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영문을 몰랐다.보고를 하고 있던 학생마저 멈추며 부총장을 살펴보았다.“에헴!” 옆에 있는 다른 한 부총장이 기침을 하며, 그에게 행동에 주의하라고 주의를 주었다.‘이렇게 흥분할 만한 일이 뭐가 있어? 학생들 앞에서 이게 뭐냐고?’이 흥분한 부총장은 직접 마이크를 들더니 입을 열기 전에 여러 번 심호흡을 하고서야 겨우 감정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방금 공식 소식을 들었는데, 생명과학대학의 한 학생이 학술지 에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는 거야!”학술지 Science에는 Science News (과학뉴스), Science's Compass (과학가이드), Research (연구성과) 라는 세 가지 큰 코너가 있었다.부총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장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세상에! 나 방금 잘못 들은 거 아니야?”“내가 생각하는 그 학술지 맞아? 이건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우리 생물과학대학의 학생이라고? 누구지?” “틀림없이 진일 선배일 거야. 전에 이미 논문을 낸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 또 뽑힌 거지.”“역시 선배님이야, 전설이 다름없어!”...거의 모든 사람들은 부총장이 말한 사람이 바로 진일이라고 생각했다.송지혜조차도 턱을 들어올렸다.‘이게 바로 내가 가르친 학생이야. 가장 자랑스러운 내 제자라고!’그러나 진일의 교수님으로서, 송지혜는 진일이 올해 학술지 에 논문을 보낸 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잊어버렸다.만약 있다면, 그녀는 교수님으로서, 교신작가로 되었을 것이다.그래서 학생이 교수님 몰래 학술지에 논문을 보낸 경우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지예는 입술을 깨물며 진일을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이주 동안 질질 끌고서야 SCI 한 편을 완성했는데, 자기는 몰래 학술지 에 논문을 보냈다니! 정말 너무해. 만약, 만약에 내가 학술지에 논문을 보냈다면...’생각만 해도 지예는 행복해 미칠 지경이었다.경혜와 서정도 부러움을 드러냈다.재민은 이에 반응하여 진일을 바라보았
사람들은 끊임없이 수군거렸다.꿀꺽-민지는 침을 삼키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정은을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으로 그녀란 사람을 알게 된 것 같았다.“정, 정은 언니, 우리 대학원에 언니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있는 거예요?”서준은 어이가 없었다.“너 바보야?”민지는 눈을 부릅떴다.“네가 뭘 알아? 나도 확인을 하고 싶은 거라고! 괜히 기뻐할까 봐 그래...”정은도 정신을 차리며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마도 없을 거야...?”“아아아아. 그럼 언니가 보낸 거 맞죠?!” 민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세상에! 제 동창이 이런 천재라니! 그것도 엄청난 천재잖아요! 정은 언니, 제 인생을 언니에게 맡길게요, 엉엉...”“야, 넌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민지는 가볍게 흥얼거렸다.“그렇게 대단하면 넌 우리 팀에서 나가든가.”서준은 직접 민지를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 정은에게 물었다.“언제 학술지에 투고한 거예요?”민지는 바로 귀를 쫑긋 세웠다.“개학 전에.”“어쩐지...”‘그런데 개학 전이라면 과제는 어디서 났고, 실험실을 또 어디서 구한 거지? 교신저자는 또 누구?’하성군은 무대에 서서 미친 듯이 박수를 쳤다.“소정은 학생, 무대에 올라와서 소감 좀 말하지 그래? 다들 박수!”“우와, 짝짝짝...”현장의 박수 소리가 열렬했다.진일조차도 참지 못하고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재민은 멀뚱멀뚱 쳐다보며 물었다.“형, 형은 서운하지도 않아?”진일은 더 이상 무뚝뚝한 표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 세상엔 우수한 사람이 너무 많아. 천재도 가득하지...”그는 잠시 멈추었다.“과학 연구는 원래 다 같이 진보를 해야 하는 거야.”‘그렇게 해야만 각자 최고의 학술 성과를 거둘 수 있는데. 송 교수님은 어쩜 이 도리를 모르시는 걸까.’지예는 멍하니 있다가 마음이 점차 달갑지 않았다. ‘소정은’이라는 세 글자를 똑똑히 들은 후, 놀라움, 경악, 의심. 심지어 표정까지 일그러졌다.송지혜는 환하
