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훈은 계속 방에서 아이와 함께 놀아주었고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엄마를 거들었다. 점심 식사 후, 석지훈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고 그의 그런 모습에 엄마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지훈이는 아이를 정말 예뻐하는구나!”석지훈이 석윤아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었다.하지만 그보다는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였을 것이다.다시 말해, 그는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본인도 우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런 그의 모습은 왠지 외로워 보였다.나는 부모님과 몇 마디 나눈 후 위층으로 올라갔다. 석윤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는데 아주 조용해 보였다. 석지훈은 내가 들어오자 나지막이 말했다.“사별이가 졸려서 잠들려고 하는 것 같아.”석지훈은 늘 석윤아를 사별이라고 불렀다.나는 그의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턱을 괴고 석윤아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금세 눈을 감고 잠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그의 귀가 순간 발갛게 달아올랐다.“장난치지 마.”진한 키스가 끝나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아이 방에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당황하며 물었다.“언제 CCTV를 설치했대요?”석지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몰랐어?”내가 만약 알았다면 감히 그렇게 대담하게 그를 유혹했을까?어쩐지 평소보다 더 적극적이고 내 작은 스킨십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더라니. 모든 것이 CCTV 때문이었다.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의 서두르는 모습에 엄마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나는 애써 태연한 척 엄마에게 물었다.“컴퓨터 어디 있어요?”엄마는 바로 눈치를 채고 나를 보며 말했다. “아빠 방에 있어. 아빠 지금 뉴스 보고 계시니까 아마 너희들 못 봤을 거야.”나는 서둘러 부모님 방으로 가서 아빠가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태연한 척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결혼은...나는 최희연이 예전에 진유겸에게 접근했던 목적을 떠올렸다.지금 그녀는 똑같은 방법을 쓰고 있었다.진유겸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 건가?[저녁에 봐.]나는 답장과 함께 식당 주소를 보냈다.문자를 보내고 나서 석지훈에게 물었다.“오후에는 뭐 할까요?”석지훈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뭐 하고 싶어?”“놀이공원에 갈까요?”내가 제안했다.나는 아직 사랑하는 사람과 놀이공원에 가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석지훈이 이렇게 시간을 내주는 것도 흔치 않은 기회였다.“좋아. 사별이도 잠들었으니 우리도 나가자.”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서 걸어가자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별장 문을 나서는 순간, 석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나는 그의 옆에 서서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지훈아, 나 아파. 병원에 와서 간호 좀 해주렴.”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나은은요?”“그 애는 우리 집 며느리가 아닌데 내가 어떻게 그 애를 내 곁에 붙잡아 두겠니? 엄마 얼굴 좀 보러 오렴. 우리도 오랫동안 못 봤잖아.”“어머니, 저 오늘 바쁩니다.”석지훈은 나와 놀이공원에 가기로 약속했다.“지훈아, 난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네가 내일 운성을 떠나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석지훈은 어머니 이정희에게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이정희는 한마디 툭 내던졌다.“병원에서 기다릴게.”석지훈은 전화를 끊고 나와 함께 차에 올랐지만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조심스럽게 말했다.“어머니는 오빠에게 좀처럼 부탁하는 법이 없잖아요. 지금 아프신데 곁에 아무도 없고 오빠는 또 어머니의 하나뿐인 가족이니 당연히 오빠가 보고 싶고 보살핌을 받고 싶을 거예요.”한성범이 석지훈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이유로 석지훈은 항상 그를 마음속 깊이 존경했다. 마찬가지로 이정희 역시 그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
석지훈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니는 석씨 가문의 안주인이었고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을 가진 분이셨어.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어머니를 이길 수 없었지. 그런데 어머니는 욕심이 많아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했어. 하지만 아버지에겐 첩이 많았고 이미 아들이 셋이나 있었어.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의 원한은 점점 쌓여갔고 그녀의 높은 자존심은 아버지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지. 그래서 어머니는 늘 뒤채에서 혼자 지냈어. 아마도 혼자 지내는 동안 심경의 변화가 생겼던 것 같아.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어머니는 그녀를 지키던 경호원과 관계를 가졌어. 한 명뿐만이 아니라, 어머니 곁에 있던 모든 경호원들과 말이야.”그럼 석지훈의 아버지는 누구란 말인가.석지훈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냉정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당시 어머니를 지키던 경호원은 모두 열네 명이었어. 그 누구도 감히 어머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지. 게다가 당시 어머니는 아름다웠고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누구도 어머니를 거절할 수 없었을 거야.”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석지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 아버지는 그 열네 명 중 한 명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 이제 와서 그 진실을 알아낼 방법은 없지. 하지만 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석지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어머니가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어. 난 오히려 어머니의 삶이 불쌍하고 안타깝게 느껴지니까.”나는 그의 차가운 손을 따스하게 감싸 쥐고 부드럽게 말했다.“어머니는 아버지를 너무 깊이 사랑했을 뿐이에요. 아버지가 다정다감한 분이라 여기셨기에 다른 첩들의 존재도 참아내셨을 테고 뒤채로 거처를 옮기신 것도 그들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였겠죠.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아버지가 내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자 그 사실을 평생 원망하며 사셨던 거예요.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방
