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멋있다, 반했다, 우리 사귀자, 내 남자친구로 되어줘... 뭐 이런 거.”“정말 갈수록 심한 말이네요.” 정은은 웃었다.“내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과감하게 생각을 하는 거야.”“그럼 생각만 해요.”현빈은 그녀의 완곡한 거절을 못 알아들은 듯 웃으며 말했다.“먼저 생각한 다음 다시 시도하자.”“꼭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정은은 일부러 그에게 찬물을 끼얹었다.“괜찮아, 노력을 해야 아쉬움이 남지 않는 법. 내가 정말 해낼지도 모르잖아?”정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현빈은 그녀를 계단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올라가.”“고마워요.”“무슨 일 있으면 나에게 전화해. 무슨 일어도 네 앞에 나타날 테니까.”“네.”“이거 봐, 또 날 얼버무리고 있잖아. 넌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응, 일단 동의하자. 어차피 정말 돌발 상황이 닥쳐도 심현빈에게 전화하지 않을 테니까.”정은은 입가를 실룩거렸다.“나도 네가 독립적이고, 혼자 사는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러나 가끔은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나에게 연락을 했으면 좋겠어. 가장 먼저 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쨌든 내 생각을 좀 하면 안 될까?”정은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이제 얼른 올라가.”현빈은 정은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녀 방의 불이 켜진 것을 보고서야 몸을 돌려 떠났다....연희는 별장에서 이주 넘게 휴양을 했고, 뱃속의 태아도 점차 안정되었다.그동안 사람들이 시중들고 연희를 돌본 데다가, 도겸이 집에 돌아가지 않아 아무도 그녀를 욕하고 모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입덧기가 지나자, 연희는 안색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3kg로 더 쪘다.그러나 서영숙은 달랐다. 종으로 부려먹으면 그만이지만, 수시로 연희의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살이 빠지진 않았지만, 안색은 무척 초췌해졌다.탈모가 심할 뿐만 아니라 밤에 잠도 잘 못 잤다.연희는 갑자기 무엇
도겸의 비서였다.도겸은 아주 중요한 서류를 서재에 두었으니, 지금 바로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상업기밀과 관계된 일인데다 또 그렇게 긴급했으니 서영숙은 얼른 비서를 데리고 서재로 갔다.“이건가?”“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그럼 됐어, 빨리 도겸에게 보내줘.”연희는 꾸물거리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과 어깨를 스치다가, 문득 서재 문이 잘 닫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좌우를 두리번거리자, 2층 복도는 조용했다. 서영숙은 이미 비서를 아래층으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연희는 눈알을 굴림 그 문을 살짝 열었다...한식 스타일의 L형 책장은 위에서 아래로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안에는 서류가 가득 놓여 있었다.창가에는 다탁이 있었는데, 그 위에 복숭아나무로 만든 다기 한 세트가 놓여 있었다.왼쪽으로 가면 옅은 색의 나무 탁자가 있었고, 위에는 필통과 몇 권의 책이 있었다.왕미자가 정기적으로 들어와 청소하는 것 외에, 이 서재는 평소에 항상 잠긴 상태였다.연희는 더욱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다.‘하지만 난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왔잖아?’여기까지 생각하자, 연희는 득의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탁자 위에 두개의 서류 봉투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봉인이 되지 않았다.연희는 하나를 집어 들어 안에 있는 A4 용지를 꺼내 보았는데, 모두 모르는 전문 용어와 숫자들이었다.물론 그녀도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 그중 한 장을 꺼낸 다음 다른 한 서류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꾸몄다.이때 서영숙의 목소리가 발자국 소리와 함께 울렸다.“이모님, 서연희는요? 방금까지 여기에 있었잖아요? 또 어디 갔어요?”연희는 당황해하며 얼른 속도를 높였고, 서영숙이 찾아오기 전에 서재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왔다.그리고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는 척했다.서영숙은 눈살을 찌푸렸다.“너 방금 햇볕을 쬐러 간다고 하지 않았니? 어떻게 위층에 있는 거야?”연희는 담담하게 웃었다.“밖이 너무 더워서
