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숙은 연희가 자신을 원망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분명히 네가 소란을 피워서 이렇게 됐는데, 그게 어째서 내 탓인 거야? 한 번만 더 헛소리를 해 봐? 내가 네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그래요, 오늘 저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이 지는 거예요.”“이모님...” 서영숙은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도겸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병원으로 오라고 해요. 당장!”“네, 사모님!”도겸은 전화를 두 번이나 끊었는데, 이제야 겨우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죠?]“도련님, 사모님께서 병원으로 오시랍니다.”[시간이 없어요.]“그런데... 사모님과 서연희 아가씨가 싸우고 있습니다.”[그래요.]왕미자는 어이가 없었다.[그럼 서 여사님에게 전해줘요. 그때 여사님이 서연희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잖아요. 지금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긴 것도 다 여사님 때문이죠. 그러니 이를 책임지고 수습을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요!]말을 마치자 도겸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왕미자가 다시 전화를 할 때, 그의 전원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사모님, 도련님께서...”“뭐라고 했는데?”왕미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도련님께서는 이 일이 사모님께서 스스로 저지른 일이니,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련님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이때 연희는 따귀를 맞았을 때보다 더 처량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곧이어 병실도 혼란스러워졌다.의사는 황급히 사람을 내쫓았다.“임산부는 지금 상태가 매우 위험하니, 응급처치를 진행해야 합니다. 가족분은 어서 나가세요!”서영숙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아이가 정말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아까 그렇게 충동적이지 말 걸 그랬어...’30분 후, 병실 문이 안에서 열리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줄지어 나왔다.서영숙은 즉시 가서 물었다.“선생님, 우리 손자는 괜찮은 거예요?”의사는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말다툼에 머리가 아파서 차갑게 말했
“우리 큰집은 지금 너와 도겸이 둘뿐이니, 어디 둘째, 셋째와 비교할 수 있겠니? 만약 유언장에 쓴 대로 사람 수에 따라 분배한다면, 틀림없이 우리가 손해를 볼 거야. 그러나 만약 네 오빠나 너에게 아이가 생겨 그 분배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도 돈을 조금 건질 수 있잖아. 지금 너한테 기대할 수 없지만, 서연희 뱃속의 아이는 마침 그 요구에 적합하니 당연히 애를 써서 남겨둬야지.”서정은 문득 깨달았다.“이것 때문이었구나.”“이제 알겠지? 서연희 뱃속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적어도 이만큼 도 많이 가질 수 있어.”서영숙은 한 손을 내밀었다.“100억이요?”“좀 더 생각해 봐.”“설, 설마 천 억은 아니겠죠?”서영숙이 웃었다.서정은 숨을 한 모금 들이켰다.그리고 병실 안의 연희는 이 말을 더욱 똑똑히 들었다.VIP 병실도 그런 셈이라서, 방음이 전혀 안 됐다.연희는 손으로 아직 평탄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천 억이라니... 그게 대체 얼마야?’...현재 연희는 병원에서 지내도 소용이 없었고, 주로 조용히 휴식을 취해야 했다.그래서 나흘 째 되는 날에 서영숙은 연희에게 퇴원 수속을 밟아줬다.이번에 하마터면 아이를 잃을 뻔했기에, 서영숙 뿐만 아니라 연희도 무척 두려웠다.처음 며칠 집에 있을 때, 연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밥도 아무거나 먹지 않고, 너무 흥분하지 못했으며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희는 아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서영숙은 집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그녀를 신처럼 모셨다. 하늘의 별을 따지 못한 것 외에, 다른 것은 정말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그동안 도겸은 별장에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서영숙이 직접 그에게 전화해도 소용없었다. 받지 않거나 직접 돌아가는 것을 거절했다.두어 마디 하자마자 바로 끊어버리며 엄청난 짜증을 냈다.도겸은 이제 연희가 싫어서, 한 번 더 보는 것도 구역질이 났다.연희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어차피 나에게 아이가 있
