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재가 담현아를 데려가고 나니 이젠 술에 취한 원태웅만 남았다. 나는 머리가 아파서 현정우에게 원태웅을 근처 호텔로 데려가라고 했지만 그는 현정우의 팔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 집에 데려왔다. 나는 꿀물을 조금 타서 현정우에게 시켜 먹이고 석지훈의 셔츠로 갈아입히게 했다. 그가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현정우에게 말했다.“잠자는 곳도 가리는가 봐요.”현정우는 웃으며 말했다.“호텔에서 자는 게 불편한가 보죠.”나는 문을 닫고 현정우에게 물었다.“한민영은 요즘 어디 있대요?”나는 어젯밤 그녀가 석지훈에게 보낸 문자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석지훈, 나 지는 거 두렵지 않아.]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현정우가 대답했다.“유럽 곳곳을 떠돌며 예지한의 행방을 찾고 있는 것 같아요. 예지한은 한민영의 유일한 절친이니까요. 한민영은 2년 동안 그녀를 찾았지만 아직까지 아무 소식도 없다고 합니다.”현정우는 한민영의 일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따로 조사를 해 본 것도 아닌데 말이다.나는 무심코 말했다.“잘 아시네요.”현정우는 차분하게 대답했다.“얼마 전 석 대표님께서 조사를 시키셨습니다. 그녀가 다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운성과 동성 두 곳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고요.”석지훈은 한민영에게 늘 냉정했다.하지만 그의 그런 태도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네, 나랑 연 씨 저택에 잠깐 다녀와 주세요.”나는 하루 종일 두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아이들은 가끔 나에게 와서 엄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석지훈은 나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원태웅은 이미 술이 깨서 떠나고 없었다.밤늦도록 석지훈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연락 한 통 없이 말이다.예전의 그도 이랬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는...설마 집에 자신을 기다리는 여자가 있다는 걸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 걸까?아이들에게조차 차가운 태도를 보이는 그에게 내 마음은 점점 얼어붙어 갔다.날이 다 밝아가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거절하세요.”한성범이 나한테 예의를 안 차렸으니 나도 그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었다.그가 석지훈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비서는 공손하게 답했다.“알겠습니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비서가 사무실을 나서자 나는 송이연이 생각났다.그녀는 왜 갑자기 송승아를 연시혁에게 보냈을까?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송이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나는 사무실을 나가서 강해온을 찾아 조사를 부탁했다. “강 비서, 송이연의 최근 소식을 알아봐 줘요.”강해온은 전화를 걸어 부하 직원에게 지시했다.곧 소식이 왔다.“송이연 씨는 계속 병원에 입원 중이랍니다.”입원...그녀가 왜 갑자기 입원했을까?나는 그녀가 신장이 하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혹시 신부전증 때문일까?생각하기도 두려웠다. 나의 엄마는 신장이 하나 없어서 신부전증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송이연도 마찬가지로 신장이 하나 없었다.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왜요?”“병원에선 독감 때문에 폐렴이 왔다고 한 달째 입원 중이라고 하더라고요.”그때 석지훈에게서 전화가 왔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솔직히 화났다.나는 휴대폰을 넣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휴게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현정우에게 다가가 지시했다.“상주시로 가요.”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습니다.”내가 차에 타자마자 송이연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수아 씨, 저를 찾으셨나요?”우리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그녀는 항상 부드럽게 나를 수아 씨라고 불렀고 나 역시 그녀를 이연 씨라고 정중하게 불렀다.나는 망설이며 물었다.“왜 승아를 시혁에게 보냈나요?”그녀는 내가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송이연은 침묵하다가 한참 후에야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제가 아팠어요. 폐렴에 걸려서 아이에게 옮을까 봐 잠시 시혁 씨에게 맡긴 거예요. 그 사람은 아이의
