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릴 때, 그곳에 아예 정은이 없었다.동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너희들 또 계속 싸울 거잖아?”도겸과 현빈은 말을 하지 않았다.“다들 어른인데, 왜 자꾸 이렇게 유치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거야?”현빈이 말했다.“이 자식이 먼저 손을 썼단 말이야.”“네가 얻어맞을 짓을 했으니까!”“됐어, 둘 다 진정해. 이따가 정말 소정은이 나타난다면, 너희 둘 다 무시를 당할 거야.”현빈은 입술을 깨물었고, 도겸은 침묵에 잠겼다.이때 선우가 입을 열었다.“가요, 먼저 병원에 가서 상처를 처리해야죠.”“아니.” 도겸은 고개를 들어 차갑게 현빈을 바라보았다.“여전히 그 말이지만, 넌 정은이를 얻을 수 없어.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해.”“그래?” 현빈은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겠어? 난 그래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지만, 넌 이미 아웃됐잖아.”도겸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또다시 손을 쓰려 했다. 다행히 선우가 재빨리 그를 붙잡았다.“병신.”현빈은 차갑게 말한 다음 차 문을 열고 곧장 떠났다.도겸은 선우를 밀어냈다.“이거 놔! 저 자식 이미 떠났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날 붙잡고 있는 거야?”선우는 한숨을 쉬었다.“도겸이 형, 대체 왜 그래요?”도겸은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 문제는 심현빈에게 물어봐!”‘한때 우린 좋은 친구였는데, 왜 하필이면 정은이에게 반한 거야?’말을 마치자, 도겸도 차에 올라탔다.선우와 동건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내 마음이 다 괴롭네요.”“그 두 녀석이 기어코 일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우리도 간섭할 수 없잖아.”“현빈이 형은 대체 왜 이러는 거죠?”‘왜 하필이면 정은 누나를 좋아하게 된 거지?’동건은 멈칫했다.무엇이 생각났는지 그는 유유히 말했다.“한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어. 가끔은 이성까지 잃을 수 있으니까.”‘엥? 형 예전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재석은 즉시 타자를 하며 답장을 하려 했다.‘아니야,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냥 직접 정은이를 찾아가자. 오늘 마침 일요일이니까 정은이도 집에 있을 거야.’“나 먼저 갈게. 그리고 세 조의 데이터가 곧 나올 테니까 여기서 지켜보고 있어.”말을 마치자마자 재석은 곧바로 떠났다.“아니... 내가 말했잖아, 나 오늘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야, 네가 왜 가는 건데? 내가 허락했냐고?! 어제 돌아가서 쉬라고 할 때는 대답을 하지 않더니, 오늘 내 휴식 시간을 빼앗는 거야?! 조재석, 너 정말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그러나 재석은 집에 돌아와서 옆집 문을 두드렸지만, 좀처럼 정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정은아? 안에 있어?”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재석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은 그는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미안, 그동안 실험실에 있어서 줄곧 핸드폰을 보지 못했거든.][이제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30분을 기다렸지만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정은이 나에게 문자를 보낼 때도 점차 기대에서 실망을 느꼈겠지?’정은은 확실히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지금 그녀는 새로 신청한 실험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서준은 신청을 제출할 때, 특별히 교무처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는데, 가장 크고 거리가 상대적으로 먼 실험실을 선택했다.선생님은 서준이 잘못 선택했을까 봐 여러 차례 확인을 했다.이 실험실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는데, 과제팀이 사용한 적이 거의 없었다.첫째는 면적이 너무 컸기 때문이고, 둘째는 기자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강의동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이 실험실로 정할게요.”면적이 넓으면 따로 휴식실을 만들어 점심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기자재가 부족하면 그들은 스스로 사면 된다.비록 강의동과 많이 떨어져 있지만, 식당과 가까워서 민지의 마음에 딱 들었다.지금 유일한 단점은 바로 청소하기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오전 내내 치웠지만, 세 사람은 겨우 실험대, 실험장, 탁자와 정수기