“뭐라고?”“임신하지 않으셨는데, 왜 보신탕을 마시는 거죠? 임산부와 음식은 빼앗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너 혼자서 그 큰 솥에 있는 것을 다 마실 수 있겠어?” 서영숙은 연희의 머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이런 바보 같은 말을 하다니.“다 마실 수 있죠.”“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연희도 엄살을 부리지 않았다.“절 위해 삶으신 이상, 다른 사람들이 마시면 안 되죠. 안 그래요?”“그래.” 서영숙은 화가 나서 그릇을 내려놓더니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너 혼자 천천히 마셔라!”말을 마치고 서영숙은 몸을 돌아섰다.연희는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세웠고, 식탁 위의 국 두 그릇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기해하며 입을 삐죽거리더니 마시지도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너 왜 보신탕을 안 마신 거야?!”연희는 낮잠에서 금방 깨어나며 하품을 했다.“갑자기 마시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너--”“아주머니, 번거로우시겠지만 나중에 제 방에 들어올 때 노크 좀 하세요.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제 뱃속의 아이가 놀랄 거예요.”서영숙은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밤이 되자, 연희는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서영숙은 그녀에게 화원에 가서 산책을 해야 태아에게 좋다고 했지만, 그녀는 들은 체 만 체였다.“아주머니가 이렇게 한가하신 이상, 만둣국 좀 사러 가시면 안 될까요? 저 지금 성동의 행복 만둣국이 땡기네요. 그 가게가 맛이 제일 좋거든요.”서영숙은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날은 벌써 어두워졌다.성동에 가려면 운전을 해도 50분이 걸렸고, 거의 2시간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으니 또 무슨 만둣국이 있겠는가?설령 있다 하더라도 사 오면 다 식어서 맛이 없을 것이다.“이 시간이라면 이미 문을 닫았겠지? 만둣국 먹고 싶다면, 내가 이모님더러 좀 만들라고 할게...”연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집에서 만드는 게 어떻게 밖의 만둣국보다 맛있을 수 있겠어요? 그 가게는 11시가 되어서야
서영숙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탕을 끓였는데, 연희가 욕을 피붓는 것을 보며 열받았다.“이건 족발인데, 안에 삼을 넣어서 아이에게 좋아.”“아이한테 좋다고 임산부를 무시하는 거예요?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거 못 봤어요? 보기만 해도 느끼한데 어떻게 마실 수 있겠어요?”서영숙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거니?”“어쩜 이렇게 둔해요? 이렇게 간단한 일까지 제가 가르쳐야 하는 거예요? 위의 기름을 버리면 되잖아요? 그렇게 멍청해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았는지...”연희는 조금도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하는 말도 독하며 듣기 거북했다.서영숙은 남한테서 이런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버럭 했다.“누가 둔하다는 거야? 서연희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만약 서영숙이 자세히 생각을 해본다면, 연희가 지금 한 말과 말투가 전에 그녀가 연희를 욕했을 때와 거의 똑같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 연희는 지금 복수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뱃속에 천 억짜리 아이를 품고 있었다. 명문가에 시집갈 수 없다 하더라도, 연희는 이 아이로 서영숙에게서 돈을 뜯을 수 있었다.‘200억 정도는 줘야겠지? 이제 돈이 있으니 도겸 씨에게 시집가든 안 가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 남자도 날 싫어하잖아. 명문가에 시집가지 않는 이상, 당연히 미래의 시어머니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고. 그럼 나도 얼른 복수를 해야지 않겠어?’“지금 저한테 소리를 치시는 거예요? 기름을 버리라고만 했지, 다른 일 시킨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내키지 않으면 그냥 가세요. 제가 언제 제 곁에 남아달라고 애원한 적 있어요? 만약 제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절대로 후회하지 마세요.서영숙은 한참 후에야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연희의 요구에 따라 삼계탕 위의 기름을 걷어내기 시작했다.30분 넘게 걷어냈지만, 연희는 얼마 마시지도 않았다. 서영숙은 화가 나서 하마터면 다시 쓰러질 뻔했다...강씨
