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석지훈은 욕실에서 다시 샤워하고 나왔다. 이번에는 검은색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는데 한순간에 다시 냉철하고 금욕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석지훈은 키가 거의 190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침대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아주 위풍당당했다.나는 석지훈의 손을 잡고 살살 흔들며 물었다.“안 자요?”석지훈은 나의 손가락을 가볍게 쥐며 말했다.“응, 처리할 일이 좀 남았어.”내가 석지훈의 손을 놓자 그는 살짝 몸을 숙여 내 볼에 입 맞추며 말했다.“먼저 자.”나는 몸이 너무 피곤해 금세 잠들어버렸다. 그런데 한밤중에 깨어 화장실에 가려고 하니 석지훈이 아직 침실로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고 나는 문을 열어 그를 찾으러 나섰다.기억을 더듬어 석지훈의 서재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석지훈은 등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그 앞에는 은색 노트북 한 대가 놓여 있었다.나는 뒤에서 석지훈의 목을 안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시간까지 뭐 하느라 안 자요?”석지훈이 대답했다.“응,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나는 석지훈의 목을 안고 있던 팔을 풀어 소파로 가서 누운 뒤 졸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일 봐요. 내가 여기서 같이 있어 줄게요.”말은 석지훈의 옆에 함께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나는 또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잠들어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은 밝아져 있었고 나의 몸에는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다.소파에 누워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일어나려는 순간 석지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일은 내가 처리할 거니까 너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방해하지 마.”‘석지훈은 누구와 전화하고 있는 거지?’전화 상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석지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너와 상관없어.”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석지훈은 손가락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나는 석지훈의 팔에 매달리며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무
유독 한민수는 깔끔한 옷차림에 그 특유의 매력적인 눈매까지 더해져 마치 사람을 홀리는 요정 같았다.한민수는 내 옆에 앉아 흥미롭게 물었다.“어젯밤 수아 씨 남자 친구가 질투했을 텐데 어떻게 달랬어요?”한민수조차 석지훈이 질투했다는 걸 눈치챘다.어젯밤 석지훈의 야성적인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본능적으로 부정했다.“아니요. 지훈 씨 집에 오자마자 바로 업무를 봤는데요?”한민수는 나의 말을 믿지 않는 듯 내 얼굴을 흘겨보며 확신에 차서 말했다.“지금 수아 씨 얼굴은 온통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요.”나는 얼굴을 붉히며 한민수의 말을 끊었다.“좀 진지하게 굴 수 없어요?”내 얼굴빛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한민수는 분위기를 파악하고서는 말했다.“알았어요. 그냥 농담한 거예요. 지훈이가 나웨이에 가니까 나에게 수아 씨와 비아드 여기저기를 둘러보라고 했어요.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냥 집에 있고 싶어요.”“집에 있어 봤자 뭐 재밌는 것도 없잖아요.”한민수는 내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이때 마침 담현아가 내게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한민수는 내 핸드폰 화면에 표시된 이름을 보고 얼른 받으라고 했다.나는 한민수의 뜨거운 시선 속에서 영상 통화를 연결했다.담현아는 여전히 핑크색 긴 머리를 하고서는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수아 언니, 나 곧 비행기 타고 동성에 돌아가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동성에 없어.”담현아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디에 있어요?”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핀란드에 있어.”“아, 언니한테 얘기할 게 있었는데.”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뭔데?”“나 다시 세계 여행을 시작하려고 계획 중이에요.”담현아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직 1년은 더 있어야 18살이 되는데. 그 전에 경찰서에서 일할 수 없으니까요. 그동안 세계를 더 다니며 풍경을 보려고요.”이토록 빛나는 담현아가 경찰이 되고 싶어 한다니. 아마 담현아는 마음속으로 평범
