말해 봐. 만약 그가 너를 원한다면, 넌 그에게 응할 거야?”내 질문을 들은 최희연은 잠시 멍해졌다.“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그가 원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사람이고 나는 왕씨 가문의 하나뿐인 안주인이니까.”나는 그녀 앞에서 한 바퀴 돌며 일부러 물었다.“희연아, 너에게 그는 그저 이용 가치가 있는 관계일 뿐이야?”최희연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 그래. 이용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였어. 아마도 은혜를 갚기 위해서겠지!”나는 호기심에 다시 물었다.“무슨 은혜?”“내가 예전에 그를 구해준 적이 있어. 그가 운 좋게 나에게 구출된 게 아니라 내가 운 좋게 그를 구해준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그는 내 삶에 나타난 지 겨우 5년밖에 안 됐지만 난 왠지 모르게 그를 전적으로 믿어. 세상에서 날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이야. 이런 믿음은 정말 이상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인연이라는 게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