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멋있다, 반했다, 우리 사귀자, 내 남자친구로 되어줘... 뭐 이런 거.”“정말 갈수록 심한 말이네요.” 정은은 웃었다.“내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과감하게 생각을 하는 거야.”“그럼 생각만 해요.”현빈은 그녀의 완곡한 거절을 못 알아들은 듯 웃으며 말했다.“먼저 생각한 다음 다시 시도하자.”“꼭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정은은 일부러 그에게 찬물을 끼얹었다.“괜찮아, 노력을 해야 아쉬움이 남지 않는 법. 내가 정말 해낼지도 모르잖아?”정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현빈은 그녀를 계단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올라가.”“고마워요.”“무슨 일 있으면 나에게 전화해. 무슨 일어도 네 앞에 나타날 테니까.”“네.”“이거 봐, 또 날 얼버무리고 있잖아. 넌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응, 일단 동의하자. 어차피 정말 돌발 상황이 닥쳐도 심현빈에게 전화하지 않을 테니까.”정은은 입가를 실룩거렸다.“나도 네가 독립적이고, 혼자 사는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러나 가끔은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나에게 연락을 했으면 좋겠어. 가장 먼저 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쨌든 내 생각을 좀 하면 안 될까?”정은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이제 얼른 올라가.”현빈은 정은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녀 방의 불이 켜진 것을 보고서야 몸을 돌려 떠났다....연희는 별장에서 이주 넘게 휴양을 했고, 뱃속의 태아도 점차 안정되었다.그동안 사람들이 시중들고 연희를 돌본 데다가, 도겸이 집에 돌아가지 않아 아무도 그녀를 욕하고 모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입덧기가 지나자, 연희는 안색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3kg로 더 쪘다.그러나 서영숙은 달랐다. 종으로 부려먹으면 그만이지만, 수시로 연희의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살이 빠지진 않았지만, 안색은 무척 초췌해졌다.탈모가 심할 뿐만 아니라 밤에 잠도 잘 못 잤다.연희는 갑자기 무엇
도겸의 비서였다.도겸은 아주 중요한 서류를 서재에 두었으니, 지금 바로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상업기밀과 관계된 일인데다 또 그렇게 긴급했으니 서영숙은 얼른 비서를 데리고 서재로 갔다.“이건가?”“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그럼 됐어, 빨리 도겸에게 보내줘.”연희는 꾸물거리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과 어깨를 스치다가, 문득 서재 문이 잘 닫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좌우를 두리번거리자, 2층 복도는 조용했다. 서영숙은 이미 비서를 아래층으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연희는 눈알을 굴림 그 문을 살짝 열었다...한식 스타일의 L형 책장은 위에서 아래로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안에는 서류가 가득 놓여 있었다.창가에는 다탁이 있었는데, 그 위에 복숭아나무로 만든 다기 한 세트가 놓여 있었다.왼쪽으로 가면 옅은 색의 나무 탁자가 있었고, 위에는 필통과 몇 권의 책이 있었다.왕미자가 정기적으로 들어와 청소하는 것 외에, 이 서재는 평소에 항상 잠긴 상태였다.연희는 더욱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다.‘하지만 난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왔잖아?’여기까지 생각하자, 연희는 득의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탁자 위에 두개의 서류 봉투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봉인이 되지 않았다.연희는 하나를 집어 들어 안에 있는 A4 용지를 꺼내 보았는데, 모두 모르는 전문 용어와 숫자들이었다.물론 그녀도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 그중 한 장을 꺼낸 다음 다른 한 서류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꾸몄다.이때 서영숙의 목소리가 발자국 소리와 함께 울렸다.“이모님, 서연희는요? 방금까지 여기에 있었잖아요? 또 어디 갔어요?”연희는 당황해하며 얼른 속도를 높였고, 서영숙이 찾아오기 전에 서재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왔다.그리고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는 척했다.서영숙은 눈살을 찌푸렸다.“너 방금 햇볕을 쬐러 간다고 하지 않았니? 어떻게 위층에 있는 거야?”연희는 담담하게 웃었다.“밖이 너무 더워서