가소롭게도 한민수는 여전히 자신의 망상 속에 갇혀 있었다. 모든 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자기 뜻대로 생각했다.나는 한민수에게 물었다.“민수 씨, 몇 살이에요?”“수아 씨 남자친구 보다 3살 많을 뿐이에요.”나는 입술을 깨물고서는 웃으며 물었다.“그럼, 이제 33살이에요?”한민수는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요?”“그럼 현아의 나이를 맞춰봐요.”나의 말에 한민수는 잠시 생각한 뒤 추측했다.“20살?”“현아가 설령 20살이라고 해도 민수 씨보다 10살은 어린 거예요. 이게 바로 남자들은 다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가? 그리고 민수 씨도 어린 여자애의 감정을 속이는 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 거잖아요? 단순히 장난치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현아를 만나고 싶은 거라면 마지막에는 부모님께 인사도 드려야 할 텐데 현아 부모님이 민수 씨 같은 나이 많은 사위를 원하시겠어요?”한민수는 코를 만지며 어색하게 말했다.“그냥 조금 신기해서 관심이 갈 뿐인데 수아 씨는 뭘 그렇게 멀리까지 얘기해요?”“그리고 현아는 딱 봐도 15살도 안 돼 보이잖아요.”한민수는 놀라며 되물었다.“그렇게 어리다고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아니요. 그냥 비유한 거예요.”나는 더 이상 한민수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민수는 어린아이처럼 내 핸드폰을 빼앗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내가 뒤따라 나갔을 때 한민수는 핑크색 셔츠 한 장만 입은 채 새하얀 눈밭에서 고개를 숙이고서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나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또 한 명이 홀려버렸네.”사실 그동안 관찰한 결과 고정재오아 담현아 사이에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해 보였다.아니면 담현아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고정재가 계속 낮은 자세로 담현아에게 매달릴 리가 없다.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가 알아낼 필요는 없었고 또 나 자신도 그러지 않기로 했다.내가 바라는 건 단지 내 삶에 나타난 모든 사람이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그럼 석지훈에 관한 얘기는요?][내일 가는 길에 얘기해 줄게요.]우리는 서로 관심 있는 사람들을 두고 협상하는 셈이었다.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 한민수는 이미 별장에 와 있었다.나는 잠옷 차림으로 내려가 한민수를 보고 놀라며 물었다.“이렇게 일찍 왔어요?”한민수는 어제 입었던 핑크색 셔츠 대신 깔끔한 흰 셔츠에 정통 슈트 차림으로 나타났다.“일찍 하다뇨? 현아는 조금 전에 비행기를 탔어요.”우리가 출발하면 시간이 비슷할 것 같았다.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가볍게 화장하고 흰색 맨투맨에 롱부츠를 신었다.그리고 따뜻한 컬러의 패딩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한민수는 약간 짜증 난 표정으로 말했다.“여자들은 왜 화장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려요?”나는 변명하듯 말했다.“이건 가볍게 한 거예요.”이 말을 들은 한민수는 더 이상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차 안에서 내가 석지훈에 관한 얘기가 너무 궁금해서 물으니 한민수는 가볍게 웃으며 내게 되물었다.“수아 씨는 석지훈의 고향이 어디라고 생각해요?”나는 고개를 찌푸리며 물었다.“동성 아니에요?”한민수는 이어서 말했다.“수아 씨가 말하는 건 석씨 가문을 얘기한 거고요.”‘그럼 석씨 가문과 석지훈이 다르다는 건가?’내가 의문을 품고 있을 때 한민수가 담담하게 말했다.“석지훈의 중심은 유럽이에요. 진유겸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어요?”전에 비서가 진유겸의 사업은 거의 유럽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어본 적 있어요.”차창 밖으로 끝없이 내리는 눈이 보였다.한민수는 차를 운전하며 설명했다.“유럽에는 두 명의 거대 사업가가 있어요. 하나는 진유겸이고 다른 하나는 석지훈이죠. 하지만 진유겸은 국내의 권력에 의지하지 못해서 지훈이만큼 강하지 않아요. 근데 둘 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고 다크한 계열에 속하는 남자들이죠.”‘다크한 계열에 속하는 남자라는 게 무슨 뜻일까?’
