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날 그렇게 쳐다봐? 빨리, 나 목말라 죽겠어!”동건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얼음물 한 잔을 마시니, 수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니까 좀 부끄럽네...”남자가 물을 따르러 가는 틈을 타서 수민은 이미 옷을 다 입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어머, 벌써 11시라니!’“부끄러워? 우리 조수민 아가씨가?! 넌 아주 당당하던데!”동건은 마치 찔려 터진 고무공과 같았다. 전에는 겨우 참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 쌓인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했다.“당당하게 나에게 물 좀 따르라고 시켰잖아? 그게 부끄러워서 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말을 마치자 동건은 작은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수민은 눈살을 찌푸렸다.“너 뭐 잘못 먹었어? 왜 나한테 성질이야?”“오늘 아침에 네 방에서 나간 그 남자부터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야?”수민은 영문을 몰랐다.“설명할 게 뭐가 있어? 넌 여자와 잤다고 특별히 남에게 설명할 거니?”동건은 말문이 막혔다.“아니, 나도 지금 어쨌든 네 남자친구잖아?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난 뭐가 되는 건데?”그를 바라보는 수민의 눈빛은 더욱 의혹에 빠져들었다.“첫째, 넌 내 가짜 남자친구야. 둘째, 난 남들 앞에서 다른 남자와 잔 게 아니라, 단지 내 방에서 잤을 뿐인데. 이게 너한테 무슨 영향을 준다는 거지? 합작하기 전에 우리 이미 약속했잖아, 서로의 감정에 간섭하지 말자고. 난 계약을 위반한 적이 없어. 그런데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동건은 말로 수민을 이길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났다.수민은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그나저나, 이 호텔 정말 좋네. 앞으로 여긴 내 방이야. 다음에 또 와야지.”‘방금 다음에 또 올 거라고 했어?!’“참, 이따가 프론트에 전화해서 룸 카드 한 장 더 준비해 달라고 해.”“뭐 하려고?”“한 장은 나 혼자 쓰고, 다른 한 장은 남에게 주려고!”‘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물어보다니.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아예 바보로 된
“그전에.”“도련님께서 분부하셨으니...”“더 전에.”“1901호 방이 체크아웃을 마친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그 여자 이미 떠났다고?!”“네, 약 10분 전에요.”“젠장!”지배인은 영문을 몰랐다.“그 여자들 전부 나가라고 해! 보기만 해도 짜증 나니까.”‘아니, 전에 전화하셨을 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는데.’짜릿하고 두근거리는 이쪽과 달리, 정은 쪽은 여전히 평온했다.아침 7시, 그녀는 스스로 깨어난 다음, 아침을 차려 놓고 장을 보러 나갔다.9시,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 정은은 소진헌이 감탄하는 것을 들었다.“이야, 조 교수는 물리 연구를 잘 할 뿐만 아니라 화초를 다루는 데도 이렇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니!”신발을 바꾸던 정은은 잠시 멈칫했다. 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베란다에서 들려왔다.“아니에요, 과찬이세요.”재석이었다.정은은 채소를 주방에 놓은 다음, 아침에 끓인 차 두 잔을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소진헌과 재석은 베란다 문을 등진 채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예닐곱 개의 화분이 놓여 있었고, 흙과 식물이 함께 파였다.“아빠, 선배님, 차 좀 마셔요.”“정은이 돌아왔구나. 오늘 시간 있으니까 이 화분들 전부 정리해 줄게. 이 꽃들은 뿌리가 이미 썩었어.”말하면서 소진헌은 손을 뻗으며 차를 받으려 했다. 자신의 손에 진흙이 묻은 것을 보고 그는 얼른 손 씻으러 갔다.“선배님.”재석은 많이 똑똑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일회용 장갑을 꼈기 때문이다.장갑을 벗은 후, 그는 직접 컵을 받았다.“고마워.”“선배님은 언제 왔어요?”“30분 전에.”“오늘은 실험실에 안 가도 되는 거예요?”“오후에 갈 거야.”“그럼 어떻게...” ‘우리 집에 찾아온 거지?’정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재석은 웃으며 대답했다.“조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쓰레기를 버리러 가시는 아저씨와 부딪쳤거든.”소진헌은 또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재석이 오전에 한가하고 오후에야 실험실에 가면 된다는 것을
