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해, 정은이의 잠옷을 입은 적이 있냐고 묻잖아.”연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에요... 전... 전 그런 적 없어요... 도겸 씨, 저 너무 아파요...”도겸은 연희가 입고 있는 잠옷 치마를 잡아당기며 차갑게 비웃었다.“그럼 이걸 어떻게 설명한 건데? 만약 해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 능숙할 수가 있지?”그때 두 사람이 관계를 맺었을 때부터 도겸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전날 저녁에 껴안은 사람은 정은이었는데, 어떻게 다음날 깨어나자마자 연희로 변했을까?도겸은 단지 자신이 술에 취해서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을 뿐, 자신이 연희의 꾀에 속았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 일을 생각하면 도겸은 이가 근질근질했다.“넌 지금 내 인내심을 도전하고 있어!”도겸은 분노를 느끼며 연희를 땅에서 잡아당겼다.“걸레 같은 것, 지금 당장 꺼져! 이 집에서 꺼지라고!”화가 치밀어 오르자, 도겸은 더욱 덥다고 느꼈다.마치 온몸이 불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그는 몸을 비틀거리며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이상해! 이 반응은 마치...’도겸은 표정이 차가워졌다.“너 나한테 약 먹였어?!”연희는 마음이 찔려서 도겸의 시선을 피했다.“젠장! 넌 정말 겁도 없는 거야?! 감히 나한테 약을 먹여?!”도겸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마음속의 그 불은 점점 더 세차게 타올랐고, 눈도 점점 붉어졌다.연희는 침을 삼키며 마음속의 공포를 억눌렀다. 그리고 땅에서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도겸 씨, 지금 무척 괴로울 거예요...”도겸은 연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말하면서 그녀는 잠옷을 벗기 시작했다.“알잖아요, 제가 도겸 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 당신을 위해서 뭘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절 다른 여자라고 생각해도, 제 가슴에 머리를 파묻히며 소정은의 이름을 불러도 전혀 개의치 않아요.”자신까지 감동시켰는지, 연희는 목소리까지 떨렸
연희는 멍해졌다.“당신은... 당신은 분명히 약을...”“왜? 실망했어?”미리 자신의 이상을 감지한 도겸은 얼른 욕실에 달려가서 먹은 해장국을 토해냈다.열이 나는 것은 단지 몸에 남은 약의 약효에 불과했다.“괜찮은 이상, 방금 왜, 왜 그런 척을 한 거죠?”도겸은 웃으며 말했다.“네가 희망에서 실망을 느끼고 또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재미있지 않아?”연희는 온몸을 떨었다.“넌 정말 겁도 없구나, 감히 나에게 약을 먹이다니. 하지만 넌 그럴 담력이 있어도 머리가 없잖아. 멍청한 것!”“이모님.”“도련님,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명을 받은 왕미자는 즉시 문을 밀고 들어왔다.연희는 허둥지둥 잠옷을 입으려 했다. 그러나 어떡해도 잘 입을 수가 없어 낭패를 봤다.“이 여자의 물건을 좀 정리해요. 30분 안으로 사람과 물건을 모두 내 집에서 던져버려요! 그리고 모든 출입문 비밀번호를 바꿔요. 지금부터 난 이 집에서 이 여자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보고 싶지 않아요.”“네, 도련님.”연희는 끌려나갔다.멍하니 왕미자가 자신을 잡아당기도록 내버려 두었다.이때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듯 세게 발버둥 쳤다.“날 건드리지 마요!”왕미자는 멈칫했다.“내 뱃속에 도겸 씨의 아이가 있어요. 당신이 뭐라고, 나에게 손을 댈 자격이 있긴 한 거예요?! 일단 자신의 주제부터 잘 파악해 봐요. 만약 나와 아이를 다치게 한다면, 당신은 배상할 수 있어요?! 내가 아들을 낳고, 도겸 씨에게 시집가면, 제일 먼저 이모님을 해고할 거예요!”왕미자는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은 마치 바보라도 보는 것 같았다.“아가씨,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임신했다고 재벌 가문에 시집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저는 강씨 가문에서 수십 년 동안 일했는데, 회장님이든 사모님이든 도련님이든, 모두 쉽게 남에게 휘둘리는 분이 아니세요. 강씨 가문의 손자는 다른 여자도 낳을 수 있지만, 이를 통해 가문의 여주인으로 되려 하다니. 너무 단순하시네요.”설사
“네, 도련님.”연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배를 안았다.“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도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가 움직이지 않자, 왕미자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이때 연희는 이미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마에도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그녀는 손으로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애원했다.“도겸 씨, 살려줘요, 우리의 아이를 살려줘요. 배가 정말 아파요...”왕미자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도련님, 서연희 아가씨는 지금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식은땀은 이미 얇은 잠옷 치마를 적셨고, 연희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그럼 알아서 처리해요.”