오미선의 말이 끝나자마자 키가 훤칠한 남자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정은은 멍해졌다.“소개하지. 이 아이는 네 성 교수님의 제자, 심현빈이야.”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정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반가워, 후배야.”“성 교수님의 학생이었어요?”정은은 혀를 내둘렀다.“왜? 그렇게 안 보여?”“그건 아니에요.”오미선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너희들 서로 아는 거야?”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리고 안 지 꽤 오래됐지...’“그럼 다행이군. 다 아는 사람들인 이상, 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지 그래?”“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정은도 줄곧 여기서 저녁을 먹었다.박애영은 요리를 한 상 차렸는데, 정은이 즐겨 먹는 음식이 두 개나 있었다.현빈은 일부러 그런 것인지, 사람들이 자리에 앉을 때, 그는 그 두 음식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정은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동적으로 옆에 앉았다.오미선은 이를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러나 정은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와, 이모님 정말 너무 좋아, 내가 좋아하는 음식까지 만들어주셨다니.’“현빈이 넌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오미선이 갑자기 물었다.“올해 28살입니다.”“28살에 자신의 투자회사를 경영하다니, 정말 유망한 젊은이구나.”현빈은 겸손하게 손을 흔들었다.“과찬이십니다. 회사를 차릴 수 있게 된 것은 가족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2~3년만에 서서히 허전되기 시작했고요.”“장사를 하고 투자를 하는 것보다, 저는 오 교수님과 성 교수님과 같은 연구학자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실험에 몰두하고, 해마다 열심히 탐구하며, 외로움과 지루함을 견뎌내시며 과학의 참뜻과 학술의 비밀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잖아요.”“과학연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생활은 외롭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아. 안 그래, 정은아?”“그럼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직장처럼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고, 사회의 교
현빈도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동작이 서툰 것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그릇과 접시마다 세제를 짰던 것이다. 그리고 정은의 어이 없는 눈빛을 보며, 현빈은 억울한 말투로 물었다.“이렇게 씻는 거 아이야?”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귀찮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나 좀 가르쳐줘.” 현빈은 가볍게 기침을 했다. “예전에 외국에 있을 때, 혼자 밥을 해먹었거든. 그런데 보통 접시 한두 개만 썼으니 설거지를 하면 접시마다 세제를 조금씩 짰어...”“사실 설거지에 고정된 패턴이 없어요. 세제의 사용방법도 유일한 것은 아니고요. 사람마다 방식이 다르니, 그릇을 깨끗이 씻으면 돼요. 하지만...”정은은 말머리를 돌렸다.“절약을 하고 싶다면, 먼저 좀 짜서 물을 섞을 다음 행주로 닦으면서 씻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맑은 물로 한번 헹구면 되고요.”“그렇구나...”현빈은 들으면서 정은이 말한 대로 했다.그가 세제를 짜려고 할 때, 정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잠깐만요!”현빈은 고개를 돌렸다.“뜨거운 물 써요.”“아, 알았어!”정리를 한 다음, 두 사람은 잠시 앉아서 오미선과 얘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다 되자, 정은과 현빈은 작별을 고했다.“나 차 몰고 왔는데, 태워다 줄까?”이 시간에 지하철은 이미 없었다.정은도 밀당을 하지 않았다.“그럼 부탁할게요.”두 사람은 차에 올라 탔다.“만약 괜찮다면, 난 네가 날 선배라고 불렀으면 좋겠는데. 현빈 오빠도 괜찮지 않아? 직접 이름을 불러도 상관없어.”“네, 도련님.”“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정은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습관이 돼서 그래요.”“그래,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어차피 언젠가는 날 부르는 호칭을 바꾸게 할 테니까.’...30분 후, 차는 대학 근처에 도착했다.“학교 대문 앞에 세우면 돼요.”“집으로 안 가고?”“실험실에 가야 해요. 아직 두 조의 데이터를 실험하지 않았으니, 야근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좋아.”남자는 더 이상 묻지