나는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운성은 비랑 눈이 정말 많이 오죠!”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예하나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곧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 제발 부탁할게요. 나랑 유진이, 형 앞에서 얘기 좀 잘 해주세요! 우리 둘 다 진짜 힘들어 죽겠어요!”맞은편에 앉은 예하나의 얼굴이 좀 어색해 보여서 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죠?”그때 예유진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형수님, 우리 둘은 매일 여기서 형이 가둬놓은 사람들이랑 같이 지내는데, 정말 너무 지루해 죽겠어요! 형한테 우리 좀 빨리 풀어달라고 말해주세요.”그 말에 나는 웃으며 물었다.“지금 갇혀있다고요?”한민수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우린 여기서 그 사람들을 지키고 있는데 정말 너무 지루하다니까요!”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그럼 오늘 밤에 슬쩍 얘기해 볼게요.”“부탁드려요. 형수님.”한민수와의 통화를 끝내고 난 뒤, 나는 표정이 굳어진 예하나에게 설명했다.“모두 내 약혼자의 친구들이에요.”“네, 재미있는 분들 같네요.”찻집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최희연의 전화가 걸려왔다.“수아야, 그이가 급한 일로 떠나야 하는데 나도 같이 따라가려고. 내 얼굴 흉터를 치료해주겠대.”“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돌아와서 얘기하자!”“어. 운성에 돌아가면 연락할게.”저녁 모임은 이렇게 취소되었다.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내 상황을 설명했더니 답장이 왔다.[응, 저녁에 집에 갈게.]휴대폰을 내려놓으니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나는 무심코 예하나에게 물었다.“하나 씨, 부모님은요?”“해외에 정착하셨어요.”“아, 나 너무 심심하네요.”“하아, 저도 심심해요.”...이정희는 창가에서 석지훈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갑고 무정한 그의 표정은 그 남자와 정말 똑같았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 남자의 친아들이 아니었다.이
저녁 8시가 되었는데도 석지훈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담현아가 저녁에 고정재의 연주가 있다며 음악회에 초대했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정재 씨는 휴가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친구 대신 급하게 연주하는 거래요!]집에 있기도 심심해서 나는 담현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음악회장 가는 길에 고양이 카페를 지나는데 창가 테이블에 앉아 팔로 머리를 괴고 바깥의 차들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예하나를 보았다. 내가 가까이 갔는데도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내가 그녀 앞에 서자 그제야 나를 발견한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귀여운 덧니를 보이며 찻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밤이라 찻집 안은 은은한 조명 몇 개만 켜져 있어 고풍스러운 등갓 아래 따스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물었다.“음악회, 같이 갈래요?”유리창 너머라 그녀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한번 물었다.“나랑 음악회, 같이 갈래요?”이번에는 들리는 듯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아니요. 난 여기 있다가 9시가 되면 바로 올라가서 잘 거예요.”그녀가 원하지 않으니 나는 더 권하지 않고 고양이 카페를 떠났다. 모퉁이를 돌기 전에 뒤돌아보니 그녀의 표정은 아주 쓸쓸해 보였다.이 여자도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수아 언니, 여기요!”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담현아가 혼자 서 있었다. 그녀는 얇은 긴소매 원피스 하나만 입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젊으니까 추위도 안 타나 보네.’내가 다가가서 물었다.“정재 씨는?”담현아는 웃으며 대답했다.“지금 무대 뒤에서 준비 중이에요.”나는 담현아와 함께 음악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담현아는 연주회가 이미 절반 정도 진행되었고 고정재의 연주는 10분 후라고 말했다.그녀는 이제 고정재의 스케줄을 완전히 꿰고 있었다.5분 후, 고정재가 내 옆에 왔다. 나와 담현아는 깜짝 놀랐다.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할 사
“고마워요.”내가 막다른 길에 들어설 때마다 조언해 주고 스승이자 친구처럼 나를 이끌어준 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그의 망설임 없는 대범함에도 감사했다.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다정하고 따뜻하면서 분별력 있는 사람, 고현성의 차가운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고현성...문득 그가 보낸 문자가 생각났다.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는 걸까?나는 고개를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꼬마 아가씨, 드레스로 갈아입어.”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나는 곧 하늘빛 롱드레스로 갈아입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정재의 비서가 다가와 말했다.“곧 시작합니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무대 위로 걸어 나갔다.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는 순간, 맨 뒷줄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나는 옅은 미소를 띠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잠시 숨을 고른 후, 첫 음을 눌렀다. 곧 애잔한 멜로디가 내 손끝에서 흘러나왔다.바람이 사는 거리사실 바람은 여기에 살지 않았지...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우리 모두가 어렸던 그 시절...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4분 남짓한 시간, 곡은 금세 끝났다.이어서 네 곡을 더 연주했다. 20분 정도 걸렸을까. 관객들의 우레같은 박수 속에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고정재와 담현아는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들 뒤편, 두 줄 뒤에는 태산처럼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그 남자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강했다...그리고 그 남자는 내 인생의 유일한 사랑이었다...박수갈채 속에서 난 과거의 집착을 떠올렸다. 평생 단 한 사람...나는 나의 9년간의 기다림이 그걸 증명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남자와 결혼했다.내 '평생 단 한 사람'은 그때 이미 웃음거리가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한 순간부터가 웃음거리였던 것이다.나는 고정재에게 줄 사랑을 고현성에게 줬다.그 사랑은 그토록 진실했지만, 잘못된 사