비록 민지는 재석이 누군지 몰랐고, 그와 정은의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민지는 그저 미친 듯이 마음속의 답답함을 발산하고 싶었다.점심을 먹은 다음, 세 사람은 다시 실험실로 돌아왔다.민지는 허리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넓기는 넓지만 청소하기가 너무 어렵잖아. 흑흑...”그러나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가 C116 교실인가요?”청소부 두 명이 문 앞에 나타났고, 손에는 청소 도구까지 들고 있었다.“네? 맞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그럼 됐어요! 우리도 얼른 시작하자.”또 다른 청소부 아주머니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민지는 눈을 깜박였다.“아주머니, 교실 잘못 찾아오신 건 아니죠?”“아닌데요, C116 교실 맞아요. 교무처에서 이곳을 청소하러 오라고 통지했거든요.”‘교무처?’민지와 정은은 동시에 서준을 바라보았다. “네가 찾은 거야?”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그럼 누구일까? 우리는 오늘 청소하러 왔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잖아. 됐어, 어차피 청소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제야 살 것 같네...”말을 마치자마자 민지는 의자에 앉더니 감자칩 한 봉지를 열었다.그녀는 혼자 먹을 뿐만 아니라 정은과 서준에게도 나누어 주었다.정은은 먹으면서 딴 생각을 했다.‘제때에 도와주지 못한 것 때문에 미안해서 이런 방식으로 보충하려는 건가? 사실 안 그래도 되는데...’민지는 서준의 어깨를 두드렸다.“넌 왜 안 먹어?”“먹고 싶지 않아. 지금 다이어트 중이거든.”‘그냥 굶어죽어랏!’...이와 동시, 서비대학교 생명과학대학 부학장실에서.백두강은 식은땀을 닦으며 입술이 터질 정도로 웃고 있었다. 그러나 맞은편의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그는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심 대표님, 오랜만에 학교에 나오셨는데. 무슨 이유로...”“내가 왜 왔는지 정말 모르
현빈의 표정은 그제야 누그러졌다.“부학장님은 결코 저를 실망시키지 않네요. 이것도 학교의 그렇게 많은 학장과 부학장님들 중에서 내가 유독 부학장님과 협력한 이유예요.”“저도 심 대표님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니 정말 영광스럽네요.”현빈은 일어나서 사무실을 떠났다.백두강은 직접 그를 바래다주었는데, 남자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웃음을 거두었다.사무실로 돌아오자, 백두강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교무처에 전화를 걸었다.“최근 CPRT 측정기를 설치한 그 두 실험실의 신청 기록 좀 확인해.”전화를 받은 사람은 어리둥절해졌다.[그중 한 대는 줄곧 송 교수님의 연구팀이 사용하셨는데, 다른 한 대는... 최근에 남진일 학생이 빌려갔어요.]“남진일? 걔도 송지혜의 연구팀에 속하잖아?”[그래요, 저도 그때 영문을 몰랐죠. 이미 한 대를 차지했는데도 다른 한 대를 신청하려 하다니? 마침 오 교수님의 학생들도 와서 그 실험실을 빌렸어요. 아쉽게도 한 발 늦었지 뭐예요...]“그러니까 오미선 쪽에서도 신청했었던 거야?”[맞아요. 거의 동시에 신청을 했죠.]‘어쩐지!’백두강은 그저 오미선의 인맥이 대단해서 현빈이 대신 나섰다고 생각했다.“그 실험실 비워둬. 남진일도 참, 왜 소란을 피우고 있는 건데!”그는 진일의 배후에 있는 송지혜를 추호도 언급하지 않았다.[네.]통화를 마치자마자 백두강은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이때, 사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그는 이마의 땀도 미처 닦지 못하고 다시 방긋 웃으며 일어섰다.“조 교수님! 어쩐 일로 여기에 오신 거죠? 어서 앉으세요.”재석은 그와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학교 규정에 ‘공공 자원을 악의적으로 독점하거나, 단체 간 악성 경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을 텐데요. 부학장님께서는 이런 규정과 제도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아시겠죠?”백두강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설마? 또 이 일 때문인 거야?!’...두 청소
