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훈은 답장이 없었다. 나는 한민수와 원태웅에게도 문자를 보냈지만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마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모두 연락이 두절되었다.마음속에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몇 시간 후 헬리콥터는 에르크에 착륙했다. 별장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현정우는 위험을 감지하고 나를 자신의 뒤로 숨겼고 나머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에게 나를 둘러싸고 보호하라고 지시했다.이때 별장 입구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 우리는 폭풍에 휩쓸렸고 나는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이때 현정우가 재빨리 내 손목을 잡고 나를 일으켜 혼란을 틈타 도망쳤다.살아남은 경호원들은 우리를 엄호하며 남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하나둘씩 눈앞에서 쓰러져 갔다. 눈앞이 아찔해지고 속이 뒤틀렸다. 이토록 잔혹한 광경은 처음이었다.현정우에게 끌려 한참을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멈추자 구토가 치밀었다. 그는 곧바로 나를 숲으로 끌어당겨 숨겼다. 핀란드의 눈 때문에 숲에는 눈이 깊이 쌓여 있었고 우리는 눈 속에 완전히 묻혔다. 멀리서 기관총을 든 서양인들이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현정우는 갑자기 일어서서 그들의 주의를 끌었고 그들은 현정우를 쫓아갔다. 나는 눈 속에서 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숨이 막힐 즈음에야 눈밭에서 기어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나는 순간, 짙은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는 마치 뱀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마치 내가 그의 사냥감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 누구야?”“누구? 네 남자의 형제랄까?”그는 외국인이었지만 우리나라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나는 마음속의 공포를 억누르고 침착하게 물었다.“지훈과 무슨 관계지? 왜 나를 죽이려는 거야?!”예전에는 석지훈이 나를 구해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직접 목격한 후로는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마음속 공포가 점점 강해지는 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마치 무협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처럼 나에게 쫄쫄이를 입히고 머리를 땋아 올리고는 검은 마스크까지 씌웠다.그러고는 시간이 급했는지 내 팔을 끌고 차로 달려가 나를 안에 밀어 넣고는 자신도 따라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본부로 돌아가.”그가 분부했다.차는 계속 북쪽으로 달렸고 나는 그들이 핀란드 국경을 넘었다는 말과 석씨 가문 사람들이 그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밤이 내려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석지훈을 보았다.나는 2층에, 그는 1층에 있었다.1층은 경기장이었다.그는 마치 악마처럼 사람들을 계속해서 죽이고 있었다.수십 명에게 포위되어 공격당하면서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여유롭게, 마치 자신의 안방인 양 상대하고 있었다.나는 아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속이 메스꺼워졌고 석지훈의 몸 상태가 걱정되었다.그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내 마음은 찢어질 것같이 아플 것이었다.크리스는 의자에 앉아 나에게 말했다.“여기는 나와 지훈이가 어릴 때부터 자란 곳이야.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지.”나는 숨을 죽이고 물었다.“벗어날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무슨 말인지 모르겠어?”그는 흘끗 나를 보며 말했다.“벗어날 수 없다는 건 평생 여기를 떠날 수 없다는 뜻이야! 나든 지훈이든 마찬가지지!”석지훈처럼 강하고 화려한 사람에게도 이런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말인가?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럼 그는 여기에 자발적으로 있는 거야, 아니면...”“당연히 자발적이지. 여기는 그의 것이니까.”여기가 석지훈의 것이라니...그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지훈이는 널 사랑해?”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야.”“우리 테스트 한번 해볼까?”나는 차갑게 물었다.“무슨 테스트?”그가 옆 사람을 보고 말했다.“밀어.”그의 부하가 물었다.“입을 막을까요?”크리스가 웃으며 말했다.“막아.”그들은 나를 경기장 안
나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고 몸의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이때 밖에서 갑자기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어이, 깼어?”이 목소리는...크리스였다.나는 다급하게 물었다.“지훈 씨는 어디 있어?”“아직도 걔를 걱정해?”“지훈 씨는 어디 있냐고? 난 지훈 씨를 만나야겠어.”나는 계속 석지훈을 찾았고 그는 의아한 듯 내게 말했다.“지훈이가 방금 너를 칼로 찔렀는데 아직도 그를 걱정해?”나는 어리둥절하게 물었다.“무슨 말이야?”“지훈이가 방금 너를 칼로 찔렀다고!”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믿을 수 없었지만 복부의 통증은 너무나도 확실했다.크리스는 나를 감방 밖으로 끌어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석지훈과 주름투성이 얼굴의 외국인 노인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크리스가 소개했다.