서영숙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입 닥쳐, 지금 내 아들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끼어드는 거야!”그녀는 도겸을 바라보며 설명했다.“어제 난 확실히 네 서재에 들어간 적이 있어. 비서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하지만 난 정말 서랍밖에 열지 않았어. 네가 원하는 그 서류를 가져다준 다음, 다른 물건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그럼 이모님이 청소하다가 실수로 건드린 건 아닐까?”왕미자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도련님께서는 청소할 때 서재에 있는 물건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저는 이 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매번 아주 조심스럽게 청소를 했습니다.”“이모님은 아닐 거예요. 서재는 일주일에 한 번만 청소하니까요. 어제는 청소할 시간이 아니었어요.”도겸이 말했다.연희는 보신탕을 천천히 떠서 입에 넣었다.“저도 서재의 열쇠가 없으니 전혀 들어갈 수가 없죠. 그러니 저일 리가 더더욱 없고요. 이렇게 보면 아주머니일 수밖에 없네요.”서영숙은 연희가 비아냥거리는 것을 듣고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지금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은 내 아들의 서류이니, 내가 왜 함부로 건드리겠어? 난 바보도 아닌데, 이렇게 하면 나에게 무슨 좋은 점이 있냐고?”연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그걸 누가 알겠어요? 어차피 제가 한 건 아니에요. 게다가 며칠 전에 누군가 일부러 짜증을 냈잖아요?”사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작은 일이었다. 서영숙은 항상 말을 마음대로 내뱉는 사람이었다. 평소에 그런 적도 많았지만, 이 시점에서 연희가 이렇게 말하니,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도겸은 안을 살펴보았다. 서류는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마치 누군가 고의로 장난을 친 것처럼, 두 부의 서류에서 각각 한 페이지를 바꾸었다.서영숙이라고 해도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필경 그동안 도겸은 별장에 돌아가지 않았고, 서영숙의 전화도 받지 않았으니, 그녀가 마음속의 불만을 발산하는 것도 아주 정상적이었다.“됐어요,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맙소사! 드디어 이 미친 여자에게서 벗어나는 건가? 흑흑... 하나님이시여!’사람들은 처음으로 서영숙이 최고라고 느꼈다.얼마 지나지 않아, 큰 별장에는 연희 혼자만 남았다.그녀는 텅 빈 거실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깊은 밤, 강씨 가문 본가에서.서정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서영숙이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안마사가 그녀의 어깨와 목을 마사지하고 있었다.“엄마? 돌아왔어요?”“응.”“그 서연희를 모시러... 아니다! 그 여자를 챙겨주러 가지 않았어요?”‘두 주일이나 넘었는데, 왜 미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돌아온 거지? 이상해!’서영숙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여자 언급하지 마,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나니까!”“무슨 일인데요?” 서정은 그녀의 곁에 앉았다.“얼른 말씀해 보세요!”서영숙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별장에서 받은 괴롭힘을 하나하나 세어 서정에게 들려주었다.후에 안마사도 마사지를 하지 않고, 일어서서 팔을 안으며 연희를 마구 욕하기 시작했다.“그 여자보다 더 천한 것을 본 적이 없다니깐! 진작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소정은과 사귀게 내버려두었을걸!”적어도 정은은 연희보다 인내심이 있고, 소질이 있으며 단정하고 예의가 있었다.말하지 않으면 몰라도, 이렇게 비교하니 서영숙은 정말 후회막급이었다.서정은 자신의 엄마가 이토록 화가 난 것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되려 열받았다.‘지난번에 뺨을 때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나 봐. 몇 대 더 때렸어야 했는데!’“그리고 네 오빠도 그래.” 도겸을 언급하자, 서영숙은 더욱 억울했다.“뜻밖에도 그 계집애의 말을 듣고, 내가 서재의 서류를 건드렸다고 믿는 거야. 심지어 내가 발뺌을 하고 있다고 말했어! 차라리 그 천한 것을 믿을지언정 날 믿지 않다니! 난 너희들 친엄마잖아!”“오빠도 너무해요! 내가 바로 전화할게요...”말을 마치자마자 서정은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서영숙도 막지
