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그럼 석지훈에 관한 얘기는요?][내일 가는 길에 얘기해 줄게요.]우리는 서로 관심 있는 사람들을 두고 협상하는 셈이었다.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 한민수는 이미 별장에 와 있었다.나는 잠옷 차림으로 내려가 한민수를 보고 놀라며 물었다.“이렇게 일찍 왔어요?”한민수는 어제 입었던 핑크색 셔츠 대신 깔끔한 흰 셔츠에 정통 슈트 차림으로 나타났다.“일찍 하다뇨? 현아는 조금 전에 비행기를 탔어요.”우리가 출발하면 시간이 비슷할 것 같았다.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가볍게 화장하고 흰색 맨투맨에 롱부츠를 신었다.그리고 따뜻한 컬러의 패딩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한민수는 약간 짜증 난 표정으로 말했다.“여자들은 왜 화장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려요?”나는 변명하듯 말했다.“이건 가볍게 한 거예요.”이 말을 들은 한민수는 더 이상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차 안에서 내가 석지훈에 관한 얘기가 너무 궁금해서 물으니 한민수는 가볍게 웃으며 내게 되물었다.“수아 씨는 석지훈의 고향이 어디라고 생각해요?”나는 고개를 찌푸리며 물었다.“동성 아니에요?”한민수는 이어서 말했다.“수아 씨가 말하는 건 석씨 가문을 얘기한 거고요.”‘그럼 석씨 가문과 석지훈이 다르다는 건가?’내가 의문을 품고 있을 때 한민수가 담담하게 말했다.“석지훈의 중심은 유럽이에요. 진유겸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어요?”전에 비서가 진유겸의 사업은 거의 유럽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어본 적 있어요.”차창 밖으로 끝없이 내리는 눈이 보였다.한민수는 차를 운전하며 설명했다.“유럽에는 두 명의 거대 사업가가 있어요. 하나는 진유겸이고 다른 하나는 석지훈이죠. 하지만 진유겸은 국내의 권력에 의지하지 못해서 지훈이만큼 강하지 않아요. 근데 둘 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고 다크한 계열에 속하는 남자들이죠.”‘다크한 계열에 속하는 남자라는 게 무슨 뜻일까?’
그들은 모두 허씨 가문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허씨 가문의 명령을 따랐다. 이 순간 한민영의 전화를 받은 그들은 모두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부탁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는 일을 해결했다.한민영은 정말로 나를 얕보고 있었나 보다. 내가 해외에 혼자 있으니 아무런 힘이 없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해프닝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어 한 시간 뒤에나 나웨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다행히 핀란드에서 노르웨이까지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석지훈을 걱정하다가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노르웨이에 도착한 뒤 위치에 따라 석지훈이 있는 곳으로 갔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나는 마음이 조급해져 곧바로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원태웅은 당장 방법이 없는지 나에게 당부했다.“우선 너무 당황하지 말고 있어. 내가 먼저 알아볼게. 넌 거기서 절대 움직이지 말고 혹시 형이 널 찾으러 갈지도 모르니까 거기서 기다려.”‘석지훈이 나를 찾으러 온다고?’하지만 이 순간 나는 원태웅의 말에서 어떤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 원태웅은 내가 위험에 처할까 봐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나는 석지훈이 계속 마음에 걸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원태웅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을 때 나는 문득 차 안에서 한민수가 진유겸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다.한민수는 그와 석지훈이 유럽에서 가장 큰 비즈니스 거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진유겸은 유럽 전역의 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다.진유겸이 나를 도와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도해 보자는 생각으로 비서에게 연락해 진유겸의 연락처를 물었다.비서는 예전에 최희연의 일을 돕느라 진유겸의 연락처를 알아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바로 번호를 보내주었다.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진유겸은 내가 석지훈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신호음이 한참 울리도록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핸드