우리가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주민솔의 정신 상태는 매우 좋아 보였다.나를 보자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런 죄수를 보러 석씨 가문 가주까지 행차하셨네요.”“그쪽이랑 나랑은 원한이 없잖아요.”“하지만 당신 베프를 괴롭혔잖아요.”주민솔은 꽤 덤덤했다.“그러게요. 내 절친을 괴롭혔으니 여기서 반성해야죠. 그쪽이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지만 그 사람은 당분간 이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그러니 여기서 좀 더 있어야 할 거예요.”진유겸의 양모가 위험에 처해서 그는 당분간 귀국할 수 없었고 고정재의 사람들이 이 일을 조사하고 있으니 오래 가두진 못해도 최희연한테만큼은 제대로 된 결과를 보여줄 생각이었다.주민솔은 단호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기다릴 거예요. 어릴 적처럼요. 난 그를 기다릴 수 있어요. 그 사람은 절대 날 실망시킨 적 없고 버린 적 없으니까요!”“그 사람은 당신을 버렸어요.”내가 말했다.그러자 주민솔은 반박했다.“아니에요!”“유겸 씨는 당신을 버리고 희연을 선택했어요. 그쪽 생각이 어떻든 간에 그건 배신이에요. 주민솔 씨, 그 사람은 당신한테 끝까지 충실하지 않았어요.”주민솔은 충격을 받았지만 고집스럽게 말했다.“아니에요!!”나는 일부러 약 올리듯 말했다.“당신도 알고 있었잖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희연이 얼굴을 그렇게 만들었겠어요?”“그녀는 당해도 싸요! 감히 내 남자를 꼬시다니! 천한 년이 어떻게 감히...”그 말을 듣자 나는 손톱으로 그녀의 얼굴을 세게 할퀴었다.그녀는 비명을 질렀다.“뭐 하는 짓이에요?”“당신이 희연에게 한 짓, 언젠가 벌 받을 거예요.”주민솔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면서도 나는 죄책감이 없었다.“이건 그냥 이자예요. 난 반드시 당신을... 아니지. 희연이 복수는 희연이 스스로 해야지. 걔가 언젠가 당신을 빈털터리로 만들 거예요!”최희연이 그녀에게 복수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센 척은 해 뒀다.그때 석지훈에게서 다시 전화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니 연한 화장이 지워졌다. 그래서 파우더를 덧바르고 팥죽색 립스틱을 발랐다.하지만 립스틱을 바르고 나니 괜히 짜증이 밀려왔다.화장실에서 잠시 머물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지나는 순간, 느닷없이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감싸 안고 입을 막았다. 두려움에 휩싸여 발버둥 치자, 뒤에 있던 사람은 갑자기 나를 옆방으로 끌고 갔다.창고였다.안에는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었고 공간은 매우 좁았다.이때 뒤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내 몸을 돌려세웠고 그 차가운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나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짜증스럽게 소리쳤다.“석지훈.”그는 눈살을 찌푸렸다.“음?”그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버릇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어쩌면 과거의 위압적인 습관이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예전 같았으면 그의 허리나 목에 매달려 애교를 부렸겠지만 지금은 마음이 답답해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윤아는 지금 날 피하는 거야?”그가 나를 윤아라고 부를 때는 목소리가 가장 다정했다.“아니요.”나는 부정했다.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은 순간부터 내가 토라진 것을 알고 직접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그는 습관처럼 내 뺨을 어루만지며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 있어?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내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나는 여전히 부정했다.“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그가 말했다.예전 같으면 내가 부정하면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돌아갔을 텐데 오늘은 내 얼굴에 다 쓰여 있다고 했다.이제 눈치도 빨라진 모양이다.이런 그의 모습에 나의 마음이 약해져 갔다.하지만 여전히 화가 났다.특히 아이에게 차가운 그의 태도가 너무 화났다.내가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석지훈의 서늘한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차가운 손
[쯧쯧, 이거 누구야?]한민수가 고소해하는 문자를 보냈다.[이거 보니까 오늘 누구는 집에 가서 빨래 판에 무릎 꿇고 빌어야겠네. 형수님, 빨래판 없으면 내가 당장 차를 몰고 갖다 드릴게요.]한민수가 아직도 그녀를 형수라고 부르다니...자기 체면은 생각도 않는 듯했다.원태웅은 겁이 많은 편이라 석지훈을 감쌌다.[형 놀리지 마. 카톡 쓴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라서 그래.]예유진이 답했다.[가입한 지 2년 다 됐잖아.][그래도 평소에 쓰는 거 봤어?]원태웅이 물었다.예유진: [하긴. 형은 형수님 때문에 카톡을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사용법도 잘 모르니 잘못 보낼 수도 있지. 다들 잊어버려. 없었던 일로 하자!]석지훈이 나 때문에 카톡을 시작했다고?곧이어 예유진은 폭소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근데 나 계속 웃음이 나오는데 어떡하지? 형이 이렇게 공처가인 줄 몰랐네! 하하, 형 입에서 '달래다'라는 말이 나오다니 대박!]한민수가 답했다.[웃고 싶으면 웃어. 뭘 그렇게 눈치 봐?]그 아래로는 한민수와 예유진이 석지훈을 놀리는 문자로 가득했다. 담유미는 조용히 있었고 내가 들어온 후로 아직까지 한민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내가 너무 오랫동안 휴대폰만 보고 있자 석지훈의 인내심은 바닥난 듯했다. 그는 언짢은 목소리로 물었다.“윤아야, 뭘 보고 있어?”