정은은 갑자기 미진이 말한 것을 떠올렸다. 서비대학교 근처에는 치한이 하나 있는데, 특히 밤에 여학생을 미행하길 좋아했다.이미 한 여자애가 그 변태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경찰에 신고한 뒤 줄곧 그 사람을 잡지 못했다.여기까지 생각하자, 정은은 숨이 멎더니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하지만 뒤의 발자국 소리도 점차 빨라졌다.그녀는 손을 가방에 넣었다.비록 늘 재석과 함께 출퇴근했지만, 가끔 바쁠 때면 두 사람은 퇴근 시간이 완전히 엇갈렸다.정은은 또 혼자 살기 때문에 호신용 스프레이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자신을 지켰다.오늘 이것을 쓸 때가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 사람의 그림자도 바짝 뒤쫓아왔는데, 마치 정은의 그림자를 덮으려는 것 같았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손은 이미 가방에 들어가 차가운 스프레이와 닿았다.정은이 용기를 내어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 손을 쓸 준비를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은아!”그녀는 고개를 들었다.현빈이 우산을 쓰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매서운 눈빛으로 정은의 뒤를 바라보았다.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사라졌다.그 사람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도망쳤다.현빈이 성큼성큼 다가왔고, 차갑던 표정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많이 놀랐지?”정은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옷이 이미 식은땀에 젖었고 손발도 나른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현빈은 정은을 부축하며 핸드폰을 꺼냈다.“응, 송 비서, 서비대 근처에 여학생을 미행하는 치한이 있으니 잘 주의해 봐... 응, 소식 생기면 나에게 알려줘.”정은은 아직도 두려움에 잠겨 말을 하지 못했다.현빈은 마음이 아파서 정은을 안으며 힘을 주고 싶었지만, 결국 손을 내려놓았다.“괜찮아?”만약 선우가 여기에 있었다면 직접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현빈은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과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정말 오래 살다 볼
“정말 멋있다, 반했다, 우리 사귀자, 내 남자친구로 되어줘... 뭐 이런 거.”“정말 갈수록 심한 말이네요.” 정은은 웃었다.“내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과감하게 생각을 하는 거야.”“그럼 생각만 해요.”현빈은 그녀의 완곡한 거절을 못 알아들은 듯 웃으며 말했다.“먼저 생각한 다음 다시 시도하자.”“꼭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정은은 일부러 그에게 찬물을 끼얹었다.“괜찮아, 노력을 해야 아쉬움이 남지 않는 법. 내가 정말 해낼지도 모르잖아?”정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현빈은 그녀를 계단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올라가.”“고마워요.”“무슨 일 있으면 나에게 전화해. 무슨 일어도 네 앞에 나타날 테니까.”“네.”“이거 봐, 또 날 얼버무리고 있잖아. 넌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응, 일단 동의하자. 어차피 정말 돌발 상황이 닥쳐도 심현빈에게 전화하지 않을 테니까.”정은은 입가를 실룩거렸다.“나도 네가 독립적이고, 혼자 사는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러나 가끔은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나에게 연락을 했으면 좋겠어. 가장 먼저 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쨌든 내 생각을 좀 하면 안 될까?”정은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이제 얼른 올라가.”현빈은 정은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녀 방의 불이 켜진 것을 보고서야 몸을 돌려 떠났다....연희는 별장에서 이주 넘게 휴양을 했고, 뱃속의 태아도 점차 안정되었다.그동안 사람들이 시중들고 연희를 돌본 데다가, 도겸이 집에 돌아가지 않아 아무도 그녀를 욕하고 모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입덧기가 지나자, 연희는 안색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3kg로 더 쪘다.그러나 서영숙은 달랐다. 종으로 부려먹으면 그만이지만, 수시로 연희의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살이 빠지진 않았지만, 안색은 무척 초췌해졌다.탈모가 심할 뿐만 아니라 밤에 잠도 잘 못 잤다.연희는 갑자기 무엇
