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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작가: 동과
그는 검은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묘비 아래 잠든 남자와 똑같은 외모를 가진 그가, 지금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간절히 바랐다. 그가 고현성이기를. 그가 다시 살아 돌아왔기를.

하지만 나는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고정재라는 것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가 나를 부드럽게 불렀다.

“꼬마 아가씨.”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난 이제 원망할 사람조차 없어졌어요.”

물론, 사랑할 사람도 없어졌다.

고정재가 말했다.

“현성이가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어.”

나는 숨을 억누르며 물었다.

“생전에 깨어난 적이 있었나요?”

고정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성이는 네가 행복하길 바랐어.”

잠시 뜸을 들인 뒤 덧붙였다.

“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하지만 나는 느꼈다. 이생에서 다시는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고정재는 비 사이로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한 걸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 아가씨, 내일 나는 운성을 떠나 F국으로 갈 거야.”

고현성이 떠남으로써, 우리 셋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결국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그도 나에게 용감히 다가올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단순히 세속적인 문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이 이미 변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 사이에 늘 존재했던 고현성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며 이별을 고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다은 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정이란 건 억지로 되는 게 아니지.”

고정재는 그렇게 떠났다.

끝도 없는 빗속에서 이제는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나는 축축이 젖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문득 이 도시가 지겨워졌다.

아니, 조금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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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지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한민수는 화가 나서 카페를 나가버렸다. 그러자 예지한은 한민수가 두려운 듯 서둘러 앞치마를 벗고 그를 쫓아 나갔다.나가기 전에 나에게 카페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카페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지만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문득 현정우가 생각났다.그의 휴가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나는 일어나 카운터에 앉았다. 아직 연회에서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런 옷을 입고 여기에 앉아 있으니 너무 어색했다.한참을 앉아 있었지만 손님은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따뜻한 물을 달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앉아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어떻게 하면 석지훈을 빨리 무너뜨릴 수 있을까?석지훈은 보수적이고 깔끔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남자였다. 예전의 그는 높은 곳에 있었고 주변에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다가온 이유는 내가 강에서 그에게 키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동생처럼 여기고 평생 지켜주겠다고 말했었다.그러나 지금의 석지훈은 2년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에 아직도 자신의 첫 키스가 남아 있고 자신이 숫총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키스하고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그에게 키스하면 다른 여자들은 끼어들 틈이 없을 테니까.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한단 말인가.나는 예전에 몇 번 술에 취했거나 정신 잃었을 때 그의 입술을 훔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술을 많이 마실 수도 없고 최음제를 먹을 수도 없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나는 원태웅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는 내 생각을 듣고 매우 찬성하며 말했다.[가능해. 네가 술에 취하면 돼. 내가 지금 바로 너를 데리러 가서 그에게 데려다줄게!]나는 답장을 보냈다.[나는 술을 많이 못 마셔요!]원태웅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누가 진짜로 취하래!]나는 순간 원태웅의 뜻을 이해했다. 예지한이 돌아오자 나는 서둘러 나갔다. 차에 타자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25화

    그와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했는데도 본 적이 없었다.게다가 내 남자의 초라한 모습을 왜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하는가?나는 한민수와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석씨 가문 쪽에는 지훈 씨에게 어떻게 설명했어요?”한민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솔직하게 말했죠.”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솔직하게 말했다는 거죠?”“부상 때문에 머리가 잘 안 돌아가고 기억이 좀 뒤죽박죽 해졌을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설명했죠. 그는 석씨 가문의 진짜 후계자가 아니고 오히려 당신이 적통이며 지금의 그는 석씨 가문에서 쫓겨난 거나 다름없다고요. 그런데 지훈이는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그리고 바로 의사에게 언제쯤 완전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지 묻던데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나는 그에게 되물었다.“지훈 씨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나요?”태산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다만 석지훈 본인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아까 의아하게 물었을 것이다. 너도 알고 태웅이도 알고 유진이도 아는데 왜 자기만 모르는지. 아마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나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그는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지훈의 부상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어요. 그러니 꼬시려면 서둘러야 할 거예요. 한성범은 당신들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을 테니까. 그는 며칠 후면 지훈이를 핀란드로 불러들일 거예요.”석지훈은 항상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한성범은 그를 구해 줬으니 만약 한성범이 핀란드로 부른다면 그는 분명 거절하지 않을 것이었다.나는 정말 서둘러야 했다.그리고 한성범도 경계해야 했다.나는 차를 한 잔 마시고 말했다.“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요!”한민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어떻게 할 건데요?”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한성범은 지금 어디 있어요?”이 말에 한민수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24화

