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더 가면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정은이 특별히 만든 휴식실이었다.무려 8개의 스위트룸, 각 스위트룸은 침대와 옷장, 심지어 전신거울과 세면대까지 구비되어 있었다.바깥의 공공구역에는 커피머신, 책꽂이, 그네, 당구대가 있어 여가를 즐길 수 있었다.이밖에 정은은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또 작은 주방을 꾸렸는데, 솥과 그릇 등 물건은 이미 잘 준비되어 있었다.이 구역은 지능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며, 실험구역과 엄격히 분리되어 서로 교란하지 않았다.“위층에는 전문 헬스장이 있고, 뒤뜰에는 수영장이 있어요. 그쪽의 풍경도 괜찮아서, 피곤하면 여기에 서서 커피를 마시며 먼 곳을 내다볼 수 있어요. 참, 여기에 간식 코너를 하나 차릴 예정이에요. 저희 팀에 미식가가 있거든요.”애초에 실험실을 디자인할 때, 정은도 이렇게 많은 휴식 구역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건 일반 실험실이랑 많이 다르니까.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평소에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려면 이미 엄청난 집중을 해야 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었기에 어떻게 줄곧 쉬지 않고 일할 수 있겠는가?적당한 휴식은 여전히 필요했다.기왕 할 거면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최적한 환경으로 만들어야 했기에, 지금 이렇게 된 것이다.재민이 말했다.“이게 무슨 실험실이야? 리조트와 다름없잖아!”서준은 입술을 구부렸다.“민지도 그렇게 말했어.”“이 휴식실은 너무 화려하네. 뜨거운 물로 샤워도 할 수 있고. 밤을 새워 실험을 한다면 여기서 잘 수도 있잖아. 자기 집처럼.”재민은 문틀을 만지면서 동경을 드러냈다.진일도 마찬가지로 부러움을 느꼈다.‘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주변의 사람과 일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겠지?’서준은 진일의 반응을 자세히 관찰하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때로는 인내보다 반항이 훨씬 쉬워요.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시도하려 하지 않을 뿐이죠.”“만약 반항에 실패했다면?”서준은 웃으며 말했다.“이 세상에 꼭 성공할 수 있는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이해할 수 있어.”민지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비록 이렇게 하면 속이 시원하지만, 대학원 쪽에서 동의할까요? 멍청이들도 아닌데?”“대학원은 교수님이 해결하실 거야. 우리는 과제에 집중하고, 자신의 일을 잘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어.”“너무 잘 됐네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자신을 위해 연구를 하는 거잖아요!”민지는 기뻐서 입에 과자 두 개를 넣었다.“맛있네! 이럴 때 따뜻한 밀크티 한 잔 더 마시면 완벽한데...”민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은의 핸드폰이 울렸다.“네,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시키신 밀크티가 도착했는데, 나와서 밀크티 좀 가져가실 순 없나요? 전 들어갈 수가 없어서.]정은은 멍해졌다.‘밀크티? 난 밀크티를 주문한 적이 없는데?’배달 기사가 다시 재촉하자, 정은은 나가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밀크티 세 잔, 그것도 뜨거운 것이었다.“정은 언니, 어쩜 이렇게 다정하신 거예요? 미리 밀크티를 시켰다니, 그것도 제가 자주 마시는 그 가게잖아요. 짱이야.”“내가 시킨 게 아니야.”민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엥? 그럼... 쮼, 네가 시켰어?”서준은 즉시 부인했다.“나 아니야.”“그럼 누구지?”바로 이때, 재석이 밖에서 들어왔다. 세 사람이 밀크티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눈썹을 치켜세웠다.“배달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도착한 모양이야.”민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교수님이 밀크티를 시키신 거예요?!”“너희들의 입맛을 몰라서 같은 걸로 시켰어.”민지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엄청 맛있어요!”이때 정은의 핸드폰이 또 울리기 시작했다.“네, 금방 나갈게요.”3분 후, 정은은 배달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민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왜 또 밀크티 세 잔이죠?! 교수님이 주문하셨어요?”재석은 고개를 저었다.“그럼 누가...”“아, 밀크티 벌써 도착했구나?” 현빈은 웃으며 휴식실로 들어왔지만, 곧 웃음이 사라졌다.세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밀크
