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실험실은 건축회사의 자질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아서 일반 집을 짓는 것과 달라.”“게다가 실험실이 완공된 이후의 보안 시스템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건설 회사에 있어 아주 어려워.”세 사람은 커피숍에 모였다.정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자신이 장악한 소식을 다른 두 사람에게 공유했다.민지 앞에는 티라미수 2인분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열심히 먹고 있었고, 동시에 귀를 기울였다.“저희 아버지는 많은 청부업자 아저씨를 알고 있어요. J시 이쪽에 업무가 있는 분들도 있고요. 그러나 어제 제가 물어봤는데, 그들은 집만 지을 줄 알고 실험실을 지을 줄 모른데요.”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전문적인 일은 그래도 전문적인 사람에게 맡겨야 돼.”서준이 말했다.“그리고 건축회사와 소통하는 디자이너를 따로 청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쌍방의 요구가 잘못 전달되어 최종 효과가 떨어질 수 있어요.”그후 며칠간 세 사람은 모두 쉬지 않았다. 수업을 제외하고, 남은 시간은 기본적으로 밖에서 돌아다녔다.업계에서 괜찮은 건축회사 몇 곳을 자세히 알아보니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디자이너가 실험실 건설을 모르거나 예산이 터무니없이 높았다.“안 되겠어, 너무 힘들어. 좀만 쉬자...”두 건축 회사를 찾아간 민지는 기진맥진했다.서준 쪽도 별 소득이 없었다.정은은 더 비참했다.민지는 콜라 두 병을 마시자, 순식간에 힘이 났다.“이렇게 큰 도시에 실험실을 건설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전 안 믿어요!”“5시에 내가 다른 회사를 예약했는데, 그 회사는 자질이 모두 갖추어졌고, 평판도 꽤 좋아. 일단 먼저 가서 상황 좀 볼게.”정은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지금 4시 20분이니 택시 타고 가면 딱이었다.그러나 그녀가 택시를 타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정은아, 바빠? 난 인훈 오빠야.]“오빠?!”할머니 생신 잔치 이후로 두 사람은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게다가 전에도 통화를 한
정은은 이 말을 듣고 인훈을 위해 기뻐했다.“그래, 그럼 주문할게!”“응!”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은은 결국 채소 두 개에 국 하나만 시켰다.“이게 다야?”“응, 다야.”“안돼, 요리 두 개 더 추가해.”“아니야! 두 사람 그렇게 많이 못 먹어! 오빠, 오늘 돈 좀 쓰려고 결심한 거야?”‘자발적으로 바가지를 쓰다니.’인훈은 웃으며 말했다.“가끔 여동생이 바가지를 씌워도 나쁠 건 없지.”“정말 필요 없어, 낭비하지 마.”“좋아, 네 말 들을게.”인훈은 맥주 두 캔을 주문했다.곧 음식이 올라왔고, 남매는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요즘 학교는 좀 어때? 적응했어? 내 번호는 저장했고? 도움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전화해.”같은 타지에 있으면서 남매는 당연히 서로를 도와주며 보살펴줘야 했다.“그럭저럭이야. 비록 전에 문제가 좀 생겼지만 지금은 다 해결됐어.”“그럼 됐어, 자, 얼른 밥 먹어...”인훈은 웃으며 말했다.중간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정은아, 너 먼저 먹어. 난 나가서 전화 좀 받을게.”“좋아.”5분 후, 인훈이 돌아왔고, 다시 맞은편에 앉았다.정은은 단번에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오빠, 오빠도 좀 먹어.”“어! 그래!”인훈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미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봐도 억지웃음이었다.정은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빠, 무슨 일이야?”이 말이 나오자, 키가 1미터 80센티미터 넘는 사나이는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혔다.“사실 나는 정말 이 사장님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니깐. 분명히 이미 얘기 끝낸 프로젝트에 계약까지 체결해면서 그렇게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였는데, 왜 갑자기 번복을 하는 거지?!”“그 사람들은 계약정신이 뭔지도 모르는 건가? 다른 사람의 노동 성과를 존중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아마도 나 자신의 문제겠지. 잔혹한 경쟁에 적응하지 못했고, 시장 파악도 잘 못했어...”처음에는 울분이 넘쳤지만, 마지막에는 낙담만 느꼈다.“상대가 계