“저분은 송 어르신이야.”나는 그에게 물었다.“송 어르신은 누군데?”크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 송 어르신이라는 사람이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저 아시아 여자와 무슨 관계냐?”석지훈이 답했다.“아무 관계도 아닙니다.”“크리스는 네 여자라고 하던데.”석지훈이 대답했다.“한낱 여자일 뿐입니다.”그의 말투는 가볍고 무심했다.송 어르신이 담담하게 물었다.“저 여자를 사랑해?”“그런 적 없습니다.”이것은 석지훈의 익숙한 말투였다.그런 적 없다...석지훈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예전에 많은 사람이 이 질문을 했었지만 나는 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내가 그저 혼자 착각했던 것일까?“그렇다면 내다 버려라.”크리스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왜 울어?”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나는 그에게 물었다.“송 어르신은 누구지?”“왜? 지훈이가 그에게 협박당해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믿지 못하겠다면, 곧 지훈이가 올 테니 직접 물어봐.”크리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덧붙였다.“벌써 왔네.”나는
“사모님, 암 말기입니다...”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뭐라고요?”의사는 진단서 위에 팔을 올려놓고 또박또박 말했다.“사모님, 2년 전 유산했을 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후에 감염까지 된 바람에 자궁에 암 덩어리가...”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의사의 말을 가로챘다.“그럼 얼마나 남았나요?”“암세포가 퍼져서 길어야 석 달 정도...”그 후로 의사가 더 뭐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가 윙 했다. 머릿속에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해서 맴돌았다......그날 저녁, 고씨 가문 별장.조금 전 나와 뜨거운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바로 나의 남편 고현성이다.결혼 3년 동안 그는 매번 별장으로 돌아와 나와 관계를 가진 후 욕실로 들어가서 씻었다. 마치 더러운 뭔가를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후에는 매정하게 나가버렸다.별장으로 들어와서부터 나갈 때까지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그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후 양복을 갈아입고 또다시 나가려고 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고현성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고현성이 입술을 깨물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그의 무관심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결국 이 한마디만 했다.“조심해서 가요.”아래층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의 검은색 마이바흐를 내려다보면서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성이 전화를 받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나와 고현성은 올해로 결혼한 지 3년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그 여자의 목숨으로 고현성을 협박하면서 나와의 결혼을 강요했다.고현성은 반항도 해봤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고 나와 결혼했다.3년 동안 나를 대하는 고현성의 태도는 늘 차가웠고 잔인하기만 했다. 심지어 나와 잠자리를 할 때도 그 여자의 이름 임지혜를 부르곤 했다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또 무슨 수작이야?”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네. 나랑 연애해요.”“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왜 그러시죠?”“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고현성은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내가 저녁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 내버려 둔 탓에 음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입맛이 없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밥을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고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연수아,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고현성의 시선이 음식 쪽으로 향했다.“다 네가 한 거야?”고현성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설거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낮에 현성 씨한테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겠냐고 물어봤었잖아요. 들어오겠다고 해서 현성 씨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한상 차렸죠.”고현성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나는 수저를 치우던 동작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눈 사이에 예전에 느꼈던 따뜻함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침묵을 택했다. 아무 말 없이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위층을 올려다보며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보니 고현성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리 위에 얇은 금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나는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다가 욕실 문을 연 순간 짙은 기운이 날 감싸 안았다.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침대까지 끌려갔다. 마지막에 고현성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혜가 그러는데 3년 전에 네가 강요해서 미국으로 간 거래.”고현성은 이미 내가 그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는 3년 전에 그와 6억 원 사이에서 고민도 없이 6억 원을 선택했다.그렇다. 3년 전에 내가 임지혜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만약 임지혜가 고현성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고씨 가문과의
