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비서는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감정의 파도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석지훈을 슬쩍 보더니 강해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라인에 떠도는 소문들 때문에 대표님께서 화가 나신 거죠.. 제 생각엔 아마 질투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연 대표님을 걱정하시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급히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까지 오신 거죠.”한쪽은 석지훈의 측근 비서, 다른 한쪽은 연수아의 측근 비서였다.두 사람 모두 자신의 대표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강해온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대표님도 하루 종일 석지훈 씨 생각뿐이었어요. 두 분께서 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윤 비서는 날카롭게 지적했다.“석 대표님은 질투심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아마 연 대표님은 석 대표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숨기신 거겠죠. 오해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네요.”질투?질투심?!지금 석지훈을 귀머거리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린 채 차갑게 경고했다.“다음엔 이런 일 없도록 해.”석지훈의 경고에 윤 비서는 이내 얼굴이 굳어졌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떠났다.그는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어쩔 바를 몰랐다. 다행히 수술은 순조롭게 끝났다.다만 그녀의 자궁은 제거되지 않았고 그녀한테는 비밀이었다.석지훈이 그녀에게 준 서프라이즈이기도 했다.수술이 끝난 뒤 그는 병실에서 그녀 곁을 지켰다.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차마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그녀가 거의 깨어날 때쯤 그는 서둘러 떠났다.굳이 숨기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자신의 병을 모른 척해주길 바랐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석지훈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윤 비서를 보더니 물었다.“아이 문제는 해결됐어?”윤 비서는 대답했다.“유씨 가문에서 돌려보냈습니다.”석지훈은 담담하게 말했다.“운성시로 돌아가자.”헬리콥터를 타고 운산 별장에 도착하자 멀리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원래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
나는 새벽 1시에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입이 바짝 말라 있었지만 다행히 비서가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나는 힘겹게 입을 열어 물을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곧바로 일어나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왔다.“수술 결과는 어떤가요?”비서는 다정하게 대답했다.“수술은 아주 성공적입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시간에 맞춰 약을 복용하고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면서 더 이상 무리하지 않으시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뜻은 병이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병의 악화를 완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선의 결과였다. 너무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의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가서 쉬세요.”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어머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내가 프랑스에 온 사실을 어쩌면 엄마한테 숨길 수 없는 게 당연했다.하지만 엄마가 나를 본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나한테 엄마는 단지 혈연만 있을 뿐 낯선 존재였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적당히 핑계 대고 거절하세요.”비서가 방을 나간 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수술 부위가 너무 아파와서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의사는 진통제를 처방했고 이곳에서 계속 요양하라고 당부했다.원래는 빨리 귀국할 계획이었지만 몸이 너무 쇠약하다 못해 일주일 뒤에 실밥을 풀고도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 며칠 더 머물렀다. 거의 2월 초가 되어서야 운성시로 돌아갔다.2월은 이미 눈이 녹는 시기였고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봄비는 끊임없이 내렸고 운성시로 돌아오자 그제야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시간이 되면 연씨 별장에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부모님께서 석지훈에 대해 이야기하실까 봐 두려웠다.나는 아직 부모님께 그와의 일을 이야기할 용기가 없었다.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예 모르시는 것은 아닐 것이다.어쨌든 나와 고현성의 스캔들로 떠들썩했으니 말이다.그런데도 사건 이
“난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는 웃으며 물었다.“희연아, 내가 투자해도 될까?”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고마워, 수아야.”“네가 돌아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하자.”“윤아야, 너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해.”나는 웃으며 답했다.“나도 마찬가지야.”난 이생에서 그녀를 만난 걸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겼다.통화를 마친 뒤 나는 비서와 함께 검사를 받으러 병원으로 갔다. 아직 예약 시간 전에 여유가 좀 있기에 오피스텔에 들러 석지훈의 책, 을 챙겼다.그만 떠나려던 찰나 침대 머리맡에 있던 선물 상자를 치고 말았다.그건 새해에 고현성이 준 선물이었다.나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고현성이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그가 과거에 많은 잘못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지금의 그는...