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은 차가 골목 어귀에 세워질 때까지 침묵했다.“다왔어.”“심 대표님, 공사팀을 빌려줘서 고마워요. 비용을 어떻게 결제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오빠가 설명할 거예요.”“좋아.”현빈이 돈을 받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이런 분명한 태도에 정은은 저도 모르게 한숨 돌렸다.“그럼 잘가요.”“그래, 정은아.”...인훈은 아주 빠르게 움직였는데, 이튿날에 바로 현빈이 보낸 이 두 공사팀을 만나 가격을 협상한 다음 계약을 마쳤다.그리고 3일째 되는 날에 정식으로 일을 시작했다.“그래서 현재 상의한 결과가 바로 나, 너, 심 대표가 매주 하루의 시간을 내여 공사 진도를 맞추는 거야.”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나와 오빠가 오면 되잖아. 굳이 그 사람을 부를 필요가 있을까?”그렇다고 정말 현빈을 ‘청부업자'로 대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현빈은 엄청 바빴으니, 이런 사소한 일을 신경 쓸 시간이 없을 것이다.인훈이 말했다.“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심 대표는 꼭 일주일에 한 번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어.”그 이유 역시 무척 충분했다.“내 공사팀이니 나도 당연히 책임을 져야죠. 모두 날 위해 일하는 사람이에요. 공사장의 사람들이든, 사무실의 직원이든 나에게 있어 모두 똑같고, 귀천이 없어요.”...“참, 너에게 말 한마디 전해 달라고 부탁했어.”“뭔데요?”“네가 이런 사소한 일로 자신을 찾아와서 너무 기쁘다고.”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인훈은 코웃음을 쳤다.“이 자식 지금 너 좋아하는 거 맞지? 아주 티를 내던데. 하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나와서 오히려 마음에 들어. 안목도 있고 담력도 있으니까. 그러나 정은아...”그는 말머리를 돌리더니 갑자기 정중하게 말했다.“남자들은 다 믿을 수 없으니까, 넌 쉽게 그 사람에게 속으면 안 돼.”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오빠, 안심해. 그럴 리 없어.”도겸과 사귄 그 6년, 정은은 이제야 가까스로 질곡에서 벗어났으니 또 어떻게 쉽게 다시 사
음식은 금방 올라온 것 같았는데, 아직도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게다가 모두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그녀는 의자를 당기며 자리에 앉았다.“오래 기다렸어?”인훈이 대답했다.“나도 방금 도착했어. 심 대표님이 가장 먼저 왔고.”음식도 현빈이 먼저 주문한 것이었다.그렇다, 오늘이 바로 세 사람의 첫 ‘회의’였다.현빈은 정은의 가방을 옷걸이에 건 다음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럼 우리 먹으면서 얘기할까? 음식 다 식겠다.”“좋아요.”세 사람은 젓가락을 움직였다.정은과 인훈은 전에 먹은 적이 있기 때문에 아주 편하게 먹었고, 현빈도 이 집 요리에 아주 잘 적응했다.‘하긴, 공사장 근처의 음식점에서 덮밥을 먹을 수 있었으니 이런 환경에 적응되지 못할 리가 없겠지?’인훈은 속으로 현빈을 칭찬했다.“에헴.”그는 신속하게 갈비 두 조각을 먹은 후, 젓가락을 내려놓고 목을 가다듬었다.“난 먼저 이번 주의 진도를 말할게... 지반은 이미 다 닦았고, 이제 건물을 짓기 시작했어. 다음 주에 기초를 완성할 것으로 예상돼.”“이렇게 빨리요?” 예상을 했었어도 정은은 이 말에 깜짝 놀랐다.인훈은 현빈을 바라보았다.“심 대표님의 두 공사팀 덕분이지.”일을 하기 시작해서야 인훈은 공사팀의 차이를 크게 깨달았다.솔직히 말해서, 인훈 자신이 데리고 있는 그 사람들보다, 현빈의 공사팀이 더욱 훌륭했다.그러니 공사 진도도 아주 빨리 따라잡았다.현빈은 고기를 집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천만에요.”“비용 결제는...”현빈이 말했다.“참, 마침 나도 이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한달에 한 번씩 계산하는 건 너무 번거로우니, 내가 먼저 공사팀의 월급을 지불할게요.”“소 사장님은 공사가 끝난 흐로 한꺼번에 나에게 결산해 주면 돼요. 안심해요, 장부는 우리 회사 재무팀이 알아서 할 거예요. 절대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예요.”인훈은 손을 흔들었다.“이렇게 말하면 섭섭하죠. 심 대표님은 큰 회사의 대표이니 우리의 푼돈을 탐낼 리가 있겠어요?”현빈은
