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비서는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감정의 파도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석지훈을 슬쩍 보더니 강해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라인에 떠도는 소문들 때문에 대표님께서 화가 나신 거죠.. 제 생각엔 아마 질투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연 대표님을 걱정하시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급히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까지 오신 거죠.”한쪽은 석지훈의 측근 비서, 다른 한쪽은 연수아의 측근 비서였다.두 사람 모두 자신의 대표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강해온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대표님도 하루 종일 석지훈 씨 생각뿐이었어요. 두 분께서 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윤 비서는 날카롭게 지적했다.“석 대표님은 질투심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아마 연 대표님은 석 대표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숨기신 거겠죠. 오해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네요.”질투?질투심?!지금 석지훈을 귀머거리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린 채 차갑게 경고했다.“다음엔 이런 일 없도록 해.”석지훈의 경고에 윤 비서는 이내 얼굴이 굳어졌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떠났다.그는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어쩔 바를 몰랐다. 다행히 수술은 순조롭게 끝났다.다만 그녀의 자궁은 제거되지 않았고 그녀한테는 비밀이었다.석지훈이 그녀에게 준 서프라이즈이기도 했다.수술이 끝난 뒤 그는 병실에서 그녀 곁을 지켰다.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차마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그녀가 거의 깨어날 때쯤 그는 서둘러 떠났다.굳이 숨기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자신의 병을 모른 척해주길 바랐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석지훈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윤 비서를 보더니 물었다.“아이 문제는 해결됐어?”윤 비서는 대답했다.“유씨 가문에서 돌려보냈습니다.”석지훈은 담담하게 말했다.“운성시로 돌아가자.”헬리콥터를 타고 운산 별장에 도착하자 멀리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원래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
나는 새벽 1시에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입이 바짝 말라 있었지만 다행히 비서가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나는 힘겹게 입을 열어 물을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곧바로 일어나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왔다.“수술 결과는 어떤가요?”비서는 다정하게 대답했다.“수술은 아주 성공적입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시간에 맞춰 약을 복용하고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면서 더 이상 무리하지 않으시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뜻은 병이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병의 악화를 완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선의 결과였다. 너무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나는 창밖의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가서 쉬세요.”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어머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내가 프랑스에 온 사실을 어쩌면 엄마한테 숨길 수 없는 게 당연했다.하지만 엄마가 나를 본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나한테 엄마는 단지 혈연만 있을 뿐 낯선 존재였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적당히 핑계 대고 거절하세요.”비서가 방을 나간 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수술 부위가 너무 아파와서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의사는 진통제를 처방했고 이곳에서 계속 요양하라고 당부했다.원래는 빨리 귀국할 계획이었지만 몸이 너무 쇠약하다 못해 일주일 뒤에 실밥을 풀고도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 며칠 더 머물렀다. 거의 2월 초가 되어서야 운성시로 돌아갔다.2월은 이미 눈이 녹는 시기였고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봄비는 끊임없이 내렸고 운성시로 돌아오자 그제야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시간이 되면 연씨 별장에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부모님께서 석지훈에 대해 이야기하실까 봐 두려웠다.나는 아직 부모님께 그와의 일을 이야기할 용기가 없었다.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예 모르시는 것은 아닐 것이다.어쨌든 나와 고현성의 스캔들로 떠들썩했으니 말이다.그런데도 사건 이
“난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는 웃으며 물었다.“희연아, 내가 투자해도 될까?”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고마워, 수아야.”“네가 돌아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하자.”“윤아야, 너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해.”나는 웃으며 답했다.“나도 마찬가지야.”난 이생에서 그녀를 만난 걸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겼다.통화를 마친 뒤 나는 비서와 함께 검사를 받으러 병원으로 갔다. 아직 예약 시간 전에 여유가 좀 있기에 오피스텔에 들러 석지훈의 책, 을 챙겼다.그만 떠나려던 찰나 침대 머리맡에 있던 선물 상자를 치고 말았다.그건 새해에 고현성이 준 선물이었다.나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고현성이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그가 과거에 많은 잘못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지금의 그는...