밖에 나오자, 세 사람은 모두 술을 마셨기에 각자의 전화로 대리운전을 불렀다.기다리는 사이에 선우는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라이터를 찾지 못했다.동건에게 달라고 할 때, 그는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뒷좌석에 있으니까 혼자 가지러 가.”선우는 차 문을 열고 라이터를 찾았다.“아, 여깄었네...”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라이터를 동건에게 돌려주었다.방금 뒷좌석에서 본 숄을 떠올리며 선우는 입가를 실룩거렸다.“형 이제 차에서 그런 짓 하는 것을 좋아하는 거야?”동건은 영문을 몰랐다.“그런 짓? 무슨 말을 하는 거야?”“모르는 척할 거예요? 뒤에 숄이 있잖아요? 그건 여자만 입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노란색. 솔직히 말해요, 어느 여자가 남긴 거예요?”동건은 어이가 없었다.“헛소리 하지 마.”“어머, 인정 안 하는 거 좀 봐요, 이건 형 답지가 않은데.”“인정하긴 개뿔! 그거 정은 씨 어머니의 숄이야. 내일 돌려주려고 했다고. 그런데 무슨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너 야동 좀 그만 봐!”선우는 깜짝 놀랐다.“정은 누나 어머니요? 그 분의 물건이 왜 형의 차에 있는 거죠?”한쪽에 있던 도겸은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동건은 방금 입을 열려고 했는데, 선우와 도겸이 모두 궁금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헤헤 웃으며 갑자기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글쎄, 그건 당연히 이유가 있겠지...”선우는 계속 추궁했다.“무슨 이유인데요?”“아니, 왜 질문이 이렇게 많아? 너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당연히 상관이 있죠! 난 이미 오랫동안 정은 누나의 소식을 듣지 못했거든요. 지난번에 다리가 부러져 이주 넘게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정은 누나가 병문안 하러 왔었거든요. 날 그렇게 걱정하고 있으니 나도 당연히 누나를 관심해야 하지 않겠어요?”“뭐? 정은 씨가 병문안을 갔었다고?” 동건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며 곁눈질로 줄곧 도겸을 주시하고 있었다.그는 몸을 살짝 기울이더니, 눈썹을 치켜
동건은 얼마 전에 도겸의 회사에 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 서연희의 어머니와 양아치 같은 남동생을 떠올렸다.“아이가 없어졌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서영숙은 아마 울다 기절할지도 모른다동건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곧 그가 부른 대리도 도착했다.“저기요! 대표님! 잠시만요!”동건이 뒷좌석 차 문을 열고 앉으려 할 때, 레스토랑 지배인이 그를 불렀다.“무슨 일이에요?”“방금 저희가 룸을 청소할 때 이 숄을 발견했습니다. 그 위에 브로치가 하나 있는데, 아마도 여성분이 빠뜨린 것 같습니다...”정은네 일가는 이미 떠났기에, 지배인은 그들과 함께 밥을 먹은 동건을 보자마자 즉시 그를 불렀다.“이리 줘요, 내가 돌려주면 되니까.’“네, 감사합니다.”동근은 숄을 뒷좌석에 놓고는 내일 사람 시켜 정은에게 돌려주려 했다.“가요, 선생님.”“네.”도중에 선우에게 전화가 왔다.[형! 왜 아직도 안 온 거예요? 지금이 몇 시인데. 우리 지금 형 하나만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요 며칠 너무 신나게 놀다가 몸이 약해진 거예요?]선우가 있는 곳은 좀 시끄러웠는데, 클럽이 아니면 술집이었다.“꺼져, 이 미친 자식아! 말도 참 더럽게 하네! 딱 기다려, 곧 도착할 테니까!”동건은 주소를 물어본 다음 직접 대리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슬라이드 바에서.선우가 나와서 동건과 어깨동무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왜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예요? 어느 여자의 품에 있다 온 건 아니겠죠?”“꺼져, 정상적인 식사를 했을 뿐이니 함부로 말하지 마.”선우는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믿을 것 같아요?”“난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니 이상한 루머 좀 퍼뜨리지 마세요.”“가짜 여자친구잖아요?” 선우는 히죽거리며 말했다.동건은 멈칫하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누가 그래?”“수민 누나가요.”“언제?”선우는 잠시 생각했다.“지난 주말이었을 걸요? 테니스를 치러 갔는데, 한 남자와 아주 다정하게 옆방에서 공을 치고 있더라고요...”남자는 수민의
이미숙은 이렇게 말했다.“뭘 먹을지 모르겠으면 제일 비싼 레스토랑으로 정해. 가격은 모든 것을 대표할 순 없지만 적어도 성의를 표시할 수 있으니까.’그래서 동건은 레스토랑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또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이미숙은 감사 인사를 해야 했으니 틀림없이 식사 자리를 비싼 곳으로 정할 것이다.금요일, 저녁.동건은 10분 앞당겨 도착했는데, 정은네 일가는 그보다 더 일찍 도착할 줄이야. 그들은 이미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원래 정은은 수민까지 불렀지만, 그녀는 너무 바빠서 이미 연속 이틀동안 야근을 했기에 정말 시간이 없었다.“정말 안 올 거야? 고동건 씨도 있는데.”수민은 눈을 부라리더니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래서? 그 남자가 있으면 내가 가야 하는 건가?]“두 사람 지금 사귀고 있잖아. 다 먹으면 동건 씨는 또 네 기사가 되어 널 집에 데려다줄 수 있고.”[쳇, 누가 데려다 달라고 했어? 나한테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우리는 가짜 커플이잖아. 넌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지금 자꾸 비아냥거릴 거야...]룸 안에서.동건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두 분도 참, 저도 간단하게 도와드렸을 뿐인데, 이렇게 특별히 밥을 사주시다니!”