서영숙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입 닥쳐, 지금 내 아들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끼어드는 거야!”그녀는 도겸을 바라보며 설명했다.“어제 난 확실히 네 서재에 들어간 적이 있어. 비서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하지만 난 정말 서랍밖에 열지 않았어. 네가 원하는 그 서류를 가져다준 다음, 다른 물건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그럼 이모님이 청소하다가 실수로 건드린 건 아닐까?”왕미자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도련님께서는 청소할 때 서재에 있는 물건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저는 이 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매번 아주 조심스럽게 청소를 했습니다.”“이모님은 아닐 거예요. 서재는 일주일에 한 번만 청소하니까요. 어제는 청소할 시간이 아니었어요.”도겸이 말했다.연희는 보신탕을 천천히 떠서 입에 넣었다.“저도 서재의 열쇠가 없으니 전혀 들어갈 수가 없죠. 그러니 저일 리가 더더욱 없고요. 이렇게 보면 아주머니일 수밖에 없네요.”서영숙은 연희가 비아냥거리는 것을 듣고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지금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은 내 아들의 서류이니, 내가 왜 함부로 건드리겠어? 난 바보도 아닌데, 이렇게 하면 나에게 무슨 좋은 점이 있냐고?”연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그걸 누가 알겠어요? 어차피 제가 한 건 아니에요. 게다가 며칠 전에 누군가 일부러 짜증을 냈잖아요?”사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작은 일이었다. 서영숙은 항상 말을 마음대로 내뱉는 사람이었다. 평소에 그런 적도 많았지만, 이 시점에서 연희가 이렇게 말하니,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도겸은 안을 살펴보았다. 서류는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마치 누군가 고의로 장난을 친 것처럼, 두 부의 서류에서 각각 한 페이지를 바꾸었다.서영숙이라고 해도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필경 그동안 도겸은 별장에 돌아가지 않았고, 서영숙의 전화도 받지 않았으니, 그녀가 마음속의 불만을 발산하는 것도 아주 정상적이었다.“됐어요,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맙소사! 드디어 이 미친 여자에게서 벗어나는 건가? 흑흑... 하나님이시여!’사람들은 처음으로 서영숙이 최고라고 느꼈다.얼마 지나지 않아, 큰 별장에는 연희 혼자만 남았다.그녀는 텅 빈 거실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깊은 밤, 강씨 가문 본가에서.서정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서영숙이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안마사가 그녀의 어깨와 목을 마사지하고 있었다.“엄마? 돌아왔어요?”“응.”“그 서연희를 모시러... 아니다! 그 여자를 챙겨주러 가지 않았어요?”‘두 주일이나 넘었는데, 왜 미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돌아온 거지? 이상해!’서영숙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여자 언급하지 마,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나니까!”“무슨 일인데요?” 서정은 그녀의 곁에 앉았다.“얼른 말씀해 보세요!”서영숙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별장에서 받은 괴롭힘을 하나하나 세어 서정에게 들려주었다.후에 안마사도 마사지를 하지 않고, 일어서서 팔을 안으며 연희를 마구 욕하기 시작했다.“그 여자보다 더 천한 것을 본 적이 없다니깐! 진작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소정은과 사귀게 내버려두었을걸!”적어도 정은은 연희보다 인내심이 있고, 소질이 있으며 단정하고 예의가 있었다.말하지 않으면 몰라도, 이렇게 비교하니 서영숙은 정말 후회막급이었다.서정은 자신의 엄마가 이토록 화가 난 것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되려 열받았다.‘지난번에 뺨을 때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나 봐. 몇 대 더 때렸어야 했는데!’“그리고 네 오빠도 그래.” 도겸을 언급하자, 서영숙은 더욱 억울했다.“뜻밖에도 그 계집애의 말을 듣고, 내가 서재의 서류를 건드렸다고 믿는 거야. 심지어 내가 발뺌을 하고 있다고 말했어! 차라리 그 천한 것을 믿을지언정 날 믿지 않다니! 난 너희들 친엄마잖아!”“오빠도 너무해요! 내가 바로 전화할게요...”말을 마치자마자 서정은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서영숙도 막지