휴대폰을 그에게 건네주자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하지만 휴대폰을 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점점 하얗게 변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에서 어딘가 음울한 기운이 느껴졌다.나는 다시 물었다.“내가 자주 화내요?”석지훈: “...”딱 걸린 것이 꽤나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특히 석지훈 같은 남자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더니 갑자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서 놀아. 난 차에서 기다릴게.”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창고 문을 열고 바로 나가버렸다. 내 핸드폰도 가져간 채로.옷매무새
담현아가 주스를 비운 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자 나는 원태웅에게 말했다.“오빠, 나랑 희연이 먼저 갈게요.”원태웅은 술에 취해 소파에 누워 있었고 문태림은 그의 다리에 앉아 있었다. 원태웅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문태림이 짜증스럽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얼른 가요. 여기서 귀찮게 하지 말고.”나: “...”원태웅을 생각해서 나는 꾹 참고 가방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최희연과 함께 룸을 나섰다.운성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봄비 특유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빗줄기였다.현정우는 우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우산을 들고 달려왔다. 나는 우산을 받아 최희연의 머리 위에 씌워주며 물었다.“집까지 바래다줄까?”“아니야. 차 불렀어.”“곧 도착해?”내가 물었다.“어. 몇 분이면 올 거야.”나는 최희연이 길가에서 차를 기다리는 동안 함께 있었다. 빗물에 그녀의 어깨가 젖자 나는 우산을 그녀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주민솔이 원망스러워?”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 원망스러워.”나는 다시 물었다.“복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오늘 경찰서에서 주민솔을 만나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나는 마음속에 강한 반감이 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최희연이 복수하기를 바랐다.그녀가 복수를 원한다면 나는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었다.설령 진유겸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 해도 말이다.그녀가 복수를 원하지 않더라도 내가 대신 복수해 줄 것이다.적어도 주민솔이 그렇게 쉽게 경찰서를 나가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내 눈앞의 여자에게 정의를 찾아줘야 했다.최희연은 나의 유일한 절친이니까.“응, 내 방식대로 하고 싶어.”그녀가 말했다.최희연은 손을 뻗어 우산 밖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받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나 때문에 석씨 가문의 힘을 이용해서 유겸 씨와 싸우지 마. 난 내 방식대로 할 거야. 수아야, 난 꼭 스스로 복수할 거야!”최희연은 내가 석씨 가문의 힘을 쓰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
석지훈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매우 심란했다. 현정우는 추측하며 말했다.“가주님, 석 대표님은 성격이 원래 차가우셔서 사람 많은 곳에 있는 것을 불편해하시지만 가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문 앞에서 따뜻하게 기다리고 계신 것 같습니다.”“흥, 따뜻하게?!”석지훈은 분명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었다.현정우는 내가 화난 것을 보고 더는 석지훈의 편을 들지 못했다. 나는 돌아서서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김은정은 내가 또 혼자 온 것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지훈이는? 애들 한 번도 보러 안 오네!”그녀의 질문에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석지훈이 바로 지금 이 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차라리 기다릴지언정 아이들을 보러 오지 않는다니!나는 매우 언짢은 기분으로 말했다.“바쁘대요.”내 말을 듣고 어머니는 더 이상 석지훈에 대해 묻지 않았다.나는 별장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저녁 9시쯤 현정우가 나에게 말했다.“석 대표님은 아직도 문 앞에 계십니다.”석지훈은 벌써 대문 앞에서 다섯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그가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나는 더 화가 났다.10시가 되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현정우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문 앞에 있는 석지훈의 검은색 벤틀리가 한눈에 들어왔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현정우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백미러로 석지훈의 차가 뒤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보면 볼수록 화가 치밀었다.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현정우에게 물었다.“저 사람을 탓해야 할까요?”아이들에게 냉담하다고 탓해야 하는 건가.아니면 어젯밤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연락 한 통 없었다고 탓해야 하는 건가.현정우가 나에게 물었다.“가주께서는 아이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그리고 그는 너무 제멋대로 행동했다.나는 이 말을 현정우에게 전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석 대표님이 늘 혼자 행동하시고 너
