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이 말을 듣고 인훈을 위해 기뻐했다.“그래, 그럼 주문할게!”“응!”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은은 결국 채소 두 개에 국 하나만 시켰다.“이게 다야?”“응, 다야.”“안돼, 요리 두 개 더 추가해.”“아니야! 두 사람 그렇게 많이 못 먹어! 오빠, 오늘 돈 좀 쓰려고 결심한 거야?”‘자발적으로 바가지를 쓰다니.’인훈은 웃으며 말했다.“가끔 여동생이 바가지를 씌워도 나쁠 건 없지.”“정말 필요 없어, 낭비하지 마.”“좋아, 네 말 들을게.”인훈은 맥주 두 캔을 주문했다.곧 음식이 올라왔고, 남매는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요즘 학교는 좀 어때? 적응했어? 내 번호는 저장했고? 도움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전화해.”같은 타지에 있으면서 남매는 당연히 서로를 도와주며 보살펴줘야 했다.“그럭저럭이야. 비록 전에 문제가 좀 생겼지만 지금은 다 해결됐어.”“그럼 됐어, 자, 얼른 밥 먹어...”인훈은 웃으며 말했다.중간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정은아, 너 먼저 먹어. 난 나가서 전화 좀 받을게.”“좋아.”5분 후, 인훈이 돌아왔고, 다시 맞은편에 앉았다.정은은 단번에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오빠, 오빠도 좀 먹어.”“어! 그래!”인훈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미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봐도 억지웃음이었다.정은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빠, 무슨 일이야?”이 말이 나오자, 키가 1미터 80센티미터 넘는 사나이는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혔다.“사실 나는 정말 이 사장님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니깐. 분명히 이미 얘기 끝낸 프로젝트에 계약까지 체결해면서 그렇게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였는데, 왜 갑자기 번복을 하는 거지?!”“그 사람들은 계약정신이 뭔지도 모르는 건가? 다른 사람의 노동 성과를 존중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아마도 나 자신의 문제겠지. 잔혹한 경쟁에 적응하지 못했고, 시장 파악도 잘 못했어...”처음에는 울분이 넘쳤지만, 마지막에는 낙담만 느꼈다.“상대가 계
인훈도 대학을 나왔으니, 정상이라면 이런 기본상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특히 계약처럼 중요한 일은 더 그랬다.“요즘 너무 바쁜 데다가, 이건 또 새로운 프로젝트거든. 참고할 만한 계약 템플릿이 없어서 계약을 작성할 때 계약 위반 조항을 함께 넣는 것을 잊어버렸어.”인훈은 상대방에게 당한 후에도 여전히 반응하지 못했다.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계약정신이 없고, 남의 노동 성과를 존중하지 않는다’였다니. 이것은 매우 바보 같았다. 아니면, 무척 무던했다.아무튼 정은은 가장 먼저 배상금을 얼마 받을 수 있나에 대해 생각했다.“계약서 같은 것도 오빠가 직접 써야 돼?”인훈은 더욱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원래는 아닌데... 전에는 이것들 모두 동업자들이 관리하고 있었어. 난 공사장의 일만 책임졌고. 그러나 이주 전에, 그 사람은 회사에서 나가겠다고 했어...”인훈 이 어수룩한 사람은 만류해도 성과가 없어, 이를 악물고 회사의 가뜩이나 넉넉하지 못한 현금에서 대부분을 뽑아내어 당초에 투입한 돈을 그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경영 상황에 따라 손실을 계산하지 않은 거야?”“어? 손실을 계산해야 돼?”“그렇지 않으면?” 정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당초에 두 사람 함께 회사를 차렸으니, 돈을 벌면 두 사람 함께 나눠야 하지 않겠어?”“그럼!”“그럼 같은 도리로, 손실이 생기면 두 사람 공동으로 부담해야 하지 않겠어?”현재 회사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아 손실이 있는 게 뻔했으니, 어떻게 회사를 떠난 후에 자신이 낸 돈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요구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주식을 조금 샀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은 손해 봐야 했다. 당장 팔아도 여전히 손해를 부담해야 했다.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다.“오빠, 그렇다면, 나도 오빠와 같이 일하고 싶어. 어차피 손해를 보지 않을 장사잖아.”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오빠는 이걸 계산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다만 돈 때문에 그 사람과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그런데 정은아, 이걸 왜 물어보는 거야?”