도겸은 보드카 한 병을 주문한 다음, 한 잔, 두 잔 계속 마셨다...선우는 그가 술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렸다.“형, 이 술은 너무 독하니까 좀 적게 마셔!”‘그러다 또 병원에 들어가지 말고...’도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계속 술잔을 들고 있으며 내려놓지 않았다.“너의 핸드폰은? 이리 줘.”“내 핸드폰은 또 왜요?” 선우는 의혹을 느끼며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도겸은 바로 빼앗아오더니 즉시 정은의 번호를 눌렀다.곧 맞은편에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사막에서 떠돌아다니다 마침내 수원을 찾은 사람인 것처럼 절박하게 입을 열었다.“정은아, 보고 싶어...”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아... 앞으로 정은 누나는 내 전화조차 받지 않겠지?’“정은아, 돌아와, 응? 내가 잘못했어... 전에 분명히 함께 백년해로하기로 약속했잖아. 이제 겨우 몇 년이 지났다고 날 버리려는 거야? 지나간 일은 다 지나가게 내버려두지. 네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든, 일하고 싶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너와 함께 할게. 난 무조건 널 응원할 거야... 그리고 우리 작년에 약속했잖아, 같이 터키에 가서 일몰을 보고 별을 세기로. 다 잊은 거야?”도겸은 잠긴 목소리로 한꺼번에 말을 다 했고, 정말 너무나도 비천했다.그러나 맞은편은 시종 침묵하며 대답하지 않았다.도겸은 계속해서 말했다.“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나 이제야 네가 날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알게 되었단 말이야... 정은아, 사랑해, 나 정말 너 없으면 안 돼...”정은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말 다 했어?]그러나 도겸의 예상과 달리, 정은은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아빠가 된다는 소식 들었어, 축하해.]뚜- 뚜- 뚜-정은은 말 한 마디로 도겸을 철저히 지옥으로 몰아넣었다.도겸의 두 눈은 초점을 잃었고, 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도 힘없이 드리워졌다.‘날 축하한대. 하하... 날 축하한다니?! 정은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어! 나
감시 화면에 나타난 시간은 오후 6시였고, 넓은 거실에서 정은은 혼자 소파에 앉아있었다.도겸은 단번에 그녀가 자신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핸드폰도 놀지 않으며 그냥 이렇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시들고 있는 장미와 같았다.원래 도겸이 좋아하던 ‘집의 느낌’은 한 여자가 하루하루 타협하고, 싫증조차 내지 않은 기다림, 심지어 자아를 완전히 포기란 희생으로 바꿔온 것이었다. 그가 언제 돌아오든 거실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다.“어렸을 때 아버지는 일하느라 바쁘셨고, 어머니는 놀러다니느라 바쁘셨어. 그럼 난 혼자 집에 남아 이모님과 함께 했지. 그래서 비록 부모님이 모두 계시고, 집안 형편도 아주 좋지만, 난 지금까지 포근하고 따뜻한 집의 느낌을 느끼지 못했어...”“정은아, 난 가끔 정말 네가 부러워... 간단하고 깨끗한 가족 관계, 한 쌍의 금슬이 좋은 부모님, 그리고 어릴 때부터 사랑으로 널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널 위한 모든 일이라면 직접 나서셨잖아...”“오늘까지도 내 부모님은 돈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셔. 돈을 쓰면 좋은 아들을 키울 수 있고. 만약 이 아이가 좋지 않다면, 틀림없이 돈을 많이 쓰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실 거야.”“정은아, 내가 널 만난 게 너무나도 큰 행운인 것 같아. 네가 나로 하여금 이런 따뜻함을 느끼게 했거든...”“너와 함께 한 후로, 내 머릿속에는 항상 이런 화면이 나타났어. 퇴근하자마자 네가 주방에서 바쁘게 돌아치는 모습, 아이가 거실에서 놀고 있는 모습. 우리 가족은 세 식구 심지어 네 식구 다섯 식구는 함께 모여 저녁을 먹고 있었어...”“식사를 한 후, 아이들은 정원에서 놀고, 넌 그네에 앉아 있었어. 그럼 난 네 뒤에 서서 가볍게 널 밀었고. 그렇게 우리는 아이들이 서로를 쫓아다니며 웃고 떠드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정은아, 날 믿어. 우리는 계속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늙은이가 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도겸은 최근 한 달의 감시 화면을 기록한 파일을 클릭했다.연희는 이미 잠들었다. 아래층에서 어렴풋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바로 정신을 차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떠날 때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이제 겨우 몇 시간 지났다고. 결국 이렇게 다시 돌아왔잖아? 흥, 재벌 집안 사모님도 별거 아니네! 아니면 정말 나 혼자 여기에 내버려두든가. 어차피 내 뱃속의 아이로 천 억을 바꿀 수 있으니까. 누가 누굴 무서워한다는 거야?’서영숙이 돌아오면 왕미자와 임강주 그들도 함께 돌아올 것이다. ‘마침 배도 고프니 이모님에게 보신탕 좀 끓여 달라고 해야지.’