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는 억울한 동시에 또 조금의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도겸 씨가 나에게 명분을 주라는 말을 듣고 뭐라 했는데?”지금 아이가 없어졌으니 그 천억도 바람처럼 사라졌다. 연희는 더 이상 아이를 이용해 돈을 얻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만약 강씨 가문에 들어가서 재벌 집 사모님이 될 수 있다면 앞으로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그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연희의 머릿속에는 가끔씩 예전을 떠올렸다. ‘내 몸이 멀쩡하고 아이도 무사할 때, 난 자주 병원에 찾아왔는데. 매일 도겸 씨와 말다툼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줌마와 싸우기도 했지...’‘난 내 몸이 아주 튼튼하다는 것을 믿고 자주 들볶았는데.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평소에 밀크티를 마시고 심지어 아이스크림까지 한가득 먹었어...’생각할수록 연희는 자신의 뺨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가 정말 없어질 줄 알았으면 난 가만히 있으면서 휴식을 취하는 건데. 왜 자꾸 화풀이를 하고 싶은 거야? 아이를 다 낳은 후에 복수하면 되잖아?’이순정은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말을 했겠어? 강도겸 그 사람은 딱 봐도 태도가 딱딱한 사람이잖아. 한 번 만나기도 어렵다고.”철봉도 들으면서 마음이 답답해졌다.‘그 아줌마는 이미 돈을 주려고 했으니 그냥 10억 챙기고 가면 되잖아? 굳이 100억을 고집하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야...’이순정을 보는 철봉의 눈빛은 원망이 더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고분고분 입을 열었다.“엄마, 그럼 우리 이제 어떡해?”이순정은 눈빛이 독해졌다.“우리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뭘 두려워하겠어? 강도겸이 동의하지 않으면 우린 다시 소란을 피우면 되지! 끝까지 한번 해보자고. 누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어!”이튿날, 모자는 다시 도겸의 회사에 찾아왔다.정문은 경비들이 엄격히 조사를 했기에 그들은 은근슬쩍 들어갈 수 없었다.다행히 철봉은 비상통로를 찾았는데, 은밀한 작은 문을 열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문에는 벽지와 어우러진 광고 포스터가 붙어 있어, 언뜻 보
모자는 눈을 마주쳤다.‘드디어 우리와 협상을 하려는 건가?!’이순정은 바로 창가에서 내려왔다.창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아주 작은 창문이었는데, 심지어 위아래로 열리는 디자인이었다. 성인은 전혀 몸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말이 안 됐다.이순정이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일 뿐이며, 도겸과 담판을 하기 위해서였다.‘다행히 성공했어.’그러나 이순정이 철봉과 뒤뚱뒤뚱 도겸의 사무실로 걸어갈 때, 뒤에 있던 비서는 처량하고 어두운 눈빛으로 그들 모자를 바라보았다.그 속에는 심지어 동정이 깃들어 있었다....이순정과 철봉이 이 사무실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이곳이 화려하다고 느꼈다.이순정도 에두르지 않고 들어온 후 직접 가격을 제시했다.“10억.”도겸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전엔 100억이라고 원하지 않았어요?”이순정은 마음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나도 100억을 갖고 싶지만, 너희들이 줘야 말이지!’그동안 이순정은 부자에게 돈이 많지만 가끔은 정말 인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수십억을 들여 말을 한 마리 사거나 골프를 쳤으며, 심지어 카지노에서 수천억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 푼도 나눠주고 싶지 않았다.‘구두쇠야 뭐야! 돈이 그렇게 많으니 우리에게 좀 나눠주면 안 돼?!’그리고 이순정은 부자들이 허리를 굽힐 수도 있지만 동시에 매정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관건은 자신에게 이용가치가 있어야 했다.예를 들면, 서영숙은 처음에 돈으로 이순정 그들을 해결하려 할 때, 그야말로 엄청난 ‘성의’를 보였다.그러나 정말 화가 났다면, 전화조차 받지 않은 채 그들을 무시했다.그러니 진정한 부자들과 소통할 때, 억지를 부려도 소용없었다.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상대방을 화나게 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이순정은 들어온 후, 밖에 있을 때처럼 울고 보채지 않고 직접 가격을 불렀다.“요 며칠 나도 깨달