과연 누가 사랑에서 후회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나는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가 과거에 저질렀던 모든 잘못까지.손을 뻗어 상자를 여는 순간 안에 든 사진을 보고 그만 충격을 받았다.놀람과 기쁨, 그리고 분노와 증오가 금세 뒤섞였다.어느새 가슴속의 설렘은 증오로 완전히 덮어버렸다.상자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더니 비서는 급히 물었다.“무슨 일이십니까?”“차 키 줘.”그는 순순히 차 키를 건네주었다.나는 직접 운전해서 고씨 가문으로 향했지만 집사 말로는 고현성이 집에 없다고 했다. 그에게 전화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그의 회사로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 회사 건물 아래에서 그와 마주친 순간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그의 얼굴을 향해 세게 내리쳤다.이토록 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운지 멍해 있었고 나는 울먹이며 외쳤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어떻게 내 두 아이를 숨길 수 있는 거지?나는 상자를 꼭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펑펑 울었다.상자 안에는 두 장의 아기 사진과 고현성이
마치 아픈 곳을 건드린 듯 고현성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언제나 강인해 보였던 그는 지금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터져 나오는 울분을 억누르며 말했다.“넌 정말 너무해.”고현성은 정말 사람을 너무 몰아붙였다.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에 그는 급히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수아야, 우선 지금 중요한 일부터 해결하자, 응?”지금 중요한 일은 바로 아이들 문제였다.나는 급히 자리를 떠났고 고현성은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차에 타려던 순간,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나는 그를 무시한 채 차를 몰고 떠났다.얼마 가지 않아 급하게 차를 길가에 세우고 유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나는 급히 별장으로 돌아가 현정우를 찾았고 헬리콥터를 타고 바로 산꼭대기에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고현성의 별장에는 여전히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다섯,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함께 놀고 있었지만 유독 쌍둥이만은 보이지 않았다.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별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도우미는 나를 발견하고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가까이 와서 말했다.“이 아이는 전유입니다.”내 눈앞의 아이는 이제 겨우 서너 달 정도 되어 보였다.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물었다.“사별은요?”도우미는 설명했다.“잘 모르겠어요. 연휴가 끝나고 다시 출근했을 때 사별이와 사현이는 없었어요. 제가 사모님께 물었더니 친부모님과 함께 있다고 하셨어요.”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의 친부모라면...나는 급히 물었다.“서당시에 있나요?”도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나는 또 물었다.“유 회장님은 집에 계신가요?”이제야 사별이와 사현이가 내 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그들을 품에 꼭 안은 채 작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손을 잡고 싶었다. 평범한 엄마들처럼 그들에게 젖을 물리고 싶었다.하지만...나는 이미 모유 수유를 끝냈다.아이들에게 젖을 물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넘쳐났다.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석지훈이 나를 상대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잠시 생각하다가 원태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셋째 오빠, 날 다시 단톡방에 추가해 줄 수 있어요?”그는 빠르게 답장했다. “또 마음이 바뀐 거야?”“제발 부탁이에요.”원태웅은 나를 다시 탄톡방에 추가해 주었다. 나는 바로 단톡방에서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핀란드 날씨가 좀 춥네요.”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나 추워요.”그는 항상 나를 아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 앞에서 약해진 모습을 보이며 사과하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질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석지훈은 여전히 나를 무시했다.순간 눈물이 핑 돌며 핀란드의 바람이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눈 내리지 않는 날이 눈 내리는 날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수술 부위도 은근히 다시 아려왔다.계속해서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담유미가 갑자기 영상 하나를 올렸다.낮에 고현성의 회사 앞에서 그를 때리던 장면이었다.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내가 했던 말들이었다.듣기엔 차가워 보이는 말들이었지만 사실은 과거 고현성에게 느꼈던 온갖 감정들이 묻어나 있었다.지금 우리 둘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게 분명했다.이제 그는 나를 만나고 싶지도 않을 것 같았다.그러나 지금 내 아이들이 그의 손에 있는 이상 나는 반드시 그를 만나야 했다.그 순간 원태웅은 단톡방에 짧고 굵게 한마디를 던졌다.“왜 쓸데없는 걸 마음대로 올리고 지랄이냐? 추방당하고 싶어?”단톡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이제 석지훈은 날 보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9977.”원태웅은 물었다.“형, 그게 무슨 뜻이야?”그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나는 급히 별장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석지훈은 내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았고 지금처럼 질책하는 일은 더더욱 드물었다. 