도겸은 이 말을 남기고 떠났다.왕미자는 자신이 정말 재수가 없다고 느꼈다.‘우리 같은 가정부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새벽 4시, 구급차가 별장에 와서 연희를 싣고 떠났다.그 병원은 마침 서영숙이 지금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서영숙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왕미자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연희와 도겸이 집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는데, 도겸이 그녀를 쫓아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희는 버티며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이번에 정말 큰일인 것 같았다.서영숙은 방심하지 못하고,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즉시 연희의 병실로 찾아갔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돼지를 잡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선생님, 제발요! 제가 이렇게 빌게요! 제 아이를 꼭 지켜주세요!”“저는 이 아이가 없으면 안 돼요. 이게 제 전부란 말이에요!”의사는 애써 연희를 위로했다.“진정 좀 하세요! 심호흡 하면서 감정부터 조절해 보세요. 지금 정서가 너무 흥분되어서, 이렇게 하면 환자분에게도, 태아에게도 좋지 않아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진정을 취한 다음 구체적으로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에 대해...”연희는 전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의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선생님, 솔직히 말해보세요. 제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거예요? 제 아이는 멀쩡한 거냐고요? 아이에게 아무
서영숙은 연희가 자신을 원망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분명히 네가 소란을 피워서 이렇게 됐는데, 그게 어째서 내 탓인 거야? 한 번만 더 헛소리를 해 봐? 내가 네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그래요, 오늘 저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이 지는 거예요.”“이모님...” 서영숙은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도겸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병원으로 오라고 해요. 당장!”“네, 사모님!”도겸은 전화를 두 번이나 끊었는데, 이제야 겨우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죠?]“도련님, 사모님께서 병원으로 오시랍니다.”[시간이 없어요.]“그런데... 사모님과 서연희 아가씨가 싸우고 있습니다.”[그래요.]왕미자는 어이가 없었다.[그럼 서 여사님에게 전해줘요. 그때 여사님이 서연희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잖아요. 지금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긴 것도 다 여사님 때문이죠. 그러니 이를 책임지고 수습을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요!]말을 마치자 도겸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왕미자가 다시 전화를 할 때, 그의 전원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사모님, 도련님께서...”“뭐라고 했는데?”왕미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도련님께서는 이 일이 사모님께서 스스로 저지른 일이니,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련님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이때 연희는 따귀를 맞았을 때보다 더 처량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곧이어 병실도 혼란스러워졌다.의사는 황급히 사람을 내쫓았다.“임산부는 지금 상태가 매우 위험하니, 응급처치를 진행해야 합니다. 가족분은 어서 나가세요!”서영숙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아이가 정말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아까 그렇게 충동적이지 말 걸 그랬어...’30분 후, 병실 문이 안에서 열리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줄지어 나왔다.서영숙은 즉시 가서 물었다.“선생님, 우리 손자는 괜찮은 거예요?”의사는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말다툼에 머리가 아파서 차갑게 말했