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안색이 변했다.오직 정은만이 가볍게 웃었다.그녀는 지예를 직시했다.“그럼 어떤 부정한 방법을 말하는 거지?”지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아주 많지. 돈으로 매수하거나, 학술지의 사람을 찾아가거나. 사람을 찾아 논문을 쓰는 것도 가능하지.”정은은 자신의 목소리가 작은 것 같아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민지는 즉시 친절하게 첫 줄로 달려가 웃으며 마이크를 가져다주었다.‘정은 언니, 이 사람들에게 본때 좀 보여줘요! 아주 매섭게 짓밟아줘야죠! 너무 좋아!’정은은 마이크를 들고 간단하게 테스트를 했다.‘음, 아주 크고 우렁차네.’“서지예라고 했지? 우선 날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한 것 같은데, 나는 남을 매수할 돈도, 그럴 인맥도 없거든. 그러니 학술지의 편집부가 세계 반대편에 있는 한 무리의 베테랑 연구원들에게 평범한 대학생인 내 논문을 통과시키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돼.”“그리고 사람을 찾아 대신 논문을 쓰는 건 확실히 좋은 방법이지만, 학술지에 논문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왜 날 대신해서 논문을 써줘야 하는 거지? 그럴 실력이 있다면 당연히 스스로 성과를 내야 하지 않겠어? 넌 오히려 이런 일들에 익숙한 것 같은데, 그럼 네가 좀 알려줄래?”지예는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바로 화를 냈다.“너,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사람을 찾아서 논문을 냈다는 거야?! 말만 하지 말고 증거를 꺼내!”정은은 영문을 몰랐다.“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굳이 그렇게 다급하게 변명할 필요가 있을까? 네 반응을 보니까 마음이 엄청 찔린 모양이네?”“나, 난...”지예는 말문이 막혔다.정은은 가볍게 웃었다.“나에게 증거를 내놓으라고 했지?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너도 내가 부정한 방법으로 학술지에 논문을 올렸다는 증거를 내놓았으면 좋겠어.”이제 지예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앉을 수밖에 없었다.정은은 그녀의 반응을 눈여겨보며 눈빛은 자기도 모르게 어두워졌다.진호는 입술을 움직여 뭔가
‘조재석도 오미선의 학생이라고 할 수 있잖아?’이 순간, 송지혜는 창피함을 느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오미선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은 줄지어 회의실을 떠났다.진호 일행은 재빨리 달아나더니, 허리를 구부리며 최대한 구석에서 걸었다.너무 창피했던 것이다.그것도 학생들 앞에서가 아니라, 학장과 전교 사생들 앞에서.“정은 언니, 방금 너무 멋있었어요!”정은을 바라보는 민지의 눈에서 하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서준은 턱을 들어올렸다.“이제 누가 감히 우리 팀을 무시할 수 있겠어?”“그러게! 다음에 신진호랑 서지예 그 얄미운 사람들 만나면, 난 거들먹거리면서 그들의 앞을 지나갈 거야. 콧구멍으로 그들을 봐야지, 헤헤...”민지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지금 아빠 대신 월세를 받을 때보다 더 행복한 것 같아!’“정은 언니, 앞으로 자주 이런 서프라이즈 해주면 안 돼요?”“이게 무슨 게임인 줄 알아?” 서준은 눈을 부라렸다.“맞고 싶어!”‘농담도 모르는 늙은이!’...서정은 학교에서 나와 직접 집에 돌아갔다. 현관에 들어설 때, 그녀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서정아.”서영숙은 그릇을 들고 수정과를 먹으면서 거실로 걸어갔다. 그러나 서정과 이렇게 부딪칠 줄이야.하마터면 그릇을 엎을 뻔했다.수정과를 쏟아도 상관없지만, 문제는 서영숙의 옷이 더러워질 것이다.“서정아, 너 어떻게 된 거야? 넋을 잃었네... 맞다, 내일 오후 서호 레스토랑에 가. 내가 이미 약속을 잡아놨어. 나준이랑 잘 얘기하고, 서로에 대해 많이 알아봐. 내가 다 알아봤는데, 나준이는 스탠포드의 우등생이야. 빈둥빈둥 놀기 좋아하는 그런 재벌 2세가 아니라고. 진정한 연구원이라잖아! SCI급에 논문을 한가득 보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최고의 학술지까지 논문을 보낸 거 있지? 