과연 누가 사랑에서 후회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나는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가 과거에 저질렀던 모든 잘못까지.손을 뻗어 상자를 여는 순간 안에 든 사진을 보고 그만 충격을 받았다.놀람과 기쁨, 그리고 분노와 증오가 금세 뒤섞였다.어느새 가슴속의 설렘은 증오로 완전히 덮어버렸다.상자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더니 비서는 급히 물었다.“무슨 일이십니까?”“차 키 줘.”그는 순순히 차 키를 건네주었다.나는 직접 운전해서 고씨 가문으로 향했지만 집사 말로는 고현성이 집에 없다고 했다. 그에게 전화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그의 회사로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 회사 건물 아래에서 그와 마주친 순간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그의 얼굴을 향해 세게 내리쳤다.이토록 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운지 멍해 있었고 나는 울먹이며 외쳤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어떻게 내 두 아이를 숨길 수 있는 거지?나는 상자를 꼭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펑펑 울었다.상자 안에는 두 장의 아기 사진과 고현성이
마치 아픈 곳을 건드린 듯 고현성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언제나 강인해 보였던 그는 지금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터져 나오는 울분을 억누르며 말했다.“넌 정말 너무해.”고현성은 정말 사람을 너무 몰아붙였다.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에 그는 급히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수아야, 우선 지금 중요한 일부터 해결하자, 응?”지금 중요한 일은 바로 아이들 문제였다.나는 급히 자리를 떠났고 고현성은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차에 타려던 순간,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나는 그를 무시한 채 차를 몰고 떠났다.얼마 가지 않아 급하게 차를 길가에 세우고 유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나는 급히 별장으로 돌아가 현정우를 찾았고 헬리콥터를 타고 바로 산꼭대기에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고현성의 별장에는 여전히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다섯,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함께 놀고 있었지만 유독 쌍둥이만은 보이지 않았다.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별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도우미는 나를 발견하고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가까이 와서 말했다.“이 아이는 전유입니다.”내 눈앞의 아이는 이제 겨우 서너 달 정도 되어 보였다.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물었다.“사별은요?”도우미는 설명했다.“잘 모르겠어요. 연휴가 끝나고 다시 출근했을 때 사별이와 사현이는 없었어요. 제가 사모님께 물었더니 친부모님과 함께 있다고 하셨어요.”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의 친부모라면...나는 급히 물었다.“서당시에 있나요?”도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나는 또 물었다.“유 회장님은 집에 계신가요?”이제야 사별이와 사현이가 내 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그들을 품에 꼭 안은 채 작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손을 잡고 싶었다. 평범한 엄마들처럼 그들에게 젖을 물리고 싶었다.하지만...나는 이미 모유 수유를 끝냈다.아이들에게 젖을 물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넘쳐났다.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석지훈이 나를 상대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잠시 생각하다가 원태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셋째 오빠, 날 다시 단톡방에 추가해 줄 수 있어요?”그는 빠르게 답장했다. “또 마음이 바뀐 거야?”“제발 부탁이에요.”원태웅은 나를 다시 탄톡방에 추가해 주었다. 나는 바로 단톡방에서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핀란드 날씨가 좀 춥네요.”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나 추워요.”그는 항상 나를 아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 앞에서 약해진 모습을 보이며 사과하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질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석지훈은 여전히 나를 무시했다.순간 눈물이 핑 돌며 핀란드의 바람이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눈 내리지 않는 날이 눈 내리는 날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수술 부위도 은근히 다시 아려왔다.계속해서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담유미가 갑자기 영상 하나를 올렸다.낮에 고현성의 회사 앞에서 그를 때리던 장면이었다.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내가 했던 말들이었다.듣기엔 차가워 보이는 말들이었지만 사실은 과거 고현성에게 느꼈던 온갖 감정들이 묻어나 있었다.지금 우리 둘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게 분명했다.이제 그는 나를 만나고 싶지도 않을 것 같았다.그러나 지금 내 아이들이 그의 손에 있는 이상 나는 반드시 그를 만나야 했다.그 순간 원태웅은 단톡방에 짧고 굵게 한마디를 던졌다.“왜 쓸데없는 걸 마음대로 올리고 지랄이냐? 추방당하고 싶어?”단톡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이제 석지훈은 날 보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9977.”원태웅은 물었다.“형, 그게 무슨 뜻이야?”그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나는 급히 별장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석지훈은 내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았고 지금처럼 질책하는 일은 더더욱 드물었다. 예전에 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그는 결코 나무라지 않았고 심지어 나는 그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그 역시 한낱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간이라면 희로애락을 느끼기 마련이다.