“당연히 그래야지.”소진헌은 웃으며 그와 악수했다.‘네가 나석천 편집장님을 정은에게 소개해준 덕분에 지금의 『7일담』이 있게 된 거야.”이미숙도 옆에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동건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젊었다.소진헌은 훤칠하지만 우아한 기질을 선보이고 있었다. 옷이든 하는 말이든 모두 지식인만이 가지고 있는 기질을 내뿜었다.이미숙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파란 원피스에 긴 머리를 걷어올린 채로 소진헌의 곁에 서 있으니 침착하면서도 도도했다.그녀가 서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곧 음식이 올라왔다.소진헌은 좋은 술 한 병을 가지고 왔다. 가득 따른 후, 그는 먼저 마시며 동건을 바라보았다.“작은 은
“정말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재석은 잠시 멈칫했다.“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뭐?!” 소진헌은 갑자기 흥분해졌다.“정말이야? 고백은 했어? 왜 아직도 사귀지 않은 거야?”잇단 질문에 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이럴 줄 알았으면 대답하지 말걸 그랬어.’네 사람은 집 앞에서 헤어졌다.재석은 왼쪽으로 향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고, 정은네 일가족은 명이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이미숙은 웃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오늘 덕분에 잘 먹었어.”“에이,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오늘 아주머니의 사인을 받았잖아요.”이 말 한마디에 이미숙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웃었다.정은은 샤워하러 갔다.평소처럼 머리를 묶고 머리가 젖지 않도록 샤워모자를 썼다.그러나 손을 뒤로 뻗은 순간, 딱딱한 집게핀을 만진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머리가 이미 묶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정은은 고개를 힘껏 흔들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음, 정말 대단한 수법이야. 그런데 왜 나만 못하는 거지? 말도 안돼,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짜증나!’이미숙과 소진헌은 씻은 다음 이미 방으로 돌아가 누워있었다. 부부는 불을 켜고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나석천이 이때 문자를 보내왔다.[이 작가님, 축하드립니다!][『7일담』은 오늘 판매량이 또 최고치를 기록했고, 이미 몇 개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이 책의 영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받고 싶다고 했어요.][30분 전에 출판사의 전화를 받았는데, 첫 번째로 인쇄한 책은 이미 품절되었고, 공장은 밤새 인쇄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작가님의 다른 배당금도 이미 도착했고요. 잠시 후에 계좌로 넣어드릴게요.][원래 전화로 말하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이미 주무셨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이렇게 문자를 보냈어요. 내일 전화로 말할 수도 있지만, 정말 너무 흥분해서요.]이미숙은 문자를 보고 나서 자신의 남편을 꽉 껴안았다.소진헌은 갑작스런 포옹에 흠칫 놀랐다.
“자.”정은은 목을 움직이더니 또 고개를 저었다. ‘어, 정말 안 떨어지네. 꽤 단단하게 묶었나 봐.’“어머! 아가씨 남자친구는 정말 빨리 배웠네요. 나보다 더 잘 하는 것 같아요!” 사장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재석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정은은 설명하려 했다.“제 남자친구 아닌...”그러나 사장님은 그녀에게 말을 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예전에는 시집간 여자들이 머리를 걷어올렸어요. 시집간 후, 금슬이 좋다면 남편이 직접 부인을 위해 머리를 묶어주었고요. 이게 다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빗겨주며 백년해로하고 영원히 한마음을 맺는다는 뜻이 있어요.”“안타깝게도 지금 이 남자들은 머리를 묶어주긴커녕 빗으로 간단하게 빗겨주는 것도 귀찮다고 하니 정말 게으름뱅이와 다름이 없다니깐요. 하지만 아가씨 남자친구는 정말 대단해요.”사장님은 재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빨리 배울 뿐만 아니라 인내심이 있어서 직접 아가씨를 위해 머리를 말아올렸잖아요.”“이 사람은 제 남자...”“아가씨, 이 총각 꼭 소중히 여겨야 돼요. 요즘은 좋은 남자가 그리 많지 않거든요.정은은 속이 답답해졌다.‘내 말을 끝까지 들어줄 순 없는 거야?’두 사람은 노점을 떠나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제 할 줄 아는 거야?”“뭘요?”“머리카락을 걷어올리는 거.”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난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배우라는 거야?!’재석이 말했다.“내가 다시 한번 가르쳐줄까?”“아니요!” 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굳이 안 걷어올려도 되니까 그냥 마음대로 묶으면 되지.’“날 못 믿겠어?”정은은 쓴웃음을 지었다.“나 자신을 믿지 않아서 그래요.”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어차피 봐도 제대로 배울 수 없으니 차라리 포기하는 게 더 나았다.두 사람은 걷다가 멈추었고, 거리를 나갈 때에야 이미숙, 소진헌과 합류했다.“엄마...”“어? 이 집게핀은...”이미숙은 바로 정은의 걷어올린