안에서 한참 동안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내가 문을 두드리자 그제야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선 사람은 바로 어제 나와 헤어진 남자였다. 내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그리워했던 석지훈이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나는 눈가가 붉어진 채 석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다친 거예요?”석지훈은 검은색 롱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이마 한쪽에 상처가 있어 밴드를 붙인 상태였다.몸 전체를 훑어보아도 다른 부상이 보이지 않자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나는 석지훈을 안고 싶었지만 다가가지 못한 채 눈이 내리는 추위 속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여기 있는 거야?”석지훈의 말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마치 내가 그의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한 것처럼 말이다.순간 당황한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내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고 화면을 확인하니 원태웅의 전화였다.원태웅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나느 석지훈의 앞에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내가 지훈 오빠는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원태웅이 먼저 말했다.“윤아야,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전화 받아.”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는 석지훈을 힐끔 쳐다본 뒤 고민하다가 일부러 한쪽으로 걸어가 원태웅에게 궁금해하며 물었다.“오빠가 한민수한테 전화해서 지훈 오빠가 습격당했다고 했잖아. 그런데 진유겸의 사람들은 지훈 오빠가 추격당하지 않았다고 했어.”원태웅은 나의 말에 웃으며 부드럽게 설명했다.“그건 한민수가 널 비아드에서 따돌리고 담현아와 단둘이 있고 싶어서 생각해 낸 방법이야. 어젯밤 내게 한참 부탁했거든. 게다가 한민수가 나한테 워낙 많은 도움을 줘서 나도 거절하기가 좀 미안했어.”“두 사람 정말.”나는 화가 나서 말을 잇지 못했지만 원태웅은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서둘러 내게 당부했다.“절대 형한테 우리가 널 속여서 나웨이로 보냈다는 걸 말하지 마. 아니면 형이 돌아오면 우리 둘 다 곤란해질 거야.”원태웅이 나더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전화를 받으라고
석지훈이 이렇게 집요하게 물은 적은 처음이라 나는 최대한 정성껏 답을 해줬다.“희연이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예요, 진씨 집안 진서준 씨와 사귀면서 결혼 얘기까지 오갔었는데 서준 씨가 그렇게 가고 나서 진유겸 씨가 서준 씨 애인 돌봐주겠다고 희연이 데리고 있는 거예요.”나는 혹시나 석지훈이 오해를 할까 봐 한마디 더 덧붙였다.“희연이가 유겸 씨 좋아한 지도 꽤 됐는데 잘됐나 모르겠어요.”내 말이 끝났음에도 석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침대에 걸터앉았다.문을 닫고 거기에 기댄 나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낡아버린 가구들이 가득한 집안을 둘러보았다.“오빠는 어떻게 여길 온 거예요?”석지훈은 손가락을 들어 침대를 톡톡 두드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여긴 내가 태어난 곳이야.”이 낡고 초라한 집이 석지훈이 태어난 곳이었다니.나는 그제야 석지훈이 노르웨이까지 온 것이 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곳에 와보기 위함이었다는 걸 알아챘다.그 속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 싶어 궁금한 나머지 나는 바로 석지훈 앞으로 가 앉았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다행히 석지훈은 내 질문 없이도 말을 이어나갔다.“내가 여기서 태어났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와봤는데 이렇게 낡아 있을 줄은 나도 몰랐어. 사람 흔적도 전혀 없고.”왜 실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석지훈의 표정과 말투에서 크나큰 실망이 엿보이자 나는 바로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어머님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거에요? 나는 오빠가 석씨 집안 옛 저택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요.”내가 옛 저택을 언급하자 석지훈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지만 그는 결국 나의 질문에는 답을 해주지 않고 내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나가자, 여긴 묵을 곳이 못 돼.”그렇게 나는 들어온 지 2분도 안 돼서 다시 석지훈을 따라 나갔다.운전을 하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어서 나는 그가 바로 비아드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석지훈은 대뜸 나를 끌고 쇼핑몰로 들어가더니 생필품을 고르
원태웅은 처음부터 우리의 연애를 찬성하고 또 우리 둘을 일부러 붙여놓기까지 한 사람이었다.내가 그의 생각을 하며 별을 보고 있을 때 석지훈은 눈으로 냄비를 씻고 또 깨끗한 물로 한 번 더 씻어내며 결벽증이 있는 사람다운 면모를 뽐내고 있었다.그에 나는 야채라도 씻으려고 그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오빠는 왜 못 하는 게 없어요?”“살려고 배운 거지 다.”“네?”이해를 못 하는 나를 위해 석지훈은 자세히 말해주기 시작했다.“석씨 집안에서 나와서 혼자 살 때는 뭐든지 다 나 혼자 해야 했어. 여기저기서 조금씩 배우다 보니까 이렇게 다 알게 된 거지.”석지훈의 표정을 보아하니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아 나는 바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오빠, 몇십 년 동안 오빠 설레게 하는 여자는 없었어요?”