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연의 상황은 나와는 달랐다. 나는 완전히 생육 능력을 잃은 반면, 그녀는 신장 이식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몸이 약해진 것뿐이었다. 비록 그녀가 이 아이를 포기하더라도, 앞으로 다시 임신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목숨을 걸고 이 아이를 지키겠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수아 씨, 우리 부모님은 정말 사랑이 넘치는 분들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졸업하자마자 편지 한 장 남기고 둘이서 세계 여행을 떠나버리셨죠.”“그 덕에 저는 어쩔 수 없이 CEO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순식간에 막강한 권력과 모두가 부러워하는 스펙을 가지게 되었어요.”“제 인생은 너무나 순탄했죠. 그리고 저는 너무 착하고 온순했어요. 그런데 시혁 씨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어요...” 송이연은 내 손을 놓고 조심스레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이 저한테 가르쳐준 것은 뼈아픈 고통, 이루지 못할 갈망, 그리고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감정이었어요.”“함께한 시간 동안 저는 늘 그 사람의 안전을 걱정했고,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어요.”“항상 사고를 치고,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면 누구와도 싸움을 벌였거든요. 너무나 유치하고 충동적었어요. 제 주변의 엘리트 남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죠. 그런 남자를 사랑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송이연은 깊이 빠져버렸고 그로 인해 이렇게까지 상처를 입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 물잔을 쥐었다. 송이연은 창밖의 지저귀는 참새 몇 마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 눈에 시혁 씨는 아무런 빛도 없는 남자일지 몰라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저한테 정말 잘해줬어요. 나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었죠.”“물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런 모습이 너무나 기뻤어요.” 그녀는 눈을 감고 슬픔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왜 이러는지 물어봤죠? 그 이유를 말해줄게요. 내가 이 아이를 지키려는 이유
뒤를 돌아보니 술에 약간 취한 듯한 반경우가 보였다.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반년 넘게 못 봤잖아. 너 더 예뻐졌다! 근데 말이야, 네가 가업을 동성시로 옮긴 지도 벌써 넉 달 가까이 됐는데, 어떻게 나한테는 한 번도 연락을 안 하냐. 날 친구로 생각하기는 하는 거냐?” 나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누가 너한테 연락하고 싶겠어.” “쳇, 내가 너한테 관심이나 있을 줄 알아?” 반경우는 넥타이를 풀고 내 옆에 앉아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그리고 물었다. “요즘 어때? 언제쯤 다시 힘낼 거야?” 그가 말하는 건 고현성과 관련된 일이었다.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잖아.” “알았어, 신경 안 쓸게.” 반경우는 내 팔을 끌어당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가자, 내 친구들 좀 만나보자.” 반경우는 나를 그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의 친구들이 그가 여자 하나를 데리고 온 것을 보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머, 반경우, 화장실 갔다 오더니 여자를 데려왔네? 뭐야, 둘이 잤어?” 그 말에 내 얼굴이 굳어지자, 반경우는 ‘닥쳐!’라며 웃으며 둘러댔다. “농담하지 마. 내 동생이야.” “네 동생?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어? SNS에서 몇 번 화제 됐던 그 여자잖아. 뭐더라... 큰 집안 대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반경우는 웃으며 말했다. “너 술 마셨냐? 이렇게 유명한 사람도 몰라? 연수아야, 연씨 그룹의 대표!” 그 친구는 감탄하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연 대표님 사업하는 거 강단 있다고 칭찬하시더라. 거의 사람들 만나지도 않고 단호한 스타일이라던데. 근데 반경우, 정말 대단하네! 우리 연씨 그룹 대표를 네 사람처럼 말하네!” 나는 강단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연씨 집안의 일에 자주 관여하지 않았고 거절할 수 없는 자리일 때만 나설 뿐이었다. 반경우는 나를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그
속이 뒤집히는 듯한 고통에 또 한 번 고개를 숙여 토했다. 반경우는 얼굴을 찡그리며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너 정말 역겨울 정도로 상태 안 좋다.” 나는 입을 닦으며 찡그린 채 물었다. “오빠가 감금됐다는 말, 대체 어디서 들은 거야? 그리고 세상에 누가 감히 그 사람을 가둘 수 있는데?”말하고 나니 문득 석씨 가문이 떠올랐다. 특별하고도 신비로운 그 가문. 반경우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원태웅한테 들었지. 석지훈 옆에 있는 사람이잖아. 그리고 너 못 느꼈어? 지난 두 달 동안 동성시의 경제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거. 석씨 가문이 자산을 축소하는 듯하더라.”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억지로 참으며 술집의 붉은 벽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모르겠어. 나 지훈 오빠랑 연락 끊었잖아. 그리고 나한테 그 사람 멀리하라고 경고한 것도 너 아니야?” 