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운성은 비랑 눈이 정말 많이 오죠!”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예하나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곧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 제발 부탁할게요. 나랑 유진이, 형 앞에서 얘기 좀 잘 해주세요! 우리 둘 다 진짜 힘들어 죽겠어요!”맞은편에 앉은 예하나의 얼굴이 좀 어색해 보여서 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죠?”그때 예유진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형수님, 우리 둘은 매일 여기서 형이 가둬놓은 사람들이랑 같이 지내는데, 정말 너무 지루해 죽겠어요! 형한테 우리 좀 빨리 풀어달라고 말해주세요.”그 말에 나는 웃으며 물었다.“지금 갇혀있다고요?”한민수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우린 여기서 그 사람들을 지키고 있는데 정말 너무 지루하다니까요!”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그럼 오늘 밤에 슬쩍 얘기해 볼게요.”“부탁드려요. 형수님.”한민수와의 통화를 끝내고 난 뒤, 나는 표정이 굳어진 예하나에게 설명했다.“모두 내 약혼자의 친구들이에요.”“네, 재미있는 분들 같네요.”찻집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최희연의 전화가 걸려왔다.“수아야, 그이가 급한 일로 떠나야 하는데 나도 같이 따라가려고. 내 얼굴 흉터를 치료해주겠대.”“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돌아와서 얘기하자!”“어. 운성에 돌아가면 연락할게.”저녁 모임은 이렇게 취소되었다.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내 상황을 설명했더니 답장이 왔다.[응, 저녁에 집에 갈게.]휴대폰을 내려놓으니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나는 무심코 예하나에게 물었다.“하나 씨, 부모님은요?”“해외에 정착하셨어요.”“아, 나 너무 심심하네요.”“하아, 저도 심심해요.”...이정희는 창가에서 석지훈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갑고 무정한 그의 표정은 그 남자와 정말 똑같았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 남자의 친아들이 아니었다.이
저녁 8시가 되었는데도 석지훈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담현아가 저녁에 고정재의 연주가 있다며 음악회에 초대했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정재 씨는 휴가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친구 대신 급하게 연주하는 거래요!]집에 있기도 심심해서 나는 담현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음악회장 가는 길에 고양이 카페를 지나는데 창가 테이블에 앉아 팔로 머리를 괴고 바깥의 차들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예하나를 보았다. 내가 가까이 갔는데도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내가 그녀 앞에 서자 그제야 나를 발견한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귀여운 덧니를 보이며 찻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밤이라 찻집 안은 은은한 조명 몇 개만 켜져 있어 고풍스러운 등갓 아래 따스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물었다.“음악회, 같이 갈래요?”유리창 너머라 그녀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한번 물었다.“나랑 음악회, 같이 갈래요?”이번에는 들리는 듯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아니요. 난 여기 있다가 9시가 되면 바로 올라가서 잘 거예요.”그녀가 원하지 않으니 나는 더 권하지 않고 고양이 카페를 떠났다. 모퉁이를 돌기 전에 뒤돌아보니 그녀의 표정은 아주 쓸쓸해 보였다.이 여자도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수아 언니, 여기요!”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담현아가 혼자 서 있었다. 그녀는 얇은 긴소매 원피스 하나만 입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젊으니까 추위도 안 타나 보네.’내가 다가가서 물었다.“정재 씨는?”담현아는 웃으며 대답했다.“지금 무대 뒤에서 준비 중이에요.”나는 담현아와 함께 음악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담현아는 연주회가 이미 절반 정도 진행되었고 고정재의 연주는 10분 후라고 말했다.그녀는 이제 고정재의 스케줄을 완전히 꿰고 있었다.5분 후, 고정재가 내 옆에 왔다. 나와 담현아는 깜짝 놀랐다.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할 사
“고마워요.”내가 막다른 길에 들어설 때마다 조언해 주고 스승이자 친구처럼 나를 이끌어준 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그의 망설임 없는 대범함에도 감사했다.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다정하고 따뜻하면서 분별력 있는 사람, 고현성의 차가운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고현성...문득 그가 보낸 문자가 생각났다.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는 걸까?나는 고개를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꼬마 아가씨, 드레스로 갈아입어.”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나는 곧 하늘빛 롱드레스로 갈아입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정재의 비서가 다가와 말했다.“곧 시작합니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무대 위로 걸어 나갔다.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는 순간, 맨 뒷줄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나는 옅은 미소를 띠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잠시 숨을 고른 후, 첫 음을 눌렀다. 곧 애잔한 멜로디가 내 손끝에서 흘러나왔다.바람이 사는 거리사실 바람은 여기에 살지 않았지...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우리 모두가 어렸던 그 시절...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4분 남짓한 시간, 곡은 금세 끝났다.이어서 네 곡을 더 연주했다. 20분 정도 걸렸을까. 관객들의 우레같은 박수 속에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고정재와 담현아는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들 뒤편, 두 줄 뒤에는 태산처럼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그 남자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강했다...그리고 그 남자는 내 인생의 유일한 사랑이었다...박수갈채 속에서 난 과거의 집착을 떠올렸다. 평생 단 한 사람...나는 나의 9년간의 기다림이 그걸 증명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남자와 결혼했다.내 '평생 단 한 사람'은 그때 이미 웃음거리가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한 순간부터가 웃음거리였던 것이다.나는 고정재에게 줄 사랑을 고현성에게 줬다.그 사랑은 그토록 진실했지만, 잘못된 사