내 질문에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 석지훈의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물었다.“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면 내가 곤란한 질문을 한 거예요?”“있었어.”갑작스레 들려온 그의 대답에 나는 조금은 울적한 기분으로 물었다.“누군데요?”“너.”깊은 눈동자로 나를 주시하며 처음으로 진심을 얘기하는 석지훈에 나는 뭐 큰 선물이라도 받은 어린아이마냥 바보처럼 웃어버렸다.그의 등 뒤로는 별이 흩뿌려진 밤하늘까지 보여 지금 이 순간이 유난히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말을 마친 석지훈은 일어나 차로 향하더니 검은색 후드티로 갈아입고는 다시 내 옆으로 와 쭈그려 앉았다.“안 춥겠어요?”온 오후를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었지만 그래도 나웨이는 워낙 기온이 낮아서 내가 걱정하며 묻자 석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안 추워.”“그래요, 오빠는 뭐 좋아해요?”“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어.”무미건조한 대답에 흥미가 생긴 나는 이내 또 다른 질문을 했다.“그럼 색깔은요?”“어두운 거 좋아해.”그 말에 자신과 진유겸 모두 검은색 계열을 좋아한다고 하던 한민수의 말이 떠오른 나는 석지훈을 보며 물었다.“검은색
그날은 완벽한 밤이었지만 눈치 없는 날씨 때문에 내가 혹시나 추워할까 봐 석지훈은 끝까지 가지는 않고 다시 내 옷깃을 여며주었다.그의 무릎에 앉은 나는 망원경을 들고 하늘을 비춰보다가 갑자기 그걸 돌려 석지훈을 비췄다.별이 수놓아진 밤하늘 속에 있는 자상한 남자를 본 순간, 나는 그와 한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그때는 정말 그와 평생을 보내고 싶었다.힘든 일은 함께 헤쳐나가면서 영영 그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는데 현실이라는 건 늘 이상과는 달랐다.모든 게 완벽했던 그날이지만 오로라는 나타나지 않아서 내가 실망하자 석지훈은 나를 위해 그곳에 이틀 더 머무르기로 했다.하지만 결국 버티지 못한 내 몸이 적신호를 보내자 석지훈은 바로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가 이틀 뒤 우리 둘은 헬기를 타고 동성으로 돌아왔다.나웨이에서 돌아온 뒤 나는 계속 병원에 입원해있었고 석지훈은 급한 일로 유럽으로 떠나버렸다.원태웅 말로는 그곳에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데 석지훈의 삶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나는 알 수 없었기에 원태웅도 구태여 길게 설명을 하진 않았다.그 뒤로도 나는 나을 기미가 없는 감기 때문에 보름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병원에 있을 때 석지훈은 한 번도 나를 보러 온 적도 없었고 내가 문자를 해도 좀만 기다리라는 답장뿐이었다.그동안 고현성은 고 씨 집안과 연씨 집안의 모든 거래를 끊고 우리 집안과 거래하는 회사들까지 매수하며 서서히 연씨 집안을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씨 집안의 백 년 가업이 무너지게 생겨서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갔지만 매일 같이 들려오는 안 좋은 소식들뿐이었다.지금 우리 집안을 구할 수 있는 건 석씨 집안 뿐이었지만 바빠 보이는 석지훈을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석지훈의 어머니가 무슨 일만 생기면 석지훈을 찾는 나를 무시할까 봐 연락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그렇게 연씨 집안이 서서히 기울어질 때, 친엄마라는 사람이 다른 번호로 나에게 연락을 했다.당연히 친엄마가 건 전화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어차피 나는 이제 선양을 지킬 힘이 없어요.”나의 상대는 고현성이었으니, 내가 그에게 빌며 애원하기만을 바라는 고현성이었으니 이 판은 나의 패배가 예상된 판이었다.하지만 나는 온 집안을 그에게 내어준다 한들 가서 애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비서도 나의 결심이 굳건하다는 걸 눈치채고는 내 말대로 자선단체에 연락을 했다.회사를 넘긴 뒤에 공문을 내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통화를 마친 비서가 들어오더니 물었다.“누구에게 넘기실 거에요?”누구냐는 저 질문에 나는 고현성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고현성한테 연락해요.”말을 마치고 가방을 챙겨 회사를 나선 나는 차 안에서도 여전히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내가 오늘날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내 뒷배가 되어주던 선양이, 내가 운성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수 있게 해주던 그 선양이, 나의 자랑이던 선양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했다.하지만 내 능력이 부족해서 선양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니 후회는 없었다, 그저 조금 슬플 뿐이었다.직접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그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건지 몇 번이나 구토를 했고 이튿날까지 그 증세가 계속되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국으로 가 임신테스트기를 사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역시나 임신 테스트기에는 빨간 줄 두 개가 선명히 찍혀있었다.다시는 엄마가 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임신은 요 며칠 중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기쁜 일이었다.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감동에 홀로 욕실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고 웃으며 그 희열을 만끽했다.나는 바로 이 사실을 알리려고 석지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어차피 바쁜 일이 끝나면 다시 전화 줄 그를 알기에 나는 전화를 끊고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와 석지훈 중 누구를 더 닮았을지에 대해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사실 나는 아이의 성격은 나를 더 닮길 원했다.석지훈을 닮아 차가운 성격이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할 테니까.