“이거 뭐야?”“실험기기 같은데! 그것도 외국인 기술자들이 직접 배달한 거 있지!”“그냥 배달만 하는 줄 알았어? 기기가 설치되면 디버깅도 해야 한다고.”“이 실험실은 예전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대단한 기계를 추가한 거지?”“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당연히 누가 빌렸겠지!”“정말 돈이 많네, 이 기기는 보기만 해도 비싼데!”...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자, 진호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졌다.지예는 맨 앞으로 비집고 나오더니 기계를 쳐다보았고,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였다.CPRT는 맞지만 그들과 똑같은 기계가 아니었다.학교에 있는 기존 두 대보다 크기가 절반이나 작은 데다가 심지어 버튼은 모두 터치만 하면 되었다. 디스플레이도 두 배 이상 컸다.“이... 이게 최신형 CPRT라고?!” 진호는 삑사리 날 뻔했다.그들의 기계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능도 더욱 완벽했다.그는 달려가서 물었다.“이 기계 어디서 난 거야?!”정은이 말했다.“너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민지는 과자를 먹으면서 미소를 지었다.“어제 우리에게 혼자 사라고 하지 않았어? 짜잔, 이게 바로 우리가 돈 모아서 산 거야. 대단하지? 뜻밖이지? 너도 우리를 위해 기뻐할 거지?”진호는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지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럴 리가 없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도착하다니. 정말 샀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해!”서준이 말했다.“넌 예약이라는 것도 모르나 봐?”“그... 그럴 리가 없어...”‘그렇게 비싼 기계를 이렇게 쉽게 샀다니?’그러나 이것은 가장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다.그날 오후, 처벌 공지가 학교 공식사이트 홈페이지에 올라왔다.내용은 다음과 같았다.[조사 결과에 따르면 3학년 남진일이 고의적으로 실험실을 독점하여 연구 자원을 심각하게 낭비한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처벌을 내릴 예정이니, 우리 단과대학의 모든 교수님과 학생들은 이번 일을 반드시 교훈으로
재민은 아직 정식으로 실험과제를 접촉하지 않았기에 이 기계가 어떻게 특별한지 잘 몰랐다. 그러나 진일이 놀란 기색을 보이자, 그도 참지 못하고 곁눈질을 했다.“형, 이거 비싸요?”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엄청 비싸지.”“얼마나 하는데요?”“3억 정도.”“네?!”‘이... 이건 너무 비싸잖아. 이렇게 비싼 물건을 어떻게 이렇게 쉽게 살 수가 있는 거지? 세 사람이 3억을 모았다니...’재민은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그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농부들이었고, 수확이 가장 좋을 때도 일년에 고작 수백만 원밖에 벌지 못했다.그리고 이 기계를 사려면 수억 원이 넘었다.재민은 제자리에 서서 멍을 때렸다.이때 복도에서 민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그들이 돌아왔어!’진일과 재민은 뒷문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갔다.나가기 전에 진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햇빛속에서 정은, 민지와 서준 세 사람은 웃으며 실험실로 들어갔다.정은은 손에 생수를 들고 있었는데, 아주 비싼 브랜드였다.민지는 간식을 한가득 안고 있었고, 포장에 영문이 가득 씌었기에 값도 엄청 비쌀 것이다.서준은 스포츠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그것은 진일이 종래로 본 적이 없는 포장이었고, 그는 그게 어떤 맛인지조차 몰랐다.“형,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재민은 진일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정말 좋네.”재민은 감개무량했다.“그러게요, 새 기계이니 당연히 좋겠죠.”진일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그가 말한 것은 결코 기계가 아니었던 것이다.정은 그들은 반항할 용기가 있었고, 맞설 실력이 있었으며, 더욱 이 모든 것을 받쳐줄 수 있는 돈이 있었다.‘정말 행복하겠군.’이 순간, 실험실 안에서.정은이 말했다.“선생님들 먼저 물 좀 드세요.”민지도 맞장구를 쳤다.“여기 간식도 있어요!”...