인훈도 대학을 나왔으니, 정상이라면 이런 기본상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특히 계약처럼 중요한 일은 더 그랬다.“요즘 너무 바쁜 데다가, 이건 또 새로운 프로젝트거든. 참고할 만한 계약 템플릿이 없어서 계약을 작성할 때 계약 위반 조항을 함께 넣는 것을 잊어버렸어.”인훈은 상대방에게 당한 후에도 여전히 반응하지 못했다.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계약정신이 없고, 남의 노동 성과를 존중하지 않는다’였다니. 이것은 매우 바보 같았다. 아니면, 무척 무던했다.아무튼 정은은 가장 먼저 배상금을 얼마 받을 수 있나에 대해 생각했다.“계약서 같은 것도 오빠가 직접 써야 돼?”인훈은 더욱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원래는 아닌데... 전에는 이것들 모두 동업자들이 관리하고 있었어. 난 공사장의 일만 책임졌고. 그러나 이주 전에, 그 사람은 회사에서 나가겠다고 했어...”인훈 이 어수룩한 사람은 만류해도 성과가 없어, 이를 악물고 회사의 가뜩이나 넉넉하지 못한 현금에서 대부분을 뽑아내어 당초에 투입한 돈을 그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경영 상황에 따라 손실을 계산하지 않은 거야?”“어? 손실을 계산해야 돼?”“그렇지 않으면?” 정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당초에 두 사람 함께 회사를 차렸으니, 돈을 벌면 두 사람 함께 나눠야 하지 않겠어?”“그럼!”“그럼 같은 도리로, 손실이 생기면 두 사람 공동으로 부담해야 하지 않겠어?”현재 회사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아 손실이 있는 게 뻔했으니, 어떻게 회사를 떠난 후에 자신이 낸 돈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요구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주식을 조금 샀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은 손해 봐야 했다. 당장 팔아도 여전히 손해를 부담해야 했다.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다.“오빠, 그렇다면, 나도 오빠와 같이 일하고 싶어. 어차피 손해를 보지 않을 장사잖아.”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오빠는 이걸 계산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다만 돈 때문에 그 사람과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그런데 정은아, 이걸 왜 물어보는 거야?”정은은 두 눈에서 빛을 발했다.“마침 나한테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오빠는 어떡해 생각해?!”인훈은 멍해졌다.“무, 무슨 프로젝트?”“스마트 실험실. 하지만 토지 건설까지 함께 해줘야 돼.”그렇다. 정은이 원하는 것은 전통적인 실험실이 아니라 고도로 지능화된 실험실이었다.두 사람은 아주 급하게 밥을 먹었다.인훈은 정은의 수요를 듣고, 지체없이 떠나 회사로 돌아가 기획안을 쓰려 했다.그리고 정은은 그가 간 후, 바로 다른 두 명의 ‘파트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민지와 서준은 자연히 두 손 들어 찬성했다.현재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그날 저녁, 정은은 집에 돌아와 더욱 상세한 요구를 이메일로 정리하여 인훈에게 보냈다.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이튿날 아침, 인훈에게서 전화가 왔다.[정은아, 아니다, 소 사장님, 이 프로젝트는 내가 맡을게! 지금부터 넌 나의 존귀한 고객이자 하나님이야!]“풉...”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오빠, 그 정도는 아니야, 왜 그래...”[아니야. 이것도 규정이야! 아무튼 앞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제기해. 날 오빠라 생각하지 말고, 단지 네 일을 처리해줄 을이라 생각해. 넌 갑이잖아.]정은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나 인훈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공적인 일은 공정하게 처리하며, 그 어떠한 사적인 감정도 섞지 않았다.“오빠, 왜 예산이 얼만지 물어보지도 않고, 가격에 대해 얘기도 하지 않는 거야? 밑지는 장사면 어떡하려고?”인훈은 너무나도 성실하고 단순했다.인훈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왜?”[우선, 넌 분명히 나로 하여금 손해를 보게 하지 않을 거야. 둘째, 돈을 벌지 않더라도 널 도울 수 있고, 동시에 내 회사를 계속 경영하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오빠...”정은은 한숨을 쉬었다.“앞으로 너무 실속 있게 행동하지 마. 쉽게 손해 볼 수 있으니까.”‘오빠는 따지기