아직 임신 소식을 전하기도 전인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기쁨의 눈물 때문에 나는 벌써부터 목이 메어왔다.내가 애써 눈물을 훔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석지훈의 낮으면서도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무슨 소식인데?”“나 임신했어요.”“...”한 자 한 자 조심스럽게 내뱉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나는 바로 말을 덧붙였다.“두 달 좀 안됐을 거에요. 오빠, 나 오빠 아이 가졌다고요!”그 뒤로도 말이 없어 내가 오빠라고 소리 높여 부르자 석지훈은 마침내 대꾸를 하며 말했다.“윤아야, 내가 좀 바빠서 그러는데 나중에 얘기하자.”“그게 무슨 말이에요?”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불안함을 감추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오빠, 아이 안 좋아해요? 아니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던 거에요?”석지훈이 아니라고 하며 나를 다독여주기 바랐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응.”응이라니, 아이를 싫어하는지 가질 생각이 없는 것인지 제대로 답하지 않자 나는 다시 물어보려 했지만 석지훈은 아주 급한 일이 있는 듯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를 끊고 나는 한참을 그의 말을 곱씹어 봤지만 그래도 무슨 뜻인지 알아내지 못했다.아니, 어쩌면 그냥 그 뜻을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아이를 싫어한다는 말이 곧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다는 말일 텐데 나는 차마 믿을 수 없는 그 말에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며 나한테는 그렇게 잘해주는 석지훈은 왜 내 아이는 원하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괴로워했다.반나절을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과 별개로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결심은 진작에 한 나이다.이 아이는 내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낳아야 했다.그 순간 나는 문득 내가 전에 송이연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만약 나에게도 아이가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만은 살릴 거라는 말.나는 이제야 그때 내 말을 듣던 송이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며칠 전에 석씨 별장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이미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어젯밤 강물에 빠진 후로 바로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파서 급히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의사를 데리고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약을 처방받은 뒤 링거를 맞았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깨어나니 이미 점심이었다.운성시는 다시 우중충한 날씨가 되었다. 겨울은 이미 지나갔고 눈은 오지 않았지만 초봄이라 비가 유난히 자주 내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한민수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그는 의도적으로 말했다.“오늘 밤 놀러 갈래?”“안 가요.”“알겠어, 그럼 끊을게.”전화를 끊고 배가 고팠지만 아직 링거를 맞고 있는 상태라 배달을 시킬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고정재가 전화를 걸어왔다.“집이야?”어젯밤 너무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나는 운성시의 아파트로 갔고 고정재는 그 주소를 알고 있었다.그가 물어본 집은 바로 그 아파트를 뜻하는 것 같았다.나는 여전히 의문이 들어 고정재에게 물었다.“어느 집이요?”“아파트, 여기서 보니까 현성의 위치가 네 집 근처에 있더라. 근데 나 지금 지금 국내에 없어서 혹시 네가 도와줄 수 있을까? 미안,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 근데 현성이가 네 말만 듣는 것 같아서.”“알겠어요. 집으로 데려다줄게요.”나는 링거를 빼고 몸을 힘겹게 일으켜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고현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검은 우산을 들고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비에 젖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그는 온몸이 젖어 있었지만 여전히 비를 맞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나는 급히 달려가서 물었다.“여기서 뭐 해?”고현성은 머뭇거리며 설명했다.“너 오늘 나 보러 온다고 했잖아. 근데 집에서 기다리다 못 참고 여기까지 왔어. 네 연락처도 없고 여기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수아는 역시 여기서 살고 있었구나.”그는 본능적인 기억을 따라 이곳으로 찾아왔다.“그럼 왜 비를 피하지 않고