빌딩에서 나올 때, 이순정과 철봉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비록 100억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이순정이 평생 노력해서라도 벌 수 없는 돈이었다.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가려 했고, 이때 화물차 한 대가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처음에 그 화물차의 속도는 정상이어서 두 모자는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어차피 차가 먼저 양보할 테니까.그러나 쌍방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 때, 화물차가 갑자기 속도를 높이더니 두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엄마...”철봉은 놀라서 본능적으로 이순정을 불렀다.이순정은 반응이 빨라서 바로 아들을 잡아당기며 옆으로 피했다.“너 뭐야?! 사람 있는 거 못 봤어?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한 거야?! 눈이 먼 거야 아니면 뭘 잘못 먹은 거야? 지금 일부러 우릴 죽이려고 작정했어?! 배상해! 이건 반드시 돈으로 배상해야 된다고!”이순정은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길 중간에 서서 욕설을 퍼부었다.“이 일을 잘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로 떠날 생각하지 마! 방금 내가 반응이 빠르지 않았더라면 이미 저 멀리 날아갔을 거야. 우리 지금 당장 병원에 가서 모든 검사를 받을 거야.”“일단 어디 다쳤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상이 없어도 넌 여전히 책임을 져야 해. 우리가 너 때문에 충격을 받았으니까. 그러니 정신적 손해 배상금을 내야지...”철봉은 바로 바닥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기 시작했다.“엄마! 나 정말 깜짝 놀랐어! 너무 무서워! 나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지금은 낮이야 밤이야? 왜 내 눈앞이 이렇게 캄캄하지?”모자는 그야말로 천상의 호흡을 선보였다. 딱 봐도 전에 자주 이런 일을 한 게 분명했다.그러나 캡모자를 쓴 기사는 이 장면을 보고 차갑게 웃더니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이순정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철봉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커다란 창문 앞에서, 키가 훤칠한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도로에서 차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도겸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는데
상대방은 차갑게 말했다.[그 입 잘 단속해.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로 하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난 손을 써서 그 입 다물게 할 수도 있어.]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기사는 핸드폰을 들고 있는 채로 멍을 때렸는데, 등은 이미 흠뻑 젖었다....밤이 찾아오자, 도겸은 창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태양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하늘은 점차 어둠으로 뒤덮였고, 음침한 기운이 구석에서 솟아났다.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유리창에 남자의 훤칠한 모습이 비쳤다.이때 도겸은 갑자기 핸드폰을 들더니 번호를 입력했다.상대방은 아주 빨리 받았다.“재밌었어, 심현빈?”맞은편의 사람은 잠시 멈칫했다.[강도겸, 너 또 무슨 약을 잘못 먹은 거야?]도겸은 웃으며 말했다.“이성수가 너에게 전화하지 않았어?”이성수가 바로 그 기사의 이름이었다.현빈은 침묵에 잠겼다.“그럼 너에게 그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알려줬겠지?”현빈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정말 안타깝네. 이성수는 감옥에 들어갈까 봐 감히 그들을 죽이지 못했어. 이렇게 되면 난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니 네 계획도 물거품으로 된 거잖아.”현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넌 언제부터 알아차린 거야?]“허, 우리가 친구로 지낸지가 언젠데. 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역시 널 잘 알고 있어.”서영숙은 분명히 이순정 모자의 카드를 끊었고, 또 호텔로 하여금 두 사람을 쫓아내라고 했다.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잘 지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최고급 호텔로 바꾸며 매일 회사에 와서 도겸을 기다렸다.만약 뒤에 아무도 없었다면 그들은 지금까지 버틸 리가 없었다.현빈은 가볍게 웃었다.[내가 방심을 했군.]“왜?” 도겸은 핏줄이 불끈 솟아오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왜 이런 함정을 만든 거지?”그래도 절친이었지만, 현빈은 마음을 먹고 도겸을 감옥에 보내려 했다.만약 이성수가 정말 사람을 치어 죽인다면, 그는 바로 체포될 것이며, 처벌을 경감하기 위해 당연