남자는 처음으로 내 머리를 말려 주는 것이었지만 동작이 매우 부드러웠다.내 머리는 숱도 많고 길어서 거의 30분 동안 드라이어로 말렸다. 그 후 그는 빗을 찾아내 머리를 빗어 주었는데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내가 계속 침묵을 지키자 석지훈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윤아야, 나한테 화난 거야?”진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내가 화난 거 뻔히 알면서 말이다.아마도 그는 우리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예전에는 내가 그를 이렇게까지 무시한 적이 없었으니까.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뒤에서 내 목을 감싸 안고는 몸을 숙여 턱을 내 어깨에 기대고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원했다.“윤아야, 제발 화 풀어.”계속 윤아라고 부르는 소리에 내 마음은 흔들렸다.이렇게 나오면 나는 진짜 버티기 힘들었다.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가 연 씨 별장 문 앞에서 7, 8시간 동안이나 기다리면서도 애들은 보러 안 들어왔다는 게 이해가 안 됐어.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나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속으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나 화 안 났어요.”내 말투는 딱딱했다. 석지훈은 내 몸을 더 세게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뭘 잘못했어?”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단 말인가?마치 내가 괜히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내가 막 화를 내려는 순간, 석지훈의 차갑고 큰 손이 갑자기 내 턱을 감쌌다.“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 줘, 윤아야. 속으로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난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그의 태도는 매우 진지했다.게다가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다니...그의 말에 끓어오르던 화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나는 눈을 감았다 뜨면서 물었다.“왜 집안에 안 들어왔어요?”나는 그가 왜 아이들을 보러 오지 않았는지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문 앞에서 널 기다리고
며칠 전에 석씨 별장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이미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어젯밤 강물에 빠진 후로 바로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파서 급히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의사를 데리고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약을 처방받은 뒤 링거를 맞았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깨어나니 이미 점심이었다.운성시는 다시 우중충한 날씨가 되었다. 겨울은 이미 지나갔고 눈은 오지 않았지만 초봄이라 비가 유난히 자주 내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한민수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그는 의도적으로 말했다.“오늘 밤 놀러 갈래?”“안 가요.”“알겠어, 그럼 끊을게.”전화를 끊고 배가 고팠지만 아직 링거를 맞고 있는 상태라 배달을 시킬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고정재가 전화를 걸어왔다.“집이야?”어젯밤 너무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나는 운성시의 아파트로 갔고 고정재는 그 주소를 알고 있었다.그가 물어본 집은 바로 그 아파트를 뜻하는 것 같았다.나는 여전히 의문이 들어 고정재에게 물었다.“어느 집이요?”“아파트, 여기서 보니까 현성의 위치가 네 집 근처에 있더라. 근데 나 지금 지금 국내에 없어서 혹시 네가 도와줄 수 있을까? 미안,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 근데 현성이가 네 말만 듣는 것 같아서.”“알겠어요. 집으로 데려다줄게요.”나는 링거를 빼고 몸을 힘겹게 일으켜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고현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검은 우산을 들고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비에 젖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그는 온몸이 젖어 있었지만 여전히 비를 맞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나는 급히 달려가서 물었다.“여기서 뭐 해?”고현성은 머뭇거리며 설명했다.“너 오늘 나 보러 온다고 했잖아. 근데 집에서 기다리다 못 참고 여기까지 왔어. 네 연락처도 없고 여기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수아는 역시 여기서 살고 있었구나.”그는 본능적인 기억을 따라 이곳으로 찾아왔다.“그럼 왜 비를 피하지 않고