남자는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겼고, 수염이 덥수룩해서 마치 하룻밤 사이에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그는 심지어 먼저 밥을 먹기도 전에 서류 한 부를 내밀었다.“정은아, 이건 초보적인 스마트 실험실 건설 계획이야! 어젯밤 나에게 보낸 수요와 결합하여 이미 보충했어. 이 몇 군데는 더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이 밀폐된 문 말이야.”“그곳은 생물실험실이기 때문에 일부 유해미생물이나 위험한 세균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어. 대문 재질은 아래의 이 몇 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해...”“나는 이미 다른 차원에 따라 그들을 비교하고 분석했는데, 종합적으로 볼 때 이 GFRT 신형 재질이 가장 좋은 것 같아. 밀봉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가소성도 매우 강하거든...”짧디짧은 하룻밤사이에 인훈은 실험실의 초기형태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디테일까지도 아주 완벽하게 보완했다.그리고 이렇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실험실 관련 건설 규범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했다.정은은 눈을 깜박였다.“오빠, 어젯밤에 보충 수업이라도 한 거야?”“크험...”인훈은 가볍게 기침했다.“임시로 공부 좀 했고, 또 이 방면의 전문가에게 가르침을 청했어.”그러나 이것은 가장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정말 정은을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내가 조사해 봤는데, 생물 실험실은 실험실에서 처리하는 미생물 및 그 독소의 위해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야 해.”“기존 국가 표준에 따르면 총 P1, P2, P3, P4 네 개의 등급이 있어. 정은아, 나에게 대담한 생각이 하나 있는데.”“뭔데?”“이 네 가지 등급은 각각 네 가지 방호 규범에 대응해. 스마트 실험실인 이상... 우리는 이 네 가지 다른 규범 표준에 대해 네 가지 심지어 더 많은 실험실 모델을 설정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이렇게 되면 하나의 실험실은 N개의 실험실과 같았다.지능형 통제로 전환하면, 심지어 인건비도 필요하지 않았다.정은의 두 눈에서 빛을 발했다.“이뤄질 수 있을까?”“가능성이 커.”
정은은 잠시 멈추었다.“예산을 초과한 부분은 내가 가능한 한 빨리 보충할 테니까, 오빠는 최선의 방안에 따라 진행하기만 하면 돼!”이쪽에서 인훈과 이야기를 마치고 겸사겸사 저녁을 해결한 정은은 즉시 민지와 서준에게 최신 소식을 알렸다.“정은 언니, 돈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빠한테 달라고 하면 되니까요...”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있던 하정남은 계속 재채기를 했다.“에취! 에취!”“당신 감기 걸렸어요?'“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딸이 지금 내가 보고 싶은 모양이야!”정은은 민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승낙한 것을 알면 네 아빠는 화를 내시지 않을까?”민지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안심하세요, 우리 아빠는 그런 분 아니세요! 돈은 단지 숫자일 뿐이니, 그 정도 달라고 했다고, 공이 몇 개 빠지는 것도 아니거든요.”‘참 돈이 많은 집안이군.’그러나 정은은 여전히 민지를 거절했다.“예산을 초과한 부분은 내가 내면 돼.”“그런데...”“그런 건 없어, 그냥 내가 말한 대로 하자.”이렇게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서준이 가볍게 기침하자, 민지는 깜짝 놀랐다.“네가 소리를 내지 않으면, 나는 네가 아직 여기에 있다는 것을 잊을 뻔했어.”서준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미안해요. 자금 방면에 도움이 되지 못해서.”집안 상황 때문에 서준은 그렇게 많은 현금을 꺼낼 수가 없었다.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집안 어르신에게 설명하기 어려웠다.정은은 웃으며 말했다.“돈은 나와 민지가 해결하면 돼. 넌 다른 방면에서 도와줘...”“뭔데요?”“두 달 안으로 실험실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격증을 준비해. 모든 행정 절차를 마치는 동시에 트집을 잡으려는 사람이 조금의 잘못도 골라내지 못하게 해야 돼. 할 수 있겠어?”그녀가 괜한 걱정을 하는게 아니라 이것은 유비무환이었다.송지혜 팀이 그동안 한 일들은 그야말로 그들의 감탄을 자아냈으며, 정은도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가만히