연희는 거실과 주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의혹을 느끼며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이때 연희는 현관에 남자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도겸 씨가 돌아온 거야?’생각을 하다가 연희는 얼른 침실로 돌아가서 섹시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서재로 걸어갔다.똑똑-“도겸 오빠, 돌아왔어요?”그녀는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서재의 불이 켜져 있었으니 도겸 말고 또 누가 안에 있겠는가?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연희는 흥분한 심정을 꾹 누르며 웃으며 문을 밀었다.“도겸 오빠...”도겸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빨간색 레이스로 된 잠옷 치마를 입고 있었다. 가슴이 푹 파인 스타일에 가느다란 끈 두 개가 새하얀 어깨에 걸려 있었다.경망스럽고 저속한 모습이었다.남자가 자신을 쫓아내지 않자, 연희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언제 돌아오셨어요? 또 야근하신 거예요? 이주 동안 계속 힘들게 일하셨으니 많이 피곤하시겠죠? 자, 제가 안마해드릴게요...”연희는 남자가 그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은 일에 적당한 핑계를 찾았다. 그리고 마치 전에 다투지 않았던 것처럼 활짝 웃었다.연희가 비위를 맞추며 가식적으로 웃는 것을 보면서 도겸은 화
화면 속의 연희는 몰래 서재에 잠입한 후, 두 서류를 바꾸고 있었다.이 외에 또 평소 거들먹거리며 서영숙을 지시하고 모욕하는 장면도 있었다.갑작스러운 증거 앞에서 연희는 멍해졌다.이 영상 때문인지 아니면 남자의 매정한 따귀 때문인지, 연희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네가 단지 허영심이 있고 천박한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버릇처럼 거짓말을 하고, 각박하고 신랄하며 또 시비를 일으키고 나와 우리 어머니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 네가 자신의 주제를 똑똑히 파악했으면 해서 널 때린 거야. 있어서는 안 될 망상을 하지 말고. 그리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해. 그렇지 않으면...”도겸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투가 음침했다.“넌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연희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극심한 공포에 따가운 양쪽 볼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도, 도겸 오빠, 저 정말 잘못했어요...”도겸은 말을 하지 않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제가 내일 본가에 찾아가서 아주머니에게 사과할게요. 절 때리든 욕하든 절대로 말대꾸를 하지 않을 거예요! 아주머니께서 화를 푸실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남자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연희는 당황해지더니 콧물과 눈물을 줄줄 흘렸다.“저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임신해서 호르몬에 이상이 생겼나 봐요. 그래서 아주머니를 그렇게 대한 거예요...”도겸은 차가운 눈빛으로 연희가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질질 짜며 불쌍하게 울고 있었다.“말 다 했어?”연희는 멈칫했다.“다 울었냐고?”“오빠...”“다 울었으면 얼른 가서 네 짐이나 싸.”“뭐, 뭐라고요?”도겸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그날 너에게 꺼지라고 한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한 거야? 이주 넘게 이 집에 남겨뒀으니 나도 널 봐줄 만큼 봐줬어.”“아니요! 그건 안 돼요! 저한테 이러면 안 되죠!” 연희는 울며 고개를
밖에 나오자, 세 사람은 모두 술을 마셨기에 각자의 전화로 대리운전을 불렀다.기다리는 사이에 선우는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라이터를 찾지 못했다.동건에게 달라고 할 때, 그는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뒷좌석에 있으니까 혼자 가지러 가.”선우는 차 문을 열고 라이터를 찾았다.“아, 여깄었네...”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라이터를 동건에게 돌려주었다.방금 뒷좌석에서 본 숄을 떠올리며 선우는 입가를 실룩거렸다.“형 이제 차에서 그런 짓 하는 것을 좋아하는 거야?”동건은 영문을 몰랐다.“그런 짓? 무슨 말을 하는 거야?”“모르는 척할 거예요? 뒤에 숄이 있잖아요? 그건 여자만 입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노란색. 솔직히 말해요, 어느 여자가 남긴 거예요?”동건은 어이가 없었다.“헛소리 하지 마.”“어머, 인정 안 하는 거 좀 봐요, 이건 형 답지가 않은데.”“인정하긴 개뿔! 그거 정은 씨 어머니의 숄이야. 내일 돌려주려고 했다고. 그런데 무슨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너 야동 좀 그만 봐!”