갑자기 되살아난 기억에 정은은 당황하기 그지없었다.‘남의 옷깃을 붙잡고 매달린 사람이 나라고?’남자와 눈을 마주치자, 정은은 어색해서 땅만 바라보았다.“생각났어?”“미안해요, 난...”“그런 문제를 물어볼 필요가 있겠어? 당연히 안 되지. 남이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드럼도 아니고. 너도 말했잖아. 많이 두드리면 바보가 된다고.”재석의 말 한마디에 어색한 분위기가 좀 풀렸다.“그럼 왜 내 머리를 두드린 거예요...”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기억이 돌아오자, 정은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분명히 선배님이 먼저 날 건드렸는데...’재석은 정색했다.“그래도 술 좀 적게 마셔. 맛있어도 욕심 부리지 말고.”“네.”정은은 또 어찌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손을 씻고 돌아온 소진헌은 차를 들고 한 입에 마셨다.재석은 천천히 음미하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술에 관한 얘기요...”“참, 조 교수, 자네 점심에 여기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건 어떤가? 우리 술 한 잔 하자고. 지난번에 그 원자력 발전 신기술에 대해 말했잖아... 그때 얘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오늘 계속 이야기하자!”재석은 처음으로 바로 응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정은을 바라보았다.“넌 어떻게 생각해?”“술, 술은 마시지 말죠?”‘술을 마시다 또 무슨 망신을 당할지도 몰라!’“선배님은 오늘 오후에 실험실에 가야 하잖아요. 그러니 술을 마시면 안 돼요. 아빠도 술 마시지 말고 그냥 식사만 하세요.”소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조 교수는 마실 수 없지만, 우리 둘이 좀 마시면 되잖아.”“어?” 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정은이는 술을 아주 좋아하나 봐요?”“그럼, 어제도 나랑 술 한잔하자고 했는데, 정은이 엄마가 못 마시게 말렸거든.”정은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아빠도 참. 내가 이렇게 눈짓을 하고 있는데! 왜 선배님한테 이런 얘기까지 하시는 거냐고!
이미숙은 어이가 없었다. ‘남을 칭찬할 때 꼭 자신을 어필한다니깐.’오후 1시, 재석은 떠날 준비를 했다.소진헌은 베란다에 앉아 계속 화분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얼른 정은을 불렀다.“정은아, 네 재석 삼촌 좀 배웅해줘!”재석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표정이 굳어졌다.정은은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섰다.“아빠,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선배님, 나 좀 기다려요...”“응.”정은이 재석을 문 밖으로 배웅하자, 소진헌은 작은 소리로 흥얼거렸다.“지난번에 조 교수를 내 동생으로 삼겠다고 했잖아. 그러니 당연히 삼촌이라고 불러야지...”...눈 깜짝할 사이에 소진헌과 이미숙은 이미 J시에서 이주 넘게 머물렀다. 정은은 때가 됐다 싶어 이미숙에게 나석천을 소개해 주려 했다.“엄마, 사실 이번에 아빠랑 같이 J시에 오라고 한 이유가 따로 있었어요.”“무슨 일인데?”정은은 서류 봉투를 꺼내 이미숙 앞으로 밀었다.“이것은 엄마와 유보영이란 사람과 체결한 계약서예요. 전에 전자판을 달라고 한 다음, 그것을 프린트해서 출판인과 지식 재산권 변호사에게 보여 줬어요...”이미숙은 가슴이 떨렸다.정은은 그녀에게 열어보라고 했다.“위에서 붉은 펜으로 표기된 곳은 모두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이에요. 예를 들어, 계약상 이 출판사는 사실 유보영이 주주이고, 그 사람의 가족이 출자한 출판 스튜디오예요.”심지어 정규 출판사라고 할 수도 없었다.출판사는 정규 출판 자격이 있어야 정식으로 도서 번호를 가진 도서를 발행할 수 있지만, 이 스튜디오는 삽화, 오디오 소설, 웹 소설만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이미숙이 10년 동안 제대로 된 책을 발행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좋은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보영이 출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유보영은 이미숙이 쓴 시작과 대강을 전부 부결했던 것이다.“출판을 할 수 없는 이상, 애초에 왜 네 엄마를 찾아서 계약을 한 거야? 그것도 10년이란 계약을 체결했잖아?”이미숙은 이미 충격을 받아 멍해졌다. 소진헌은
“해외?”“네, 이 두 책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전자책 판매량과 종이책 판매량이 모두 상위권에 들어갔거든요.”이미숙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난 이 두 권의 책이 해외에서 발행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는데...”“제가 계산을 해봤는데, 그동안 『살기』와 『황량한 마을 학교』가 가져온 수익이 적어도 이 정도 할 거예요...”정은은 한 손을 내밀었다.소진헌이 말했다. “5천만 원?”“아빠, 더 대담하게 추측해 보세요.”“50억?!”정은은 고개를 저었다.“500억이에요.” 그것도 대충 계산한 결과였다.소진헌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엄마.”정은은 이미숙의 곁에 다가앉아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손을 맞잡았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이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계약이 끝난 만큼, 엄마와 유보영 사이의 10년 묵은 원한도 이제 마침표를 찍을 때가 온 거예요. 