옆에서 구경하던 민지는 눈을 깜빡이며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이건... 쯧쯧!’정은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현빈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아무렇지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거절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넘쳤다.이에 비해 재석은 훨씬 평온했고 눈빛이 온화했다. 정은은 그 눈빛을 알아차렸는데, 그것은 일종의 포용과 격려였다.마치 바다처럼, 너그럽게 모든 하천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두 사람 모두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정은은 갑자기 무언가를 보더니, 일어나서 정수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위의 캐비닛에서 머그컵 하나를 꺼냈다.“역시 물을 마시는 게 더 좋겠네요.”재석과 현빈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또 저마다 눈을 뗐다.현빈은 조용히 웃었다.“오전 내내 수고했으니 푹 쉬어. 난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회사로 돌아갈게.”현빈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회사의 크고 작은 일들을 결정해야 했기에, 오전 한 시간을 낼 수 있는 것은 이미 한계였다.“그래요. 데려다 줄게요.”현빈은 웃었고, 미간에 즐거움이 넘쳐났다.“좋아.”말을 마치자, 재석을 향해 도발적인 눈빛을 던졌다.정은은 현빈이 차에 올라타는 것까지 지켜봤고,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현빈은 정은이 은근히 미안해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하는 모든 일은 다 내가 원해서 그래. 그러니 부담 가질 필요가 없어. 우리도 친구인 셈이니, 계속 사양하면 정말 서먹해질라 그래.”정은은 잠깐 멈칫하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현빈이 떠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리니, 재석이 이미 복도에 나왔다.남자는 몸매가 훤칠했고, 꿋꿋하게 서 있었다. 지금 차분한 눈빛으로 정은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분명히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정은은 갑자기 마음이 찔렸다.‘아니, 내가 뭘 했다고 마음이 찔리는 거지?’이런 알 수 없는 정서가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재석은 이미 정은의 앞으로 다가왔
“정은이는 항상 그랬어.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침착해졌지.”도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경혜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방금 참관할 때, 실험실은 실험 구역뿐만 아니라 레저구역도 있던데. 심지어 주방까지 설치했잖아요...”도겸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정은이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거든. 요리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매번 밖에서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요리를 먹을 때마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레시피를 연구했어.”“만약 레시피와 영상이 맞지 않는다면, 정은이는 그 두 가지 방법을 따라 각각 만들어서 어떤 게 더 맛이 좋은지 봤고...”경혜가 말했다.“그럼 아주 세심한 사람이겠네요.”도겸은 입술을 구부렸고, 추억에 빠졌기 때문에 눈은 초점을 잃었다.“맞아, 정은이는 세심할 뿐만 아니라 아주 다정한 사람이야. 누가 머리 아프면 정은이는 항상 가장 먼저 발견했거든...”“집안의 장식품이며 그릇에 대해서도 정은이는 모두 잘 알고 있어. 약 상자는 종류별로 잘 정리되어 있는데, 해열제, 소염제, 위장약, 기침약 등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경혜는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나며 자신도 모르게 달콤한 기억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두 사람의 과거가 엄청 재밌었겠네요...”도겸은 듣지 않고 혼자 계속 말했다.“정은이는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슬리퍼까지 가지런히 놓아야 했어. 그러나 난 하필 치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마음대로 물건을 놓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린 말다툼을 적지 않게 했어.”“그러나 정은이는 항상 나로 하여금 잘못을 인정하게 할 방법이 있었어. 변론을 하거나 애교를 부리거나, 아예 달려들어 나의 입을 틀어막거나...”도겸의 눈빛이 점점 밝아졌는데, 여기까지 말하자 소리가 뚝 그쳤다.이전의 아름다운 추억은 항상 도겸에게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놓쳤는지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추억이 밀려오자, 후회도 따라서 용솟음쳤다.도겸은 가슴이 무언가에 눌린 듯 하마터면 숨이 막힐 뻔했다.그는