선우는 깜짝 놀랐다.“정은 누나 어머니요? 그 분의 물건이 왜 형의 차에 있는 거죠?”한쪽에 있던 도겸은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동건은 방금 입을 열려고 했는데, 선우와 도겸이 모두 궁금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헤헤 웃으며 갑자기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글쎄, 그건 당연히 이유가 있겠지...”선우는 계속 추궁했다.“무슨 이유인데요?”“아니, 왜 질문이 이렇게 많아? 너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당연히 상관이 있죠! 난 이미 오랫동안 정은 누나의 소식을 듣지 못했거든요. 지난번에 다리가 부러져 이주 넘게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정은 누나가 병문안 하러 왔었거든요. 날 그렇게 걱정하고 있으니 나도 당연히 누나를 관심해야 하지 않겠어요?”“뭐? 정은 씨가 병문안을 갔었다고?” 동건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며 곁눈질로 줄곧 도겸을 주시하고 있었다.그는 몸을 살짝 기울이더니, 눈썹을 치켜
동건은 얼마 전에 도겸의 회사에 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 서연희의 어머니와 양아치 같은 남동생을 떠올렸다.“아이가 없어졌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서영숙은 아마 울다 기절할지도 모른다동건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곧 그가 부른 대리도 도착했다.“저기요! 대표님! 잠시만요!”동건이 뒷좌석 차 문을 열고 앉으려 할 때, 레스토랑 지배인이 그를 불렀다.“무슨 일이에요?”“방금 저희가 룸을 청소할 때 이 숄을 발견했습니다. 그 위에 브로치가 하나 있는데, 아마도 여성분이 빠뜨린 것 같습니다...”정은네 일가는 이미 떠났기에, 지배인은 그들과 함께 밥을 먹은 동건을 보자마자 즉시 그를 불렀다.“이리 줘요, 내가 돌려주면 되니까.’“네, 감사합니다.”동근은 숄을 뒷좌석에 놓고는 내일 사람 시켜 정은에게 돌려주려 했다.“가요, 선생님.”“네.”도중에 선우에게 전화가 왔다.[형! 왜 아직도 안 온 거예요? 지금이 몇 시인데. 우리 지금 형 하나만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요 며칠 너무 신나게 놀다가 몸이 약해진 거예요?]선우가 있는 곳은 좀 시끄러웠는데, 클럽이 아니면 술집이었다.“꺼져, 이 미친 자식아! 말도 참 더럽게 하네! 딱 기다려, 곧 도착할 테니까!”동건은 주소를 물어본 다음 직접 대리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슬라이드 바에서.선우가 나와서 동건과 어깨동무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왜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예요? 어느 여자의 품에 있다 온 건 아니겠죠?”“꺼져, 정상적인 식사를 했을 뿐이니 함부로 말하지 마.”선우는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믿을 것 같아요?”“난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니 이상한 루머 좀 퍼뜨리지 마세요.”“가짜 여자친구잖아요?” 선우는 히죽거리며 말했다.동건은 멈칫하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누가 그래?”“수민 누나가요.”“언제?”선우는 잠시 생각했다.“지난 주말이었을 걸요? 테니스를 치러 갔는데, 한 남자와 아주 다정하게 옆방에서 공을 치고 있더라고요...”남자는 수민의
이미숙은 이렇게 말했다.“뭘 먹을지 모르겠으면 제일 비싼 레스토랑으로 정해. 가격은 모든 것을 대표할 순 없지만 적어도 성의를 표시할 수 있으니까.’그래서 동건은 레스토랑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또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이미숙은 감사 인사를 해야 했으니 틀림없이 식사 자리를 비싼 곳으로 정할 것이다.금요일, 저녁.동건은 10분 앞당겨 도착했는데, 정은네 일가는 그보다 더 일찍 도착할 줄이야. 그들은 이미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원래 정은은 수민까지 불렀지만, 그녀는 너무 바빠서 이미 연속 이틀동안 야근을 했기에 정말 시간이 없었다.“정말 안 올 거야? 고동건 씨도 있는데.”수민은 눈을 부라리더니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래서? 그 남자가 있으면 내가 가야 하는 건가?]“두 사람 지금 사귀고 있잖아. 다 먹으면 동건 씨는 또 네 기사가 되어 널 집에 데려다줄 수 있고.”[쳇, 누가 데려다 달라고 했어? 나한테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우리는 가짜 커플이잖아. 넌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지금 자꾸 비아냥거릴 거야...]룸 안에서.동건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두 분도 참, 저도 간단하게 도와드렸을 뿐인데, 이렇게 특별히 밥을 사주시다니!”“당연히 그래야지.”소진헌은 웃으며 그와 악수했다.‘네가 나석천 편집장님을 정은에게 소개해준 덕분에 지금의 『7일담』이 있게 된 거야.”이미숙도 옆에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동건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젊었다.소진헌은 훤칠하지만 우아한 기질을 선보이고 있었다. 옷이든 하는 말이든 모두 지식인만이 가지고 있는 기질을 내뿜었다.이미숙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파란 원피스에 긴 머리를 걷어올린 채로 소진헌의 곁에 서 있으니 침착하면서도 도도했다.그녀가 서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곧 음식이 올라왔다.소진헌은 좋은 술 한 병을 가지고 왔다. 가득 따른 후, 그는 먼저 마시며 동건을 바라보았다.“작은 은