도겸은 보드카 한 병을 주문한 다음, 한 잔, 두 잔 계속 마셨다...선우는 그가 술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렸다.“형, 이 술은 너무 독하니까 좀 적게 마셔!”‘그러다 또 병원에 들어가지 말고...’도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계속 술잔을 들고 있으며 내려놓지 않았다.“너의 핸드폰은? 이리 줘.”“내 핸드폰은 또 왜요?” 선우는 의혹을 느끼며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도겸은 바로 빼앗아오더니 즉시 정은의 번호를 눌렀다.곧 맞은편에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사막에서 떠돌아다니다 마침내 수원을 찾은 사람인 것처럼 절박하게 입을 열었다.“정은아, 보고 싶어...”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아... 앞으로 정은 누나는 내 전화조차 받지 않겠지?’“정은아, 돌아와, 응? 내가 잘못했어... 전에 분명히 함께 백년해로하기로 약속했잖아. 이제 겨우 몇 년이 지났다고 날 버리려는 거야? 지나간 일은 다 지나가게 내버려두지. 네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든, 일하고 싶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너와 함께 할게. 난 무조건 널 응원할 거야... 그리고 우리 작년에 약속했잖아, 같이 터키에 가서 일몰을 보고 별을 세기로. 다 잊은 거야?”도겸은 잠긴 목소리로 한꺼번에 말을 다 했고, 정말 너무나도 비천했다.그러나 맞은편은 시종 침묵하며 대답하지 않았다.도겸은 계속해서 말했다.“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나 이제야 네가 날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알게 되었단 말이야... 정은아, 사랑해, 나 정말 너 없으면 안 돼...”정은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말 다 했어?]그러나 도겸의 예상과 달리, 정은은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아빠가 된다는 소식 들었어, 축하해.]뚜- 뚜- 뚜-정은은 말 한 마디로 도겸을 철저히 지옥으로 몰아넣었다.도겸의 두 눈은 초점을 잃었고, 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도 힘없이 드리워졌다.‘날 축하한대. 하하... 날 축하한다니?! 정은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어! 나
감시 화면에 나타난 시간은 오후 6시였고, 넓은 거실에서 정은은 혼자 소파에 앉아있었다.도겸은 단번에 그녀가 자신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핸드폰도 놀지 않으며 그냥 이렇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시들고 있는 장미와 같았다.원래 도겸이 좋아하던 ‘집의 느낌’은 한 여자가 하루하루 타협하고, 싫증조차 내지 않은 기다림, 심지어 자아를 완전히 포기란 희생으로 바꿔온 것이었다. 그가 언제 돌아오든 거실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다.“어렸을 때 아버지는 일하느라 바쁘셨고, 어머니는 놀러다니느라 바쁘셨어. 그럼 난 혼자 집에 남아 이모님과 함께 했지. 그래서 비록 부모님이 모두 계시고, 집안 형편도 아주 좋지만, 난 지금까지 포근하고 따뜻한 집의 느낌을 느끼지 못했어...”“정은아, 난 가끔 정말 네가 부러워... 간단하고 깨끗한 가족 관계, 한 쌍의 금슬이 좋은 부모님, 그리고 어릴 때부터 사랑으로 널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널 위한 모든 일이라면 직접 나서셨잖아...”“오늘까지도 내 부모님은 돈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셔. 돈을 쓰면 좋은 아들을 키울 수 있고. 만약 이 아이가 좋지 않다면, 틀림없이 돈을 많이 쓰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실 거야.”“정은아, 내가 널 만난 게 너무나도 큰 행운인 것 같아. 네가 나로 하여금 이런 따뜻함을 느끼게 했거든...”“너와 함께 한 후로, 내 머릿속에는 항상 이런 화면이 나타났어. 퇴근하자마자 네가 주방에서 바쁘게 돌아치는 모습, 아이가 거실에서 놀고 있는 모습. 우리 가족은 세 식구 심지어 네 식구 다섯 식구는 함께 모여 저녁을 먹고 있었어...”“식사를 한 후, 아이들은 정원에서 놀고, 넌 그네에 앉아 있었어. 그럼 난 네 뒤에 서서 가볍게 널 밀었고. 그렇게 우리는 아이들이 서로를 쫓아다니며 웃고 떠드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정은아, 날 믿어. 우리는 계속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늙은이가 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도겸은 최근 한 달의 감시 화면을 기록한 파일을 클릭했다.