도겸은 기사에게 분부했다.“차 돌려, 하명 백화점으로.”“네, 대표님.”...이번 식사는 경혜가 노력한 덕분에 그런대로 즐겁게 먹었다.다만 그 사이에 도겸은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술을 다 마시자, 도겸은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눈이 어슴푸레해졌다.경혜는 그를 부축해서 차에 태울 수밖에 없었다.기사는 깜짝 놀랐다.“대표님이 어쩌다...”“술에 취했으니 집에 데려다 주세요.”기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가씨, 같이 가시지 그래요?”경혜는 멍해졌다.“오해하지 마세요. 이 시간에 이모님은 이미 퇴근했으니 별장에 사람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대표님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괜찮으시다면...”“나야 당연히 괜찮죠. 그럼 가요.”말이 끝나자 그녀도 따라 차에 올랐다.곧 기사는 두 사람을 데려다 준 다음 떠났다.경혜는 도겸을 부축하여 문으로 들어섰는데, 기사가 말한바와 같이 집안이 어두워 아무도 없었다.경혜는 그를 거실 소파에 안치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남자는 편하게 자지 못한 듯 눈을 꼭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경혜는 도겸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그의 외투를 벗겼고, 또 셔츠 단추 몇 개를 풀었다.이렇게 되니 도겸은 정말 많이 편안해진 것 같다.적어도 눈살을 더 찌푸리지 않았다.경혜는 시간을 보았는데, 곧 10시가 되어갔다. 그녀는 또 주방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따뜻한 물 한잔을 들고 나와오더니 탁자에 올려놓았다.이어 베개 하나를 가져와 남자의 머리를 받쳤다.마지막으로 도겸의 이마를 살펴보았는데, 열이 나지 않았단 것을 확인한 후에야 경혜는 살금살금 떠났다.문을 닫는 소리는 이 고요한 밤에 유난히 뚜렷했다.경혜가 떠나자, 소파에 누워 있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떴다.그렇다, 도겸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경혜를 떠보고 싶을 뿐이었다.경혜가 ‘돈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도겸은 순식간에 경계심을 가졌다.한 여자가 돈조차 원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더 많은 것을 원할 것이다.예를
백두강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뭐라고 했겠어? 넌 이 일을 잘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혼자 봐!”말이 끝나자 백두강은 책상 위의 서류 하나를 들더니 바로 송지혜의 얼굴에 던졌다.송지혜는 그것을 보면 볼수록 얼굴이 창백해졌다.처분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과제 경비도 물건너갔고, 내년 국가급 연구사업에 참가할 자격까지 취소를 당했다...처벌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무거운 산이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그렇게 송지혜는 거의 허리를 구부린 채로 사무실을 나섰다.백두강의 처지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비록 어제 총장실에서 모든 잘못을 송지혜에게로 돌렸지만. 학교측은 여전히 부당 관리에 직무를 태만했단 이유로 그에게 6개월 간의 경고 처분을 주었다.대학원 쪽에서 이 소식을 듣자, 학장은 백두강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비록 말은 완곡하게 했지만, 태도는 매우 강경했다. 듣기 좋게 말하면 휴가였고, 듣기 싫게 말하면 그의 권리를 빼앗아 내쫓아내는 것이었다.6개월 뒤, ‘휴식’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다면, 더 이상 부학장의 자리를 앉을 수 없게 될 것이다.백두강은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렸다.‘송지혜가 이렇게 멍청하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다면, 난 절대로 그 사람과 엮이지 않았을 텐데. 이제 됐어, 다 끝났어!’...“이모! 부학장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소정은 일에 우리가 말려드는 건 아니겠죠?”지예는 이미 송지혜의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얼른 맞이했다.찰싹-송지혜는 지예의 따귀를 한 대 때렸다.“이, 이모?” 지예는 멍해졌다.“어제 그 많은 기자들을 부른 사람이 너야?!”지예는 마음이 찔려 침을 삼키더니 시선을 회피했다.“이모, 제가 잘못했어요.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부학장님이 일을 크게 만들수록 좋다고 하셔서 저도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두 방송국에 초청을 보냈 것일 뿐이에요. 하지만...”“두 집에 보냈다고?” 송지혜는 표정이 굳어졌다.“확실해?”“그럼요! 저 맹세코