    석지훈의 성격상 그는 절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몇 걸음 빠르게 걸어 그들을 앞질러 갔다.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있는 몇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나는 갑자기 밝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수 씨, 이따가 고양이 카페에서 만나요. 내가 커피 살게요~”한민수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수아 씨, 본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요? 나한테 웃지 말아요. 정신 못 차리겠잖아요!”내 아름다움은 고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석지훈도 예전에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일부러 석지훈의 시선을 끌려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와 고양이 카페로 갔다. 한창 손님들을 맞느라 정신없던 예하나는 나를 보자 바쁘게 말했다.“혼자 알아서 해요. 나는 좀 바빠서!”최희연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영업을 시작했다.과연 참을성이 없었다.나는 직접 최고급 작설을 꺼내 차를 우리고 창가에 앉았다. 벌써 8시였다. 바깥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카페는 운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었는데 주변은 유럽풍의 복고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화려하게 눈부셨다. 그리고 창밖에는 차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예하나가 왜 여기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차를 따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한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어디에요? 차를 몰고 갈 건데.]나는 바로 그에게 위치를 공유했다.카페에 도착한 한민수는 바쁘게 일하는 예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하나도 그를 보자마자 숨으려 했지만 한민수는 거침없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유진이가 2년 동안이나 너를 찾았는데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거야! 지한이 너 숨는 실력 하나는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23화

    한민수는 내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뜻이었다.“갈게요.”전화로 그렇게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훈 씨는 왜 운성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전에도 나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이 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이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저녁에 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한민수가 말한 연회장으로 갔다. 내가 한민수를 찾았을 때 석지훈은 2층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민수는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교한 디자인의 정장은 그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냈고 흰 셔츠 소매의 금색 단추는 그에게 고귀한 분위기를 더했다.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말이다.지금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얼마나 더 이야기할 거예요?”내 목소리를 듣고 석지훈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지훈 씨.”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관심한 눈빛으로 내 옆에 있는 한민수를 바라보았다.한민수는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야.”한민수의 말은 마치 날벼락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석지훈을 바라보았다.나는 충격에 빠진 채 물었다.“이게 무슨 말이에요?”한민수는 황급히 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한민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기억상실이에요.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어요. 의사 말로는 일시적이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는데 한두 달 안에 회복될 가능성이 높대요. 하지만 한성범은 그 한두 달 사이에 민영과 지훈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할 거예요! 기정사실을 만들어서 지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거죠.”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그가 나를 잊었다고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22화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민수가 보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물었다.“그 사람 걱정하느라 속이 타 죽겠죠?”당연한 거 아닌가?!나는 먼저 물었다.“상태는 어때요?”“괜찮아요. 지훈은 왜 안 물어봐요?”나는 가볍게 말했다.“민수 씨 안부부터 물어야 덜 외로울 거 아니에요.”한민수는 한 씨 가문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한민영이 병원에 온 것도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한민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마음도 착하셔라.”나는 그제야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는?”“나도 아직 잘 몰라요.”그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한민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초조해서 말했다.“난 지훈 씨가 걱정돼요. 그러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내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테니까!”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했다.“우리는 습격을 당했어요. 그리고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 줬지요.”나는 서둘러 캐물었다.“누군데요?”“한성범.”자신의 할아버지를 한성범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현재 한민수와 한씨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요?”“생명에는 지장 없을 거예요.”석지훈은 한성범이 점찍은 손녀 사윗감이었으니 그를 위험하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석지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를 빨리 에르크로 데려오고 싶었다.서둘러 병실을 나와 보니 한민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네 할아버지한테 있지?”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그저 그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하지만 한민영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정말 모르는 눈치였다.나는 함승윤을 데리고 곧장 한씨 가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한성범이 집에 없다고 했다. 나는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하게 했다.한성범은 전화를 받고 웃으며 물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21화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20화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19화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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