“정말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재석은 잠시 멈칫했다.“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뭐?!” 소진헌은 갑자기 흥분해졌다.“정말이야? 고백은 했어? 왜 아직도 사귀지 않은 거야?”잇단 질문에 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이럴 줄 알았으면 대답하지 말걸 그랬어.’네 사람은 집 앞에서 헤어졌다.재석은 왼쪽으로 향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고, 정은네 일가족은 명이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이미숙은 웃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오늘 덕분에 잘 먹었어.”“에이,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오늘 아주머니의 사인을 받았잖아요.”이 말 한마디에 이미숙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웃었다.정은은 샤워하러 갔다.평소처럼 머리를 묶고 머리가 젖지 않도록 샤워모자를 썼다.그러나 손을 뒤로 뻗은 순간, 딱딱한 집게핀을 만진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머리가 이미 묶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정은은 고개를 힘껏 흔들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음, 정말 대단한 수법이야. 그런데 왜 나만 못하는 거지? 말도 안돼,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짜증나!’이미숙과 소진헌은 씻은 다음 이미 방으로 돌아가 누워있었다. 부부는 불을 켜고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나석천이 이때 문자를 보내왔다.[이 작가님, 축하드립니다!][『7일담』은 오늘 판매량이 또 최고치를 기록했고, 이미 몇 개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이 책의 영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받고 싶다고 했어요.][30분 전에 출판사의 전화를 받았는데, 첫 번째로 인쇄한 책은 이미 품절되었고, 공장은 밤새 인쇄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작가님의 다른 배당금도 이미 도착했고요. 잠시 후에 계좌로 넣어드릴게요.][원래 전화로 말하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이미 주무셨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이렇게 문자를 보냈어요. 내일 전화로 말할 수도 있지만, 정말 너무 흥분해서요.]이미숙은 문자를 보고 나서 자신의 남편을 꽉 껴안았다.소진헌은 갑작스런 포옹에 흠칫 놀랐다.
“자.”정은은 목을 움직이더니 또 고개를 저었다. ‘어, 정말 안 떨어지네. 꽤 단단하게 묶었나 봐.’“어머! 아가씨 남자친구는 정말 빨리 배웠네요. 나보다 더 잘 하는 것 같아요!” 사장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재석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정은은 설명하려 했다.“제 남자친구 아닌...”그러나 사장님은 그녀에게 말을 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예전에는 시집간 여자들이 머리를 걷어올렸어요. 시집간 후, 금슬이 좋다면 남편이 직접 부인을 위해 머리를 묶어주었고요. 이게 다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빗겨주며 백년해로하고 영원히 한마음을 맺는다는 뜻이 있어요.”“안타깝게도 지금 이 남자들은 머리를 묶어주긴커녕 빗으로 간단하게 빗겨주는 것도 귀찮다고 하니 정말 게으름뱅이와 다름이 없다니깐요. 하지만 아가씨 남자친구는 정말 대단해요.”사장님은 재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빨리 배울 뿐만 아니라 인내심이 있어서 직접 아가씨를 위해 머리를 말아올렸잖아요.”“이 사람은 제 남자...”“아가씨, 이 총각 꼭 소중히 여겨야 돼요. 요즘은 좋은 남자가 그리 많지 않거든요.정은은 속이 답답해졌다.‘내 말을 끝까지 들어줄 순 없는 거야?’두 사람은 노점을 떠나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제 할 줄 아는 거야?”“뭘요?”“머리카락을 걷어올리는 거.”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난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배우라는 거야?!’재석이 말했다.“내가 다시 한번 가르쳐줄까?”“아니요!” 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굳이 안 걷어올려도 되니까 그냥 마음대로 묶으면 되지.’“날 못 믿겠어?”정은은 쓴웃음을 지었다.“나 자신을 믿지 않아서 그래요.”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어차피 봐도 제대로 배울 수 없으니 차라리 포기하는 게 더 나았다.두 사람은 걷다가 멈추었고, 거리를 나갈 때에야 이미숙, 소진헌과 합류했다.“엄마...”“어? 이 집게핀은...”이미숙은 바로 정은의 걷어올린