나는 무대에서 황급히 내려와 의상을 갈아입고 그 남자를 찾으러 객석으로 갔다.그러나 뒷좌석은 텅 비어 있었다.나는 급히 음악당을 나와 옆 골목에서 석지훈을 찾았다. 그는 고개를 약간 든 채 골목길 가로등을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다가가서 물었다.“뭘 보고 있는 거예요?”“이 가로등이 고장 났어.”그가 말했다.그의 말대로 불이 꺼져 있었다.나는 다가가 익숙하게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고장 난 지 얼마 안됐나 봐요. 이곳은 번화가니까 금방 고칠 거예요!”석지훈은 나를 쳐다보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윤아야, 너 평생 네 신념을 굳건히 지킬 수 있겠어?”나는 일부러 물었다.“내 신념이 뭔데요?”내 신념은 오직 평생 눈앞의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었다.하지만 난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웃기만 했다.오늘 밤의 석지훈은 좀 이상했다. 병원에 있는 이정희가 그한테 뭔가 이간질하는 말이라도 한 건가.나는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석지훈과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잠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고 나는 일부러 따뜻한 색의 침구로 바꿨다.별장에는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계시는데 항상 우리가 집에 없을 때 와서 정리해주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갈아주시는 침대 시트는 흰색 아니면 검은색이라 왠지 차갑게 느껴졌다.나는 따뜻한 색을 좋아했다. 그래야 마음도 따뜻해지는 기분이 드니까.석지훈은 30분 후에 샤워를 마치고 나왔고 그다음에 내가 샤워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보니 그는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는 평소에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았다. 혹시 무슨 걱정거리가 생긴 건가.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아니.”그의 대답에 나는 다시 물었다.“근데 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그는 고개를 돌리며 불쑥 말했다.“어머니는 마음고생을 너무 오래 하셔서 병나셨어. 방금 아버지가 그립다고 하시더라.”이정희는 나의 아버지를 미워했다.하지만 사랑하
결코 회피하거나 얼렁뚱땅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나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석지훈은 담배를 끄고 나를 품에 안으며 나지막이 물었다.“안 피곤해?”지금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나는 대답했다.“조금요.”그는 나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 잠이 들려는 순간, 석지훈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윤아야, 세상의 많은 일들은 정해진 결말이 있어. 네가 내 아내가 되는 게 바로 그 종착점이지.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기 전까지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난 네가 흔들리지 않고 주변에 휘둘리지 않으며 스스로를 억누르지 않길 바래. 이것 또한 하나의 믿음이니까.”석지훈은 내가 마음을 굳게 먹길 바라고 있었다.나약한 모습 대신 그의 아내가 되는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기를 말이다.나는 입술을 깨물고 목 안에서 간신히 소리를 냈다.“응.”석지훈이 다시 말했다.“아가야, 넌 내 삶의 전부야.”평소 애정 표현을 잘 안 하는 석지훈이 갑자기 날 삶의 전부라고 하니 마음속에 불안감이 스며들었다...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해요?”“내일 떠나야 하니까.”나는 몸을 돌려 그의 목을 꽉 껴안았다. “우리 안 만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나 며칠 뒤에 오빠를 찾아갈 건데요 뭐!”“아가야, 떠나기 전에 너와 진심을 나누고 싶고 널 더 많이 사랑해 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어. 내 마음 알지?”지금의 석지훈은 정말 많이 변했다.이전의 그 차가운 남자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네. 나도 사랑해요!”나는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는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자라고 나지막이 말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초조해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석지훈은 일어났다.나는 눈을 감은 채 뜨지 않았다. 석지훈은 욕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내게 등을 보인 채 흰 셔츠로 갈아입고 늘 입던 검은 정장을 걸쳤다. 그리고는 다가와 손바닥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나는 몽롱한 척 눈을 뜨며 물었다. “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휴대폰을 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답답해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송이연이 어떻게 신부전증이란 말인가.어떻게 엄마처럼 신부전증이...그래서 아이를 연시혁에게 보낸 것이었다.그를 용서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나는 급히 송이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 나는 다시 연시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나는 망설이며 물었다.“최근에 이연 씨를 만났어?”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안 만나 줘.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근데 왜 갑자기 걔 얘기를 해?”나는 망설였다. 송이연의 상태를 그에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지 않기로 했다.