예전에 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그는 결코 나무라지 않았고 심지어 나는 그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그 역시 한낱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간이라면 희로애락을 느끼기 마련이다.나는 그의 마음속에 담긴 억울함을 느끼고 갑자기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순간 내 몸 상태도 잊은 채 그를 안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내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석지훈은 갑자기 돌아서서 원래 자리로 물러났다. 그리고 붓을 들고 정성스럽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침묵을 깨려고 했지만 석지훈이 먼저 말했다.“아이는 네가 목숨으로 바꿔온 거니까 내가 가질 자격은 없어. 보고 싶으면 윤 비서한테 연락해.”그는 너무나 쉽게 아이들을 내게 돌려주었다.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그는 나를 괴롭힌 적이 없었다. 석지훈은 다시금 예전처럼 거만한 태도로 돌아가 마치 방금 내게 따져 묻던 모습은 없었던 일 같았다.내 마음속에 깊은 실망감과 당혹감이 밀려왔다.지금 이 순간 나는 두 아이를 찾아가야 했지만 발이 땅에 뿌리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석지훈이 곁눈질로 나를 보며 차갑게 물었다.“할 말 남았어?”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럼 가 봐.”석지훈은 분명 나를 내쫓고 있었다.이제는 대놓고 나를 쫓아내기 시작한 것이다.나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내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석나은 씨, 여기서 뭐 하세요?”석나은은 흰색 밍크코트 안에 검은색 한복을 입고 있어 더욱 우아해 보였다. 하얗고 가는 손목에는 푸른 옥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그녀는 아름다웠다. 전형적인 낙동강 변에서 자란 고전적인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기품 있는 자태는 부러움을 자아냈고 사랑에 대한 굳건한 집념은 존경스러웠다.석
석나은이 갑자기 제안했다.“수아 씨,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줘요. 만약 이번에도 제가 실패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접고 당신들 앞에서 사라질게요.”차가운 강바람에 으슬으슬 떨렸고 몸도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그런 유치한 내기 같은 건 생각 없어요. 하지만 지훈 씨에 대한 그쪽의 마음은 존중해요. 그게 다예요. 그러니 나를 끌어들여서 무슨 약속을 하려 하지 마세요!”그녀가 석지훈을 좋아하든 말든, 쫓아다니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와 그런 쓸데없는 내기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으니까.나는 그렇게 어리석게 나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지 않을 것이었다.석나은은 내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수아 씨는 정말 냉정하고 무정하네요.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고집불통이라고 해야 할까요. 항상 자신을 유리한 위치에 두는 것이 참 존경스러워요.”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은 씨와 지훈 씨의 일에 대해서 나는 할 말 없네요.”지금 내가 무슨 자격으로 왈가불가한단 말인가?석나은은 나와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한마디만 남기고 가버렸다.그녀는 분명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 그 남자를 찾아갈 것이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현정우는 석나은이 떠나는 것을 보고 내게 다가와 코트를 걸쳐주었다.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석나은 씨 예쁘죠?”현정우는 남자의 시점으로 대답했다.“예쁩니다.”나는 이어서 물었다. “정우 씨 이상형이에요?”현정우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감히 석나은 씨에게 흑심을 품겠습니까.”나는 그를 흘겨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그냥 이상형인지 물어봤을 뿐이에요.”현정우는 진지하게 잠시 생각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네, 맞아요.”나는 무심코 말했다.“그럼 지훈 씨의 이상형이기도 하겠네요.”옆에 있던 현정우는 대담하게도 되물었다.“가주님, 질투하시는 겁니까?”질투?!내가 현정우를
2층은 매우 조용했고 서재는 더 조용했다. 나는 뭔가 엿들을 수 있을까 싶어 갔지만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보니 석지훈은 여전히 고개를 살짝 숙이고 큰 글씨를 쓰고 있었고 흰 선지에는 빽빽하게 작은 해서체 글씨가 가득했다. 그리고 석나은은 그의 옆에 서서 감상하고 있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지만 세월이 정지된 듯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늑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가시에 찔린 듯 아팠다. 그 순간 고현성이 나에게 키스하는 사진을 봤을 때 그가 느꼈을 슬픔과 분노 그리고 깊은 소유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세상에. 석지훈과 석나은이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견디기 힘든데 하물며 나와 고현성은 키스까지 했으니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석지훈이 주먹을 날린 것도 이해가 됐다.나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엄청 우울했을 것이다.갑자기 석지훈의 마음이 참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강하면 강할수록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항상 내 감정만 생각하고 내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봤지 한 번도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감정은 애써 달래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무시했던 것이다.지금 이 순간 나는 정말 내가 쓰레기 같다고 느꼈다. 석지훈과의 관계에서 나는 제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내 잘못이었다. 몰래 그에게 상처를 거듭해서 주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석나은이 먼저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지훈아.”석지훈은 대꾸하지 않았는데 늘 그랬듯 무뚝뚝한 모습이었다.석나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수아 씨가 왔어.”석지훈이 석나은 앞에서 나를 무시하고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붓을 내려놓고 석나은에게 말했다.“운성으로 돌아가. 사람을 시켜서 데려다줄게.”석지훈의 말에 석나은의 고운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만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알았어