식당에 도착하자, 종업원은 네 사람을 데리고 직접 룸으로 향했다.그리고 음식을 주문한 다음 음식이 올라오길 기다렸다.민지가 강력히 추천한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 맛은 정말 좋았고, 재료도 정말 싱싱했지만 정말 매웠다.중간에 정은은 화장실에 다녀왔다.돌아올 때 팥빙수 하나가 올라왔다.재석이 설명했다. “이걸로 좀 풀어.”정은은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선배님은 정말 다정하고 자상한 사람인 것 같아.’다 먹고 재석은 계산하러 갔다.샤브샤브 식당 옆에는 번화가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시끌벅적했다.이미숙이 가고 싶어 하자 소진헌은 웃으며 그녀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재석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정은은 그들 일가족이 다 떠나는 것은 너무 예의가 없다고 생각하고 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이 나왔는데, 손에 종이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방금 네가 그 팥빙수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하나 더 포장해달라고 했어. 돌아가서 얼른 먹어. 남기면 직접 버리고. 내일 먹으면 배탈이 나기 쉬워.”“좋아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두 분은?”그녀는 번화가를 가리켰다.“놀러 가셨어요.”“그럼 우리도 구경하러 할까?”“그래요!” 정은도 당연히 가고 싶었다.만약 재석을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진작에 이미숙, 소진헌과 함께 갔을 것이다.두 사람은 나란히 거리를 걸었고, 양쪽 길가에는 노점이 빽빽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파는 물건도 각양각색이었다.먹을 것과 입을 것과 그리고 노는 것까지 가득했다.액세서리 노점을 지나자, 정은은 멈추더니 한 회색 집게핀을 가리키며 물었다.“이거 얼마예요?”“그건 2,000원이에요.”“이건 어떻게 집어야 머리카락을 꽉 고정시킬 수 있는 거죠?”정은은 인터넷에서 산 집게핀을 써본 적이 있었다.그녀의 머리카락이 많고 굵어서인지, 걷어 올려도 제대로 고정시킬 수 없었다.정은은 방금 이 집게핀이 전에 인터넷에서 산 것보다 더 크고 재질도 더 견고한 것을 보고 가격
딩-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정은이 안에서 나왔다.“선배님.”“어디 갔었어?”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지만 감정은 확연히 달랐다.정은의 말투는 홀가분했고, 재석은 약간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심지어 걱정이 묻어났다.“방금 아래층에서 심 대표님을 만났거든요. 자, 선배님, 물 좀 마셔요.”정은은 봉지에서 물 한 병을 꺼내 재석에게 건네주었다.재석은 봉지 위의 로고를 힐끗 바라보았다. 맞은편 거리의 수입 마트였다. ‘정은이는 그렇게 멀리까지 갈 리가 없을 텐데, 그렇다면...’“심 대표가 산 거야?”“네. 심 대표님 대신 어르신 좀 챙겨드렸거든요. 그 사람은 건너편 마트에 가서 물을 샀고요. 두 어르신은 이 브랜드의 물만 마셔서요.”재석은 손을 내밀어 물을 받았다.정은은 사인회장을 들여다보았다.“어때요? 이미 끝났어요?”재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줄을 선 사람이 많아서 아마도 조금 더 걸릴 거야.”방금 전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했기에, 정은은 다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정은은 재석이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선배님, 들어가서 사인 받을 거예요?”“난 그냥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그래요!” 정은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선배님, 왜 웃어요?”“에헴!” 재석은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갑자기 정색했다. “아무것도 아니야.”‘뭐지, 선배님은 지금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니!’사인회는 원래 오후 4시에 끝날 예정이었지만 결국 5시가 되어서야 끝났다.맨 뒤에서 줄을 선 재석과 정은은 책을 펼쳐 이미숙 앞에 놓았다.“사랑하는 엄마, 저에게 사인 좀 해주세요.”“감사합니다, 아주머니.”이미숙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예쁜 딸이 앞에 서 있었고, 옆에는 재석이 있었다.두 사람 모두 웃으며 눈빛에 기대를 드러냈다.그 순간, 이미숙은 마음이 황홀했다. ‘두 아이가 이렇게 서 있으니 정말.