방금 그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원태웅은 갑자기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방금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맞혀볼래?”나는 그를 흘겨보며 답했다.“얼른 알려줘요.”“네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어.”이건 석지훈에게 꽤 어려운 일이었다.나는 웃으며 물었다.“그거 말고 또 있어요?”“그리고 오늘 밤에 한 말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냐고 하더라? 네가 형 앞에서 몇 번이고 그 얘기를 했다고.”석지훈은 이혼한 여자를 좋아할 이유가 있냐고 했었다.나 역시 그 말을 생각하면서 그의 앞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다. 나는 궁금한 듯 물었다.“그럼 뭐라고 대답했어요?”“답을 못 할 뻔했지. 눈치도 못 채고 되레 형한테 물었단 말이야. 다른 여자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냐고?”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그리고 오빠는 전화를 끊었겠죠?”“내가 방심했나 봐! 바로 둘째 형한테 메시지 보낼 거야. 누구든지 그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지, 특히 예쁘고 자존심 강한 여자는 더욱 상처받을 거라고 해야겠어.”원태웅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오빠들은 항상 둘째 오빠 앞에서 내가 예쁘다고 말하네요.”원태웅은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지, 원래 예쁘잖아. 아무래도 우리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니까 형도 궁금해하지 않을까?”“괜찮아요, 이미 나에게 관심을 가진 것 같은데요?”이제는 그냥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우리 수아 자신감 넘치는데?”“당연한 거 아닌가요? 유진 씨도 저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는데요. 오늘 깜짝 놀랐잖아요, 다행히 잘 넘겼지만.”그 말을 꺼내자마자 원태웅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네가 말 안 했으면 까맣게 잊었을 거야, 유진 때문에 둘째 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지금 당장 전화해서 경고해야겠어.”원태웅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다른 한편...통유리 창 너머로 반짝이는 온 도시의 네온 불빛과 달리 집 안은 깜깜했다. 유일하게 석지훈의 핸드폰만 불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영상을 보고 나서 원태웅이 보낸 메
나만 손해를 보게 될 거라고?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손해 보는 게 그와 무슨 상관이지?나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순간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내게 경고하듯 귓가에 울려 퍼졌다.“이 세상에는 항상 더 강한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비록 지금은 수아 씨가 석씨 가문을 쥐고 있지만 그것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여지를 두는 게 결국 좋을 겁니다.”강가에 파도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석씨 가문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지훈 씨라는 건가요? 그럼 한번 해보세요. 지훈 씨도 잘 알잖아요. 결과는 두 사람 모두 상처만 남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제가 왜 가만히 있어야 하죠? 그때마다 항상 사람들에게 당하기만 했는데 이제 석씨 가문을 제 손에 쥐었는데 제가 왜 참아야 하죠?”석지훈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표정이 굳어졌다.“정말 고집이 심하네요.”나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지훈 씨 마음대로 하세요.”석지훈과 처음 만난 건 우리가 강에 빠졌을 때였다.그때 나는 강에서 그에게 키스했었고 그 일이 그의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방금 내가 했던 말이 상처가 됐을지 몰라도 나는 그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나는 서로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석지훈은 내 태도에 한참을 멈춰 서 있다가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강에 뛰어들었다.차가운 강물에 휩쓸려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수영을 거의 할 줄 몰랐다. 석지훈이 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 경호원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그가 있으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석지훈이 나를 구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며 물을 삼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쯤 누군가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나를 물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나는 급히 그의 목을 끌어당긴 채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물속에서는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분명히 그에게 입을
