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처음으로 내 머리를 말려 주는 것이었지만 동작이 매우 부드러웠다.내 머리는 숱도 많고 길어서 거의 30분 동안 드라이어로 말렸다. 그 후 그는 빗을 찾아내 머리를 빗어 주었는데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내가 계속 침묵을 지키자 석지훈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윤아야, 나한테 화난 거야?”진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내가 화난 거 뻔히 알면서 말이다.아마도 그는 우리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예전에는 내가 그를 이렇게까지 무시한 적이 없었으니까.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뒤에서 내 목을 감싸 안고는 몸을 숙여 턱을 내 어깨에 기대고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원했다.“윤아야, 제발 화 풀어.”계속 윤아라고 부르는 소리에 내 마음은 흔들렸다.이렇게 나오면 나는 진짜 버티기 힘들었다.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가 연 씨 별장 문 앞에서 7, 8시간 동안이나 기다리면서도 애들은 보러 안 들어왔다는 게 이해가 안 됐어.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나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속으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나 화 안 났어요.”내 말투는 딱딱했다. 석지훈은 내 몸을 더 세게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뭘 잘못했어?”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단 말인가?마치 내가 괜히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내가 막 화를 내려는 순간, 석지훈의 차갑고 큰 손이 갑자기 내 턱을 감쌌다.“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 줘, 윤아야. 속으로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난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그의 태도는 매우 진지했다.게다가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다니...그의 말에 끓어오르던 화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나는 눈을 감았다 뜨면서 물었다.“왜 집안에 안 들어왔어요?”나는 그가 왜 아이들을 보러 오지 않았는지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문 앞에서 널 기다리고
석지훈은 나의 약혼자이고 앞으로 나의 남편이 될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내 두 아이의 아빠이기도 했으니 나는 그들 사이가 서먹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서로 가까워지기를 바랐고 석지훈이 나에게 주는 따뜻함을 아이들에게도 조금 나눠 주고 너무 차갑고 냉담하게 대하지 않기를 바랐다.나중에 애들이 커서 석지훈의 냉정함을 원망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석지훈은 나를 놓아주고 내 옆에 앉았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담담하게 설명했다.“나는 아이들을 좋아해. 네가 목숨을 걸고 낳아 준 아이들이니까. 나는 네가 그 아이들을 내 곁으로 보내 준 것에 감사하고 네가 나를 위해 희생한 것에 감사해. 하지만 윤아야, 사람마다 교육 방식이 다르 듯이 내가 아이들에게 냉담하게 대하는 것은 사실이야. 나는 아이들이 나에게 의존적으로 자라는 걸 원치 않아. 난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서 앞으로 혼자서도 모든 일을 해낼 수 있기를 바라거든.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말이야.”이것은 석지훈이 처음으로 나에게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아이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자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나는 그저 아이들이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나는 내 생각을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가볍게 내가 잘 아는 그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야, 이 세상은 네 생각처럼 안전하지 않아. 지금은 우리가 이 세상을 쥐고 있다지만 우리도 언젠가 늙을 거야! 결국 이 세상은 젊은이들의 것이지.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의 권력은 다시 재편될 거야. 우리 둘도 아이들을 평생 지켜줄 수는 없잖아. 게다가 나에게는 원수가 많고 아이들은 내 핏줄이기 때문에 평탄한 삶을 살 수는 없을 거야. 아이들이 스스로를 지키려면 자신의 힘으로 권력의 정점에 서야 해.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강해져야 하지. 그게 바로 석씨 가문이 어린 후손들을 집에서 내보내 수련시키는 이유야. 거대
아침에 눈을 뜨니 석지훈은 옆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베개 옆에 쪽지를 남겨 두었다.“윤아야, 나 회의가 있어서 동성에 가.”그는 정말 보고하기 시작했다.그는 말한 것은 꼭 지키는 성격이었다.상처는 거의 다 나았지만 석지훈의 소심한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나는 쪽지를 서랍에 넣고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운성에는 여전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정원에는 살구꽃이 만발해 있었다. 곧 복숭아꽃과 배꽃도 피어날 것이다. 시간이 되면 석지훈과 함께 비 오는 날 침대에 누워 꽃구경을 해야겠다.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정말 아름답다.”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날들이다.나는 창문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코끝에 맑은 향기가 가득했다. 나는 창가에 한참 서 있다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국제전화였다.나는 전화를 받고 물었다. “누구세요?”“접니다. 진유겸.”진유겸이 왜 갑자기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나는 그가 최희연에게 한 짓을 떠올리며 차갑게 물었다.“무슨 일로 전화하셨죠?”그는 내 말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희연이는 어디 있어요?”나는 쏘아붙였다.“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내 사람 말로는 운성에서 사라졌다던데.”나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몰라요. 끊을게요!”전화를 끊고 나는 비서에게 최희연의 행방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한참 뒤 비서가 나에게 보고했다.“아이스랜드의 작은 마을에 있습니다.”나는 놀라서 물었다. “언제 갔대요?”“어젯밤에 급하게 비행기 표를 예매했습니다.”“갑자기 아이스랜드에는 왜 갔을까요?”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대표님,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비서의 말에 나는 마음속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에게 지시했다.“아이스랜드로 갈 준비해요. 돌아오는 길에 F 국에 들릴 테니 사람을 시켜 윤민이를 F 국으로 보내 주세요.”나는 석윤민에게 작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다.앞으로