정은은 두 눈에서 빛을 발했다.“마침 나한테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오빠는 어떡해 생각해?!”인훈은 멍해졌다.“무, 무슨 프로젝트?”“스마트 실험실. 하지만 토지 건설까지 함께 해줘야 돼.”그렇다. 정은이 원하는 것은 전통적인 실험실이 아니라 고도로 지능화된 실험실이었다.두 사람은 아주 급하게 밥을 먹었다.인훈은 정은의 수요를 듣고, 지체없이 떠나 회사로 돌아가 기획안을 쓰려 했다.그리고 정은은 그가 간 후, 바로 다른 두 명의 ‘파트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민지와 서준은 자연히 두 손 들어 찬성했다.현재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그날 저녁, 정은은 집에 돌아와 더욱 상세한 요구를 이메일로 정리하여 인훈에게 보냈다.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이튿날 아침, 인훈에게서 전화가 왔다.[정은아, 아니다, 소 사장님, 이 프로젝트는 내가 맡을게! 지금부터 넌 나의 존귀한 고객이자 하나님이야!]“풉...”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오빠, 그 정도는 아니야, 왜 그래...”[아니야. 이것도 규정이야! 아무튼 앞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제기해. 날 오빠라 생각하지 말고, 단지 네 일을 처리해줄 을이라 생각해. 넌 갑이잖아.]정은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나 인훈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공적인 일은 공정하게 처리하며, 그 어떠한 사적인 감정도 섞지 않았다.“오빠, 왜 예산이 얼만지 물어보지도 않고, 가격에 대해 얘기도 하지 않는 거야? 밑지는 장사면 어떡하려고?”인훈은 너무나도 성실하고 단순했다.인훈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왜?”[우선, 넌 분명히 나로 하여금 손해를 보게 하지 않을 거야. 둘째, 돈을 벌지 않더라도 널 도울 수 있고, 동시에 내 회사를 계속 경영하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오빠...”정은은 한숨을 쉬었다.“앞으로 너무 실속 있게 행동하지 마. 쉽게 손해 볼 수 있으니까.”‘오빠는 따지기
남자는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겼고, 수염이 덥수룩해서 마치 하룻밤 사이에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그는 심지어 먼저 밥을 먹기도 전에 서류 한 부를 내밀었다.“정은아, 이건 초보적인 스마트 실험실 건설 계획이야! 어젯밤 나에게 보낸 수요와 결합하여 이미 보충했어. 이 몇 군데는 더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이 밀폐된 문 말이야.”“그곳은 생물실험실이기 때문에 일부 유해미생물이나 위험한 세균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어. 대문 재질은 아래의 이 몇 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해...”“나는 이미 다른 차원에 따라 그들을 비교하고 분석했는데, 종합적으로 볼 때 이 GFRT 신형 재질이 가장 좋은 것 같아. 밀봉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가소성도 매우 강하거든...”짧디짧은 하룻밤사이에 인훈은 실험실의 초기형태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디테일까지도 아주 완벽하게 보완했다.그리고 이렇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실험실 관련 건설 규범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했다.정은은 눈을 깜박였다.“오빠, 어젯밤에 보충 수업이라도 한 거야?”“크험...”인훈은 가볍게 기침했다.“임시로 공부 좀 했고, 또 이 방면의 전문가에게 가르침을 청했어.”그러나 이것은 가장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정말 정은을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내가 조사해 봤는데, 생물 실험실은 실험실에서 처리하는 미생물 및 그 독소의 위해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야 해.”“기존 국가 표준에 따르면 총 P1, P2, P3, P4 네 개의 등급이 있어. 정은아, 나에게 대담한 생각이 하나 있는데.”“뭔데?”“이 네 가지 등급은 각각 네 가지 방호 규범에 대응해. 스마트 실험실인 이상... 우리는 이 네 가지 다른 규범 표준에 대해 네 가지 심지어 더 많은 실험실 모델을 설정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이렇게 되면 하나의 실험실은 N개의 실험실과 같았다.지능형 통제로 전환하면, 심지어 인건비도 필요하지 않았다.정은의 두 눈에서 빛을 발했다.“이뤄질 수 있을까?”“가능성이 커.”