석지훈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여전히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아마도 내가 왕자현을 칭찬한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그는 내가 왕자현의 외모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석지훈은 내가 늘 그의 미모에 유혹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는 차갑게 나를 보며 물었다.“왜?”나는 일부러 물었다.“나한테 화났어요?”그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니.”또 아니란다.나는 다시 물었다.“혹시 질투하는 거예요?”그는 차갑게 말했다.“아니.”“내 마음속에는 오빠가 제일 잘생겼어요!”나는 발끝을 세워 석지훈의 턱에 입을 맞춘 후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쥐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내 마음속에선 오빠가 제일 멋있어요! 아무도 오빠랑 비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오빠가 잘생기지 않았더라도 난 오빠를 좋아했을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건 오빠라는 사람이지 오빠의 외모가 아니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석지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거짓말.”그가 이렇게 대답한다는 것은 화가 풀렸다는 의미였다.나는 다시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중심을 잃고 몸이 살짝 기울어지자 석지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왕자현의 저택의 따뜻한 방에서...최희연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온몸에 피로를 느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석지훈은 방을 나가 왕자현을 만나러 갔다.왕자현이 그에게 문자를 보냈기 때문이다.[석지훈, 거실에서 얘기 좀 해.]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나는 자현 씨의 아내이니 조만간 그와 관계를 갖게 될 거야.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잖아. 나 처녀막 수술을 하고 싶어.”나는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최희연이 먼저 말했다.“내가 이러는 건 뭔가를 숨기려는 게 아니야. 그는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도, 내가 낙태를 했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두 남자를 만났다는 것도
석지훈은 갑자기 나를 놓아주고 침대 옆에 가서 앉았다. 다리 한쪽을 의자에 올리고 팔꿈치를 무릎에 괴는 모습이 평소와 달리 건들거렸다.게다가 검은 코트 차림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그가 화가 났고 내가 달래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니면 내가 그에게 사과해야 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나는 일부러 그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오히려 그를 놀리고 싶었다.나는 그의 옆에 가서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갔다. 방은 매우 따뜻했다. 바깥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방안은 봄처럼 따스했다. 나는 조용히 패딩을 벗었다.안에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나는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석지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정말 잘생겼어?”석지훈은 아직도 그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잘생기지 않았어요? 왕자현 씨는 분위기가 끝내주잖아요. 정말 멋있어 보이던데!”석지훈: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발목을 잡고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내 입술에 키스했다.“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밖에 나갔다 온다고? 이건 너무하잖아!’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오빠.”그는 곁눈질로 나를 차갑게 쳐다보더니 흘끗 보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나: “...”그는 고의로 나를 벌주는 것이었다석지훈은 질투하는 것도 모자라서 복수까지 하는 것이었다.나는 침대에서 뒹굴며 그가 언제 방으로 돌아올지 생각했다.하지만 문 앞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실망감이 점점 커져서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석지훈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그가 왕자현의 거실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거실에는 값비싸 보이는 피아노가 한 대 놓여있었다.왕자현도 거기에 있었고 차를 끓이고 있었다.내가 들어가자 두 남자는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석지훈은 미간을 찌
“희연아, 남편 정말 잘 얻었네!”최희연은 농담처럼 물었다.“부럽지?”나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얀 도포를 입은 절세 미남이라, 정말 너무 완벽해. 모든 여자들의 이상형이잖아. 쯧, 진짜 부럽다!”“칭찬도 잘한다!”내가 왕자현을 이렇게 칭찬한 건 최희연이 그에게 관심을 좀 더 가졌으면 해서였다. 왕자현은 그녀가 기댈 만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리고 왕자현은 이런 칭찬을 받을 만했다.내가 통나무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왕자현은 연주를 멈추고 나를 보며 웃었다.“연수아 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저를 아세요?”“네. 희연이 절친이잖아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일어서더니 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내 옆을 보고 웃었다.“석 대표님도 와 계시는데.”