식당에 도착하자, 종업원은 네 사람을 데리고 직접 룸으로 향했다.그리고 음식을 주문한 다음 음식이 올라오길 기다렸다.민지가 강력히 추천한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 맛은 정말 좋았고, 재료도 정말 싱싱했지만 정말 매웠다.중간에 정은은 화장실에 다녀왔다.돌아올 때 팥빙수 하나가 올라왔다.재석이 설명했다. “이걸로 좀 풀어.”정은은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선배님은 정말 다정하고 자상한 사람인 것 같아.’다 먹고 재석은 계산하러 갔다.샤브샤브 식당 옆에는 번화가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시끌벅적했다.이미숙이 가고 싶어 하자 소진헌은 웃으며 그녀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재석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정은은 그들 일가족이 다 떠나는 것은 너무 예의가 없다고 생각하고 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이 나왔는데, 손에 종이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방금 네가 그 팥빙수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하나 더 포장해달라고 했어. 돌아가서 얼른 먹어. 남기면 직접 버리고. 내일 먹으면 배탈이 나기 쉬워.”“좋아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두 분은?”그녀는 번화가를 가리켰다.“놀러 가셨어요.”“그럼 우리도 구경하러 할까?”“그래요!” 정은도 당연히 가고 싶었다.만약 재석을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진작에 이미숙, 소진헌과 함께 갔을 것이다.두 사람은 나란히 거리를 걸었고, 양쪽 길가에는 노점이 빽빽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파는 물건도 각양각색이었다.먹을 것과 입을 것과 그리고 노는 것까지 가득했다.액세서리 노점을 지나자, 정은은 멈추더니 한 회색 집게핀을 가리키며 물었다.“이거 얼마예요?”“그건 2,000원이에요.”“이건 어떻게 집어야 머리카락을 꽉 고정시킬 수 있는 거죠?”정은은 인터넷에서 산 집게핀을 써본 적이 있었다.그녀의 머리카락이 많고 굵어서인지, 걷어 올려도 제대로 고정시킬 수 없었다.정은은 방금 이 집게핀이 전에 인터넷에서 산 것보다 더 크고 재질도 더 견고한 것을 보고 가격
딩-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정은이 안에서 나왔다.“선배님.”“어디 갔었어?”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지만 감정은 확연히 달랐다.정은의 말투는 홀가분했고, 재석은 약간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심지어 걱정이 묻어났다.“방금 아래층에서 심 대표님을 만났거든요. 자, 선배님, 물 좀 마셔요.”정은은 봉지에서 물 한 병을 꺼내 재석에게 건네주었다.재석은 봉지 위의 로고를 힐끗 바라보았다. 맞은편 거리의 수입 마트였다. ‘정은이는 그렇게 멀리까지 갈 리가 없을 텐데, 그렇다면...’“심 대표가 산 거야?”“네. 심 대표님 대신 어르신 좀 챙겨드렸거든요. 그 사람은 건너편 마트에 가서 물을 샀고요. 두 어르신은 이 브랜드의 물만 마셔서요.”재석은 손을 내밀어 물을 받았다.정은은 사인회장을 들여다보았다.“어때요? 이미 끝났어요?”재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줄을 선 사람이 많아서 아마도 조금 더 걸릴 거야.”방금 전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했기에, 정은은 다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정은은 재석이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선배님, 들어가서 사인 받을 거예요?”“난 그냥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그래요!” 정은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선배님, 왜 웃어요?”“에헴!” 재석은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갑자기 정색했다. “아무것도 아니야.”‘뭐지, 선배님은 지금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니!’사인회는 원래 오후 4시에 끝날 예정이었지만 결국 5시가 되어서야 끝났다.맨 뒤에서 줄을 선 재석과 정은은 책을 펼쳐 이미숙 앞에 놓았다.“사랑하는 엄마, 저에게 사인 좀 해주세요.”“감사합니다, 아주머니.”이미숙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예쁜 딸이 앞에 서 있었고, 옆에는 재석이 있었다.두 사람 모두 웃으며 눈빛에 기대를 드러냈다.그 순간, 이미숙은 마음이 황홀했다. ‘두 아이가 이렇게 서 있으니 정말.
