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성만 아니었다면 내 인생은 행복했을 것이다.오혜원의 말대로 나는 운성의 권세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인데 당연히 내 인생은 빛나고 찬란해야만 한다.하지만 왜 하필 고현성 같은 사람을 만나서 불행을 자처하는 꼴이 되었을까?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고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하지만 오늘까지만 울고 더 이상 울지 않겠다.그리고 이제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위층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피아노 소리가 점점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그때의 그 "바람이 사는 거리"였다.멍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데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위층 베란다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더니 팔짱을 낀 채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어두운 밤하늘 아래서도 그의 얼굴은 유난히 밝게 빛이 났다.그의 눈에 비친 광대한 별빛은 내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정토와도 같았고 평생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나는 낮은 소리로 그를 불러 보았다.“정재 씨.”“꼬마 아가씨, 왜 울고 있어?”너무 익숙한 장면이다. 예전과 같은 장소, 같은 위치였는데 그때에도 그는 위에서 나를 바라봤고 나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그날에도 장대 같은 비가 하늘에서 쏟아졌는데 왜 우는지 물어보는 그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그는 언제나 내 마음을 단번에 알아챘고 나를 이해했다.내가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이고 그와 평생을...근데 지금은 왜 이런 사이가 되어버렸을까?나는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해졌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안 울었는데요?”눈물은 이미 마구 흐르고 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그는 베란다에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달빛이 그에게 비치자 마치 배경음악으로 그 곡이 또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그러다가 문득 나에게 되물었다.“아직도 슬퍼?”나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마음은 이미 다 타들어 가 재만 남았지만 말이다.이때, 그
별빛 아래,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너무 슬퍼 보였지만 이 와중에도 너무 반짝거려서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나도 내가 여기서 한 발짝만 움직여 그에게 다가가면 이 광대한 빛을 발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결국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에게 울면서 말했다.“미안해요...”고정재는 말없이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다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두 달 전에도 너는 내가 아닌 고현성을 택했었지.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결정한 일이라면 난 응원해. 처음부터 끝까지 네 행복만을 바랐거든. 네가 건강하고 지금보다 잘살기를 바랐는데 너는 지금 너무 불행해 보여. 그런데도 너는 왜 우리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조차 나한테 주지 않는 거야?”과거로 돌아간다고?나랑 고정재 사이에 무슨 과거가 있어?9년 동안 나만 저 사람을 짝사랑했던 걸 말하는 걸까?캠퍼스의 등불은 너무 어두웠고 나는 그 아래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하지만 고정재라는 사람은 내 청춘 시절의 막연한 꿈이자 로망이었다.쉽게 다가갈 수도, 마음을 줄 수도 없는 존재였다.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를 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었다.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면서 솔직하게 말했다.“정재 씨를 좋아했던 건 사실이에요. 아뇨, 제 목숨보다도 더 사랑했어요. 그때는 그저 당신 이름만 들어도 설렜고 좋았어요. 죽어도 두려울 게 없었죠. 지금도 당신만 보면 마음이 짜릿하고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거든요. 근데 고정재 씨, 그 9년이라는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그중에는 제가 고현성 씨와 결혼한 것과 암에 걸려 아이를 더 이상 낳지 못하게 된 것, 거기에 지금 전국적으로 웃음거리가 된 사건도 있었잖아요? 이래도 제가 쉽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고정재는 내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위로했다.“수아야, 지나간 일들에 대해 더 이상
그렇게 4분짜리 피아노곡은 순식간에 끝나갔고 나는 연주가 다 끝나기도 전에 먼저 자리를 떴다.그렇게 여름날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내 뜨거웠던 9년간의 짝사랑도 같이 날려버렸다.차를 몰고 집에 돌아와 보니 시간은 이미 많이 늦어져 있었다. 너무 피곤해 침대에 누웠는데 강해온이 메시지 하나를 보내왔다.[연 대표님, 회사는 두 달 동안 그 구설수로 인해 주가가 5% 하락한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 없습니다. 대표님의 복귀를 축하합니다.]구설수라...그때 빗속에서 구질구질하게 고현성을 향해 빌던 영상이겠지.어쨌든 내가 선양 그룹의 대표이기에 회사에 영향이 가는 건 당연했다.나는 강해온의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을 잤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 점심이었다. 무음으로 되어 있는 핸드폰에는 이미 수많은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조민수, 최희연, 원태웅 등등.물론 비서 강해온도 포함이다.순간 나는 또다시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그러다가 다시 카톡을 열어 강해온이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대표님, 지금 실검 한번 확인 부탁드립니다.]이 말투는 분명 무슨 일이 터졌다는 뜻이다.트위터를 보니..실검 1위가 연수아.2위가 피아니스트 고정재.3위가 바람이 사는 거리.4위는 연수아의 남자들.남자들이라니, 참 어이없는 단어다.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문득 영상 하나를 클릭해 보았다.영상 속에는 나와 고정재의 모습이 보였고 그는 위층에, 나는 아래층에서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데 마치 영화 속 한 장면같이 느껴졌다.그리고 어제 우리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그대로 녹화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했던 절절한 고백도 다시 내 귓가에 들려왔다.“진짜 정처 없이 너만 찾아다녔지. 마치 9년 전에 나를 쫓아다니던 너처럼 말이야. 그렇게 나도 9년 동안 너를 가슴에 품고 살았어...”나는 재빨리 영상을 껐다.그리고 아래에 있는 댓글들도 봤는데 하나같이 내가 꽃뱀이라고 욕하고 있었다.이렇게 되