“우리 큰집은 지금 너와 도겸이 둘뿐이니, 어디 둘째, 셋째와 비교할 수 있겠니? 만약 유언장에 쓴 대로 사람 수에 따라 분배한다면, 틀림없이 우리가 손해를 볼 거야. 그러나 만약 네 오빠나 너에게 아이가 생겨 그 분배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도 돈을 조금 건질 수 있잖아. 지금 너한테 기대할 수 없지만, 서연희 뱃속의 아이는 마침 그 요구에 적합하니 당연히 애를 써서 남겨둬야지.”서정은 문득 깨달았다.“이것 때문이었구나.”“이제 알겠지? 서연희 뱃속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적어도 이만큼 도 많이 가질 수 있어.”서영숙은 한 손을 내밀었다.“100억이요?”“좀 더 생각해 봐.”“설, 설마 천 억은 아니겠죠?”서영숙이 웃었다.서정은 숨을 한 모금 들이켰다.그리고 병실 안의 연희는 이 말을 더욱 똑똑히 들었다.VIP 병실도 그런 셈이라서, 방음이 전혀 안 됐다.연희는 손으로 아직 평탄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천 억이라니... 그게 대체 얼마야?’...현재 연희는 병원에서 지내도 소용이 없었고, 주로 조용히 휴식을 취해야 했다.그래서 나흘 째 되는 날에 서영숙은 연희에게 퇴원 수속을 밟아줬다.이번에 하마터면 아이를 잃을 뻔했기에, 서영숙 뿐만 아니라 연희도 무척 두려웠다.처음 며칠 집에 있을 때, 연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밥도 아무거나 먹지 않고, 너무 흥분하지 못했으며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희는 아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서영숙은 집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그녀를 신처럼 모셨다. 하늘의 별을 따지 못한 것 외에, 다른 것은 정말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그동안 도겸은 별장에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서영숙이 직접 그에게 전화해도 소용없었다. 받지 않거나 직접 돌아가는 것을 거절했다.두어 마디 하자마자 바로 끊어버리며 엄청난 짜증을 냈다.도겸은 이제 연희가 싫어서, 한 번 더 보는 것도 구역질이 났다.연희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어차피 나에게 아이가 있
“뭐라고?”“임신하지 않으셨는데, 왜 보신탕을 마시는 거죠? 임산부와 음식은 빼앗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너 혼자서 그 큰 솥에 있는 것을 다 마실 수 있겠어?” 서영숙은 연희의 머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이런 바보 같은 말을 하다니.“다 마실 수 있죠.”“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연희도 엄살을 부리지 않았다.“절 위해 삶으신 이상, 다른 사람들이 마시면 안 되죠. 안 그래요?”“그래.” 서영숙은 화가 나서 그릇을 내려놓더니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너 혼자 천천히 마셔라!”말을 마치고 서영숙은 몸을 돌아섰다.연희는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세웠고, 식탁 위의 국 두 그릇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기해하며 입을 삐죽거리더니 마시지도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너 왜 보신탕을 안 마신 거야?!”연희는 낮잠에서 금방 깨어나며 하품을 했다.“갑자기 마시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너--”“아주머니, 번거로우시겠지만 나중에 제 방에 들어올 때 노크 좀 하세요.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제 뱃속의 아이가 놀랄 거예요.”서영숙은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밤이 되자, 연희는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서영숙은 그녀에게 화원에 가서 산책을 해야 태아에게 좋다고 했지만, 그녀는 들은 체 만 체였다.“아주머니가 이렇게 한가하신 이상, 만둣국 좀 사러 가시면 안 될까요? 저 지금 성동의 행복 만둣국이 땡기네요. 그 가게가 맛이 제일 좋거든요.”서영숙은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날은 벌써 어두워졌다.성동에 가려면 운전을 해도 50분이 걸렸고, 거의 2시간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으니 또 무슨 만둣국이 있겠는가?설령 있다 하더라도 사 오면 다 식어서 맛이 없을 것이다.“이 시간이라면 이미 문을 닫았겠지? 만둣국 먹고 싶다면, 내가 이모님더러 좀 만들라고 할게...”연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집에서 만드는 게 어떻게 밖의 만둣국보다 맛있을 수 있겠어요? 그 가게는 11시가 되어서야
서영숙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탕을 끓였는데, 연희가 욕을 피붓는 것을 보며 열받았다.“이건 족발인데, 안에 삼을 넣어서 아이에게 좋아.”“아이한테 좋다고 임산부를 무시하는 거예요?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거 못 봤어요? 보기만 해도 느끼한데 어떻게 마실 수 있겠어요?”서영숙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거니?”“어쩜 이렇게 둔해요? 이렇게 간단한 일까지 제가 가르쳐야 하는 거예요? 위의 기름을 버리면 되잖아요? 그렇게 멍청해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았는지...”연희는 조금도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하는 말도 독하며 듣기 거북했다.서영숙은 남한테서 이런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버럭 했다.“누가 둔하다는 거야? 서연희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만약 서영숙이 자세히 생각을 해본다면, 연희가 지금 한 말과 말투가 전에 그녀가 연희를 욕했을 때와 거의 똑같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 연희는 지금 복수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뱃속에 천 억짜리 아이를 품고 있었다. 명문가에 시집갈 수 없다 하더라도, 연희는 이 아이로 서영숙에게서 돈을 뜯을 수 있었다.‘200억 정도는 줘야겠지? 이제 돈이 있으니 도겸 씨에게 시집가든 안 가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 남자도 날 싫어하잖아. 