도겸을 본 순간, 정은은 은근히 놀랐다.도겸은 사실 학교 근처에 있는 이런 작은 식당에 오길 좋아하지 않았다. 정은을 쫓아다닐 때, 두 사람 함께 와서 먹은 적이 있는 것 외에, 정식으로 사귄 다음, 도겸은 더 이상 이런 곳에 오지 않았다.그러나 이건 상관이 없었지만, 진정으로 정은을 놀라게 만든 것은 도겸이 지금 안고 있는 여자가 바로 심경혜였던 것이다.이 다정한 행동을 보니, 아마도 연인인 것 같다.‘두 사람은 언제 사귄 거지?’정은이 전 남자친구의 감정에 궁금한 게 아니라, 정상인으로서 이런 일을 마주칠 때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이런 상황이라면, 도겸이 아닌 다른 아는 사람이었어도 정은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결국 구경거리가 눈 앞에 있었으니, 호기심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경혜는 도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 정은을 본 순간, 그녀는 즉시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데리고 걸어왔다.“어머, 정은아.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뭐야? 나랑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것도 내 이름을 부르다니?’그러나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않는다고, 정은 역시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음.”그리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경혜는 미소가 약간 굳어졌다.“소개할게. 내 남자친구 강도겸이야.”말하면서 그녀는 애교를 부리듯 남자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이 사람은 내 동창인데, 소정은이라고 해요.”‘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내가 언제 누구냐고 물었어? 왜 갑자기 소개를 하는 거야? 어이가 없네.’“저기, 안에 빈 자리가 많은데.”그 뜻은 즉 저쪽에 가서 앉아도 되니 자신의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라는 것이었다.“풉.”현빈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도겸이 여자를 껴안고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부터, 현빈의 눈빛은 의미심장해졌다.이 생쇼를 묵묵히 지켜보려고 꾹 참았지만, 정은의 솔직한 발언에 현빈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에헴! 정은아, 그래도 강 대표님의 새 여자친구를 난처하게 하면 안 되지. 같이 먹어도 되잖아.”
정은은 잠시 멈칫하다 그제야 도겸이 자신과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서비대 근처에 맛이 좋은 한식당이 꽤 많으니, 이렇게 만나는 것도 정상이야. 생각지도 못했다고? 그건 말이 안 되지”경혜가 계속 ‘우연’이라고 말했을 때부터 정은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우연이라고? 학교 근처의 음식점에서 동창을 만나는 게 무슨 어려운 일이야? 왜 다들 이런 말로 인사를 하려는 건데? 정말 가식적이고 징그러워.’도겸이 물었다.“화났어?”정은은 영문을 몰랐다.도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날, 네가 말한 거 말이야, 나 정말 진지하게 고려해 봤어. 우리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네가 이미 그때의 추억 속에서 벗어난 이상, 나도 계속 제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아.”정은은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이 헤어진 후, 그녀는 처음으로 이렇게 진지하게 도겸을 훑어보았다.도겸은 웃으며 말했다.“의외라고 생각해? 1년이 넘었으니 나도 이제 납득을 해야겠지. 전에는 내가 환상을 품고 네 감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폐를 끼쳤잖아, 정말 미안해.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정은은 더욱 자세히 도겸을 관찰했다.그러나 도겸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솔직하고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할 거야. 전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해가 되네. 네 말이 맞아. 사람은 항상 앞을 보면서 나아가야 하지.”“너...”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는데, 자꾸만 이런 도겸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듣기엔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 같지만...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어... 마치 일부러 나에게 들려준 것처럼.’그러나 도겸의 목적이 뭔지, 어떤 속셈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정은과는 상관이 없으니까.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니, 정말 잘됐어. 그럼 네 미래가 더욱 순조롭길 바랄게.”도겸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 정은아.”“다시 시작하기로 했으니 앞으로 호칭을 바꾸는 게 좋을 거야.