그들은 모두 허씨 가문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허씨 가문의 명령을 따랐다. 이 순간 한민영의 전화를 받은 그들은 모두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부탁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는 일을 해결했다.한민영은 정말로 나를 얕보고 있었나 보다. 내가 해외에 혼자 있으니 아무런 힘이 없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해프닝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어 한 시간 뒤에나 나웨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다행히 핀란드에서 노르웨이까지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석지훈을 걱정하다가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노르웨이에 도착한 뒤 위치에 따라 석지훈이 있는 곳으로 갔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나는 마음이 조급해져 곧바로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원태웅은 당장 방법이 없는지 나에게 당부했다.“우선 너무 당황하지 말고 있어. 내가 먼저 알아볼게. 넌 거기서 절대 움직이지 말고 혹시 형이 널 찾으러 갈지도 모르니까 거기서 기다려.”‘석지훈이 나를 찾으러 온다고?’하지만 이 순간 나는 원태웅의 말에서 어떤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 원태웅은 내가 위험에 처할까 봐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나는 석지훈이 계속 마음에 걸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원태웅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을 때 나는 문득 차 안에서 한민수가 진유겸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다.한민수는 그와 석지훈이 유럽에서 가장 큰 비즈니스 거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진유겸은 유럽 전역의 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다.진유겸이 나를 도와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도해 보자는 생각으로 비서에게 연락해 진유겸의 연락처를 물었다.비서는 예전에 최희연의 일을 돕느라 진유겸의 연락처를 알아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바로 번호를 보내주었다.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진유겸은 내가 석지훈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신호음이 한참 울리도록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핸드
안에서 한참 동안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내가 문을 두드리자 그제야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선 사람은 바로 어제 나와 헤어진 남자였다. 내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그리워했던 석지훈이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나는 눈가가 붉어진 채 석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다친 거예요?”석지훈은 검은색 롱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이마 한쪽에 상처가 있어 밴드를 붙인 상태였다.몸 전체를 훑어보아도 다른 부상이 보이지 않자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나는 석지훈을 안고 싶었지만 다가가지 못한 채 눈이 내리는 추위 속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여기 있는 거야?”석지훈의 말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마치 내가 그의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한 것처럼 말이다.순간 당황한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내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고 화면을 확인하니 원태웅의 전화였다.원태웅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나느 석지훈의 앞에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내가 지훈 오빠는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원태웅이 먼저 말했다.“윤아야,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전화 받아.”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는 석지훈을 힐끔 쳐다본 뒤 고민하다가 일부러 한쪽으로 걸어가 원태웅에게 궁금해하며 물었다.“오빠가 한민수한테 전화해서 지훈 오빠가 습격당했다고 했잖아. 그런데 진유겸의 사람들은 지훈 오빠가 추격당하지 않았다고 했어.”원태웅은 나의 말에 웃으며 부드럽게 설명했다.“그건 한민수가 널 비아드에서 따돌리고 담현아와 단둘이 있고 싶어서 생각해 낸 방법이야. 어젯밤 내게 한참 부탁했거든. 게다가 한민수가 나한테 워낙 많은 도움을 줘서 나도 거절하기가 좀 미안했어.”“두 사람 정말.”나는 화가 나서 말을 잇지 못했지만 원태웅은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서둘러 내게 당부했다.“절대 형한테 우리가 널 속여서 나웨이로 보냈다는 걸 말하지 마. 아니면 형이 돌아오면 우리 둘 다 곤란해질 거야.”원태웅이 나더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전화를 받으라고
