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크리스마스 전야에 생물정보대학은 신입생 소개팅을 조직했다.대상은 새로 입학한 모든 미혼 대학원생이었다.처음에는 학생들이 사이좋게 지내며 학교 생활에 더욱 잘 융합되기 위한 것이었지만,매년 개최하면서 점차 공식적인 ‘소개팅’으로 변했다.솔직히 말하면,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찾기 위한 모임이었다.물론 이미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도 상대방을 데리고 참가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정은과 무관했다.그녀는 매일 수업을 마친 다음, 이웃 학교의 실험실에 달려가야 했기에, 밥을 먹을 때조차 실험 절차, 데이터 수집에 대해 생각했다.그러니 또 어떻게 시간을 이런 ‘소개팅'에 낭비할 수 있겠는가?그래서 초청장을 받았을 때, 정은은 영문을 몰랐다.특히 초청장에는 ‘소정은'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이건 더욱 이상했다.이번 MT는 신청해야 참가할 수 있었는데, 정은은 신청하지 않았다. 그럼 왜 정식 초청장을 받은 것일까?정은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고개를 돌리자, 민지가 까치발을 하고 소리 없이 실험대에서 내려와 살금살금 도망가려는 모습이 보였다.“민지야!”민지는 멈칫하더니 잠시 후 웃으며 몸을 돌렸다.“헤헤, 정은 언니, 무슨 일이세요?”“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식당이요.”“너 방금 밥 먹었잖아?”민지는 침을 삼켰다.“그 뭐지, 지금 또 배가 고파서 뭘 좀 더 먹어야겠어요.”‘그래, 간식 타임! 절대로 몰래 도망가는 게 아니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하지만 떠나기 전에 먼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설명해줄래?”그녀는 손에 든 초청장을 흔들었다.민지는 분명히 당황해지더니 눈알을 마구 굴렸다.‘정은 언니.”정은은 팔짱을 끼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애교 부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에헴! 정은 언니, 사실 저도 진작에 언니에게 이 좋은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어요...”“그래서?”“그래서...”민지는 이를 악물고 결심을 내린
“미안, 난 춤을 출 줄 몰라서.” 정은은 완곡하게 거절했다.남자는 실망을 안고 떠났다.이게 끝인 줄 알았는데, 한 명이 가자, 다른 사람이 계속 찾아올 줄이야.연이어 다섯 명의 남자를 거절한 후, 정은은 재빨리 민지를 끌고 구석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구석인 데다가 불빛이 어두워 사람들의 주목을 그리 받지 않았다.정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드디어 조용해졌네.’“정은 언니, 어쩜 인기가 이렇게 많은 거예요? 저도 언니랑 같이 춤을 추고 싶어졌네요. 헤헤.”“그럼 한 번 고려해보지.” 정은도 미소를 지었다.민지는 갑자기 턱을 들더니 가슴을 쳤다.“그 남자들 아마도 제가 부러워 죽을 거예요!”“그게 안 좋은 일이야?”“너무 좋죠.”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민지가 말했다.“저 먹을 거 좀 가지러 갈게요!”“그래.”정은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생수를 마셨는데, 정말 다른 사람과 소통할 마음이 없었고, 디저트와 음료에도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태블릿을 꺼내 논문을 보기 시작했다.이때 민지는 먹을 것 가득 들고 돌아왔다.‘어? 언니도 참. 이런 나 자신이 좀 민망한데.’위치가 너무 구석에 있어서인지, 아무도 정은 그들의 테이블에 와서 앉지 않았다.정말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이렇게 생각할수록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여기 사람 있어? 내가 앉아도 될까?“미안하지만, 우리...”민지는 원래 거절하려고 했다.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정은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선배님?! 선배님이 여긴 무슨 일로?”재석은 회색 양복을 입었는데, 검은색 외투를 벗은 다음 손에 들고 있었다.“내가 앉을 수 있다는 뜻이야?”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민지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반응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도 MT에 참가하러 오신 거예요?”“음.”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니... 오늘 신입생만 초대한 거 아닌가?’얼마 지나지 않아 MT가 시작되었고, 사