3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생명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소원은 고현성과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고현성이 나를 조금만 달래줘도 나는 아마 날뛰듯이 기뻐할 것이다.그나저나 나는 평생 귀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여 임지혜를 자주 질투했고 미친 것처럼 고현성을 욕심냈다.고현성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해도 기꺼이 당해주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보잘것없고 비굴한 존재였다.나는 항상 자신을 낮추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고현성은 평소처럼 그냥 휙 가버린 게 아니라 샤워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회사 서류를 처리했다.나는 잠옷을 입고 가볍게 물었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나는 시력이 좋아 그의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서류를 정확히 보았다. 전부 예전에 선양 그룹과 체결했던 계약이었다.최근 선양 그룹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들이 줄줄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게 다 고현성이 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 않았다. 그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길 바랐다.고현성이 무시하자 나도 더는 방해하지 않고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혼에 관해 그와 상의하려는데 임지혜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임지혜의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현성아, 살려줘. 그 여자가 사람을 시켜서 날 납치했어. 내 몸을 더럽혀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여자로 만들겠대.”고현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네가 시킨 거야?”나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예요?”고현성이 나가려고 하자 나는 달려가서 그를 잡았다. 그러고는 용기 있게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물었다.“현성 씨는 왜 그 여자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요? 자작극일 수도 있잖아요.”“난 지혜를 잘 알아. 걔는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나는 순간 멈칫했다.‘너 같
나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고 몸의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이때 밖에서 갑자기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어이, 깼어?”이 목소리는...크리스였다.나는 다급하게 물었다.“지훈 씨는 어디 있어?”“아직도 걔를 걱정해?”“지훈 씨는 어디 있냐고? 난 지훈 씨를 만나야겠어.”나는 계속 석지훈을 찾았고 그는 의아한 듯 내게 말했다.“지훈이가 방금 너를 칼로 찔렀는데 아직도 그를 걱정해?”나는 어리둥절하게 물었다.“무슨 말이야?”“지훈이가 방금 너를 칼로 찔렀다고!”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믿을 수 없었지만 복부의 통증은 너무나도 확실했다.크리스는 나를 감방 밖으로 끌어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석지훈과 주름투성이 얼굴의 외국인 노인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크리스가 소개했다.“저분은 송 어르신이야.”나는 그에게 물었다.“송 어르신은 누군데?”크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 송 어르신이라는 사람이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저 아시아 여자와 무슨 관계냐?”석지훈이 답했다.“아무 관계도 아닙니다.”“크리스는 네 여자라고 하던데.”석지훈이 대답했다.“한낱 여자일 뿐입니다.”그의 말투는 가볍고 무심했다.송 어르신이 담담하게 물었다.“저 여자를 사랑해?”“그런 적 없습니다.”이것은 석지훈의 익숙한 말투였다.그런 적 없다...석지훈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예전에 많은 사람이 이 질문을 했었지만 나는 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내가 그저 혼자 착각했던 것일까?“그렇다면 내다 버려라.”크리스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왜 울어?”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나는 그에게 물었다.“송 어르신은 누구지?”“왜? 지훈이가 그에게 협박당해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믿지 못하겠다면, 곧 지훈이가 올 테니 직접 물어봐.”크리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덧붙였다.“벌써 왔네.”