“그렇게 생각하면 더 좋고!”바로 이때 지예의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저쪽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지예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갑자기 검사라나?! 그럴 리가 없잖아! 검사한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 응, 알았어! 바로 갈게!”통화가 끝나자, 지예는 송지혜를 보며 온몸을 떨었다.“이모, 큰일 났어요...”송지혜와 지예가 실험실에 도착했을 때, 소방대원들이 질서 있게 자리를 떠났다.진호는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왔다.“교수님, 저희 두 실험실에 모두 딱지가 붙었는데, 일정 기간 내에 시정을 마칠 것을 요구했어요...”이 익숙한 장면은 두 달 전에 금장 정은 그들에게 일어났는데, 오늘 또 재연되었다.하지만 이번에 시정서를 받은 사람은 송지혜 그들이 되었다.송지혜는 전혀 믿지 않았지만, 진호의 손에 있는 시정서를 똑똑히 보고서야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아니, 이제 검사한지 얼마나 됐다고 왜 또 검사하러 왔어? 그리고 왜 우리 실험실만 검사하는 거지?!”송지혜는 앞장선 소방관들을 불렀다.“첫째, 저희 소방대는 실험실을 돌격 검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언제 검사하고 싶든 모두 된단 말입니다. 그 목적은 실험실이 일상적으로 소방규범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독촉하는 데 있습니다.”“둘째, 이 실험실만 조사하는 것은 저희 시 소방대에서 오늘 오전 9시에 이 실험실이 소방규범을 준수하지 못했다는 신고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히 돌격 검사를 조직한 것입니다.”“사실이 보여주듯이, 이 실험실에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저도 궁금하지만, 왜 지난번 검사할 때, 소방시설이 구전되었는데, 겨우 두달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이것저것 부족한 거죠?”상대방의 말에 송지혜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녀도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신고? 누가 신고한 거죠?!”“죄송하지만 저희도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자.”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떠났다.송지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었다.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오미선
송지혜는 처분을 받자마자 자신의 명의로 된 두 실험실이 시정서를 받고 정돈되는 것을 지켜봤다.하늘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교수님, 이제 어떡하죠?” 지예는 당황한 표정으로 송지혜를 붙잡았다.진호도 초조해서 원숭이처럼 머리를 긁적였다.곧 기말이 다가왔기에, 이때 실험실에 일이 생기면 과제는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일부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기말에 그는 또 무슨 성적을 받겠는가?이것은 성적, 심지어 졸업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강서정 역시 충격에 빠졌다.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이것이 정은 그들이 한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애초에 그들도 이렇게 상대방을 괴롭히지 않았는가?정은도 단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되갚았을 뿐이었다...일단 신고를 하기 시작하면, 이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었다.몇 사람들 중, 가장 침착한 사람은 경혜였다.그녀는 연구를 좋아하지 않았고, 학술적으로도 천부적인 재능과 욕심이 없었다. 당초에 대학원 시험에 응시한 것도 자신의 이력서를 화려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앞으로 일자리를 찾고 좋은 집안에 시집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므로 실험실을 사용할 수 있든 없든, 과제가 영향을 받든 말든 그녀는 상관이 없었다.‘더군다나 지금 내 곁에 도겸 씨가 있잖아... 이 남자의 마음만 잡으면, 평생 걱정 안 해도 돼.’진호가 말했다.“정돈이라고 하지만, 그 기간이 얼마인지 말하지 않았어요. 그럼 저희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죠?”“소정은 그 사람들 생각해 봐요.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통과되지 않았잖아요. 저희도 스스로 실험실을 짓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스스로 실험실을 만들자고...’송지혜는 이 말을 듣고 눈빛이 밝아지더니 고개를 돌려 서정을 보았다.서정은 두피가 저렸고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실험실을 짓는 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돈은 그렇다 쳐도, 땅과 심사비준이 가장 어려운데, 너희들 중 누가 땅을 구할 수 있니?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