명문가에 시집가지 않는 이상, 당연히 미래의 시어머니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고. 그럼 나도 얼른 복수를 해야지 않겠어?’“지금 저한테 소리를 치시는 거예요? 기름을 버리라고만 했지, 다른 일 시킨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내키지 않으면 그냥 가세요. 제가 언제 제 곁에 남아달라고 애원한 적 있어요? 만약 제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절대로 후회하지 마세요.서영숙은 한참 후에야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연희의 요구에 따라 삼계탕 위의 기름을 걷어내기 시작했다.30분 넘게 걷어냈지만, 연희는 얼마 마시지도 않았다. 서영숙은 화가 나서 하마터면 다시 쓰러질 뻔했다...강씨
오미선의 말이 끝나자마자 키가 훤칠한 남자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정은은 멍해졌다.“소개하지. 이 아이는 네 성 교수님의 제자, 심현빈이야.”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정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반가워, 후배야.”“성 교수님의 학생이었어요?”정은은 혀를 내둘렀다.“왜? 그렇게 안 보여?”“그건 아니에요.”오미선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너희들 서로 아는 거야?”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리고 안 지 꽤 오래됐지...’“그럼 다행이군. 다 아는 사람들인 이상, 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지 그래?”“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정은도 줄곧 여기서 저녁을 먹었다.박애영은 요리를 한 상 차렸는데, 정은이 즐겨 먹는 음식이 두 개나 있었다.현빈은 일부러 그런 것인지, 사람들이 자리에 앉을 때, 그는 그 두 음식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정은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동적으로 옆에 앉았다.오미선은 이를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러나 정은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와, 이모님 정말 너무 좋아, 내가 좋아하는 음식까지 만들어주셨다니.’“현빈이 넌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오미선이 갑자기 물었다.“올해 28살입니다.”“28살에 자신의 투자회사를 경영하다니, 정말 유망한 젊은이구나.”현빈은 겸손하게 손을 흔들었다.“과찬이십니다. 회사를 차릴 수 있게 된 것은 가족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2~3년만에 서서히 허전되기 시작했고요.”“장사를 하고 투자를 하는 것보다, 저는 오 교수님과 성 교수님과 같은 연구학자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실험에 몰두하고, 해마다 열심히 탐구하며, 외로움과 지루함을 견뎌내시며 과학의 참뜻과 학술의 비밀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잖아요.”“과학연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생활은 외롭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아. 안 그래, 정은아?”“그럼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직장처럼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고, 사회의 교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
“안녕하세요.”정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은혁은 일행과의 대화를 뚝 끊고 곧장 정은 앞까지 다가왔다.“머리하러 왔어요?”“네.”“그... 저번에 식사 한번 하자고 했던 거 기억하죠? 혹시 오늘은 시간 괜찮으세요?”정은은 짧게 대답했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죄송해요.”그 순간 수민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하이! 은혁 도련님?”“수민이?! 혹시 정은 씨랑 같이 왔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바로 그 친구.”“와! 그럼 다 아는 사이네! 머리 끝나고 다 같이 밥 어때? 내가 쏠게!”수민은 눈을 살짝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근데 나 들러리 아니야? 밥 사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잖아.”은혁은 순간 말이 막혀 멋쩍게 웃었다.“그, 그게... 다 친구잖아. 다 같이 보면 좋은 거지 뭐... 하하...”그 말이 끝나자 수민은 슬쩍 정은 쪽을 힐끔 바라봤다.‘갈까? 아니면 거절할까?’정은은 아주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그걸 본 수민은 곧장 말투를 바꿨다.“나 아직 염색 더 남았거든. 게다가 이미 예약해 둔 식당도 있어서 미안. 다음에 보자!”은혁은 서둘러 말했다.“아, 괜찮아! 나 기다릴 수 있어. 같이 식당 가면 되잖아!”그러자 수민이 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저었다.“노노!! 오늘은 걸스 나잇. 남자는 입장 금지, 알겠어?”“그렇구나...”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럼... 다음에 따로 할게.”수민은 환하게 웃었다.“그래, 다음에 봐.”여기까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혁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그는 정은이 옆 소파에 툭 앉은 거였다.“정은 씨... 옆에 좀 앉아도 괜찮죠?”“네.”그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날 제가 데려다드린 곳, 정은 씨 실험실이었죠?” “맞아요.”“저 사실 대학 시절 전공이 재료공학이었어요. 생명과학과는 다르지만, 교차하는 영역도 좀 있죠. 논문 읽다 보면 은근 연결되더라고요.” ‘어...? 이 사람