나는 송이연이 걱정되어 연시혁과의 통화를 끝내고 직접 상주시로 향했다. 현정우는 연차였고 비서에게도 며칠 휴가를 줬기에 몇 명의 경호원만 대동했다.상주시에 도착하니 이미 정오가 다 되어 있었다. 비서가 미리 송이연의 주소를 보내 주었는데 상주 대병원이었다.병원에 도착했는데 뜻밖에도 김예진을 만났다. 하지만 그녀는 응급실로 들어갔기에 나는 나중에 다시 찾아뵙기로 했다.내가 송이연을 찾았을 때 그녀는 병원 옥상에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오랜만에 본 송이연은 너무 말라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마치 뼈만 남은 듯한 모습이었다.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았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불렀다.“이연 씨.”그녀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나를 향한 눈빛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수아 씨, 왔어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뼈만 남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쩌다 이렇게 말랐어요?”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제 몸이 말을 안 듣네요. 입원해 있는 동안 점점 더 살이 빠졌어요.”“그런데 제 비서가
오혜원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도 살고 싶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이기적일 수 있기에 오혜원은 단지 인간이 가장 쉽게 하는 결정을 내렸을 뿐이다. 그러니 연시혁을 압박했다고 해서 그녀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나는 한숨을 지었다. 송이연은 내 손등을 꽉 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우린 건강하진 않지만 살아갈 희망은 있어요. 수아 씨는 저보다 훨씬 많은 걸 겪었으니 더 잘 알잖아요.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이제 와서 따져봤자 시간 낭비이고 에너지 낭비일 뿐이에요. 그러니 잘했든 못했든 상관없어요. 앞으로 남은 인생은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거예요. 혜원이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요.”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시혁을 용서한 건가요?”송이연은 웃으며 말했다.“이미 용서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승아를 맡기지도 않았을 거예요. 전 결국 저 자신에게 진 거죠.”스스로에게 졌다기보단 사랑에 진 거겠지.나는 다시 물었다.“그럼 시혁이와 다시 만날 건가요?”송이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나는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물었다.“왜요?”“그 사람을 용서했지만 그가 저에게 했던 모든 일을 잊을 수는 없어요. 그 상처는 평생 가슴에 남을 테니까. 다시 만난다 해도 예전처럼 그에게 의지할 수 없을 거예요.”그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람은 살면서 지켜야 할 선이 있어요. 그 선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거예요.”송이연의 사랑은 너무나 순수했다. 그녀는 예전에 자신의 부모님이 굉장히 사랑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연시혁은 그녀의 마지막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알겠어요. 당신의 생각을 존중해요.”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송이연의 결정이었다.나는 그녀의 어떤 결정이라도 지지할 것이다.그녀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수아 씨, 어쩌면 저도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을 만날지 몰라요. 지금 수아 씨가 석지훈 씨를 만난 것처럼요. 그 누가 알겠어요? 어쩌면 더 행복해질지.”나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간호사는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환자 치료 중인데 왜 함부로 들어와요?!”김예진은 나인 것을 발견하고 간호사에게 말했다.“내 동생이에요. 걱정돼서 온 거니까 이해해주세요.”그녀는 평소엔 유순해 보여도 중요한 순간엔 단호했다. 나는 간호사를 흘끗 보고 그녀에게 다가갔다.“언니, 어쩌다 이렇게 다치셨어요? 오빠는요?”그날 밤 나는 두 분이 이혼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오빠는 왜 같이 안 왔어요?”김예진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출근했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그런데 어떻게 다치신 거예요?”그러자 그녀는 대충 둘러댔다.“그냥 넘어졌어.”넘어져서 이렇게 다칠 수가 있나?나는 김예진의 앞에서 조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녀는 다급하게 말렸다.“수아야, 오빠 일하는 데 방해하지 마.”나는 그녀를 막아서며 말했다.“언니는 오빠의 아내이니 다쳤으면 남편이 옆에 있어야죠. 안 그러면 남편이 왜 필요해요?”김예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민수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팔에 난 상처를 보고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김예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넘어졌어요.”조민수는 바로 쏘아붙였다.“내가 바보로 보여요?”그녀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수아도 있는데.”나는 그 말을 듣고 서둘러 조민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난 상주시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이제 끝나서 급하게 가 봐야 해. 오빠는 언니 잘 챙겨드려. 나중에 또 봐.”조민수가 말했다.“조심히 가.”나는 김예진에게 웃으며 인사했다.“언니, 갈게요.”나는 서둘러 병원을 나섰다. 운성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조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 [수아야, 전화해 줘서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네 언니는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을 거야.]나는 답장을 보냈다.[별말씀. 오빠, 언니 잘 챙겨주고 속상하게 하지 마.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언니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