나는 무대에서 황급히 내려와 의상을 갈아입고 그 남자를 찾으러 객석으로 갔다.그러나 뒷좌석은 텅 비어 있었다.나는 급히 음악당을 나와 옆 골목에서 석지훈을 찾았다. 그는 고개를 약간 든 채 골목길 가로등을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다가가서 물었다.“뭘 보고 있는 거예요?”“이 가로등이 고장 났어.”그가 말했다.그의 말대로 불이 꺼져 있었다.나는 다가가 익숙하게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고장 난 지 얼마 안됐나 봐요. 이곳은 번화가니까 금방 고칠 거예요!”석지훈은 나를 쳐다보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윤아야, 너 평생 네 신념을 굳건히 지킬 수 있겠어?”나는 일부러 물었다.“내 신념이 뭔데요?”내 신념은 오직 평생 눈앞의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었다.하지만 난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웃기만 했다.오늘 밤의 석지훈은 좀 이상했다. 병원에 있는 이정희가 그한테 뭔가 이간질하는 말이라도 한 건가.나는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석지훈과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잠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고 나는 일부러 따뜻한 색의 침구로 바꿨다.별장에는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계시는데 항상 우리가 집에 없을 때 와서 정리해주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갈아주시는 침대 시트는 흰색 아니면 검은색이라 왠지 차갑게 느껴졌다.나는 따뜻한 색을 좋아했다. 그래야 마음도 따뜻해지는 기분이 드니까.석지훈은 30분 후에 샤워를 마치고 나왔고 그다음에 내가 샤워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보니 그는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는 평소에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았다. 혹시 무슨 걱정거리가 생긴 건가.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아니.”그의 대답에 나는 다시 물었다.“근데 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그는 고개를 돌리며 불쑥 말했다.“어머니는 마음고생을 너무 오래 하셔서 병나셨어. 방금 아버지가 그립다고 하시더라.”이정희는 나의 아버지를 미워했다.하지만 사랑하
결코 회피하거나 얼렁뚱땅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나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석지훈은 담배를 끄고 나를 품에 안으며 나지막이 물었다.“안 피곤해?”지금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나는 대답했다.“조금요.”그는 나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 잠이 들려는 순간, 석지훈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윤아야, 세상의 많은 일들은 정해진 결말이 있어. 네가 내 아내가 되는 게 바로 그 종착점이지.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기 전까지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난 네가 흔들리지 않고 주변에 휘둘리지 않으며 스스로를 억누르지 않길 바래. 이것 또한 하나의 믿음이니까.”석지훈은 내가 마음을 굳게 먹길 바라고 있었다.나약한 모습 대신 그의 아내가 되는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기를 말이다.나는 입술을 깨물고 목 안에서 간신히 소리를 냈다.“응.”석지훈이 다시 말했다.“아가야, 넌 내 삶의 전부야.”평소 애정 표현을 잘 안 하는 석지훈이 갑자기 날 삶의 전부라고 하니 마음속에 불안감이 스며들었다...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해요?”“내일 떠나야 하니까.”나는 몸을 돌려 그의 목을 꽉 껴안았다. “우리 안 만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나 며칠 뒤에 오빠를 찾아갈 건데요 뭐!”“아가야, 떠나기 전에 너와 진심을 나누고 싶고 널 더 많이 사랑해 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어. 내 마음 알지?”지금의 석지훈은 정말 많이 변했다.이전의 그 차가운 남자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네. 나도 사랑해요!”나는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는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자라고 나지막이 말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초조해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석지훈은 일어났다.나는 눈을 감은 채 뜨지 않았다. 석지훈은 욕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내게 등을 보인 채 흰 셔츠로 갈아입고 늘 입던 검은 정장을 걸쳤다. 그리고는 다가와 손바닥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나는 몽롱한 척 눈을 뜨며 물었다. “지
석지훈의 성격상 그는 절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몇 걸음 빠르게 걸어 그들을 앞질러 갔다.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있는 몇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나는 갑자기 밝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수 씨, 이따가 고양이 카페에서 만나요. 내가 커피 살게요~”한민수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수아 씨, 본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요? 나한테 웃지 말아요. 정신 못 차리겠잖아요!”내 아름다움은 고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석지훈도 예전에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일부러 석지훈의 시선을 끌려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와 고양이 카페로 갔다. 한창 손님들을 맞느라 정신없던 예하나는 나를 보자 바쁘게 말했다.“혼자 알아서 해요. 나는 좀 바빠서!”