원태웅이 지금 운성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깜짝 놀랐다.문득 아침에 나한테 전화했던 목적이 혹시 석지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다.근데 석지훈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는데?“내가 셋째 오빠란 건 안 까먹었나 보네?”원태웅은 나에게 다가와 내 이마를 장난스레 톡 하고 때렸다. 다른 사람이 보면 우리 두 사람이 친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렇게 만난 게 고작 두 번째였다.이때, 원태웅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에게 대뜸 물었다.“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그 영상 나도 봤어. 쯧쯧, 우리 윤아가 참 스캔들이 끊이질 않는구나. 그것 때문에 지훈이 형이 얼마나 화났는지 모르지?”사실 이 일은 석지훈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화낼 이유도 없었다. 근데 나는 내 개인적인 일이 이렇게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단 사실에 너무 화가 났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나한테 하는 건데?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둘째 오빠랑 무슨 상관인데요?”하지만 원태웅은 내 말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갑자기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정재 씨를 좋아했던 건 사실이에요. 아뇨, 내 목숨보다도 더 사랑했어요. 그때는 그저 당신 이름만 들어도 설렜고 좋았어요. 죽어도 두려울 게 없었죠. 지금도 당신만 보면 마음이 짜릿하고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거든요. 쯧쯧, 우리 윤아가 남자한테 이런 고백 멘트를 거리낌 없이 하고 다니던데? 그나저나 두 달 전만 해도 다른 남자랑 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 거야? 둘째 형이 지금 어떤 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엄청 화나 있을 거야.”원태웅은 보란 듯이 내가 어제 그 사람에게 했던 고백들을 토씨 하나도 빠짐없이 줄줄이 읊었다. 심지어 석지훈도 언급했다.내 정곡만 찔러대는 그에게 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오빠!”내가 화난 모습에 원태웅은 그제야 진지한 얼굴로 다시 오늘 온 목적에 대해 말했다.“알겠어. 안 놀릴게. 난 그저 이 계약서를 가져다주려고 온 거야.”
고현성은 보기 드물게 검은색 반팔 티에 앞머리도 이마 위로 몇 가닥 내렸다.“그 어떤 설명도 듣고 싶지 않고 더 이상 당신이랑 엮이고 싶지도 않아요. 근데 결혼은 축하해요. 이제 건강한 아내와 아이까지 생기겠네요.”고현성은 한참 동안 무언가를 말하려고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를 지나 다시 회사로 돌아왔고 몇십 층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저녁때쯤, 오혜원이 갑자기 나한테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재빨리 그녀의 번호를 차단했다.나는 아직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우선 차단하고 연씨 가문의 일부터 해결하고 나서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순간 예전보다 단호해진 결단력에 나 자신도 놀랐다.그렇게 고현성이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돌아가려 했다. 회사에서 나와보니 여름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면서 우울했던 나의 기분을 달랬다.어차피 지금 사는 아파트랑 회사가 그리 멀지도 않아 가는 길에 꽃도 살 겸 걸어가고 싶었다.도라지꽃을 사고 싶었지만 파는 곳이 없어 다른 꽃 몇 송이만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이때, 누군가가 내 뒤에서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고 발소리도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다.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누군지 확인한 뒤 그에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이에요?”눈앞의 사람은 고현성과 똑 닮은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차이를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었다.고정재는 싱긋 웃으면서 답했다.“너무 늦어서 데려다주려고.”“전 괜찮은데요.”“그래. 빨리 가.”고정재는 정말 나를 집에만 데려다주려고 온 건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하여 나도 몸을 돌려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갔다.뒤따라오는 발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갔고 그렇게 나는 재빨리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집에 들어온 뒤 나는 꽃을 한 구석에 던져놓고 창가 쪽으로 달려가 확인했는데 그는 여전히 대문에 서 있다가 약 5분 후에 떠났다.지금 그의 모습은 5년 전의 내 모습과 똑 닮아있었다.이제는 그가 내 뒤를 쫓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9년이라는 시간을 곰곰이 회상하며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제목: 연수아의 9년이라는 시간.안녕하세요.저는 선양 그룹의 대표, 연수아입니다.선양 그룹은 운성에서 유명한 대기업입니다. 사업도 언제나 원칙을 준수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천리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하여 선양 그룹에 대해서는 굳이 제가 글로 적지 않아도 이미지가 어떤지 다들 아실 거라 믿습니다.