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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Author: 십일
[그때 호텔에서 네가 날 도와줬잖아. 난 그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서, 비록 넌 도겸과 헤어졌지만, 그 은혜는 갚아야 하지.]

‘방금 난 여기에서 담배를 두 대나 피웠고, 20분 정도 걸렸는데. 소정은은 뜻밖에도 직접 나에게 전화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니? 선우가 분명히 말했잖아, 나에게 자원이 있다고! 그것도 최고급 자원이야! 소정은은 어쩜 이리 둔한 것일까? 날 뭘로 보고?’

동건은 입을 삐죽거렸다.

[믿을 만한 편집장을 찾고 있다고? 이따가 그 사람 연락처 보낼게.]

정은도 엄살을 부리거나 괜한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다.

동건이 말을 이렇게까지 했으니 거절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바보와 다름없었다!

“고마워요.”

[은혜를 갚은 것뿐이야.]

전화를 끊고 동건은 즉시 그 편집장의 톡을 찾아 정은에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자신에게 정은의 톡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동건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 뭐지... 톡 친구 요청 좀 통과해. 걱정 마, 난 심현빈과 같은 늑대가 아니니까. 절친의 전 여자친구에게 조금도 분수에 넘치는 생각이 없어.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이따가 명함을 받은 다음 날 삭제해도 돼.]

“이미 수락했어요.”

[응.]

명함을 보낸 다음, 동건은 핸드폰을 접고 다시 룸으로 돌아갔다.

선우가 물었다.

“화장실을 이렇게 오래 갔다니, 똥구덩이에 빠진 건 아니겠죠?”

“꺼져!”

여자는 동건이 돌아온 것을 보고 바로 웃으며 다가왔다.

“동건 도련님, 방금 저를 두고 떠나셨다니.”

“그렇지 않으면 나랑 같이 남자 화장실에 갈 거야?”

동건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렸다.

여자는 즉시 아양을 떨며 그를 가볍게 노려보았다.

“동건 도련님, 오늘 저녁에 제 노래를 주문하시는 건 어때요?”

동건은 사악하게 웃으며 그녀를 한 번 훑어보았고,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멈칫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약간의 실망을 드러냈다.

‘이 재벌 집 도련님들은 정말 통이 크고 여자를 달래는 수법도 대단하지만, 정말 너무 매정하다니깐. 마음이 너무 딱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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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83화

    선우는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난 정은 누나와 자주 연락을 했는데, 왜요?”동건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마치 도겸의 마음을 꿰뚫어본 것 같았다.“난 네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아. 선우가 소정은과 연락을 유지하고 있는 일과 내가 오늘 손을 써서 소정은을 도와준 일에 대해 넌 의혹을 느낄 거야. 우리가 네 체면을 봐서 소정은을 잘 대해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소정은이란 사람 때문인 건지.”동건은 말하면서 잠시 멈칫했다.“난 분명하게 알려줄 수 있어. 소정은이란 사람 때문이야. 너와 상관없어. 선우도 마찬가지일 거고.”도겸은 눈살을 찌푸렸다.“왜?”동건은 흥얼거리며 웃었다.“사람들은 교제를 할 때, ‘거래’를 하기 마련이잖아? 시간이 갈수록 친분을 쌓은 거지. 넌 소정은이 너와 함께 한 6년 동안 단지 네 그림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우리는 한 달에 적어도 두세 번 모이지 않았어? 그러니 우리도 소정은과 접촉할 기회가 적지 않았어. 선우부터 말하자. 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소정은이 네 컴퓨터를 고쳐주었고 또 프로그래밍까지 써줬었지?”“맞아요!” 선우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정은 누나는 프로그래밍이 아주 대단했어요. 내가 그때 한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상대방은 하마터면 장부에 손을 쓸 뻔했어요. 정은 누나가 자동 계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날 도와 그 장부를 정리했거든요.”“그리고 그때...”선우는 유유히 말했지만, 도겸은 들을수록 막막해졌다.그들이 말하는 그 ‘소정은’과 자신의 기억속에서 매일 집에 틀어박혀 그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안배한 ‘소정은’이 정말 같은 사람인가?“나만 얘기할 순 없죠. 그때 정은 누나가 형을 도와줬잖아요...”“에힘!” 동건은 선우의 말을 끊었다.“그만 해, 나 갈 테니까 너희 둘도 좀 일찍 돌아가.”말이 끝나자 재빨리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빨리 좀 가줘요.”...정은은 동건이 보낸 명함을 받고 클릭한 다음 친구 추가 신청을 보냈다.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84화