나는 그의 마음속에 담긴 억울함을 느끼고 갑자기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순간 내 몸 상태도 잊은 채 그를 안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내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석지훈은 갑자기 돌아서서 원래 자리로 물러났다. 그리고 붓을 들고 정성스럽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침묵을 깨려고 했지만 석지훈이 먼저 말했다.“아이는 네가 목숨으로 바꿔온 거니까 내가 가질 자격은 없어. 보고 싶으면 윤 비서한테 연락해.”그는 너무나 쉽게 아이들을 내게 돌려주었다.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그는 나를 괴롭힌 적이 없었다. 석지훈은 다시금 예전처럼 거만한 태도로 돌아가 마치 방금 내게 따져 묻던 모습은 없었던 일 같았다.내 마음속에 깊은 실망감과 당혹감이 밀려왔다.지금 이 순간 나는 두 아이를 찾아가야 했지만 발이 땅에 뿌리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석지훈이 곁눈질로 나를 보며 차갑게 물었다.“할 말 남았어?”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럼 가 봐.”석지훈은 분명 나를 내쫓고 있었다.이제는 대놓고 나를 쫓아내기 시작한 것이다.나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내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석나은 씨, 여기서 뭐 하세요?”석나은은 흰색 밍크코트 안에 검은색 한복을 입고 있어 더욱 우아해 보였다. 하얗고 가는 손목에는 푸른 옥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그녀는 아름다웠다. 전형적인 낙동강 변에서 자란 고전적인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기품 있는 자태는 부러움을 자아냈고 사랑에 대한 굳건한 집념은 존경스러웠다.석
석나은이 갑자기 제안했다.“수아 씨,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줘요. 만약 이번에도 제가 실패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접고 당신들 앞에서 사라질게요.”차가운 강바람에 으슬으슬 떨렸고 몸도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그런 유치한 내기 같은 건 생각 없어요. 하지만 지훈 씨에 대한 그쪽의 마음은 존중해요. 그게 다예요. 그러니 나를 끌어들여서 무슨 약속을 하려 하지 마세요!”그녀가 석지훈을 좋아하든 말든, 쫓아다니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와 그런 쓸데없는 내기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으니까.나는 그렇게 어리석게 나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지 않을 것이었다.석나은은 내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수아 씨는 정말 냉정하고 무정하네요.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고집불통이라고 해야 할까요. 항상 자신을 유리한 위치에 두는 것이 참 존경스러워요.”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은 씨와 지훈 씨의 일에 대해서 나는 할 말 없네요.”지금 내가 무슨 자격으로 왈가불가한단 말인가?석나은은 나와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한마디만 남기고 가버렸다.그녀는 분명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 그 남자를 찾아갈 것이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현정우는 석나은이 떠나는 것을 보고 내게 다가와 코트를 걸쳐주었다.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석나은 씨 예쁘죠?”현정우는 남자의 시점으로 대답했다.“예쁩니다.”나는 이어서 물었다. “정우 씨 이상형이에요?”현정우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감히 석나은 씨에게 흑심을 품겠습니까.”나는 그를 흘겨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그냥 이상형인지 물어봤을 뿐이에요.”현정우는 진지하게 잠시 생각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네, 맞아요.”나는 무심코 말했다.“그럼 지훈 씨의 이상형이기도 하겠네요.”옆에 있던 현정우는 대담하게도 되물었다.“가주님, 질투하시는 겁니까?”질투?!내가 현정우를
2층은 매우 조용했고 서재는 더 조용했다. 나는 뭔가 엿들을 수 있을까 싶어 갔지만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보니 석지훈은 여전히 고개를 살짝 숙이고 큰 글씨를 쓰고 있었고 흰 선지에는 빽빽하게 작은 해서체 글씨가 가득했다. 그리고 석나은은 그의 옆에 서서 감상하고 있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지만 세월이 정지된 듯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늑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가시에 찔린 듯 아팠다. 그 순간 고현성이 나에게 키스하는 사진을 봤을 때 그가 느꼈을 슬픔과 분노 그리고 깊은 소유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세상에. 석지훈과 석나은이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견디기 힘든데 하물며 나와 고현성은 키스까지 했으니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석지훈이 주먹을 날린 것도 이해가 됐다.나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엄청 우울했을 것이다.갑자기 석지훈의 마음이 참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강하면 강할수록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항상 내 감정만 생각하고 내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봤지 한 번도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감정은 애써 달래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무시했던 것이다.지금 이 순간 나는 정말 내가 쓰레기 같다고 느꼈다. 석지훈과의 관계에서 나는 제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내 잘못이었다. 몰래 그에게 상처를 거듭해서 주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석나은이 먼저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지훈아.”석지훈은 대꾸하지 않았는데 늘 그랬듯 무뚝뚝한 모습이었다.석나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수아 씨가 왔어.”석지훈이 석나은 앞에서 나를 무시하고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붓을 내려놓고 석나은에게 말했다.“운성으로 돌아가. 사람을 시켜서 데려다줄게.”석지훈의 말에 석나은의 고운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만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알았어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