오미선은 새로운 CPRT가 들어온 지 사흘 만에 이 일을 알게 됐다.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송지혜!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송지혜가 물었다.백두강은 차갑게 웃었다.“묻지 마, 어차피 네가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니까.”현빈이 이 일로 찾아왔을 때는 그래도 백두강과 예의를 차렸지만, 재석은 직접 문을 밀고 들어와서 질문을 했던 것이다.‘어쩔 수 없지 뭐. 그분은 학술계를 뒤흔들어 놓으신 분이니까.”서비대학교는 한 회사의 경제적 지원을 잃을 수 있지만, 학술 성과를 산출할 수 있는 과학자를 잃을 순 없었다.“그냥 돌아가. 썩어도 준치라고, 넌 오미선 교수에 비하면 아직 멀었어!”백두강은 냉소를 지었다.‘오미선 교수는 심지어 병원에 입원해 있었잖아. 그런데도 말 한마디에 심 대표와 조 교수님이 바로 나서셨다니. 송지혜, 넌 쥐뿔도 아니야!’...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송지혜의 귓가에 여전히 백두강의 말이 울렸다.“넌 오미선 교수에 비하면 아직 멀었어!”“아직 멀었어!”“멀었어...”화가 나서 컵을 던지고 싶었지만, 방금 나가기 전에 그녀는 이미 컵을 깨뜨렸다.그래서 손 옆에 필통 하나밖에 없었다.쾅.필통이 벽에 떨어지자, 안에 있던 펜이 바닥에 흩어졌다.이때 서지예가 마침 문을 밀고 들어왔다. 사무실의 우울한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그녀는 인사를 하고 들어온 다음, 안쪽의 탕비실에 가서 음료수 한잔을 따랐다.그리고 마시면서 입을 열었다.“목말라 죽는 줄 알았네... 참, 이모, 진일 선배는 논문을 언제 완성할 수 있는 거죠? 오늘 수업할 때 교수님이 물어보셨거든요. 제가 이번 주 안으로 바칠 거라고 했어요. 이모가 좀 재촉해 주세요!”송지혜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논문 쓰는 게 쉬운 줄 알아? 이번 주 안으로 완성할 거라고?! 넌 큰소리를 치기 전에 미리 생각도 하지 않는 거야?!”송지혜가 한바탕 욕설을 퍼붓자, 지예는 어리둥절해졌다.“이모...”“닥쳐! 학교에서는 날 교수님이라 부르라고 했잖아!”“그런데 여기 아무도 없잖아요...”지예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그냥 데이터가 일치하도록 고쳐. 더 이상 검증할 필요가 없으니까.”진일은 이미 예상했지만, 직접 이 대답을 들으니 여전히 충격을 받았다.“이건 학술 조작이에요!”그는 또박또박 말했다.송지혜는 안색이 돌변했다.“진일아, 넌 철이 든 아이잖아. 어떤 말은 해도 되고 어떤 말은 하면 안 되는지, 너도 다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을 거야. 네 교수님으로서 나는 단지 너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생각을 제공할 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여전히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해.”진일은 고개를 들며 처음으로 예리한 눈빛으로 송지혜를 직시했다.“교수님, 이건 옳지 않아요.”‘이건 옳지 않아...’...진일이 떠난 후, 송지혜는 사무실 문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지금 납득이 안 가도 괜찮아.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 성장할 테니까. 그때 가면 진일도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SCI를 얼마나 많이 냈는지, 얼마나 많은 학술 성과를 냈는지야.’과학연구가 단순하다고 하지만, 송지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인맥, 자원, 돈, 지위, 직함등이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은 전부 학술 성과와 관련이 있었다.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솔직하게 말할 자격이 있지만, 그 전제는 정상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송지혜는 핸드폰을 꺼냈다.“서정이 좀 불러와.”‘이제 드디어 강서정이 나설 차례가 됐군.’“서정아, 개학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적응 잘 하고 있는 거야? 선배들은 어때? 널 괴롭히진 않았지?”강서정은 송지혜의 관심에 깜짝 놀랐다.“아니에요, 선배님 모두 저에게 잘해 줬어요.”“어, 그럼 됐어. 오늘은 실험실과 관련된 일이 있어서 널 찾은 거야. 너와 상의하고 싶거든.”서정은 두 눈을 반짝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저도 이제 곧 실험실에 들어가서 연구를 참여할 수 있는 거예요?”“넌 내가 인정한 학생이잖아. 그러니 과제팀에도 당연히 네 자리가 있겠지. 하지만 지금 문제가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