    왕미자가 몸을 돌리자, 연희는 바로 미소를 지었다.“그럼 이모님이 수고하세요. 난 졸려서 먼저 방으로 돌아가 자야겠어요.”말이 끝나자 연희는 나풀나풀 주방을 떠났다.왕미자는 영문을 몰랐다.‘이게 무슨 일이래? 전에는 자기가 해장국 가져다주겠다고 난리를 피우지 않았어? 왜 갑자기 성격이 바뀐 거야?’왕미자는 해장국을 반쯤 그릇에 부은 다음 쟁반에 놓고 안방으로 향했다.도겸은 오늘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지만, 저녁을 먹지 않아 위가 또 은근히 아프기 시작했다.마침 왕미자가 뜨거운 해장국을 들고 올라오자, 그는 거절하지 않고 단숨에 다 마셨다.왕미자는 빈 그릇과 쟁반을 가지고 방에서 물러났고, 또 가볍게 문을 닫아주었다.도겸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휴식하면서 위의 통증이 점차 사라지기를 기다렸다.얼마나 지났는지, 그는 위가 많이 좋아졌다고 느꼈지만 몸은 갈수록 뜨거워졌다.에어컨 온도를 낮추려고 힐 때, 누군가 갑자기 안방으로 들어왔다.연희는 맨발로 침대 앞으로 걸어왔다. 이미 취한 채로 침대에 쓰러진 남자를 보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도겸은 더워서인지 단추 두 개를 풀었고, 얼굴에 새빨간 홍조가 나타났다.침대 가장자리에 늘어진 팔은 튼튼하고 힘이 있으며 손은 뼈마디가 분명했다. 특히 오늘 짙은 색의 셔츠를 입어 무척 도도해 보였고,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연희는 그들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관계를 가졌을 때를 떠올렸다.그때의 도겸도 이렇게 곤드레만드레 취했고, 입으로는 줄곧 정은의 이름을 불렀다.살짝 열린 셔츠를 통해, 연희는 남자의 볼록한 목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음이 움직이더니 얼른 도겸의 몸에 달라붙었다.손가락으로 남자의 가슴을 가볍게 매만지며 은근히 아래를 향했다.순간, 도겸은 몸을 돌리더니 그녀를 등졌다.연희는 놀라서 벌떡 일어섰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입고 있는 잠옷을 보았다. ‘그땐 소정은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도겸 씨의 욕망을 불러일으켰었지.’연희는 눈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85화

    “대답해, 정은이의 잠옷을 입은 적이 있냐고 묻잖아.”연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에요... 전... 전 그런 적 없어요... 도겸 씨, 저 너무 아파요...”도겸은 연희가 입고 있는 잠옷 치마를 잡아당기며 차갑게 비웃었다.“그럼 이걸 어떻게 설명한 건데? 만약 해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 능숙할 수가 있지?”그때 두 사람이 관계를 맺었을 때부터 도겸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전날 저녁에 껴안은 사람은 정은이었는데, 어떻게 다음날 깨어나자마자 연희로 변했을까?도겸은 단지 자신이 술에 취해서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을 뿐, 자신이 연희의 꾀에 속았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 일을 생각하면 도겸은 이가 근질근질했다.“넌 지금 내 인내심을 도전하고 있어!”도겸은 분노를 느끼며 연희를 땅에서 잡아당겼다.“걸레 같은 것, 지금 당장 꺼져! 이 집에서 꺼지라고!”화가 치밀어 오르자, 도겸은 더욱 덥다고 느꼈다.마치 온몸이 불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그는 몸을 비틀거리며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이상해! 이 반응은 마치...’도겸은 표정이 차가워졌다.“너 나한테 약 먹였어?!”연희는 마음이 찔려서 도겸의 시선을 피했다.“젠장! 넌 정말 겁도 없는 거야?! 감히 나한테 약을 먹여?!”도겸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마음속의 그 불은 점점 더 세차게 타올랐고, 눈도 점점 붉어졌다.연희는 침을 삼키며 마음속의 공포를 억눌렀다. 그리고 땅에서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도겸 씨, 지금 무척 괴로울 거예요...”도겸은 연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말하면서 그녀는 잠옷을 벗기 시작했다.“알잖아요, 제가 도겸 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 당신을 위해서 뭘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절 다른 여자라고 생각해도, 제 가슴에 머리를 파묻히며 소정은의 이름을 불러도 전혀 개의치 않아요.”자신까지 감동시켰는지, 연희는 목소리까지 떨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86화