알만한 사람들은 소정은이 강도겸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은 자신의 생활도, 공간도 없이, 하루 24시간 강도겸을 중심으로 돌아갔다.매번 이별 후 사흘이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재회를 청했다. 누구나 이별이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정은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도겸이 새로운 연인을 안고 들어올 때, 방안은 오묘한 정적이 5초간 흘렀다. 그러자 정은은 귤을 까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왜 다들 말이 없어? 나를 왜 봐?”“정은아.”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도겸은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 노골적이고도 태연했다.“생일 축하해, 선우야.”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일인 선우를 생각하며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화장실 좀 다녀올게.”문을 닫을 때, 정은은 안에서 이미 대화가 시작된 것을 들었다.“형, 정은이 여기 있잖아요. 미리 얘기했는데 왜 여자를 데려왔어요?”“맞아! 도겸아, 이번에는 너무했어.”“신경 쓰지 마.” 도겸은 여자의 허리를 매만지며 담배를 피웠다. 흰 연기 속에서 미소 짓는 모습이 마치 세상을 게임처럼 여기는 방탕한 사람 같았다. 남은 대화는 문이 닫혀서 정은은 듣지 못했다. 정은은 침착하게 화장실에서 나와 화장을 고치며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정말 비참하군.”비참한 삶. 정은은 깊이 심호흡하며 결심했지만, 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정은은 참을 수 없이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도겸은 여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었고, 타액이 두 사람 사이에서 티슈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웃으며 소란을 피웠다.“역시 도겸이네! 제대로 놀 줄 알아!”“분위기 끝내주네, 한 번 더!”정은의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다. 이 사람이 자신이 6년간 사랑한 남자라니. 지금, 이 순간 그저 헛웃음만이 났다.“야, 그만해.” 누군가가 작게 경고하며 문 쪽을 가리키자, 모두가 일제히 그쪽을 보았다.“정은, 돌아왔네? 이거 다 장난이야, 신경
식탁 쪽.“왜 죽이 없죠?”“보양식 죽 말이죠?”“보양식 죽?”“네, 정은 아가씨가 자주 끓여준, 찹쌀과 표고버섯, 황태, 대추를 함께 끓인 그 죽 말씀하시는 거죠?”“아이고, 그거 준비하려면 표고버섯, 황태랑 대추만이라 해도 전날에 준비를 해놔야 해요.”“그리고 불 조절이 특히 중요해요. 저는 정은 아가씨처럼 인내심이 없어서 계속 불을 볼 수 없어요. 제대로 끓여내지 못해요.”“그럼 고기 소스 좀 가져다줘요.”“그래요. 도련님.”“맛이 이상한데요?” 도겸은 병을 훑어보았다. “포장도 다르네요.”“도련님이 자주 먹던 그건 이미 다 먹어서 이제는 이거밖에 없어요.”“나중에 마트 가서 두 병 사다 놔요.”“못 구해요.”왕순자는 약간 난처하게 웃었다. “그것도 정은 아가씨가 직접 만든 거라서, 저는 못 해요.”쿵! 도겸은 깜짝 놀랐다.“음? 도련님, 식사 안 하세요?”“네.”왕순자는 도겸이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갑자기 왜 화를 내시는 거지?’...“게으름뱅이! 일어나!”정은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뜨지 않았다. “시끄러워, 조금만 더 잘래.”조수민은 화장을 마치고 가방을 고르고 있었다. “곧 8시야, 너 강도겸한테 아침 안 해줘도 돼?”예전에도 정은은 가끔 외박하곤 했지만, 새벽에는 돌아갔다. 도겸의 속을 위해 보양식 죽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수민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겸이 다친 것도 아니고, 휴대폰으로 배달을 시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정말 사람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쓸데없는 습관이었다.수민이 계속해서 부르자 정은은 잠결에 손을 흔들었다. “안 해줘도 돼, 헤어졌어.”“오, 이번에는 며칠 동안 헤어지려고?”수민의 말에 정은은 할 말을 잃었다.“그래, 그럼 더 자. 아침 식사는 탁자 위에 있어. 나는 일하러 간다. 그리고 나 저녁 약속이 있어서 저녁은 준비하지 마.”“됐다. 너 어차피 다시 돌아갈 거지? 그럼 나갈 때 베란다 창문 좀 닫아줘.”정은
“자리 찾기 힘든가? 내가 나가서 도와줄까요? 음?”도겸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챈 선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 형, 누나... 아직 안 돌아왔어요?” 이미 3시간이 넘었고 도겸은 두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돌아와? 이별이 장난이야?” 그 말을 마치고 도겸은 선우를 지나 소파에 앉았고, 선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헤어진 거야?’하지만 곧 선우는 머리를 흔들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겸이라면 이별을 말한 뒤 다시는 붙잡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정은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 모든 여자가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어도, 정은은 그렇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도겸아, 왜 혼자야?” 고동건이 재미있는 듯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기한 3시간은 이미 지났고, 하루가 다 갔어.”그러자 도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기에서 졌으니 벌칙을 받아야지. 벌칙은 뭐야?”진심으로 하는 말에 동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다른 거 해보자. 술 마시는 거 말고.”“뭔데?”“정은이한테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거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라고.”