지금 중요한 건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거예요.”“경제적인 손해보다도,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버린 것이 더 가슴 아픈 일이라는 걸 저도 잘 알아요. 작가에게 십 년이란 시간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시간이니까요.”이미숙은 등을 돌리더니 훌쩍거리기 시작했다.“엄마가 그동안 미처 발행하지 못한 원고를 다른 한 편집장님에게 보냈는데, 가서 한번 만나 보세요.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줄 거예요...”이미숙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래.”그날 밤, 작은방에서 낮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남자의 따뜻한 위로도 있었다.정은은 눈을 뜨고 천장을 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튿날, 정은과 소진헌은 이미숙을 데리고 커피에 갔다.카페는 빌딩을 등지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지나자 안에 손님이 얼마 없었다.렉돌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른하게 프론트에 엎드려 있었다. 딩동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고양이는 하품을 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왼쪽 창가 자리에 얼굴이 네모난 남자가
그동안 이미숙은 꿈에서도 자신의 미스터리 작품이 다시 출판되길 바랐다.유보영을 찾아 몇 번이나 상의했지만, 그녀는 항상 다른 이유로 거절했다.그러나 지금, 앞의 이 남자가 갑자기 이 작품들을 출판할 수 있다고 말하다니. 게다가 이뿐만이 아니었다.“만약 작가님께서 동의를 하신다면, 저희는 즉시 도서 번호를 신청할 것입니다. 동시에 인쇄공장과 매체에 연락하여 사전의 모든 준비를 마칠 것입니다. 그 후에는 조판, 인쇄, 홍보, 출시가 남았죠. 전체 과정은 두 달 안에 완성될 것으로 예상됩니다.”“저작권료와 후속 수입 배분에 관해서, 저희는 이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물론 다 보신 후에 의견을 제출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잘 상의할 수 있습니다.”나석천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왔다.제시된 저작권료와 배당 비율도 매우 성의가 있었다. 그 외에 그는 심지어 계약서까지 들고 왔다.이미숙은 처음에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나중에는 나석천의 말을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나 선생님.”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미안해요...”나석천은 이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제시한 조건은 이미 상당히 완벽하지만, 제 자신 때문에 그래요. 저도 잠시 냉정을 취해야 할 것 같아요...”10년 동안 자신의 작품이 매몰된 이미숙은 지금 엄청난 경계를 하고 있었다.비록 나석천이 매우 솔직하고 성의가 넘쳤지만, 당시 유보영이 찾아와서 계약을 하려 했을 때도 이랬다.그러나 그 결과, 이미숙은 지금 트라우마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나석천은 실망을 느꼈지만, 그래도 이미숙의 선택을 존중했다.“이 작가님, 지금 작가님의 심정을 잘 이해합니다. 누가 이런 일을 당하더라도 한동안 우울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완벽한 미스터리 추리 작가는 일반 사람보다 더 이성적이고 명석할 것이라 믿습니다.”“이것은 제 명함입니다. 위에 저의 모든 연락처가 있으니, 만약 생각을 바꾸셨다면 저와 텐스출판사가 작가님이 가장 먼저 연락하고 싶
정은과 소진헌은 카페 밖에 앉아 있었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이미숙이 심각한 표정을 하다가 마지막에 미안한 표정을 지은 것을 보니 분위기가 그렇게 유쾌하지 않은 것 같았다.나석천은 이미 일어나서 떠날 준비를 했지만, 이때 이미숙이 고개를 들어 무슨 말을 했다. 그는 마치 불과 닿은 촛불처럼 열정이 다시 넘쳐흘렀다.그리고 다시 앉아서 계속 이미숙과 상의했다.이번에 이미숙이 말이 많아졌고, 무뚝뚝했던 얼굴도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얘기를 끝낼 때, 나석천은 일어나 다시 손을 내밀었다.“이 작가님, 저희와 즐거운 협력을 하셨으면 좋겠네요.”이번에 이미숙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일어나 악수했다.“고마워요. 사실 처음부터 수정한 원고를 내놓으셨다면, 저희의 대화가 많이 순조로웠을 텐데.”그러나 나석천은 고개를 흔들었다.“글은 아주 신성한 존재입이다. 그것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정서를 표현할 수 있으며, 아름다움을 찬양할 수 있지만, 유독 남을 이용하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이미숙은 감탄했다.“당신은 정말 좋은 편집장입니다. 이번에...”‘또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은은 이미숙에게 나석천의 첫인상에 대해 물었다.“착실하고, 성실하고, 성의가 있어.”“그래서, 지금 얘기를 끝내신 거예요?”“응. 