정은은 약간 뻘쭘해졌다. 속마음이 간파당했지만 그렇게 난처한 편은 아니었다.처음 만난 사이이니, 경계를 하는 것도 아주 정상적이었다.‘두 분은 겪으신 일이 나보다 훨씬 많으니 내 마음을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거야.’아니나 다를까, 봉수진은 정은의 손을 두드렸다.“아가씨, 특히 너처럼 예쁜 아가씨는 언제나 경계심을 가져야 해. 미리 위험을 방지해야 자신을 더 잘 보호할 수 있어.”“네.”“제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L시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J시에 왔어요. 그러니 두 분은 아마 저를 보신 적이 없을 거예요.”“하긴.” 봉수진은 웃었다.그러나 왠지 모르게 정은은 봉수진의 미소에서 낙담과 실망을 느낄 수 있었다.이춘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예전에는 보지 못했지만,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인연이라 할 수 있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물을 사러 간 현빈이 돌아왔고, 두 노인에게 한 병씩 건네주었다. 그리고 남은 물을 담은 봉지를 정은에게 건네주었다.“몇 병 더 샀는데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드려. 오늘 아주머니 사인회이니 아저씨도 같이 오셨겠지?”“네, 맞아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받아.” 현빈은 봉지를 직접 그녀의 손에 넣었다.“고마워요.”“방금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기분이 꽤 좋으신 것 같은데?”들어오기 전에 현빈은 멀리서 이춘재의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는 것을 보았고, 평소에 가장 까다로운 할머니조차도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이 장면을 본 순간, 현빈은 갑자기 멍해졌다.‘두 분께서 이렇게 웃으시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작년에 외국에 두 노인을 방문할 때, 봉수진은 마침 입원을 했다. 이춘재는 매일 탄식하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현빈은 이주 정도 머물렀고, 이춘재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아예 없었다.이씨 가문의 산업이 모두 국내에 있었기에, 현빈도 두 노인에게 돌아오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막내딸이 실종된 이후로 이씨 가문은 모든 것이 변했다.이것도 바로 이춘재 부부가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것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아직도 행방이 묘연해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모를 떠올리니, 현빈은 저도 모르게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만약 계속 찾을 수 없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아쉬움을 메우지 못할 것이다.“현빈아, 목이 좀 마르구나.” 노부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래요. 그럼 저 물 사러 갈게요...” 현빈은 정은을 바라보았다.“많이 바빠?”“괜찮아요.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죠?”“난 물 좀 사러 갈 테니까, 나 대신 두 분 좀 챙겨줘.”“내가 사러 갈까?” 어차피 정은도 내려와서 물을 사려 했다.현빈은 고개를 저었다.“우리 할머니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평소에 고정된 브랜드의 물만 마시거든. 이 근처에는 없고, 맞은편 거리에 있는 수입 마트에 가서 사야 해.”“그래요? 그럼 얼른 가서 사요. 난 여기서 두 분과 함께 얘기 나누고 있을 테니 안심해요.”“고마워.”현빈은 몸을 돌려 떠났다.할머니 봉수진은 정은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곁에 앉혔다.“아가씨, 우리 현빈이와 친구라고? 너희들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지?”“아...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도겸이 바로 그 ‘친구'였다.“그렇구나. 현빈이는 여성 친구가 거의 없는데, 네가 처음은 것 같구나!” 봉수진은 웃음을 지었다.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와, 심 대표는 정말 물 마시듯 여자친구를 바꾸었지.’“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곳은 너무 많이 변했어.”이춘재는 갑자기 감탄하기 시작했다.정은은 그의 말투에 묻은 그리움을 알아차리며, 최근 몇 년 J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춘재는 정은이 J시에 대해 술술 말하는 것을 듣고, 호기심에 물었다.“넌 이곳의 사람인가?”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저는 L시의 사람이에요. L시 아시죠? 남방의 구릉지대인데,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과 물도 있고...”정은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