동건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고 선우는 도겸의 전화로 정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차단된 건가?’ 도겸은 잠시 멍해졌다.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 아마도 진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걸 거예요. 정은 누나가 형을 차단할 리가 없잖아요.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선우는 말하며 자신도 민망해졌고 동건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어쩌면 정은이 이번에는 진짜일지도 몰라.”그러자 도겸은 코웃음을 쳤다. “이별이 진짜지 그럼 가짜야? 이별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이런 내기 다시는 하지 말자. 앞으로 누가 소정은에 대한 말을 꺼내면, 친구로 지낼 수 없을
어젯밤엔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새벽이 되자 선우가 또 한잔하자고 했고, 강도겸은 운전기사가 이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바로 잠에 빠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려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이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구나.’몽롱한 상태에서 도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을 뜨자, 위에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으으...” 도겸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속 쓰려! 소정은!”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도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은은 참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버텼던 그녀였다.‘좋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 근데… 약은 어디에 뒀지?’도겸은 거실로 나가 약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약상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왕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장약을 찾으시는 건가요? 약상자에 넣어둔 걸로 알고 있어요.]도겸은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약상자가 어디에 있죠?”[옷장 서랍 안에 있어요. 정은 아가씨가 도련님이 술을 마신 후 아침이면 위가 아플 걸 알고 쉽게 찾을 수 있게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보세요? 도련님? 아직 듣고 계시죠? 전화 끊으신 건 아니죠?]도겸은 옷장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자주 먹던 위장약이 다섯 통이나 들어 있었다. 약을 삼키고 나니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도겸은 갑자기 멈춰 섰다. 서랍 속에 보석과 명품 가방은 여전히 있었지만, 정은의 모든 신분증, 여권, 학위증, 졸업증 등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구석에 쌓여 있던 캐리어 중 하나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좋아, 좋네, 좋아...”도겸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너무 자유롭게 둬도 안 돼. 자유를 줄수록 더 고집을 부리니까.’
남자는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겼고, 수염이 덥수룩해서 마치 하룻밤 사이에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그는 심지어 먼저 밥을 먹기도 전에 서류 한 부를 내밀었다.“정은아, 이건 초보적인 스마트 실험실 건설 계획이야! 어젯밤 나에게 보낸 수요와 결합하여 이미 보충했어. 이 몇 군데는 더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이 밀폐된 문 말이야.”“그곳은 생물실험실이기 때문에 일부 유해미생물이나 위험한 세균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어. 대문 재질은 아래의 이 몇 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해...”“나는 이미 다른 차원에 따라 그들을 비교하고 분석했는데, 종합적으로 볼 때 이 GFRT 신형 재질이 가장 좋은 것 같아. 밀봉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가소성도 매우 강하거든...”짧디짧은 하룻밤사이에 인훈은 실험실의 초기형태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디테일까지도 아주 완벽하게 보완했다.그리고 이렇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실험실 관련 건설 규범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했다.정은은 눈을 깜박였다.“오빠, 어젯밤에 보충 수업이라도 한 거야?”“크험...”인훈은 가볍게 기침했다.“임시로 공부 좀 했고, 또 이 방면의 전문가에게 가르침을 청했어.”그러나 이것은 가장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정말 정은을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내가 조사해 봤는데, 생물 실험실은 실험실에서 처리하는 미생물 및 그 독소의 위해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야 해.”“기존 국가 표준에 따르면 총 P1, P2, P3, P4 네 개의 등급이 있어. 정은아, 나에게 대담한 생각이 하나 있는데.”“뭔데?”“이 네 가지 등급은 각각 네 가지 방호 규범에 대응해. 스마트 실험실인 이상... 우리는 이 네 가지 다른 규범 표준에 대해 네 가지 심지어 더 많은 실험실 모델을 설정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이렇게 되면 하나의 실험실은 N개의 실험실과 같았다.지능형 통제로 전환하면, 심지어 인건비도 필요하지 않았다.정은의 두 눈에서 빛을 발했다.“이뤄질 수 있을까?”“가능성이 커.”
