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이 나오자 현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공기마저 흐르는 것을 멈춘 듯했다.‘소중한 외동딸?’‘무슨 뜻이지?’‘이씨 가문에는 딸이 둘 있지 않았어?’다들 알고 있듯이, 큰딸 이미윤은 J시에서 손꼽히는 재벌 집안 심씨 가문에 시집갔다.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인정받지 못하게 된 걸까?현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는 분수를 알고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따지지는 않았다.이미숙과 소진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올게 왔구나!’봉수진의 ‘폭탄'이 여기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그렇게 결국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하지만...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미윤이 이씨 가문의 딸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봉수진은 제멋대로 굴며 이런 결정을 내렸다.이미윤이 자신의 딸을 해쳤으니, 이제부터 봉수진도 이미윤을 딸로 삼고 싶지 않았다.원래 피도 섞이지 않은 인연일 뿐이었다.이제껏 이미윤을 키워서 재벌 가문에 시집보냈으니, 두 사람의 인연도 다한 셈이었다.이제부터 그들은 ‘모녀’가 아니라, 남으로 될 것이다.무대 아래에서 이미윤은 두 어르신이 자신에게 미리 아무 말도 없이 일을 진행한 것에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오늘은 그녀 혼자 초대장을 들고 왔고, 심정훈은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지난번 두 사람이 모든 걸 터놓고 이야기한 이후로, 심정훈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이미윤은 그가 두 어르신에게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동안 지켜본 결과, 심정훈이 그러게 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왜냐하면, 이춘재와 봉수진이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만약 두 어르신이 이미숙의 실종이 이미윤의 소행이라는 걸 알았다면, 반드시 찾아와 따졌을 것이다. ‘두 분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거야.’불안한 마음으로 하루, 이틀... 일주일을 보냈고, 이주가 지나도 두 어르신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이미윤은 완전히 안심했다.아마 이미숙도 이 사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미윤은 표정이 일그러지고 이마의 핏줄이 불거졌다.‘어떻게 이런 일이? 두 분 다 아신 거야? 아니... 그럴 리 없어... 절대로...’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빛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이미윤을 향해 덮쳐왔다.심씨 가문에 시집간 지 20년이 넘은 이미윤은 항상 ‘사모님'으로서 호사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훌륭한 남편과 아들 덕분에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았으니, 이렇게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욕을 먹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이미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진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웃음을 지으며 무대에서 내려오는 이춘재를 맞이했다.“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오늘은 아빠의 팔순 잔치이자, 미숙이까지 되찾았잖아요. 우리 집안에 경사가 겹쳤네요!”이춘재는 고개를 들어 차갑게 이미윤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그녀가 내민 손을 피하며 말했다.“내가 방금 한 말, 못 알아들은 거야?”이미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춘재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씨 가문의 딸은 미숙이 하나뿐이야. 그러니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고칠게요... 그러지 마세요...”이미윤은 이춘재가 관계를 끊겠다는 말을 부녀 간의 다툼으로 넘어가려 했다.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상황을 무마하려고 애쓰고 있었다.그 순간, 주변의 손님들 역시 이 일을 부녀 간의 갈등으로 오해하며 말했다.“큰일인 줄 알았는데, 그냥 가족 싸움이었네.”“다들 흩어져요.”그런데 봉수진이 갑자기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은 봤어도, 너처럼 두꺼운 사람은 처음이야.”“그동안 현빈이 때문에 널 봐줬던 거야. 조용히 있으면 겉으로는 네 체면을 봐줄 수 있었을 텐데, 넌 끝도 없이 우리 집안에 빌붙으려 하고 있으니, 더 이상은 봐줄 수 없겠군.”“엄마, 그만하세요...”이미윤은 봉수진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봉수진은 마치 그동안 쌓인 원한을 한꺼번에
“천만에요, 천만에요...”남의 집안 이야기를 이렇게 들으니, 손님들은 오히려 재밌는 구경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정말로 대박이야.’해프닝이 끝나자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갔지만, 강서원만이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었다.방금 이미윤이 바로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미윤의 반응을 가장 먼저 눈에 담을 수 있었다.공포, 당황, 무력감, 원망...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이미윤의 얼굴에 드러났다.‘그럼 그때 정말로 자신의 동생을...’하지만 기억 속의 이미윤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현명하며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다.