그 사이언인지 뭔지 하는 학술지만 빼고...” 서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소정은이 학술지 에 논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운 것 같다.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교실, 실험실, 도서관에 에어컨이 빵빵했다.주말에도 무척 행복했는데, 집에 에어컨을 틀고 시원한 수박을 먹으니 너무 행복했다.‘냉기가 가득한 방에서 수박을 먹으면서 논문을 보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조수민이 전화를 했다.[오늘 토요일인데, 수업할 필요가 없잖아. 정말 나와서 놀지 않을 거야?]“수민아, 나 좀 살려줘. 이 온도라면, 나가자마자 바로 타버릴 것 같아.”[넌 쇼핑을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자신에게 예쁜 옷을 좀 사주고 싶지 않은 거냐고?!]“그건 인터넷에서 사면 되지.”[스킨케어는? 이런 건 항상 매장에 가서 써 봐야 좋은지 안 좋은지 알 수 있잖아?!]“그럴 필요 없어. 난 고정된 브랜드만 사용하니까.”[맛있는 거 먹고, 마트에 가서 장도 보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사려면 당연히 외출해야 하지 않겠어?!]수민의 말투는 점차 욱해졌다.정은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사실, 배달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정은이 물었다.“너 요즘 일이 바쁘지 않아서 심심한 거야?”수민은 길게 탄식을 했다. ‘역시, 날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우리 정은이밖에 없어!’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럴 리가 없는데. 네 주소록에 있는 Keven, David, 그리고 그 연하남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전의 수민은 아무리 심심해도 한여름에 뜨거운 태양을 무릅쓰고 그녀와 쇼핑하러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그녀는 정은보다 햇볕을 더 무서워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오늘 수민이 입을 열자마자 정은은 이상하다고 느꼈다.[말도 마...]수민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그 일을 생각만 해도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고동건 그 미친 놈 말이야, 내 핸드폰 비밀번호를 물어본 다음 뜻밖에도 내 핸드폰으로 야동을 본 거 있지! 그래서 내 핸드폰에 바이러스가 걸려서 아예 망가진 거야.]동건은 고칠 수 있다고 맹세했다. 수민은 그의 말을 믿고 또 다른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그 결과, 수민
“아이고, 정말 아깝네.”“괜찮아.” 수민은 살짝 웃었다.“핸드폰이 고장 나면 바꿀 수 있고, 전화카드가 없어졌으면 가서 다시 만들면 되지. 어차피 번호가 그대로이니, 연락이 안 될 정도는 아니야.”‘대부분 그 연하남들이 먼저 나에게 연락했으니까.’수민이 주동적으로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새로운 남자를 만날 수 있었기에 옛 남자들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동건은 이를 갈았다.수민은 고장난 핸드폰을 가져왔다.“앞으로 또 내 물건을 건드리면, 네 손을 부러뜨릴 거야. 알았어?”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거실을 나섰다.그녀는 이미 사람 시켜 자신의 차를 몰고 오게 했으니, 남이 데려다줄 필요 없이 그냥 가면 된다.동건이 쫓아갔다.‘아니... 네 그 전화번호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아. 8이 너무 많잖아, 우리 다른 걸로 바꾸자? 내가 널 위해서 좋은 번호 하나 찾아줄게! 어때?”“8이 안 좋다고?” 수민은 눈을 부라리며 진심으로 동건이 정신 나갔다고 느꼈다.“돌팔이라는 말이 있잖아?”“입 닥쳐! 날 귀찮게 하지 마!”말을 마치자 수민은 차에 시동을 걸며 동건의 앞에서 사라졌다.동건은 제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조수민! 너 정말 양심도 없어! 난 여태껏 남에게 좋은 번호를 양보한 적이 없단 말이야?!”애석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아무리 커도 수민은 듣지 못했다.