방금 그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원태웅은 갑자기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방금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맞혀볼래?”나는 그를 흘겨보며 답했다.“얼른 알려줘요.”“네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어.”이건 석지훈에게 꽤 어려운 일이었다.나는 웃으며 물었다.“그거 말고 또 있어요?”“그리고 오늘 밤에 한 말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냐고 하더라? 네가 형 앞에서 몇 번이고 그 얘기를 했다고.”석지훈은 이혼한 여자를 좋아할 이유가 있냐고 했었다.나 역시 그 말을 생각하면서 그의 앞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다. 나는 궁금한 듯 물었다.“그럼 뭐라고 대답했어요?”“답을 못 할 뻔했지. 눈치도 못 채고 되레 형한테 물었단 말이야. 다른 여자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냐고?”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그리고 오빠는 전화를 끊었겠죠?”“내가 방심했나 봐! 바로 둘째 형한테 메시지 보낼 거야. 누구든지 그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지, 특히 예쁘고 자존심 강한 여자는 더욱 상처받을 거라고 해야겠어.”원태웅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오빠들은 항상 둘째 오빠 앞에서 내가 예쁘다고 말하네요.”원태웅은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지, 원래 예쁘잖아. 아무래도 우리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니까 형도 궁금해하지 않을까?”“괜찮아요, 이미 나에게 관심을 가진 것 같은데요?”이제는 그냥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우리 수아 자신감 넘치는데?”“당연한 거 아닌가요? 유진 씨도 저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는데요. 오늘 깜짝 놀랐잖아요, 다행히 잘 넘겼지만.”그 말을 꺼내자마자 원태웅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네가 말 안 했으면 까맣게 잊었을 거야, 유진 때문에 둘째 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지금 당장 전화해서 경고해야겠어.”원태웅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다른 한편...통유리 창 너머로 반짝이는 온 도시의 네온 불빛과 달리 집 안은 깜깜했다. 유일하게 석지훈의 핸드폰만 불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영상을 보고 나서 원태웅이 보낸 메
나만 손해를 보게 될 거라고?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손해 보는 게 그와 무슨 상관이지?나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순간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내게 경고하듯 귓가에 울려 퍼졌다.“이 세상에는 항상 더 강한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비록 지금은 수아 씨가 석씨 가문을 쥐고 있지만 그것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여지를 두는 게 결국 좋을 겁니다.”강가에 파도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석씨 가문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지훈 씨라는 건가요? 그럼 한번 해보세요. 지훈 씨도 잘 알잖아요. 결과는 두 사람 모두 상처만 남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제가 왜 가만히 있어야 하죠? 그때마다 항상 사람들에게 당하기만 했는데 이제 석씨 가문을 제 손에 쥐었는데 제가 왜 참아야 하죠?”석지훈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표정이 굳어졌다.“정말 고집이 심하네요.”나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지훈 씨 마음대로 하세요.”석지훈과 처음 만난 건 우리가 강에 빠졌을 때였다.그때 나는 강에서 그에게 키스했었고 그 일이 그의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방금 내가 했던 말이 상처가 됐을지 몰라도 나는 그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나는 서로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석지훈은 내 태도에 한참을 멈춰 서 있다가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강에 뛰어들었다.차가운 강물에 휩쓸려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수영을 거의 할 줄 몰랐다. 석지훈이 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 경호원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그가 있으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석지훈이 나를 구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며 물을 삼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쯤 누군가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나를 물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나는 급히 그의 목을 끌어당긴 채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물속에서는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분명히 그에게 입을