정은은 약간 뻘쭘해졌다. 속마음이 간파당했지만 그렇게 난처한 편은 아니었다.처음 만난 사이이니, 경계를 하는 것도 아주 정상적이었다.‘두 분은 겪으신 일이 나보다 훨씬 많으니 내 마음을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거야.’아니나 다를까, 봉수진은 정은의 손을 두드렸다.“아가씨, 특히 너처럼 예쁜 아가씨는 언제나 경계심을 가져야 해. 미리 위험을 방지해야 자신을 더 잘 보호할 수 있어.”“네.”“제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L시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J시에 왔어요. 그러니 두 분은 아마 저를 보신 적이 없을 거예요.”“하긴.” 봉수진은 웃었다.그러나 왠지 모르게 정은은 봉수진의 미소에서 낙담과 실망을 느낄 수 있었다.이춘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예전에는 보지 못했지만,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인연이라 할 수 있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물을 사러 간 현빈이 돌아왔고, 두 노인에게 한 병씩 건네주었다. 그리고 남은 물을 담은 봉지를 정은에게 건네주었다.“몇 병 더 샀는데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드려. 오늘 아주머니 사인회이니 아저씨도 같이 오셨겠지?”“네, 맞아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받아.” 현빈은 봉지를 직접 그녀의 손에 넣었다.“고마워요.”“방금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기분이 꽤 좋으신 것 같은데?”들어오기 전에 현빈은 멀리서 이춘재의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는 것을 보았고, 평소에 가장 까다로운 할머니조차도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이 장면을 본 순간, 현빈은 갑자기 멍해졌다.‘두 분께서 이렇게 웃으시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작년에 외국에 두 노인을 방문할 때, 봉수진은 마침 입원을 했다. 이춘재는 매일 탄식하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현빈은 이주 정도 머물렀고, 이춘재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아예 없었다.이씨 가문의 산업이 모두 국내에 있었기에, 현빈도 두 노인에게 돌아오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막내딸이 실종된 이후로 이씨 가문은 모든 것이 변했다.이것도 바로 이춘재 부부가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것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아직도 행방이 묘연해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모를 떠올리니, 현빈은 저도 모르게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만약 계속 찾을 수 없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아쉬움을 메우지 못할 것이다.“현빈아, 목이 좀 마르구나.” 노부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래요. 그럼 저 물 사러 갈게요...” 현빈은 정은을 바라보았다.“많이 바빠?”“괜찮아요.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죠?”“난 물 좀 사러 갈 테니까, 나 대신 두 분 좀 챙겨줘.”“내가 사러 갈까?” 어차피 정은도 내려와서 물을 사려 했다.현빈은 고개를 저었다.“우리 할머니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평소에 고정된 브랜드의 물만 마시거든. 이 근처에는 없고, 맞은편 거리에 있는 수입 마트에 가서 사야 해.”“그래요? 그럼 얼른 가서 사요. 난 여기서 두 분과 함께 얘기 나누고 있을 테니 안심해요.”“고마워.”현빈은 몸을 돌려 떠났다.할머니 봉수진은 정은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곁에 앉혔다.“아가씨, 우리 현빈이와 친구라고? 너희들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지?”“아...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도겸이 바로 그 ‘친구'였다.“그렇구나. 현빈이는 여성 친구가 거의 없는데, 네가 처음은 것 같구나!” 봉수진은 웃음을 지었다.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와, 심 대표는 정말 물 마시듯 여자친구를 바꾸었지.’“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곳은 너무 많이 변했어.”이춘재는 갑자기 감탄하기 시작했다.정은은 그의 말투에 묻은 그리움을 알아차리며, 최근 몇 년 J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춘재는 정은이 J시에 대해 술술 말하는 것을 듣고, 호기심에 물었다.“넌 이곳의 사람인가?”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저는 L시의 사람이에요. L시 아시죠? 남방의 구릉지대인데,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과 물도 있고...”정은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