    연희는 멍해졌다.“당신은... 당신은 분명히 약을...”“왜? 실망했어?”미리 자신의 이상을 감지한 도겸은 얼른 욕실에 달려가서 먹은 해장국을 토해냈다.열이 나는 것은 단지 몸에 남은 약의 약효에 불과했다.“괜찮은 이상, 방금 왜, 왜 그런 척을 한 거죠?”도겸은 웃으며 말했다.“네가 희망에서 실망을 느끼고 또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재미있지 않아?”연희는 온몸을 떨었다.“넌 정말 겁도 없구나, 감히 나에게 약을 먹이다니. 하지만 넌 그럴 담력이 있어도 머리가 없잖아. 멍청한 것!”“이모님.”“도련님,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명을 받은 왕미자는 즉시 문을 밀고 들어왔다.연희는 허둥지둥 잠옷을 입으려 했다. 그러나 어떡해도 잘 입을 수가 없어 낭패를 봤다.“이 여자의 물건을 좀 정리해요. 30분 안으로 사람과 물건을 모두 내 집에서 던져버려요! 그리고 모든 출입문 비밀번호를 바꿔요. 지금부터 난 이 집에서 이 여자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보고 싶지 않아요.”“네, 도련님.”연희는 끌려나갔다.멍하니 왕미자가 자신을 잡아당기도록 내버려 두었다.이때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듯 세게 발버둥 쳤다.“날 건드리지 마요!”왕미자는 멈칫했다.“내 뱃속에 도겸 씨의 아이가 있어요. 당신이 뭐라고, 나에게 손을 댈 자격이 있긴 한 거예요?! 일단 자신의 주제부터 잘 파악해 봐요. 만약 나와 아이를 다치게 한다면, 당신은 배상할 수 있어요?! 내가 아들을 낳고, 도겸 씨에게 시집가면, 제일 먼저 이모님을 해고할 거예요!”왕미자는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은 마치 바보라도 보는 것 같았다.“아가씨,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임신했다고 재벌 가문에 시집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저는 강씨 가문에서 수십 년 동안 일했는데, 회장님이든 사모님이든 도련님이든, 모두 쉽게 남에게 휘둘리는 분이 아니세요. 강씨 가문의 손자는 다른 여자도 낳을 수 있지만, 이를 통해 가문의 여주인으로 되려 하다니. 너무 단순하시네요.”설사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87화

    “네, 도련님.”연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배를 안았다.“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도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가 움직이지 않자, 왕미자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이때 연희는 이미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마에도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그녀는 손으로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애원했다.“도겸 씨, 살려줘요, 우리의 아이를 살려줘요. 배가 정말 아파요...”왕미자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도련님, 서연희 아가씨는 지금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식은땀은 이미 얇은 잠옷 치마를 적셨고, 연희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그럼 알아서 처리해요.”도겸은 이 말을 남기고 떠났다.왕미자는 자신이 정말 재수가 없다고 느꼈다.‘우리 같은 가정부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새벽 4시, 구급차가 별장에 와서 연희를 싣고 떠났다.그 병원은 마침 서영숙이 지금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서영숙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왕미자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연희와 도겸이 집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는데, 도겸이 그녀를 쫓아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희는 버티며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이번에 정말 큰일인 것 같았다.서영숙은 방심하지 못하고,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즉시 연희의 병실로 찾아갔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돼지를 잡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선생님, 제발요! 제가 이렇게 빌게요! 제 아이를 꼭 지켜주세요!”“저는 이 아이가 없으면 안 돼요. 이게 제 전부란 말이에요!”의사는 애써 연희를 위로했다.“진정 좀 하세요! 심호흡 하면서 감정부터 조절해 보세요. 지금 정서가 너무 흥분되어서, 이렇게 하면 환자분에게도, 태아에게도 좋지 않아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진정을 취한 다음 구체적으로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에 대해...”연희는 전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의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선생님, 솔직히 말해보세요. 제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거예요? 제 아이는 멀쩡한 거냐고요? 아이에게 아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88화

    서영숙은 연희가 자신을 원망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분명히 네가 소란을 피워서 이렇게 됐는데, 그게 어째서 내 탓인 거야? 한 번만 더 헛소리를 해 봐? 내가 네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그래요, 오늘 저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이 지는 거예요.”“이모님...” 서영숙은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도겸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병원으로 오라고 해요. 당장!”“네, 사모님!”도겸은 전화를 두 번이나 끊었는데, 이제야 겨우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죠?]“도련님, 사모님께서 병원으로 오시랍니다.”[시간이 없어요.]“그런데... 사모님과 서연희 아가씨가 싸우고 있습니다.”[그래요.]왕미자는 어이가 없었다.[그럼 서 여사님에게 전해줘요. 그때 여사님이 서연희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잖아요. 지금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긴 것도 다 여사님 때문이죠. 그러니 이를 책임지고 수습을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요!]말을 마치자 도겸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왕미자가 다시 전화를 할 때, 그의 전원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사모님, 도련님께서...”“뭐라고 했는데?”왕미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도련님께서는 이 일이 사모님께서 스스로 저지른 일이니,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련님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이때 연희는 따귀를 맞았을 때보다 더 처량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곧이어 병실도 혼란스러워졌다.의사는 황급히 사람을 내쫓았다.“임산부는 지금 상태가 매우 위험하니, 응급처치를 진행해야 합니다. 가족분은 어서 나가세요!”서영숙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아이가 정말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아까 그렇게 충동적이지 말 걸 그랬어...’30분 후, 병실 문이 안에서 열리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줄지어 나왔다.서영숙은 즉시 가서 물었다.“선생님, 우리 손자는 괜찮은 거예요?”의사는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말다툼에 머리가 아파서 차갑게 말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89화