재석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진욱이 말했다.“잘 좀 봐. 초청장에 생명과학대학 신입생 MT라는 글이 적혀 있단 말이야! 학술 보고회가 아니라고!”“알아.”“알면서도 간다는 거야?”“가면 안 돼?”“헐! 너 정말 귀신에 홀렸구나... 잠깐만!”진욱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한 듯 다시 그 초청장을 바라보았다.“생명과학대학? 정은이가 있는 곳 아니야?”기기를 조절하던 재석은 잠시 멈칫했다.진욱은 갑자기 앞으로 다가오더니 두 눈을 가늘게 떴다.“조 교수, 지금 너무 수상한데! 귀신에 홀린 것보다 더 무섭다고! 정은이한테 반한 거야? 본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 넌 정은이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정은이는 그런 널 받아들일 수 있긴 한 거야?”연이은 질문에 재석은 말문이 막혔다....“교수님? 선배님!” 정은은 몇 번 소리쳤다.재석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뭐라고?”“이따 끝나고 집에 갈 거예요 아니면 실험실에 갈 거예요?”“집에.”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우리...”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옆에 멈춰 섰다.정은이 문득 고개를 들자, 마침 그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현빈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너도 여기에 있었어? 내가 앉아도 되지?” 말을 마치자, 현빈은 또 민지를 바라보았다.“자리 좀 옮겨줄래?”민지는 어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네.”말을 마치자, 주동적으로 옆으로 움직였다.현빈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그리고 정은의 옆에 앉았다.정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여긴 어쩐 일로 온 거죠?”현빈은 재석을 힐끗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이상해? 조 교수님도 여기에 계시잖아?”“교수님은 오프닝 하러 오셨는데, 당신은요?”현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난 스폰서.”학교의 많은 활동은 교외에 가서 투자를 끌어들였는데, 마침 MBA 재학 중인 재벌 2세 현빈이 학교의 돈줄이 되었다.그래서 초청장을 받았던 것이다.정은이 물었다.“심 대표님은 자신이 후원한 모든 행사에 직접
박수와 환호 소리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는 한가운데 있는 탁자 위에 멈추었고, 이어서 옆에 앉아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비추었다.사회자가 감탄을 했다.“어머, 커플인 것 같은데! 두 분 자기소개 좀 해주실래요?”경혜는 일어나서 건네준 마이크를 받았다.“안녕하세요, 생물대학원의 심경혜입니다.”“옆에 있는 그 잘생긴 분은요? 자기소개 하지 않으실래요?”도겸은 움직이지 않았고, 얼굴에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경혜는 웃으며 말을 이어받았다.“제가 대신할게요. 제 남자친구 강도겸이라고 하는데, 저희 학교 학생이 아니에요. 오늘 특별히 저와 같이 온 거예요.”“어머!” 경혜가 말을 마친 순간, 현장의 사람들은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오늘 저녁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싱글이었고, 이 기회를 틈타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를 찾으려고 했다.그러니 즉석에서 애정을 과시하는 이런 행위에 그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었다.질투가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저 남자는 너무 좋겠다!”“경혜는 우리 대학원의 여신이기도 하잖아. 우리는 아직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저 사람에게 빼앗겼다니!”“그러게! 가뜩이나 여자 학생이 적은데, 교외의 사람이 덕을 봤다니, 쯧쯧...”경혜는 평소에 말수가 적은 데다가,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아 모두들 농담을 하며 자신의 부러움을 드러냈다.도겸은 표정이 담담했는데, 토론의 중심에 있어도 여전히 태연자약했다.그러나 경혜는 잘 알고 있었다. 도겸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좋고 나쁨을 막론하고, 그는 이런 일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다고 느낀 것이었다.도겸의 마음은 확실히 여기에 있지 않았다. 그는 진작에 정은이 있는 그 구석을 훑어보고 있었다.정은이 민지와 함께 들어왔을 때, 남학생이 그녀에게 거절당했을 때, 재석과 현빈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정은을 찾아갔을 때...도겸은 정은의 모든 동작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이 순간 역시 그랬다.정은은 민지와 과자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고, 현장의 소란과 농담