반경우는 날 흘겨보며 말했다. “멀리하라고 했는데, 왜 반년 전에 교회 앞에서 그 사람이 널 데려갔던 건데?” 나는 대충 둘러댔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더 이상 알아낼 게 없다는 듯 반경우는 말 없이 나를 아파트까지 데려다주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지만 속이 여전히 불편했다. 결국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나오면서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메시지는 몇백 개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은 친구나 연씨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이 보낸 것으로, 형식적인 안부 메시지가 많았다. 평소에는 메시지를 열어보지도 않고 카톡 알림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나는 화면을 넘기며 원태웅의 번호를 찾았다. 역시나, 그가 보낸 메시지 여덟 통이 눈에 띄었다. [윤아야, 나 둘째 형이랑 연락이 안 돼.][어디 간 거야?][윤아야, 방금 둘째 형이 석씨 가문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어.] [어디 있냐고?][연윤아, 너까지 잠수 타는 거냐?][빨리 답장 좀 해.][전화도 안 받냐?][너 핸드폰 잘 안 보냐?]나는 미처 보지 못했던 부재중 전화
원태웅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너라면 형을 구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석지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몰랐다. 더구나, 석지훈이 석씨 가문에서 대체 어떤 위험이 있단 말인가.“오빠가 자기 집에 있는데 왜 구해줘야 하는 거예요?”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물었다. “그리고 왜 하필 나냐고요?” “형은 네 말만 듣거든.” 그가 내 말을 듣는 게 구해주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거지?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영문을 몰라 하는 걸 알았는지 원태웅은 설명을 덧붙였다. “석씨 가문이 둘째 형을 붙잡아둘 수 있는 건 형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야. 하지만 네가 부르면... 형은 틀림없이 가문의 뜻을 거스르고 너를 찾으러 올 거야.” 그리고 잠시 멈추더니 덧붙였다. “그러면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지훈 오빠가 석씨 가문에 있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이에요? 대체 석씨 가문이 오빠한테 무슨 짓을 한 건데요?” 원태웅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고, 그저 애매하게 말했다. “형은 석씨 가문에서 돌아올 때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어. 뭘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좋은 일은 아니었겠지! 윤아야, 둘째 형은 차가운 성격이야.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구도 마음에 들이지 않았지. 난 형이 평생 그럴 줄 알았어.”“하지만 네가 나타난 뒤 형에게서 처음으로 작은 희망을 봤어.” 나는 핸드폰을 꽉 쥐고 물었다. “어떤 희망인데요?”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 “오빠 말은, 지훈 오빠가... 날 사랑한다고요?” 원태웅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 사랑이 꼭 연애 감정인지, 아니면 가족에 대한 애정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 형은 너를 신경 쓰고 있어. 그렇지 않다면 굳이 네 곁에서 그렇게 힘을 쏟을 리 없잖아.” 나는 석지훈이 전에 했던 말을 기억했다. 나에 대한 감정은 그저 가족애에
방 안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밤바람이 약간 서늘했고, 넓고 텅 빈 평수는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때, 석지훈의 약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쉬어.” 창밖은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가득했다. 나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어루만지며, 평온한 눈빛으로 아래의 복잡한 차도와 인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집스레 말했다. “석지훈 씨, 나 정말 당신 보고 싶어요.” 그는 침묵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다시 말했다. “내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석지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알겠어. 태웅이를 보내서 널 데리러 갈게.” 결국 그는 내게 타협했다. 전화를 끊고 잠시 후, 원태웅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기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연윤아, 둘째 형이 널 데려오래!” 나는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석씨 가문으로 가는 거예요?” 원태웅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하지” 불안한 마음이 밀려와 다시 물었다. “아니, 아까 지훈 오빠가 석씨 가문을 떠날 거라면서요?” 원태웅은 태연히 말했다. “좀 틀리긴 했지만 상관없어. 형이 우리를 만나 주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아, 아니지.‘우리’가 아니라 너야. 난 그저 너를 석씨 가문 앞까지 데려다주는 역할이야!” 뭔가 더 말하려던 찰나, 원태웅은 바로 데리러 가겠다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마치 내가 마음을 바꿀까 봐 서둘러 끊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흰 티셔츠와 청 멜빵바지를 입고, 편안한 운동화를 신었다. 밤에 마신 과도한 술 때문인지 속이 여전히 불편했고, 몸에 희미한 술 냄새도 남아 있었다. 은은한 향수를 조금 뿌리고, 머리를 간단히 묶었으나 화장은 하지 않았다. 석지훈 앞에서는 늘 화려하게 꾸미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입술이 지나치게 창백해 보여,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는 아래로 내려가 원태웅을 기다렸다. 지금 이 시간이 애매했다. 석씨