서지예도 맞을까 봐 두려워, 민지를 바라보는 눈빛에 공포가 들어있었다.‘이렇게 뚱뚱하면 힘도 세겠지?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그녀는 재빨리 진호를 밀어냈다.“여자 뒤에 숨다니, 너도 참 뻔뻔해!”강서정은 한쪽에 서서 두 손으로 가슴을 껴안았다.“됐어,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하러 왔는지 잊은 거야? 다들 가만히 좀 있어.”말을 마치고, 그녀는 정은을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깜끔하게 실험실 열쇠 내놔요. 어차피 열쇠를 갖고 있어도 소용없으니까.”정은은 미소를 지었다.“미안하지만, 열쇠는 정말 너에게 줄 수 없는데.”서정은 눈살을 세게 찌푸렸다.“지금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데, 지금은 주고 싶지 않아도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야 한다고요!”“실험실 정돈 개혁 규정에 따르면, 시정 중의 실험실은 사용을 허용하지 않으니, 학생들은 열쇠를 소지할 수 없어요. 반드시 교수님에게 맡겨 보관하거나 교무처에 넘겨야 한단 말이에요.”“학교 규정을 잘 배웠네.”서정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턱을 살짝 들었다.“규정이라는 것을 안 이상, 눈치 있게 열쇠부터 줘요.”정은은 웃으며 말했다.“난 확실히 열쇠를 바쳐야 하지만, 왜 너에게 줘야 하는 거지? 네가 뭔데? 내 교수님이야, 아니면 교무처의 선생님이야?”“아니...” 서정은 할 말을 잃었다.어제, 송지혜는 그녀를 사무실로 부른 다음, 반드시 정은의 열쇠를 가져와야 한다고 당부했다.처음에 서정은 그 이유를 잘 몰랐다.‘허름한 실험실일 뿐, 왜 빼앗으려는 거지?’그러나 그녀는 이 평범한 실험실에 수억 원짜리 CPRT가 놓여 있다는 것을 잊었다.기계는 무겁고, 설치와 해체할 때 모두 전문 기술 인원의 도움이 필요했으니, 정은 그들은 가져갈 수가 없었다.좋은 물건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민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렸다.“어떤 사람들은 정말 욕심이 많네요! 거머리처럼 하루 종일 어떻게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실지를 생각하다니.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건지,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
찰싹!정은의 눈빛이 차가웠다.따귀가 떨어지자, 현장은 매우 조용해졌다.서정마저 멍해졌다.“너, 방금 날 때렸어? 감히 날 때리다니?!”“왜 못 때리는 건데? 네가 먼저 도발했으니, 나도 단지 나 자신의 명예를 지켰을 뿐이야. 여기는 학교이지 네 집이 아니니까. 넌 재벌 집 아가씨라고 성질 좀 부려도 되지만, 난 그런 널 방임할 의무가 없어.”‘전에 내가 좀 잘해 주었다고 그것을 아부라 생각하는 거야? 정말 아이러니하네...’지예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설사 서정이 말을 듣기 싫게 했다 하더라도, 넌 사람을 때리면 안 되지! 학교 규정에 똑똑히 적혀 있잖아. 싸우거나 시비를 걸면 처분을 받을 거야.”진호는 바로 말을 받았다.“가자, 교무처에 가서 이 사람 고소하자! 우리 모두 증인이잖아!”탁재민은 이 말을 듣고 즉시 가운데로 돌진하여 그들을 말리려 했다.“모두 동창인데, 이렇게 나오면 섭섭하지. 이 일은 그냥 넘어가는 게 더 나아. 적보다 친구를 하나 더 사귀는 게 더...”“꺼져! 이 촌놈아!” 진호는 재민을 힘껏 잡아당겼다. “너는 도대체 누구 편이야? 방금 말참견을 해야 할 때는 옆에 서서 죽은 척하다가, 교무실에 가서 소정은을 고소하겠다고 하니 바로 뛰쳐나오면서 지껄이다니. 탁재민, 너 참 대단해. 전에 왜 네 말주변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아니야... 그냥 다들 다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 일이 커지면 누구한테도 안 좋잖아...”그는 설명하고 싶었지만, 입만 열면 말을 더듬기 시작해서 제대로 말 할 수가 없었다.그는 시종 입을 열지 않은 진일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진일은 여러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마지막에 시선을 서정의 얼굴에 떨어뜨렸다.“소정은은 틀린 말을 하지 않았어. 여기는 학교이지 네 집이 아니야. 아무도 널 봐주지 않을 것이고, 네가 남을 욕 할 때, 이미 남에게 맞을 준비를 해야 했어.”“너...” 서정은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진호는 진일에게 뭐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