최희연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영업을 시작했다.과연 참을성이 없었다.나는 직접 최고급 작설을 꺼내 차를 우리고 창가에 앉았다. 벌써 8시였다. 바깥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카페는 운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었는데 주변은 유럽풍의 복고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화려하게 눈부셨다. 그리고 창밖에는 차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예하나가 왜 여기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차를 따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한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어디에요? 차를 몰고 갈 건데.]나는 바로 그에게 위치를 공유했다.카페에 도착한 한민수는 바쁘게 일하는 예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하나도 그를 보자마자 숨으려 했지만 한민수는 거침없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유진이가 2년 동안이나 너를 찾았는데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거야! 지한이 너 숨는 실력 하나는
한민수는 내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뜻이었다.“갈게요.”전화로 그렇게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훈 씨는 왜 운성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전에도 나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이 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이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저녁에 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한민수가 말한 연회장으로 갔다. 내가 한민수를 찾았을 때 석지훈은 2층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민수는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교한 디자인의 정장은 그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냈고 흰 셔츠 소매의 금색 단추는 그에게 고귀한 분위기를 더했다.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말이다.지금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얼마나 더 이야기할 거예요?”내 목소리를 듣고 석지훈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지훈 씨.”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관심한 눈빛으로 내 옆에 있는 한민수를 바라보았다.한민수는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야.”한민수의 말은 마치 날벼락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석지훈을 바라보았다.나는 충격에 빠진 채 물었다.“이게 무슨 말이에요?”한민수는 황급히 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한민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기억상실이에요.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어요. 의사 말로는 일시적이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는데 한두 달 안에 회복될 가능성이 높대요. 하지만 한성범은 그 한두 달 사이에 민영과 지훈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할 거예요! 기정사실을 만들어서 지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거죠.”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그가 나를 잊었다고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민수가 보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물었다.“그 사람 걱정하느라 속이 타 죽겠죠?”당연한 거 아닌가?!나는 먼저 물었다.“상태는 어때요?”“괜찮아요. 지훈은 왜 안 물어봐요?”나는 가볍게 말했다.“민수 씨 안부부터 물어야 덜 외로울 거 아니에요.”한민수는 한 씨 가문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한민영이 병원에 온 것도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한민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마음도 착하셔라.”나는 그제야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는?”“나도 아직 잘 몰라요.”그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한민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초조해서 말했다.“난 지훈 씨가 걱정돼요. 그러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내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테니까!”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했다.“우리는 습격을 당했어요. 그리고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 줬지요.”나는 서둘러 캐물었다.“누군데요?”“한성범.”자신의 할아버지를 한성범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현재 한민수와 한씨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요?”“생명에는 지장 없을 거예요.”석지훈은 한성범이 점찍은 손녀 사윗감이었으니 그를 위험하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석지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를 빨리 에르크로 데려오고 싶었다.서둘러 병실을 나와 보니 한민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네 할아버지한테 있지?”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그저 그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하지만 한민영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정말 모르는 눈치였다.나는 함승윤을 데리고 곧장 한씨 가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한성범이 집에 없다고 했다. 나는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하게 했다.한성범은 전화를 받고 웃으며 물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