재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어떤 것도 할 자격이 없지.’그 틈을 타 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좀 더 기다려야 해서요. 선배님 먼저 차 가져가세요.”“그래.”재석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그렇게 조용히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그 사람... 누구일까?’...정은은 길가에 조용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5분쯤 지난 후, 골목 입구로 노란색 페라리가 굉음을 내며 등장했다. 엔진 소리만으로도 차주의 성격이 상상되는 차였다.운전석 창문이 슥 내려가더니, 조수민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우리 공주님! 탑승하시죠!”정은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간다! 간다!”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정은은 안전벨트를 매며 슬쩍 물었다. “또 바꿨어? 차?”“아냐, 고동건 그놈 차야.”“오...”“뭐야 그 ‘오’는? 뭔가 의미심장했어.”수민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봤다.정은은 시크하게 말했다.“그냥 ‘오’ 한 거야. 더는 묻지 말고, 운전이나 해. 묻는 순간부터 의미 없어져. 너도 알잖아.”“와... 너 요즘 말투 진짜, 우리 오빠랑 똑 닮았어. 점점 꼬인다, 꼬여.”정은은 잠시 말을 멈추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재석 선배...?’하지만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 차 안엔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침 흘러나오던 노래를 들은 수민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 곡으로 넘겼다.[말 못 하는 그 말알게 해줘야 했는데그렇게 쉬운 몇 마디왜 난 못했을까...]‘무슨 가사야 이건?’그리고 이어진 곡...[기대하던 너의 붙잡음은 없고결국 넘겨준 그녀그럼 넌 뭐야 사랑한다면서도 기다리지 말라니 됐어, 넌 계속 그렇게 물러서더라...]수민은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 불렀다. 리듬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거리자, 정은은 곧장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야야야, 운전 중이야. 진지하게 좀 몰아.”“앗, 네네, 죄송... 요즘 정신이 잠깐씩
“이제야 좀 낫네.”민지는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걸렸다.‘이상하네...’예전 같으면 둘이 만나기로 한 날엔 늘 서준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밀크티며, 선호하는 과자까지 미리 챙겨놨었다.‘오늘은 어딘가 좀... 다르네.’그리고 서준이 도착하고 나서, 민지의 그 낌새는 더욱 확실해졌다.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준을 바라봤다.“너 기분 안 좋아?”“아니...”“거짓말! 완전히 삐졌잖아. 누가 너 속상하게 했어?”서준은 잠시 말없이 민지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시선에 민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뭐야, 왜 그렇게 봐...?”서준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기분 안 나빠.”“아니거든? 엄청 나빠 보이거든?!”“안 나쁘다니까.”“거짓말! 완전 티 나! 눈, 코, 입, 눈썹, 머리카락, 속눈썹... 다 티 난다니까! 그리고 오늘은 밀크티도 안 사 왔잖아!”서준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이랑 밥 먹고 왔는데... 밀크티까지 마시면 배 안 터지냐...”“어...?”“어어어어어????”민지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잠깐만, 너 오늘 오전에 나랑 진일 선배랑 밥 먹는 거 본 거야?!”“흥.”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민지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입꼬리를 얄밉게 올리며 말했다.“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말이야... 전일 선배가 고향 내려가기 전에 일부러 시간 비워서 밥 사준 거야. 그것도 선배 어머니가 챙겨준 거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절해?”서준은 작게 투덜거렸다.“근데 넌 말도 안 했잖아.”목소리는 작았지만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하,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인데.’민지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투를 조금 낮췄다.“중요한 일도 아니고, 우리 일정이랑도 안 겹쳤고...”“그리고... 너도 안 물어봤잖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줄은 몰랐지.”그 말에 서준은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