“그런데 정은아, 이걸 왜 물어보는 거야?”정은은 두 눈에서 빛을 발했다.“마침 나한테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오빠는 어떡해 생각해?!”인훈은 멍해졌다.“무, 무슨 프로젝트?”“스마트 실험실. 하지만 토지 건설까지 함께 해줘야 돼.”그렇다. 정은이 원하는 것은 전통적인 실험실이 아니라 고도로 지능화된 실험실이었다.두 사람은 아주 급하게 밥을 먹었다.인훈은 정은의 수요를 듣고, 지체없이 떠나 회사로 돌아가 기획안을 쓰려 했다.그리고 정은은 그가 간 후, 바로 다른 두 명의 ‘파트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민지와 서준은 자연히 두 손 들어 찬성했다.현재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그날 저녁, 정은은 집에 돌아와 더욱 상세한 요구를 이메일로 정리하여 인훈에게 보냈다.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이튿날 아침, 인훈에게서 전화가 왔다.[정은아, 아니다, 소 사장님, 이 프로젝트는 내가 맡을게! 지금부터 넌 나의 존귀한 고객이자 하나님이야!]“풉...”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오빠, 그 정도는 아니야, 왜 그래...”[아니야. 이것도 규정이야! 아무튼 앞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제기해. 날 오빠라 생각하지 말고, 단지 네 일을 처리해줄 을이라 생각해. 넌 갑이잖아.]정은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나 인훈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공적인 일은 공정하게 처리하며, 그 어떠한 사적인 감정도 섞지 않았다.“오빠, 왜 예산이 얼만지 물어보지도 않고, 가격에 대해 얘기도 하지 않는 거야? 밑지는 장사면 어떡하려고?”인훈은 너무나도 성실하고 단순했다.인훈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왜?”[우선, 넌 분명히 나로 하여금 손해를 보게 하지 않을 거야. 둘째, 돈을 벌지 않더라도 널 도울 수 있고, 동시에 내 회사를 계속 경영하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오빠...”정은은 한숨을 쉬었다.“앞으로 너무 실속 있게 행동하지 마. 쉽게 손해 볼 수 있으니까.”‘오빠는 따지기
인훈도 대학을 나왔으니, 정상이라면 이런 기본상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특히 계약처럼 중요한 일은 더 그랬다.“요즘 너무 바쁜 데다가, 이건 또 새로운 프로젝트거든. 참고할 만한 계약 템플릿이 없어서 계약을 작성할 때 계약 위반 조항을 함께 넣는 것을 잊어버렸어.”인훈은 상대방에게 당한 후에도 여전히 반응하지 못했다.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계약정신이 없고, 남의 노동 성과를 존중하지 않는다’였다니. 이것은 매우 바보 같았다. 아니면, 무척 무던했다.아무튼 정은은 가장 먼저 배상금을 얼마 받을 수 있나에 대해 생각했다.“계약서 같은 것도 오빠가 직접 써야 돼?”인훈은 더욱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원래는 아닌데... 전에는 이것들 모두 동업자들이 관리하고 있었어. 난 공사장의 일만 책임졌고. 그러나 이주 전에, 그 사람은 회사에서 나가겠다고 했어...”인훈 이 어수룩한 사람은 만류해도 성과가 없어, 이를 악물고 회사의 가뜩이나 넉넉하지 못한 현금에서 대부분을 뽑아내어 당초에 투입한 돈을 그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경영 상황에 따라 손실을 계산하지 않은 거야?”“어? 손실을 계산해야 돼?”“그렇지 않으면?” 정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당초에 두 사람 함께 회사를 차렸으니, 돈을 벌면 두 사람 함께 나눠야 하지 않겠어?”“그럼!”“그럼 같은 도리로, 손실이 생기면 두 사람 공동으로 부담해야 하지 않겠어?”현재 회사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아 손실이 있는 게 뻔했으니, 어떻게 회사를 떠난 후에 자신이 낸 돈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요구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주식을 조금 샀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은 손해 봐야 했다. 당장 팔아도 여전히 손해를 부담해야 했다.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다.“오빠, 그렇다면, 나도 오빠와 같이 일하고 싶어. 어차피 손해를 보지 않을 장사잖아.”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오빠는 이걸 계산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다만 돈 때문에 그 사람과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정은은 이 말을 듣고 인훈을 위해 기뻐했다.“그래, 그럼 주문할게!”“응!”