난 이미 희망을 품지 않았지만, 그 성의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 자세히 생각해 보면, 상황은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을 거야. 그럼 서로에게 기회를 줘야지.”집에 돌아온 정은은 계약서를 뒤지다가 갑자기 감탄을 했다.이미숙은 고개를 돌렸다.“왜 그래?”소진헌은 즉시 다가왔다.“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이 계약서에는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무척 평등했다. 심지어 이미숙에게 더 이롭기도 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계약서가 책 대신 작가를 체결했던 것이다.나석천이 작품만 보고 작가를 보지 않던 관례를 깨고, 이미숙과
그날 저녁, 정은의 은행카드에는 4천만 원이 더 많아졌다.그녀는 잔액 변동 알림을 받고 멍해졌다. 잠시 후, 정은은 바로 이불을 들추고 일어나 쿵쿵거리며 옆방으로 달려갔다.“엄마, 왜 저한테 돈을 주시는 거예요?”이미숙과 소진헌은 눈을 마주쳤는데, 마치 정은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미리 예상한 것 같았다.“네 아빠와 상의를 해봤는데, 그때 너 별장을 사느라 엄청 많은 돈을 썼잖아. 전에 우리는 분담할 능력이 없었지만, 지금 돈이 생겼으니 주는 거야. 비록 여전히 부족하지만 적어도 널 도와 부담을 좀 덜어주고 싶어.”“저한테 돈 많아요!”“알아.”이미숙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나도 네가 돈이 부족해서 준 게 아니야. 별장은 나와 네 아빠가 살고 있잖아. 이제 우리도 여유가 생겼으니, 집을 산 비용을 조금 분담하는 게 당연하지.”“그러나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이렇게 분명하게 계산할 필요가 없는데.”“나도 이 말에 동의해. 그래서 넌 계속 우리와 이렇게 따질 거니?”이미숙이 이렇게 말하자, 정은은 말문이 막혔다.“하지만...”“자, 이제 그만해.”소진헌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네 엄마 말 들어. 게다가, 앞으로 우리에게 돈 쓸 곳이 필요하다면, 넌 우리를 무시할 거니?”“그럴 리가요.”“그럼 됐어. 시간도 늦었군. 내일 우린 고속열차 타야 하니까 얼른 자야 돼.”“그럼 이 돈은 우선 제가 관리하고 있을게요. 돈 쓰실 곳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그래, 얼른 가서 자.”정은은 그제야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이미숙이 말했다.“우리 착한 딸이 또 잠을 설치겠어요.”“사실 정은 이런 돈에 신경을 쓰지 않을 거야...”소진헌은 정은에게 돈이 꽤 많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었다. 구체적인 액수에 대해 묻지 않았지만, 아마도 수백억 정도는 있을 것이다.이미숙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건 정은의 돈이에요. 우리가 준 돈이 아무리 적어도 부모님으로서의 마음이고요.”이것은 돈이 많든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
“안녕하세요.”정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은혁은 일행과의 대화를 뚝 끊고 곧장 정은 앞까지 다가왔다.“머리하러 왔어요?”“네.”“그... 저번에 식사 한번 하자고 했던 거 기억하죠? 혹시 오늘은 시간 괜찮으세요?”정은은 짧게 대답했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죄송해요.”그 순간 수민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하이! 은혁 도련님?”“수민이?! 혹시 정은 씨랑 같이 왔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바로 그 친구.”“와! 그럼 다 아는 사이네! 머리 끝나고 다 같이 밥 어때? 내가 쏠게!”수민은 눈을 살짝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근데 나 들러리 아니야? 밥 사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잖아.”은혁은 순간 말이 막혀 멋쩍게 웃었다.“그, 그게... 다 친구잖아. 다 같이 보면 좋은 거지 뭐... 하하...”그 말이 끝나자 수민은 슬쩍 정은 쪽을 힐끔 바라봤다.‘갈까? 아니면 거절할까?’정은은 아주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그걸 본 수민은 곧장 말투를 바꿨다.“나 아직 염색 더 남았거든. 게다가 이미 예약해 둔 식당도 있어서 미안. 다음에 보자!”은혁은 서둘러 말했다.“아, 괜찮아! 나 기다릴 수 있어. 같이 식당 가면 되잖아!”그러자 수민이 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저었다.“노노!! 오늘은 걸스 나잇. 남자는 입장 금지, 알겠어?”“그렇구나...”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럼... 다음에 따로 할게.”수민은 환하게 웃었다.“그래, 다음에 봐.”여기까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혁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그는 정은이 옆 소파에 툭 앉은 거였다.“정은 씨... 옆에 좀 앉아도 괜찮죠?”“네.”그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날 제가 데려다드린 곳, 정은 씨 실험실이었죠?” “맞아요.”“저 사실 대학 시절 전공이 재료공학이었어요. 생명과학과는 다르지만, 교차하는 영역도 좀 있죠. 논문 읽다 보면 은근 연결되더라고요.” ‘어...? 이 사람