들었다고 해도 그저 차갑게 웃어줄 뿐이었다.2층에서, 송보미와 가정부는 베란다에 서서 방긋 웃으며 아래층을 주시했다.가정부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아가씨는 도련님을 별로 상대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그래야죠.”송보미는 팔짱을 꼈다. 방금 관리를 받은 그녀의 피부는 반짝이면서 혈색이 아주 좋아보였다. 온몸에서 귀부인의 느낌이 물씬 했다.“남자들은 쉽게 넘어오는 여자에게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은 법이니까요. 여자들이 꼭 자신에게 덤벼들 것 같다고 생각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니깐요, 도도하고 차갑게 대해야 홀딱 반하게 될 거예
수민은 확실히 듣지 못했다.그녀는 새 핸드폰으로 베란다를 찍었는데, 거꾸로 늘어진 와인잔에 초점을 맞춘 다음, 배경을 전부 모호하게 만들었다.그리고 이런 글을 더했다.[지루한 여름, 나른한 오후.]그 다음, SNS에 올렸다.수민은 핸드폰을 소파에 던진 다음 일어나더니 맨발로 침실에 들어갔다.‘일단 낮잠부터 자자.’냉기로 가득한 방은 확실히 편했다. ‘그래서 정은이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거였어. 나도 나가기 싫어졌네.’...동건은 오늘 실내 서핑을 하러 갔다.이 코치는 기술이 좋아서 예약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원래 동건은 오늘 외출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 기회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결국 찾아왔다.그러나 예약하기 어려운 것도 다 일리가 있었다.코치를 따라 몇 번 연습하니, 기술이 많이 늘었다. 동건은 지금 자신이 엄청 강하다고 느꼈다.잠시 쉬고 혼자 연습하려던 동건은 앉자마자 SNS를 보았다. 그러나 수민의 포스터를 볼 줄은 몰랐다.[지루한 여름, 나른한 오후.]그리고 사진을 확인하니 더할 나위 없이 흔한 게시물이었다.사진도 정상이고, 글도 괜찮았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심심한 게 바쁜 것보다 낫겠지’라는 댓글을 달 뿐이었다.하지만 동건은 일반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여자를 많이 놀아본 카사노바였다.지루한 여름? 키워드는 ‘지루하다’였는데, 그 말은 즉, ‘나에게 돈도 있고 시간도 있지만 할 일이 없으니 같이 놀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이었다.나른한 오후? 키워드는 ‘나른하다’였다.즉 ‘난 이미 누웠으니 누가 나와 함께 누울래?’라는 뜻이었다사진을 보면 중간에 와인잔이 있었다.‘다른 남자와 술을 마시고 싶은 게 분명해! 지금 누구한테 암시를 하고 있는 거지?’동건은 단번에 알아차렸다.“조수민, 너!”그는 즉시 목욕 가운을 입더니 샤워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코치는 멀리서 그를 보며 물었다.“도련님, 더 연습하시지 않을래요?”“안 해요!”“급한 일 있으세
그러니 비밀번호를 바꾸는 건 상식이었다.“넌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다 이러는 거야?”“모두는 아니지. 비밀번호를 바꿀 때마다 우리 엄마와 정은이에는 꼭 문자로 새 비밀번호를 알려줬거든. 엄마와 정은이 찾아와도 난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을 것이고. 그런데 이걸 왜 물어봐?”“그럼 왜 내가 알았다고 바로 바꾼 거야?”수민은 어이가 없었다.“넌 누군데? 내가 왜 바꾸면 안 되는 거지? 우리 친한 사이냐?”“그럼 다른 남자가 만약 네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면...”“당장 바꿔야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동건은 한동안 기뻐해야 할지 탄식해야 할지 몰랐다.기쁜 것은 이 여자가 너무 멍청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른 남자랑 자도 여전히 그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방비할 줄 알았던 것이다.탄식하는 이유는 자신이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동건도 경계가 필요한 리스트에 올라갔다.“나한테 볼일 있어?”수민이 물었다.동건은 실내를 힐끗 쳐다보았다.“밖은 아주 더운데.”“그래서?”“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돼?”