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은은 결국 채소 두 개에 국 하나만 시켰다.“이게 다야?”“응, 다야.”“안돼, 요리 두 개 더 추가해.”“아니야! 두 사람 그렇게 많이 못 먹어! 오빠, 오늘 돈 좀 쓰려고 결심한 거야?”‘자발적으로 바가지를 쓰다니.’인훈은 웃으며 말했다.“가끔 여동생이 바가지를 씌워도 나쁠 건 없지.”“정말 필요 없어, 낭비하지 마.”“좋아, 네 말 들을게.”인훈은 맥주 두 캔을 주문했다.곧 음식이 올라왔고, 남매는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요즘 학교는 좀 어때? 적응했어? 내 번호는 저장했고? 도움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전화해.”같은 타지에 있으면서 남매는 당연히 서로를 도와주며 보살펴줘야 했다.“그럭저럭이야. 비록 전에 문제가 좀 생겼지만 지금은 다 해결됐어.”“그럼 됐어, 자, 얼른 밥 먹어...”인훈은 웃으며 말했다.중간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정은아, 너 먼저 먹어. 난 나가서 전화 좀 받을게.”“좋아.”5분 후, 인훈이 돌아왔고, 다시 맞은편에 앉았다.정은은 단번에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오빠, 오빠도 좀 먹어.”“어! 그래!”인훈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미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봐도 억지웃음이었다.정은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빠, 무슨 일이야?”이 말이 나오자, 키가 1미터 80센티미터 넘는 사나이는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혔다.“사실 나는 정말 이 사장님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니깐. 분명히 이미 얘기 끝낸 프로젝트에 계약까지 체결해면서 그렇게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였는데, 왜 갑자기 번복을 하는 거지?!”“그 사람들은 계약정신이 뭔지도 모르는 건가? 다른 사람의 노동 성과를 존중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아마도 나 자신의 문제겠지. 잔혹한 경쟁에 적응하지 못했고, 시장 파악도 잘 못했어...”처음에는 울분이 넘쳤지만, 마지막에는 낙담만 느꼈다.“상대가 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실험실은 건축회사의 자질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아서 일반 집을 짓는 것과 달라.”“게다가 실험실이 완공된 이후의 보안 시스템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건설 회사에 있어 아주 어려워.”세 사람은 커피숍에 모였다.정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자신이 장악한 소식을 다른 두 사람에게 공유했다.민지 앞에는 티라미수 2인분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열심히 먹고 있었고, 동시에 귀를 기울였다.“저희 아버지는 많은 청부업자 아저씨를 알고 있어요. J시 이쪽에 업무가 있는 분들도 있고요. 그러나 어제 제가 물어봤는데, 그들은 집만 지을 줄 알고 실험실을 지을 줄 모른데요.”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전문적인 일은 그래도 전문적인 사람에게 맡겨야 돼.”서준이 말했다.“그리고 건축회사와 소통하는 디자이너를 따로 청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쌍방의 요구가 잘못 전달되어 최종 효과가 떨어질 수 있어요.”그후 며칠간 세 사람은 모두 쉬지 않았다. 수업을 제외하고, 남은 시간은 기본적으로 밖에서 돌아다녔다.업계에서 괜찮은 건축회사 몇 곳을 자세히 알아보니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디자이너가 실험실 건설을 모르거나 예산이 터무니없이 높았다.“안 되겠어, 너무 힘들어. 좀만 쉬자...”두 건축 회사를 찾아간 민지는 기진맥진했다.서준 쪽도 별 소득이 없었다.정은은 더 비참했다.민지는 콜라 두 병을 마시자, 순식간에 힘이 났다.“이렇게 큰 도시에 실험실을 건설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전 안 믿어요!”“5시에 내가 다른 회사를 예약했는데, 그 회사는 자질이 모두 갖추어졌고, 평판도 꽤 좋아. 일단 먼저 가서 상황 좀 볼게.”정은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지금 4시 20분이니 택시 타고 가면 딱이었다.그러나 그녀가 택시를 타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정은아, 바빠? 난 인훈 오빠야.]“오빠?!”할머니 생신 잔치 이후로 두 사람은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게다가 전에도 통화를 한