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마치 무협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처럼 나에게 쫄쫄이를 입히고 머리를 땋아 올리고는 검은 마스크까지 씌웠다.그러고는 시간이 급했는지 내 팔을 끌고 차로 달려가 나를 안에 밀어 넣고는 자신도 따라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본부로 돌아가.”그가 분부했다.차는 계속 북쪽으로 달렸고 나는 그들이 핀란드 국경을 넘었다는 말과 석씨 가문 사람들이 그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밤이 내려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석지훈을 보았다.나는 2층에, 그는 1층에 있었다.1층은 경기장이었다.그는 마치 악마처럼 사람들을 계속해서 죽이고 있었다.수십 명에게 포위되어 공격당하면서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여유롭게, 마치 자신의 안방인 양 상대하고 있었다.나는 아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속이 메스꺼워졌고 석지훈의 몸 상태가 걱정되었다.그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내 마음은 찢어질 것같이 아플 것이었다.크리스는 의자에 앉아 나에게 말했다.“여기는 나와 지훈이가 어릴 때부터 자란 곳이야.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지.”나는 숨을 죽이고 물었다.“벗어날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무슨 말인지 모르겠어?”그는 흘끗 나를 보며 말했다.“벗어날 수 없다는 건 평생 여기를 떠날 수 없다는 뜻이야! 나든 지훈이든 마찬가지지!”석지훈처럼 강하고 화려한 사람에게도 이런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말인가?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럼 그는 여기에 자발적으로 있는 거야, 아니면...”“당연히 자발적이지. 여기는 그의 것이니까.”여기가 석지훈의 것이라니...그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지훈이는 널 사랑해?”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야.”“우리 테스트 한번 해볼까?”나는 차갑게 물었다.“무슨 테스트?”그가 옆 사람을 보고 말했다.“밀어.”그의 부하가 물었다.“입을 막을까요?”크리스가 웃으며 말했다.“막아.”그들은 나를 경기장 안
석지훈은 답장이 없었다. 나는 한민수와 원태웅에게도 문자를 보냈지만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마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모두 연락이 두절되었다.마음속에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몇 시간 후 헬리콥터는 에르크에 착륙했다. 별장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현정우는 위험을 감지하고 나를 자신의 뒤로 숨겼고 나머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에게 나를 둘러싸고 보호하라고 지시했다.이때 별장 입구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 우리는 폭풍에 휩쓸렸고 나는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이때 현정우가 재빨리 내 손목을 잡고 나를 일으켜 혼란을 틈타 도망쳤다.살아남은 경호원들은 우리를 엄호하며 남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하나둘씩 눈앞에서 쓰러져 갔다. 눈앞이 아찔해지고 속이 뒤틀렸다. 이토록 잔혹한 광경은 처음이었다.현정우에게 끌려 한참을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멈추자 구토가 치밀었다. 그는 곧바로 나를 숲으로 끌어당겨 숨겼다. 핀란드의 눈 때문에 숲에는 눈이 깊이 쌓여 있었고 우리는 눈 속에 완전히 묻혔다. 멀리서 기관총을 든 서양인들이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현정우는 갑자기 일어서서 그들의 주의를 끌었고 그들은 현정우를 쫓아갔다. 나는 눈 속에서 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숨이 막힐 즈음에야 눈밭에서 기어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나는 순간, 짙은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는 마치 뱀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마치 내가 그의 사냥감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 누구야?”“누구? 네 남자의 형제랄까?”그는 외국인이었지만 우리나라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나는 마음속의 공포를 억누르고 침착하게 물었다.“지훈과 무슨 관계지? 왜 나를 죽이려는 거야?!”예전에는 석지훈이 나를 구해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직접 목격한 후로는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마음속 공포가 점점 강해지는 가
석지훈의 어머니는 두 번이나 내가 그녀와 닮았다고 했다. 그녀의 전체 얼굴을 마주하자 나는 마치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몇십 년 후면 나도 그녀와 똑같아질 것이다.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고 최욱현은 눈치껏 자리를 뜨며 말했다.“어머니, 약속대로 수아를 데려왔습니다! 두 분 먼저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올게요.”최욱현이 자리를 뜨자 내 곁에는 현정우 몇몇만 남았다. 그녀는 나에게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이 사람들 일단 물리렴.”나는 현정우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나에게서 10미터 정도 떨어졌다.그들이 멀어지자 앞에 앉은 귀부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헤어진 후 처음으로 너를 만나는구나.”‘그렇다면 나에게 신장을 기증했을 때도 나를 보지 않았던 것인가?’내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나는 네가 보고 싶었고 내가 직접 키우고 싶었어. 