사회자는 즉시 현빈에게 관심을 가졌다.“그럼 제가 현장의 모든 여자아이들, 그리고 저 자신을 포함하여 한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대표님?”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에헴! 실례지만 지금 여자친구 있으세요?”“아직은 없어요.”“그럼 저희에게 기회가 있을까요?” 사회자도 대담하게 질문했다.“아니요.”“왜요?”“좋아하는 사람 있거든요.”말하면서 현빈은 웃음을 머금은 눈빛을 정은에게 돌렸다.재석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손에 든 생수병은 어느새 쭈글쭈글 해졌다.민지는 고백을 하고 있는 현빈을 보다가 또 아무런 반응이 없는 정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응, 맛있네...’현빈은 실망한 사람들의 탄식을 무시하고 마이크를 돌려준 다음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곁눈질로 정은을 주시했다. 그녀는 지금 케이크를 먹고 있었는데, 볼이 불룩불룩한 해서 마치 작은 다람쥐와 같았다.그 자신조차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난 왜 한 여자에게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나로 하여금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고, 이렇게 반하게 하고 이렇게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여자는 정은이 처음이야.’봐도 봐도 계속 보고 싶고, 어느 순간부터 현빈은 평생 정은을 그렇게 바라만 봐도 행복하다고 느꼈다.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심 대표님 오늘 밤 정말 흥이 많네요.”“그래요, 조 교수님도 그럭저럭인 것 같은데.”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의 눈빛에 살기가 넘쳤다.“에헴!” 민지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정은 언니, 저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같이 가줄래요?”“좋아.” 정은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 테이블과 멀리 떨어져서야 정은은 한숨을 돌렸다.민지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정은 언니, 지금 좀 홀가분해졌어요?”“민지야, 살려줘서 고마워.”“헤헤, 천만에요!”‘언니와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졌으니, 이제 두 사람더러 싸우라고 해.’...스포트라이트 코너가
도겸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잠시 후, 도겸은 경혜를 향해 손을 내밀더니 자신과 춤을 춰달라고 초청했다.경혜는 웃으며 자신의 손을 위에 놓았다.두 사람은 나란히 무도장으로 들어갔다.민지와 화장실에서 돌아온 정은은 마침 이 장면을 보았다.선남선녀가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는 이 장면을.‘보기 좋네.’정은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때, 그녀의 앞에 두 손이 나타났다.하나는 왼쪽, 하나는 오른쪽.현빈과 재석이 동시에 정은을 초청했던 것이다.민지는 놀라서 뒤로 물러나더니 이곳을 빠져나왔다.‘이게 뭐야... 남자들이 한 여자를 위해서 다투고 있잖아?’현빈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정은아, 나에게 이런 영광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춤을 추지 않을래?”재석도 웃으며 말했다.“나도 심 대표님과 같은 생각을 했는데.”현빈이 고개를 돌리자, 재석은 직시하며 피하지 않았다.살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정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이 두 사람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거야? 갑자기 왜 이래?’그녀는 고개를 돌려 민지를 찾으려 했다.뒤에 있던 민지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정은 언니, 이번에는 정말 언니를 도울 수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처음에 사람들은 이 빛이 어둡고 구석진 곳에 많은 관심을 돌리지 않았지만, 구경꾼들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아무리 깊이 숨어도 그들은 냄새를 맡으며 찾아올 수 있었다.더군다나 이것도 숨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헐, 이게 무슨 상황이야? 조 교수님과 심 대표님?!”“지금 누굴 초청하고 있는 거지? 어디 보자, 누가 이렇게 매력적인지... 아, 소정은이구나, 그럼 하나도 이상하지 않네.”예쁘게 생긴 데다가 1학년이지만 학술지 Science가 그녀의 논문을 올렸으니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게다가 정은은 학생들이 뽑은 ‘7대 퀸카'중 한 명이었다.“쯧쯧, 재밌네! 정말 재밌어!”“드라마도 이렇게 못 찍겠지?”“이야, 이게 연애소설보다 더 재밌네!”