석지훈이 차 옆으로 다가와 직접 문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차갑고 깊은 눈빛에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윤아야, 추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원태웅이 웃으며 우쭐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 형, 내가 아기 윤아를 안전하게 데려다줬어. 이 공 절대 잊지 마!” 원태웅의 허풍스러운 말이 점점 심해졌다. 그의 말을 들으니 예전에 그가 석씨 가문의 공식 SNS를 통해 올린 ‘연수아 아기’라는 별명이 떠올라 괜히 마음이 찜찜해졌다. 잠깐만! ‘아기’라는 단어, 왜 이렇게 익숙하지? 그날, 리시안셔스 밭에 엎드려 있을 때 누군가가 날 ‘아기’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다. 설마 석지훈인가? 원태웅한테 배운 걸까? 석지훈은 원태웅의 말을 무시한 채, 그 뒤에 있던 사람에게서 검은색 코트를 건네받아 내 머리 위에 덮어 주었다. 비를 맞지 않게 하려는 배려 같았다. 나는 코트로 몸을 단단히 감싼 채 차에서 내렸다. 그때 석지훈이 갑자기 내 허리를 감쌌다. 그의 팔은 단단하고 힘이 넘쳤고, 그 힘에 숨이 약간 막힐 정도였다. 옆에는 그의 은은한 향기가 가득했다.나는 일부러 그의 품에서 멀어지지 않았고 순순히 안긴 채 그와 함께 석씨 가문 안으로 들어섰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나는 코트에 꽁꽁 싸인 채 눈만 내놓고 있었고, 거의 그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가며 걷는 듯했다. 그렇게 약 10분 정도 걸었을 때 석지훈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곧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아, 이분은 네 친구야?” 석지훈을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적어도 내가 본 사람 중에서는 처음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몸에 딱 맞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값비싸 보이는 보석 목걸이를 두르고 있었다. 또 손목에는 에메랄드빛 팔찌를 찼고, 머리는
하늘에서는 굵은 비가 퍼붓고 있었고 빗방울이 청석길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멀리 보이는 암흑은 나를 삼킬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석씨 가문은 깊고 어두워 무서울 정도였고, 복도에 걸린 등롱만이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떨리는 내 몸은 본능적으로 석지훈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눈을 살짝 좁히며 물었다. “어딜 다쳤다는 거야?” “셋째 오빠가 그러는데, 오빠가 석씨 가문에 올 때마다...”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석지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태웅이가 널 놀린 거야. 워낙 한가해서 장난치기 좋아하는 녀석이지.” 그 말을 듣자 나는 부끄럽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석지훈은 손을 들어 원태웅이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치 나를 달래듯 행동했다. 그의 행동에 나는 멍해졌다. 그리고 물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다정해요?” 석지훈은 살짝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응?” “태웅 오빠가 이렇게 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데, 오빠가 그러는 건 너무 이상해요! 석지훈 씨, 몇 달 못 본 사이 형이 많이 다정해진 것 같아요!” 석지훈은 손을 거두며 낮게 말했다. “버릇없게.” 나는 멍해졌다. 버릇없다고? 그냥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석지훈은 나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나는 고양이처럼 그를 졸졸 따라붙었다. 그가 가는 방향으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계속 따라갔다. 10분쯤 걸었을까, 우리는 어느 정원에 도착했다. 비록 어두운 밤이었지만 정원이 넓고 웅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원 안에는 인공 연못과 정자가 있었고, 곳곳에 꽃나무들이 심겨 있었는데 특히 무궁화가 유독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석지훈은 주위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가니, 비로소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공간을 마주했다. 방은 클래식한 유럽풍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한쪽에는 침대가 있었고, 반대쪽에는 욕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꽤 넓은 거실이 있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우유를 가리켰다. 석지훈은 우유를 들고 와 내 몸을 부축해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의 손에 기대 우유를 한 모금 마셨지만, 느끼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맛없어요.” 내가 투덜대자, 석지훈은 아무 말 없이 꿀물로 바꿔 주었다. 나는 꿀물을 두어 모금 마셨고, 속이 한결 나아졌다. 