나는 잠시 멈춘 뒤 말했다.“한씨 가문 쪽은 함 집사에게 맡겨. 어르신께서 운성시를 떠나지 않으면 그냥 두고, 만약 떠나려고 하면 지훈 씨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가두어 두면 돼. 참, 아까 어르신께서 에르크 별장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비서가 설명했다.“오늘 금방 운성시에 도착했습니다.”나는 눈을 감고 속에 쌓인 분노를 가라앉혔다.고현성은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내 손을 꼭 잡은 채 위로를 건넸다.“수아야, 나 때문에 화내지 마. 그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으니까 네가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이제 와서야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다니.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 화 안 났어.”그리고 곧장 물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고현성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도 훤칠했다.비록 정신이 온전치 않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다.“아까 민영이 따라 쇼핑몰에 갔다가 민영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거든. 그때 갑자기 그 여자가 나타난 거야. 나를 수아한테 데려다주겠다고 했어.”그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여자는 나를 속이지 않았어. 난 수아를 만났고 수아는 내 손도 잡아 줬잖아.”그는 우리가 맞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나는 그의 순진한 표정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나는 비서에게 지시했다.“집까지 데려다주세요.”그러자 고현성은 서운한 듯 물었다.“수아야, 나를 보내려고? 이제 금방 만났는데...”그는 예전에도 종종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그는 내가 이런 모습에 약하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곁에 있던 비서가 나를 대신해 말했다.“현성 씨,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대표님께서 현성 씨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러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 나면 곧 찾아가실 겁니다.”그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수아야, 정말
나는 애초에 그들이 이렇게까지 고현성을 모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눈앞에서 잔뜩 위축된 채 겁먹은 듯한 그를 보니 가슴 속에 답답함이 차오르며 알 수 없는 연민이 느껴졌다.나는 몰래 눈물을 훔치며 애써 참아냈다. 그리고 한성범을 바라보며 물었다.“고현성을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단지 모욕하기 위해서입니까?”한성범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굳이 바보 같은 놈과 엮일 이유가 없지 않니? 스스로 찾아온 거지, 우리 한씨 가문과 무관하네.”주변의 하객들은 대부분 자리를 떠났고, 이 일과 관련 있는 자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 중 나에게 적의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주민솔이었다.그녀는 이미 모습을 감췄고 나는 곧바로 담유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유미 씨가 데려온 거예요?”담유미 역시 나에게 호의를 가질 리 없었다.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나는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렸다.“거짓말하지 말고 잘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지금 거짓말을 해도 곧바로 사람을 시켜 이 일을 전부 조사할 수 있어요.”그녀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눈빛에는 순간적인 당혹감이 스쳐 갔다. 하지만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그때, 갑자기 고현성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수아야,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 나 데려가 줄 수 있어?”이 순간, 그는 나를 수아라고 불렀다.나는 전에 그에게 내 이름이 수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그렇다면... 그의 아내 수아뿐만 아니라 나도 기억하는 걸까?나는 애틋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 데려갈게.”그리고 원태웅에게 비켜달라고 말한 뒤, 덤덤한 시선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며 내 뒤에 서 있던 비서를 향해 조용히 지시했다.“이 일이 누구의 짓인지 철저히 조사해 주세요. 만약 어르신의 소행이라면 즉시 이 저택을 폭파해 버리세요. 혹여나 담유미 씨가 한 짓이라면 담씨 가문을 매입해서 담현아에게 넘겨주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담유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소리를 질렀다.“수아 씨가 아무리 권력을 가졌다