석지훈이 그의 앞에서 몇 번이나 그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석지훈은 그의 앞에서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고현성이 연수아에게 조금만 더 잘해 줬더라면 자신은 그녀를 가질 수 없었을 거라고 말이다.그리고 고현성은 다시는 연수아를 되찾을 수 없었다.한편...비행기에서 내린 최희연은 두꺼운 패딩을 꽉 여미며 공항 입구로 나갔다. 거기에는 경호원처럼 보이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그녀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왕자 씨가 보내신 분들인가요?”“네. 최희연 씨, 저희를 따라오시죠.”최희연은 고개를 들어 아이스랜드의 차가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이 땅을 밟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그녀는 복수하고 싶었다.그 남자를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그리고 연수아가 걱정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이곳에 왕자라는 사람을 찾으러 왔다.맞다. 왕자는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최희연은 그것이 가명일 거라고 생각했다.누가 진짜 이름을 그렇게 짓겠는가.경호원들이 그녀를 데려간 곳은 통나무집이었는데 전통 가옥처럼 지어져 있었고 내부는 매우 호화로웠다. 모두 최고급 목재를 사용했고 마당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천도 있었다. 앞쪽에는 복도가 있었고 처마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달려 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딱 그 남자의 사치스러운 스타일이었다.그녀는 앞마당 눈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불렀다.“왕자 씨.”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들리는 것이라곤 풍경 소리와 어깨에 내려앉는 차가운 눈바람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나지막이 노래했다.“소녀, 부족하나마, 도령의 눈에 들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도령을 귀찮게 했으니, 부디 노여워 마십시오. 도령은 북쪽으로 가시고 소녀는 남쪽을 바라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는군요...”
현정우와 함께 아이스랜드에 도착했을 때, 아직 최희연을 만나지 못했지만 공항에서 우연히 진유겸과 마주쳤다.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여기까지 희연이를 찾으러 온 거예요?”진유겸의 얼굴은 어두웠다.“네.”그는 최희연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아이스랜드로 달려왔다. 사실, 그는 그녀를 신경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주민솔이 있었고 마치 과거 고현성의 곁에 임지혜가 있었던 것과 같았다.고현성이 나에게 했던 일을 떠올리며 나는 조용히 충고했다.“이 세상에서 반드시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은 없어요. 저랑 희연이는 오랜 친구예요. 보기엔 연약해 보이고 사람들과 다투지도 않지만 뒤끝 있는 성격이에요. 앞으로 유겸 씨가 후회하지 않길 바랄 뿐이에요.”그는 주민솔을 선택했고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최희연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그 역시 잘 알고 있지만 단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을 뿐이다.그러나 그 이유는 내게 너무 하찮게만 느껴졌다.지금 필요한 건 그의 결단력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민솔을 외면할 수 없었다.마치 과거의 고현성이 임지혜와 결혼식을 해야만 했던 것처럼.지금의 주민솔과 과거의 임지혜는 너무도 닮았다. 모두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옭아맸다.천박한 수법이었지만 너무도 성공적이었다.내 경고에 진유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최희연을 찾았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녀는 흰색 모피 외투를 두른 채 한 오두막 앞에 앉아 있었다.온 세상이 눈 속에 파묻혀 있었고 그녀의 눈동자는 공허하게 저 멀리 새하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끝없는 슬픔이 담긴 듯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숨쉬기조차 어려웠다.조심스레 눈을 밟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힌 채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불렀다.“희연아.”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나를 바라보았다.“수아야.”나는 애틋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나야.”진유겸은 우리 뒤에 서 있었지