수민은 손을 내려놓더니 옆으로 비키며 길을 양보했다.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익숙하게 슬리퍼를 갈아신은 다음 곧장 거실로 갔다. 그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곳이 자기 집인 줄 알겠어.’수민은 눈을 부라렸다.“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나 엄청 바쁘거든.”동건은 냉소를 지었다.“뭐가 바빠? 사람을 집으로 불러서 같이 지루한 여름을 보내는 거? 아니면 나른한 오후를 함께 감상하는 거?”“미친.”수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말할 거면 제대로 말해. 왜 내가 올린 SNS를 언급하는 건데?”그것도 큰 소리로 외우니 무척 어색했다.“올릴 때 아주 신이 난 것 같은데, 내가 말해도 안 되냐? 너만 보낼 수 있고, 난 읽으면 안 되는 거냐고?”“아니... 너 오후에 내가 보낸 SNS를 읽어주려고 우리 집에 왔어? 넌 할 일이 없어서 발광을 하고 있는 거야?”“그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
“안녕하세요.”정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은혁은 일행과의 대화를 뚝 끊고 곧장 정은 앞까지 다가왔다.“머리하러 왔어요?”“네.”“그... 저번에 식사 한번 하자고 했던 거 기억하죠? 혹시 오늘은 시간 괜찮으세요?”정은은 짧게 대답했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죄송해요.”그 순간 수민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하이! 은혁 도련님?”“수민이?! 혹시 정은 씨랑 같이 왔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바로 그 친구.”“와! 그럼 다 아는 사이네! 머리 끝나고 다 같이 밥 어때? 내가 쏠게!”수민은 눈을 살짝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근데 나 들러리 아니야? 밥 사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잖아.”은혁은 순간 말이 막혀 멋쩍게 웃었다.“그, 그게... 다 친구잖아. 다 같이 보면 좋은 거지 뭐... 하하...”그 말이 끝나자 수민은 슬쩍 정은 쪽을 힐끔 바라봤다.‘갈까? 아니면 거절할까?’정은은 아주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그걸 본 수민은 곧장 말투를 바꿨다.“나 아직 염색 더 남았거든. 게다가 이미 예약해 둔 식당도 있어서 미안. 다음에 보자!”은혁은 서둘러 말했다.“아, 괜찮아! 나 기다릴 수 있어. 같이 식당 가면 되잖아!”그러자 수민이 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저었다.“노노!! 오늘은 걸스 나잇. 남자는 입장 금지, 알겠어?”“그렇구나...”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럼... 다음에 따로 할게.”수민은 환하게 웃었다.“그래, 다음에 봐.”여기까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혁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그는 정은이 옆 소파에 툭 앉은 거였다.“정은 씨... 옆에 좀 앉아도 괜찮죠?”“네.”그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날 제가 데려다드린 곳, 정은 씨 실험실이었죠?” “맞아요.”“저 사실 대학 시절 전공이 재료공학이었어요. 생명과학과는 다르지만, 교차하는 영역도 좀 있죠. 논문 읽다 보면 은근 연결되더라고요.” ‘어...? 이 사람
재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어떤 것도 할 자격이 없지.’그 틈을 타 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좀 더 기다려야 해서요. 선배님 먼저 차 가져가세요.”“그래.”재석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그렇게 조용히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그 사람... 누구일까?’...정은은 길가에 조용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5분쯤 지난 후, 골목 입구로 노란색 페라리가 굉음을 내며 등장했다. 엔진 소리만으로도 차주의 성격이 상상되는 차였다.운전석 창문이 슥 내려가더니, 조수민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우리 공주님! 탑승하시죠!”