핀란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가 급하게 멈추며 흔들렸지만 담현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자 운전하던 예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방금 예하나라고 했어요?”나는 원태웅이 예전에 예유진이 자신의 여동생을 좋아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예씨 가문의 실권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실권자는 예지한이었고 고양이 카페의 직원인 예하나가 아니었다.게다가 예하나는 자신이 제당 출신이라고 했다.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네, 예하나.”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형수님, 그분은 잘 지내고 있나요?”그는 예하나를 예지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담현아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화면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예지한의 어릴 적 이름이 하나예요. 고양이 카페의 그 사람, 아마 예지한 일 거예요.”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꽤나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내 말을 듣고 예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나를 에르크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뒤 예하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나 씨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전자기기를 일절 쓰지 않더군요.”그는 순간 멍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거네요.”그는 담현아와 함께 떠났고 나는 한동안 저택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자고 있던 저먼 셰퍼드 두 마리가 갑자기 놀라 깨더니 나를 향해 낮게 짖었다. 그러나 곧 나를 알아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한밤중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녀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녀석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나는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일어났다.다시 쓰러
“급한 일이에요. 얼른 넘겨줘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석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유진이랑 함께 에르크로 돌아가 있어.”곧이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뒤차로 향하려던 순간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가.”나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집...에르크에 있는 그곳.석지훈에게는 그곳이 진짜 집이었다.운성시에 정착한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큰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유진이 나를 에르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정착해야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더 이상 그와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하지만 국내에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석씨 가문이 있었다.고정재가 말했듯, 나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더 이상 과거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있다가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었다.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담현아가 물었다.“언니, 뭔 일 있어요?”“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예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둘째 오빠랑 민수 씨가 떠난 이유가 뭐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저도 말해줄 수 없어요. 아직 형수님이랑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사업적으로나 사적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일이에요.”나는 늘 우리가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럽게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여겼다.당연히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곧 전 세계였다.그는 다른 이들의 전부이기도 했다.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전부였다.“그래요. 오빠가 있으면 그게 곧 전 세계죠.”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지훈은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한민수 일행을 뒤따라갔다.앞서가던 한민수는 계속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겠지만 그 역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마치 한씨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물러난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히 포기했다.예유진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혈통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있었다.마치 과거에 내 아버지에게 발각된 석지훈처럼...아버지는 갖은 술수를 동원해 석지훈의 손에서 석씨 가문을 빼앗아 내게 넘겼다.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었고 늘 곁에 두고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결국엔 나라는 낯선 존재가 더 중요했다.정해진 현실 속에서 운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한민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유진아, 넌 어떤 순간에 여자한테 가장 설레?”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소 아련하게 말했다.“내 셔츠를 입고 있을 때.”한민수는 흥미를 느낀 듯 되물었다.“사모님도 네 셔츠를 입은 적 있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곁눈질로 석지훈을 바라보았더니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문득,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발코니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한민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왜 혼자 웃어요?”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재밌는 거 있으면 좀 공유해줘요.”나는 웃기만 했고 그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공항 밖으로 나와 그들은 한차에 탔고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