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문 옆 복도에서 석지훈이 두 손을 등 뒤로 모으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위치는 마침 왕자현과 마주 보고 있었는데 마침 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나는 방금 전까지 그가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게다가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이 어두워 보였다.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지훈 씨, 왔어요.”그는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내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가 나를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 왕자현과 최희연의 앞에서 내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왕자현이 말했다.“연수아 씨, 희연이가 그러는데 두 분 여기서 며칠 묵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방금 손님방을 하나 정리해 두었어요. 뒤편에 있으니 사람을 시켜 안내해 드리죠.”왕자현은 사람을 시켜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석지훈은 앞서 걸었고 나는 1미터쯤 뒤에서 따라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에게 거칠게 밀쳐져 문틀에 부딪혔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나는 당황하며 물었다.“왜 그래요?”석지훈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나는 그가 이런 모습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내가 그에게
석지훈이 떠나고 30분쯤 지났을까, 내가 휴대폰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최희연이 온천 회관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내 몸에 남은 흔적을 보고는 일부러 놀리듯 물었다.“방금 온천 옆에서 남자 바지랑 셔츠를 봤는데 어떤 차가운 남자 옷 같더라! 쯧쯧, 내가 눈치 없이 온 거 아니야?”나는 일어나 최희연이 보는 앞에서 옷을 입으며 되받아쳤다.“너랑 왕자현 씨는...”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최희연은 황급히 말을 막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 나랑 자현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그런 쪽으로는 아무 말도 안 했고 포옹이나 손잡는 것도 한 번도 없었어. 그는 항상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 그리고 내 얼굴은... 어쨌든 그는 석지훈과 달라!”나는 웃으며 물었다.“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다 네가 말한 거잖아. 근데 왜 갑자기 지훈 씨를 그 사람이랑 비교하는 건데? 솔직히 말해 봐. 만약 그가 너를 원한다면, 넌 그에게 응할 거야?”내 질문을 들은 최희연은 잠시 멍해졌다.“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그가 원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사람이고 나는 왕씨 가문의 하나뿐인 안주인이니까.”나는 그녀 앞에서 한 바퀴 돌며 일부러 물었다.“희연아, 너에게 그는 그저 이용 가치가 있는 관계일 뿐이야?”최희연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 그래. 이용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였어. 아마도 은혜를 갚기 위해서겠지!”나는 호기심에 다시 물었다.“무슨 은혜?”“내가 예전에 그를 구해준 적이 있어. 그가 운 좋게 나에게 구출된 게 아니라 내가 운 좋게 그를 구해준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그는 내 삶에 나타난 지 겨우 5년밖에 안 됐지만 난 왠지 모르게 그를 전적으로 믿어. 세상에서 날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이야. 이런 믿음은 정말 이상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인연이라는 게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본사 와서 벌 받아.]“쌤통이야.”나는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석지훈이 진유겸을 만난 것은 30분 후였다. 그는 시내 중심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이스랜드의 3, 4월은 매우 추웠는데 진유겸은 허리를 굽힌 채 마치 버려진 노숙자처럼 그곳에 앉아 있었다.석지훈은 그의 옆에 앉아 물었다.“무슨 일이냐?”진유겸과 석지훈은 오랜 숙적이었다. 유럽에서 끊임없이 영역 다툼을 벌였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상대이기도 했다. 둘은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일종의 암묵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진유겸은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내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석지훈은 침묵했다. 연수아 외에는 누구도 위로해 본 적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진유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었으니까.“지훈아, 우리 같은 남자들은 왜 항상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걸까? 내가... 민솔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건 사실이야. 난 희연이가 처리할 시간을 줄 줄 알았어. 근데 며칠 만에 갑자기 모든 게 변해버렸어.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아무도 한 사람을 위해 영원히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거.”석지훈이 물었다.“이제 어떻게 할 거냐?”진유겸은 하늘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모르겠어. 왕자현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지만 심오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야. 아무도 그를 쉽게 제거할 수 없어.”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석지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석지훈은 그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자신과 진유겸은 모두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둘이 손을 잡는다면 분명 왕자현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가 왜 진유겸을 도와야 한단 말인가?그의 여자와 최희연은 절친한 친구였으니 그는 항상 최희연의 편이었지 진유겸을 도와 그녀를 다치게 하는 쪽이 아니었다.