“응, 별로 친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어.”별로 친하지 않다면서도 최희연은 그를 항상 신뢰해 왔다.과연 그녀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존재일까?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녀를 아파트에 데려다준 뒤 곧바로 공항으로 향해 F국으로 떠났다.비행기에서 내릴 때쯤 나는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운성시에 있어요?]그는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응,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석지훈은 요즘 말투가 점점 다정해지고 있다.나는 핸드폰을 넣으며 옆에 있던 현정우에게 물었다.“윤민이는?”“강 비서랑 함께 맨션에 있어요. 가주님을 기다리고 있대요.”현정우랑 함께 맨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밤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다. 현관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최욱현이 나왔다. 그의 정교한 이목구비는 여전히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고 귀에는 여느 때처럼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다만 이번에는 붉은색이었다.그는 볼 때마다 이어폰 색이 달랐다.최욱현은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하루 종일 너를 기다리셨어. 다행히 상태는 괜찮으셔. 윤민이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셔서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으시더라. 평생 받은 선물 중 가장 소중하다고 하셨어.”그 말을 듣고 나는 마음 한구석이 시려왔다.이제 그녀한테 남은 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나는 그를 따라 맨션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멈춰서자 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왜 안 가?”나는 오히려 반문했다.“너야말로 왜 안 가?”나는 지하 밀실에서 십수 년간 보관되었던 나의 신장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가 공작을 어떻게 대했는지도 보았기에 경계심이 생겼다.경계심이라기보다 혐오감에 가까워지며 그가 점점 거북하게 느껴졌다.그래서 너무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같이 가려고 기다린 거야.”“그럴 필요 없어. 먼저 가.”그는 눈빛이
아마 석윤민을 뜻하는 듯했다.나는 차분히 물었다.“가능한가요?”“왜 윤아가 아니라 윤민이지?”안혜인은 이미 석윤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내가 2년 전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도 알고 계셨던 걸까?만약 알고 계셨다면 왜 다시 만나려 하지 않았던 걸까?나는 솔직하게 답했다.“윤민이는 오빠예요. 앞으로 많은 책임과 고난을 짊어져야 하죠. 후작위는 윤민이에 대한 제 보상이에요.”석지훈은 석윤민을 내 곁에서 멀리 떠나보내 단련시키려 했고 반면, 석윤아는 계속 내 곁에 머물게 할 생각이었다.앞으로 석윤민이 걸어갈 될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이 후작위는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었다.안혜인은 대답했다.“그럼 윤아한테 불공평하지 않겠니?”나는 단호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내 생각을 말했다.“설령 지금 어머니께서 후작위를 제게 주신다고 해도 결국 저는 둘 중 한 명에게 물려줄 겁니다. 하지만 먼 미래에도 둘의 우애가 깊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만약 사이가 좋다면 누구에게 주든 상관없지만 사이가 나빠진다면 누구에게도 줄 수 없겠죠. 그러니 지금 윤민이한테 주는 게...”어머니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다면 내 이름으로 윤민이한테 물려주마. 이렇게 하면 미래에 윤아가 원망을 하든 그 화살은 네가 아닌 할머니인 나에게 향하겠지.”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허락하신 거예요?”어머니는 단순히 허락한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책임까지 짊어지셨다.“그래. 널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구나. 게다가 윤민이한테 주나 너에게 주나 결국 내 핏줄에게 주는 것이니 다를 바가 없지 않겠니?”“감사합니다.”그녀는 덧붙여 설명하셨다.“나는 윤민이와 윤아를 같은 마음으로 아낀다. 모두 네 아이들이잖아.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늘 윤아한테 미안하단다. 아무것도 남겨줄 게 없잖아.”“그럴 일 없어요. 윤아는 제가 챙길 거예요.”후작위란 단지 하나의 명칭일 뿐이었다.나와 석지훈이 갖고 있는 건 그것보다 훨씬 많
더 이상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었다.그 사실이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수아야,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니?”나는 예의를 갖추고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안혜인은 석윤민을 품에 안은 채 손가락으로 장난쳤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욱현이는 너 말고 내가 가장 걱정하는 사람이야.”“네?”어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그 아이는 성격이 어둡고 말썽도 잘 부리지. 어쩌면 F국 왕실이 욱현이의 가장 큰 보호막이지만 앞으론 네가 지켜 주었으면 해. 욱현이가 어떤 실수를 하든지 나를 봐서라도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 수아야, 그 아이는 본래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다만 어릴 때부터 외롭게 자라서 그래. 게다가 버림까지 받아서...”안혜인은 말을 멈추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이것이 그녀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그렇게 할게요.”“고마워, 수아야.” 그녀는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나는 그녀한테서 석윤민을 건네 안았다. 그러자 그녀는 서둘러 말했다.“이제 그만 귀국하렴. 앞으로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바란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고맙습니다.”“윤민이는 욱현이한테 맡겨라. 며칠 후에 그 아이에게 작위를 계승시킬 거야. 모든 일이 끝나면 욱현이가 윤민이를 데리고 귀국할 거다.”나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네, 그렇게 할게요.”“좀 피곤하구나, 이제 가거라.”나는 석윤민을 안고 문을 열고 나왔다.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게 나를 한없이 차갑고 무정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부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오랜 세월의 거리감이 너무도 선명했다.나는 석윤민을 최욱현에게 넘겼다.“부탁할게.”“응. 하룻밤이라도 묵고 가지 그래?”“얼른 운성시로 돌아가야지.”나는 이 텅 빈 저택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긴 복도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