나는 잠시 멈춘 뒤 말했다.“한씨 가문 쪽은 함 집사에게 맡겨. 어르신께서 운성시를 떠나지 않으면 그냥 두고, 만약 떠나려고 하면 지훈 씨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가두어 두면 돼. 참, 아까 어르신께서 에르크 별장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비서가 설명했다.“오늘 금방 운성시에 도착했습니다.”나는 눈을 감고 속에 쌓인 분노를 가라앉혔다.고현성은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내 손을 꼭 잡은 채 위로를 건넸다.“수아야, 나 때문에 화내지 마. 그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으니까 네가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이제 와서야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다니.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 화 안 났어.”그리고 곧장 물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고현성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도 훤칠했다.비록 정신이 온전치 않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다.“아까 민영이 따라 쇼핑몰에 갔다가 민영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거든. 그때 갑자기 그 여자가 나타난 거야. 나를 수아한테 데려다주겠다고 했어.”그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여자는 나를 속이지 않았어. 난 수아를 만났고 수아는 내 손도 잡아 줬잖아.”그는 우리가 맞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나는 그의 순진한 표정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나는 비서에게 지시했다.“집까지 데려다주세요.”그러자 고현성은 서운한 듯 물었다.“수아야, 나를 보내려고? 이제 금방 만났는데...”그는 예전에도 종종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그는 내가 이런 모습에 약하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곁에 있던 비서가 나를 대신해 말했다.“현성 씨,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대표님께서 현성 씨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러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 나면 곧 찾아가실 겁니다.”그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수아야, 정말
나는 애초에 그들이 이렇게까지 고현성을 모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눈앞에서 잔뜩 위축된 채 겁먹은 듯한 그를 보니 가슴 속에 답답함이 차오르며 알 수 없는 연민이 느껴졌다.나는 몰래 눈물을 훔치며 애써 참아냈다. 그리고 한성범을 바라보며 물었다.“고현성을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단지 모욕하기 위해서입니까?”한성범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굳이 바보 같은 놈과 엮일 이유가 없지 않니? 스스로 찾아온 거지, 우리 한씨 가문과 무관하네.”주변의 하객들은 대부분 자리를 떠났고, 이 일과 관련 있는 자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 중 나에게 적의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주민솔이었다.그녀는 이미 모습을 감췄고 나는 곧바로 담유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유미 씨가 데려온 거예요?”담유미 역시 나에게 호의를 가질 리 없었다.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나는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렸다.“거짓말하지 말고 잘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지금 거짓말을 해도 곧바로 사람을 시켜 이 일을 전부 조사할 수 있어요.”그녀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눈빛에는 순간적인 당혹감이 스쳐 갔다. 하지만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그때, 갑자기 고현성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수아야,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 나 데려가 줄 수 있어?”이 순간, 그는 나를 수아라고 불렀다.나는 전에 그에게 내 이름이 수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그렇다면... 그의 아내 수아뿐만 아니라 나도 기억하는 걸까?나는 애틋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 데려갈게.”그리고 원태웅에게 비켜달라고 말한 뒤, 덤덤한 시선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며 내 뒤에 서 있던 비서를 향해 조용히 지시했다.“이 일이 누구의 짓인지 철저히 조사해 주세요. 만약 어르신의 소행이라면 즉시 이 저택을 폭파해 버리세요. 혹여나 담유미 씨가 한 짓이라면 담씨 가문을 매입해서 담현아에게 넘겨주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담유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소리를 질렀다.“수아 씨가 아무리 권력을 가졌다