도겸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게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현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나랑은 상관없지만 그냥 좀 궁금해서 그래. 네 새 여자친구 말이야... 참 신기해. 마침 서비대학교 학생이고, 또 마침 정은이와 같은 전공이라니. 여자 보는 안목이 참 기가 막히네.”도겸은 냉소를 지었다.“넌 왜 남의 여자 친구에게 이렇게 관심을 갖는 거지? 남의 여자 좋아하는 버릇 아직도 못 고쳤어?”“하하...” 현빈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래도 친구 사이였으니 너한테 관심 좀 가지면 안 되는 거야?”도겸은 가볍게 웃으며 차갑게 말했다.“관심? 날 떠보는 건 아니고? 이건 너 자신이 더 잘 알겠지.”“아, 이미 알아차렸어?”현빈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도겸을 한 번 훑어보았다.“네 새 여자친구 말이야, 너무 빨리 찾은 것 같아. 마치 고의로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허, 연기든 뭐든, 네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 비켜.”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웠고, 한동안 도겸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너 지금 일부러 정은이에게 보여 주려고 그 여자 찾은 거지?”도겸은 냉소를 지으며 변명하지 않았다.“내가 말했지, 네 마음대로 생각하라고.”현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전에 정은이를 만회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어? 왜 갑자기 다른 여자가 생긴 건데?”“지금 날 심문하는 거야?”“궁금해서 그래.”“난 네 호기심을 만족시킬 의무가 없어.”“넌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허... 당황한 거야? 심현빈, 너도 이런 날이 있구나! 내가 정은이를 포기하면 너에게 기회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니? 천만에! 난 단지 너보다 일찍 깨달았을 뿐이고, 또 마침 적합한 사람을 만났을 뿐이라고. 너의 그런 무의미한 질문, 이제 그만 집어치워.”“정말 포기한 거야? 그 심... 뭐였더라, 그 여자를 위해서?”도겸의 안색이 갑자기 차가워졌다.“너도 전과가 있는 사람이니, 난 너의 입에서 내 여자친구의 이름을 듣
매년 크리스마스 전야에 생물정보대학은 신입생 소개팅을 조직했다.대상은 새로 입학한 모든 미혼 대학원생이었다.처음에는 학생들이 사이좋게 지내며 학교 생활에 더욱 잘 융합되기 위한 것이었지만,매년 개최하면서 점차 공식적인 ‘소개팅’으로 변했다.솔직히 말하면,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찾기 위한 모임이었다.물론 이미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도 상대방을 데리고 참가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정은과 무관했다.그녀는 매일 수업을 마친 다음, 이웃 학교의 실험실에 달려가야 했기에, 밥을 먹을 때조차 실험 절차, 데이터 수집에 대해 생각했다.그러니 또 어떻게 시간을 이런 ‘소개팅'에 낭비할 수 있겠는가?그래서 초청장을 받았을 때, 정은은 영문을 몰랐다.특히 초청장에는 ‘소정은'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이건 더욱 이상했다.이번 MT는 신청해야 참가할 수 있었는데, 정은은 신청하지 않았다. 그럼 왜 정식 초청장을 받은 것일까?정은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고개를 돌리자, 민지가 까치발을 하고 소리 없이 실험대에서 내려와 살금살금 도망가려는 모습이 보였다.“민지야!”민지는 멈칫하더니 잠시 후 웃으며 몸을 돌렸다.“헤헤, 정은 언니, 무슨 일이세요?”“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식당이요.”“너 방금 밥 먹었잖아?”민지는 침을 삼켰다.“그 뭐지, 지금 또 배가 고파서 뭘 좀 더 먹어야겠어요.”‘그래, 간식 타임! 절대로 몰래 도망가는 게 아니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하지만 떠나기 전에 먼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설명해줄래?”그녀는 손에 든 초청장을 흔들었다.민지는 분명히 당황해지더니 눈알을 마구 굴렸다.‘정은 언니.”정은은 팔짱을 끼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애교 부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에헴! 정은 언니, 사실 저도 진작에 언니에게 이 좋은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어요...”“그래서?”“그래서...”민지는 이를 악물고 결심을 내린