강서원은 처음으로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느꼈다.“강 여사? 왜 서 계세요? 자리로 가시죠?”“그래요, 곧 갈게요!”...이와 동시, 서영숙과 세정 모녀도 멍하니 있었다.세정은 설날 내내 집에서 보내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음식도 가정부가 직접 들고 올라갔으니, 장애인과 다를 바 없었다.서영숙은 간신히 세정을 설득해 이춘재의 생일 잔치에 참석시켰다.그런데 이렇게 큰 충격을 받을 줄이야...“엄마... 이거 꿈이죠? 다 가짜죠, 그렇죠?”세정은 어쩔 줄 몰라 서영숙의 손을 잡았다.서영숙은 이미 멍해졌다.무대 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곳을 응시하고 있었다.마치 그곳의 무언가를 다시 확인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맞아, 꿈일 거야...”그녀는 세정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서정은이 어떻게 이씨 가문의 사람이란 말인가?’이씨 가문은 오래된 명문 집안이었다.부자는 3대를 못 이어간다는 말이 있지만, 이씨 가문은 조상부터 직위가 놓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실업으로 나라를 구한 집안이었다.돈도 많았지만, 인성도 바르고 명망도 높았다.최근 20, 30년 사이에 조용해졌을 뿐이었다.정은이 이런 대가족, 이런 배경과 실력을 가진 집안의 귀한 손녀라니.서영숙은 어느 해 설날, 정은이가 선물을 들고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그때 그녀는 정은이를 문턱에도 들이지 않았다.“세
“강 여사? 강 여사!”“네? 뭐라고요?” 서영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식사해야죠, 자리에 안 앉을 거예요?”“아, 그래요. 앉아야죠.”서영숙은 서둘러 세정을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물어보던 사람은 머리를 긁적이며 속으로 궁금해했다.‘오늘은 왜 이 두 집안의 사모님과 아가씨들이 모두 이렇게 이상한 거지?'...연회가 끝나자, 사람들 하나둘씩 떠났다.위층 휴게실에서, 현빈이 어쩔 수 없단 듯이 말했다.“어머니, 이제 돌아가세요.”“난 안 가! 내가 왜 가야 해?! 나와 부모 자식 간의 연을 끊겠다는 거야?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그래요.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현빈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미윤의 눈빛이 흔들렸다.“아버지는 아직도 전화를 안 받으세요?”“그래.”마침내 이춘재와 봉수진이 방에 들어왔다.이미숙과 그녀의 가족은 이미 떠났다.봉수진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무표정으로 이미윤을 바라보았다.“현빈이가 그랬어, 네가 우리를 만나고 싶다고.”“엄마...”“그렇게 부르지 마. 듣기 싫으니까.”봉수진은 더 이상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다는 듯이, 혐오하는 표정을 드러냈다.이미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알겠어요.”이제 그녀는 완전히 냉정을 되찾았다.“앉으세요. 저와 이야기 좀 해요.”봉수진은 궁금했다. 이제 와서 무슨 할 말이 더 있는 건지,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게 자신들을 만나려고 하는 건지.어르신은 자리에 앉았다.이미윤이 말했다.“다 아신 거죠?”봉수진은 냉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뭘 알아? 네가 직접 말해 봐.”이미윤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봉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이 방에 CCTV가 있고, 아니면 녹음기로 저한테서 증거를 얻으시려는 건지 모르겠네요.”“어떤 일들은 말로 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계시잖아요. 굳이 소문을 퍼뜨릴 필요는 없죠.”두 어르신은 이미윤의 당당한 태도에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현빈도 눈살을 찌푸렸다.이미윤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봉수진은 자신의 선심이 뱃속의 아이로 이어진 것이라고 믿었다.지영은 그녀의 복덩이였다!부부는 상의 끝에 세 살 난 지영을 입양하기로 결정했고, 그녀의 이름을 ‘이미윤'으로 바꿔 주었다.아름다울 미, 윤택할 윤.그녀가 아름답고 순조로운 삶을 살길 바랐다.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이렇게 낯선 양녀를 보며, 봉수진은 슬픔을 감출 수 없었다.이춘재는 일어나 아내를 부축하며 차갑게 말했다.“넌 우리가 심씨 집안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길 거라 생각하는 거야? 오늘 현빈이를 봐서 그런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난 더 심한 말을 했을 거라고.”“네가 조건을 걸겠다면, 그에 맞는 걸 내놔. 심씨 집안이든, 심 서방이든 모두 우리에겐 아무런 위협이 없으니까.”이미윤은 분노하며 일어섰다.“아니!”현빈이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어머니, 그만하세요!”“너는 내 아들이야! 날 도와주지 않을 거니?!”현빈은 어두운 눈빛으로 말 한 마디 내뱉었다.“그때 이모가 실종된 일, 정말 어머니와 관련이 있는 거예요?”“현빈아!”“제 질문에 대답하세요!”“심현빈!”“그럼 관련이 있었던 거네요.”이미윤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마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다니.현빈은 무력하게 뒤로 물러나며 눈을 감았다.‘그렇구나... 그래서 할머니가 어머니를 싫어하셨던 거구나. 그래서 부모님이 자주 싸우셨던 거구나. 그래서 어머니의 원한이 이렇게 깊었던 거구나.’현빈은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밤이 깊어지며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이미윤을 억지로 돌려보낸 후, 현빈은 이춘재와 함께 연회장에 남았다.이춘재는 몇 마디 당부했다.“넌 참 좋은 아이야. 그동안 나와 네 할머니는 네 덕분에 잘 지냈어. J시에서 유일하게 걱정되는 사람도 너뿐이고.”“오늘 연회에서 한 말 미리 너에게 알리지 않은 건 미안해. 우리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고, 네 반응도 보고 싶었어.”“현빈아, 넌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어. 그러니 여전히 우리의 손자가 되어줄래?”그들은