내가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데 누군가 말했다.“고현성은 이제 끝났어. 잘나가던 인생이 재앙 덩어리를 아내로 맞는 바람에 망한 거잖아!”재앙 덩어리...나는 눈을 감고 화를 가라앉혔다. 그때 고현성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 사람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그는 모든 것을 잊었지만 수아는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오직 그의 수아만을 옹호하고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침묵하는 석지훈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오히려 담유미가 물었다.“그럼 넌 바보야?”바보에게 바보냐고 묻다니.나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입 다물어요!”“왜? 부끄러워서 화내는 거야?”한성범은 이때다 싶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그럼 고현성이 바보가 아니라는 거야? 연수아, 난 널 초대 안 했으니 나가. 곧 ‘바보극' 공연이 있거든!”한성범은 석지훈의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다.내가 정말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나는 눈앞의 술잔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하지만 석지훈은 그를 위해 막아냈다. 마음속에서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그때 고현성이 황급히 일어나 나를 진정시켰다.“저 사람들 때문에 화내지 마. 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 수아는 그냥 내 아내일 뿐이야!”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차가운 눈빛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저 사람을 감쌀 건가요?”석지훈은 차가운 침묵으로 나에게 답했다.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술잔을 다시 한성범에게 던졌다. 하지만 남자는 가볍게 받아 바닥에 던져버렸다.유리 조각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흩어졌다.그때 담유미가 차갑게 말했다“연수아 씨, 너무 건방지네요.”그러자 담현아가 차갑게 꾸짖었다.“입 닥쳐!”담유미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원태웅은 황급히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윤아야, 화내지 마. 우리 여기서 나가자!”나는 눈
석지훈은 당연히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에서 위로 그를 올려다보며 비판했다.“오후에 그 일은 당신이 잘못했어요!”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음?”“나는 그 사람들과 친분이 있어요. 친구처럼. 그들이 나를 유람선에 초대한 건 내가 그들과 어울릴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석지훈 씨라고 했죠? 설마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당신 주변에 자주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근데 내가 당신의 무엇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이 우리 석씨 가문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내 말은 다소 따끔했고 석지훈의 얼굴은 차가워졌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어떤 사람들은 가끔 자기 생각에 빠져 착각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혹시 당신 마음속으로는 나를 좋아하는데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나를 피하고 당신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설마 마음이 흔들릴까 봐 두려운 건가요?”석지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나는 눈치껏 말을 돌렸다.“물론.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당신 속마음을 알 수는 없죠. 됐어요, 당신이랑 말싸움하기 귀찮아요!”그는 차갑게 말했다.“허튼소리.”나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평소에 나한테 신경 끄세요!”석지훈은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못 참네. 그 성격에 어떻게 여자 없이 지금까지 버텼을까? 아마도 내가 운이 좋은가 봐. 안 그러면 당신을 어떻게 얻었겠어!”‘지훈 씨,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신앙처럼. 당신 말대로 이 길을 따라갈게! 당신이 나에게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다 기억해둘 테니까! 나중에 똑같이 갚아줄 거야!’담현아는 몇 분 동안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나는 놀리듯 물었다.“부부끼리 무슨 달콤한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네. 이제 푹 빠진 거야?”담현아는 웃으며 물었다.“푹 빠졌다는 게 사랑한다는 뜻이에요?”내가 되물었다.“그럼 아니야?