재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어떤 것도 할 자격이 없지.’그 틈을 타 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좀 더 기다려야 해서요. 선배님 먼저 차 가져가세요.”“그래.”재석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그렇게 조용히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그 사람... 누구일까?’...정은은 길가에 조용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5분쯤 지난 후, 골목 입구로 노란색 페라리가 굉음을 내며 등장했다. 엔진 소리만으로도 차주의 성격이 상상되는 차였다.운전석 창문이 슥 내려가더니, 조수민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우리 공주님! 탑승하시죠!”정은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간다! 간다!”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정은은 안전벨트를 매며 슬쩍 물었다. “또 바꿨어? 차?”“아냐, 고동건 그놈 차야.”“오...”“뭐야 그 ‘오’는? 뭔가 의미심장했어.”수민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봤다.정은은 시크하게 말했다.“그냥 ‘오’ 한 거야. 더는 묻지 말고, 운전이나 해. 묻는 순간부터 의미 없어져. 너도 알잖아.”“와... 너 요즘 말투 진짜, 우리 오빠랑 똑 닮았어. 점점 꼬인다, 꼬여.”정은은 잠시 말을 멈추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재석 선배...?’하지만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 차 안엔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침 흘러나오던 노래를 들은 수민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 곡으로 넘겼다.[말 못 하는 그 말알게 해줘야 했는데그렇게 쉬운 몇 마디왜 난 못했을까...]‘무슨 가사야 이건?’그리고 이어진 곡...[기대하던 너의 붙잡음은 없고결국 넘겨준 그녀그럼 넌 뭐야 사랑한다면서도 기다리지 말라니 됐어, 넌 계속 그렇게 물러서더라...]수민은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 불렀다. 리듬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거리자, 정은은 곧장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야야야, 운전 중이야. 진지하게 좀 몰아.”“앗, 네네, 죄송... 요즘 정신이 잠깐씩
“이제야 좀 낫네.”민지는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걸렸다.‘이상하네...’예전 같으면 둘이 만나기로 한 날엔 늘 서준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밀크티며, 선호하는 과자까지 미리 챙겨놨었다.‘오늘은 어딘가 좀... 다르네.’그리고 서준이 도착하고 나서, 민지의 그 낌새는 더욱 확실해졌다.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준을 바라봤다.“너 기분 안 좋아?”“아니...”“거짓말! 완전히 삐졌잖아. 누가 너 속상하게 했어?”서준은 잠시 말없이 민지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시선에 민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뭐야, 왜 그렇게 봐...?”서준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기분 안 나빠.”“아니거든? 엄청 나빠 보이거든?!”“안 나쁘다니까.”“거짓말! 완전 티 나! 눈, 코, 입, 눈썹, 머리카락, 속눈썹... 다 티 난다니까! 그리고 오늘은 밀크티도 안 사 왔잖아!”서준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이랑 밥 먹고 왔는데... 밀크티까지 마시면 배 안 터지냐...”“어...?”“어어어어어????”민지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잠깐만, 너 오늘 오전에 나랑 진일 선배랑 밥 먹는 거 본 거야?!”“흥.”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민지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입꼬리를 얄밉게 올리며 말했다.“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말이야... 전일 선배가 고향 내려가기 전에 일부러 시간 비워서 밥 사준 거야. 그것도 선배 어머니가 챙겨준 거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절해?”서준은 작게 투덜거렸다.“근데 넌 말도 안 했잖아.”목소리는 작았지만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하,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인데.’민지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투를 조금 낮췄다.“중요한 일도 아니고, 우리 일정이랑도 안 겹쳤고...”“그리고... 너도 안 물어봤잖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줄은 몰랐지.”그 말에 서준은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