그러고는 계속 그의 어깨에 기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누군가 내 신발을 벗기고 조심스럽게 나를 침대에 눕히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혼자 침대에 누워 눈을 떴다. 석지훈의 흔적은 없었고 침대에는 나만 있었다. 게다가 완전히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머리가 멍한 채로 일어나 욕조 쪽으로 갔더니, 새로운 칫솔과 수건이 준비되어 있었다. 석지훈은 언제나 세심했다. 그런데 그는 어젯밤 어디에서 잤던 걸까? 양치질을 마친 나는 내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굳이 풀어서 다시 묶지 않았다. 간단히 정리한 후 나는 방을 나섰다. 방 밖 복도의 처마 끝에 베이지색 등롱이 걸려 있었는데, 낮인데도 불구하고 불이 켜져 있었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지만 많이 약해져 있었다. 밤새 폭우에 시달린 나무 아래에는 무궁화 꽃잎이 떨어져 있었고, 그 옆의 붉은 단풍잎도 함께 깔려 있었다. 빨간색과 흰색이 교차하며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 있어요?” 그는 한참 만에 답장을 보냈다. “서재.” 나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했다. 핸드폰을 든 채 뜰로 나가려던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몇몇 사람을 보고 멈칫했다. “석지훈 씨를 찾으러 오셨나요?” 내가 선뜻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왠지 모르게 날 불편하게 만들었다. 뜰로 돌아가려다 무례하다고 할까 봐 어색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차림의 여인이 등장했다. 그녀는 원피스를
이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설명해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형, 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 형의 석씨 가문을 빼앗은 여자야! 방금 보니까 술에 취했더라고. 곁에 비서도 없이 말이야. 전에 날 도와준 적이 있는데 차마 그녀를 혼자 둘 수 있어야지. 그래서 집에 데려다주려고.”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했지?”원태웅: “...”석지훈이 지시했다.“이 여자를 네 차에 태워.”“형, 내 차 고장 났어. 우리 두 사람 좀 집까지 데려다줘! 얘는 술 취하면 얌전해. 절대 방해 안 할게.”석지훈: “...”석지훈은 결국 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원태웅은 전화를 받고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야 했다. 정말 일이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석지훈의 운전기사가 그를 길가에 내려주자 차에는 나와 석지훈 두 사람만 남았다.나는 일부러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는 신사답게 나를 밀어내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나는 그의 팔을 껴안고 웅얼거리며 말했다.“정우 씨.”“허, 정우까지 네 손에 넘어간 거야.”남자가 갑자기 뜬금없이 말하자 나는 당황한 척 그를 바라보았다. 이때 운전기사가 물었다.“아가씨, 어디 사세요?”나는 계속 당황한 척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는 무관심하고 간결하게 말했다.“주소.”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무슨 주소요?”그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네 집 주소.”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정말 오랫동안, 거의 돌처럼 굳어 버릴 때까지 생각하다가 석지훈의 품에 쓰러졌다.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운전 기사에게 지시했다.“동성으로 돌아가.”2년 전 석지훈은 동성에 살았었다.동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보니 창밖에는 온통 도라지꽃이 피어 있었다. 여기는 석 씨 저택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석지훈은 몰래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나는 깨어난 후 계속 멍하니 차 안에 앉아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행히 술에 취해서 그런지 그는 나를 심하게
예지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한민수는 화가 나서 카페를 나가버렸다. 그러자 예지한은 한민수가 두려운 듯 서둘러 앞치마를 벗고 그를 쫓아 나갔다.나가기 전에 나에게 카페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카페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지만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문득 현정우가 생각났다.그의 휴가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나는 일어나 카운터에 앉았다. 아직 연회에서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런 옷을 입고 여기에 앉아 있으니 너무 어색했다.한참을 앉아 있었지만 손님은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따뜻한 물을 달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앉아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어떻게 하면 석지훈을 빨리 무너뜨릴 수 있을까?석지훈은 보수적이고 깔끔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남자였다. 예전의 그는 높은 곳에 있었고 주변에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다가온 이유는 내가 강에서 그에게 키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동생처럼 여기고 평생 지켜주겠다고 말했었다.