“네가 정은을 위해 날 죽음으로 몰아넣을 줄은 정말 몰랐어.”‘심현빈에게 있어 정은이 뜻밖에도 이렇게 중요하다니.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계획을 짤 줄은 더욱 생각지도 못했어.’[계획?]현빈은 가볍게 웃었다.[그건 아니야. 다만 뒤에서 그 사람들을 조금 도왔을 뿐이니까.]도겸이 말한 것처럼, 이 계획에는 허점이 아주 많았다. 만약 현빈이 직접 나섰다면, 기필코 도겸을 감옥에 보냈을 것이다.[이렇게 간단한 함정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넌 콩밥을 먹어도 싸.]‘밑지지 않는 장사인 이상, 내가 왜 포기를 해야겠어?’성공하면 직접 도겸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도겸은 여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희를 책임져야 했다.‘실패해도 괜찮아, 난 강도겸 잘 사는 꼴 못 보니까.’“정말 비겁해!” 도겸은 이를 갈았다.“한 여자를 위해 날 구덩이로 밀어넣다니?”현빈은 감탄했다.[정은이는 일반 여자가 아니야...]그녀는 소정은이었다.도겸은 냉소를 지었다.“내 앞에서는 진지한 척할 필요가 없어.”[아니, 넌 몰라...]“허, 그래?” 도겸은 현빈을 비웃었다.“이기적인 네 마음을 모른다는 거야, 아니면 네 함정을 몰랐다는 거야? 심현빈, 넌 자신을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만약 네가 정말 정은이를 좋아했다면, 우리가 함께 한 그 6년 동안 왜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을까?”정은이 온갖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슬픔과 절망에 빠져 결국 가슴이 찢어지도록 내버려두었다.“친구의 여자친구라서 넘볼 수가 없었어? 너 같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었으니 어떻게 그런 감정을 느끼겠어? 넌 일부러 그랬던 거야!”도겸은 이성적으로 분석했다.“넌 일부러 정은이 나에게 상처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지켜봤어. 오직 이렇게 해야만 정은은 날 떠나기로 결심할 수 있고, 너도 기회를 가질 수 있으니까. 넌 정은이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고, 그러다 절망에 빠지고, 결국 널 설레게 하는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냉담하게 지켜보았어.
이순정과 철봉은 화물차에 치여 죽지 않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다.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머리가 터졌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긁혔다.화물차가 다가올 때, 철봉은 아직도 땅바닥에서 뒹굴며 소란을 피웠기에 반응을 할 때 이미 늦었다. 그는 손발이 나른해져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나지도 못했다.그렇게 철봉은 화물차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엄마!”철봉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이번에 정말 죽을 줄 알았지만, 화물차는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순식간에 그와 스쳤다.철봉은 놀라서 제자리에 앉아 멍을 때렸다.정신을 차린 후, 그는 자신의 바짓가랑이가 젖었다는 것을 발견했다.방향을 바꾼 화물차는 다시 이순정을 향해 돌진했다.이순정은 본능적으로 도망쳤지만, 화물차는 마치 쥐를 잡는 고양이처럼 그녀를 쫓아갔다.죽일 생각은 없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이렇게 계속 이순정에게 겁을 주었다.이순정은 도망치고 피하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이미 지쳐서 기진맥진했지만, 생존 본능 때문에 그녀는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이때 이순정은 나무에 머리를 박더니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기사는 마침내 공격을 멈추며 화물차를 몰고 훌쩍 떠났다.“엄마... 엄마, 괜찮아?” 철봉은 땅에서 일어나 오줌을 지리며 이순정에게 달려갔다.이순정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있었다. 이마에 엄청난 상처가 생겨 지금 밖으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철봉은 손으로 피를 막으려 했지만, 자신이 방금 바짓가랑이를 만져 손에 오줌이 묻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엄마! 정신 차려!”한참 동안 이순정을 흔들며 부르자, 그녀는 마침내 두 눈을 떴다.“내가 왜 바닥에 쓰러졌지?” 이순정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제야 무엇을 떠올린 듯 이순정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온몸을 떨었고 이를 갈았다.마치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가자...”이순정은 철봉의 손을 덥석 잡으며 힘껏