석지훈이 이렇게 집요하게 물은 적은 처음이라 나는 최대한 정성껏 답을 해줬다.“희연이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예요, 진씨 집안 진서준 씨와 사귀면서 결혼 얘기까지 오갔었는데 서준 씨가 그렇게 가고 나서 진유겸 씨가 서준 씨 애인 돌봐주겠다고 희연이 데리고 있는 거예요.”나는 혹시나 석지훈이 오해를 할까 봐 한마디 더 덧붙였다.“희연이가 유겸 씨 좋아한 지도 꽤 됐는데 잘됐나 모르겠어요.”내 말이 끝났음에도 석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침대에 걸터앉았다.문을 닫고 거기에 기댄 나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낡아버린 가구들이 가득한 집안을 둘러보았다.“오빠는 어떻게 여길 온 거예요?”석지훈은 손가락을 들어 침대를 톡톡 두드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여긴 내가 태어난 곳이야.”이 낡고 초라한 집이 석지훈이 태어난 곳이었다니.나는 그제야 석지훈이 노르웨이까지 온 것이 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곳에 와보기 위함이었다는 걸 알아챘다.그 속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 싶어 궁금한 나머지 나는 바로 석지훈 앞으로 가 앉았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다행히 석지훈은 내 질문 없이도 말을 이어나갔다.“내가 여기서 태어났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와봤는데 이렇게 낡아 있을 줄은 나도 몰랐어. 사람 흔적도 전혀 없고.”왜 실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석지훈의 표정과 말투에서 크나큰 실망이 엿보이자 나는 바로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어머님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거에요? 나는 오빠가 석씨 집안 옛 저택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요.”내가 옛 저택을 언급하자 석지훈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지만 그는 결국 나의 질문에는 답을 해주지 않고 내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나가자, 여긴 묵을 곳이 못 돼.”그렇게 나는 들어온 지 2분도 안 돼서 다시 석지훈을 따라 나갔다.운전을 하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어서 나는 그가 바로 비아드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석지훈은 대뜸 나를 끌고 쇼핑몰로 들어가더니 생필품을 고르
원태웅은 처음부터 우리의 연애를 찬성하고 또 우리 둘을 일부러 붙여놓기까지 한 사람이었다.내가 그의 생각을 하며 별을 보고 있을 때 석지훈은 눈으로 냄비를 씻고 또 깨끗한 물로 한 번 더 씻어내며 결벽증이 있는 사람다운 면모를 뽐내고 있었다.그에 나는 야채라도 씻으려고 그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오빠는 왜 못 하는 게 없어요?”“살려고 배운 거지 다.”“네?”이해를 못 하는 나를 위해 석지훈은 자세히 말해주기 시작했다.“석씨 집안에서 나와서 혼자 살 때는 뭐든지 다 나 혼자 해야 했어. 여기저기서 조금씩 배우다 보니까 이렇게 다 알게 된 거지.”석지훈의 표정을 보아하니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아 나는 바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오빠, 몇십 년 동안 오빠 설레게 하는 여자는 없었어요?”내 질문에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 석지훈의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물었다.“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면 내가 곤란한 질문을 한 거예요?”“있었어.”갑작스레 들려온 그의 대답에 나는 조금은 울적한 기분으로 물었다.“누군데요?”“너.”깊은 눈동자로 나를 주시하며 처음으로 진심을 얘기하는 석지훈에 나는 뭐 큰 선물이라도 받은 어린아이마냥 바보처럼 웃어버렸다.그의 등 뒤로는 별이 흩뿌려진 밤하늘까지 보여 지금 이 순간이 유난히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말을 마친 석지훈은 일어나 차로 향하더니 검은색 후드티로 갈아입고는 다시 내 옆으로 와 쭈그려 앉았다.“안 춥겠어요?”온 오후를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었지만 그래도 나웨이는 워낙 기온이 낮아서 내가 걱정하며 묻자 석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안 추워.”“그래요, 오빠는 뭐 좋아해요?”“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어.”무미건조한 대답에 흥미가 생긴 나는 이내 또 다른 질문을 했다.“그럼 색깔은요?”“어두운 거 좋아해.”그 말에 자신과 진유겸 모두 검은색 계열을 좋아한다고 하던 한민수의 말이 떠오른 나는 석지훈을 보며 물었다.“검은색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