그러나 지금의 석지훈은 2년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에 아직도 자신의 첫 키스가 남아 있고 자신이 숫총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키스하고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그에게 키스하면 다른 여자들은 끼어들 틈이 없을 테니까.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한단 말인가.나는 예전에 몇 번 술에 취했거나 정신 잃었을 때 그의 입술을 훔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술을 많이 마실 수도 없고 최음제를 먹을 수도 없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나는 원태웅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는 내 생각을 듣고 매우 찬성하며 말했다.[가능해. 네가 술에 취하면 돼. 내가 지금 바로 너를 데리러 가서 그에게 데려다줄게!]나는 답장을 보냈다.[나는 술을 많이 못 마셔요!]원태웅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누가 진짜로 취하래!]나는 순간 원태웅의 뜻을 이해했다. 예지한이 돌아오자 나는 서둘러 나갔다. 차에 타자
그와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했는데도 본 적이 없었다.게다가 내 남자의 초라한 모습을 왜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하는가?나는 한민수와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석씨 가문 쪽에는 지훈 씨에게 어떻게 설명했어요?”한민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솔직하게 말했죠.”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솔직하게 말했다는 거죠?”“부상 때문에 머리가 잘 안 돌아가고 기억이 좀 뒤죽박죽 해졌을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설명했죠. 그는 석씨 가문의 진짜 후계자가 아니고 오히려 당신이 적통이며 지금의 그는 석씨 가문에서 쫓겨난 거나 다름없다고요. 그런데 지훈이는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그리고 바로 의사에게 언제쯤 완전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지 묻던데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나는 그에게 되물었다.“지훈 씨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나요?”태산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다만 석지훈 본인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아까 의아하게 물었을 것이다. 너도 알고 태웅이도 알고 유진이도 아는데 왜 자기만 모르는지. 아마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나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그는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지훈의 부상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어요. 그러니 꼬시려면 서둘러야 할 거예요. 한성범은 당신들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을 테니까. 그는 며칠 후면 지훈이를 핀란드로 불러들일 거예요.”석지훈은 항상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한성범은 그를 구해 줬으니 만약 한성범이 핀란드로 부른다면 그는 분명 거절하지 않을 것이었다.나는 정말 서둘러야 했다.그리고 한성범도 경계해야 했다.나는 차를 한 잔 마시고 말했다.“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요!”한민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어떻게 할 건데요?”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한성범은 지금 어디 있어요?”이 말에 한민수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석지훈의 성격상 그는 절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몇 걸음 빠르게 걸어 그들을 앞질러 갔다.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있는 몇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나는 갑자기 밝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수 씨, 이따가 고양이 카페에서 만나요. 내가 커피 살게요~”한민수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수아 씨, 본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요? 나한테 웃지 말아요. 정신 못 차리겠잖아요!”내 아름다움은 고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석지훈도 예전에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일부러 석지훈의 시선을 끌려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와 고양이 카페로 갔다. 한창 손님들을 맞느라 정신없던 예하나는 나를 보자 바쁘게 말했다.“혼자 알아서 해요. 나는 좀 바빠서!”최희연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영업을 시작했다.과연 참을성이 없었다.나는 직접 최고급 작설을 꺼내 차를 우리고 창가에 앉았다. 벌써 8시였다. 바깥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카페는 운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었는데 주변은 유럽풍의 복고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화려하게 눈부셨다. 그리고 창밖에는 차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예하나가 왜 여기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차를 따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한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어디에요? 차를 몰고 갈 건데.]나는 바로 그에게 위치를 공유했다.카페에 도착한 한민수는 바쁘게 일하는 예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하나도 그를 보자마자 숨으려 했지만 한민수는 거침없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유진이가 2년 동안이나 너를 찾았는데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거야! 지한이 너 숨는 실력 하나는