“선배님, 선배님, 그렇게 빨리 가지 마요...”정은은 재빨리 쫓아갔다.가까스로 따라잡자, 재석은 몸을 돌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은을 보았다.“그렇게 재밌어?”정은은 즉시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네, 재미있어요!”‘정말 너무 재밌지!’재석은 한숨을 쉬었다.“그런데 네 장갑과 목도리가 다 젖었잖아.”“괜찮아요!” 정은은 바로 입을 열었다.“15분 전에 너도 그렇게 말했는데. 또 조금만 더 놀면 집에 가겠다고 했어.”‘어?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왜, 왜 기억이 안 나지??’정은은 멍해졌다.재석이 말했다.“가자, 놀고 싶어도 돌아가서 장갑과 목도리, 그리고 신발 갈아입고 다시 놀아.”고개를 숙이자, 정은은 그제야 자신의 부츠가 이미 젖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 자신조차도 느끼지 못했는데, 재석이 오히려 발견했다.“그래요.” 정은은 재석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틈을 타서 재석의 손에서 통을 가져왔다. 그 안에는 그녀의 눈놀이 도구가 들어 있었다.“선배님, 이건 내가 들면 돼요.”재석은 할말을 잃었다.정은은 애꿎은 표정으로 입을 뗐다.“몰래 놀고 싶은 게 아니에요.”말을 마치자, 정은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재석은 더욱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이따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는 듯, 정은이 집에 돌아와 옷을 싹 바꾼 뒤, 재석은 다시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다.“선배님?”“성설궁에 가서 눈 구경 할래?”“지금이요?”“음.”“그런데 오늘 입장권이 없는 것 같은데...”“나와 같이 가면, 입장권은 필요 없어.”“그럼 당연히 가야죠!”두 사람은 바로 출발했다.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피해 다른 한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들어가면 바로 궁전의 뒷마당이었다.앞으로 돌아가면 앞에 우물 하나, 살구꽃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다시 앞문으로 나가면 바로 넓은 광장이었다.다음 순간, 정은은 눈앞의 아름다운 경치에 어안이 벙벙해졌다.‘어쩐지 인터넷에서 그렇게
정은은 가장 빠른 속도로 정리한 다음,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두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아이들이 이미 출동하여 각자 도구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올 겨울의 첫눈이라 사람들은 유난히 기뻤다.사람들 외에, 재석은 눈이 쌓인 나무 밑에 서서 웃음을 머금으며 정은을 보고 있었다.정은은 눈앞이 환해지더니 바로 달려갔다.가까이 가서야 정은은 재석의 발 옆에 둥근 통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에는 뜻밖에도 눈집게, 삽, 플라스틱 장난감 등이 있었다.그리고 눈집게는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다.“이, 이건...”정은은 침을 삼켰다.“너 놀라고.”“아, 선배님,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러나 2분 후...정은은 흥분해하며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선배님! 이 오리 좀 봐요! 엄청 잘 만들었죠?!”“그리고 이 아기 공룡도 너무 귀여워요!”“선배님, 이 작은 삽으로 저쪽에서 깨끗한 눈 좀 퍼 주세요. 새하얀 거요. 흙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돼요.”“선배님...”“선배님!”정은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나가는 이웃들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쩔 수 없었다. 정은이 자란 곳에는 겨울에 거의 눈이 내리지 않았다.오직 그녀 만이 이 큰 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었다.정은은 아주 즐겁게 놀았다.재석은 정은이 노는 것을 지켜보며, 또 가끔 그녀의 지휘대로 움직였고, 심지어 꼬리처럼 바쁘게 정은을 따라다녔다. 그도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진욱은 지금 실험실에서 머리를 잡고 있었다.“지금이 몇 시인데, 조 교수는 왜 아직도 안 온 거야? 어제 두 조의 데이터에 모두 문제가 생겨서 조 교수가 수정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태민은 은근히 놀랐다.“전 교수님, 조 교수님 기다리고 계셨어요?”“맞아, 왜 그래?”“그... 조 교수님 오늘 휴가 내셨어요.”“휴가?! 언제?! 난 왜 몰랐지?!”“교수님은 어젯밤 한밤중에 이메일로 통지를 보내셨어요. 그리고... 자신이 없는 동안