지금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이슈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일이라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하지만 일이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선양 그룹의 선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이에 대해 해명하고자 이렇게 몇 자 적어봅니다.9년 전, 저희 부모님은 사고를 당했는데 유골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 겨우 열네 살이었던 저는 그렇게 연씨 가문에 혼자 남게 되었고 몸과 마음이 모두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이 일로 끝없는 우울감과 슬픔에 빠져 있었죠.그때의 저는 제일 예민하고 힘들어했던 와중에 고정재 씨를 만났습니다.9년 전의 저는 당연히 고정재란 사람이 누군지 몰랐고 그가 미래에 글로벌한 음악 거장이 될 것이라고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이런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제가 그 사람을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그해에 저는 그 사람이 혹시나 내 눈앞에서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매일 쫓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언제나 다정한 말투로 ‘꼬마 아가씨’라고 불러줬고 저를 위해 피아노도 자주 쳐줬습니다.그러나 그 사람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죠. 심지어 저는 그 사람의 이름조차 몰랐고 그렇게 몇 년 동안 한 사람만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고승철 회장님께서 맞선 제안을 하면서 고현성 씨의 사진을 보여줬는데 저는 당시 사진 속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습니다.물론 설레기도 했고요. 사진 속의 남자가 바로
고정재 씨는 단지 어린 시절의 특별하고 소중했던 한 조각의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아무리 놓기 아쉬워도 결국엔 놓아야 했습니다. 저는 고현성 씨를 선택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제 뜻과 정반대로 가는 일이 너무 많더라고요. 저는 고현성 씨와 석 달 전에 이혼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다. 고정재 씨와의 일은 결국 지나간 과거일 뿐입니다. 그의 앞날이 빛나길 진심으로 빕니다. 바람이 머무는 거리. 결국 그것은 저 혼자만의 집착일 뿐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삶은 각자 행복하길 바랍니다. 글쓴이: 연수아. ————글을 작성할 때 나의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마치 과거와 드디어 작별을 고한 것처럼 묵직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글을 작성한 후 사진을 한 장 찍어 홍보팀 직원에게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가 물었다. “연 대표님, 정말 이걸 공개하실 건가요?”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은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다. 그저 내 마음속 깊은 곳을 꺼내어 스스로를 돌아본 고백일 뿐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비서는 연씨 가문의 공식 계정에 내가 쓴 글을 업로드했고 짧은 문구를 덧붙였다. [앞으로의 삶은 각자 행복하길 바라요.] 나는 곧바로 트위터를 열어 상황을 주시했다. 글이 게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 수는 순식간에 만 개를 넘겼다. 어떤 사람은 석씨 가문의 공식 계정을 태그 하며 이렇게 썼다. [아, 너무 아까워요. 결국은 잘못된 사랑이었네요. 9년간의 집착이 이렇게 사라지다니. 괜찮아요! 앞으로는 석 선생님이 연 아가씨를 아끼고 사랑해 줄 테니까요!] 연씨 가문이 올린 게시물 이후로 여론은 빠르게 바뀌었다. 많은 사람이 과거를 추억하며 한숨을 내쉬었고 나를 비난하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하지만 석씨 가문의 공식 계정을 태그 하는 댓글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날 사람들 눈에 비친 석지훈은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
휴대폰에서는 통화연결음만 들려왔고 결국 석지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실망스럽게 전화를 끊고 석씨 가문 공식 계정이 리트윗한 글을 바라봤다. 그 글은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는 내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끊어버렸다! 이건 분명히 날 도발하려는 거다! 원태웅은 정말 얄미운 인간이다. 나는 분노로 가득 차서 휴대폰을 꽉 쥐었고 숨이 막힐 정도로 화가 났다. 잠시 후, 원태웅이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난 그저 너를 응원해 주려는 거야. 사람들이 너를 아껴준다고 느끼게 말이야. 아무튼 난 트윗을 절대 삭제하지 않을 거야!” 원태웅은 내가 왜 전화를 했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손에 쥐고 회사를 나왔다. 건물 아래에 섰을 때 동성시로 달려가 원태웅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이건 역시 석지훈을 찾아야 해결될 일이야.” 석지훈의 전화는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둘째 오빠, 할 말이 있어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답장을 줄 것이라 믿었다. 그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최희연이 내게 카톡을 보냈다. 그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수아야, 괜찮아?] 두 달 전에 석지훈이 나를 데리고 운성시를 떠날 때 최희연은 이미 여러 번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왔었다. 하지만 그때는 내 감정이 너무 엉망이라 휴대폰을 거의 보지 않았다. 쌓여 있던 메시지를 모두 무시하고 운성시로 돌아와 이렇게 단체 메시지를 보냈을 뿐이다. [운성시로 왔으니 걱정 마세요.] 이 메시지를 받은 최희연은 내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고 나에게 바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제 일이 터지고 내가 그에 대해 공식적으로 대응한 뒤에야 그녀가 나에게 물어왔다. 최희연은 내가 지난 몇 년간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어떤 억울함과 슬픔을 견뎌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또한 그녀는 내가 이러한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