연희는 이미 잠들었다. 아래층에서 어렴풋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바로 정신을 차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떠날 때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이제 겨우 몇 시간 지났다고. 결국 이렇게 다시 돌아왔잖아? 흥, 재벌 집안 사모님도 별거 아니네! 아니면 정말 나 혼자 여기에 내버려두든가. 어차피 내 뱃속의 아이로 천 억을 바꿀 수 있으니까. 누가 누굴 무서워한다는 거야?’서영숙이 돌아오면 왕미자와 임강주 그들도 함께 돌아올 것이다. ‘마침 배도 고프니 이모님에게 보신탕 좀 끓여 달라고 해야지.’연희는 거실과 주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의혹을 느끼며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이때 연희는 현관에 남자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도겸 씨가 돌아온 거야?’생각을 하다가 연희는 얼른 침실로 돌아가서 섹시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서재로 걸어갔다.똑똑-“도겸 오빠, 돌아왔어요?”그녀는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서재의 불이 켜져 있었으니 도겸 말고 또 누가 안에 있겠는가?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연희는 흥분한 심정을 꾹 누르며 웃으며 문을 밀었다.“도겸 오빠...”도겸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빨간색 레이스로 된 잠옷 치마를 입고 있었다. 가슴이 푹 파인 스타일에 가느다란 끈 두 개가 새하얀 어깨에 걸려 있었다.경망스럽고 저속한 모습이었다.남자가 자신을 쫓아내지 않자, 연희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언제 돌아오셨어요? 또 야근하신 거예요? 이주 동안 계속 힘들게 일하셨으니 많이 피곤하시겠죠? 자, 제가 안마해드릴게요...”연희는 남자가 그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은 일에 적당한 핑계를 찾았다. 그리고 마치 전에 다투지 않았던 것처럼 활짝 웃었다.연희가 비위를 맞추며 가식적으로 웃는 것을 보면서 도겸은 화
화면 속의 연희는 몰래 서재에 잠입한 후, 두 서류를 바꾸고 있었다.이 외에 또 평소 거들먹거리며 서영숙을 지시하고 모욕하는 장면도 있었다.갑작스러운 증거 앞에서 연희는 멍해졌다.이 영상 때문인지 아니면 남자의 매정한 따귀 때문인지, 연희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네가 단지 허영심이 있고 천박한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버릇처럼 거짓말을 하고, 각박하고 신랄하며 또 시비를 일으키고 나와 우리 어머니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 네가 자신의 주제를 똑똑히 파악했으면 해서 널 때린 거야. 있어서는 안 될 망상을 하지 말고. 그리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해. 그렇지 않으면...”도겸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투가 음침했다.“넌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연희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극심한 공포에 따가운 양쪽 볼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도, 도겸 오빠, 저 정말 잘못했어요...”도겸은 말을 하지 않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제가 내일 본가에 찾아가서 아주머니에게 사과할게요. 절 때리든 욕하든 절대로 말대꾸를 하지 않을 거예요! 아주머니께서 화를 푸실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남자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연희는 당황해지더니 콧물과 눈물을 줄줄 흘렸다.“저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임신해서 호르몬에 이상이 생겼나 봐요. 그래서 아주머니를 그렇게 대한 거예요...”도겸은 차가운 눈빛으로 연희가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질질 짜며 불쌍하게 울고 있었다.“말 다 했어?”연희는 멈칫했다.“다 울었냐고?”“오빠...”“다 울었으면 얼른 가서 네 짐이나 싸.”“뭐, 뭐라고요?”도겸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그날 너에게 꺼지라고 한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한 거야? 이주 넘게 이 집에 남겨뒀으니 나도 널 봐줄 만큼 봐줬어.”“아니요! 그건 안 돼요! 저한테 이러면 안 되죠!” 연희는 울며 고개를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