현빈은 도겸을 똑바로 쳐다봤다.도겸은 그의 시선에 그만 멍해졌다.“허.” 현빈은 갑자기 웃었다. “그래서 날 비웃으려고 남은 거야?”도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당하게 말했다. “맞아.”“방금 그 자리에 있었으니, 왜 끝까지 보지 않은 거야?”도겸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졌거든.”“그래서?” 도겸이 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현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 어머니가 이씨 가문의 양딸인 거 몰라?”도겸은 순간 몸이 굳어졌다.“나는 정은이는 혈연관계가 없다고.” 현빈은 담배를 한 모금 빨며 담담하게 말했다.“흥.” 도겸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혈연관계가 있든 없든, 어르신이 정은의 신분을 공개한 순간부터 넌 정은이의 오빠가 될 수밖에 없어! 남들은 사실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너와 정은이 모두 한가족이라는 것밖에 모르거든.”“비록 나와 정은이는 이미 헤어졌지만, 그동안 함께 사귀면서 난 그래도 정은이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오빠라는 신분만으로, 정은이는 절대로 널 선택하지 않을 거야.”“심현빈, 너 아웃이라고, 아직도 모르겠어?”도겸은 웃으며 도발을 띤 말투로 말했다.현빈은 차가운 눈빛으로 도겸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웃기 시작했다.“정은이를 잘 알고 있는 이상, 정은이가 가족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더 잘 알겠지. 나와 정은이는 함께 할 수 없더라도, 가족이라는 신분으로 당당하게 정은이의 곁을 지킬 수 있고, 정은이를 배려하고 보호할 수 있지. 하지만 넌...”“가까이 가는 것조차 헛된 망상일 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 강도겸이라고.”현빈의 말은 도겸의 정곡을 찔렀다.그는 온몸이 떨리더니 두 눈이 붉어졌다. “그럼 우리 두고 보자고!”모진 말을 내뱉으며 도겸은 몸을 돌려 떠났다.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지만 도겸은 기어코 먼저 남을 건드리려 했
설날에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설날 보낸 후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해줬으니 이춘재와 봉수진은 이미 감동을 느끼며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이미숙과 소진헌이 하루만 떠났을 뿐인데, 갑자기 조용해진 집안을 보니 봉수진은 어색함을 느꼈다.‘예전에도 이렇게 지냈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검소함에서 사치로 넘어가는 것은 쉽지만,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딸과 사위가 곁에 있는 시간을 맛본 후, 어떻게 다시 쓸쓸한 시간을 견딜 수 있겠는가?“안 돼!” 봉수진은 벌떡 일어섰다. “나도 L시로 갈 거예요!”이춘재는 어쩔 수 없다는 눈빛으로 말했다.“소란 좀 피우지 마. 미숙이는 아직 다른 도시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당신 혼자 L시로 가서 뭐 하려고?”“소 서방을 찾으러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아니면 직접 미숙이 찾아가도 되잖아요! 어쨌든 더 이상 집에 못 있겠어요!”이춘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소 서방은 매일 아침 일찍 나가고 저녁 늦게 들어오는데, 이번 학기에도 담임을 한다고 들었어. 지금 소 서방을 찾아가면 방해만 될 뿐이야.”“나는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집에 있으면서 밥도 해 주고, 미숙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당신도 참, 나이를 먹었는데도 왜 자꾸 아이처럼 구는 거야? 아이들 없이는 못 사는 거야?”봉수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당신은 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이춘재는 말문이 막혔다.그렇다, 사실 그도 가고 싶었다.봉수진이 말했다.“산이 나에게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가야죠! 당신도 나랑 같이 갈 거죠?”다음날 아침, 봉수진은 일어나 아침을 먹고는 다시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이춘재는 침착하게 돋보기 안경을 쓰고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봉수진은 옆에 앉아 그가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도 않고, 그저 탁자 위의 과일을 보며 이미숙이 생각나서 괴로워했다.한순간, 그리움과 슬픔이 밀려왔다.이춘재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해 태블릿을 건네주며
연회장에서 한바탕 소란을 벌인 이미윤은, 끝내 가족들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심정훈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들으니 해외로 출장을 다녀갔다고 한다.그 후 이틀 동안 이미윤은 남편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심정훈의 핸드폰은 꺼져 있거나 연결할 수 없었다.그녀는 화가 나서 핸드폰 두 대를 부쉈다.가정부들은 그런 이미윤 때문에 모두 전전긍긍하며 행여나 그녀의 화풀이로 될까 봐 두려웠다.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평범한 아침이 찾아왔다.이미윤은 아침을 먹고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심정훈의 비서가 갑자기 나타나 간단한 인사를 한 뒤, 그녀에게 서류 한 부를 건넸다.이미윤은 영문을 몰랐고, 다음 순간, ‘이혼 합의서'라는 다섯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이미윤의 머리는 새하얘졌다.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이미윤은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비서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이게 무슨 뜻이죠?”