내가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데 누군가 말했다.“고현성은 이제 끝났어. 잘나가던 인생이 재앙 덩어리를 아내로 맞는 바람에 망한 거잖아!”재앙 덩어리...나는 눈을 감고 화를 가라앉혔다. 그때 고현성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 사람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그는 모든 것을 잊었지만 수아는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오직 그의 수아만을 옹호하고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침묵하는 석지훈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오히려 담유미가 물었다.“그럼 넌 바보야?”바보에게 바보냐고 묻다니.나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입 다물어요!”“왜? 부끄러워서 화내는 거야?”한성범은 이때다 싶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그럼 고현성이 바보가 아니라는 거야? 연수아, 난 널 초대 안 했으니 나가. 곧 ‘바보극' 공연이 있거든!”한성범은 석지훈의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다.내가 정말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나는 눈앞의 술잔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하지만 석지훈은 그를 위해 막아냈다. 마음속에서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그때 고현성이 황급히 일어나 나를 진정시켰다.“저 사람들 때문에 화내지 마. 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 수아는 그냥 내 아내일 뿐이야!”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차가운 눈빛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저 사람을 감쌀 건가요?”석지훈은 차가운 침묵으로 나에게 답했다.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술잔을 다시 한성범에게 던졌다. 하지만 남자는 가볍게 받아 바닥에 던져버렸다.유리 조각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흩어졌다.그때 담유미가 차갑게 말했다“연수아 씨, 너무 건방지네요.”그러자 담현아가 차갑게 꾸짖었다.“입 닥쳐!”담유미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원태웅은 황급히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윤아야, 화내지 마. 우리 여기서 나가자!”나는 눈
석지훈은 당연히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에서 위로 그를 올려다보며 비판했다.“오후에 그 일은 당신이 잘못했어요!”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음?”“나는 그 사람들과 친분이 있어요. 친구처럼. 그들이 나를 유람선에 초대한 건 내가 그들과 어울릴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석지훈 씨라고 했죠? 설마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당신 주변에 자주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근데 내가 당신의 무엇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이 우리 석씨 가문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내 말은 다소 따끔했고 석지훈의 얼굴은 차가워졌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어떤 사람들은 가끔 자기 생각에 빠져 착각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혹시 당신 마음속으로는 나를 좋아하는데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나를 피하고 당신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설마 마음이 흔들릴까 봐 두려운 건가요?”석지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나는 눈치껏 말을 돌렸다.“물론.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당신 속마음을 알 수는 없죠. 됐어요, 당신이랑 말싸움하기 귀찮아요!”그는 차갑게 말했다.“허튼소리.”나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평소에 나한테 신경 끄세요!”석지훈은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못 참네. 그 성격에 어떻게 여자 없이 지금까지 버텼을까? 아마도 내가 운이 좋은가 봐. 안 그러면 당신을 어떻게 얻었겠어!”‘지훈 씨,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신앙처럼. 당신 말대로 이 길을 따라갈게! 당신이 나에게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다 기억해둘 테니까! 나중에 똑같이 갚아줄 거야!’담현아는 몇 분 동안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나는 놀리듯 물었다.“부부끼리 무슨 달콤한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네. 이제 푹 빠진 거야?”담현아는 웃으며 물었다.“푹 빠졌다는 게 사랑한다는 뜻이에요?”내가 되물었다.“그럼 아니야?