하지만 네 아빠를 생각하면... 그는 나를 속이고 내 사랑을 짓밟았어. 난 그를 증오해. 그래서 네가 곁에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었어. 미안하구나.”그녀는 내 아버지를 증오한다고 말할 때도, 나를 그리워한다고 말할 때도 매우 차분했다. 아주 조금의 감정 동요도 없었다.나는 입을 열었다“괜찮아요.”“수아야, 너는 나를 만나도 차분하구나.”나는 커피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그 말을 듣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너는 나와 많이 닮았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말을 이었다.“욱현이에게 널 데려오라 한 건, 운성에 있는 내 재산과 F 국에 있는 것을 모두 너에게 주려고 그랬어.”나는 웃으며 물었다.“그렇게나 후하세요?”그녀는 말했다.“너는 내 유일한 딸이니까.”“욱현이도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던데요.”내가 갑자기 최욱현을 언급하자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설명했다.“욱현이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내가 키웠어. 날 어머니라 부르는 건 그냥 친근함의 표시
최욱현은 아이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였고 현정우가 입고 있는 검은색 군복에도 관심을 보였다.“우리 옷이랑 다르네. 여기 허리띠가 있네.”나: “...”나는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현정우의 허리띠를 잡아당기는 것을 보았지만 현정우는 그를 무시했다.최욱현은 재미없다는 듯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대신 나에게 물었다.“석씨 가문 가주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무기력해? 아까 왜 그 이씨 가문 사람들을 그냥 뒀어?”나는 설명했다.“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니 권세로 억누르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다은이 시댁 될 사람들인데 예의는 지켜야지. 정재 씨도 의사 선생님 체면을 생각해서 고급 차로 데려오지 않고 검소하게 했는데 네가 나타나서 다 망쳐놨잖아! 이제 이씨 가문 사람들과 의사 선생님 동료, 친구들이 다 다은이가 돈이 많다는 걸 알게 됐으니 앞으로 그녀를 귀찮게 할 일도 많아지겠지. 그 사람들 눈에 다은이는 졸부로 보일 거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돈은 다은이에게는 껌값일 테니 한 번 도와주고 두 번 도와주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뒷말이 나올게 뻔해.”최욱현은 내 옆에 앉아 말했다.“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구나. 네 말이 맞아. 앞으로 돈이 필요하면 신부를 찾을 거야. 신부는 시댁 식구들이나 친구들이니 분명 도와 줄것이고 그 사람들은 신부가 만만하니까 돈 뜯어낼 궁리만 하겠지.갈수록 더 심하게 말이야! 하지만 너는 한 사람을 간과했어. 바로 신랑이야. 신랑이 자기 쪽 사람들이 신부를 괴롭히는 걸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까? 게다가 오늘 일을 크게 벌인 건 앞으로의 많은 문제를 예방하는 거야. 아무도 신부를 얕보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아무도 신부를 괴롭히지 않겠지.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의사의 동료 중에 신부를 괴롭혔던 사람도 있었어.”“나는 그런 일은 잘 몰라.”내가 말했다.나는 윤다은의 성격상 스스로 해결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여러 사람들 속에서 혼자 나를 구해준 적도 있었으니까.“됐다, 그 얘긴 그만하자.”
최욱현이 F국을 언급하자 F국에 정착한 나의 친어머니 안혜인이 떠올랐다. 고귀한 공작부인 말이다.나는 패딩을 여미며 거절했다.“시간 없어.”최욱현은 씩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가 너 보자고 하셔. 지금 F국 성에서 기다리고 있어.”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우리 엄마 알아?”최욱현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내가 눈을 부릅뜨자 자기 머리 쓱 만지면서 말했다.“알지. 옛날부터 알았어. 너 지난번에 입은 드레스도 네 엄마가 보내준 거야.”“엄마가 그런 식으로 보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지난번 일 때문에 솔직히 너 못 믿겠어.”최욱현이 되물었다.“내가 네 엄마 아는 거 못 믿는 거야?”나는 아무 말 없이 헬리콥터 쪽으로 걸어갔다. 최욱현은 내 뒤를 따라오며 설명했다.“진짜야. 나 네 엄마 알아. 우리 삼촌 와이프거든. 어릴 때 네 엄마랑 몇 년 같이 살았어. 비록 숙모지만 난 어머니라고 불렀지.”나는 걸음을 멈췄다. 최욱현도 예전에 자기 엄마가 도라지 꽃을 좋아한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우리 엄마도 도라지꽃을 좋아하셨는데.그렇지 않고서야 석 씨 저택 아래의 운산 기슭에 그렇게 많은 도라지꽃을 심어 놓았을 리가 없었다. 최욱현의 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내가 동요하는 것을 보고 그는 휴대폰을 꺼내 곧바로 번호를 누르고 내게 건넸다.“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나: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야?”최욱현은 대답 안 하고 씩 웃으면서 나를 봤다.나는 휴대폰을 귀에 댔다. 수화기 너머에서 유난히 부드럽고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나야.”나는 미간을 찌푸렸다.“누구...”묻자마자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최욱현이 그녀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수아야, 나 안혜인이야.”그녀는 감히 자신을 나의 엄마라고 칭하지 못했다.“네. 욱현 씨가 건 거예요.”나의 어조는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매우 차분했다.“수아야, 널 만나고 싶구나.”비록 그녀는 나를 버렸지만 나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었다.