담현아는 의리가 있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홀을 나와 뒤뜰을 찾아갔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갑자기 고현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담현아가 먼저 그를 언급했던 것이다.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나 아저씨한테 고현성의 현재 상황을 들었어요. 그의 지금 상황이... 아저씨는 아주 괴로워하더라고요. 결국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수아 언니는 어때요?”담현아는 내 마음이 아픈지 묻고 싶어 했다내 마음이 안 아플 리가 있겠는가?그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내 전남편인데.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게다가 지금의 고현성은 변하고 있었다.그는 예전의 그 남자와는 완전히 달랐다.그는 심지어 아이를 나의 생일선물로 돌려주기까지 했었다.나는 담현아 앞에서 고현성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기분이 다운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아무렇지도 않아. 근데 희연이가 요즘 연락 오던?”“네. 흉터 제거 수술을 받아서 아이스랜드에서 한동안 머물러야 한대요. 왕자현 씨가 옆에서 계속 돌봐주고 있다고 하더라고요.”담현아가 왕자현을 언급하자 나는 흥미가 생겨 말했다.“왕자현 씨 집안이 엄청 부자라며?”담현아는 뭔가 아는 듯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왕씨 가문은 세력은 없어도 돈은 엄청 많죠.”돈이면 다 되지. 돈이 곧 힘인데.담현아가 뭔가 더 말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급히 일어서며 고정재의 전화라고 했다.담현아가 남편 전화를 받으러 뒤뜰을 나가자 앉아서 할 일이 없던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바로 그때 나는 2층 발코니에서 고독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미소를 짓고 떠나려 했다.그런데 그가 뜻밖에도 나를 불러 세웠다.“연수아 씨.”나는 걸음을 멈췄다. 석지훈이 나를 부른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웠다.오후에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그가 그렇게 차가우니 나도 굳이 아부할 필요는 없었다.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우리가 그렇게 친했나요?”그는 내 질문
담현아는 옷을 갈아입고 싶어 했다. 내 차에도 여벌 옷은 있었지만 우린 키 차이가 있었고 예지한도 여기 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를 근처 쇼핑몰에 데려갔다.담현아는 쇼핑이 빨랐다. 핑크색 롱드레스를 입으니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 그녀는 또 반지 몇 개를 손가락에 끼고는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뻐요?”담현아는 워낙 예뻤기에 뭘 입어도 예뻤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말했다.“아주 예뻐.”담현아는 바보같이 웃으며 말했다.“저는 꾸미는 걸 잘 안 해서...”그녀는 쇼핑몰 화장대에서 가볍게 화장을 하고 나서야 나와 함께 한씨 가문으로 갔다. 그리고 경호원을 많이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오늘 한씨 가문에는 일부러 트집 잡으러 가는 거라 나도 준비를 해뒀다. 휴가가 방금 끝난 비서에게 문자를 해두었던 것이다.한씨 가문에 도착하니 비서는 이미 와 있었다. 내 옆에 있는 23명 외에도 비서는 꽤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다.비서는 우리 뒤를 따라 들어가고 나머지는 입구를 지켰다. 담현아는 초대장을 내고 들어가자마자 담유미를 발견했다.흰색 이브닝드레스에 진한 화장을 한 담유미는 큰 키 덕분에 드레스가 참 잘 어울렸다. 담현아는 그녀를 불러 세우며 물었다.“담유미, 너 엄마 아빠 앞에서 무슨 말을 했어?”담유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너 지금 언니한테 따지는 거야?”“미안하지만, 난 오빠밖에 없어.”담현아의 말은 너무 매몰찼다.담유미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곧 설명했다.“난 네 일에 관심 없어. 부모님은 오빠한테 네 남자친구 얘기 들으신 거야.”담현아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너랑 상관없는 일이네!”담현아의 말투는 꽤나 퉁명스러웠지만 담유미는 별말 없이 얼굴만 굳힌 채 가버렸다.그녀가 가고 나서야 담현아가 말했다.“우리 집의 골칫거리는 바로 저 여자인데 집안 사업까지 쥐고 흔들고 있죠. 하지만 뭐, 나쁘진 않아요. 어차피 나랑 오빠는 담씨 가문의 사업에는 관심 없으니까!”담유미에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