비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회장님께서 사모님에게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가서 그이에게 말해요, 이혼을 하고 싶다면 스스로 와서 제기하라고! 이혼 협의서만 보내서 뭘 하려고요? 내가 사인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네, 회장장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비서는 상대방이 자신의 얼굴에 던진 합의서를 차분하게 주워서 돌아섰다.비서가 떠나자, 이미윤은 그제야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녀는 즉시 현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너희 아버지가 나랑 이혼을 하려 하다니!”맞은편은 아주 조용했다. 이미윤이 말을 끝내고 나서야 현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알았어요.]이미윤은 말문이 막혔다.[또 다른 일 있으세요?]“심현빈! 너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는 거야?! 너희 아버지가 나와 이혼하려고 하잖아!”[알아요. 할아버지 생신잔치가 끝나는 대로 바로 이혼하실 줄 알았는데, 일주일이나 더 끌 줄은 몰랐어요.]“너, 너 지금 당장 돌아와! 그렇지 않으면, 날 엄마라 부르지도 마!”현빈은 결국 이 말 때문에 집으로 돌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
[진짜 안 따라 나오는 거야? 손태민, 너 나한테 진심이긴 해? 마음 있긴 해?!]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태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디야?”[정문 앞 카페. 시간 줄게, 5분 안에 와.]“그래.”태민은 짧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태민이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통화한 지 15분이 지나 있었다.수아는 두 팔을 꼬며 차갑게 말했다.“뭐야, 이게? 5분이랬잖아. 내가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잖아.” “미안...태민은 고개를 숙였다. 눈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사과했다.그런 태민의 모습에 수아는 괜히 짜증이 났다. ‘조재석이랑 비교하면... 능력도, 집안도, 얼굴도, 도대체 뭐 하나 나은 게 없어.’하지만 그녀는 아직 태민이 필요했다. 그 생각에 억지로 화를 눌러가며, 입꼬리를 올려 웃는 척했다.“너... 교수님한테 한 번만 말해줄 수 있어? 이번 해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좀 부탁해 줘.” 그 말에, 태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예전엔 본 적 없는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봤다.‘저 눈빛은... 뭐야...?’수아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딱 2초 만에 시선을 피했다.“도와줄 거야, 말 거야? 싫으면 됐어. 그냥 안 해도 돼.”예전 같았으면, 수아가 이렇게 말만 해도 태민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엔... 침묵이 조금 길었다.“그래...”드디어 태민이 대답했다. 수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곧이어 태민이 덧붙인 말이 그녀를 멈칫하게 했다.“근데, 조건이 있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조 교수님이 너를 그렇게까지 내친 이유...”“그건... 지금 꼭 해야 하는 말이 아니잖아...”“나는 꼭 들어야겠어.”수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상하게 낯선 태민의 태도에 그녀는 자신이 제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손태민, 지금 뭐 하는 거야? 날 협박하는 거야?”“진짜 날 사랑하긴 해? 그 정도 일도 못 해줘?”그 비난과 몰아붙임 속에서
수아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곧장 재석 앞까지 걸어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눈은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해 있었다.“조 교수님, 왜 절 해고하신 거예요?” “일주일 병가 낸 게 문제였어요? 아니면 프로젝트에서 뭐 잘못된 거라도 있었나요?”재석은 조용히 수아를 응시하다가, 문득 작게 웃었다.“이수아 선생님, 경찰이 못 밝혀낸다고 해서,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봐요? 자세히 얘기해줘요? 모두 들을 수 있게?”그 말에, 수아 마음속 마지막 희망 하나가 차갑게 꺼져버렸다.‘알고 있었어...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 말 안 하다가, 오늘...’그녀는 마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속에 쌓여 있던 분노는 어디로 갔는지, 기운 빠진 사람처럼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미진은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하지만 재석의 깊고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스치자, 그제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구나.’ 순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곱씹던 미진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추측 하나가 떠올랐다.그리고 미진의 시선은, 동정에서 충격으로 바뀌었다.진욱은 이미 눈치챘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오직 태민만이 아직 그 정답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수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수아야...”“꺼져! 건들지 마!!”수아는 그대로 태민의 손을 뿌리치고, 실험실을 박차고 나갔다. 허둥지둥, 마치 도망치듯.‘왜... 왜 조미진랑 전진욱이... 그런 눈으로 날 본 거야...?’ ‘설마... 그 사람들도... 눈치챈 건가?’모든 사람에게서 밀려난 채, 홀로 남겨진 태민은 허공을 향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왜, 다들 나만 빼고 알고 있는 거야...’재석은 말없이 돌아서며 실험대로 향했다.