    “우리 큰집은 지금 너와 도겸이 둘뿐이니, 어디 둘째, 셋째와 비교할 수 있겠니? 만약 유언장에 쓴 대로 사람 수에 따라 분배한다면, 틀림없이 우리가 손해를 볼 거야. 그러나 만약 네 오빠나 너에게 아이가 생겨 그 분배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도 돈을 조금 건질 수 있잖아. 지금 너한테 기대할 수 없지만, 서연희 뱃속의 아이는 마침 그 요구에 적합하니 당연히 애를 써서 남겨둬야지.”서정은 문득 깨달았다.“이것 때문이었구나.”“이제 알겠지? 서연희 뱃속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적어도 이만큼 도 많이 가질 수 있어.”서영숙은 한 손을 내밀었다.“100억이요?”“좀 더 생각해 봐.”“설, 설마 천 억은 아니겠죠?”서영숙이 웃었다.서정은 숨을 한 모금 들이켰다.그리고 병실 안의 연희는 이 말을 더욱 똑똑히 들었다.VIP 병실도 그런 셈이라서, 방음이 전혀 안 됐다.연희는 손으로 아직 평탄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천 억이라니... 그게 대체 얼마야?’...현재 연희는 병원에서 지내도 소용이 없었고, 주로 조용히 휴식을 취해야 했다.그래서 나흘 째 되는 날에 서영숙은 연희에게 퇴원 수속을 밟아줬다.이번에 하마터면 아이를 잃을 뻔했기에, 서영숙 뿐만 아니라 연희도 무척 두려웠다.처음 며칠 집에 있을 때, 연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밥도 아무거나 먹지 않고, 너무 흥분하지 못했으며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희는 아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서영숙은 집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그녀를 신처럼 모셨다. 하늘의 별을 따지 못한 것 외에, 다른 것은 정말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그동안 도겸은 별장에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서영숙이 직접 그에게 전화해도 소용없었다. 받지 않거나 직접 돌아가는 것을 거절했다.두어 마디 하자마자 바로 끊어버리며 엄청난 짜증을 냈다.도겸은 이제 연희가 싫어서, 한 번 더 보는 것도 구역질이 났다.연희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어차피 나에게 아이가 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90화

    “뭐라고?”“임신하지 않으셨는데, 왜 보신탕을 마시는 거죠? 임산부와 음식은 빼앗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너 혼자서 그 큰 솥에 있는 것을 다 마실 수 있겠어?” 서영숙은 연희의 머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이런 바보 같은 말을 하다니.“다 마실 수 있죠.”“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연희도 엄살을 부리지 않았다.“절 위해 삶으신 이상, 다른 사람들이 마시면 안 되죠. 안 그래요?”“그래.” 서영숙은 화가 나서 그릇을 내려놓더니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너 혼자 천천히 마셔라!”말을 마치고 서영숙은 몸을 돌아섰다.연희는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세웠고, 식탁 위의 국 두 그릇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기해하며 입을 삐죽거리더니 마시지도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너 왜 보신탕을 안 마신 거야?!”연희는 낮잠에서 금방 깨어나며 하품을 했다.“갑자기 마시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너--”“아주머니, 번거로우시겠지만 나중에 제 방에 들어올 때 노크 좀 하세요.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제 뱃속의 아이가 놀랄 거예요.”서영숙은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밤이 되자, 연희는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서영숙은 그녀에게 화원에 가서 산책을 해야 태아에게 좋다고 했지만, 그녀는 들은 체 만 체였다.“아주머니가 이렇게 한가하신 이상, 만둣국 좀 사러 가시면 안 될까요? 저 지금 성동의 행복 만둣국이 땡기네요. 그 가게가 맛이 제일 좋거든요.”서영숙은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날은 벌써 어두워졌다.성동에 가려면 운전을 해도 50분이 걸렸고, 거의 2시간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으니 또 무슨 만둣국이 있겠는가?설령 있다 하더라도 사 오면 다 식어서 맛이 없을 것이다.“이 시간이라면 이미 문을 닫았겠지? 만둣국 먹고 싶다면, 내가 이모님더러 좀 만들라고 할게...”연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집에서 만드는 게 어떻게 밖의 만둣국보다 맛있을 수 있겠어요? 그 가게는 11시가 되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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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2화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1화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0화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9화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8화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7화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6화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5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4화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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