“수아야?”태민이 몇 번이나 불렀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자, 수아는 그제야 반응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뭘 보고 있냐고 물었는데.”“아무것도 아니에요.”수아는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태민의 손을 뿌리쳤다.“조 교수님에게 볼 일이 좀 있어서요.”말을 마치자 수아는 재석을 향해 달려갔다.태민은 자신의 손, 그리고 수아의 다급한 뒷모습을 보며 의혹의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수아가 이런 활동에 흥미를 가질 줄은 몰랐다.그러나 그녀가 오고 싶은 이상, 태민도 같이 와준 것이다.그렇다, 태민은 재석의 실험실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서도 교수님으로 일하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초청장을 보았을 때, 수아는 햇빛보다 더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태민은 수아가 이렇게 웃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어, 바로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손태민, 너 이번에 정말 잘했어!’“교수님, 잠깐만요!”재석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고, 수아가 웃으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무슨 일 있어?”“교수님.” 수아는 일부러 농담을 했다.“정은은 일 때문에 바쁘다고 떠났잖아요. 그럼 제가 교수님과 함께 춤을 추는 건 어때요?”재석은 눈빛이 어두워졌다.“아니야.”수아는 웃음이 굳어졌고, 곧 일부러 밝게 웃었다.“교수님도 참, 농담일 뿐이니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하지 마세요. 실험실의 그 노화 설비는 언제 교체할 수 있는지 묻고 싶어서 왔어요. 전 교수님은 여러 번 불평하셨잖아요.”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이틀 전에 난 이미 단체 메일을 보냈는데, 그 안에는 노화 설비의 처리와 새로운 설비의 가격, 설치 시간 등에 대해 모두 설명을 했어.”수아는 표정이 굳어졌다.“그, 그래요? 제가 주의를 하지 않은 것 같아요... 죄송해요.”“실험실 규정 제2조, 업무와 관련된 메일을 하루에 한 번씩 체크하기.”“아, 교수님, 저는...”“연구원으로서 네가 연구에 더 많은 마음을 기울였으면 좋겠어.”수아는 눈을 드리웠다.“알
재석은 떠나자, 수아도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저 집에 갈게요.”말을 마치자 태민을 버리고 혼자 떠났다.태민은 영문을 몰랐는데, 입을 벌리고 쫓아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수아를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다.그러나 교수님 대표로서 오늘 밤 태민에게 다른 임무가 있었으니 그는 몸을 뺄 수가 없었다.수아는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었고,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태민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태민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분명히 두 사람은 이미 사귀는 사이였지만, 태민은 항상 수아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수아의 마음을 알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두 사람은 여태껏 사귀면서 손을 잡는 것 외에 키스조차 한 적이 없었다.그는 실의에 빠져 고개를 떨구었다.이때 누군가 갑자기 태민과 부딪쳤다.“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민지는 한 손에 접시를 들고 있었고, 안에 과자 5개 정도 들어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 음료수를 들고 있었는데, 방금 태민과 부딪쳤기 때문에 좀 쏟아졌다.그녀는 빨리 사과했다.태민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괜찮아.”말하면서 휴지를 꺼내 건네주었다.“좀 닦아, 음료수가 다 쏟아졌네.”“앗! 감사합니다!” 민지는 얼른 받으려 했지만, 자신의 두 손에 모두 물건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갑자기 난감해했다.태민은 민지의 궁핍함을 알아차렸다.“아니면 내가 접시 들어줄까?”“어? 괜찮으세요?”“그럼.” 태민이 접시를 받았다.민지는 손을 닦았다.“방금 정말 죄송해요. 전 성격이 너무 털털해서...”“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방금 딴 생각을 한 데다가 또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길을 주의하지 않았어.”“제가 사과로 간식 하나 드릴게요.”태민은 그제야 접시에 망고 무스, 두리안 케이크, 나폴레옹 케이크 등 여러 가지 디저트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좋아.” 그도 사양하지 않고 웃으며 그 두리안 케이크를 골랐다.민지는 아쉬움을 드러냈다.“왜 그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