결국, 실험실에서 재석이 누군가를 내보내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했다.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 누군가가 이런 방식으로 떠나게 될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미진은 잠시 멍해졌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갑자기‘계약 종료’라는 통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수아가 병가 중이긴 한데... 설마 그 병이 심각해진 건가?’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수아 상태가 안 좋아진 건가요?”하지만 그렇다 해도 ‘계약 종료’는 너무 가혹했다. 재석은 단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사람을 냉정하게 잘라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자세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재석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수아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는 태민이 인계할 거야. 오늘 중으로 인수인계 마무리해.” 이름이 불리는 순간, 태민은 마치 누가 뒤통수를 내리친 듯 멍해졌다. ‘뭐...? 내가?’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귀도 막힌 것처럼 주위 소음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수아가 잘렸다’는 그 사실에 꽂혀 있었다.그때, 옆에 앉아 있던 미진이 책상 아래로 태민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태민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멍하니 재석을 바라봤다. “교수님, 왜죠?”재석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또 그 눈빛이었다. 무표정하면서도 단호하고, 어떤 설명도 허락하지 않는.그리고 결국, 재석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회의실엔 놀람과 당혹, 멍한 표정들이 뒤섞인 채로 몇 초간 정적만 흘렀다.오전 내내 실험실 분위기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 태민은 여러 번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수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만약 모른다면...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재석은 끝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태민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저런 결정을 내릴 정도라면...
그날 아침, 별다른 것 없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잠에서 깨자마자, 태민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 수아에게서 연락이 와 있진 않을까...부재중 전화, 메시지 알림은 있었지만... 전부 다른 사람이었다.‘오늘도 아니야.’실망감이 스르르 밀려왔다. 태민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씻고, 옷을 챙겨 입고,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막 실험실에 도착하자, 태민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떴다.수아에서 온 전화였다.“수아야?! 드디어... 너 왜 그동안 연락 안 했어? 나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나...”[손태민, 진짜 왜 이렇게 집착하냐?!]단 한 마디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태민의 정신이 멍해졌다.[계속 전화하고, 계속 메시지 보내는 게 그렇게 재밌어? 내가 안 받고, 안 보는 거면 알아서 눈치껏 그만해야지! 왜 자꾸 연락하는데?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 건데? 진짜 짜증 나!]“수아야...”태민은 당황해 목소리가 떨렸다.“나는 그냥... 네가 너무 연락이 없으니까,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돼서 그랬어...”[걱정?]전화기 너머로, 조소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내가 뭘 어쨌다고 걱정을 해? 너 진짜... 왜 그렇게 남 일에 다 끼어들고 싶어 하는 거야? 다 간섭하고, 다 챙기고.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태민은 눈앞이 흐려졌다.‘난 그냥 좋아하니까... 그게 다였는데.’“난 그냥, 너한테 잘해주고 싶었어...”[됐어, 잘하고 못하고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제발, 더 이상 전화도 하지 말고, 메시지도 보내지 마.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뚝-태민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태민아? 앞 좀 보고 다녀!”실험실 입구. 미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태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쓰레기통을 걷어찰 뻔했다.“아, 죄송해요...”그는 황급히 쓰레기통을 세워놓고 어색하게 웃었다.“자, 가자.”미진이 그를 불렀다.“어디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