“미안, 난 춤을 출 줄 몰라서.” 정은은 완곡하게 거절했다.남자는 실망을 안고 떠났다.이게 끝인 줄 알았는데, 한 명이 가자, 다른 사람이 계속 찾아올 줄이야.연이어 다섯 명의 남자를 거절한 후, 정은은 재빨리 민지를 끌고 구석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구석인 데다가 불빛이 어두워 사람들의 주목을 그리 받지 않았다.정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드디어 조용해졌네.’“정은 언니, 어쩜 인기가 이렇게 많은 거예요? 저도 언니랑 같이 춤을 추고 싶어졌네요. 헤헤.”“그럼 한 번 고려해보지.” 정은도 미소를 지었다.민지는 갑자기 턱을 들더니 가슴을 쳤다.“그 남자들 아마도 제가 부러워 죽을 거예요!”“그게 안 좋은 일이야?”“너무 좋죠.”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민지가 말했다.“저 먹을 거 좀 가지러 갈게요!”“그래.”정은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생수를 마셨는데, 정말 다른 사람과 소통할 마음이 없었고, 디저트와 음료에도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태블릿을 꺼내 논문을 보기 시작했다.이때 민지는 먹을 것 가득 들고 돌아왔다.‘어? 언니도 참. 이런 나 자신이 좀 민망한데.’위치가 너무 구석에 있어서인지, 아무도 정은 그들의 테이블에 와서 앉지 않았다.정말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이렇게 생각할수록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여기 사람 있어? 내가 앉아도 될까?“미안하지만, 우리...”민지는 원래 거절하려고 했다.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정은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선배님?! 선배님이 여긴 무슨 일로?”재석은 회색 양복을 입었는데, 검은색 외투를 벗은 다음 손에 들고 있었다.“내가 앉을 수 있다는 뜻이야?”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민지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반응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도 MT에 참가하러 오신 거예요?”“음.”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니... 오늘 신입생만 초대한 거 아닌가?’얼마 지나지 않아 MT가 시작되었고, 사
재석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진욱이 말했다.“잘 좀 봐. 초청장에 생명과학대학 신입생 MT라는 글이 적혀 있단 말이야! 학술 보고회가 아니라고!”“알아.”“알면서도 간다는 거야?”“가면 안 돼?”“헐! 너 정말 귀신에 홀렸구나... 잠깐만!”진욱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한 듯 다시 그 초청장을 바라보았다.“생명과학대학? 정은이가 있는 곳 아니야?”기기를 조절하던 재석은 잠시 멈칫했다.진욱은 갑자기 앞으로 다가오더니 두 눈을 가늘게 떴다.“조 교수, 지금 너무 수상한데! 귀신에 홀린 것보다 더 무섭다고! 정은이한테 반한 거야? 본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 넌 정은이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정은이는 그런 널 받아들일 수 있긴 한 거야?”연이은 질문에 재석은 말문이 막혔다....“교수님? 선배님!” 정은은 몇 번 소리쳤다.재석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뭐라고?”“이따 끝나고 집에 갈 거예요 아니면 실험실에 갈 거예요?”“집에.”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우리...”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옆에 멈춰 섰다.정은이 문득 고개를 들자, 마침 그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현빈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너도 여기에 있었어? 내가 앉아도 되지?” 말을 마치자, 현빈은 또 민지를 바라보았다.“자리 좀 옮겨줄래?”민지는 어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네.”말을 마치자, 주동적으로 옆으로 움직였다.현빈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그리고 정은의 옆에 앉았다.정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여긴 어쩐 일로 온 거죠?”현빈은 재석을 힐끗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이상해? 조 교수님도 여기에 계시잖아?”“교수님은 오프닝 하러 오셨는데, 당신은요?”현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난 스폰서.”학교의 많은 활동은 교외에 가서 투자를 끌어들였는데, 마침 MBA 재학 중인 재벌 2세 현빈이 학교의 돈줄이 되었다.그래서 초청장을 받았던 것이다.정은이 물었다.“심 대표님은 자신이 후원한 모든 행사에 직접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