담현아는 의리가 있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홀을 나와 뒤뜰을 찾아갔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갑자기 고현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담현아가 먼저 그를 언급했던 것이다.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나 아저씨한테 고현성의 현재 상황을 들었어요. 그의 지금 상황이... 아저씨는 아주 괴로워하더라고요. 결국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수아 언니는 어때요?”담현아는 내 마음이 아픈지 묻고 싶어 했다내 마음이 안 아플 리가 있겠는가?그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내 전남편인데.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게다가 지금의 고현성은 변하고 있었다.그는 예전의 그 남자와는 완전히 달랐다.그는 심지어 아이를 나의 생일선물로 돌려주기까지 했었다.나는 담현아 앞에서 고현성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기분이 다운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아무렇지도 않아. 근데 희연이가 요즘 연락 오던?”“네. 흉터 제거 수술을 받아서 아이스랜드에서 한동안 머물러야 한대요. 왕자현 씨가 옆에서 계속 돌봐주고 있다고 하더라고요.”담현아가 왕자현을 언급하자 나는 흥미가 생겨 말했다.“왕자현 씨 집안이 엄청 부자라며?”담현아는 뭔가 아는 듯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왕씨 가문은 세력은 없어도 돈은 엄청 많죠.”돈이면 다 되지. 돈이 곧 힘인데.담현아가 뭔가 더 말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급히 일어서며 고정재의 전화라고 했다.담현아가 남편 전화를 받으러 뒤뜰을 나가자 앉아서 할 일이 없던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바로 그때 나는 2층 발코니에서 고독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미소를 짓고 떠나려 했다.그런데 그가 뜻밖에도 나를 불러 세웠다.“연수아 씨.”나는 걸음을 멈췄다. 석지훈이 나를 부른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웠다.오후에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그가 그렇게 차가우니 나도 굳이 아부할 필요는 없었다.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우리가 그렇게 친했나요?”그는 내 질문
담현아는 옷을 갈아입고 싶어 했다. 내 차에도 여벌 옷은 있었지만 우린 키 차이가 있었고 예지한도 여기 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를 근처 쇼핑몰에 데려갔다.담현아는 쇼핑이 빨랐다. 핑크색 롱드레스를 입으니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 그녀는 또 반지 몇 개를 손가락에 끼고는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뻐요?”담현아는 워낙 예뻤기에 뭘 입어도 예뻤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말했다.“아주 예뻐.”담현아는 바보같이 웃으며 말했다.“저는 꾸미는 걸 잘 안 해서...”그녀는 쇼핑몰 화장대에서 가볍게 화장을 하고 나서야 나와 함께 한씨 가문으로 갔다. 그리고 경호원을 많이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오늘 한씨 가문에는 일부러 트집 잡으러 가는 거라 나도 준비를 해뒀다. 휴가가 방금 끝난 비서에게 문자를 해두었던 것이다.한씨 가문에 도착하니 비서는 이미 와 있었다. 내 옆에 있는 23명 외에도 비서는 꽤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다.비서는 우리 뒤를 따라 들어가고 나머지는 입구를 지켰다. 담현아는 초대장을 내고 들어가자마자 담유미를 발견했다.흰색 이브닝드레스에 진한 화장을 한 담유미는 큰 키 덕분에 드레스가 참 잘 어울렸다. 담현아는 그녀를 불러 세우며 물었다.“담유미, 너 엄마 아빠 앞에서 무슨 말을 했어?”담유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너 지금 언니한테 따지는 거야?”“미안하지만, 난 오빠밖에 없어.”담현아의 말은 너무 매몰찼다.담유미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곧 설명했다.“난 네 일에 관심 없어. 부모님은 오빠한테 네 남자친구 얘기 들으신 거야.”담현아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너랑 상관없는 일이네!”담현아의 말투는 꽤나 퉁명스러웠지만 담유미는 별말 없이 얼굴만 굳힌 채 가버렸다.그녀가 가고 나서야 담현아가 말했다.“우리 집의 골칫거리는 바로 저 여자인데 집안 사업까지 쥐고 흔들고 있죠. 하지만 뭐, 나쁘진 않아요. 어차피 나랑 오빠는 담씨 가문의 사업에는 관심 없으니까!”담유미에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