석지훈이 방을 나가자 나는 침대에 누워 심심함을 느꼈다. 하지만 석지훈이 왕자현을 안다는 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제 진유겸에 왕자현까지 만나러 간다니.하필 그 두 사람 다 최희연과 얽혀있는 남자들인데.문득 석지훈이 내게 덮어주었던 양복이 온천 옆에 놓여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 양복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양복 주머니에는 석지훈의 휴대폰이 들어있었다.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이 켜지면서 원태웅이 보낸 알 수 없는 문자가 있었다.나는 원태웅이 석지훈에게 보낸 문자가 항상 궁금했다.석지훈의 휴대폰에는 비밀번호 잠금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호기심에 못 이겨 문자를 열어보니 원태웅이 여러 개의 문자를 보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맨 위로 스크롤을 올려 몇 시간 전 대화 내용을 보니 석지훈이 원태웅에게 말한 내용이었다.[모든 기억이 돌아왔어.]원태웅은 놀란 이모티콘을 보내며 답했다.[벌써요?]석지훈: [...][그럼 형은 어디에 있어?]석지훈은 간단하게 답했다.[아이스랜드.][아이스랜드에는 왜? 설마 윤아 때문인가? 윤아가 아이스랜드에 있어? 맞다, 형이 갑자기 나한테 문자를 보낸 이유가 뭐지? 윤아가 또 형한테 화난 거 아니야?]원태웅은 석지훈의 습관을 꿰뚫고 있었다.석지훈은 담담하게 답했다.[...]나는 석지훈을 너무 잘 안다. 이 말줄임표는 원태웅을 상대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듣고 싶다는 의미였다.[여자는 화가 나도 달래기 쉬워. 게다가 형은 잘생겼으니 누가 정말 형한테 화를 내겠어? 내 말 믿어. 윤아는 분명 거절할 거야. 그럼 그냥 좀 더 박력 있게 나가. 그리고 윤아가 좋아하는 말 많이 해줘. 뭘 좋아하든 그냥 다 맞춰줘. 원칙 같은 건 필요 없어. 자기 여자 앞에서 무슨 원칙이야. 내 말 들어. 틀림없다니까.]석지훈이 답장이 없자 원태웅이 계속해서 말했다.[윤아는 그냥 좀 까다로울 뿐 온순해서 달래기 쉬워.]내가 까다롭다고?석지훈이 대꾸하지 않자 신이 난 원태웅
하지만 그건 과거의 연수아일 뿐이었다.지금의 그녀는 그에게 의지하고 예전보다 성격도 더 까칠해졌지만 살아있는 사람다웠다.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연수아는 진심으로 그에게 의지하고 그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로 여기며 그에게서 원하는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평범한 여자들처럼 꾸밈없이 사랑하고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에게 화가 나면 바로 표정을 굳히는 것처럼 말이다.이런 모습이 진짜 연수아였다. 더 이상 과거 고현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심스러워하거나 가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 석지훈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까탈스러운 게 아니라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의 윤아는 까다롭지 않다. 그의 윤아는 그저 평범한 행복을 바랄 뿐이었다. 기쁠 땐 웃고, 슬플 땐 우는 그런 그녀야말로 석지훈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비록 그가 시시때때로 그녀를 달래줘야 한다 해도 괜찮았다.석지훈은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녀의 사랑을 받는 이런 나날들이 행복했다.그는 심지어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평생 그녀 곁에 있을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인생은 늘 엇갈리고 어쩔 수 없는 일투성이다.석지훈은 옆에 있는 윤 비서를 바라보며 갑자기 뜬금없이 말했다.“윤아가 내 곁에 온 후로 너뿐만 아니라 태웅이를 포함한 몇몇이 규칙을 잊고 나한테 하지 말아야 할 질문들을 계속하더라. 몇 번이나 주의를 줬는데도 멈추질 않고. 내가 우습게 보여? 설마 내 뒷말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하지 마. 다 알고 있으니까.”연수아가 석지훈의 곁에 나타난 후에야 윤 비서를 비롯한 원태웅 등은 석지훈에게 부드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사자 수염을 건드리듯 조심스럽게 농담도 하고 그랬지만 나름대로 선은 지켰다고 생각했다.윤 비서 일행은 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석지훈에게 들통나고 말았다.역시 석 대표님은 세상에서