지금의 최욱현은 마치 오지랖 넓은 할아버지 같았다.나는 다시 물었다.“금운에는 어떻게 온 거야?”“아까 말했잖아.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그가 말했다.나는 차갑게 말했다.“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잖아.”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우리가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나는 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잖아? 눈보라 속에서 너를 업고 몇 시간이나 걸었고.”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지훈 씨가 네가 꾸민 일이라고 했어.”“진실을 알고 있었네.”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화가 나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는 친구 아니야. 얼른 가.”최욱현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흠칫 놀라 그의 손을 쳐냈다.“만지지 마.”“그냥 쓰다듬는 것뿐인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그는 어린아이처럼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차마 미워할 수 없었다.석지훈이 그에게 백혈병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병으로 나와 너무나도 닮았다.우리 둘은 다 건강한 몸이 아니었다.“허락 없이 만지는 건 성추행이야.”내 말을 듣자 그는 순순히 말했다.“그럼 앞으로 허락을 받고 터치할게.”12월의 날씨에 들러리 드레스만 입고 있으니 너무 추웠다. 담현아가 패딩을 가져다주자 나는 패딩을 받아 들고 웃으며 말했다“나는 이따 핀란드에 갈 거야. 너는 정재 씨랑 같이 동성으로 돌아가.”그러자 담현아가 말했다.“나랑 그 사람은 사는 도시가 다르잖아요.”나는 작게 말했다.“어쩌면 가는 길에 데려다줄 수도 있잖아.”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굳이 길을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담현아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 망설이다가 나에게 물었다.“언니, 아저씨에 대한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많이 망설여져요...”나는 차분히 물었다.“뭐가 망설여지는데?”내 옆에는 최욱현이 서 있었지만 담현아는 솔직하게 말했다.“내 인생은 이제 막 시작했잖
12월 금운의 날씨는 포근했고 부드러운 햇살이 쫙 쏟아져 짙은 색 군용 점퍼를 입은 남자에게 따스하게 내려앉았다.한 달 만에 만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그랬다. 그는 아름다웠다.최현욱, 아니지. 그의 이름은 최욱현이었다.최욱현은 사람을 홀릴만한 미모를 갖고 있었다.선글라스를 손에 든 채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그의 긴 부츠는 반짝반짝 빛났는데 마치 인간 세상에 내려온 요정 같았다.이씨 가문 친척들과 하객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고급 차 수십 대가 한꺼번에 있는 모습을 본 적도 거의 없었다. 모두 경악과 부러움에 휩싸였다.이주원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구신지?”최욱현은 여전히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다만 화려한 분홍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나는 그가 왜 항상 이어폰을 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최욱현은 우리 앞에 와서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신부 친구입니다. 원래 신부 데리러 오려고 했는데, 좀 늦어져서 아쉽네요. 이 고급 차 수십 대를 활용하지 못했으니 사과의 의미로 신부에게 선물할게요. 다은 씨, 어때요?”최욱현과 윤다은이 아는 사이라고?윤다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혹시 도와주러 온 건가?윤다은은 재치 있게 대답했다.“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차는 뭐 하러 줘요? 나도 살 수 있는데.”신부의 당당한 말에 이씨 가문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최욱현은 웃으며 물었다.“다들 왜 입구에 서 계시는 거죠?”윤다은은 시무룩하게 말했다.“수아 언니가 이혼했다고 내 들러리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그러자 최욱현은 나를 보며 물었다.“수아 씨는 어떻게 생각해?”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어?”최욱현은 다시 이씨 가문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이씨 가문 사람들도 멍해졌다.“네?”최욱현은 허리에 손을 얹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 비꼬는 척하며 말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고향에서 부랴부랴 달려오신 윤다은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수아야.”나는 정중하게 인사했다.“아주머니.”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맙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윤다은도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방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인터넷에서 화제였던 그 연수아 맞죠? 이혼한 사람이 어떻게 다은이의 들러리를 설 수 있죠?”맞다. 이혼한 내가 어떻게 들러리를 설 수 있겠는가?사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윤다은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초대했고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이 사실을 지적하다니.윤다은의 결혼식이었기에 나는 그 사람과 논쟁하기 싫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윤다은은 내가 억울한 거 같았는지 립스틱 내려놓고 정색하면서 말했다.“수아 언니가 이혼한 건 맞지만, 지금은 미혼이에요. 왜 들러리를 설 수 없다는 거죠?”그 여자는 고집스럽게 말했다.“불길해요.”하지만 윤다은은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길하다고 하면 길한 거예요.”“집안이 좋다고 우리 이씨 가문을 무시하지 마세요. 작은어머니께 말씀드릴 테니, 그때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요!”알고 보니 그녀는 이주원 쪽 친척이었다.그녀가 방을 나가자 나는 윤다은을 달래며 말했다.“저 사람 말이 맞아. 나는 이혼했으니 네 들러리로는 적합하지 않아.”나는 혹시라도 이씨 가문 사람들이 윤다은을 곤란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윤다은은 고집스럽게 말했다.“나는 언니가 꼭 내 들러리를 서 줬으면 좋겠어요. 오늘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나: “...”점심때쯤 이주원이 신부를 데리러 왔다. 이주원의 들러리들은 모두 같은 과 의사들이나 오랜 친구들이었는데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주원에게 들러리 중 한 명을 소개해 달라고 했지만 이주원은 나와 최희연에게 이미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