한민수는 내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뜻이었다.“갈게요.”전화로 그렇게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훈 씨는 왜 운성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전에도 나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이 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이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저녁에 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한민수가 말한 연회장으로 갔다. 내가 한민수를 찾았을 때 석지훈은 2층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민수는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교한 디자인의 정장은 그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냈고 흰 셔츠 소매의 금색 단추는 그에게 고귀한 분위기를 더했다.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말이다.지금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얼마나 더 이야기할 거예요?”내 목소리를 듣고 석지훈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지훈 씨.”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관심한 눈빛으로 내 옆에 있는 한민수를 바라보았다.한민수는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야.”한민수의 말은 마치 날벼락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석지훈을 바라보았다.나는 충격에 빠진 채 물었다.“이게 무슨 말이에요?”한민수는 황급히 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한민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기억상실이에요.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어요. 의사 말로는 일시적이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는데 한두 달 안에 회복될 가능성이 높대요. 하지만 한성범은 그 한두 달 사이에 민영과 지훈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할 거예요! 기정사실을 만들어서 지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거죠.”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그가 나를 잊었다고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민수가 보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물었다.“그 사람 걱정하느라 속이 타 죽겠죠?”당연한 거 아닌가?!나는 먼저 물었다.“상태는 어때요?”“괜찮아요. 지훈은 왜 안 물어봐요?”나는 가볍게 말했다.“민수 씨 안부부터 물어야 덜 외로울 거 아니에요.”한민수는 한 씨 가문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한민영이 병원에 온 것도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한민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마음도 착하셔라.”나는 그제야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는?”“나도 아직 잘 몰라요.”그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한민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초조해서 말했다.“난 지훈 씨가 걱정돼요. 그러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내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테니까!”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했다.“우리는 습격을 당했어요. 그리고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 줬지요.”나는 서둘러 캐물었다.“누군데요?”“한성범.”자신의 할아버지를 한성범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현재 한민수와 한씨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요?”“생명에는 지장 없을 거예요.”석지훈은 한성범이 점찍은 손녀 사윗감이었으니 그를 위험하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석지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를 빨리 에르크로 데려오고 싶었다.서둘러 병실을 나와 보니 한민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네 할아버지한테 있지?”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그저 그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하지만 한민영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정말 모르는 눈치였다.나는 함승윤을 데리고 곧장 한씨 가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한성범이 집에 없다고 했다. 나는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하게 했다.한성범은 전화를 받고 웃으며 물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