정은은 줄곧 재석이 향수를 쓰는지 안 쓰는지가 궁금했다.그러나 이 문제는 좀 예민해서 잠시 마음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정은은 어색하게 웃었다.“고마워요, 선배님. 외출할 때 목도리 챙기는 것을 잊어버렸어요...”사실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귀찮았던 것이다.쓰레기를 버리고 바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이 정도면 목도리를 안 둘러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재석은 정말 정은의 속마음을 몰랐을까?다만 간파하지 않았을 뿐, 묵묵히 자신의 목도리를 그녀에게 주었다.“방금 임 교수님과 장 교수님이 왜 아이를 가지지 않으셨냐고 물었지? 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임 교수님의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래.”그 시대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사형을 선고받은 범인과 다름없었다.장 교수의 집안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 사람이 이혼하도록 강요했다.임 교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더 이상 매달리고 싶지 않아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이혼을 제기했다.그러나 장 교수는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다.“후에 장 교수님이 그 당시의 아내를 되찾기 위해서 집안과 관계를 끊고 임 교수님을 찾아가셨다고 들었어.”“아무튼 20년 동안 집안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가족들도 서서히 이 현실을 받아들였고,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거야. 하지만 사이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야.”임 교수는 본래 고아였다. 장 교수도 그녀를 위해 자신을 고아로 만들었다.이때부터 그들의 인생은 서로뿐이었다.정은은 이 말을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그 시절은 정말 로맨틱한 것 같아요. 비록 발달하진 않지만, 일생동안 딱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재석은 그런 정은을 바라보았다.여자는 풍경을 보고 있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풍경으로 되기도 했다.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은 흰 안개로 되어 마치 응결된 이슬과 같았다.그녀는 중얼거렸다.“올해 눈이 올지 모르겠네...”작년은 눈송이만 조금 날렸는데, 땅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물이 되어 전혀 쌓이지 않았다.재작
그릇은 두 사람이 함께 씻었고, 주방도 두 사람이 함께 치웠다.마지막으로 함께 외출을 하며 쓰레기를 버렸다.정은은 패딩을 입고 쓰레기를 들고 나갔다.재석도 집에 가서 두 포대의 쓰레기를 들고 나왔다.“선배님, 쓰레기를 안 버린 지 얼마나 됐어요?”“이주 정도?”“선배님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다행히도 모두 포장함, 비닐 봉지들이었고 남은 음식찌꺼기나 과일껍질 같은 것은 없었다.“가자.”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미 쓰레기를 버리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그렇게 네 사람이 딱 마주쳤다.“조 교수랑 정은이 너도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거야?”“네.”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오늘 또 무슨 맛있는 걸 한 거야? 아래층에서도 아주 향기가 죽여주던데!”“버섯전골이요.”“어머! 조 교수가 어제 받은 그 버섯 맞지?”어제 재석이 택배를 받을 때, 마침 채소를 사서 돌아오는 할머니를 만났는데, 그녀에게 버섯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두 사람 하나는 식재료를 제공하고, 다른 하나는 음식을 책임지니 이웃이 된 것도 다 운명이지! 이렇게 친해졌으니 차라리 함께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옛날 사람들은 시원시원하고 대담했다.정은은 처음에는 반응하지 못하다가, 재석의 기침소리를 듣고서야 갑자기 정신을 차리며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지금 오해를...”할머니는 즉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설명할 필요 없어, 그럴 필요 없어. 너희들이 좋으면 되지! 가자 영감, 집에 가야지!”“그래...” 할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했다.“당신도 참, 늘 허튼소리를 하기 좋아한다니깐. 정은이 얼굴이 다 빨개졌잖아.”“내가 무슨 허튼소리를 했다는 거야? 그 당시에 우리도 하나는 위층, 하나는 아래층에서 살다가 알게 되었잖아? 그때 사회가 이렇게 개방되지 않아서, 우리는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