내 손가락은 나도 모르게 그의 허리에 닿았고 붉어진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지만 그 순간 그가 날 끌어안았다.나는 결국 그에게 안겨 방으로 돌아왔다.그는 내 몸의 물기를 닦아주고 침대에 눕혔다.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나를 보고 석지훈은 의외로 농담을 건넸다.그는 예전보다 더 뻔뻔해진 것 같았다.나는 그를 노려보며 대꾸하지 않았다. 석지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윤아야, 넌 내 사람이야.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우리 어머니 일은... 내게 위협이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누구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 설령 어머니가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난 슬프고 안타깝겠지만 그뿐이야. 그분이 내 행복을 막는 걸림돌이 될 순 없어. 그분뿐만 아니라, 이 세상 누구도 네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둘 수 없어.”석지훈은 몸을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너야. 아이들도 너에 비할 바가 못 돼. 아이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너야말로 내가 평생 지켜야 할 여자라는 거야. 아이들은 네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이고! 윤아야, 앞으로는 네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직접 널 내 세상으로 데려갈게. 괜찮겠니?”그 후에도 석지훈은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고 내가 원하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었다.난 조용히 응수했다. 그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잠깐 자고 있어. 유겸이가 아직 아이스랜드에 있는데 만나고 와야 해. 그리고 친구라고 하기도 뭐한 친구도 만나야 하고.”예전 같았으면 절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난 그를 보내주며 말했다.“가서 볼일 보고 와요.”석지훈이 일어서자 난 그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친구라고 하기도 뭐한 친구는 누군데요?”그는 나지막이 대답했다.“왕자현.”석지훈과 왕자현이 아는 사이라고?...석지훈은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코트로 갈아입고 온천 회관을 나섰다. 계속해서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 비서는 석지훈이 나
나는 그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게 싫었다.하지만 또 그가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기를 바랐다.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은 변함없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아니, 그 사람 눈에 든 게 얼마나 다행인지.“윤아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눈가가 빨개진 채로 그를 쳐다보니 석지훈은 내 몸에 묻은 눈을 털어주고 자신의 정장을 벗어 내게 덮어주며 한숨을 쉬었다.“나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여자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라. 태웅이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는 게 정답이라고 해서 내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잊었어.”나는 억울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석지훈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태웅이가 그러더라. 차가운 남자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나도 네가 내가 무뚝뚝해서 여러 번 화를 냈다는 걸 알아. 그리고 핀란드를 떠날 때마다 제대로 말하지 않아서 화를 냈다는 것도. 미안해. 내가 부족해서 네가 원하는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게 했고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에게도 힘든 시간을 주었어.”역시, 석지훈은 정말 다 알고 있었다.그는 내 마음속 깊은 곳의 모든 생각을 알고 있었다.그는 눈밭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어머니 일은 아직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 이 일로 네게 실망을 안겨 줘서 미안해. 그러니, 우리 당분간 결혼은 미루는 게 어떨까?”눈이 그의 몸 위로 떨어졌다. 그는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들었다.“먼저 내 세상에 적응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 아가야, 나는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이해해. 표현이 서툴렀을 뿐이야. 앞으로 더 잘할게. 그러니까 화 풀어, 응?”석지훈이 이렇게까지 낮추다니.나는 그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깊은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일단 따뜻한 곳으로 가자. 몸 녹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