“다 너 때문이잖아! 어디서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고 있어! 너만 아니었으면 나와 철봉이가 어떻게 강도겸을 찾아갔겠어?”돈을 얻을 수 없게 되자, 이순정도 자애로운 척하고 싶지 않았다.철봉이 맞장구를 쳤다.“그 강도겸이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왜 진작에 말하지 않은 거야? 오늘 나와 엄마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지금 일부러 우리를 해치려고 그런 거지? 그리고 그 6억을 독차지하려고!”연희는 다급히 반박했다.“그런 적 없어! 내가 왜 엄마와 널 해치려 했겠어? 나도 도겸 씨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고!”이순정은 냉소를 지었다.“넌 강도겸의 곁을 그렇게 오래 따라다녔는데,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그래! 이 상처들도 정말 많은 돈을 썼는데, 지금 강도겸 쪽은 한 푼도 주려 하지 않잖아. 그러니 누나가 돈 배상해! 돈 없다고 발뺌하지 마. 강도겸은 너에게 6억을 준 적이 있다고 말했어!”이 일을 말하자, 이순정은 바로 화가 났다. ‘분명히 돈이 있는데도 일부러 숨기다니. 나와 철봉이를 팔아먹은 것과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돈을 받으면 되고. 양심도 없는 계집애!’연희는 시선을 피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나한테도 지금 돈이 얼마 없어. 4백만 원 정도밖에 줄 수 없단 말이야...”“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네 속셈을 모를 것 같아? 카드는?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면 여기에 있는 거야?”이순정은 연희가 자신의 성격과 똑같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 계집애 지금 틀림없이 돈을 어디에 숨겨놓았을 거야!’그녀는 울부짖고 있는 연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사방을 뒤지기 시작했다.연희는 마지막 남은 돈까지 빼앗길까 봐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철봉이 가로막았다.“가만히 있어! 나와 엄마는 누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한 줄 알아? 하마터면 차에 치여 죽을 뻔했는데, 사례비를 좀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이순정은 책상과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가방에서 은행카드 한 장을 찾았다.“철봉아! 빨리 와!
“병원비를 납부하라고?” 연희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줄곧 도겸 씨의 계좌에서 돈을 긁지 않았어?”“죄송하지만 그 계좌는 이미 사용금지가 된 상태라서요.”“사용금지?! 왜?!”“이건 대표님께서 직접 신청하신 거예요.”‘도겸 씨가 직접 신청했다니...’“하하하... 강도겸, 당신 정말 너무 독하구나!”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던 연희는 이날 마침내 퇴원했다.그녀는 맑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보면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도겸은 오늘 일찍 퇴근했다.차에 찬 후, 그는 기사에게 분부했다.“별장으로 가.”“네, 대표님.”도중에 도겸은 눈을 잠깐 붙이다가, 창밖을 휙휙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떴다.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침울한 날씨는 곧 비라도 내릴 것만 같았다.매년 장마철이 되면 눅눅하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도겸은 혐오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차는 평온하게 별장 구역으로 들어갔다.이때 기사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끼익.도겸의 몸은 관성으로 인해 앞으로 기울어졌는데, 안전벨트가 없었다면 지금쯤 이미 앞좌석에 부딪혔을 것이다.“어떻게 된 거야?” 그는 말투가 좋지 않았고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죄송합니다.”기사는 재빨리 사과했다.“한 여자가 갑자기 뛰쳐나와서 저도 얼른 브레이크를 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도겸은 고개를 들었다.밖에는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차 앞에 서 있었고, 몸은 이미 푹 젖었다. 머리카락은 목에 달라붙었으며 얼굴은 핏기가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연희는 생얼에 하얀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때 빗물에 젖은 옷감은 그녀의 몸에 딱 달라붙었는데, 여자의 아름다운 몸매를 그대로 그려냈다.마치 폭우 속의 꽃처럼 애처롭게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며 떨어질 듯 말 듯했다.기사조차도 마음이 약해졌다.그러나 도겸은 냉담하게 시선을 거두며 눈빛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이곳의 치안이 언제 이렇게 나빠졌지? 아무나 안으로 들여보내다니. 경비원에게 통지해서 이 여자 끌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