정은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간다! 간다!”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정은은 안전벨트를 매며 슬쩍 물었다. “또 바꿨어? 차?”“아냐, 고동건 그놈 차야.”“오...”“뭐야 그 ‘오’는? 뭔가 의미심장했어.”수민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봤다.정은은 시크하게 말했다.“그냥 ‘오’ 한 거야. 더는 묻지 말고, 운전이나 해. 묻는 순간부터 의미 없어져. 너도 알잖아.”“와... 너 요즘 말투 진짜, 우리 오빠랑 똑 닮았어. 점점 꼬인다, 꼬여.”정은은 잠시 말을 멈추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재석 선배...?’하지만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 차 안엔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침 흘러나오던 노래를 들은 수민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 곡으로 넘겼다.[말 못 하는 그 말알게 해줘야 했는데그렇게 쉬운 몇 마디왜 난 못했을까...]‘무슨 가사야 이건?’그리고 이어진 곡...[기대하던 너의 붙잡음은 없고결국 넘겨준 그녀그럼 넌 뭐야 사랑한다면서도 기다리지 말라니 됐어, 넌 계속 그렇게 물러서더라...]수민은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 불렀다. 리듬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거리자, 정은은 곧장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야야야, 운전 중이야. 진지하게 좀 몰아.”“앗, 네네, 죄송... 요즘 정신이 잠깐씩
“이제야 좀 낫네.”민지는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걸렸다.‘이상하네...’예전 같으면 둘이 만나기로 한 날엔 늘 서준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밀크티며, 선호하는 과자까지 미리 챙겨놨었다.‘오늘은 어딘가 좀... 다르네.’그리고 서준이 도착하고 나서, 민지의 그 낌새는 더욱 확실해졌다.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준을 바라봤다.“너 기분 안 좋아?”“아니...”“거짓말! 완전히 삐졌잖아. 누가 너 속상하게 했어?”서준은 잠시 말없이 민지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시선에 민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뭐야, 왜 그렇게 봐...?”서준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기분 안 나빠.”“아니거든? 엄청 나빠 보이거든?!”“안 나쁘다니까.”“거짓말! 완전 티 나! 눈, 코, 입, 눈썹, 머리카락, 속눈썹... 다 티 난다니까! 그리고 오늘은 밀크티도 안 사 왔잖아!”서준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이랑 밥 먹고 왔는데... 밀크티까지 마시면 배 안 터지냐...”“어...?”“어어어어어????”민지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잠깐만, 너 오늘 오전에 나랑 진일 선배랑 밥 먹는 거 본 거야?!”“흥.”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민지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입꼬리를 얄밉게 올리며 말했다.“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말이야... 전일 선배가 고향 내려가기 전에 일부러 시간 비워서 밥 사준 거야. 그것도 선배 어머니가 챙겨준 거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절해?”서준은 작게 투덜거렸다.“근데 넌 말도 안 했잖아.”목소리는 작았지만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하,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인데.’민지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투를 조금 낮췄다.“중요한 일도 아니고, 우리 일정이랑도 안 겹쳤고...”“그리고... 너도 안 물어봤잖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줄은 몰랐지.”그 말에 서준은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